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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스탈린그라드 삼부작 번역 기획안을 넣었을 때 제출했던 번역문의 일부


예전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일이 떠오른 김에, 6년전 출판사 몇곳에 보냈던 원고의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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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수하야 베레이카 강 일대, 1942 7 23

독일군은 리쥬코프(A. I. Liziukov) 소장을 세 방향에서 조여가고 있었다. 리쥬코프의 지휘를 받는 제2 전차군단의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있었고 그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리쥬코프는 3주전 까지만 하더라도 제5전차군의 지휘관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군단에 준하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제5전차군을 편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제5전차군을 전차 641대로 증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지를 막 점령한 독일 48기갑군단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제5전차군에게 남진하여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돈 강에 인접한 주요 도시였던 보로네지는 독일군이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와 남쪽의 카프카즈로 진격하는데 아주 적절한 북쪽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투의 중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리쥬코프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독일군의 기갑사단 한 개 뿐이라고 믿었으며, 5전차군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강행군 중인 보병사단들의 증원을 받기 전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독일군의 선봉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였다.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 장교 중에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전투에서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리쥬코프의 전차군 사령부는 편성된 지 겨우 6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차군 예하의 기갑사단급 부대였던 3개 전차군단은 4월에 막 편성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한 번의 작전에서 3개 전차군단은 커녕 3개 전차여단을 연계시켜 운용할 능력조차 없었다. 세 개의 전차군단은 강력하게 공격을 집중하는 대신 7 6일부터 10일 사이에 따로 따로 전투지역에 도착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맞닥뜨렸으며 곧 수개의 보병사단이 여기에 증원되었다. 독일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리쥬코프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리쥬코프의 상급자들은 그를 도울 방도가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늘 하던대로 전투를 미시적인 부분 까지 통제하려 했으며 소련군 기갑국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구체적인 지침을 연달아 내려 리쥬코프의 행동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그동안 제5전차군을 지휘하는 전선군 사령부(집단군에 해당하는 소련군 부대단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령을 바꾸고 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은 연달아 세명이 교체됐다. 리쥬코프와 그의 예하 지휘관들이 이 와중에 교체된 지휘관이 내렸던 지시를 따르려고 조치를 취하면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쥬코프는 독일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항공기를 집결시켜야 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성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7 15일에 전차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리쥬코프를 전차군단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계속했는데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7 20일이 되자 제9기갑사단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들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의 반격 끝에 7 21일에서 22일에 걸쳐 소규모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으나 한 개의 소총병사단과 선봉을 맡은 리쥬코프의 제2전차군단에 소속된 두 개 전차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부대는 곧 독일군의 보병 및 기갑 부대에게서 세 방향으로 포위당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리쥬코프는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으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 블라소프(A. A. Vlasov) 중장의 부사령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통해 처음으로 소연방영웅의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7 23, 리쥬코프는 1942년 한여름에 3주 동안 실패만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브랸스크 전선군이 반격을 위해 편성한 특수작전집단 지휘관인 치비소프(N. E. Chibisov) 중장은 리쥬코프에게 독일군의 후방 깊숙히 고립된 제2전차군단의 두 전차여단을 찾아내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쥬코프는 7 23일 오전 9시에 군단 정치위원과 함께 KV 중전차에 올라탔다. 그는 볼샤야 베레이카에 있는 군단사령부에서 직접 전차를 지휘해 남쪽으로 향했고 수하야 베레이카 강을 건너 그의 두 전차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돌파하려 했다. 리쥬코프의 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에서 조금 못 미친, 188.5 고지에서 서쪽으로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레뱌즈예 마을 남쪽의 숲에서 대전차포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된 전차는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고 리쥬코프는 전차 승무원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치를 열고 탈출하던 도중 조종수는 기관총에 부상을 입었고 무전수는 전사했다. 리쥬코프는 전차에서 탈출하다가 포화에 휩쓸려 전사했다.

독일군은 제5전차군과 그 예하의 군단과 여단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제각각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련군의 참모 역량과 지휘관들의 능력에 대한 경멸감을 더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격의 기세가 둔화되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리쥬코프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지 불과 네 달도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소련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그들이 독일의 적수들과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에 실린 발레리 자물린의 ‘Could Germany Have Won the Battle of Kursk if It Had Started in Late May or the Beginning of June 1943?’을 번역한 것 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 장성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서방 학자들이 쿠르스크 전투의 패인을 거듭된 작전 연기로 인해 소련군이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것 입니다. 꽤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번역을 해봤습니다.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발레리 자물린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이나 6월 초에 벌어졌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이 1943년 5월 부터 6월까지 공세를 여러차례 연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특히 서구 역사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타델레 작전이 처음 연기된 것은 194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이 아직 공세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심지어 제9군은 공세를 위해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킬 시간 조차 없었다.) 이때는 모두가 공세를 연기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5월 4일에 열린 쿠르스크 공세에 관한 회의에서 공세를 다시 연기할 뜻을 밝히고 이것을 5월 6일에 공식적으로 명령함으로서 공격일이 6월 12일로 다시 연기되자 독일 국방군 수뇌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는 그가 43년 하계공세의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한 티거 전차와 판터 전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을 연기하는 것은 계속됐다. 독일의 군수산업계는 1943년 5월은 물론 6월의 첫 10일 동안에도 티거와 판터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또다시 공세를 6월 21일로 연기했다가 다음에는 7월 3일로 연기했다. 히틀러는 6월 25일이 되어서야 치타델레 작전의 개시 일자를 7월 5일로 확정했다. 바로 이날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 날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독일군 장성들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부터 공세를 거듭해서 연기한 것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육군 원수였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1951년에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를 4주나 늦게 시작했으며 ‘독일군 지휘관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공세가 너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1) 1943년 7월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벨고로드 방면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펼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955년 독일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클라이스트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치타델레 작전이 최소한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실시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이러한 주장은 주로  6월 초 까지 소련군은 겨울 전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전력도 크게 감소한 상태였지만 6월에 공세를 지연시킴으로서 소련군 수뇌부가 소모된 일선 부대들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게 됐다고 설명한다.
학계에서는 미국의 스티븐 뉴튼Steven NewtonKursk:The German View라는 저작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중부전선군을 공격한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의 자료에 근거해 이 주장을 학술적으로 가다듬었다.3)  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통계들, 특히 소련군의 각 부대별 전력에 대한 수치들이 모두 다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이 글에서는 최근 러시아 연방군 문서보관소에서 공개된 쿠르스크 전투 시기 붉은 군대의 기밀 해제된 자료들을 통해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뤄보기로 한다. 

소련군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승리를 거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 번째 이유는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에 투입된 부대들의 준비태세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최고사령부가 대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1943년 4월 부터 6월에 걸쳐 방대한 규모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첫 번째 이유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1943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그리고 1943년 7월 오룔과 벨고로드 방면에서 공격해온 독일국방군의 주공을 직접 맞아 싸운 각 야전군의 전력 보충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5월 쿠르스크 일대에 배치된 소련군의 준비태세가 높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서구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하계전역 계획과, 작전이 잠시 중단된 봄 기간에 쿠르스크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1943년 4월 12일 크렘린에서 스탈린, 소련군 부사령관 주코프 소연방 원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소연방 원수, 부참모장 안토노프 상장의 참석하에 열린 회의에서는 봄의 라스푸티차가 끝나고 땅이 마르는 즉시(대략 5월 경) 독일 국방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취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5월까지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을 최대한 보충하도록 하고, 해당 전선군의 군사위원회는 방어작전 계획을 수립하는데 총참모부와 긴밀히 협조하도록 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각각 4월 25일과 28일에 방어준비계획을 완성했다고 보고했다. 최고사령부는 두 전선군사령부에서 제출한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 계획을 승인하고4) 5월 10일까지 예하 부대들이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자를 각 사령부에 통보했는데 그 날자는 적어도 1943년 6월 1일 이내일 것이라고 보았다.5)
1943년 4월 12일에 결정된 사안들이 5월 10일까지 완료된 덕분에 소련측은 기본적으로 독일군이 쿠르스크 지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상대로 언제든지 성공적인 방어전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6월초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전력이 이미 다음달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때 확보하고 있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후술할 통계수치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정확하게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30일 로코소프스키 상장6)이 지휘하는 중부전선군에는 총 304,464명의 장교와 사병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5월 5일까지 여기에 61,167명이 증가해 총 365,641명이 되었다.7)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중부전선군 병력의 7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같은시기에 독일 제9군의 주공을 상대한 푸호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13군의 병력은 42,552명에서 114,456명으로 증가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85퍼센트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병력이 증가한 주된 이유는 제13군에 3개 사단이 증원된데 기인하지만 원래 소속되어 있던 사단의 병력도 18퍼센트로 대폭 증가했다.(평균 6,378명에서 7,527명으로) 소련 제13군이 하계 전역을 준비하던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보충병력을 받은 시기가 바로 1943년 4월이었다. 5월 29일까지 제13군에 추가로 14,701명이 증원되어 총 병력은 129,157명에 달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 한편 중부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말 451,179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되던 날 확보하고 있던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8)
바투틴 원수가 지휘하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 보충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병력은 4월 5일에 208,391명이었는데 5월 5일까지 143,068명이 증원되어 총 351,459명 또는 7월 5일까지 확보하기로 계획한 기준 병력의 84퍼센트에 달했다.9) 4월 5일에서 5월 5일까지 독일군의 주공 축선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된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에 30,262명의 보충병력이 배치되었고 총 병력은 장교와 사병 72,836명에 달했다.(예하 소총병 사단의 평균 전력은 5,982명에서 7,666명으로  28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조공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배치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중장의 제7근위군은 9,047명의 보충병력을 받아 총 병력이 67,231명으로 증가했다. 제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 사단의 평균 병력은 5,965명에서 7,600명으로 27퍼센트 증가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30일 기준으로 409,975명으로 증가했다.(7월 5일 당시 병력의 98퍼센트)  그리고 제6근위군과 제7근위군의 병력은 6월 5일 기준으로 각각 장교 및 사병 79,937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100%)과 71,332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93퍼센트)으로 증가했다.
포병 전력의 증강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중부전선군과 여기에 배속된 제13군의 야포와 박격포 숫자는 5월 6일에 이미 1943년 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에 달했다.(로켓포는 제외한 수치이다.) 5월 29일 중부전선군은 4,544문의 야포 및 대전차포와 7,161문의 박격포를 보유했는데 이것은 각각 7월 5일 보유량의 87퍼센트와 89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제13군의 좌익을 방어하며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낸 제70군은 야포 796문(7월 5일 보유량의 93퍼센트)과 박격포 1,280문(7월 5일 보유량의 98퍼센트)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 보충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부전선군은 5월 3일 기준으로 674대의 전차와 38대의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0) 이것은 7월 5일 보유량의 4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예하의 제13군은 137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1)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보유량의 64퍼센트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전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 원인은 1943년 겨울과 봄 전역에 투입된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기동부대들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던데 있다. 일부 전차군단은 총 전력이 완편 상태의 전차대대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문에 최고사령부는 3월말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소속의 기동부대들을 최우선적으로 증강하라.12)  4월 내내 공장에서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들은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에 최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이 덕분에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증강되었다. 예를 들면 1943년 4월 1일 부터 4월 15일까지의 불과 2주 남짓한 시기에 보로네지전선군 소속의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은 219대의 신품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6,432명의 병력을 보충 받았다.13)  그 결과 4월 9일에 276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던 보로네지 전선군은 4월 21일에 540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에 더해 전선군 소속의 야전정비부대들도 파손된 차량을 열심히 수리했다. 여기에 더해서 최고사령부는 4월 28일자로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중장의 제1전차군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시켰다. 북서전선군에 배속되어 있던 제1전차군은 3월에 쿠르스크 지구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제1전차군과 더불어 다른 독립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되었다.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은 5월 5일에 거의 완편상태에 도달하여 48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7월 5일까지 보충용으로 보급받은 기갑차량은 61대에 불과했다.14)
그래서 5월 초에는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전선군 보다 기갑전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5월 15일 기준으로 보로네지전선군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 1,380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수량의 76퍼센트에 해당했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의 기갑차량 보유량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했다. 6월 5일에 중부전선군은 제13군 소속의 기갑차량 171대(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를 포함해 총 1,216대(7월 5일 보유량의 72퍼센트)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다.15) 

서방의 저명한 군사학자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적 차원에서 공자가 방자에 대해 최소한 3배에서 2배의 숫적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여러 군사이론에서 말하는 공리일 뿐만 아니라 소련이 전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16) 히틀러는 치타델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기갑전력 규모에 대하여 논해 보자. 예를들어 1943년 5월 4일에 독일 제9군이 배속된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 442대의 전차(3호전차와 4호전차, 티거는 없었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71퍼센트인 314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 같은 날 남부집단군은 1,087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67퍼센트인 728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17) 그러므로 이미 1943년 5월 시점에서 이 중요한 기갑전력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의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1.5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돌출부 남쪽의 소련군은 1.3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군에게 불리한 상황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치타델레 작전에 부정적이어서 이 작전을 ‘멍청한 짓’이라고 했던 제6기갑사단장 휘너스도르프 장군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전체 작전이 ‘부대 지휘의 기초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뉴튼이 모델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주장한 것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주장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뉴튼은 1943년 5월 초 모델이 히틀러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독일 제9군과 소련 중부전선군의 기갑전력 비율을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뉴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일측의 정보평가는 소련 중부전선군이 1943년 4월말에서 5월초 사이에 전차와 자주포를 1,500여대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는 1,0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정보평가는 모델이 공세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치명적인  오류였다. 모델은 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1,500여대를 가진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세에 필수적인 기갑전력, 특히 판터와 티거를 증원해 달라고 요청할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자신 보다 200여대 정도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공세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제9군은 공세를 늦춘 결과 기갑전력이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소련군은 거의 두배나 늘어났다.” 

가장 먼저, 뉴튼이 제시한 수치와 양군의 전력비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월 초에 독일 제9군이 보유한 전차는 800여대가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전체를 통털어도 그 절반에 불과했으며 소련 중부전선군은 이에 대해 거의 1.5배나 되는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중부전선군은 674대, 독일 중부집단군은 442대 였다. 두 번째로, 유명한 1943년 5월 4일 뮌헨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모델이 보낸 서한을 회람하고 공세를 5월에서 6월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제9군에 기갑전력을 증원하는 문제는 회의의 주요 안건이 아니었다. 애초 부터 독일 제9군은 그리 많은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기갑전력은 남부집단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델의 제9군에 기갑전력을 대규모로 증원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모델은 이미 4월 초 부터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만슈타인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포병 및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전투공병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될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은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방어선이 강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불편한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제1파 공격부대가 소련군의 주 방어선과 제2방어선을 돌파해 기갑부대가 작전 공간에 돌입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제9군은  이미 5월 무렵에 방어선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을 돌파한 뒤 소련군의 방어선 종심 깊숙히 공세를 확대하는데 투입할 최소한의 기갑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소련 중부전선군의 방어선을 확실히 돌파하기 위해서 보병의 진로를 열고, 야전 축성을 격파하고, 역습에 나설 소련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중전차를 제1파 공격부대에 배속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43년 4월 초 독일 육군본부는 그달 말 까지 제9군에 티거 전차를 배치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5월 3일 까지도 티거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다. 즉 모델은 소련군의 기갑전력이 독일 제9군 보다 1.5배 우세해서 더 많은 기갑전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티거, 판터, 페르디난트와 같은 중장갑과 강력한 화력을 가진 기갑차량을 요구한 것 이었다.그리고 필자는 미국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모델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정원에 미달하는 상태였던 보병사단의 보병 전력을 보충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찾았다.18)  보병사단의 병력 보충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4월 20일에 처음으로 쿠르스크 공세 개시일을 연기했다.19) 그래서 모델 상급대장은 소련군의 방어진지 구축 상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을 첨부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내 공세 자체를 취소하던가, 아니면 보병사단에 병력을 보충하고 중전차를 보급하는 작전적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고 했다.그러므로 모델이 소련 중부전선군의 실제 기갑전력 규모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개시할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가 없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1943년 5월 상순에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전투력을 보충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각 사령부의 보고서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병력과 장비가 전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작전 부대에 배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전선군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무기와 장비 중 상당수는 여전히 보급창에 집적되어 있거나 열차편으로 하역될 기차역을 향하는 중이었다. 예를들면, 바투틴은 1943년 5월 11일 최고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보로네지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방어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췄다. 제38, 40, 6근위군, 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사단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8,000명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제69군 예하 소총병사단들의 병력은 6~7,000명 수준이다. 제35근위소총병군단20) 소속 사단들은 완편상태이다. 장비의 대부분은 수일 내로 철도편을 통해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1943년 5월 14일 밤 까지는 대부분의 무기 보급이 완료될 것이다. 이 밖에 무기를 수송하는 열차 9대가 아직 이동 중에 있어 일선부대에 도착하는 것은 5월 18일에서 20일 사이로 예상된다. 이들 열차편이 도착하게 되면 각 부대는 박격포, 대전차소총, PPSh 기관단총, 연대포는 편제의 100퍼센트, 소총은 편제의 74퍼센트, 경기관총은 편제의 57퍼센트, 중기관총은 편제의 65퍼센트, 45mm 대전차포는 편제의 71퍼센트, 76mm 사단포는 편제의 80퍼센트, 122mm 곡사포는 편제의 70퍼센트를 갖추게 될 것이다.제69군 예하 사단들은 1943년 5월 20일 까지 최소한 병력 8,000명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전차 부대들은 대부분 완편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5월 중순에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모든 부대가 높은 수준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그들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했다.(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로네지전선군은 최고사령부에 쿠르스크 지구에서 선제 공격을 취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첫번째 날자(5월 8일)가 지나가자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는 초조함을 느꼈고 적군이 공세를 취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최고사령부에 선제공격을 개시할 지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의 요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코프와 안토노프, 그리고 나는 스탈린이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말도록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21) 

하지만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들이 아직 전투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부가 먼저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바실레프스키의 증언 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을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선제공격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1943년 6월 초 소련군의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리면서 이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4월 12일 전략적 방어를 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적군의 예상 공격 축선을 특정한 뒤 1개월의 기간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부대들, 특히 주공 축선에서 작전하게 될 야전군들에 장비와 보충 병력을 보냈다. 5월 10일까지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은 계획대로 병력과 야포의 숫자라는 두가지 중요한 지표에서 7월 5일 기준의 80퍼센트를 초과했다.(기갑전력 측면에서는 각각 40퍼센트와 75퍼센트였다.) 6월 5일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총 병력이 7월 5일 기준의 98퍼센트를 넘어섰고, 야포는 거의 90퍼센트, 전차와 자주포의 숫자는 72퍼센트에서 76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므로 두 전선군은 5월 중순에는 기본적으로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 중부집단군은 같은 시기에 치테델레 작전 이전까지 보급받기로 되어 있었던 최소한의 기갑차량도 다 받지 못한 상태였다. 중부집단군 예하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들은 아직 병력과 장비를 편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하계 공세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측은 이미 5월에는 당시 독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이 5월 말 까지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만슈타인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이었다.22)  

치타델레 작전을 좌절시킨데는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아군의 준비 태세 뿐만 아니라 교모하고 종심 깊게 구축된 방어선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독일 장군들과 서방의 학자들은 독일군의 패배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을 꼽을 때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해 왔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1943년 5월에서 6월 사이 로코소프스키와 바투틴의 주요 업무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이들이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고 병사들이 방어시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훈련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초순 총참모부 검열단이 실시한 검열 결과에 따르면 보로네지전선군 방어 지구 주방어지대의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은 대부분의 방어 진지 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제2방어지대와 제3방어지대에서는 구축 방식과 형태에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결함이 발견됐다.(조명지뢰를 방어선 중간에 매설했다던가, 참호를 너무 얕게 팠다던가, 위장이 형편없었다던가와 같은) 이러한 문제점들은 6월 초 까지 대부분 개선되었다. 예를들어 제6근위군은  5월 5일까지 90,000개의 대전차지뢰 중 17퍼센트, 64,000개의 대인지뢰 중 16퍼센트 만을 매설했다.(7월 5일 까지는 모두 매설됐다.) 제7근위군 지구도 비록 인접 부대에 비하면 사정이 나았지만 5월 16일까지도 지뢰 매설이 크게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까지 대전차지뢰 65,000개 중 22.4퍼센트, 대인지뢰 84,000개 중 16.9퍼센트가 매설되었다.23) 그러나 6월 5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6근위군은 대전차지뢰는 계획량의 50퍼센트, 대인지뢰는 계획량의 62퍼센트까지 매설했다. 제7근위군은 대전차지뢰 46.2퍼센트, 대인지뢰 35.7퍼센트를 매설했다.그러나 5월까지 지뢰 매설이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방어선의 전차가 기동가능한 지역이 독일군의 기갑차량들에게 활작 열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주방어지대 전방과 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각 방어지대 사이와 제2, 3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남아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봄의 진흙탕으로 물자수송과 공병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폭약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4월 말 부터 폭약류의 보급이 지체되기 시작했고 각 전선군 사령부는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물자, 특히 독일제 포탄과 지뢰 같은 노획 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획 물자를 사용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주관적인 요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1943년 6월 18일 붉은군대 공병감 보로브예프 중장은 명령49호를 하달했는데 이 명령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5월 23일에 보로네지전선군이 관리하고 있던 보로네지 지구의 대전차지뢰 임시야적장에서 폭발이 있었다. 보로네지전선군은 이곳에 2,700개의 대전차지뢰를 모아두고 있었다. … 독일제 T-35 대전차지뢰들은 뇌관이 없는 상태로 수송됐으며 기폭장약이 들어있는 상태로 낱개 단위로 야적장에 쌓여 있었다. 폭발의 원인은 쌓여있던 지뢰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노무자들은 사전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제 지뢰의 폭발 방식과 취급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참모진은 운반 작업을 조율하거나 감독하지도 않았다. 이 폭발로 지뢰 2,700개와 트럭 2대가 파괴되고 군인 7명과 야적장 부근에 있던 민간인 노무자 15~20명이 사망했다. 대전차지뢰 야적장은 교통량이 많은 주요 보급로에 인접해 있었다.”24)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두 전선군의 방어선 구축은 거의 70퍼센트 가량의 완공율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1943년 6월 1일 이후로는 독일측이 치타델레 작전을 계속 연기했더라도 5월 초와 마찬가지로 붉은군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쿠르스크 돌출부의 양쪽에 집결한 독일군은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에 대해 군사이론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필수 요소로 꼽는 숫적 우세를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수의 병력, 기갑차량, 야포를 확보할 수 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43년 5월이 되면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후방의 스텝군관구에는 상당한 규모의 최고사령부 예비대가 집결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1943년 5월이건 6월이건 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쿠르스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이 치타델레 작전을 여름이 시작될 무렵 개시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저 불리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헌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을 비롯한 서방측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관점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만슈타인 본인도 독일군 수뇌부가 쿠르스크에 배치된 소련군의 전투력을 오판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전후에 소련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1943년 하계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측이 전시동원과 군수산업에서 그토록 뛰어난 조직 역량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붉은군대야 말로 머리 하나를 자르면 새로 두개의 머리가 생기는 ‘히드라’ 그 자체라고 평했다.25)


주석

1) V. Khristoforov, V. Makarov, and B. Khavkin, ‘Fel’dmarshal fon Kliest na Liubianke’ [Field Marshal von Kleist in the Lubianka Prison], Rodina 6 (2010) p. 94.  
2) E. Manstein, U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3 
3) S. Newton, Kurskaia bitva nemetskii vgliad [Kursk: The German View] (Iauza, EKSMO, Moscow, 2006), pp. 463–476. 
4)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 TsAMO RF, F.16-A, Op.321, D.138. 
6) 로코소프스키는 1943년 4월 28일에 원수 칭호를 받았다.  
7) TsAMO RF, F.62, Op.1720, D.14,L.23. 
8) TsAMO RF, F.16-A, Op.321, D.138. 
9) TsAMO RF, F.203, Op.2843, D.425, L.425. 
10) TsAMO RF, F.62, Op.321, D. 16, L. 86obr. 
11) TsAMO RF, F.62, Op.321, D.16, L.86. 
12) 최고사령부 지령: 제23전차군단과 제2전차군단, 제1근위기계화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 46090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자 46091호, 제3근위전차군단을 제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2호, 제1근위’돈’전차군단, 제12전차군단, 제15전차군단, 제18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3호.  
13) V. N. Zamulin, Kurskii izlom: Reshaiushchaia bitva Velikoi Otechestvennoi [쿠르스크의 전환점: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투 (Iauza, Eksmo, Moscow, 2008), pp. 101–102.  
14) TsAMO RF, F.203, Op.2843, D.426: ‘Boevoi sostav 6 gv., 7 gv., 40, 38 A, 1 TA za 5 maia i 5 iulia 1943’ [1943년 5월 5일과 7월 5일 제6근위군, 제7근위군, 제40군, 제38군, 제1전차군의 전력]. 
15) TsAMO RF, F.62, Op.321, D.16, L.127, 127 obr. 
16) D. Glantz and D. House, Kurskaia bitva: Reshaiushchii povorotnyi punkt Vtoroi mirovoi voiny [쿠르스크 전투: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 (Astrel’, Moscow, 2006), p. 80. 이 책은 글랜츠와 하우스가 쓴 The Battle of Kursk (University Press of Kansas, Lawrence, KS, 1999) 러시아어 번역본이다. 
17) 군사사연구소(IVI) 부속문서고 , F.191, Op.233, D.108. 1943년 5월 3일 부터 1944년 6월 1일 까지 기갑총감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한 보고, 제1편, 소연방 총참모부 군사사국, 1947, pp. 6–7. 
18) NARA, T.312. R.317.F.7886042, 7886046. 
19) NARA, T.312. R.317. F.7886050. 
20) 전선군사령부의 예비대였다. 
21) A. M. Vasilevsky, Delo vsei zhizni, Kn. 2 [Cause of an Entire Life, Book 2] (Politizdat, Moscow, 1988), p. 24. 
22) E. Manstein, Poteriannye pobedy, p. 543. 
23) TsAMO RF, F.38A, Op.9022, D.5, L.21. 
24) TsAMO RF, F.69A, Op.10751, L.11, Ll.37, 38. 
25) Manstein, Po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6.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번역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 : 1943~1945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작전사 연구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정도이지요. 이러한 경향은 사실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한 연구 자체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독일에서는 미국으로 부터 반환된 2차대전기 문서들을 활용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자료의 제약으로 소련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현재 시점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참고할 만한 훌륭한 저작이 많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새롭게 공개된 러시아 자료들을 활용한 중요한 연구들이 영어권 국가들에서 대거 출현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기 동부전선은 여전히 연구해야 할 대상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약간 재미있는 점은 독일의 연구들도 영어권의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되지 못한 상태에서 데이빗 글랜츠와 같이 러시아 자료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시각들이 독일의 입장에 치우쳐져 있다고 비판받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독일의 시각을 담은 연구들도 대중적으로 널리 소개된 것은 아닙니다. 대중적으로 큰 반응을 얻은 구데리안, 만슈타인, 멜렌틴 등의 회고록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독일측 시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오늘 소개할 그레고리 리트케Gregory Liedtke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1호(2008)에 기고한 논문, “FUROR TEUTONICUS: German offensives and counter-attack on the eastern front, august 1943 to march 1945”는 1990년대 이후 러시아의 시각이 반영된 연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독일 시각을 반영한 균형잡힌 작전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필자가 제기하는 주장에 비해서 논증이 약간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1차사료 이용이 제한적이고 2차사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문제점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개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점은 감안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데이빗 글랜츠와 같은 유명한 영어권 연구자들이 러시아 자료에 무게를 두다 보니 정작 독일측의 움직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주장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반영한 개론서들이 역시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 또한 리트케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독소전쟁 후반기 독일군의 반격작전을 단지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는 와중에 별 의미없이 허우적 댄 것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일면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2차대전 후반기 동부전선의 주요 작전에 대한 간단한 해설로도 괜찮은 논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개를 해봅니다.


튜튼인들의 격노 :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 1943-1945
그레고리 리트케

독소전쟁에 관한 대중적인 서술들은 대부분 치타델레Zitadelle 작전(1943년 7월 5일~17일)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작전의 종막을 알리는 상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앨버트 시튼Albert Seaton과 같은 역사가들은 독일군이 이 공세 기간중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는 점을 들어 “치타델레 작전 이후 추축군은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다시는 이것을 되찾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1) 마찬가지로 존 에릭슨은 그의 유명한 저작에서 1943년 7월 이후 “러시아에서 독일군의 공세와 승리는 더 이상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서술했다.2) 얼 짐케와 마그나 바우어는 이 전투의 결과 “소련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을 일치하여 강조하였다.3) 주도적인 연구자들 간에 이렇게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보니 학계내에서는 일반적으로 독일 동부군Ostheer이 쿠르스크 전투로 입은 손실 때문에 공세능력이 약화되었고 돌이킬 수 없이 방어를 취해야만 했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독일 동부군은 공세를 효과적으로 맞받아 칠 수 있는 전력이 없어서 1945년 5월에 항복하게 될 때 까지 소련군에 의해 가차없이 퇴각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4)

쿠르스크를 둘러싼 전투가 독일의 절대적인 전략적 상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작전이라는 수준에서 본다면 독일 육군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 까지도 매우 공세적이며 위험한 적수로 남아 있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널리 퍼진 인식은 치타델레 작전 종결 부터 독일이 항복할 때 까지 감행한 여러 차례의 공세와 대규모 반격작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공세들은 독일 동부군이 독소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도 공세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1943년 7월 이후 전개된, 독일군의 여러 공세와 반격에 대해 시간순서에 따른 검토와 개략적인 설명을 하고자 한다. 특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규모와 전투의 치열함, 그리고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작전이 소련군과 소련군 수뇌부에 끼친 영향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독소전쟁 후반기에 독일군이 실시한 공세와 반격에 대한 검토는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된 이후에도 독일군이 오랫동안 강력한 공세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는 것 외에도 몇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이런 작전들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하면서 작전 단위에서 전쟁에 영향을 끼치는 한편, 소련이 갈수록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려 가던 시점에서 항상 소련군에게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혔다. 즉,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 작전은 전략 및 작전 단위에서 차후 소련의 계획 수립에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붉은군대 자체의 교리 및 조직구성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5) 마지막으로, 독소전쟁을 주제로 한 가장 최신 저작들 조차 대부분은 이러한 작전을 무시해 왔다.6)  수많은 개별적인 공세와 전투, 교전은 (독소전쟁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시적인 연구는 독소전쟁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치타델레 작전의 실패의 바로 직후에, 그리고 그 패배의 여파로 소련군은 일련의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공세 중 하나인 제4차 하리코프 전투 기간 중이었던 1943년 8월 3일, 독일군의 첫 번째 대규모 반격을 개시했다.7) 제5근위전차군과 제1전차군이 선두에 선 소련군의 공격은 순식간에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 Abteilung Kempf의 지경선을 돌파해 들어왔다. 수일 만에 두 야전군의 사이에는 35마일에 달하는 간극이 벌어졌으며 이것은 러시아에서 독일군 전선의 남부 전체를 무너뜨릴 위협이 되었다.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의 사령관 에리히 만슈타인 원수가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적은 폴타바를 거쳐 드네프르 강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였다.”8)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도네츠 지역의 공업 및 광업 자원의 중요성 때문에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다수의 기갑사단을 집결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9) 이들 기갑사단은 7월에 전개된 격렬한 전투로 소모된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갑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표1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투입된 5개 기갑사단은 대략 289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이 기갑사단들은 가동상태가 아닌 기갑차량 384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군 정비인력의 효율성과 이러한 차량 대부분이 (2주 이하의) 단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파손된 차량들은 기갑사단이 기갑전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자산이었다.10) 8월 11일, 총 673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한 이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선봉 기갑부대들에 대해 일련의 반격을 시작해서 8월 20일에는 돌파구를 메울 수 있었다.

표1.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된 독일군의 증원 기갑전력 규모11)
부대12)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3)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3Pz
34
54
-
-
34
54
3SS. PGD
58
110
18
16
76
126
2SS. PGD
56
126
16
16
72
142
PGD GD14)
53
46
21
14
74
60
5SS. PGD15)
33
?
?
?
33
?
총계
234
338
55
46
289
384


이 과정에서 독일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독일군 전선의 연결을 회복했다.
정리하면, 이 반격은 러시아 남부에서 독일군의 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실제로,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퇴각하도록 하는데에는 이로 부터 한 달 이상의 격렬한 전투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이 지구에 투입된 소련의 5개 전선군은 701,474명의 사상자와 2,026대의 전차, 1,730문의 야포와 박격포, 596대의 항공기를 잃어야 했다.16) 직접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반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선봉에 선 두개의 전차군을 철저하게 격파했다는 점이다. 제1전차군과 제5근위전차군은 처음에 각각 전차와 자주포 54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제 1전차군은 8월 18일에 120대로 줄어들었고 제5근위전차군은 8월 24일에 겨우 111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17) 제5근위전차군은 이후 드네프르 강을 향한 진격에도 계속해서 투입되었으나 상태가 심하게 약화되어 후퇴하는 독일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19) 제1전차군의 상황은 더 나빠서, 이 부대는 총사령부(STAVKA) 예비로 돌려져 대규모의 재편성에 들어갔다. 제1전차군은 11월 중순 키예프 지구에 투입되기 전 까지는 전투에 다시 참가하지 못했다.20)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하리코프는 8월 23일 소련군에 탈환되었으며 독일군의 반격은 격렬하게 계속되었지만 원래의 전선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반격은 커다란 재앙을 저지하였고, 붉은군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부대들이 작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만, 동부전선 전체에 걸쳐 악화되기 시작한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바로잡는데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독일 동부군은 기나긴 전선을 따라 여러 차례의 소련군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한계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9월 15일, 히틀러는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퇴각하여 8월 중순 이래 대략 드네프르 강을 따라 건설되고 있었던 요새선, 즉 동부방벽Ostwall 방어선을 따라 부대를 배치하게 해 달라는 휘하 야전 지휘관들의 요청을 마지못해 승락했다.21) 히틀러는 끝내 퇴각에 동의했지만, 독일이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이자 크리보이 로그와 니코폴의 중요한 철, 니켈, 그리고 망간 광산을 확보할 수 있는 선인 동부방벽 방어선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할 것을 요구했다.22) 또한 히틀러는 동부 방벽의 자연적인 조건과 인력으로 구축한 진지가 서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일 동부군이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방어선에 의지하여 강력하고 전투로 단련된 역전의 독일 동부군은 붉은 군대의 서진을 계속해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23)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군은 일련의 반격을 감행했으며 이 중 첫번째의 반격은 체르노빌Чернобыл 지구에서 드네프르을 도하해 교두보를 만든 소련 제13군과 제60군을 대상으로 감행되었다. 역사가 데이빗 글랜츠가 기록한 것 처럼, 이 교두보들이 하나로 통합되게 된다면 “독일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과 남부집단군의 중요한 연결점을 노리는 정면 40km, 종심 40km의 비수”가 될 것이었다.24)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은 이 교두보가 동부방벽 방어선의 상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합동으로 대규모의 반격을 준비했다. 10월 3일 부터 4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56기갑군단이 소련군 교두보의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2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59군단이 교두보 남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5) 10월 14일에 전투가 마무리 상태로 접어들 무렵, 반격을 통해 체르노빌을 재점령 했으며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소련군의 교두보를 밀어내어 여러개의 작은 교두보로 쪼개 놓았다.26) 그 결과 이 지구는 그 다음달 내내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드네프르 강의 남쪽에서는 10월 15일에 소련의 스텝 전선군Степной фронт이 미슈린 로그Мишурин Рог의 교두보에서 공세에 나섰다. 며칠만에 독일 제8군과 제1기갑군을 연결하는 지점의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이를 따라 제5근위전차군이 크리보이 로그를 향해 남진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은 히틀러가 하달한 경제적 목표와 전체 동부방벽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제1기갑군의 우익을 드네프르강 만곡부에 고립되어 격파될 수 있는 위협을 가하는 것 이었다.
독일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여러개의 사단이 서부에서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10월 말, 만슈타인은 새로이 도착한 제14, 24기갑사단을 제3SS 기갑사단과 함께 제40기갑군단에 편입시켜 돌파해온 소련군의 서쪽 측면을 공격하고 크리보이 로그 일대를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제40기갑군단은 새롭게 도착한 3개 보병사단의 선견대와 함께 10월 28일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최소한 254대에 달하는 전차 및 돌격포로 이루어진 기갑전력으로 소련군의 측면을 분쇄해 나갔다.27) 독일공군도 이 지구에 하루 1,200회 출격해 이 반격을 지원했다.28) 이 공세로 인하여 소련군의 선봉에 선 약체화된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들은 인굴레츠Ингулец강 까지 후퇴했으며 크리보이 로그 북쪽 20km 지점 까지 밀려나고 말았다.29) 만슈타인에 따르면 소련군은 “심각한 방해”를 받았으며 11월 3일 반격이 종결될 때 까지 10,000명의 전사자와 5,000명의 포로, 그리고 350대의 전차를 잃었다.30)

비록 소련군은 드네프르강 서안에 확대된 교두보를 계속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독일군 전선의 이 지역에 들이닥친 위협은 감소되었다. 이로 인해 만슈타인은 독일군이 주도하는 두 가지의 공세 계획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28일에 소련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4-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이 독일 제6군이 방어하고 있던 드네프르강 만곡부와 아조프해 사이의 전선을 돌파해 들어왔다. 11월 초 이 지구의 독일군은 드네프르 강 까지 밀려났으며, 소련군의 진격으로 크림 반도의 제17군은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만슈타인은 육군 총사령부OKH에 추가로 도착할 예정인 3개 기갑사단을 활용하여, 40기갑군단 소속의 제14, 24기갑사단과 함께 진격해오는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북익을 타격하는 작전을 제안했다.31) 또한 만슈타인은 대안으로서, 이들 기갑사단을 크리보이 로그 북쪽에 있는 확대된 소련군 교두보를 분쇄하는데 투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32) 여기에 투입될 5개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은 대략 783대의 전차와 돌격포였기 때문에, 이 두 공세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실행되었다면, 아마도 붉은 군대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33) 이러한 승리는 독일군이 이 지역의 방어태세를 안정시키고 소련군이 새로운 공세를 재개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재정비를 하도록 만들어서 독일 남부집단군이 담당하고 있던 남부지역의 전선에서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크게 호전시켰을 것이다. 소련군의 다음 공세가 오기 까지의 시간에 독일군은 부대들을 휴식시키고 재편성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세계획들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계획 모두 기획 단계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11월 3일,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소련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1-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이 키예프 북부의 교두보에서 공세를 개시해 11월 6일에는 키예프를 점령했다. 제4기갑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1주일만에 소련 기갑부대는 남쪽으로 40마일, 서쪽으로 90마일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교통의 요지인 파스토프Фастов, 코로스텐Коростень, 그리고 지토미르Житомир를  점령했다.34) 소련군 총사령부는 이 성과를 활용하여, 4개의 야전군과 여러개의 전차군단 및 기계화군단을 이동시켰다.35) 남부집단군의 북익 전체가 완전히 붕괴될 지경에 처했으며 그러한 재앙은 남부집단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형성한 방어선을 버리고 남서쪽으로 퇴각하도록 만들 것이었다. 즉, 이렇게 된다면 러시아의 독일군 전선에서 중부와 남부 사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 이래 최대 규모의 기갑전력을 집결시켰다. 여기에는 만슈타인이 드네프르강 만곡부에 투입하려 한 새로이 도착한 3개 기갑사단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차출해온 2개 기갑사단과 1개 기갑척탄병사단, 2개 보병사단이 포함되었다.36) 표2에 나타난 것 처럼, 11월 20일에 이 전력이 추가됨으로써 제4기갑군의 기갑전력은 총 938대의 전차 및 돌격포로 증강되었으며 이 중 360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독일 야전지휘관들은 논의를 한 끝에 지토미르와 코로스텐 사이에 존재하는 소련군의 취약한 측면을 찿아내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독일 기갑사단들은 소련군의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딛히는 대신, 기동을 통해서 적을 포위하고 각개 격파하고자 했다.37) 연속된 전선을 다시 형성하고 소련군의 대부분을 섬멸하거나 최소한 심각한 타격만 가할 수 있더라도 소련군을 키예프 교두보에서 몰아내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38)

표2. 키예프 지구 반격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1943년 11월 20일)39)
부대
전차
(보유)
전차
(가동)
돌격포
(보유)
돌격포
(가동)
보유
총계
가동
총계
1.SS PzD
218
58
50
35
268
93
2.SS PzD
144
41
23
8
167
49
1.PzD
196
122
-
-
196
122
7.PzD
33
17
-
-
33
17
8.PzD
78
8
-
-
78
8
19.PzD
30
10
-
-
30
10
25.PzD
75
26
10
4
85
30
독립부대
38
16
43
15
81
31
총 계
812
298
126
62
938
360


11월 12일, 도착한 독일 기갑사단들의 선견대가 집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소련 제3전차군의 선봉 전차여단을 격파하는 것으로 키예프 지구에 대한 독일군의 작전이 시작되었다.40) 3일 뒤 제48기갑군단 소속의 1기갑사단과 1SS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독일 공군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 주공이 시작되었다.41) 소련군의 전선은 독일 기갑사단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동요했으며 11월 19일에는 지토미르를 다시 빼앗기고 24일에는 코로스텐이 그 뒤를 이었다. 소련군 총사령부는 독일군의 성공에 불안을 느껴 키예프 지구로 서둘러 병력을 증원했다.42) 독일 기갑사단들은 코로스텐을 재점령한 뒤 진창과 매우 나쁜 기상상태로 인해 기동이 불가능해 져서 잠시 작전을 중지하였고, 12월 6일에 제48기갑군단이 기동할 수 있을 정도로 지표가 얼어붙은 뒤에야 공격을 재개했다.43) 그러나 이 무렵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들은 심각한 인명 손실을 입었고 소련군은 증원병력이 계속해서 도착하면서 점차 완강하게 저항해갔다.44) 그 결과 독일군이 소련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서 얻을 수 있었을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독일군의 반격은 12월 22일 최종적으로 종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추가로 소련군 부대들을 격파했다.
결국 독일군의 반격은 소련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 했지만 소련군이 공세 초기에 탈환한 지역의 대략 절반 가량을 반격 과정에서 재점령했다.45) 코로스텐과 지토미르를 재점령 함으로써 러시아의 독일군 전선의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의 직접적인 육상 교통로가 회복되었다. 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 제38군 전체와 제1근위군 및 제60군의 일부 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만슈타인에 따르면 소련군의 피해는 전사자 20,000명과 포로 5,000명에 달했고 전차 600대와 각종 화포 300문, 대전차포 1,200문이 파괴되거나 노획당했다.46) 키예프 방어작전(1943년 11월 13일-12월 22일)에 대한 러시아 측의 공식적인 추산에서 인명피해를 87,473명, 그리고 이중 26,443명을 전사 및 실종으로 서술하고 있은 점을 감안하면 만슈타인이 제시한 수치는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47)

12월 전반에 걸쳐 키예프 지구에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독일군은 전선의 다른 곳에서도 별도의 반격을 감행했다. 소련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2-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기존의 스텝 전선군)은 크리보이 로그에서 패배한 다음에는 드네프르 강 일대에 걸쳐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2월 초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 키로포그라드Кировоград의 동북쪽과 동남쪽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갔다. 키로포그라드 동남쪽에서 돌파한 소련군은 제13기갑사단과 갓 도착한 제2강하엽병사단이 상대했다. 이 두 독일군 사단은 이틀(12월 19~20일)에 걸친 격전 끝에 소련 제1기계화군단과 여러개의 소총병 사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노브고로드카를 다시 점령하고 독일 제8군과 제1기갑군을 연결하는 전선의 안정을 회복했다.48) 12월 26일, 세개의 기갑사단이 키로포그라드 동북쪽에 뚫린 돌파구를 막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약화된 소련군은 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제10근위기계화군단과 제252소총병사단의 대부분이 포위당했다. 독일군은 12월 29일까지 돌파구를 막고 포위된 소련군을 섬멸했다.49) 이 전투로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기동부대들의 남은 공격 역량이 소모되어 버렸으며,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공세작전을 잠정적으로 연기해야만 했다.50)

이러한 전투들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중부집단군도 동부전선의 중부지역에서 중요한 반격 작전을 실시했다. “니콜라우스Nikolaus”라는 암호명의 작전에서 공격 목표는 11월 초에 만들어진 독일 제2군과 제9군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것 이었다. 소련 벨로루시 전선군Белорусский фронт의 공격은 이 간극을 확대하거나 돌파구를 뚫는데 실패했지만 소련군이 광대한 프리펫 습지대에 독일 제2군을 고립시키고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인 보브루이스크Бобруйск를 점령할 가능성이 있었고 이것은 오랫 동안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위협이었다.51) 12월 20일 부터 독일 제41기갑군단이 2개 보병사단과 새로 도착한 제16기갑사단을 동원하여 이 간극의 북쪽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2) 21일에는 독일 제2군이 제4기갑사단으로 간극의 남측면을 공격하였고 신속하게 북쪽에서 진격해온 부대들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53) 공격해온 독일군 부대들은 소련군의 소총병사단 3개와 소총병여단 1개를 포위했다. 소련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봉쇄된 채로 유지되었고 포위된 부대들은 12월 27일까지 분쇄되거나 와해되어 소련군 전선으로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54) 니콜라우스 작전은 불과 1주일만에 종료되었지만  두 야전군의 연결을 다시 굳건히 하였고 이로서 1944년 중반까지 소련은 남부 벨로루시로 진격하려는 시도를 중단하여야만 했다.

1943년 말, 독일군이 실시한 반격작전들로 인해 소련이 군사작전을 통해 더 큰 작전적, 전략적 성과를 얻는 것이 저지되긴 했으나 소련군 총사령부는 독일군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키예프 지구에서 독일군의 반격이 결국 종결되자,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2월 24일 새로운 공세를 재개했다. 공세 첫날이 끝나갈 무렵, 소련 제1근위전차군과 제3근위전차군은 3개의 야전군의 지원을 받아 독일군 후방으로 20마일 가까이 밀고들어갔다.55) 다음날 측익에 배치되어 있던 다른 소련 야전군들도 공격에 가세했으며 키예프 교두보를 봉쇄하고 있던 독일군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2월 29일에는 코로스텐이 소련군에게 다시 탈환되었으며 31일에는 지토미르가 그 뒤를 이었다. 1944년 1월 첫째 주말까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50마일의 전선에 걸쳐 50마일을 진격했다.56) 비록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과 지엽적인 역습으로 소련군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제4기갑군의 전선은 고립된 부대들 단위로 무너져버렸다.57) 소련군은 고립된 독일군 부대들 사이로 사실상 남서쪽, 그리고 남부집단군의 깊숙한 후방 까지 활짝 열린 것이나 다름없는 길을 확보했다. 독일군의 전 선선에 걸쳐 심각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만슈타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 이후의 몇 주일이 동부전선의 독일군 남익이 고립되어 남서방면으로 퇴각하게 될 것이나 말 것이냐를 결정할 것 이었다.”
만슈타인과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이런 사태가 초래되는 것을 우려하여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력한 수단을 취하였다. 제1기갑군 사령부가 2개 기갑사단과 함께 드네프르 만곡부에서 이동해와 돌파구 동쪽의 모든 독일군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이양받았다. 돌파구의 반대편에는 제4기갑군이 제48기갑군단(여전히 제1기갑사단과 제1SS기갑사단을 거느리고 있던)을 집결시켰고 육군 총사령부가 동부전선의 다른 지구에서 차출한 1개 기갑사단과 5개 보병사단도 증원되었다. 1월 말 까지 총 5개 기갑사단과 5개 보병사단이 암호명 “바투틴Vatutin”이라는 반격 작전을 위해 집결했다.59)
바투틴 작전을 위해 동원된 기갑전력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그 대략적인 규모는 표3에 나타냈다.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던 제17기갑사단은 표에서 제외했으므로, 이 수치는 최소한의 추정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베케Bäke” 전투단에 배속된 티거 전차들도 제외했다.60) 또한 16기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의 대부분이 가동가능 상태에 있었으므로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의 총 수량은 상당히 큰 수준이었을 것이다.61)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독일군이 반격을 위해 대략 400대 정도의 기갑차량을 집결시켰으며 이 중에서 거의 300대 정도는 가동가능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표3. 바투틴 작전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의 추정치
부대
날자
총 보유대수
가동대수
1.SS. PzD62)
1944. 1. 21
116
77
1.PzD63)
1944. 1. 1
60
42
6.PzD64)
1944. 1. 2
?
29
16.PzD65)
1944. 1. 10
196
?
PzKG Bäke66)
1944. 1. 23
?
37
총계
-
372
185


1월 24일, 바투틴 작전이 제18포병사단 소속 야포들의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67) 독일군 1개 군단이 돌파구를 확대하려던 소련군을 견제하는 동안 또 다른 군단들이 돌파한 소련군의 측면을 타격했다. 소련군은 이때 까지의 전투로 보급선이 늘어난데다 전투력도 약화되었기 때문에, 소련 제5근위군과 제40군은 20마일 가까이 밀려났으며 제1근위전차군과 제38군의 일부 부대가 포위되어 섬멸당했다.68) 소련군의 정확한 인명피해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만슈타인은 최소한 5,000명을 사살하고 5,5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차 700대, 야포 200문, 대전차포 500문을 격파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69) 소련군의 실제 피해가 어느 정도였건 간에, 1월 29일에 독일군의 반격이 종결될 무렵에는 독일군이 연속적인 전선을 다시 형성했으며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 역량은 일시적으로 고갈되었다.70)

이후 수개월 동안 독일 남부집단군은 집단군의 존속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워나가면서 몇 차례의 반격을 실시했다. 2월 초에는 8개 기갑사단이 2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코르순 일대에 포위된 독일 제8군의 일부 병력을 구출하는 데 투입되었다. 비록 구출을 위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포위된 부대들이 자력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만슈타인은 이 과정에서 소련군 2,000명을 포로로 잡았고 전차 700대, 대전차포 600문과 야포 150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71) 3월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감행한 공세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되고 제1기갑군 전체가 포위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2SS기갑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2개 기갑사단이 황급히 프랑스로 부터 이동해왔다. 무장친위대의 두 기갑사단(204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장비)은 새롭게 도착한 2개 보병사단과 함께 4월 4일 구원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만에 제1기갑군과 접촉을 할 수 있었다.72)

남쪽에서는 독일 제6군과 제8군이 루마니아 북부로 퇴각하여 이곳에서 4월과 5월 초에 걸쳐 일련의 격전을 치른 끝에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내었다.73) 그러나 5월 말, 독일측은 소련이 타르굴-푸르모스Targul-Frumos와 야시Iasi 북쪽에서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것을 포착하였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유일한 대규모 원유 공급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공세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직접적으로 전략적 위협을 가하는 것 이었다. 독일군은 약체화된 부대들로는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를 다시 한번 감행할 경우 견뎌낼 수 없음을 우려하였으나 소련군 총사령부가 5월 26일 부로 이미 공세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74)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 준비를 방해하기 위하여 4개 기갑사단과 독일군 및 루마니아군의 4개 보병사단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파쇄공격(암호명 소냐Sonja와 카챠Katja)을 감행하였다.75) 일주일 간(5월 30일~6월 5일)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많은 소련군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선을 북쪽으로 2~5마일 정도 밀어 올릴 수 있었다.76) 이렇게 해서 독일군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 타르굴-푸르모스와 야시 북쪽에 방어선을 종심깊게 구축할 수 있었고 이것은 전술적 상황을 호전시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가로 질러 악몽과도 같은 퇴각을 한 끝에 이 공격을 통해 1943~44년 전역을 사기를 북돋아주는 승리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 작은 승리를 만끽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6월 22일, 소련군은 독일 중부집단군을 격멸하고 벨로루시 전역을 해방하기 위한 대공세인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작전을 개시했다.77) 12일 만에 중부집단군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군 44개 사단 중 25개 사단이 사실상 전멸했으며 인명피해는 30~35만명에 달했다.78) 중부집단군의 괴멸로 소련군은 서쪽으로 300km 진격할 수 있었으며 소련군의 선봉부대는 동프로이센의 국경지대 지척까지 육박해 들어갔다.79) 전황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발트해 연안지역의 소련 전선군들은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에 일련의 공세를 감행해 북부집단군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이 벨로루시 지구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7월 13일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소련군의 일련의 공세에 호응하여 갈리치아의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Heeresgruppe Nordukraine을 공격했다.80)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7월 27일 까지 독일군의 방어선을 분쇄하고 비스와Wisła강에서 2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동북방면으로 소련 제2전차군은 바르샤바의 문턱 까지 도달했다. 7월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전 선선은 돌이킬 수 없는 붕괴를 목전에 둔 것 처럼 보였다.81)
독일은 이 위태로운 상황에 대해 이와 같은 위기가 닥칠 때 마다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으로 대응했다. 바로 공격하는 것 이었다! 7월 24일, 그때 막 독일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어떻게 상황을 바로 잡을 것이냐는 어떤 부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공세를 취해야 하네!”83) 히틀러는 7월 31일에 열린 군사회의에서 “전선을 안정시키고 가능하면 한 두차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공세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84) 독일인들에게는 다행히도 독일과 루마니아에서 이동해온 여러개의 사단들이 마침내 7월 말 경 전선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의도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85) 이렇게 해서 독일군 지휘관들의 공세적인 성향과 증원부대의 도착은 독일군이 1944년 8월에 걸쳐 일련의 공격과 반격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첫 번째 반격은 바르샤바 동부에서 수행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소련 제2전차군의 진격으로 독일 제2군이 측면을 우회당하여 세개의 독일 야전군의 중요한 보급로를 차단당할 위협을 받고 있었다.86) 7월 30일, 3개 기갑사단이 소련 제3전차군단에 공격을 감행해 북쪽으로 가장 깊숙히 진격해온 소련군의 2개 전차군단의 후방을 끊고 바르샤바 일대에 안정적인 전선을 회복하려 했다.87)  8월 2일에는 제4기갑사단과 제3SS기갑사단도 반격에 가담했다. 표4에 나타난 것 처럼 반격에 투입된 5개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을 모두 합하면 전차와 돌격포 700여대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군은 이후 3일간에 걸친 격렬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웠던 전투를 통해 소련 제3전차군단을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고 제8근위전차군단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8월 7일 반격이 종결될 무렵, 독일측은 소련군이 전사 3,000명과 포로 6,000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88) 소련군의 기갑전력 손실도 의심할 바 없이 심각했으며 8월 11일 제2전차군이 휴식과 재편성을 위해 철수했을 때 원래 보유하고 있던 758대의 전차와 자주포 중 100대 미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89) 이 반격은 소련 제1벨로루시 전선군의 공세 능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중요한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안정적인 방어선을 다시 형성하였고 소련군이 8월 1일에 시작된 폴란드인들의 바르샤바 봉기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표4. 바르샤바 반격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기갑전력의 추정치(1944년 7월 30일~8월 6일)90)
부대
전차
돌격포
총계
FPD “HG”
72
31
103
19.PzD
168
-
168
5.SS PzD
105
21
126
3.SS PzD
119
16
135
4.PzD91)
156
12
168
총계
620
80
700


바르샤바 일대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소련군은 바르샤바 남쪽에 비스와강을 따라 몇 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비스와 강은 독일이 자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방어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최후의 중요한 자연 방벽이었다.92) 독일은 비스와강이 방어선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소련군의 교두보를 봉쇄하고 분쇄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강력한 반격을 감행했다. 8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감행된 제19기갑사단과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의 일부 부대의 공격은 소련 제8근위군이 마그누셰프Magnuszew일대에 확보한 교두보를 봉쇄하고 축소하였으나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 했다.93) 마스누셰프 교두보의 남쪽에서는 소련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산도미에쉬Sandomierz 일대에 거대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8월 8일까지 2개 전차군과 2개의 야전군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이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7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 2개 보병사단과 2개 보병여단을 단계적으로 집결시켰다.94) 독일군은 9월에 걸쳐 산도미에쉬 교두보를 거듭해서 공격했으며 일련의 길고 피해가 큰 교전이 이어졌다. 독일군의 반격은 비스와강에 형성된 거점들을 격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교두보를 봉쇄하고 그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방어하는 소련군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95)

폴란드의 전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은 발트해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7월 말에 걸쳐 소련 제1발트전선군1-й Прибалтийский фронт은 벨로루시의 독일군 전선이 붕괴된 것을 기회로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로 압박해 들어왔다. 7월 31일에 소련군의 선봉은 바로 리가 서쪽 해안에 도달하여 독일군의 육상 교통로를 차단하고 북부집단군을 독일군의 전선에서 고립시켰다.96)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북부집단군이 완전히 전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3기갑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구출작전을 실시하기로 하고 강력한 전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도펠코프Doppelkopf” 라는 암호명의 이 작전은 6개의 기갑사단과 한개의 사단급 기갑전력을 갖춘 부대를 2개 기갑군단으로 편성하여 프로이센 국경의 집결지에서 공격을 시작해 소련 제2근위군과 제51군의 방어를 분쇄하고 리가 일대에서 북부집단군과의 접촉을 재개하려는 것 이었다. 주공의 우익에는 1개 기갑사단과 7개 보병사단, 그리고 여러개의 독립 기갑부대로 편성된 2개 보병군단이 주공을 지원하고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97)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3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이 추가 증원병력으로 도착했다.98) 표5에 자세히 나타낸 것 처럼, 독일군은 8월 16일 작전이 시작될 때 까지 659대의 전차와 돌격포라는 상당한 전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도착한 증원전력이 이 숫자를 더 늘렸기 때문에, 8월 25일에 도펠코프 작전이 종료될 무렵 제3기갑군은 812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 517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99)

표5. 도펠코프 작전 개시 당시 독일군 기갑 전력(1944년 8월 16일)100)
부대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01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4.PzD
47
54
-
-
47
54
5.PzD
38
24
-
-
38
24
12.PzD
28
-
36
2
64
2
PzG GD
77
22
20
4
97
26
14.PzD
11
-
11
-
22
-
7.PzD
24
20
5
-
29
20
PzKG
Strachwitz
85
-
-
-
85
-
IX.AK
18
17
41
-
59
17
XXVI.AK102)
6
-
69
-
75
-
총계
334
137
182
6
516
143


독일군의 구원부대의 규모와 독일공군의 상당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10일간의 격전을 치른 뒤에야 북부집단군과의 굳건한 접촉을 할 수 있었다.103)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소련군은 제5근위전차군, 제3근위기계화군단, 그리고 제1전차군단을 증원했으며 추가로 3개의 야전군이 주공의 측면을 엄호하고 있던 우익의 독일군 군단들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104) 독일군은 이렇게 소련군이 증원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소련군을 뒤로 밀어냈으며, 북부집단군도 구원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자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소련 제1발트 전선군은 공격해 오는 독일군 사이에 예하 부대들이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8월 21일에 남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5) 소련군의 철수로 독일군은 30km폭의 회랑을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북부집단군에 병력을 보내고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106)
도펠코프 작전은 독일군이 연속된 전선을 다시 형성할 수 있도록 하여 한 개의 집단군이 완전히 괴멸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붉은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전선 북부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했다. 8월 16일 부터 25일까지, 독일 제39기갑군단만 하더라도 담당 지구에서 소련군 전사자 2,060명을 확인했으며 포로 929명을 잡고 전차 277대, 대전차포 472문, 야포 82문을 격파하거나 노획했다.107) 소련군이 입은 전체적인 손실은 알 수 없으나, 제1발트전선군이 또 다른 공세를 개시하기 까지는 거의 6주가 걸렸다.108)

전쟁의 마지막 수 개월에 걸친 시기 독일 동부군은 계속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한편, 계속 해서 다수의 공세작전을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공세 중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통로를 재점령하여 독일의 유일한 원유 공급지인 헝가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1944년 10월 초 실시할 예정이었던 “집시 남작Zigeunerbaron”작전이 있다. 이를 위하여 독일 제3기갑군단의 예하에 4개의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이 배속되어 데브레첸Debrecen 일대에 집결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이 작전은 실시되지 못하였으며 보류되었다.109) 그러나 독일 제3기갑군단이 데브레첸 일대에 전개함으로써 독일군은 소련군이 10월에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소련군의 측면에 여러 차례의 역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역습은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한동안 치사Tisza강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110)
이외의 공세작전으로는 부다페스트 아래의 도나우강 서안에서 소련군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계획이 입안된 “늦은 추수Spatlese” 작전이 있다.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12월 18일 까지 2개 기갑사단과 3개의 독립 전차대대와 400여대에 달하는 기갑차량을 부다페스트 북서쪽에 집결시켰으나 소련군의 돌파로 인해 이 부대들을 즉시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작전도 취소되고 말았다.112) 또 다른 작전으로는 1945년 2월 베를린을 향해 진격해 오던 소련군의 150마일에 달하는 북측익에 대해 폼메른에서 감행한 공세인 “(동)지Sonnenwende” 작전이 있다. 황급히 긁어모은 7개의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을 투입한 이 공격은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로루시 전선군을 상대로 극히 미미한 성과만을 거두었지만 소련군 총사령부에는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다.113) 동지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독일군이 전력을 긁어모아 투입함으로써 붉은군대가 베를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폼메른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폼메른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는 오랫 동안 많은 손실을 입으며 진행되었으며 1945년 4월 4일에야 마무리 될 수 있었다.114)
독일 제4군이 1945년 1월 27일에서 30일 사이에 동프로이센에서 고립된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감행한 공세 또한 소련군의 우려를 일으켰다. 독일군이 소련 제48군을 휩쓸고 엘빙Elbing일대의 독일군 주방어선에서 6마일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자 소련군은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지구에서 3개의 야전군을 차출해왔다.115) 이 증원병력으로 인해 독일군의 돌파는 좌절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116)

독소전쟁의 최종단계에서 감행된 독일군의 모든 작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봄의 부활Frühlingserwachen”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부다페스트를 재탈환하고 소련군을 다뉴브강 동안으로 밀어냄으로써 나지카니자Nagykanizsa 일대의 마지막 유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여기에는 서부전선에서 헝가리로 비밀리에 이동해온 제6SS기갑군도 투입되었다.117) 독일군은 공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월 17일 부터 22일 까지 “남풍Südwind”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에는 2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이 투입되어 부다페스트 북서쪽의 에스체르곰Esztergom 지구의 소련군 교두보를 분쇄했다. 그 결과 소련 제7근위군이 큰 타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준비하고 있던 공세의 좌익에 대한 위협이 제거되었다.118) 3월 5일에 봄의 부활 작전이 시작될 무렵 제6SS기갑군은 발라톤 호수 북쪽에 8개 사단을 집결시켰으며 이 중 5개 사단이 기갑사단이었다. 남쪽에서는 또 다른 8개 사단이 드라바 강 일대에서 양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에서 주공의 북쪽에는 독일 제6군이 5개 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으로 좌익을 엄호하고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여기에 가세할 예정이었다.119)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군이 24개 사단을 집결시킨 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것 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매우 많은 기갑전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120) 표6에 나타난 것과 같이, 제6SS기갑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8일 뒤에도 979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21) 3월 15일에, 헝가리에 배치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총 1,796대에 달했고 이중 772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에 있었다.122) 소련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이 막대한 전력에 대항하여 407대의 전차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465,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123)

표6. 봄의 부활 작전 진행중 제6SS기갑군의 기갑전력(1945년 3월 13일)124)
부대
전차
(가동)
전차
(수리중)125
돌격포
(가동)
돌격포
(수리중)
가동
총계
수리중
총계
1.SS.PzD
86
58
22
10
108
68
12.SS.PzD
54
39
67
49
121
88
2.SS.PzD
51
40
56
39
107
79
9.SS.PzD
56
33
57
30
113
63
23.PzD
53
41
29
22
82
63
44.ID
-
-
10
5
10
5
3.KD
-
-
22
13
22
13
4.KD
4
2
16
15
20
17
총계
304
213
279
183
583
396


독일군에게는 불행히도, 소련은 독일측의 공세준비를 포착하였고 이에 따라 방어를 준비했다. 이로서 양측 모두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힘겨운 대결이 벌어졌다.126) 제한적인 도로망 또한 전차의 신속한 기동에 장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온이 오르면서 지면은 진창이 되어 버렸다.127) 독일군은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전 초기의 며칠 동안 겨우 20마일을 진격하는데 그쳤으며 이후에는 급속히 공세의 탄력을 상실해 갔다. 3월 15일, 이 작전은 결국 중단되었으며 그 다음날에는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을 상대로 공세를 시작했다. 공세 이틀차에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으며 독일군의 후방으로 신속히 진출했다. 이로 인해 독일 6SS기갑군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며 2차대전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최후의 공세도 끝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봄의 부활 작전이 감행되기 훨씬 이전에 독일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으므로 이 작전은 어떠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결과도 가져올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반격작전들은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블라우 작전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전략적 의미도 없었다.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유럽 전역에 걸쳐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작전들은 독일군이 그 공세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간주되어온 쿠르스크의 전투로 부터 한참 뒤에도 공세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는 인식과는 달리 이러한 공세들은 전쟁이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독일 동부군이 위험한 적수로 남아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43년의 하리코프에서 1945년의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반격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진 대규모의 병력을 계속해서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으로 독일은 몇번이고 소련에게 작전상의 차질과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일대에서 전개된 반격은 소련군이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여 폴란드인들이 패배하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도펠코프 작전은 발트해 지역의 독일군이 격파당하는 것을 방지했으며, 동지작전은 베를린에 대한 소련군의 최종 공세를 지연시켰다. 독일군의 공세가 입힌 손실과 그것이 이후의 소련군 작전에 끼친 영향의 관점에서 보면 소련 전차군들이 하리코프 일대에서 큰 타격을 받은 뒤 후방으로 돌려진 것을 가장 적합한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군의 공세 및 반격작전들은 붉은군대의 승리를 오랫동안 지연시키면서 그 승리를 막대한 인명 손실을 치른 뒤에야 이룰수 있도록 만드는 상당한 누적 효과를 일으켰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Albert Seaton: The Russo-German War, 1941–1945. (London: Arthur Baker Ltd., 1971), p. 368. 이제는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이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것 보다는 가벼웠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재검토는 Niklas Zetterling &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Portland, OR: Frank Cass Pub., 2000)를 참고하라.
2) John Erickson: The Road to Berlin: Stalin’s War with Germany.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83), p. 135.
3) Earl Ziemke &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Decision in the East. (Washington, DC: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7), p. 141.
4) 동부군Ostheer이라는 용어는 1941년 부터 1945년 까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일부를 칭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발칸반도, 또는 프랑스에서 싸운 독일군과 동부전선에서 싸운 독일군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5) 현재 전쟁 기간 중 붉은 군대의 발전에 관해 가장 상세하게 다룬 연구로는 David Glantz: Colossus Reborn: The Red Army at War, 1941–1943.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을 참고하라.
6) 예를 들면 Evan Mawdsley: Thunder in the East: The Nazi-Soviet War 1941–1945.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나 Richard Overy: Russia’s War: A History of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London: Penguin Pub., 1997) 두 저작 어디에서도 1943년 11월에서 12월에 걸쳐 독일군이 키예프 일대에서 감행한 반격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
7) 이 전투에 대한 작전사적 저술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George M. Nipe: Decision in the Ukraine, Summer 1943: II SS and III Panzer Corps. (Winnipeg: J.J. Fedorowicz, 1996)가 있다. 전체적인 소련의 전략내에서 이 전투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David Glantz & Jonathan M. House: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8)를 참고하라.
8) Erich von Manstein: Lost Victories. (Novato, CA: Presidio Press, 1982), p. 454
9) 히틀러가 러시아 남부를 유지하고자 한 경제적 이유에 대해서는 Seaton, p. 379를 참고하라.
10) 1943년 10월 1일 부터 1944년 1월 31일 까지 독일군의 야전 정비부대는 모든 전선에서 최소한 8,702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수리해서 전선에 복귀시켰다. Zetterling & Frankson, p. 135.
11) 별도로 표기 하지 않는 한 여기에 인용된 수치는 6. 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über Panzer und Sturmgeschütz Lage. NARA, T312, Roll 1483, Frame 441에 의거한 것이다. 이 수치는 해당 기갑사단의 1943년 8월 1일자 기갑전력을 가르킨다.
12) 이하 약칭은 다음과 같다. Pz 기갑사단, SS-Pz 친위대 기갑사단, PGD 기갑척탄병사단, SS-PGD 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Kav, 기병사단, Inf 보병사단.
13) 이것은 장기 및 단기 수리를 요하는 차량의 합계를 뜻한다. 단기 수리를 요하는 차량은 보통 2주 이내에 가동 가능 상태가 되었다.
14) 이 사단의 1943년 8월 1일자 통계는 Zetterling & Frankson, p. 218에 의거한 것이다.
15) 이 사단은 8월 11일에는 33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Nipe, p. 217
16) 이 통계는 소련이 체르니고프-폴타바 전략 공세작전(8월 26일~9월30일)과 돈바스 전략 공세작전(8월 13일~9월 22일) 동안에 입은 피해를 합친 것이다. G.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20th Century. (Mechanicsburg, PA: Stackpole Books, 1997), pp. 135–137 & 267.
17) Glantz, Colossus Reborn, p. 277
18) 생략
19) 추격 과정에서 제5근위전차군의 남은 기갑차량은 세개의 선견대에 인도되었고 전차군의 주력은 예비대로 돌려져 재편성에 들어갔다. Glantz & House, p. 172. 소련군이 독일군의 퇴각 과정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에 관해서는 Manstein, p. 469를 참고하라.
20) 비슷한 이유에서, 제2전차군과 제4전차군 및 많은 독립 전차군단들이 최고사령부 예비로 돌려졌다. Erickson, p. 122.
21) 동부 방벽은 북부와 중부 지구의 완성도가 훨씬 높았는데, 해당 지역의 집단군들이 더 느리게 퇴각하고 있어서 건설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부 방벽의 남쪽 부분은 독일군이 9월 말 드네프르강 서안으로 퇴각할 무렵에는 아직 건설 초기 단계에 있었다. Mawdsley, p. 273.
22) Manstein, p. 482;  Seaton, p. 379.
23) Erickson, p. 134.
24) David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1941–1945: Volume Five-The Summer-Fall Campaign, 1 July–31 December 1943. Part Two. (Carlisle, PA: Self-published, 2000), p. 582.
25) 제56기갑군단은 2, 4, 5, 12기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59군단은 7, 8기갑사단과 291, 217, 339 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다. Ibid, pp. 590 & 594. 전체적인 독일 기갑전력은 알 수 없으나 10월 1일에 제4기갑사단은 9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41대의 단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Joachim Neumann: Die 4. Panzer Division 1943–1945: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Bonn: Selbstverlag der Verfassers, 1989), p. 188. 제5기갑사단사에 따르면 이 사단은 10월 2일에 10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Anton von Plato: Die Geschichte der 5. Panzer Division, 1938 bis 1945. (Regensburg: Verlag Georg Zwickenpflug, 1978), p. 302. 9월 30일에 제7기갑사단은 56대의 전차 중 18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라고 보고했으며 제8기갑사단은 77대의 전차 중 가동가능한 것이 단 한대도 없다고 보고했다. 4. Pz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über Panzer und Sturmgeschütz Lage. NARA T313, Roll 391, Frames 8681807–8681815.
26) 이 전투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서술은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 Five, Part Two, pp. 574–603를 참고하라.
27) 제14기갑사단과 제24기갑사단은 각각 109대와 116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가지고 도착했다.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and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Volume Two, 1943–1945. (Atglen,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6), p. 109. 10월 30일에 제3SS 기갑사단은 29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Wolfgang Vopersal, Soldaten, Kampfer, Kameraden: Marsch und Kampfe der SS-Totenkopf Division, Band IVa & IVb. (Bielefeld: Im Selbstverlag der Truppenkameradschaft der 3. SS-Panzer Division, 1988), p. 53.
28) E.R. Hooten, Eagle in Flames: The Fall of the Luftwaffe. (London: Arms & Armour Press, 1997), p. 198.
29)  소련 제5근위전차군 소속의 제18전차군단은 편제상 223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0월 28일에는 단지 23대의 전차만 남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10월 23일에 제7근위군 소속의 제1근위기계화군단은 편제에 있는 229대의 전차 및 자주포 중 75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78.
30) Manstein, p. 483.
31) Ibid, p. 484.
32) Ibid, pp. 484–485.
33) Jentz, p. 117.
34) Mawdsley, p. 278; Manstein, p. 488.
35) 존 에릭슨에 따르면, 12월 초,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병력 452,000명, 전차 1,100대, 각종 화포 및 박격포 6,000문에 달했으며, 총 66개 소총병사단과 8개 전차군단/기계화군단으로 구성되었다. Erickson, p. 143.
36) 새롭게 도착한 3개 사단은 1.SS 기갑사단과 1, 25기갑사단이었다. 나머지 사단은 2.SS 기갑사단과 19기갑사단, 16기갑척탄병사단, 그리고 68, 168보병사단이었다.
37) Ziemke & Bauer, p. 187, Manstein, pp. 488–489, Erickson, p. 143.
38) 키예프 일대의 전투에서 독일 야전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F.W. von Mellenthin: Panzer Battles: A Study of the Employment of Armour in the Second World War. (London: Cassel & Coy. Ltd., 1955), pp. 244–260를 참고하라.
39) 4. PzAOK. Ia. Zustandsberichte. Wochenmeldungen uber Panzer und Sturmgeschutz Lage. NARA T313, Roll 391, Frames 8681807– 8681815에 있는 기갑전력현황에 대한 주간 보고를 편집한 것이다.
40) Glantz & Frankson, p. 174.
41) Mellenthin, p. 255. 또한 Hooten, p. 198도 참고하라.
42) 예를들어 8월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뒤 총사령부 예비로 있던 제1근위전차군이 12월 초 546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가지고 키예프 지구에 투입되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인접한 벨로루시 전선군의 지휘관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총사령부로 부터 바투틴의 사령부를 방문해 왜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 총사령부의 의도는 바투틴이 독일군의 반격을 격퇴하는데 실패한 것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에서 면직시키려는데 있었것으로 보인다. Konstantin Rokossovsky, A Soldier’s Duty. (Moscow: Progress Pub., 1970), pp. 226–228. 또한 Mawdsley, p. 278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43) Manstein, p. 489, Ziemke & Bauer, p. 189, 그리고 Mellenthin, p. 251.
44) 11월 2일에서 12월 1일 까지 제1기갑사단은 1,20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XXIV. Panzer Korps. Ia, Anlagen z. KTB. NARA T314, Roll 726, Frame 1177. 11월 동안 1.SS 기갑사단은 1,68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and III.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82), p. 344.
45) Mawdsley, p. 278.
46) Manstein, p. 489.
47) Glantz & House, p. 298에 인용된 내용.
48) 에릭슨이나 시튼의 저작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전투에 대한 몇 안되는 서술 중 하나로는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ume Five, Part Two, pp. 742–750를 참고하라.
49) Ibid, pp. 760–768.
50) 제29전차군단은 이미 12월 8일에는 전차 22대로 줄어들어 있었고 12월 15일 제5근위기계화군단은 겨우 23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51) Ziemke, pp. 194–195.
52) 제16기갑사단은 러시아에 도착했을 무렵 총 110대의 전차와 42대의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 117.
53) 12월 19일에 제4기갑사단은 가동가능한 전차 39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부대 소속의 전차 5대와 호르니셰 15대가 배속되었다. Neumann, p. 270.
54)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Glantz, Forgotten Battles of the German-Soviet War, Volume Five, Part Two, pp. 545–561을 참고하라.
55) Seaton, p. 413.
56) Erickson, p. 163; Manstein, p. 500.
57) 제3근위전차군은 공세 시작당시 419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으나 1월 8일에는 85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Glantz, Colossus Reborn, p. 280.
58) Manstein, p. 498.
59) 여기에는 1SS, 1, 6, 16 그리고 17 기갑사단, 4산악사단, 101엽병사단, 그리고 1, 96, 254보병사단이 투입되었다. 혼성기갑전투단인 ‘베케’ 전투단도 전투에 참여했다. 베케전투단은 23기갑연대 2대대(판터)와 503중전차대대(티거)로 구성되었다.
60) 다른 독립 부대들 또한 제외하였다.
61) 제16기갑사단은 니콜라우스 작전에 참여한 직후에 곧바로 도착하였으며 이 작전 기간 중 별다른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2) Lehmann, p. 408.
63) XXIV. Panzer Korps. Ia, Anlagen z.KTB 1/44, Versheidene Bericht. NARA T314, Roll 731, Frame 727.
64) Wolfgang Paul: Brennpunkte: Die Geschichte der 6. Panzer Division (1. leichte), 1937–1945. (Krefeld: Hontges-Verlag, 1977), p. 346.
65) Wolfgang Werthen, Geschichte der 16. Panzer Division 1939–1945. (Bad Nauheim: Verlag Hans-Henning Podzun, 1958), p. 190.
66) Ernst Rebentisch: Zum Kaukasus und zu den Tauren: Die Geschichte der 23. Panzer Division, 1941–1945. (Esslingen: Herausgegeben von Verband ehemaliger Angehoriger der 23. Panzer Division, 1963), p. 361.
67) 제18포병사단은 다수의 중포병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이 공격에 72문의 야포를 지원했다.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 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 Division 1943–1944, anhang Heeresartillerie Brigade 88 1944–1945. (Germany: Preussischer Militar-Verlag, 1989), p. 312.
68) Seaton, p. 416.
69) Manstein, p. 509. 소련군 소총사단 6개가 전멸한 것으로 추정되며 소련군 5개 전차군단은 기갑 전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 Division 1940–1943, p. 315.
70)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독일군의 반격 동안에 입은 피해에 더하여 이미 1943년 12월 24일 부터 1944년 1월 14일까지 감행한 공세로 100,018명의 사상자를 입은 상태였다. Glantz & House, p. 298.
71) Manstein, p. 516. 소련군이 코르순-세브첸코스키 공세(1월 24일~2월 17일) 기간 중 입은 손실은 총 80,188명이었고 이 중 24,286명이 전사자였다. Glantz & House, p. 298.
72) Jentz, p. 130. 이 작전에 관한 가장 자세한 서술은 Michael Reynolds: Sons of the Reich: The History of the II SS Panzer Corps in Normandy, Arnhem, the Ardennes and on the Eastern Front. (Havertown, PA: Casemate, 2002), pp. 4–13을 참고하시오.
73) 1944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루마니아 북부에서 전개된 전투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저술로는  David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The Failed Soviet Invasion of Romania, Spring 1944.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와 F.M. von Senger und Etterlin: Der Gegenschlag. (Neckargemund: Kurt Vowinckel Verlag, 1959)를 참고하라.
74)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p. 365.
75) Ibid, pp. 330–367. 5월 31일 기준으로 이 공격에 참여한 기갑사단들은 245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 205.
76) 두 독일기갑사단만 해도 98대의 전차와 92문의 야포, 그리고 88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Glantz, Red Storm over the Balkans, p. 366.
77) 이 작전에 참여한 4개의 소련 전선군은 병력 1,254,300명, 전차 및 자주포 4,070대, 그리고 야포 24,363문을 보유했다. Glantz & House, p. 201.
78) Seaton, p. 442; Glantz & House, p. 209.
79) 독일 중부집단군의 붕괴와 그 이후의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는 훌륭한 연구로는 Paul Adair: Hitler’s Greatest Defeat: The Collapse of Army Group Centre, June 1944. (London: Arms & Armour, 1994), Alex Buchner: Ostfront 1944: The German Defensive Battles on the Russian Front, 1944. (West Chester,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1), 그리고 Rolf Hinze: East Front Drama-1944: The Withdrawal Battle of Army Group Center. (Winnipeg: J.J. Fedorowicz Pub., 1996)를 참고하라.
80) 이 전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서술은 Rolf Hinze: To the Bitter End: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North Ukraine, A, Centre, Eastern Front 1944–1945. (Solihull, UK: Helion & Coy., 2005) 그리고 David Glantz & Harold S. Orenstein, eds.: L’vov-Sandomierz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Carlisle, PA: Self-published, 1998)를 참고하라.
81)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개괄은 Samuel Mitcham: Crumbling Empire: The German Defeat in the East, 1944. (Westport, CT: Praeger Pub., 2001)를 참고하라.
82) 독일의 전쟁 이론과 그것이 역사적으로 적용된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bert Citino: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 (Lawrence, K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를 참고하라.
83) Ziemke & Bauer, p. 336. 또한 Seaton, p. 452도 참고하라.
84) Ibid, p. 339.
85) 한 자료에 따르면 7월에서 9월 까지 3개 기갑사단, 7개 기갑여단, 그리고 9개 전차대대가 독일에서 이동해 왔다. Jentz, pp. 206–207 & 218. 8월 초 까지 중부집단군은 새로이 12개 보병사단을 배속받았다. Mitcham, p. 101.
86) Hinze, East Front Drama, p. 305.
87) 여기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은 막 독일에서 도착한 제19기갑사단과 이탈리아에서 이동해 온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 그리고 상대적으로 전력 소모가 없었던 5SS기갑사단이었다. 이 반격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서술은 David Glantz: “The Red Army’s Lublin-Brest Offensive and the Advance on Warsaw (18 July-30 September 1944): An Overview and Documentary Survey”.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 (2) (2006), pp. 401–441을 참고하라.
88) Werner Haupt: Army Group Center: The Wehrmacht in Russia, 1941–1945. (Atglen,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1997), p. 209.
89) Glantz, “The Red Army’s Lublin-Brest Offensive and the Advance on Warsaw”, pp. 407, 417.
90) Jentz, pp. 206–207.
91) Neuman, p. 434. 1944년 8월 1일에는 이 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 중 전차 98대와 돌격포 12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였다.
92) “OKW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스와강을 겨울 방어선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Hinze, To the Bitter End, p. 22.
93) Hinze, East Front Drama, pp. 310–312.
94) 이 전투를 다룬 자세한 문헌은 없으나 여기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는 Glantz & Orenstein의 49번 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5) 한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붉은 군대는 8월 3일에서 9월 7일까지 포로 3,000명, 전차 및 자주포 650대, 그리고 각종 화포 942문을 상실했다. Herausgegeben von Traditionsverband der Division. Geschichte der 3. Panzer Division Berlin- Brandenburg, 1935–1945. (Berlin: Verlag der Buchhandlung Gunther Richter, 1967), p. 442.
96) Glantz & House, p. 226.
97) Gerd Niepold: Panzer Operationen: Doppelkopf und Casar- Kurland, Sommer 1944. (Herford: Mittler & Sohn, 1987), p. 35–38.
98) 이 부대들은 제1보병사단과 새롭게 편성된 548, 551척탄병사단, 그리고 제103, 104기갑여단이었다. Ibid, p. 66. 이 두 기갑여단은 전선에 도착했을 때 각각 판터 36대와 대공전차 4대를 보유한 1개 전차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Jentz, pp. 206, 207.
99) Niepold, p. 66.
100) Ibid, pp. 35–37.
101) 이것은 단기간 수리를 요하는 차량으로 2주 이내에 가동 가능한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간 수리를 요하는 차량은 포함하지 않았다.
102) 니폴트의 저작에는 제6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에 관한 정보가 없다. 도펠코프 작전 개시 당시의 제6기갑사단의 기갑 전력은 알 수 없으나 6기갑사단이 7월에 동부전선에 도착할 무렵에는 81대의 4호전차와 8대의 대공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Jentz, pp. 206, 207. 제6기갑사단의 전차는 1944년 8월 26일까지 10대의 수리중인 4호 전차와 23대의 가동가능한 4호 전차로 줄어들어 있었다. 배속된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연대 1대대는 26대의 가동가능한 판터와 11대의 수리중인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Paul, Brennpunkte, p. 422.
103) 독일공군은 8월 17일 하룻동안만 해도 제3기갑군 구역에 260회 출격했다. Niepold, p. 40. 작전 후반기에 독일군의 선봉부대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여러척의 구축함으로 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다. Ziemke & Bauer, p. 343; Seaton, p. 507.
104) Glantz & House, pp. 226, 227; Ziemke & Bauer, p. 343.
105) Erickson, p. 325.
106) Glantz & House, p. 226.
107) Niepold, p. 78.
108) Glantz & House, p. 228.
109) 제3기갑군단의 기갑전력은 전차와 돌격포 224대였다. Peter Gosztony: Endkampf an der Donau, 1944/1945. (Wien: Verlag Fritz Molden, 1969), p. 40. 또한 Hans Friessner: Verratene Schlachten: Die Tragodie der Deutschen Wehrmacht in Rumanien und Ungarn. (Hamburg: Holsten-Verlag, 1956), p. 130도 참고하라.
110) 독일측은 한달 간에 걸친 격전을 통해 소련군 18,155명을 사살하고 포로 6,662명을 잡았으며 전차 및 자주포 632대와 야포 및 박격포 557문, 그리고 600문의 대전차포를 파괴하거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Ibid, p. 153. 이 기간(10월 6일~28일) 동한 소련군이 입은 총 피해는 사상자 84,010명으로 이 중 19,713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자였다. Glantz & House, p. 299.
111) 생략
112) Gosztony, pp. 97, 98.
113) Mawdsley, p. 373. 이 사건은 주코프와 스탈린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더 심하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주코프의 야심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던 스탈린은 동지 작전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분노했다. Erickson, p. 522. 독일군의 준비에 대해서는 Ziemke & Bauer, p. 446를 참고하라.
114) 동 폼메른에서의 작전 기간(1945년 2월 10일~4월 4일)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사상자 234,360명에 달하였으며 전차 및 자주포 1,027대와 야포 및 박격포 1,005문, 그리고 1,073대의 항공기가 파괴되거나 노획당하였다. Krivosheev, pp. 156 & 263. 이러한 피해는 부분적으로 독일군이 역사책에서 흔히 서술하는 것 처럼 항상 약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45년 3월 25일 기준으로 10SS기갑사단은 15,067명의 병력과 13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중 61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Wilhelm Tieke: Im Feursturm letzter Kriegsjahre: II. SS Panzerkorps mit 9. und 10. SS-Division ‘Hohenstaufen’ und ‘Frundsberg’.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75), p. 623.
115) 여기에는 소련 제5근위전차군, 제8전차군단과 제3근위기병군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Rokossovsky, pp. 287, 288.
116) Erickson, pp. 468, 469.
117) “히틀러는 여전히 독일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 지대는 헝가리와 빈 분지의 유전 지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Seaton, p. 541.
118) 이 전투에서 소련군의 피해는 최소한 8,800명이었다. Erickson, p. 511.
119) Ibid, p. 509.
120) 이들 사단의 대부분은 병력의 기준에서 보면 거의 완편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3월 1일에 제9SS기갑사단은 총 병력이 17,229명이라고 보고했다. Tieke, p. 622.
121) 이때 까지 제6SS기갑군은 다 해서 겨우 42대의 기갑차량만을 상실했을 뿐 이었다. Georg Maier: Drama Zwischen Budapest und Wien: Der Endkampf der 6. Panzerarmee 1945. (Osnabruck: Munin Verlag GMBH, 1985), p. 241.
122) Krisztian Ungvary: Battle for Budapest: 100 Days in World War II. (New York: I.B. Tauris & Co., 2003), p. 331.
123) 이 수치는 제6근위전차군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소련군 201,500명과 전차 500대가 북쪽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혹은 부다페스트 동쪽에 예비대로 있던 제9근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Glantz & House, p. 372.
124) Maier, p. 241.
125) 이 수치는 단기간의 수리와 장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차량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126) 소련군의 손실은 32,899명에 달했으며 이 중 8,492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었다. Glantz & House, p. 300. 반면 3월 6일에서 13일까지 독일군의 손실은 14,818명으로 이중 3,702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46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상실했다. Maier, pp. 240 & 268.
127) 이 작전 기간 중 너무나 심각한 진창 때문에 독일 전차 지휘관들은 전차 보다는 잠수함이 필요하다고 불평하는 보고를 올렸다. Erickson, p. 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