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오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오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8년 7월 18일 수요일

[번역글] 쿠르스크의 전환점: 검열의 장막 뒤에는 어떤 진실이 감춰져 있었을까?

간만에 업데이트를 합니다….

이 글은 발레리 자물린의 논문집 The Battle of Kursk: Controversial and Neglected Aspects에 실린 논문 The Kursk turning point- What remained behind the curtain?을 번역한 것 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 보로네지 전선군이 겪은 지휘통제의 어려움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유능한 중견 간부진의 부족, 훈련 부족 등 소련군이 작전-전술적으로 겪은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련군 각급 사령부의 직위는 적절한 한국어 용례가 없어서 이 글에서 사용한 용례에 동의하지 않은 분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지적을 해 주시면 검토해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쿠르스크의 전환점: 검열의 장막 뒤에는 어떤 진실이 감춰져 있었을까?

발레리 자물린
영어번역: 스튜어트 브리튼

모든 정보기관은 다른 나라 군대의 실제 상황을 밝혀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수백명의 정보요원과 수십여 곳의 분석기관, 부서와 조직이 정밀 시계처럼 엮여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첩보를 비교분석한다. 그 목적은 적이 실제로 처해있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정찰부대와 정보장교들은 완벽한 첩보를 획득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러한 첩보에는 군대의 병력과 공장에서 생산한 무기 및 장비의 숫자 뿐만 아니라 고위 참모단과 전술단위 장교단의 훈련 수준, 보충병의 전투력 수준이 포함된다. 또한 투항병 및 탈영병의 숫자도 꼼꼼하게 파악할 대상이었다. 적군의 민족 구성, 각급 부대간에 첩보와 명령이 전달되는 체계와 속도도 연구 대상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적군이 전쟁에 투입할 물질적ㆍ기술적 능력을 밝혀내고, 부대의 사기ㆍ훈련 수준ㆍ민족구성의 차이로 인한 불화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민족구성의 차이를 이용해 적군의 전투력을 떨어트리고 부대의 단결력을 저해하는 등의 공작을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진영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군사관련 정보를 적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완벽하게 감춰야 한다. 이런 행동은 매우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든 군대는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군대의 부정적인 사실이 사회에 알려진다면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 지휘관들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며, 더 나아가 국민들이 정부와 군 수뇌부가 국가를 수호할 능력이 부족할 거라고 의심하게 될 수 있다. 대조국전쟁 당시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 소련과 독일 양측은 상대방 군대의 패배, 약점, 일선 부대가 자행하거나 사전에 계획한 전쟁 범죄를 선전했다. 소련은 “잔인한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독일은 “동방에서 몰려오는 열등인종들”이라는 이미지를 생산했다.  선동 및 정보조작 전문가들은 이런 선동 정보를 생산해 수백만 국민의 마음 속에 치밀하게 심어넣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인식과 결합해 확대재생산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붉은군대의 이미지는 그 실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된게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러시아 동포들이 대조국전쟁에 대해 실제와 다른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도 거의 70여년이나 되었다. 반면 양측의 군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과 그것이 일어나게 된 과정은 철저하게 은폐되어왔다. 그래서 오늘날도 전쟁, 또는 개별 전투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검열 뿐 아니라 지휘계통을 통해 수백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문서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실제 전쟁”에 관한 문헌을 찾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학자들은 군사문서보관소에 쌓여있는 수많은 문서 더미를 파헤쳐 흥미로운 사건, 혹은 그 실마리를 찾는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전쟁 당시 부대에서 벌어졌던 거의 모든 일들을 파악하고 부정적인 문제를 바로잡거나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도 존재했다. 야전군과 전선군 사령관들이 여기에 포함되는 극소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물중에는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이 있다. 바투틴의 책상에는 매일 예하 부대, 때로는 개별 장교와 사병의 상태와 행동에 관한 전문, 브리핑 자료, 보고서가 쌓였다. 대부분은 작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바투틴에게 올라가는 자료들은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안으로, 결정이 지체되면 전선군의 전투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매일 제출되는 문서 외에도 전선군 사령부와 야전군 사령부의 각 부서가 5일이나 10일 단위로 생산하는 요약보고서와 통계자료 등이 있었다. 이런 자료들은 일정기간의 전투 작전이 끝난 뒤 생산된 전투보고서들 처럼 정보량이 풍부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선 부대에서 발생한 문제들, 특히 부정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전선군 지휘관이 수많은 정보 중에서 시급한 문제를 즉시 파악해 대응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지휘관 개인의 역량이 중요했다.

이러한 사료들은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종류의 문헌에 늘상 존재하는 주관적인 평가와 결론을 배제하고 읽는다면, 해당 사료들에 숙달되는 만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전선의 부대들, 특히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부대들이 실제로 처해있었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해 독일 남부집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거나 더 심각해진 문제들,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던 전투 초기 5일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가 전투 개시 이래 예하 부대들의 전투 경험을 정리한 보고를 받기 시작한 것은 7 9일이었다. 바투틴은 예하 부대들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3개월에 걸친 소강기 동안 전투에 필요한 수준으로 전투준비 태세를 향상시키려고 부대를 재편하고 훈련하는데 쏟아부은 막대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참모부는 모든 임무를 파악할때 전투를 기준으로 삼는다. 각 전선군과 예하 야전군 지휘부의 기획 및 실제 업무 추진 과정의 문제점과 실패가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가장 먼저 드러난 사실은 지휘통제상의 문제였다. 붉은군대는 지난 2년간의 전쟁에서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정치 지도부의 압박이 없을때에는 정확하고 신중한 판단을 내렸고 때로는 매우 탁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모스크바 반격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독일 제6군을 포위하기 위해 주공을 지향할 지점을 선정한 것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1943년 봄 방어태세로 전환해 쿠르스크 돌출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한 결정도 통찰력 있는 탁월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보로네지 전선군사령관 바투틴이 남긴 녹취록을 읽어보면 그가 작전의 추이와 향후 수일간 독일군의 움직임을 매우 정확하게 분석했음을 알 수 있다. 방어작전 초기 바투틴이 내린 결정과 사령부 참모진이 중요한 문제를 다룬 양상을 살펴보면, 신중하고 통찰력을 갖추었으며 전선의 상황에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바투틴은 전략단위의 부대 운용에 통달했으며, 이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예하 지휘관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부하들을 올바르게 대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야전군 및 군단급 지휘관 대다수는 그들의 재능과 전투 경험을 활용해 부여받은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지만 작전-전술 단위 지휘관의 상당수, 특히 전술단위 지휘관들의 자질은 매우 형편없었다. 이것은 비단 보로네지 전선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붉은군대 전반에 걸친 문제였다. 붉은군대의 전술단위 지휘관들은 어떻게 해야 작전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해 그에 맞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작전 상황을 부하들에게 숙지시키고 참모진의 업무를 조율하고 인접부대와 협동하는 방식도 몰랐다. 붉은군대의 전술 지휘관들은 작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전술단위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전술 지휘관들에게 있었다.

군단급의 참모진들 조차 전투 중 제병협동을 조율할 능력이 없었다. 좀 더 기술적으로 말하면, 군단장급 지휘관들 조차 야전군에서 배속받은 부대들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작전 지휘가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독일군이라고 해서 이런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군은 장교를 훨씬 엄격히 교육시켰으며 장교교육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또한 사병의 훈련 수준도 높았다. 그래서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매우 우수한 전투능력을 발휘했다. 독일군의 사단 및 군단급 제대는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붉은군대의 부대 훈련은 구체적이기 보다는 도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잦았다. 그리고 실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전술제대들은 임무 수행에 있어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지 않았으며 ‘사소한’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무시한 사소한 문제들이 나중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잦았다. 붉은군대 지휘관들은 전투 중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지휘관들은 명령을 내린 뒤에는 다시 회의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처음에 내린 결심과 작전 수립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제안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붉은군대 지휘관들은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상급제대 지휘관들이 하위제대의 작전 계획을 검토하는 일은 드물었다. 설마 진짜로 이랬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규모 작전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야전군 지휘관들 조차 인접 부대의 작전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문서들을 보면 단지 인접부대의 존재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내용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배속받은 부대를 운용하는 일도 매우 어려웠다. 사단 혹은 군단 지휘관들이 배속받은 부대와 협동 작전을 제대로 수행한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소총병사단과 연대급 지휘관들은 전차 및 포병과 합동작전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해야 할 지휘관들이 전차 및 포병 부대의 특성을 모르는 경우가 잦았다. 배속받은 부대의 전술적 운용에 대한 이해가 없어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결과 막대한 손실을 내고 임무에 실패하곤 했다. 1943 7 8일 제27근위전차여단장 네브진스키Н. В.П Невжинский 대령이 작성한 보고서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보고서는 보로네지 전선군 소속 제7근위군의 보병 지휘관들의 지휘 방식을 잘 보여준다.

1.1943 7 6일 여명 제27근위독립전차여단은 제24근위소총병군단장의 구두 명령에 따라 작전을 하고 있었다. 작전 지역은 폴랴나Поляна 국영농장, 192.6지점, 192.8지점, 140.1지점, 르자베츠Ржавец 남동쪽의 철도선이었다. 여단은 우익으로는 제72근위소총병사단에 1개 전차대대를, 좌익으로는 제213근위소총병사단에 1개 전차대대를 배속시켜 지원을 했다. 여단은 정면 12km의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여단을 지휘하여 다른 병과와 협동작전을 수행하고 후송 및 보급 체제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부대는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2.여단이 축차투입된 결과 본 여단은 충격 부대로Р서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했으며 기동력을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운용되지 못했다. 
3.여단은 전투 명령을 구두로 전달받았을 뿐 문서로 된 명령을 받지 못했다. 보병부대의 지휘관들이 포병이나 보병 지원 없이 특정 목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잦았다. 보병 지휘관들은 “만약 목표 점령에 실패한다면 귀관을 총살하겠다”고 협박했다. 1전차대대장에 따르면 제72근위소총병사단장이 제1대대장에게 이렇게 협박 했다고 한다.  여단은 이런 식으로 운용되어 많은 장비와 병력을 잃었다.1)

연대나 사단급은 물론 심지어 군단급 사령부 조차 명령만 내린 뒤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경우가 흔했다. 상급제대 지휘관들은 예하 부대의 문제를 살펴보려하지 않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문제가 커지거나 명령이 신속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부하 지휘관들을 나태한 겁쟁이에 우유부단한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하거나 총살해 버리겠다고 윽박질렀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경우 쿠르스크 전투를 앞두고 불과 몇주 전에 임명된 연대장과 사단장이 많다보니 상황이 더 복잡했다. 심지어 독일군의 공격 개시 며칠 전에 부임한 지휘관도 있었다. 군단장급 중에는 자신의 군단에 소속된 예하부대를 과거에 지휘해 전투를 경험한 경우가 간혹 있어 사정이 조금 나았다. 하지만 소총병군단들은 대부분 1943 5월에서 6월 사이에 편성되어 완편된 효율적인 전투부대로 육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특히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공축선상에 배치된 제6근위군의 경우 사단장 교체가 지나치게 잦았다. 1943 7 5일 제6근위군은 6개 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이 중 3개 사단의 사단장은 부임한지 2개월 남짓 되었다. 한 사단은 전투를 앞두고 겨우 일주일 전에 사단장이 부임한 상태였다.2)  게다가 사단장이 교체된 3개 사단은 야전군의 제1제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3개사단은 미리 구축된 방어진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지휘통제에 관한 문제들은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 2일차인 7 6일이 되자 제6근위군 방어구역에서는 군단장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예하부대 지휘관들의 훈련수준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지만 사단들을 통합해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군단사령부들은 야전군과 사단간에 명령을 중계하는 역할 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그 조차도 그때 그때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상당수의 지휘관들은 적극성과 결단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중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 군단사령부 참모진들이 배속된 사단 지휘부와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제69군 소속의 제48소총병군단은 7 2일에야 배속된 사단들의 지휘권을 인수했으며 7 4일 부터 작전에 투입됐다. 작전에 투입되기 전 예하부대에 익숙해 질 수 있었던 시간이 고작 이틀이었다. 7근위군과 제40군은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된 직후에 군단사령부 편성 명령을 내렸다.

각 군단사령부 참모진의 자질은 별개의 문제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한 지식을 갖춘 장교도 역동적이고 압박이 심한 실전에서는 무능한 경우가 잦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전에 구축한 방어선에 부대를 배치한 상태에서도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할 수 없었다. 또한 상황의 전개에 맞춰 신속하게 대응하지도 못했고,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을때 이를 신속히 회복하지도 못했고, 상급부대 및 인접부대와의 락망을 확고하게 유지하거나 효과적으로 합동 작전을 전개하지도 못했다. 보로네지 전선군 소속 스메르시СМЕРШ 부서가 제출한 브리핑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3 7 8일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장 이바노프S. P. Ivanov 중장은 제5근위전차군단장과 제10전차군단장을 호출해 08시 정각에 공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군단장들이 지휘소로 돌아가는 동안 공격시간을 09시 정각으로 변경한다는 명령이 암호화된 무전으로 하달됐다. 5근위전차군단은 변경된 명령에 따라 공격을 개시해 10~15km 정도 진격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고 16시경 공격개시선까지 퇴각했다. 5근위전차군단이 패퇴해 퇴각했을 무렵 공격명령을 철회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2전차군단과 제10전차군단은 공격 취소 명령을 제시간에 받아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때문에 제5근위전차군단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채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3)

위에서 언급한 3개 전차군단 중 제10전차군단만 전선군사령부와 직접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10전차군단 사령부는 공격취소 명령을 받았지만 함께 공격에 나서기로 한 인접 군단에는 이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0전차군단 사령부는 제5근위전차군단 사령부가 통신망 구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1942년 말에서 1943년 상반기에는 붉은군대 내에 군단급 제대를 지휘할 경험과 역량을 갖춘 참모장교와 장군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특히 보로네지 전선군의 경우 지휘관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40군 참모장 바튜냐А. Г. Батюня  소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군단사령부는 국방인민위원회의 예비역 참모진을 근간으로 편성해서 장교 대부분이 실전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군단급 사령부를 실제로 지휘해 본 경험이 전무했고, 이론적으로 배운 것을 실전 상황에 적용하는게 매우 더뎠다. 이때문에 전투 초기 군단급의 지휘가 아주 형편없었고 야전군사령부가 군단사령부의 업무를 완전히 대행해야 했다.4)

여러가지 객관적인 문제가 있었고 전선군사령관인 바투틴이라고 해도 모든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방어작전을 수행하면서 군단급 사령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야전군사령부가 군단사령부의 업무 대부분을 담당했다. 이렇게 되자 야전군사령부의 업무가 복잡해졌다. 야전군사령부 참모장교들과 통신망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 결과 판단을 신속하게 내려 결심을 내리는게 어려워졌고, 참모진의 임무수행 수준도 떨어졌다. 너무 많은 임무가 떨어지다 보니 야전군사령부 참모진들은 이미 내린 명령과 지시가 올바로 이행되고 있는지 감독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주관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고급 지휘관 중 상당수는 의욕도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다. 6근위군 사령관 치스챠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중장은 예하의 두 군단장을 지속적으로 주시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전선군사령관 바투틴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로네지 전선군 군사위원회는 7 7일 제23근위소총병군단장 바흐로메에프Павел Прокопьевич Вахрамеев 소장을 경질했다. 23근위소총병군단은 오보얀 고속도로에서 프로호롭카로 이어지는 축선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적 전차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전선군군사위원회는 바흐로메에프가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군율을 어기고 전투 중 음주를 했다는 점도 경질된 이유였다.

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 나가츠킨И. П. Нагаткин 대령은 참모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군단 참모진 전체가 아무런 계획 없이 움직였다. 군단사령부는 방어선의 상황, 부대의 상태에 대해 명확하고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군단 참모장에게 구두 경고가 내려갔다. 그렇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943 8 25일 제6근위군 사령관이 서명한 야전군명령 0125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은 작전 기간 동안 지휘소에 있으면서 임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군단사령부의 각 부서가 올바르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감독하지도 않았고, 사령부 인원의 훈련도 방치했다. 일일업무와 전투 임무도 검토하지 않았으며 예하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업무 역량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임무에 관련된 지식을 쌓고자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대조국전쟁기의 실전 경험을 학습하지도 않았고, 틈만나면 음주를 하면서 가슴통증을 호소했다. 군단이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가츠킨 근위대령은 참모진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으며, 군단 예하 사단 사령부와 연락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예하 사단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했으며 전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제22근위소총병군단 사령부는 전투기간 중 군단 지휘부로서의 기능을 못했다.5)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뒤 나가츠킨 대령은 해임되어 전선군사령부 군사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독일군도 군사적인 영역에서 붉은군대 지휘부의 미숙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뒤 저명한 영국 역사가 리델 하트는 국방군 장성들과 많은 대담을 가졌다. 이중 다수는 동부전선에서 싸웠다. 독일 장성들은 전쟁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소련 지휘관들이 싸우는 법을 알게 되었고 교훈을 빨리 받아들이게 됐다고 평가했다. 리델하트가 면담한 독일 장성중 한명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소련군의 지휘능력은 모든 제대에 걸쳐 크게 향상됐다. 소련군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소련 장교단의 학습 능력과 그들이 자신들의 과업을 대하는 자세였다.6) 하지만 붉은군대 장교단의 지휘 능력에 관한 독일인들의 평가는 북부전선과 남부전선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부전선에는 북부전선 보다 우수한, 즉 훈련을 잘 받은 젊고 전문적인 장군이 더 많이 배치되어있었다. 소련 중부전선군, 남서전선군, 남부전선군이 배치된 남부전선은 전쟁 내내 중요한 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을 수도 있다. 반면 독일 장군들은 북부전선에 배치된 소련 지휘관들을 좀 다르게 평가했다. 필자는 기밀해제된 문서들에 비추어 볼때 독일 장군들의 평가가 어느 정도는 붉은군대 지휘관들 전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보로네지 전선군도 포함된다. 리델 하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평하자면, 소련군의 지휘체계에서 최상층부와 최하층부는 매우 튼실했다. 하지만 중간 부분의 지휘관들은 부실했다. 최상층부의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독자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었다. 최하층부의 지휘관들은 젊은 장교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제한적인 범주 내에서 훌륭한 전술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무능한 장교는 적군의 총포탄이 지배하는 전장의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단계의 지휘관들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면이 있었다. 이들은 적군보다 상급자의 명령과 판단을 더 두려워했다. (중략) 방어선을 유연하게 구축했다면 대개는 소련군이 먼저 공격해오도록 하는 편이 안전했다. 소련군은 항상 용맹하고 저돌적으로 파상 공격을 감행했다. 그 원인은 아마도 공격을 중단할 경우에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7)

군사용어로는 ‘정면공격’을 감행했다는 이야기다. 일선의 병사들은 이런 유형의 장교들을 다소 부정확하고 장황하기는 해도 솔직하게 평가했다. “그 병신은 주님께 기도나 하라고 해. 조금 있다가 대가리가 깨질테니.” 쿠르스크 전투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이렇게 단순한 전술을 사용하는 장교들을 대상으로 명령과 지침을 하달했다. 그런 문건 중 하나를 여기 인용해본다. 이 문서는 바투틴이 직접 서명한 문서로 사단급까지의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아군의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포병은 전차와 보병을 지원하지 못하고 후방에 뒤쳐지곤 한다. 장차 있을 작전에서는 절대 포병이 뒤쳐지게 해서는 안된다. 적의 저항은 포병을 집중운용하고 보병 화력을 통합하여 분쇄해야 한다. 정면공격을 하는 사례가 많은데 적을 포위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한 경우가 종종 있다. 부대 전술의 결함을 최대한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 (중략) 화력을 집중 운용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8)

독일 남부집단군이 주공을 지향한 지역에 배치된 부대들은 전투 초기의 며칠 동안 위에서 열거한 문제들이 누적되어 지휘통제에 있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제6근위군 방어지구가 심했다. 1943 7 6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돌파하면서 전개된 전투로 이 지역의 방어 배치가 복잡해 진 것이 첫번째 원인이었다. 이 무렵 제6근위군 지구의 방어선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6근위군의 방어선이 붕괴하면서 부대가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통합된 지휘통제 체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치스챠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가 직접 지휘한 집단의 사단들은 제1전차군과 함께 오보얀Обоя́нь 축선을 방어했다. 치스챠코프는 코체톱카Кочетовка에 지휘소를 두었다. 라구틴Павел Филиппович Лагутин 소장이 지휘하는  집단은 리포븨이 도네츠강Липовый Донец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라구틴의 보조 지휘소는 사즈노에Сажное에 있었다. 두 집단의 사이에는 제1전차군과 제69군이 배치되어 부대가 뒤섞여 있었다. 치스챠코프의 야전군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어 단일한 야전군으로 통합 운용을 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통신망을 유지하고 보급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예를들어 제51근위소총병사단은 정면 30km에 달하는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 사령부의 협력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쿠르스크 전투 기간 동안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 사령부는 협동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같은 전투 구역에 부대가 뒤섞여 있었고, 심지어 같은 참호선에 두 부대의 예하 부대들이 함께 배치된 경우까지 있었다. 6근위군과 제1전차군 사령부는 효율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고 그 예하의 군단과 사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부대는 아예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작전을 펼쳤다. 6근위군 사령부의 한 참모장교는 두 부대의 협동 작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과 함께 작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 사령부는 정기적인 정보 교환 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때문에 보전협동 작전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6근위군 사령부의 상황도에는 제1전차군 예하 부대의 위치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때문에 부대간의 전투지경선 구분 조차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무의미한 희생이 발생하기도 했다.9) 
 규모는 작았지만, 1전차군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1전차군의 우익과 중앙에 배치된 제6전차군단과 제3기계화군단 소속의 연대와 여단, 대대들이 뒤섞여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제22근위소총병군단 소속의 2개 사단, 증원부대로 도착한 제39군과 제40군 예하 부대와도 섞여 있었다. 3기계화군단 작전 구역으로 이동한 제6전차군단 소속의 전차여단들의 지휘계통은 두개가 되었다. 전차여단장들은 전투 중 부대 재배치나 철수를 수행하기 위해 제6전차군단 사령부와 제3기계화군단 사령부 양쪽으로 부터 명령을 받아야 했다. 무전기가 부족하고 다른 통신 수단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기존에 수립한 지휘관 결심은 대부분 실행하기 전 부터 실패한 상태였다. 군단장들도 명령을 하달하고 지시를 내릴때 같은 문제를 겪었다.

붉은군대는 독립된 단위의 전차군을 운용하는데 있어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전차군을 편성할때 중요한 사안을 생략하거나 대충 처리하고 넘어간 경우가 잦았다. 이때문에 바투틴이 제1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에게 오보얀과 프로호롭카 축선 방어를 위해 제병협동 야전군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을때 제1전차군은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통신수단은 물론 야전군 사령부의 기능을 수행할 인력 조차 부족했다. 예를들어 전차군 사령부예하 포병사령부의 규모는 일반적인 야전군 사령부의 포병사령부의 50% 수준이었다. 쿠르스크 방어 작전 기간 중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이 독일군의 공세 개시 전에 보유했던 것 보다 두 배 많은 포병을 배속받았다. 1전차군 포병사령관 프롤로프И. Ф. Фролов 대령과 그의 참모진은 이렇게 많은 규모의 포병을 운용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1전차군 포병사령부는 배속받은 포병 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지휘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으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효과적으로 포병을 운용하지 못했다. 프롤로프 대령은 전투가 끝난 뒤 이렇게 보고했다. “전투 기간 중 포병사령부에는 작전 장교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다른 작전장교들은 배속받은 포병 부대에 나가 있었다.10)

프롤로프 대령은 제1전차군 방어구역에 배속된 포병연대들이 도착할 즈음 탄약이 부족한 상태라는걸 파악했다. 새로 배속된 포병연대들은 제1전차군의 탄약창에서 포탄을 보급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1전차군에 배속된 포병부대 전체에 중앙 집중화된 효과적인 지휘체계를 구축할 수 없었다. 결국 포병부대는 증원된 부대가 배치된 전투 구역의 최고 지휘관들이 통제하게 되었다.

야전군-군단-사단으로 이어지는 단일화되고 원활한 다채널 지휘계통을 확립하지 못해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졌다. 7 6일 제1전차군은 제6전차군단 및 제3기계화군단과 함께 제2선 방어선에 도착했다. 사령부는 신속하게 일반 통신망과 포병사령부와의 통신망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통신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 뒤인 7 7일 독일군은 크리보셰인Семён Моисеевич Кривошеин이 지휘하는 제3기계화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제3기계화군단은 유선통신망이 단절될 위기에 직면해 가설해 놓은 유선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체르니옌코Дмитрий Хрисанфович Черниенко 소장의 제31전차군단이 프로호롭카 축선에 도착했을때, 이 군단은 제1전차군 사령부와 연결되는 통신망을 구축하지 못했다. 3전차군단 통신참모는 “전장 상황의 변화에 맞춰 통신 체계를 구축할 방법을 몰랐고”, 통신대대의 훈련수준이 매우 낮은데다 전장의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11)  1전차군사령부가 안정적으로 다채널 통신망을 유지한 제대는 제6전차군단 뿐이었다. 이때문에 전투가 진행될수록 제3기계화군단 및 제31전차군단과 통신망을 유지하는게 어려워졌다. 또한 각 군단에 배속된 여단급 제대의 지휘통제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전차군에 소속된 연락기연대를 운용하는데도 제약이 많았다. 차량이 심각하게 부족했지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휘통제 수단은 통신장교들을 전령으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전령 장교들은 결정적인 시점에 중요한 명령과 지침을 전달했다.

오보얀과 프로호롭카 축선을 방어하던 부대들의 작전 관련 정보를 송수신하는데 있어 무선통신망은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전투 중 무전기 일부는 파괴되었고 일부는 고장이 나버렸다. 7 7일 야코블레포Яковлево 인근에서 무전기를 장비한 제3기계화군단장의  지휘전차가 격파되고 제1, 3기계화여단 본부의 무전기가 파손되었다. 크리보셰인 소장12)은 제1전차군사령부에서 쿠르스크 전투의 전훈을 평가하기 위해 개최한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단의 지휘는 지휘소와 전방관측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본인이 지휘한 작전집단은 전방관측소에 군단사령부 작전 및 정보장교, 그리고 군단 및 예하 제대의 통신장교를 두고 여기에 암호과의 파견대, 통신병 및 두 대의 무전기를 두었다. 명령을 내리거나 예하 부대의 정보를 받을때는 해당 부대 지휘관을 무선으로 호출했다. 하지만 우리 군단은 РСБ 무전기가 부족했다. 각 여단은 한대의 РСБ무전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여단 예하 부대와의 통신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접 여단 및 군단 사령부와 통신망을 유지하려면 РСБ 무전기가 한대 더 필요했다. 여단장의 지휘전차에 탑재된 R-0 무전기는 유효 통신반경이 고작 4~5km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군단장과 여단장은 여단본부의 무전기를 이용해야 했다. 무전기 한대에 회선이 2~3개 되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 [중략] 1개 군단에는 최소한 8대의 РСБ 무전기가 필요하다. 이중 2대는 지휘전차에 탑재하고 나머지는 윌리스 지프에 탑재해 운용해야 한다.13)

31전차군단의 상황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1전차군사령부는 긴급히 한대의 РАФ 장거리 무전기를 구해 제31전차군단 사령부에 보냈다. 이로인해 제1전차군사령부와 제31전차군단 사령부간의 무선통신은 다소 개선됐지만 결국 쿠르스크 전투가 끝날때 까지도 인접군단 및 제31전차군단 내의 군단-여단-대대 통신은 향상되지 못했다.

1전차군 작전참모처에는 13명의 통신장교가 있었다. 이정도 규모로는 통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전투가 격렬한 시점에는 작전참모처의 통신장교들이 전차군 예하부대 및 제38, 40군 예하부대에 파견되어 전선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7 8일과 9일에는 통신 문제가 특히 더 심각했다. 1전차군 참모장 샬린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Шалин소장은 포병사령부의 참모장교 전원을 전차군에 배속될 예정인 대전차연대 및 대전차여단들을 통제하도록 파견했고, 작전참모처에 소속된 인원을 일부 포함한 통신장교들을 최전선의 작전상황을 전달하고 전차군 사령부의 명령을 받도록 하기 위해 파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전차군 사령부와 사령부가 구축한 통신망은 과부하가 걸렸다. 사령관인 카투코프 본인이 직접 예하 군단 및 여단 본부의 이동 상황을 꾸준히 파악하고, 작전상황을 전달받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접촉을 유지해야 했다. 심지어는 통신망이 가장 잘 구축된 제6전차군단과의 통신도 원활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공습이 주된 요인이었다. 1전차군의 기록에 따르면 전차군과 인접부대와의 통신망은 주간에는 평균 18, 야간에는 평균 3회 두절되었다. 인접부대와 연결한 유선망은 평균 3km 정도가 지속적으로 절단되었다. 1전차군 사령부 군사위원회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평균연령 50~53세의 늙은 병사들을 후방 지원 및 근무부대에 배속시켰는데, 이로인해 통신망을 원활하게 유지하고 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전차군 내의 지휘통제 체계는 완벽하게 작동하지 못했는데, 6근위군의 보병 부대 및 전차, 기계화부대와의 협동 작전이 부재했다는 점은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1전차군에 배속된 제90소총병사단과 제67소총병사단은 제6근위군 소속 제22근위소총병군단의 작전 통제를 받았다. 6근위군 사령부가 인접부대와 작전 협조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예하부대 통제도 엉망이었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다. 이때문에 철수를 해야 할때는 인접부대가 가장 마지막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군으로 부터 통지를 받아 상황을 파악하기 보다는 갑자기 독일군이 측방과 후방에 출현한 걸 보고서야 아군이 철수한 사실을 알게되는게 다반사였다. 독일군은 이 약점을 아주 잘 활용했다.

뿐만아니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부대의 전술적인 차원의 문제도 심각했다. 특히 연대급과 대대급 지휘관들은 이론 교육 수준이 매우 낮았고 지휘관으로서의 실전경험도 부족했다. 이 문제는 보로네지 전선군의 작전 지휘, 효율성, 상황에 따른 대응 능력, 상황 판단능력, 작전 상황에 맞는 결정 능력에 영향을 끼쳤다. 작전 정보 및 첩보를 수집해 전파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각 부대 지휘관들과 참모장, 작전 참모, 그 밖의 참모들은 예하 부대장에게 경고를 하고 명령을 엄수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아군과 적군의 상황을 시간별로 파악해 분석하고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상급 사령부들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어구역에서 며칠동안 단 하나의 첩보 보고 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위제대 지휘관들은 상급 제대에 정보를 객관적으로 종합해서 보고할 임무가 있었지만 이를 무책임하게 방기하거나 명령을 무시하고, 아예 어물쩍 넘어가거나 허위 보고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군단장과 사단장들은 예하 부대에 직접 연락장교를 보내야했다.(대개는 예하 부대에 보낼 수 있는 연락장교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군단 및 야전군급 사령부의 고급 장교와 장군들은 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일부 지휘관들의 보고서는 작전보고서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까웠다. 보고서의 내용은 물론 문체 조차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보고서에 구체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는 대신 “(고대 러시아의 영웅 설화에 나오는)보가티르Богатир 처럼 싸웠다.” “적의 집단을 섬멸하였다.” “적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파시스트들이 전장을 장악하고 있어 적의 손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같은 문장을 사용했다. 71근위소총병사단 참모장 류보무드로프П. И. Любомудров 중령의 전투명령을 인용해 보겠다. 류보무드로프 중령은 예하 지휘관들의 임무 수행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1943 7 4일 부터 7일까지 전개된 격렬한 전투에서 사단은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유례없이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예하 부대들이 전투를 수행하는데 있어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작전의 결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때로는 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는데 있어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a)사단 예하부대장들은 보고를 제시각에 하지 못했으며 때로는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인접부대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고는 했다. 예를들어 제219근위연대는 235.6고지를 적에게 빼앗겼지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213근위연대는 적 2개대대가 드미트리옙카Дмитриебка를 점령하는걸 막지 못했고 적이 드미트리옙카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야 이 상황을 보고했다. 이로인해 사단 본부는 시의적절하게 전투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b)각 연대본부는 정찰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적의 의도를 제때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적이 작전을 개시했을때 기습 상황과 돌발 상황에 직면하곤 했다. 
c)증원부대와 배속부대와의 협동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했다. 부대장들은 우익이나 좌익, 후방에 배치된 부대가 어느 부대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배속받은 부대의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 제병협동부대를 적절하게 운용할 수 없었다. 
d)적군의 전력은 과장하고 아군의 전력은 축소하는 경향이 많았다. 독일군 1개 중대가 공격해 오는데 이를 대대규모로 오인해서 이미 보유한 화력만으로도 적을 격파하거나 제압하는데 충분한데 로켓포 지원을 요청하는 식이었다. 
e)사단장의 승인 없이 지휘소와 관측소를 옮기는 경우가 빈번해 연대본부와 사단본부간의 통신이 자주 방해를 받았고 완전히 통신이 두절되기도 했다. 
f)지휘관들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예비대를 투입하고는 임무를 달성한 뒤에도 예비대를 후방으로 돌리지 않았다. 예비대가 없는 상황에서 위기가 닥치면 전투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단이 없게 된다. 
g)지휘관들은 일일 인명손실 및 장비손실, 부대 보급 상황등을 보고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문에 사단 사령부가 결심을 내리는데 애로가 많았다. 
h)지휘관들이 부대 배치를 변경하거나 방어선을 변경하면서 부대 배치 현황을 제출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예하부대의 배치 현황을 보고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이때문에 지휘관들은 예하 부대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고 이로인해 이미 내린 결심을 바꾸거나 계획을 잘못 이행하는 경우가 있었다.14)

여단, 사단, 군단급 지휘부의 정보부서의 활동은 특기할 만한 주제이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붉은군대 정보 조직의 활동은 적절하게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간부 요원 확보였다. 야전군과 전선군 사령부 단위에서도 정보참모 부서는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경험이 부족한 인력을 받아들여야 했다. 군단과 야전군 사령부 조차 숙련된 정보장교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전선군 급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정보와 정찰임무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정보부서에 인력과 장비를 충원하고 정보장교를 선발ㆍ 교육ㆍ훈련ㆍ유지하는데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경향이 나타난다. 총참모부는 일선 부대에서 이런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우려를 표명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다. 예를들어 1943 1 5일 총참모부 정보참모차장 올랴노프И. В. Олянов 소장은 각 전선군 및 야전군 정보참모 부서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하달했다.

1.아군이 전투 작전을 시작하면 전선군 사령부와 야전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부간의 업무 협조가 잘 안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전투정보가 시의적절하게 도착해 참모부가 적의 행동을 예측하게 되는 경우 보다는 정보가 늦게 도착해 아무 쓸모없게 되고 이로인해 전선군과 총참모부는 상황을 분석하지 못하게 된다. 
2.전선의 상황이 안정적인데도 불구하고 15일에서 30일이 넘도록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적 사단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공세작전 중 정면의 적 부대를 24시간에서 48시간이 넘도록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1)전선군사령부와 야전군의 정보참모부서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해야 한다. 하루에 최소 3회씩 다른 회선과 유선 전화로 보고하는 시간을 정하도록 한다. 
   2)전선군사령부와 야전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서는 통신수단을 보조하기 위해 차량과 오토바이 등의 보조 연락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3.적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군의 정면에 배치된 적 사단의 위치를 최소한 3~5일에 한번씩은 확인해야 한다. 적 부대의 단대호를 신속히 파악하기 위해서 적 포로를 확보하고 적 사상자로 부터 문서를 노획할 집단을 운용하고, 이 집단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15)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과 결함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전투정보 부서들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전선군 예하의 각급 제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전투정보 부서는 수개월이 넘도록 정원을 채우지 못했으며, 첩보를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도 못했다. 이때문에 전훈을 정리 분석하지도 못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각급 부대 지휘관들은 군단 및 야전군 사령부가 정보 업무를 수행하도록 지원하지 못했고, 타성에 젖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정보 업무를 잘 모르는 장교가 분석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은 정보 업무를 다룰 기술과 능력이 없었다. 각급 사령부의 정보참모 부서에서는 인력 교체가 빈번했다. 심지어 군단사령부 정보 참모가 한달 동안 여러번 교체된 경우도 있었다. 각급 부대의 참모장의 임무 중에는 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정보 분야의 문제점이나 정보 장교 부족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로네지 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의 정보장교 슐젠코П. И. Шульженко 중령의 보고서를 인용하겠다.16)

“보로네지 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는 붉은군대의 정보 활동 개선 조치에 대한 1943 4 19일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제0072호를 이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 참모장 마랴힌Сергей Степанович Маряхин 대령17), 각 전차군단 및 기계화군단의 참모장, 전차여단장들은 무책임하고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정보 및 정찰 임무를 감독하고 정보 업무를 담당할 간부를 육성하는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b)이들은 정보참모들이 예하 부대의 정보참모부서와 정찰부대를 직접적으로 시의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지 못했고 물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있었던 사례를 인용한다. 
   1.전시 규정에 따르면 제1선과 제2선 방어선에 배치된 모든 부대는 적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고, 적의 방어태세를 연구하고, 적의 의도롤 파악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이렇게 취득한 정보를 상급 사령부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부대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지난 3개월간 각 야전군에 배속된 전차-기계화부대와 전차여단 및 독립 전차연대 본부는 적의 상황에 대한 정기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각 야전군에 배속된 전차-기계화부대와 전차여단 및 독립 전차연대 본부는 적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했으며 적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대전차 방어 대책을 수립하는 것 조차 소홀히 했다. 이 문제는 또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상급 사령부에 무엇을 보고했겠는가? 전투 결과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아군 전차 부대는 아무것도 모른채 작전에 나서 무의미한 손실만 입었다. 본인은 최소 한번 이상 마랴힌 대령에게 예하 부대 본부와 지휘관들에게 정찰을 실시하도록 명령할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범죄 행위는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제0072호를 위반한 것으로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변명이 있다. ‘우리 부대 주력은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하 부대에 정찰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등등. 그렇다면 적을 연구하고 파악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2.마랴힌 참모장은 기계화 부대들의 정찰 활동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모장 본인 부터가 정찰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무시했다. 예를들어 1943 7 1일 붉은군대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Управление командующего бронетанковыми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ми войсками 1943 5 2일에 하달한 지침 제1102660호에 의거해 기갑 및 기계화부대의 첩보 업무에 관한 지침을 하달했다. 지침 제1102660호는 모든 전차-기계화부대의 참모장에게 기본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고 보고서 작성을 위해 전투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각급 지휘관들에게 직접 정보를 요구할 권한을 부여했다.본 사령부 소속의 전차 및 기계화 부대 본부는 마랴힌 참모장이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에 매우 수준낮은 자료를 5일이나 늦게 제출했다. 전선군사령부가 접수한 보고서는 전투 정보 업무 경험이 전무한 행정병들이 정리했다. 40군 예하 기갑부대들은 정보 업무 규정에 따른 자료 정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40군의 기갑 참모 이바노프 소장은 지침을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참모장에게 돌렸다. ‘마랴힌 참모장에게 우리 사령부에는 첩보를 정리할 인력이 없다고 전달하라.’ 제40군은 이렇게 통지하고는 지침을 이행하지 않았다. 본인은 마랴힌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3.전선군 예하 부대의 정보 참모 부서와 정찰 부대, 그리고 일부 지휘관들은 정보 장교를 육성할 필요성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모든 문제를 정보참모들에게 일임했다. 각 부대의 정보참모들은 대개 경험과 교육이 부족해 군단급과 여단급의 정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정보참모를 부주의하게 다룬 사례를 언급하겠다. 5근위‘스탈린그라드’전차군단은 올해 5 1일 부터 7 14일사이에 정보 참모를 세 명이나 교체했다. 군단장은 보데이코 중령, 포베츠킨 소령, 예프레모프 소령 등 세명의 장교를 무능하다는 이유로 연달아 해임했다. 문제는 이 세명의 장교에게 있는게 아니라 이들이 정보 업무에 관심을 가지고 실력을 육성할 수 있도록 지도할 상급자가 없었다는데 있다. 본인이 수일동안 제5근위전차군단의 정보참모 업무가 수행되는 환경을 조사한 결과, 군단 정보장교들이 군단 참모장의 업무를 보좌할 때는 부여된 임무에 걸맞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정보참모부는 군단 사령부 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보참모부는 군단사령부에서 가장 무시받는 부서로 장교들도 선호하지 않았다. 정보장교들이 예하 여단을 방문할 때는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 차에 동승하는 일이 흔했다. 정보장교들이 조사 임무를 수행하도록 차량이 배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지적한 뒤에야 정보참모부에 오토바이 한대가 배정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사이드카가 달리지 않은 1인승으로 정보참모부가 운용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의 다른 부대들도 정보참모부서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보로네지전선군사령부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의 정보참모인 본인 조차 임무를 수행하는데 물질적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예하 부대의 정보참모 부서와 정찰부대의 임무 수행을 감독하기 위해서 부대를 방문할 때 원래 계획한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정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차량을 배당 받기가 매우 어렵다. 본인도 예하 부대를 다른 임무로 방문하는 차량에 동승해서 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마랴힌 참모장은 편제표에 명시된 것 보다 더 많은 자동차 두 대와 오토바이 한 대를 사용하고 있다. 
   4.스탈린 동지께서는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제0072호를 통해 정보장교를 다른 임무에 전용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의 전차-기계화 부대들은 위에서 언급한 정보 업무와 정보 장교들에 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고, 이로인해 유능한 정보 장교들이 고갈되어 가는 실정이다. 정보장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다른 보직을 받으려 한다. 보로네지 전선군이 정보장교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임에도 지난 6주간 포춈킨 소령과 샤발로프 대위 등 2명의 우수한 정보 장교가 다른 보직으로 옮겨갔다.본인은 이렇게 정보참모 부서가 무너지는 유감스러운 상황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랴힌 참모장과의 사이만 나빠졌을 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보로네지 전선군의 지난 동계공세 전 기간에 걸쳐 본인이 배속받은 인원은 본인과 독일어 통번역 요원을 포함해 편제의 40%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업무 부담이 과도해 마랴힌 참모장에게 인력 충원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공세작전이 끝날때 까지도 부서의 인원은 변동이 없었다. 마랴힌 참모장이 정보참모부의 임무 수행을 위해 해 준 일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1943 7 5일 시작된 독일군의 벨고로드 축선 공세 기간 동안 정보참모부 소속의 정보장교 1명은 예하 전차군단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었다. 또 다른 정보장교는 7 5일 부터 7 12일까지 기밀문서 취급과 보관을 담당하는 위원회에 파견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방첩과장을 제외하면 이 장교 한명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의 부관은 불가피한 사유로 7 12일까지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본인은 마랴힌 참모장에게 이러한 문제를 호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열의를 가지고 최대한 노력 했지만 이렇게 부담이 심한 상태에서 모든 과업을 감당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참모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귀관이 잘 해나가겠지’ 마랴힌 참모장은 정보 업무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 문제는 이때문에 일어났다.거듭 말하고자 한다. 본인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을 했지만 참모장 마랴힌 대령과의 사이만 나빠졌을 뿐이다. 본인은 보로네지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관 라드케비치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адкевич 소장에게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라드케비치 장군은 내 보고서를 마지못해 읽어보고는 참모장에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청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마랴힌 참모장과 갈등을 빚는걸 하찮은 일로 치부했다.18)

이 보고서는 언뜻 봤을때 슐젠코 중령이 사이가 좋지 않은 마랴힌 참모장을 중상모략하려고 쓴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붉은군대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국장 페도렌코 상장이 1943년 하계전역과 추계전역의 전훈을 반영해 같은해 10월 각 야전군 사령부에 내린 지침을 보면 슐젠코 중령의 보고서에서 지적한 문제점이 똑같이 나나탄다. 즉 정보 부서에 대한 태도는 보로네지 전선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군의 전투 정보 효율성을 떨어트린 또 다른 문제점은 적군의 병력을 과장하는 것이었다. “적은 것 보다는 많은게 낫다”는 경향이 널리 퍼져있었다. 정보 부서도 이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수집된 첩보를 신뢰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또한 첩보를 전투 지휘에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모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1전차군의 핵심 부대 중 하나인 크리보셰인 소장의 제3기계화군단 소속의 정보 장교들이 쿠르스크 전투 중 가장 치열하고 격동적인 기간이었던 1943 7 6일 부터 15일까지 정보 업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보여주는 문헌을 하나 제시하겠다. 이 자료는 제1전차군 정보참모부의 오사우멘코Осауменко 소령이 작성한 비망록이다. 그는 이당시 제3기계화군단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었다. 오사우멘코 소령은 비망록을 작성해 제1전차군 정보참모부 제1과장 안드랴노프Андрянов 중령에게 제출했다.

1.3기계화군단이 전투에 투입된 직후 부터 군단 정보참모부는 여단 사령부와 정상적인 통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각 여단의 정보참모 및 정찰부대와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통신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 군단 정보참모부는 각 여단의 정찰 활동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각 여단의 정보참모들은 전투 중 정찰 활동을 조직하고 정찰대 파견과 관측활동을 통해 여단 정면에 배치된 적의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제때 군단 정보참모부에 전달하지 못했다. 여단 작전과에서 전투 정보를 수집해 군단 작전참모부에 유선전화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무전으로 암호화해 전달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군단 정보참모부는 이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 군단 정보참모부는 작전참모부 처럼 하급 부대와 통신망을 갖추고 운용하질 못했다. 이때문에 군단 정보참모부는 전선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질 못했다. 
2.군단 정보참모부에 소속된 정찰대대는 상황에 따라 정보참모가 운용했다. 하지만 정찰대대의 활동은 군단사령부가 필요로 하는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통신 체계를 올바르게 조직하지 못했고 정찰 보고를 늦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규칙하게 했기 때문이다. 정찰대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야 정찰 결과 확인한 정보를 확인하는게 대부분이었다. 
3. 군단정보참모부의 편제와 임무가 규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보 장교들이 상황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1전차군 사령부 정보참모부로 부터 적에 대한 정보를 요청받으면 신속하게 정보를 정리해 보고 할 수 있도록  정보 업무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격파된 적 전차에서 문서를 노획했을때 몇시간, 심지어는 며칠 동안이나 방치해 놓아 정보참모부나 스메르시도 문서의 존재를 몰랐던 경우도 있다. 군단 정보참모부가 노획문서를 입수한 뒤에도 이것을 수송차량편으로 제1전차군 정보참모부에 보냈다. 유선통신망이 혼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군단 정보참모부가 유선전화로 전차군 정보참모부에 보고하는 것은 어려웠다. 군단 정보참모부는 오토바이 전령 같은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군단 정보참모부는 다른 부문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전투 작전이 시작된 이후 정보참모부의 정보장교들은 이틀간 쉬지 못하고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정보장교들은 탈진상태가 되었다. 결국 모두가 잠에 빠져 전화가 오는데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전투 개시 이후 수일이 지나도록 정보참모부의 유선전화는 통신망에 연결되지 못해 작전참모부의 전화로 보고를 해야만 했다.19)

이 문서는 무언가를 조사하는 보고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중상모략하려고 작성한 문서도 아니다. 다른 야전군급 부대의 참모장교들도 하위 부대를 시찰해 방문한 부대의 임무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려했다. 이 비망록은 제1전차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일반 문서 파일에서 발굴한 것이다. 이 문서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1전차군 정보 참모가 군단급 부대의 정보 업무 방식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과 약점을 이해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6근위군의 적정 파악도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예하 군단의 정보참모부 장교들은 최전선의 적을 열심히 관측했지만 적군의 후방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2근위소총군단장 이뱐스키Николай Болеславович Ибянский 소장은 쿠르스크 전투 1단계 작전이 끝난 뒤 정보참모를 교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두브네르Б. И. Дубнер 소령이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두브네르 소령의 정보 업무는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어 군단장을 보좌하기에 부족했다. 중요한 점은 군단 참모장 조차  전투 중에 술에 취해 군단 사령부의 각 부서 업무를 조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20) 당시 바투틴의 책상에는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가 홍수 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있었는가? 많은 시도가 있었다.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제0072호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면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은 물론 전투기 시작된 이후에도 전투 정보를 개선하는데 필요한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1943년 봄에는 스탈린이 직접 전투정보 문제를 제기하기 까지 했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기까지 했다.

바투틴이 신경쓴 또 다른 문제는 아군간의 오인 사격이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시작된지 3일차가 되자 일선부대에서는 이른바 ЧП(즉 심각한 실수, 불운한 또는 재앙적인 사고를 뜻하는 약어)가 급증했다. 각급 제대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여기에 일선 장병들의 갖가지 실수, 간헐적인 태업과 무책임, 그리고 임무를 무시하는 경향이 결합하여 아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특히 전차병과 조종사들이 오인 사격으로 인한 비난을 많이 받았다. 1전차군, 6근위군, 7근위군, 69군 방어 지구에 제38군과 제40군을 비롯한 예비대가 증원되어 병력 밀도가 높아지다 보니 아군간의 교전이 급증했다. 특히 소련 공군이 소련 육군을 폭격하는 사고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1943 7 7일 보로네지 전선군의 전차부대간에 최초의 오인 사격 두 건이 발생했다. 땅거미가 질 시간대에 제192독립전차여단은 페나강 만곡부(1전차군의 좌익)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 인근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던 제6전차군단 제200전차여단 제191전차대대의 T-34 전차 한대가 제417전차대대 소속 파타호프Фатахов 중위의 M3 스튜어트 전차에 사격을 가해 격파하고 또 다른 한대에 손상을 입혔다. 파타호프 중위 차량의 조종수와 무전수가 전사하고 파타호프 중위는 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차의 전차장인 마튜셴코Матюшенко 중위가 전사했다. 조사 결과 제200전차여단의 T-34 승무원이 미국제 렌드리스 전차를 독일 전차로 오인했음이 밝혀졌다. 독일군이 돌파해 온 것으로 판단한 이들은 즉시 사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제192전차여단은 후방에서 행군해오고 있었고 그 방향에서 독일군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21)
두번째 ЧП는 제7근위군 방어 구역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는 대낮에 아군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262근위독립중전차연대장의 보고서를 인용한다.

1943 7 6 21시경 제1중대 소속의 КВ전차 8대는 제81근위소총병사단의 보병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방어선을 바꾸어 볼샤야 이구멘카Большая Игуменка로 이동했다. 7 7 12시 제81근위소총병사단의 포병이 제1중대의 전차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포격에 독일군의 대전차포 사격까지 더해져 제1중대의 전차 3대가 격파됐다. 중급 지휘관 중에서는 전차장 구로프 중위, 전차장 피나르스키 중위가 전사했고 하급 지휘관 중에서는 코발료프 원사, 듀빈 근위중사가 전사했다. 중상자는 샤마로프 중위, 엘린 상사, 그리고 전차 조종수 1명이다. 실종자는 중대장 벨로프 상위(그의 전차 포함), 중대장 코세노프 상위 등이다.22)

다음날에는 아군간의 교전이 더 많이 일어났다. 사상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예를들어 7 8일 아침 제100전차여단은 아군인 제192독립전차여단, 그리고 제31전차군단 예하 제242전차여단과 교전했다.23) 원인은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미국제 렌드리스 전차를 독일 전차로 오인해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전투가 격렬해지자 전차병들은 아군의 T-34에 포격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은날 오후 제2전차군단 예하 제99전차여단은 제69군 예하 제183소총병사단 제285소총병연대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285소총병연대는 프로호롭카 역으로 부터 동쪽으로 8km 떨어진 접근로의 제1방어선 참호에 배치되어 있었다.24) 사상자는 수십명에 달했다. 183소총병사단장 코시칀А. С. Косицын 소장이 7 9일 오전 5시에 제출한 특별전투보고서 제5호를 인용한다.

1. 1943 7 8 16시 제285소총병연대 지휘소는 (후방인) 프로호롭카역과 241.6 지점 방향에서 나는 엔진 소리를 들었다. 전차들은 접근해 오면서 전투 대형으로 전개해 연대의 진지, 대전차총 중대 진지, 포병 진지,  관측소 등에 맹렬하게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전차들은 바실옙카Васильевка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수많은 건물을 파괴했으며 제10전차군단 소속의 전차 한대도 격파했다.(10전차군단은 바실옙카 인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전차들은 제285소총병연대 제1대대의 방어진지에 포격을 퍼붓고 참호에 배치된 보병들을 궤도로 짓밟았다. 특히 제3중대와 제5중대가 피해를 입었다. 아군의 기존 방어선을 수복하기 위해 공격을 준비하던 와중에 갑자기 공격을 받아 아군 부대들은 와해되었다. 특히 제3, 4, 5중대의 피해가 컸다. 이 전차들은 지휘통제도 받지 않고 움직였으며 전투 대형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규율도 무너져 보였다. 285소총병연대 지휘부는 이 전차 부대에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아군을 공격했다. 연대본부에서는 장교들을 이동중인 전차 부대로 보내 그들의 위치와 현재 상황을 전달하려고 했다. 전차 중대장 한명은 안드레옙카Андреевка-바실옙카 방면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추후 그레즈노예 방면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고  285소총병연대와 바실옙카에 배치되어 있던 제10전차군단 예하 제11차량화소총병여단 소속 부대들을 공격했다. 우리 부대를 공격한 전차들은 제2전차군단 제99전차여단 소속이었다. 포포프Алексей Фёдорович Попов 소장 지휘하의 부대이다. 99전차여단 선임참모 피뉴크Пинюк 대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2전차군단장 포포프 소장이 제99전차여단에 직접 공격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적군은 안드레옙카, 바실옙카, 코즐롭카, 그레즈노예에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부대는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을 뿐이다.’ 아직 집계를 마치지 못했으나 제285소총병연대 예하 중대들이 아군 전차의 공격으로 입은 인명피해는 전사 25, 부상 37명이다. 특히 제3중대와 제5중대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명피해의 원인은 대부분 제99전차여단장이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대로 제285소총병연대에 공격을 감행한데 있다. 이때문에 아군 보병들은 아군 전차에 포격을 당하고 아군 전차의 궤도에 짓밟혔으며, 아군 전차들은 아군의 대전차 지뢰에 격파되었다.25)

 99전차여단은 7 8일의 전투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제99전차여단은 258.2지점, 테테레비노Тетеревино, 루츠키Лучки에서 전투에 돌입했다. 99여단은 제2제대로 제169전차여단과 제26전차여단을 후속하고 있었다. … 여단은 기본적으로 정면과 측면에 배치된 적은 물론 아군에 대한 정보 조차 없는 상태였다. 선봉에 선 제169전차여단이 콤소몰레츠 국영 농장선에 도달하자 적의 포병, 중박격포, 그리고 참호에 배치된 6호전차 등이 아군 전차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많은 Ju-88 폭격기와, Ju-87 지상공격기가 공격에 가세했다. . 여단이 진격하면서 적의 공습은 한층 더 심해졌고 1943 7 8 18시경까지 공습이 끊이질 않았다. 아군 항공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69전차여단의 제1제대인 제1전차대대장은 공격개시선(이바노프스키 븨셀로크Ивановский Выселок 북쪽 500m 지점 철도가의 오두막)으로 이동할 때 진격 방향을 잘못잡고 이바노프스키 븨셀로크 남쪽 2km 지점의 오두막으로 갔다. 169여단장은 황급히 제1대대 대신 제2대대를 제1공격제대로 교체했다. 1전차대대는 이동을 중지하고 콤소몰레츠 국영농장 옆에 있는 숲의 남서쪽 끝자락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제1전차대대는 제2공격제대로 편성되었다.1전차대대장은 돌로 포장한 도로 근처에서 제26전차여단의 행군대열과 마주쳤다. 대대장은 제26전차여단이 우익에서 작전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1전차대대장은 행군 방향을 돌려 테테레비노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다. 대대는 258.2고지로 이동하던 중 두대의 6호전차로 부터 사격을 받았다. 1대대는 교전 중 전차 몇 대를 잃고 콤소몰레츠 국영농장 옆에 있는 숲의 서쪽 끝자락으로 후퇴해 그곳에서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2대대는 제169전차여단의 뒤를 따라 이동하다가 258.2고지의 북서쪽 자락에 도착했다. 이때 224.5고지와 258.2고지에서 맹렬한 포격을 받아 2대의 T-70전차를 잃었다. 2대대는 남은 10대의 전차로 야라 자슬로늬이 동쪽으로 이동해 제169전차여단 및 제15근위독립중전차연대와 합류했다. 2대대의 전차 일부는 격파되고 남은 전차들은 분산되었다.[그리고 분산된 전차 일부는 아군인 제285소총병연대를 공격했다.- 저자]차량화소총병대대와 대전차총중대는 제1대대와 제2대대의 전차에 올라타고 이동하다가 독일공군의 공습을 받고 하차해 6~10명 단위로 분산되었다. 차량화소총병대대장은 박격포 중대도 배속받고 있었는데 대대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대대장은 대대본부 요원들과 함께 분산된 대대 병력을 수습해야 했다.여단본부도 이때문에 매우 바빴다….아군의 전차와 포병이 적 전차 및 포병과 교전하는 동안 적 공군도 밤이 될 때까지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밤이 될 무렵 차량화소총병대대와 여단본부의 노력으로 분산된 보병들을 수습해 재편성할 수 있었다. 이날 전투로 제99전차여단은 21대의 T-34, 2대의 T-70 전차가 손상을 입거나 완파되었다. 사상자는 사병과 간부 21명 전사, 53명 부상이다.26)

별도로 해설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전차병과 보병들은 그들이 공격하는 지역의 전장 정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지도 조차 없었다는 사실만 덧붙이겠다. 심지어 포포프 장군 조차 국영농장 일대에 포진한, 카르포프А. К. Карпов 중령이 지휘하는 제285소총병연대의 작전 상황이나 부대 배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285소총병연대는 제2전차군단의 우인접 부대였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아군간의 오인교전과 포포프 장군이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점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만들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작전이 완료된 이후인 1943 7 30일 바투틴은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라 명령 00212호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3 7 7 21시 제2전차군단장 포포르 소장은 본인으로 부터 군단을 스탈린국영농장 근교에 집결시킨 뒤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해 7 8 10 30분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포프 소장은 이 명령을 받은 뒤에 조우전이 발생했을때 대응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접 부대의 위치를 파악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69군 사령관 크류첸킨과 코로차에서 만났었다. 69군은 제2전차군단이 투입될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포포프는 명령을 접수한 뒤 공격에 나서기 까지 1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는 예정된 공격 시간 보다 한시간 빠른 7 8 9 30분 공격을 명령했다. 공격시간이 예정 보다 앞당겨졌기 때문에 예하 여단장들은 정찰을 실시할 여유도 없었고 지형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최전방의 아군 방어선 배치도 알지 못했다. 이때 제99전차여단이 공격을 감행할 지역에는 아군 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그결과 제99전차여단의 전차들은 제183소총병사단 제285소총병연대의 방어진지를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25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러한 전투 지휘는 범죄 행위이므로 제2전차군단장 포포프 소장은 군사재판에 회부해 엄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그러나 그 이후의 전투에서 포포프 소장은 스스로 대담하고 결단력 있는 지휘관임을 입증했으며 부여받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므로 충분한 속죄를 했다고 판단된다.본인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포포프 소장에 대한 비난은 그가 자초한 것이다. 모든 지휘관들은 인접부대와의 협력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27)

포포프 군단장이 유죄라는 점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참모장 코셸레프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шелев 대령을 비롯한 제2전차군단 사령부 장교들은 물론 제99전차여단 장교들도 책임이 있다. 이들은 부대 훈련, 통신 장교와 정찰대 운용, 예하 부대에 대한 문서 전달, 전투 준비 태세 등 군단이 부여한 과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발굴한 문서들은 제2전차군단 예하의 여단 지휘관들이 부여된 임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휘관들 중에는 전투 명령을 받는걸 꺼리거나, 자신이 받은 임무를 권한이 없는 하급자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심지어 술을 잔뜩 마시고 만취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인해 병사들이 희생되고 부대의 전투 능력도 저하되었다. 포포프 소장은 예하 지휘관들의 능력과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예하 지휘관들과 함께 싸우고자 그들의 능력을 키우고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엄격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도 인내심의 한계는 있었다. 그럴때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15근위독립중전차연대장, 99전차여단장, 26전차여단장, 129전차여단장, 58차량화소총병여단장에게. 첫째: 본인은 귀하의 여단들의 무선 통신망 구축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 어제 밤 본인은 여단장 및 여단 참모장과 무선으로 교신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단장을 비롯한 사령부 인원들이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는가. 무전으로 부대의 배치 현황을 보고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99전차여단의 경우 여단 본부를 최전방으로 부터 25km 후방에 두고 있어 상황을 보고할 수 조차 없었다. 앞으로도 통신을 이런 상태로 한다면 여단 선임참모와 통신 참모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이다.둘째: 본인은 군단사령부와 무선 교신을 담당할 간부는 최소한 여단사령부에서 선임 참모 다음가는 참모장교로 해야 한다고 명령한 바 있다. 귀하는 시간을 맞춰 군단사령부에 부대의 현황을 지속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 여단장과 사령부 참모장교들은 항시 무전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신병 한명만 무전기에 붙어있고 다른 장교들은 잠을 자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셋째: 각 여단사령부는 허위보고를 일삼았다. 예하 부대의 위치를 모를때는 무전기가 이동 중이라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이런 행태는 명예롭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28)

2전차군단은 최정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악의 부대도 아니었다. 포포프 소장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적을 격파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았으며 1943 9월에는 제99전차여단을 포함한 군단 전체가 근위부대 칭호를 받았다.29) , 쿠르스크 전투 당시 제2전차군단의 작전 준비 태세는 붉은군대의 다른 기동부대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수준 차이가 없었다. 예를들어, 7 8일 다른 지구에서 작전 중이던 게트만Андрей Лаврентьевич Гетман 소장의 제6전차군단도 비슷한 사고를 경험했다. 6전차군단 제200전차여단 소속의 중대장이자 제1전차군의 전차 에이스였던 코브자르А. Г. Кобзарь 상위는 아군의 대전차포에 맞아 전사했다.30)  코브자르 상위와 그의 승무원들은 7 8일 하룻동안 독일 전차 17대를 격파했다. 이전까지의 전투에서 그는 독일 전차 7대를 격파한 상태였다. 1전차군 정치국 주라블료프А. Г. Журавлёв 대령의 보고서를 인용한다.

“몇몇 부대에서는 아군의 편성 상태를 몰라서 아군 전차에 사격을 가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었다. 용맹한 전차 중대장 코브자르른 중대를 지휘해 적 전차 20대를 격파했다. 7 8 21, 그는 전투를 마친 뒤 아군 부대가 있는 고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 한 대전차포 포대에서 코브자르의 전차를 적 전차로 오인하고는 명령도 없이 발포했다. 코브자르 중대장은 아군의 사격에 전사했다.31)

하지만 이런 사고는 제2항공군 조종사들이 저지른 실수에 비하면 약과였다. 소련 공군의 Ил-2지상공격기들의 아군 오폭 사고는 7 7일 부터 보고되고 있었다. 7근위군 제148독립전차연대장이 이날 11시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소련 지상공격기들이 191.8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소련군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2근위 타친스카야 전차군단 예하 여단들도 소련 공군에 오폭을 당했다. 다음날 제1지상공격군단 소속의 조종사들은 또다시 제2근위 타친스카야 전차군단에 기총소사를 가한 다음 제3기계화군단 예하 여단들까지 공격했다. 7 9일에는 본대와 떨어진 조종사들이 오보얀과 프로호롭카 축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1전차군과 제6근위군 예하 부대들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최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을 공격한 사고는 항공부대 사령부들이 추이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전투가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고 항공통제반이 부족해서  발생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100km나 떨어진 후방의 아군 부대를 폭격한 사고는 납득하기 어렵다.

7 9일 하루 동안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가 접수한 관련 전문들을 인용해 보겠다.

05 20: Ил-2 8대가 오제로보 지구의 제2근위전차군단 제26근위전차여단을 폭격(1명 전사, 12명 부상). 사즈노예 지구의 제2근위전차군단 사령부를 폭격.32)
05 50: Ил-2 5대가 제2근위 타친스카야 전차군단 제4근위전차여단을 폭탄과 기관포로 공격.33)
0845: Ил-2 18대가 제6근위군의 보급기지인 프로호롭카역 지구를 폭격.34)
15 30: Ил-2 6대가 (프로호롭카역 인근의) 그루슈키 지구를 폭격.35)
18 32: Ил-2 13대가 올홉스키, 페레시프 지구(6근위군 후방 지역)를 폭격.36)
19 32: Ил-2 8대가 크리브초보역(최전선에서 80km 후방)을 폭격.37)

심지어 이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오인 폭격도 있었다. 69군이 그런 경우였다. 7 9 02 58분 제69군 참모장 프로타스С. М. Протас 대령은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와 제2항공군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1943 7 9일 적 기갑부대와 보병부대에 대한 폭격을 요청함. a)프로호롭카 방면.b)벨레니히노Беленихино-코로차Короча 방면: 먼저 항공정찰을 한 뒤 제69군 지휘소의 요청에 따라 폭격할 것. 69군 예하 부대에 대한 공중 엄호. 2항공군의 작전반을 통신수단과 함께 제69군 지휘소로 파견해 줄 것.38)

그리고 얼마 뒤 프로타스 대령은 전문 110960호를 보내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와 제2항공군 사령관에게 항공지원 요청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했다.

07시에서 09시 사이에 60대의 Ил-2이 바실옙카, 콤소몰레츠 국영농장, 241.6고지 일대에 배치된 제183소총병사단 예하 제285, 295소총병연대를 폭격했다. 현재 피해를 파악 중이다. 이 지역을 폭격하라고 한 것이 누구인지 파악해 주길 바란다.39)

2항공군 사령부가 이렇게 심각한 오폭을 할 정도로 전장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원인은 알 수 없다. 1지상공격기군단 사령부가 사전에 목표물에 대한 정찰을 실시해 달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곧바로 폭격 명령을 내린 이유도 알 수 없다. 하지만 2개 연대규모의 Ил-2 지상공격기가 제183소총병사단 예하 2개 연대의 참호선과 벙커, 지뢰원을 공격했을때 어떻게 되었을지는 독자 여러분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오폭은 그저 수많은 오폭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군의 오폭이 시작됐을때 제2전차군단 제99전차여단은 스토로제보예Сторожевое 숲에서 나와 안드레옙카Андреевка 지구에 배치된 제10전차군단 제178여단과 진지 교대를 하던 중이었다. Ил-2 조종사들은 제99전차여단의 행군 대열을 발견하자 즉시 공격을 개시했다. 99전차여단은 대공화기가 전무했고 소련 조종사들은 열심히 아군을 공격했다. 전차병들은 폭격을 하는게 아군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스토로제보예 숲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또다시 아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99여단은 다시 프숄강의 강변 마을로 피신했다. 가장 극심한 타격을 입은 것은 제99전차여단 예하 차량화소총병대대였다. 99전차여단 정치위원 테프틴Тептин 소령은 군단사령부에 ЧП에 대해 보고했다. “오늘 아군 항공기들이 행군중이던 여단 예하 부대들을 세 차례나 공격했다. 아군의 폭격으로 차량화소총병대대 제1중대는 75%에 달하는 병력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으며 전차병 중에서 10명 가량이 부상을 당했다.40)
이날 제2전차군단 예하 모든 여단들이 소련 공군에게서 세 차례 오폭을 당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편적인 피해 통계만 있을 뿐이다. 99여단 본부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 258.2고지와 바실옙카에서 입은 인명피해 통계가 있다. 이 두 장소에서 소련 공군의 오폭으로 제2전차대대와 차량화소총병대대를 합쳐 3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런 대형 사고는 총사령부에 보고해야 했다. 7 8일 부터 9일까지 제183소총병사단과 제2전차군단 방어구역에서 일어난 사고도 보고되었다. 이때까지는 전선 전체를 통틀어 이정도로 대규모의 오폭 사고가 없었던 것 같다. 스탈린도 바로 다음날 이 사고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바투틴은 총참모부 부참모장 안토노프Алексей Иннокентьевич Антонов 상장으로 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국방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즉시 사실을 조사하여 책임 소재를 파악하라. 
2.야전군, 군단, 사단 지휘관들에게 이런 사고는 결코 용인되지 못한다는 점을 주지시키도록 하라. 또한 지휘관들에게 다른 병종과의 협동 작전을 보다 정확하게 조율하도록 하고 인접 부대와의 통신을 항상 유지하게 주지시키도록 하라. 조치를 취하는대로 보고하라.41)

소련 공군이 오폭을 하면 지상군 지휘관들은 아군임을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제2항공군 예하 부대들이 대공화기를 보유한 아군 부대 상공에서 오폭을 하면 소련 대공포 사수들도 어쩔수 없이 응사를 하게 됐다. 이제 소련 조종사들도 아군의 공격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쿠르스크 방어작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오폭이 심각한 수준에 달해 소련 보병들이 소련 공군을 두려워할 정도가 됐다. 소련 보병들은 제2항공군의 비행기들이 자신들을 폭격할 거라고 두려워해서 방어조치 차원에서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1943 7 14일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이 내린 명령문을 보면, 5근위기계화군단 제24근위전차여단 소속의 차량화소총병 중대들이 낮은 고도로 귀환중이던  Ил-2 지상공격기들에게 무질서하게 사격을 퍼부은 사례가 있다. 소련 보병들은 비행기의 동체와 날개에 붉은 별이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사격을 가했다.42) 프로호롭카 남쪽에서 작전을 하던 제69군 예하의 한 부대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 몇몇 소총병 대대장들은 방어선의 끝에 대공포판을 설치하는 것 조차 두려워했다. 소련 공군이 대공포판을 설치한 지역을 폭격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방어작전 기간 중 돌출부 남부에서 소련과 독일 양군이 공군을 운용한 양상을 살펴보면 독일군이 공군을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군 지휘부는 종심 깊은 방어선을 돌파할 때 지상공격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항공기의 성능을 개량하고 신형항공기를 개발해 대량생산 하는 한편, 지상군과 공군의 협력 체계를 구축해 하위 전술단위 지휘관들도 항공지원을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게 했다.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사단에는 사전에 설정된 축선에서 활동할 항공연락장교가 배속되어 있었다. 항공연락장교들은 무전기가 달린 장갑차를 배정받아 전장 한가운데서도 항공유도를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이렇게 해서 전장 상황이 급변하는 중에도 아군의 오폭을 방지하는 한편, 기갑부대가 공격하다가 아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대전차 방어지대를 만났을때 급강하폭격기와 지상공격기의 지원을 정확하게 유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의 경우에는 사단급은 커녕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 사령부 조차 공군과의 통신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몇몇 독자들은 필자가 소련 공군, 특히 제2항공군에 불리한 자료만 인용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소련 공군의 자료를 인용하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총참모부의 고위 장교 한명이 제2항공군 사령부의 쿠즈미체프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зьмичев 중령과 함께 작성한 보고서 제31호 “1943 7 4일 부터 9월까지 제2항공군이 전투 작전을 수행하면서 나타난 문제점”이다.

1943 7 4일 부터 적 공군은 기갑 및 기계화부대와 긴밀한 협동작전을 수행하며 아 지상군의 최전방에 대해 정기적으로 집중적인 공습을 가해왔다. 아군 전투기부대는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분투했으나 임무에 성공하지 못했다. 아군 전투기부대는 전투 초반 숫적 우세에 있었지만 주도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적 공군은 적이 장악한 지역의 상공에서 아 공군을 완전히 밀어냈으며 이후 공중전은 거의 대부분 아군 영역의 상공에서 일어났다. 적 공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대부분의 전투에서 아군 전투기부대가 숫적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적 공군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아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가 많다. 아군 전투기부대는 수많은 출격을 하면서(1943 7 5일 하룻동안 전투기부대는 907회 출격했다.) 방대한 양의 연료를 소모하고 있고, 조종사 개개인이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다. 아군 전투기 부대의 졸렬한 전투 성과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지상의 통제반이 항공기 유도를 잘 못하고 있다. 무선통신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으며 전투기 관제도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1943 7 5일 제8근위전투기사단장 라루슈킨Ларушкин 대령과 제205전투기사단장 넴체비치Немцевич 대령은 무전으로 전투기 부대를 통제하기 위해 지상관제소로 갔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 사단장은 전투기를 관제하기는 커녕 구경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43 7 5, 격렬한 항공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두 사단장은 지상관제소, 사단본부, 공중 어느 곳에서도 전투기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공중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2항공군사령부와 전투기군단 사령부는 전투기들을 관제할 지상관제 체계가 구축되지 못한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무선을 통한 지상관제 및 지휘 체계를 구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공중전이 전개되던 중요한 순간에 전투기부대는 지상 관제를 받을 수 없었다. 전투기조종사들은 지상으로 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고,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으로 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더 심각한 문제는 공중전 지휘가 순전히 책상 물림의, 관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전투기군단장과 전투기사단장, 참모들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서 공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전투기 조종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지휘관과 참모들은 공중전의 추이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아군 전투기 부대의 작전을 분석할 상태도 아니었다.전장에서 50~60km 떨어진 사령부의 지휘소에서 무전기로 공중전을 지휘하는 것은 공중전을 수행하는 조종사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전장의 상황과 임무 파악을 어렵게 했다.항공관측소Воздушного Наблюдения, Оповещения и Связи(ВНОС)가 아군 전투기부대가 없는 장소에 대규모의 적 폭격기 부대가 나타났다는 경보를 발령하면 전투기 사단 및 군단 지휘소에서는 무전으로 전투기부대에 원래 부여된 임무를 포기하고 적 폭격기를 요격하러 다른 공역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경우에 아군 전투기들이 적 폭격기를 요격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투기 부대가 다른 공역으로 이동하게 되면 이륙 전에 받은 제1차 임무는 물론 무전으로 받은 제2차 임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출격을 하고도 아무것도 못하고, 목적도 없고 성과도 없이 예산만 낭비했다. 
2.전투기 조종사들은 부대 단위로 공중전을 전개할 능력과 지식이 없었다. 2항공군은 1943 7 2일 쿠르스크 지구에서 귀중한 대규모 공중전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예하 부대들은 실전 경험을 정리, 연구하지 않아서 이를 통해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 공군 장교들은 대규모 항공전에 필요한 전술을 만들어낼 실무적, 이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강력한 집중 공격을 통해 대규모의 적 폭격기 집단을 요격해 분산 격파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적 폭격기 집단에 대한 공격은 대개 2~4대 단위의 소규모로 이루어졌다.그리고 전투기들은 한번 공격을 한 뒤에는 분산되었다. 한번 분산되고 나면 부대 단위의 작전을 할 수 없었고, 편대를 다시 조직하지도 못했다. 대부분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두 대 단위로 작전을 하거나 단독 행동을 하곤 했다. 편대장들은 예하 편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조종사들의 훈련 수준이 낮아서 편대를 재구성하기가 어려웠다. 1943 7 5일 소연방영웅 나자렌코 대위는 12대의 Ла-5 전투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중 4대만이 적 폭격기를 공격했다. 927전투기연대의 나머지 전투기 8대는 폭격기 요격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조종사들은 나자렌코 대위의 명령에 따르질 못했다. 결국 나자렌코 대위는 숫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우게 됐다. 나자렌코의 편대원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단일한 부대로 싸우질 못했다. 이로인해 아군은 큰 손실을 입은 반면 적의 손실은 경미했다. 조종사들은 전투기에 달린 무전기를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3.전투기 조종사들의 전술 훈련이 부족했다. 조종사들의 공중전 수완과 전술적 판단 능력이 떨어졌다. 또한 공격 의지도 부족했다. 
1943 7 5일 코로차 상공에서 4대의 Пе-2 폭격기가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작전하던 중 독일 Me 109 2대의 공격을 받았다. 아군 조종사들은 숫적으로 우세하다고 방심한 상태였다. 독일 전투기들은 공격할 기회를 노리다가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폭격기 2대와 전투기 1대를 격추시켰다. 적은 아무 손실도 입지 않았다. 
1943 7 8 8대의 Як 전투기가 프라바로트 지구로 향하던 중 2대의 Me 109와 조우했다. 아군 편대는 적 전투기들을 무시한채, 전투 대형을 취하지도 않고 그대로 임무를 속행했다. 적 전투기들은 아군 편대를 유유히 따라왔다. 적기는 공격 기회를 잡자마자 공격을 감행했고 두 차례의 공격으로 Як-1 3대가 격추됐다. 적은 아무 손실도 입지 않았다. 
전투기 부대의 적 탐색 방식은 매우 조악했다. 아군 전투기들이 초계비행을 하는 구역에서도 적 폭격기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아 지상군을 폭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1943 7 6 12대의 Ла-5 전투기가 야코블레포 지구에서 초계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때 18대의 Ju-88 폭격기가 야코블레포-오보얀 고속도로 일대를 폭격했다. 지상관제소는 전투기 부대가 적 폭격기를 요격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전투기들이 적 전투기와 교전하다가 이탈하는 기술도 부족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이탈했다. 교전 중 이탈하는 방식이 체계화 되지 못했다. 아군의 엄호가 없는 상태에서 이탈하는 경향 때문에 전투기 손실이 높았다.과거에도 그랬지만, 편대 구성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있다. 윙맨은 리더를 엄호해야 하지만 격추를 달성하려는 욕심 때문에 리더를 버리고 직접 적기를 추격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행동은 리더를 방해하고, 지원을 하지 않아서 적기의 목표물이 되게 만든다. 윙맨 역할을 하는 조종사들이 리더를 엄호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 소련 조종사들은 윙맨이 리더를 시야에서 놓치는 행위가 심각한 군율위반이라는 인식이 없다. 리더가 되는 과정이 체계적이지 않다. 윙맨으로 75~100회 이상 출격해 리더를 성공적으로 엄호해야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전투기 조종사는 능동적으로 적을 찾아서 교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군 조종사 중에는 이런 의지가 결여된 자가 많다. 아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매우 신중하게 교전을 하고, 간혹 교전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 조종사들이 전투기의 성능을 활용하지 못한다. 소극적으로 교전하는 결과 무방비상태가 되고, 적의 좋은 먹이감이 된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원인 중 하나는 각급 항공부대 지휘관들이 전투기부대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는 데 있다. 지휘관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는 훌륭하게 수행된 공중전 사례에 주목하지 않으며, 형편없이 수행된 전투 사례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때문에 전투기 조종사들이 실전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4.전투기 운용 방식에 대한 시야가 좁고, 전투기 운용 계획도 부실하다. 아군 전투기 부대는 아군 공역, 아군 부대의 상공에서 적 폭격기를 요격하고 있다. 전투기 부대가 교전이 시작되는 경계를 넘어 초계 비행을 수행하는 경우도 드물다. 적 폭격기들이 전선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전투기 부대를 적 공역 깊숙히 투입하지도 않는다. 아군 전투기들은 적 전투기들을 적의 공역에 묶어두고 요격하거나, 단독 또는 소규모 편대로 작전중인 적 폭격기들을 격추하기 위한 소탕 작전(Free Hunt)을 수행하지도 않았다. 기술적인 측면을 보면 아군 전투기들은 충분히 적 공역에 진입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제원표상으로 아군의 Ла-5 전투기는 Me109F형 보다 우수하고 Fw190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적 폭격기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할 때도 전혀 공세적이지 못하며, 전술적 혁신을 모색하지도 않고 있다. 전투기 부대는 작전 계획을 세울때 초계 비행을 중심으로 계획을 짤 뿐 제공권을 잡고 공중 우세를 달성하기 위한 전투를 계획하지 않는다. 
5.각급 부대 지휘부는 전투기 부대의 작전에 대해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전투기 부대의 작전 계획은 매우 조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공중전을 연구하지도 않으며 전투기 부대의 임무 수행을 감독하지도 않는다. 전투기 부대의 문제점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도 않으며, 공중전이 있은 뒤 작전 및 전술적 평가도 하지 않는다. 적의 전투기 전술을 연구하지도 않으며, 적의 전술에 대응할 전술을 연구하지도 않는다.
결론: 2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적 보다 더 많은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투기의 성능도 우수하지만 형편없는 지휘통제와 지휘부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제공권을 잡지 못하고 적 전투기 부대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전술적 역량을 통해 우리 지상군의 신뢰와 존중도 받지 못했다.45)

전쟁이 끝난 뒤 나온 책들은 쿠르스크 돌출부 상공에서 소련 공군이 우세했다는 공허한 말장난으로 가득차있다.46) 하지만 당시 공군 지휘관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다.

바투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서를 읽고 서명을 했다. 바투틴은 회의와 전문을 통해 예하 지휘관들에게 부대의 기강을 확립하고, 증원 부대가 방어구역에 도착할 때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고, 부대 배치를 바꾸기 전에는 상급 부대에 이동하게 될 작전 지역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도록 하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정찰을 하도록 하고, 인접 부대와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고, 공군과 지상군 간에 통신망을 확실하게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바투틴의 지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부대와 사령부에 있는 많은 장교들이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고 규율이 잡혀있지 않아 아군에 대한 오폭이 일어났다. 2항공군 사령부는 이런 문제점을 시정해야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예를들어, 2근위 타친스카야 전차군단 본부와 제1지상공격기군단 본부간에는 통신망이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작전이 시작된 직후 부터 제1지상공격기군단의 Ил-2 지상공격기들은 제2근위전차군단을 폭탄과 로켓으로 공격했고 심지어는 제2근위전차군단 지휘소까지 폭격했다.
3기계화군단에도 공군 연락장교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파견나온 공군 연락장교는 공지합동작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1지상공격기군단이 경험은 커녕 권한도 없는 초급 장교들을 공군연락장교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3기계화군단장 크리보셰인 장군은 쿠르스크 전투의 전훈을 분석하기 위한 제1전차군 사령부 참모진과의 회의에서 제2항공군과의 협동 작전 경험에 대해 평가했다.

“소련 공군은 극도로 중앙 통제화 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전차부대와 공군의 협동 작전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특히 지상공격기 부대는 아군의 위치를 알리는 지상군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아군을 폭격했다. 전투기 부대는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상군과 협력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주요한 원인은 군단에 자격을 갖춘 공군 연락장교들이 없었고, 공군 부대와 직접 연결된 통신망도 부족한데 있었다. 항공군단에서는 겨우 대위 한명을 연락장교로 보냈다. 모두가 그를 무시했다. 연락장교가 항공 지원을 요청해도 아무도 듣지를 않았다. 연락장교를 돌려보내는게 나았다. 연락장교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연락장교가 있건 없건 차이가 없었다. 항공지원을 못 받는건 똑 같았다. 공군 비행장도 너무 멀리 있었다. 보통 공군 비행장은 지상군의 최전선에서 50~60km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거리가 멀어 통신 상태가 나빴고 항공지원을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공군 지원이 필요없어질 때 쯤 되어서야 요청한 비행기들이 나타났다.47)

공군의 오폭 사고가 일어나면 지상군과 공군은 물론 스메르시 부서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사건의 개요와 원인을 구체적으로 조사할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라 향후 이러한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다른 곳에서 오폭 사고가 일어났다.

1943 7 11일 보로네지 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예하 야전군 및 포병 지휘관들에게 암호전문 12939호를 하달했다. 부대를 잘못 지휘하거나 아군과의 협동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7 8일 부터 9일 사이에 발생한 아군 부대간의 사격전, 아군 공군의 오폭, 아군 대공포병의 아 공군 공격”등의 사고를 7 14일까지 전선군 군법원에서 조사한뒤 결론을 내겠다는 내용이었다.48) 또한 야전군 및 포병사령부 지휘관들은 “아군과의 작전 협조와 통신 유지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9) 하지만 전선군사령부가 직접 경고를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선군사령부가 명령을 내린 날인 7 11일에 제69군 사령관 크류첸킨 중장과 그의 참모진은 후방지역에서 소련 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다음날인 7 12일에는 프로호롭카 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제69군 예하부대가 아군으로 부터 대규모의 오인 사격을 받았다. 이날의 사고는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부대와 총사령부 예비대로 대기하다가 투입된 제5근위전차군 간에 발생했다. 69군 사령관의 명령서를 살펴보자.

7 12 17시에서 18시 사이에 제5근위전차군 소속 제53독립전차연대는 노보-알렉산드로프스키 븨셀로크Ново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Выселок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연대는 (알렉산드롭카 북쪽의) 241.5고지에 도착하자 돌연 알렉산드롭카 방면에 배치되어 있던 제92소총병사단과 제96전차여단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군 지상군 부대끼리 전투를 벌이는 동안 지상공격기들이 제92근위소총병사단 방어진지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총참모부에서 파견나온 소콜로프 중령과 제35근위소총병군단 포병사령관이 개입한 뒤에야 간신히 아군간의 교전을 멈출 수 있었다.53독립전차연대는 알렉산드롭카를 지나서 진격하다가 적 전차와 교전을 하게 됐다. 그러나 잠깐 교전을 한 뒤 임무를 마치지도 못한 채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3독립전차연대는 후퇴하면서 분산되어 있던 아군 보병들을 태우고 돌아왔다. 53독립전차연대를 후속하던 대전차포 부대가 아군에게 포격을 가하지 않은 원인은 총참모부의 소콜로프 중령과 제35근위소총병군단 포병사령관의 통제 덕분이었다. 241.5고지에 지휘소를 두고 있었던 제96독립전차여단장 레베데프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Лебедев 소장50)과 제92근위소총병사단장 트루닌В. Ф. Тругнин 대령은 너무 늦게 개입해서 아군간의 교전을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53독립전차연대가 제92근위소총병사단 방어진지의 경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설명한 사고는 작전을 지휘할 책임을 가진 지휘관들이 무심하고 태만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들 지휘관들은 다른 아군 부대와의 작전 협조를 생각하지 않았고 지형정찰과 적 탐색 임무에 실패했다.51)

같은날 제2항공군의 지상공격기들이 제69군 소속 제48소총병군단의 지휘소를 여러 차례 폭격했고, 군단장 로고즈늬Зиновий Захарович Рогозный 소장과 군단 참모들도 공격을 당했다.(18 20분에는  Ил-2 22대가, 20 30분에는 Ил-2 6대가 공격해왔다.) 로고즈늬 소장은 소련 공군의 폭격을 피해 지휘소를 황급히 옮겼다. 7 13일과 14일에도 레스키에 있던 제48소총병군단 지휘소와 관측소가 소련공군과 독일공군의 폭격을 함께 받았다. 오폭이 계속됐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가 정리한 작전 문서뿐만 아니라, 군 검열기구도 바투틴에게 제출할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열기구의 보고서는 압수했거나 원인 불명으로 배달되지 못한 병사와 지휘관들의 편지를 검열해 군대 내의 동향을 파악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조사한 내용은 군 방첩기구를 거쳐 스탈린에게 까지 보고되었다. 보고서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경험자이며 보로네지 전선군 소속으로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한 한 병사의 편지가 있다. 검열관들은 이 편지의 내용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7근위군 제270소총병사단 소속 이그나토프Е. Я. Игнатов의 편지를 인용한다.

“나는 지금 쿠르스크주에 있어. 아침 부터 밤 늦게까지 전투가 이어지고, 많은 전우들이 내 곁을 떠났어. 더러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죽은 사람도 많아. 나도 7 22일에 부상을 당했어. 비러시아계 병사들은 정말 형편없어. 우즈베크, 키르기즈, 카자흐들이 그래. 이놈들 때문에 피해가 심해. 이놈들 때문에 독일 저격병들이 장교와 정치위원, 그리고 러시아인 병사들을 저격해서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 포탄이 쏟아지면 우즈베크, 키르기즈, 카자흐들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움직이질 않아. 그러니 누군가가 그놈들에게 달려가서 일으켜 세워줘야 해. 이때 적 저격병의 목표가 되는 거야. 내 생각에 독일놈들은 아군이 공격을 할때 정치위원과 장교들이 선두에 선다고 배운것 같아. 아 물론 당연히 장교들이 선두에 서야지. 하지만 독일 저격병들은 부대의 선두에 선 장교들을 노린단 말이야. 날마다 격전이 계속되고 있어. 이제 부대에 남은 병력도 X명 밖에 안돼. 우리 부대는 붕괴되고 있어. 이틀동안 식사는 커녕 물 조차 배급받지 못했어. 이건 전투력에 영향을 끼친다고. 특히 지속적으로 공격을 할때 더욱 그렇지.후방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과 지휘관들만 생각하지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아. 거짓말과 기만, 잡담이나 늘어놓을 뿐이지. 과거의 전쟁과 비교해보자고. 나는 1917년 부터 1918년에도 참전했는데 이때 병사들이 내전때 보다 훨씬 규율이 잘 잡혀있었어. 그야말로 강철 같았지. 요즘 ‘우리는 민주화되어 있어.  붉은군대에서는 병사들을 지도하는데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 초급장교들은 물론 고급장교들까지 그모양이야. 그리고 뭔가를 한다 해도 감독이 제대로 되질 않지. 보충되는 신병들은 제대로 훈련받지를 못했어. 나같은 고참병은 붉은군대 병사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잘 알아. 우리 붉은군대 병사들은 단정하지가 않아. 뭐 장교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요즘 전쟁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주 실망스러울거야. 그리고 장교들이 잔인하다던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되겠지. 게으른 태도를 산딸기 처럼 사방에서 찾아볼 수 있어. 간단하게 말할께. 위선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어. 예를 들어볼까? ‘야삽은 병사의 친구다’라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야삽도 지급받지 못하고 전투에 나가. ‘야삽을 보급해 주겠다.’ 라고 약속하지만 이런 소리는 너무 신물이나서 아무도 안믿어.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해. 본부에 있는 놈들은 그냥 병신들이야. 그저 아첨을 하고 고자질이나 하는 얼간이가 본부에 있지.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믿을게 없지.52)

필자는 이런 부류의 인물은 대의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군인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과대평가하고, 여기에 의존해 붉은군대가 처한 상황을 평가하고 있다. 이그나토프의 판단은 ‘내부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명한 소련군사사가이자 쿠르스크 전투 참전용사인 콜투노프Г. А. Колтунов 대령은 필자에게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내가 대조국전쟁때 전투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모든 군인이 자신이 들어앉은 개인호를 중심으로 전투를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투에 참전했거나 목격한 사람, 특히 군인의 진술만을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낼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콜투노프씨의 조언을 명심하면서 소련 군인을 평가해보자. 이 평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러시아 땅에서도 싸웠던 독일 장군 귄터 블루멘트리트53)가 한 것이다. 블루멘트리트는 저명한 영국 군사이론가 리델하트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1941~45년 기간의 붉은군대는 제정 러시아 군대 보다 훨씬 강인한 군대였습니다. 붉은군대는 사상을 위해 광적으로 싸웠습니다. 사상은 붉은군대에 불굴의 의지를 주었습니다. 붉은군대와 싸우면서 우리 군대도 강인해졌습다.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격언은 동부전선에 잘 들어맞았지요. 붉은군대의 규율은 제정 러시아 군대 보다 훨씬 엄했다고 생각합니다.54)

이 글에서 소개한 내용들이 보로네지 전선군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로 편향되어 있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 이 글에서 인용한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쿠르스크 방어작전의 추이와 아군의 전투 손실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용한 문서는 모두 소련군 참모장교들이 전장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고 실수를 교정하고 향후 유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지 소련군을 폄하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 병과간 작전 조율과 ЧП 사고 문제는 특별히 보로네지 전선군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문제들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배치된 전선군 뿐만 아니라 붉은군대 전체에 걸쳐 조금씩은 있었던 문제들이다. 다른 나라의 군대도 같은 문제를 경험했다. 필자는 이 문제를 사병에서 연대장에 이르는 대조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이야기 한 일이 있다. 참전용사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전선에서 직접 경험한 현실이었다. 모순된 사실, 아군간의 오인 사격, 대대에서 사단-군단에 이르기 까지 나타난 다른 병과 및 인접 부대와의 협동 작전 문제는 사실 거의 매일 발생했다. 전선이 안정적인 경우에는 이런 사고가 드물게 일어났다. 하지만 공세작전이나 기동방어 작전에서는 이런 사고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고, 심지어는 같은 사단이 여러번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특별히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때는 따로 기록을 하지도 않았고 지휘계통을 통해 보고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고의 원인은 단순한 우연, 부대간 통신망의 부재 같은 초보적인 실수, 사병과 지휘관들의 무책임함과 낮은 훈련 수준 등 여러가지였다. 이런 사고는 언뜻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참전용사들은 모든 장병들이 규정을 준수하도록 만들고, 교범과 군사교육 내용을 숙지하도록 하고, 이것을 각급 지휘관들이 철저히 감독하도록 만들고, 좁은 지역에 많은 병력이 몰리지 않도록 통제한다 하더라도 이런 사고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불과할 거라고 지적했다. 아군간의 교전 같은 사고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려 한다. 대조국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 사람들의 논리와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을 뒤로 돌려 당시의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한 불가능하다. 오늘날까지도 붉은군대 수뇌부 내부의 상호 관계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회고록 같은 자료로는 군단 및 사단급 지휘부의 지휘통제 방식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 대조국전쟁 시기 붉은군대 장병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전선군 사령부와 국방인민위원회, 총사령부의 자료 중 상당수는 여전히 기밀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이 꾸준히 노력하고 시간이 흐른다면, 아주 미시적인 내용을 담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대조국전쟁사를 쓰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밀 자료들은 최근에 들어와서야 조금씩 공개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새로 공개된 사료를 통해 대조국전쟁기의 격동적인 실상을 탐구하여 전투 작전에 영향을 끼쳤던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고 쿠르스크 전투와 같은 결정적인 사건에 관여한 핵심 인물들의 의사 결정 과정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석
1)TsAMO RF, F.3108, Op.1, D.7, L.103.
2)1943 4 30일 시바코프 대령이 제71근위소총병사단장에 임명됐다. 체르노프 대령은 1943 4 30일까지 제90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있었다. 네크라소프 대령은 19435 17일 제52근위소총병사단장에 임명됐다. 바크소프 대령은 1943 6 30일 제67근위소총병사단장에 임명됐다.(TsAMO RF, 간부 복무이력철)
3)Voenno-istoricheskii zhurnal, No.7(2013), pp.26~27을 참고하라.
4)TsAMO RF, F.203, Op.2843, D.520, L.20.
5)TsAMO RF, F.1207, Op.1, D.138, L.150.
6)B. H. Liddell Hart, Na druguiu storonu kholma, (Moscow, AST, 2014), pp.338~339. 이 책은 1948년 처음 간행된 리델 하트의 The German Generals Talk: Startling revelations from Hitlers high command의 러시아어 번역판이다. 해당 인용문은 하퍼 페레니얼 출판사에서 1975년에 간행한 판본의 222~223쪽에 있다.
7)Ibid., p.340. 1975도 영문판 p.223.
8)TsAMO RF, F.42.gv.sd., Op.1,D.76, L.237.
9)TsAMO RF, F.335, Op.5113, D.235, L.53.
10)TsAMO RF, F.1.gv.TA., Op.3072, D.13, L.15.
11)TsAMO RF, F.1.gv.TA, Op.3070, D.4, L.19.
12)세묜 모이세예비치 크리보셰인(1899~1978) 1943년에 중장 계급이었고 1945년 소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18년 부터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1941 3월에는 하리코프 군관구의 제25기계화군단장이 되었다. 1941 7월 제25기계화군단은중부전선의 제21군에 배속되었다. 1941 10월에는 붉은군대 전차-기계화총국의 군사훈련처장이 되었다. 1943 2월에는 북서전선군 소속 제1전차군예하 제3기계화군단장에 임명됐다. 1전차군은 1943 4 28일 보로네지 전선군으로 배속변경됐다. 1943 7 6일 크리보셰인의 제3기계화군단은 제6근위군의 제2방어선에 배치되어 오보얀 고속도로 축선을 방어했으며 동시에 독일 제48기갑군단과 제2친위대 기갑군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기계화군단 예하 여단들은 이후 10일에 걸쳐 우세한 독일군에 맞서 이들이 작전 기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돌파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보얀 축선에서 치열하고 용맹하게 싸운 끝에 예하 여단들은 모두 근위 칭호를 받았으며 제3기계화군단은 제8근위기계화군단으로 개칭됐다. 크리보셰인은 폴코보데츠 루미얀체프 작전에서도 군단을 훌륭하게 지휘했다. 그는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해 2급 수보로프 훈장을 받았다. 그는 1944 2월 부터 전쟁이 끝날때 까지 제1기계화군단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기계화사단 지휘관을 역임하다가 한 군관구의 전차-기계화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크리보셰인은 1953년 퇴역했다.
13)TsAMO RF, F.8.gv.tk., Op.1, D.41, L.13.
14)TsAMO RF, F.1207, Op.1, D.64, L.64.
15)Russkii arkhiv: Velikaia Otechestvennaia voina, No.23(12-3) (Moscow: Terra, 1999), p.126.
16)표트르 일리치 슐젠코는 1943년에 중령 계급이었다. 그는 1910년에 태어나 1932년 군에 입대했다. 그는 1938년 오룔기갑학교를 졸업해 1941년 부터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독립수색대대 선임참모, 130전차대대 부대대장, 1전차군단 정보참모부 차장, 4전차군단 정보참모부 정보참모, 60군 정보참모부 차장 등이다. 슐젠코는 남서전선군, 브랸스크전선군, 보로네지전선군 등에서 복무했다. 그는 1943 2월 부터 보로네지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의 정보참모였다. 그는 1945 3월 전차-기계화학교에 입학했다. 1945 5 29일에는 제8기계화군단 소속 제23전차사단 정보참모가 되었다.
17)세르게이 스테파노비치 마랴힌은 1964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911년에 태어나 1931년에 입대했다. 그는 1941년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해 1941 7월 제50전차사단 제99전차연대의 대대장이 되었다. 1941 9월에는 제150전차여단 참모차장, 1942 1월에는 같은 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1942 4 22일에는 붉은군대 전차-기계화부대 총국에 배치되었고, 1942 8 4일 부터 1943 11 20일까지 보로네지 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 참모장이 됐다. 1943 11 27일에는 제4근위전차군 작전참모가 되었다. 1945 3 17일에는 제4근위전차군 제93독립전차여단자에 임명됐지만 3 24일에는 다시 작전참모로 복귀했다. 1945 6 20일 제10근위전차사단 제81근위중전차연대장에 임명됐다.
18)TsAMO RF, F.203, Op.2851, D.22, LL.232~233.
19)TsAMO RF, F.1gv.TA, Op.3109, D.5, L.28.
20)TsAMO RF, F.1207, Op.1, D.138, L.150.
21)TsAMO RF, F.1gv.TA, Op.3063, D.20, LL.34~35.
22)TsAMO RF, F.7gv.A, Op.5330, D.60, L.13.
23)TsAMO RF, F.1gv.TA, Op.3603, D.20, LL.34~35.
24)TsAMO RF, F.285sp, Op.46981, D.1, LL.132~133.
25)TsAMO RF, F.48sk, Op.1, D.44, L.49.
26)TsAMO RF, F.59gv.tbr, Op.1, D.6, LL.21~22obr.
27)TsAMO RF, F.38A, Op.9027, D.50, L.375.
28)TsAMO RF, F.8 gv.tk, Op.1, D.67, L.132.
29)2전차군단은 1943 9 19일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제284호에 의거해 제8근위전차군단으로 개편됐다.
30)야코프 티모페예비치 코브자르(1918~1943) 1942년 상위로 진급했다. 1938년 붉은군대에 입대했다. 1941년 소위로 임관했다. 1941 6월 부터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제6전차군단 제200전차여단 제192전차대대의 중대장으로 마르스 작전 당시 공훈을 세워 붉은별 훈장을 받았다. 그는 세 차례 부상을 당했다. 그는 1943 7 6일 부터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다. 소련 자료에 따르면 그가 지휘한 전차 중대는 7 8일 오보얀 축선의 베르호펜예 지구에서 독일전차 28대와 돌격포 9대를 격파했다. 이 중 17대가 코브자르 상위의 전과였다고 한다. 1990 10 4일 소련 최고소비에트 칙령으로 그는 사후에 소연방 영웅이 되었다.
31)http://sovkub.narod.ru/kobsar.htm
32)TsAMO RF, F.3400, Op.1, D.23, L.97; D.31, L.40.
33)TsAMO RF, F.4gv.tbr, Op. 1, D.26, L.16.
34)TsAMO RF, F.355, Op.5113, D.235, L.33.
35)Ibid.
36)Ibid.
37)Ibid.
38)TsAMO RF, F.426, Op.10753, D.65, L.15.
39)Ibid., L.18.
40)TsAMO RF, F.8gv.tk, Op.1, D.233, L.13.
41)TsAMO RF, F.48sk, Op.3409, D.16, L.511.
42)TsAMO RF, F.3415, Op.1, D.48, L.12.
43)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미체프(1907~19??). 1931년 붉은군대에 입대해 할힌골 전투와 소련-핀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1939년 용맹 메달을, 1940년 붉은별 훈장을 수여받았다. 대조국전쟁기에는 1942 5월 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세운 공훈으로 대조국전쟁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다. 총참모부의 한 장교와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의 코스틴 대령이 1943 7 30일 작성한 추천서는 다음과 같다. “보로네지전선군의 1943 7월 방어작전 기간 중 쿠즈미체프 동지는 탁월한 지휘능력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는 갖은 위험을 무릅쓰며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우리 공군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제2항공군 사령부와 상급 부대가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쿠즈미체프 동지가 문제점을 해결한 부대의 조종사들은 적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혔다.
44)[영어번역자 주석] 의회도서관의 러시아어 알파벳 표기법에 따라 Iak로 표기하면 ‘전투기군단’의 약자와 혼동될 수 있으므로 Yak로 표기한다.
45)TsAMO RF, F.203, Op.2843, D.342, LL.181~184.
46)S.A.Krasovsky, Zhiznv aviatsii(Moscow: Voenizdat, 1968), p.174.; Kurskaia bitva:Vospominaniia, statI, 2nd ed.(Voronezh: Tsentralno-Chernozemnoe izdatelstvo, 1973), p.190.
47)TsAMO RF, F.8gv.mk, Op.1, D.41, LL.14obr, 15obr.
48)TsAMO RF, F.203, Op.2843, D.489, L.61.
49)Ibid.
50)빅토르 그리고르예비치 레베데프(1901~1979) 1943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9년 붉은군대에 입한 러시아내전 참전용사로 핀란드-소련 전쟁에도 참전했다. 1941 3월 레닌그라드군관구 제24전차사단 제24전차연대장에 임명되어 개전 초기 이 부대에서 싸웠다. 1941 11월 부터 1942 2월까지 레닌그라드전선군 제8군 예하 제107독립전차여단장을 역임했다. 그뒤 약 1개월간 제87독립전차여단장직을 맡았다. 1942 3월 제96독립 첼랴빈스크 콤소몰 전차여단장에 임명됐다. 1942 4월 제96독립전차여단은 보로네지전선군 제6근위군에 배속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직전 제96독립전차여단은 제6근위군 좌익의 벨고로드-오보얀 고속도로 축선에 배치되었다.  여단은 전투 첫날 부터 제2친위대기갑군단을 상대로 세베르스키 도네츠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7 5일에서 8일 사이에 여단은 쇼피노와 테르놉카의 교량을 방어했다. 이후 7 7일에서 12일 사이 켐프분견군의 제3기갑군단을 상대로 코로차 축선에서 활약했다. 여단은 7 11일 제69군이 북도네츠강과 라줌나야강으로 퇴각하는 것을 엄호하다가 포위됐지만 이를 돌파해냈다. 1943 7 15일 레베데프 소장은 제1전차군 제6전차군단 부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는 폴코보데츠 루미얀체프 작전에 참가했으며 하리코프 지구와 하리코프 남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6전차군단의 선봉 2개여단의 작전을 조율했다. 그러나 보로네지전선군 전차-기계화부대 사령부와 갈등을 빚어 쿠르스크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49년 ‘새로이 밝혀낸 사실에 입각하여’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전출을 요청하여 1943 11월 제7전차군단 제54근위전차여단장이 되었다. 그는 1944 1월 중상을 입은 뒤 붉은군대 차량화총국에 배치됐다. 1944 11월 부터 전쟁이 끝날때 까지 총사령부 직할대인 제4수송여단에서 근무했다. 1953년 퇴역했다. 전후에는 교사가 되었다.
51)TsAMO RF, F.48sk, Op.1, D.2, L.17.
52)Ognennaia duga:Kurskaia bitva glazami Lubianki(Moscow: Moskvovskie uchebniki i Kartolitografia, 2003), pp.90~91.
53)귄터 블루멘트리트(1892~1967). 1944년 육군중장으로 진급했다. 1911년 군에 입대했다. 1914년 부터 1917년까지 소대장에서 대대장 부관 등을 역임했다. 1918년 대위로 진급해 연대장 부관이 되었다. 전쟁 중 부상을 입었다. 1940 10월에 제4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1 6 22일 부터 독소전쟁에 참전했다. 벨루시아 전역과 모스크바 전투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세운 공훈으로 독일십자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1942 1월 육군본부 제1참모부장에 임명됐다. 1942 9월 부터 전쟁이 끝날때 까지 서부전선에서 활동하면서 군단장, 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최종적으로는 1945 4월 부터 5월까지 블루멘트리트 군집단(Armeegruppe Blumentritt)을 지휘했다. 기사십자훈장 수훈자이다. 1945 6 1일 부터 1948 1 1일까지 영국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54)B. H. Lidell Hart, Na drugoi storone vysoty(Moscow: AST, 2014), p.343. 이 책은 The German Generals Talk의 러시아어판이다. 영어판에는 해당 구절이 225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