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전에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어이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물론 미국이 1941년에 소련으로 보낸 원조 물자 중에는 트럭이 있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랑 400대라는 점이지요. 고작 400대의 트럭으로 서부전선군 예하 사단들의 기동력을 높일 수 있다니 미국 자동차들은 무안단물이라도 발랐나 봅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부품상태로 도착해서 소련에서 조립을 했기 때문에 부대에 지급된 것은 1942년 1월이 넘어서 였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리는군요.
거참. 남의 블로그에 맞춤법도 틀린 헛소리나 늘어놓는 주제에 예의를 찾다니 어이가 화성탐사 나갈 지경입니다.
게다가 논리도 엉망이지요. 결국 증원군을 극동에서 러시아 서부까지 이동시킨게 철도라고 시인을 했는데 그렇다면 자동차는 별 도움이 안됐다는 결론아닙니까.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도 무지한 주제에 맞춤법도 틀리고 논리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남의 블로그에다 예의를 논하니 뭐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낮짝도 두껍습니다.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2007년 8월 12일 일요일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
참으로 오래된 퀴퀴하고 눅눅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낡은 떡밥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2006년 11월 30일 목요일
미국 육군의 차량화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오늘날의 미육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곳 저곳 들쑤시며 뉴스거리를 만드는 존재였지만 불과 100년전의 미 육군은 주요 열강의 육군 치고는 비리비리한 군대였습니다. 유럽과 같은 국가 총동원체제가 자리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은 육군이 약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것이 캐나다와 멕시코같이 적대적이지도 않고 군사력도 그저 그런 나라들이었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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