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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4일 화요일

1차5개년 계획과 소련 기계화 부대의 발전

러시아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군사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작전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동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군사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작전술'에 바탕을 둔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이론을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는 혁명과 내전의 피해를 막 복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업화의 수준은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 것 없었으며 군대는 1차대전 당시와 별 다를바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군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야심차게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기점으로 소련 군사이론가들의 '이론'은 드디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차5개년 계획시기의 전차 생산과 초기 기계화부대 창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론에서 교리로

1920년대 후반기 기계화부대의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첫번째는 기동전에 대한 이론들이 교리로서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 군사이론가들은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 Свечин)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의 논쟁을 시작으로 샤포쉬니코프(Борис М. Шапошников), 트리안다필로프(Владимир К. Триандафиллов)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기동전에 대한 이론을 활발하게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논쟁을 주도한 두 사람 중 스베친의 경우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소모전에 의한 점진적 승리를 제창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장기소모전이 1차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방대한 산업력을 동원하기 이전에 대규모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속한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29~131] 하지만 많은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은 미래의 전쟁은 기동 위주의 전투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스베친 조차 미래의 전쟁에서는 1914~15년 시기의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기동전을 예측했습니다.[Harrison, 2001, p.135]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활발한 논쟁을 통해 '작전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전략과 전술의 중간단계로서 작전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이 추가되면서 이론적인 정립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술이라는 단어는 1923~24년 붉은군대의 장군참모대학(뒷날의 프룬제 군사대학) 강의에서 스베친이 처음으로 명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작전술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붉은군대 장교단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1928년에 '작전술'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군사사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Harrison, 2001, p.140~141] 작전술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작전술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고 구체화 했습니다.

소련군은 작전술 개념의 도입 등 군사사상에 있어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차의 사용에 대해서는 2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1927년 까지도 전차는 참호전 상황에서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전차생산을 증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것은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서방의 전차 보유대수에 대한 과장된 정보 등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88]
새로운 군사이론에 맞는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 들이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1928년에 전차의 대규모 생산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운용 방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투하체프스키가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와의 논쟁으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이후였습니다. 투하체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트리안다필로프도 전차의 활용방안을 연구했습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1920년대의 연구를 통해 적의 방어종심을 돌파해 포위하는 것 이외에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반격해 올 적의 예비대의 격파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50] 전차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무기체계였습니다.

1928년도 붉은군대야전규범(Полевой Устав Краснои Армий), PU-28은 전차의 활용한 돌파와 포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PU-28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제대 중 하나는 적 방어선을 돌파해 후방의 적 포병을 격멸하거나 기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적 후방이나 측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두 번째 제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아 적 주저항선의 방어 거점을 격파하도록 규정했습니다.[Habeck, 2003 p.95~96]
PU-28의 개정판인 1929년도 야전규범, PU-29는 전차, 보병, 포병 부대의 연합작전에 기반한 현대적 기동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PU-29는 투하체프스키,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혁신적인 군사이론가들이 서술했는데 특히 트리안다필로프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차와 차량화부대를 이용, 공세 초기에 적 방어선의 방어종심을 일거에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PU-29는 PU-28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차 부대의 역할을 더 이상 보병지원의 단거리 돌파에 묶어 두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는 기병과 함께 기동력을 발휘해 적을 포위하거나 제병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규범은 야전지휘관들이 전차부대를 보병지원전차와 장거리전차로 구분하고 이 중 장거리전차에 적 포병의 격파와 적 후방으로의 돌파임무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전차부대의 동원이 가능할 경우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도 돌파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차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Erickson, 2001, p.307]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전차를 기능 별로 구분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소련의 낮은 기술수준에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소련의 기술과 산업생산능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전차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별로 특화된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Habeck, 2003 p.129]

2. 외국 전차 기술의 도입

PU-29를 통해 기초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대규모 전차부대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까지 소련 전차부대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던 MS-1 전차는 기본적으로 르노 FT-17의 개량형으로 보병지원 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PU-29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거리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1920년 후반의 시점에서도 소련은 아직 독자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형전차 개발에 외국의 전차를 참고해야 했습니다.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29년 11월에 외국의 장갑차량, 특히 전차를 구매할 위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그 위원단의 단장에는 군사과학지도국의 할렙스키(Иннокентий А. Халепский)를 임명했습니다. 할렙스키의 위원단은 1929년 12월부터 4개월간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전차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은 1930년 1월 독일을 방문해 비밀리에 전차 개발을 하고 있던 독일 기업들과 접촉했습니다. 할렙스키는 독일측과 신형전차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등을 논의했습니다.
독일 다음의 방문지인 영국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위원단은 영국에서 빅커스-암스트롱(Vickers-Armstrong Ltd)으로부터 카든-로이드 소형전차(Tankettes) 20대, 6톤 경전차 15대, Mark-II 중형전차 15대를 구입했습니다. [Habeck, 2003 p.130] 영국에서 구입한 전차들은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영국을 시찰한 할렙스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 차량화에 대해서 가장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Hofmann, 1996, p.288]

위원단의 미국 방문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미 1928년 10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바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커닝햄(Cunningham) T1을 접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 두 번째 미국방문에서 커닝햄 T1을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할렙스키 위원단의 미국 방문 이전에도 커닝햄 T1의 수입을 신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아직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커닝햄사에서는 무기의 해외 수출을 관리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에 이 문제를 알렸습니다. 1930년 3월 미국에 도착한 할렙스키는 원래 계획대로 T1을 구입하려 했으나 전쟁부가 외교문제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또 T1의 성능이 당초 기대를 밑돌아 T1의 구입을 취소했습니다.
커닝햄 T1 대신 칼렙스키의 관심을 끈 것은 유명한 크리스티(John Walter Christie)의 경전차였습니다. 칼렙스키는 미국의 군사잡지에서 크리스티가 개발한 전차 차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크리스티와 접촉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렙스키가 보기에 크리스티의 M1928은 궤도주행방식과 바퀴주행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이 고민하던 '작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습니다. 1930년 4월 29일 크리스티는 소련에 M1928의 개량형인 M1930을 판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할렙스키는 귀국한 뒤 크리스티 전차를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BT, 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의 개발과 대량생산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폴란드도 크리스티 전차를 구매했기 때문에 고속전차의 양산이 폴란드보다 뒤쳐진다면 소련은 폴란드군에게 '작전 기동성'의 우위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말 까지는 최소한 100대의 고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구입한 크리스티 전차가 1930년 9월에는 소련에 인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1년 5월까지는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Hofmann, 1996, p.291] 장차 크리스티 전차와 함께 소련군 기갑부대의 주축이 될 빅커스의 6톤 경전차의 경우는 1931년 8월까지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할렙스키의 계획이었습니다.[Stoecker, 1998]

크리스티 M1930을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의 개발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6월 3일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에 출두해 고속전차 개발 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할렙스키는 M1930을 바탕으로 14톤급에 37mm포(초기안은 76mm포)와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바퀴 상태로는 시속 70km, 궤도 상태로는 시속 40km의 성능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도 고속전차의 개발을 가속화 했습니다. 1931년 11월 할렙스키가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스탈린은 직접 할렙스키를 불러 크리스티 전차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152] 스탈린의 관심 덕분인지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1월에 원자재, 운송수단, 노동자에 대한 식량배급 등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 받았습니다.[Stone, 2000, p.189]

3. 1차5개년 계획과 전차 생산

기동전에 필요한 이론과 교리의 정립,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전차의 확보가 끝났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차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산업력의 확보였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전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MS-1가 처음이었습니다. 1927~28년 사이에 생산된 MS-1은 25대에 불과했습니다. 붉은군대 혁명군사평의회는 1928년 3월에 1933년까지 MS-1을 1,600대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28년 당시 소련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합쳐봐야 92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73] 그리고 실제로도 이 야심찬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완성된 군사부문 5개년 생산 계획에서는 전차 생산량을 1929/30년에는 340대로 잡고 이것을 1933년까지 연간 7,000대 수준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잡았습니다.[Simonov, 2000, p.42] 5년만에 전차 생산능력을 20배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때마침 붉은군대의 무장계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강인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투하체프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30~131] 투하체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과 병기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최종 결정권자인 스탈린도 전차 생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업화가 진행중인 소련에게 현대적 무기체계인 전차의 생산을 단기간에 급증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30년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으로는 전차의 장갑에 필요한 고급 철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는 점 입니다. 낮은 기술수준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토빌리힌스키 기계공장이 생산한 37mm전차포는 100% 모두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Stone, 2000, p.163] 붉은군대의 방대한 전차부대 증강과 전시동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공업생산능력과 기술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931년 7월 말 중공업, 특히 제철업의 신속한 확장을 요구했습니다.

고속전차의 생산은 할렙스키가 제시한 37mm포탑의 생산 지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와 고속전차 생산계획을 검토한 뒤 고속전차의 시제품을 생산할 공장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자동차 공장에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변경하고 1931년 10월 15일까지 3대의 시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제품이 완성되면 양산을 개시해 1932년 말 까지 고속전차 2,000대와 T-26 1,600대를 생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1931년 11월 1일에야 고속전차 시제품 3대를 완성했으며 1932년 11월까지 당초 계획에 크게 미달한 170대의 고속전차가 붉은군대에 인도되는 것에 그쳤습니다.[Hofmann, 1996, p.298~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군대 수뇌부는 전차 생산계획을 더욱 확대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1932년도 생산계획은 T-26 12,000대와 소형전차 16,000대였습니다.[Habeck, 2003 p.149]
위에서 언급했듯 1932년의 전차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형 고속전차인 BT-5 또한 45mm전차포의 생산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고 1932년 12월까지 생산된 신형전차는 603대의 고속전차와 1410대의 T-26에 불과했습니다. 이중 고속전차 89대는 전차포의 부족으로 포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포탑이 없거나 기관총만 장비한 BT-2를 1933년까지 모두 37mm포탑으로 교체한 뒤 45mm전차포를 탑재한 BT-5의 생산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T-26, BT의 양산과 함께 중형전차와 중전차 개발도 추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스 Mark II를 기초로 한 중형전차 T-28과 중전차 T-35가 혁명군사평의회로부터 생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형전차와 중전차의 개발도 앞서 진행된 경전차들의 생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T-28의 경우 구동계통의 문제와 경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포탑 생산 부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전차 T-35또한 구동계통 문제로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31~1933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 신형 전차 중 제대로 생산된 것은 T-27소형전차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전차 생산은 2,000대에 그쳤습니다.
소련의 전체적인 산업력의 부족은 전차생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BT-5의 초기 생산형에 대해 질 낮은 베어링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45mm포탑을 탑재하면 무리가 갔습니다.[Hofmann, 1996, p.304] 1931년의 전차포 생산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BT-5에 탑재할 신형 45mm 전차포는 1931년에 단 한문도 도입되지 않았습니다.[Stone, 2000, p.169]

1931년의 부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전차생산 증대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스탈린은 1932년 1월 10일 국방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고속전차 증산을 위해 일반 민수공장들을 전차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고 전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T-27 5,000대, T-26 3,000대, BT전차 2,000대 등 총 1만대로 결정되었습니다.[Stone, 2000, p. 193] 1932년 전차생산계획에 따라 전차를 생산할 공업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계속됐습니다. 5월에는 스탈린그라드에 T-26 1만2천대와 6천대분의 예비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32년까지 건설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산 증대 계획은 차질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민수 공장들을 대거 전차 생산에 돌렸지만 생산에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이었습니다. 생산이 비교적 단순한 T-26 조차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고 구조가 더 복잡한 BT 전차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주 생산공장인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했고 포탑, 엔진, 구동 계통 등을 생산할 일곱개의 공장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엔진을 탑재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산 계획을 맞추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급히 리버티 엔진을 수입해야 했고 엔진 문제로 생산은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생산이 성공적이었던 T-27 조차 갑작스러운 생산계획 상향조정으로 문제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도 전차생산계획도 이전 연도의 생산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까지 5,1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이후 월간 생산량을 1,365대로 끌어올려 1만대 생산을 달성한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실제 10월 1일까지의 생산량은 1,365대에 월간 생산량은 480대를 달성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전차 생산은 T-27 2,100대, T-26 1,600대, BT전차 600대에 그쳤습니다.[Stone, 2000, p.198~201]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45mm 전차포의 생산 차질로 T-26과 BT 전차 중 800대는 포탑이 없는 상태로 계획된 숫자만 채우기 위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32년 생산계획이 실패한 결과 1933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7,000대로 하향조정 되었습니다. 1933년도 생산계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신형전차, T-37 수륙양용전차와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가 포함되었습니다. 기존의 전차 생산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채 보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복잡한 신형전차의 생산이 추진된 것 입니다.

4. 기계화군단의 창설

비록 5개년계획 기간 중 전차 생산 계획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소련의 전차 생산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이제 소련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전술교리, 교리를 기술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차, 그리고 그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만들어질 차례였습니다.

신형전차의 도입은 소련 이론가들이 정립한 전차 운용 교리를 현실화 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T26은 보병지원전차로서, BT 계열 전차들은 고속 전차로서 독립된 기계화부대의 주력 장비가 되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와 할렙스키는 신형전차들의 전술임무를 다음과 같이 할당했습니다. T27소형전차와 T37수륙양용전차는 정찰 임무를,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는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돌파를, 그리고 전술적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BT전차와 T26전차가 작전단계의 종심돌파를 수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1929년에 편성된 임시기계화연대를 확대 개편해 1930년 5월 창설되었습니다. 이때 창설된 임시 기계화여단은 66대의 전차와 340대의 각종 차량, 3천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임시 기계화여단은 1930년 가을에는 정식으로 제 1기계화여단(Мехакнизированная Бригада)이 되었고 예하에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대와 기타 지원부대를 두었습니다. 장비는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장갑차, 350대의 각종 차량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초기 훈련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가을에 실시된 한 훈련에서 기계화여단은 기병사단을 추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기동 도중 연료를 모두 소비해 기병사단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전차연대가 장비한 MS-1 전차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MS-1의 느린 속력으로는 PU-29에 명시된 적 방어종심의 신속한 돌파와 적 포병의 격파가 어려웠습니다.[Habeck, 2003 p.133~134] 새로운 교리에 맞는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고 그것은 이제 막 대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3월, 할렙스키는 붉은군대 총참모부에 전차군단(Танковый Корпус)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예고로프(Александр И. Егоров)와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의 건의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계화군단을 포함한 대규모의 기계화부대 창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된 기계화군단의 창설 외에도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TRGK)을 별도로 편성하고, 기병사단 예하에는 기계화연대를, 소총병사단 예하에는 전차대대를 편성하도록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군단은 11소총병사단을 개편한 11기계화군단과 45소총병사단을 개편한 45기계화군단이었습니다. 각 기계화군단은 2개 기계화여단과 1개 소총병여단, 기타 직할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두 군단의 예하 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1기계화군단은 31기계화여단(T-26), 32기계화여단(BT전차)과 33소총-기관총여단(Стрелково пулеметная Бригада), 45기계화군단은 133기계화여단(T-26), 134기계화여단(BT전차), 135소총-기관총여단이었습니다.[Дриг, 2005, с.9] 편성 초기 기계화군단의 기갑장비는 전차 500대와 장갑차 200대라는 당시까지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Habeck, 2003, p.168] 1934년 1월까지 붉은군대의 기갑전력은 약 7,900대 수준으로 증강됐습니다. 기계화군단의 추가 창설은 보로실로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밖의 기계화부대 창설은 계속되어 1936년까지 6개의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 15개의 기병사단 예하 기계화연대, 83개의 소총병사단 예하 전차대대 및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습니다.[Harrison, 2001, p.176~177]

이것은 당초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와 같은 군사이론가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하는 것 이었지만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이 외국의 전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순방길에 오른지 5년 만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및 산업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2001
Mary R. Habeck, Storm of Steel :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Richard Harrison, The Russian Way of War : Operational Art, 1904-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George F. Hofmann, ‘Doctrine, Tank Technology, and Execution : I. A. Khalepskii and the Red Army’s Fulfillment of Deep Offensive Operation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Nikolai S. Simonov, ‘The War Scare of 1927 and the birth of the defense-industry complex’, The Soviet Defense-Industry Complex from Stalin to Khrushchev, St.Martins Press, 2000
Sally W. Stoecker, Forging Stalins Army : Marshal Tukhachevsky and the Politics of Military Innovation, Westwiew Press, 1998
David Stone, Hammer and Rifle : The Militarization of the Soviet Union 1926-193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Евгений Дриг,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Корпуса РККА В Бою, Иэдателстьство 2005

2009년 3월 8일 일요일

100만대의 비행기

1차대전에서 유례가 없던 대규모 소모전을 경험한 뒤 각국의 군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업동원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공업력으로 고생을 한 러시아의 후계자, 소련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에버스타트는 비상 조직에서의 보좌역이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지만 전시동원의 진행은 곧 그의 코포라티즘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해 포레스탈(James Forrestal)과 토론하곤 했다. 포레스탈은 에버스타트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명확한 코포라티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초기부터 부분적인 전시동원을 통해 미국의 생산력을 재조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력과 자본, 정부조직과 산업계, 납세자와 관료기구들을 국가적 노력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잘 조직된 계획만 있다면 미국은 1년에 50만대에서 100만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레스탈에게 이러한 생산을 통해 ‘적들에게 극도의 경각심을 주고’ 대공황으로 산산조각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Jeffery M. Dorwart, Eberstadt and Forrestal : A National Security Partnership 1909~1949,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1, pp.39~40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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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인배의 본산지 노서아 천지에 "소잡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