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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5일 금요일

The Somme - Robin Prior and Trevor Wilson

지난번에는 솜(Somme) 전투를 다룬 책 중에서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를 소개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할 책도 역시 솜 전투에 대한 책인데 의 Gliddon의 책 보다는 평범한 형식입니다.

지난번에도 적었듯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재를 글의 주제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 입니다. 아주 잘 쓸 자신이 없다면 좀 특이한 방식으로 접근하던가 하는 쪽이 덜 위험하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이야기할 프라이어(Robin Prior)와 윌슨(Trevor Wilson)의 The Somme은 아주 과감한 저작입니다. 저자들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솜 전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기존의 연구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국군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료적 토대가 탄탄하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매우 쏠쏠한 좋은 책 입니다. 제가 읽은 솜 전투에 대한 저작 중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라는 점도 언급해야 겠군요.

저자들은 매우 용감한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된 분석대상으로 삼는 것은 솜 전투의 입안과정과 솜 전투 첫날을 포함한 초기의 전투입니다. 전투 첫날에 대해서는 미들브룩(Martin Middlebrook)의 The First Day on the Somme 같은 유명한 저작이 있다 보니 더 쓸만한 것이 있나 싶은데 저자들은 신통하게도 기존 연구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탄탄한 자료에 기반한 글의 강점은 이런 것이다 싶더군요.

솜 전투에 대한 많은 저작들이 독일군의 기관총에 학살당하는 밀집대형의 영국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저자들은 그런 이미지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쟁 중과 전쟁 직후에 출간된 부정확한 저작들의 서술이 과장되게 수용된 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이날 공격에 나선 영국군 보병부대들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공격대형을 훈련 받았습니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솜 전투 초기 영국군의 포병 운용의 실패입니다. 먼저 공격 개시 전에 수일간 계속된 공격준비사격이 매우 형편없이 진행되었고 또 공격 당일의 공격준비사격과 이후 보병의 공격과정에서 진행된 탄막사격이 거의 효과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즉, 영국군의 공격준비사격은 강력한 독일군의 제1방어선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에는 부족했고 또 독일 포병에 대한 제압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또 7월 1일 공격 당일의 포병 운용도 매우 형편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영국 8군단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8군단의 공격을 지원하는 포병은 독일군의 제1방어선이 제압되지 않았는데도 후방의 독일군 진지로 포격을 돌리는 바람에 제1방어선의 독일군은 방어준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격준비사격이 독일포병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포병은 영국군 보병부대가 돌격해 오자 바로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 영국군에 기관총 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영국군의 공격준비사격은 독일군의 제1선 방어진지와 철조망, 후방의 독일 포병 어느 하나에도 충분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그 결과는 공격 첫째 날의 가공할 손실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공격 첫날의 형편없는 포병운용과는 반대의 사례로 제시되는 것은 7월 14일의 공격입니다. 저자들은 이날 영국군의 포격이 독일군의 제2방어선과 후방의 독일 포병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제2방어선이 제1방어선에 비하면 방어력이 취약한 면도 있었지만 포병이 공격에 앞서 2중으로 구축된 철조망선을 뚫은 것은 이날의 공격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 입니다. 저자들은 14일의 전투와 같이 영국군 보병은 충분하고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받았을 때 매우 양호한 전과를 거뒀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1915~16년에 편성된 전투경험이 없는 사단들 조차도 훈련 상태에 비하면 양호한 전투능력을 보여줬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존의 저작들과는 반대되는 평가여서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각 장의 분량이 짧아서 가독성이 매우 좋더군요.

2008년 8월 20일 수요일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 - Gerald Gliddon

글을 쓰는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고르는 것은 꽤 위험한 행위 입니다. 유명한 만큼 기존에 명성을 날리는 수많은 저작들이 있고 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경쟁자들이 즐비하니 만큼 상당한 수준이 아닌 이상 쉽게 주목 받지 못하고 묻힐 가능성이 많지요. 이런 점은 군사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2차대전사에 있어서 노르망디 전역이나 벌지 전투를 다루는 서적은 무수히 많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독창적인 책은 상대적으로 적고 종이나 낭비하는 지루하고 개성 없는 저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차 대전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경우를 들라면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솜(Somme) 전투일 것 입니다. 이 전투는 영국군 수뇌부의 어리석은 지휘로 인한 가공할 규모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전차가 최초로 실전 투입된 전투로도, 그리고 이후 수개월간 이어진 처절한 격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 대해서는 영어권과 독일어권에서 많은 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요즘도 꾸준히 관련 서적들이 새로 출간되거나 재발간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평이한 서술방식으로는 주목을 받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7년에 처음 발간 된 이 책,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는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솜 전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2000년 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연대기순의 평이한 기술을 피하고 대신 전투가 벌어진 각 지역을 단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저자인 Gerald Gliddon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좋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첫 발간 당시의 서평은 많이 읽어 보지 못 했지만 저자가 취하고 있는 참신한 접근 방식은 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저작은 솜 전투에 대해 개괄 이상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꽤 유용한 참고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의 서술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 위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amel 항목을 보면 Hamel이라는 지역에 대해 지리적인 개괄을 한 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연대기 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공간 중심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양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점도 좋습니다. 또 책의 뒷 부분에는 솜 전투의 경과를 시기별로 요약해 놓았는데 이것도 꽤 유용합니다. 매일의 기상상태와 온도가 적혀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부록으로는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는데 평범하지만 정리가 잘 돼서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반대로 단점이기도 합니다. 공간 위주의 서술을 하다 보니 내용을 지명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솜 전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읽는 다면 내용 정리가 제대로 되기 어렵지요. 즉 솜 전투에 대한 개설서로는 부적합 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서술이 철저히 영국군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저자는 각각의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놓았지만 독일 측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많은 책이라 1차대전 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2006년 5월 29일 월요일

솜(Somme) 전투와 영국 육군의 불운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

인간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다.
전쟁질도 인간이 하는 짓이라 그런지 패전, 또는 실패한 작전에서 더 많은 교훈이 얻어지는 모양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군에겐 솜(Somme) 전투가 거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꽤 유명한 군사사가인 하우스(Jonathan M. House)는 1차대전 직전의 영국군에 대해서 “신무기로 무장했지만 무기를 다룰 교리는 가지지 못한”군대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1차 대전 중반기 까지 영국군 장군들의 “무시무시”한 지휘를 보면 하우스의 지적이 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례로 1914년 8월 26일에 벌어진 르 샤토(Le Cateau)전투에서 영국군 포병은 보병을 근접 지원하기 위해서 전선 가까이에 포진했다. 유감스럽게도 영국 포병은 독일군이 관측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후방에 있던 독일군의 중포는 영국 포병을 일방적으로 학살해 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영국 포병들은 야포 42문중 25문을 내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영국군 대규모 육군을 유지해 본 경험이 전무했으므로(심지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1차대전과 같은 전쟁은 국가적으로 생소한 경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피스(Paddy Griffith)는 영국육군이 1915년 까지도 제대로 된 공격교리가 없어 프랑스군의 교리를 도입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차 대전 발발 이전 영국육군에서는 “현대전에서 화력의 증대로 밀집대형의 제파공격은 비효율적이다”라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그러면 어떤 공격전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1915년부터 영국 원정군은 집단군 규모로 증강됐고 항공기, 유무선 통신, 기관총 등 다양한 신기술을 써먹을 기회도 늘어나 자체적인 전술교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영국육군의 공격전술은 적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공격에서 보병중대의 소총화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느린 변화는 솜 전투의 끔찍한 피해로 이어졌다.
솜 전투의 참상은 여러 서적과 매체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공격 첫날 29보병사단의 랭카셔 수발총 연대가 공격 선봉에 내세운 2개 중대는 공격개시선에서 불과 50미터도 전진하지 못 한 채 거의 전멸 당하는 등 수많은 공격부대가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했다.
공격부대의 중앙에 배치된 3군단 역시 소름끼치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전 전통을 자랑하는 정규연대들을 다수 가진 8사단의 경우 연대 당 손실이 최저 50%에서 최고 93%에 달했다. 제 2 미들섹스 연대는 공격 개시 수시간만에 연대병력의 93%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역시 솜 전투에서 유명한 일화라면 독일군의 기관총 1정이 영국군 1개 대대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 일텐데 당시 삼각대에 얹은 중기관총 1정은 양호한 시계만 확보되면 정면 2500야드(대충 2.3km 정도?) 정도의 범위를 방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독일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말-1915년 초에 기관총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술을 확립하고 있었고 영국육군 역시 1915년의 Loos전투에서 독일군의 기관총 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솜 전투이전까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전술이 나타나지 못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육군은 솜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 전사자 2만을 포함해 5만7천의 사상자를 냈고 11월에 백해무익한 대공세가 끝날 무렵에는 43만2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솜 전투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는 영국군에 큰 충격을 줬고 이후의 공격전술을 크게 변화 시켰다.

먼저 포병과 보병의 유기적인 협동이 강조됐다.
2차대전 당시의 영국군도 마찬가지 혹평을 들었지만 1916년 이전 영국군은 병종간 협동작전이 매우 서툴렀으며 이것은 솜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포병은 유동적으로 변하는 전선의 상황에 따라 보병에 화력지원을 제공하지 못 했고 독일군의 거점을 제압하는데도 비효율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또한 소규모 보병전술에서는 소총분대의 지원을 받는 수류탄 돌격조가 선봉에 서고 총류탄 발사기의 지원을 받는 루이스 경기관총이 소대화력의 중심이 되는 공격 전술로 변화했다.

※여단급 3인치 박격포는 공격부대가 운용하기엔 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 좀 센 펀치가 필요할 땐 총류탄 발사기가 유용하게 사용됐다고 한다.

또 화력 운용의 융통성과 함께 독일군의 거점을 마주치면 우회공격으로 제압하는 등 뼈저린 손실로 배운 교훈을 잘 살리게 됐다고 한다.

쓰라린 교훈을 얻기 전에 좋은 방법을 찿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 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이 잘 풀리는 사례가 별로 없는 듯 싶다.
영국육군 역시 솜 전투에서 아주 쓰디쓴 교훈을 얻었고 그 결과 1917년 이후에는 독일군에 대해 전술적으로 대응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게 됐다.
수십만명의 희생을 대가로 교훈을 얻은 셈이다.


참고로, 솜 전투당시 영국육군의 사단별 손실은 다음과 같았다.

(자료 : Robin Rrior and Trevor Wilson, The Somme, Yale University Press, 300-301p)

30보병사단 : 17374명
18보병사단 : 13323명
21보병사단 : 13044명
5보병사단 : 12667명
17보병사단 : 12613명
56보병사단 : 12333명
34보병사단 : 11239명
25보병사단 : 11239명
12보병사단 : 11089명
33보병사단 : 10787명
9보병사단 : 10538명
4보병사단 : 10496명
1보병사단 : 10451명
3보병사단 : 10377명
7보병사단 : 10237명
19보병사단 : 9830명
뉴질랜드사단 : 9408명
8보병사단 : 8969명
11보병사단 : 8954명
49보병사단 : 8461명
오스트레일리아 2사단 : 8113명
50보병사단 : 7902명
14보병사단 : 7643명
55보병사단 : 7624명
47보병사단 : 7560명
오스트레일리아 4사단 : 7248명
39보병사단 : 7215명
근위사단 : 7204명
6보병사단 : 6966명
캐나다 2사단 : 6876명
20보병사단 : 6854명
캐나다 1사단 : 6555명
23보병사단 : 6282명
51보병사단 : 6202명
24보병사단 : 6119명
48보병사단 : 6115명
41보병사단 : 5928명
31보병사단 : 5902명
36보병사단 : 5482명
32보병사단 : 5272명
15보병사단 : 4877명
35보병사단 : 4663명
16보병사단 : 4330명
캐나다 4사단 : 4311명
오스트레일리아 1사단 : 7883명
2보병사단 : 7856명
29보병사단 : 7703명
캐나다 1사단 : 7469명
63보병사단 : 4075명
38보병사단 : 3876명
46보병사단 : 2648명
37보병사단 : 2000명

솜 전투당시 영국군 보병사단들의 규모는 10,000-12,000명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