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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4일 토요일

미군과 독일군 장비의 비교 평가에 관한 미 제2기갑사단장의 보고서 - 6




한동안 잊고 있었던(;;;;;;) 주제로군요. 지난편이 올라간게 2014년 이라니(;;;;;) 오늘은 중위~소위급 장교들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이 보고서에 실려있는 초급 장교들의 증언은 미군과 독일군 기갑장비의 성능격차를 이야기하는 서적에서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에 접해보신 분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밖의 다른 무기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습니다. 초급지휘관들 부터는 미군 전차의 절대적인 열세를 증언하고 있어서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그래도 이왕 번역을 시작했으니 이 보고서를 전부 번역한 뒤 제3기갑사단장이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보고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2기갑사단장의 보고서는 부사관과 사병들의 증언을 담은 부분만 번역하면 마무리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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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알로니어John J. Allonier 소위

본인은 M4 중형전차로 5호전차와 교전한 바 있다. 5호전차는 아군의 M4 보다 우수하다. 독일 전차의 강철 궤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강철궤도 보다 내구성이 낮지만 접지압을 훨씬 좋게 해준다. 5호전차는 두꺼운 장갑을 가지고 있지만 기동성도 우수하다. 5호전차의 주포는 관통력이 높아서 아군의 75mm포 보다 훨씬 우수하다. 차체 기관총 사수용 관측창 또한 5호전차의 중요한 특징이다.

Issac D. White(Major General, Commanding General 2nd Armored Division), United States vs. German Equipment, (Merriam Press, 2011),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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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릭Edwin H. Reeg 중위, 소대장

판처파우스트를 사격해 본 경험이 있는데 미제 무기 중에서는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100미터 거리에서 명중을 시킬 수 있었다. 판처파우스트는 매우 정확도가 높고 사격하는 것도 쉬우며 5호전차와 야크트판터의 정면 장갑에 대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명중만 하면 관통을 시킬 수 있었다. 개활지에서는 좋은 폭발 효과를 보여주었으나 지면이 질퍽한 곳에서는 45발 중 한발 꼴로 불발이 일어났다. 판처파우스트는 우리가 사용하는 바주카와 비교했을 때 파괴력이 강하지만 유효 사거리는 약간 짧고, 따로 정비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무기는 발사하는 것이 쉽고 발사하고 나서 발사관을 버리면 된다. 아군도 판처파우스트와 유사한 무기를 지급받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제 바주카포의 발사관은 아군의 것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나은 점이 없다. 하지만 탄약은 훨씬 위력이 좋다. 미제 바주카포로는 관통하지 못하는 장갑도 독일제 바주카포로는 뚫을 수 있었다. 또한 훨씬 먼 거리에서도 관통을 보장할 수 있다.

ibid.,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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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실즈Harold A. Shields 중위, 제66전차연대 A중대

1945년 3월 2일 제66전차연대 2대대는 라인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대대 목표인 독일의 피흘렌Fichlen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아군 중형전차 세대가(4호전차 차체에 장포신 75mm포를 탑재한) 적의 자주포 한대에 격파되었다. 내가 지휘하는 M24 경전차 소대는 800야드 거리에서 이 자주포에 사격을 가했다. 우리 소대는 총 25발을 발사했으며 대부분이 철갑탄이었다. 적 자주포의 경사진 정면장갑은 모든 철갑탄을 튕겨냈다. 제66전차연대 I중대의 76mm포를 탑재한 중형전차 몇대가 이 자주포에 사격을 가했지만 이들이 쏜 포탄 역시 튕겨나갔다. I중대가 적 자주포에 사격을 가한 거리는 600야드 정도였다. 적 자주포는 양 옆으로 건물을 끼고 있어서 측면을 공격할 수가 없었고 오직 정면에서만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인 3월 3일에 이 자주포를 직접 살펴보았다. 철갑탄은 단 한발도 정면을 관통하지 못했다. 아군의 포탄은 정면장갑에 약간의 흠집만 내고 튕겨나갔다. 그리고 이 자주포가 격파한 세대의 아군 전차도 살펴보았다. 세대 모두 독일군 자주포가 쏜 한발의 포탄에 관통이 되었으며 이 중 한대는 포탑 측면에 맞은 포탄이 반대편까지 뚫고 나갔다.

1944년 11월 17일 제66전차연대 2대대는 독일의 에데렌Ederen을 확보하는 임무를 위해 푸펜도르프Puffendorf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에데렌으로 진격하던 중 아군의 M5A1과 M4의 접지압을 독일군의 5호전차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에데렌에 진입할 때 내가 탄 전차는 5호전차가 지나간 자국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나는 두 전차의 야지 기동능력을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판터 전차의 궤도 자국을 내 전차의 것과 비교해 봤다. 5호전차의 궤도자국은 지면에서 2인치 정도 파여 있었는데 내가 탄 M5A1 전차의 궤도 자국은 3.5인치에서 4인치 정도 파여 있었다. 그리고 M4 중형전차의 궤도 자국은 5인치에서 6인치 정도 파여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독일 5호전차의 무게는 45톤으로 내가 탔던 15톤 급의 M5A1 전차 보다 세배나 무거웠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M4 중형전차는 30톤 이다.

ibid.,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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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퀼렌Robert V. McQuillen 소위, 제66전차연대 A중대

나는 1944년 8월 18일쯤에 엘뵈프Elbeouf 근교에서 1개 소대의 M5A1 전차를 지휘하여 (75mm포와 76mm포를 탑재한 M4 중형전차를 장비한) 제66전차연대 G중대의 측면을 엄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의 6호전차 세대로 부터 사격을 받았고 아군의 중형전차 세대가 격파됐다. 이 중 두대는 전소되었다. 독일 전차를 발견하자 마자 아군 중형전차들은 대응사격을 실시해 두대를 퇴각시켰다. 적의 세번째 전차는 궤도가 벗겨져 승무원들이 버리고 달아났다. 아군의 M4 중형전차들은 이 버려진 전차에 약 400야드 거리에서 76mm포를 발사했다. 세발의 포탄이 튕겨나갔다. 나중에 살펴보니 76mm 포탄은 겨우 2인치 정도를 뚫어 정면장갑에 살짝 흠집만 낸 수준이었다.

ibid.,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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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레이크래프트David O. Craycraft 중위, 제66전차연대 3대대

5호전차의 조준경은 M4전차의 조준경 보다 우수하다. 독일제 조준경은 훨씬 또렷하고, 배율 조절이 가능하며, 배율이 높다. 게다가 거리 측정 기능도 있다. 하지만 밀폐된 상태에서는 미국제 전차의 시야가 훨씬 우수하다. M4 전차의 포탑 선회 속도는 5호 전차 보다 두 배 이상 빨라서 아군 전차는 표적에 대해 훨씬 빨리 대응할 수 있다. 5호전차는 넓은 궤도와 현가장치의 특성 때문에 셔먼 보다 우수한 접지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형 현가장치를 가진 M4A3E8의 등장으로 아군 전차의 접지력도 크게 향상됐다. 5호전차는 마력이 높은 엔진을 장착해 강력하다. 5호전차의 무게는 기동력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M4의 기동성이 5호전차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5호전차의 내부 탄약배치는 M4보다 나을게 없다.

M24전차는 M5 보다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장갑이 약한건 마찬가지이다. 이 전차를 자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이상의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미제 반궤도 장갑차는 독일군의 것 보다 훨씬 우수하다. 하지만 독일제 장갑차는 더 날카롭게 선회할 수 있다. 양측의 반궤도장갑차는 장갑이 너무 얇아 탑승한 보병을 그렇게 잘 보호하지 못한다. 미제 반궤도 장갑차는 독일 장갑차 보다 탑승과 하차가 훨씬 쉽다.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미제 2½톤 트럭은 독일제 트럭보다 훨씬 우수하다. 특히 캡 오버(Cap-over-engine) 형식의 트럭은 미제가 훨씬 많은 적재 공간을 가지고 있다.

미제 지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88mm포는 ‘최강의 포’로 통한다. 미제 90mm포 보다 관통력과 정확도가 높다. 미제 90mm포는 포구초속이 너무 낮다. 독일의 75mm포가 미제 76mm포 보다 우수한 이유도 동일하다.

미제 30구경 기관총은 우리가 가진 장비 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하다. 발사속도도 적절하다. 매우 잘 만들어졌으며 혹독한 환경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아군의 50구경 기관총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수하다. 대공용으로 탁월하다. 하지만 차량에 탑재하는 방식은 지상 공격에 부적절하다. 50구경 기관총은 경계 진지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독일제 기관단총은 아군의 소화기보다 훨씬 우수하다. 발사속도도 빠르고 정확도도 높다.

아군의 카빈은 탄걸림이 잦아 인기가 없다. 게다가 탄의 위력과 살상력까지 낮다. 톰슨 기관단총은 근접 전투에서 많은 장병들이 선호하는 무기이다. 발사속도도 양호하고 공격해오는 적 보병에 대해 높은 저지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군의 바주카포는 구경이 크고 관통력도 높다. 조준장치도 아군의 바주카포 보다 뛰어나다. 미제 바주카포 포탄은 불발율도 높다.

아군의 피복류는 현재 독일군이 착용하는 모든 피복류에 비해 우수하다. 과거 독일군의 엘리트 부대는 훌륭한 피복류를 지급받았지만 현재는 피복류의 질이 급락했다. 혹한기 작전에 유용한 피복류는 다음과 같다. 1) 구형 야전상의와 바지; 2) 덧신 형식의 방한화(Shoe pacs); 3) 모직 안감으로 만들어진 벙어리장갑; 4) 모직 모자와 신형 후드 등. 코트의 방한 성능은 좋지만 너무 거추장 스럽다. 그리고 기갑 병과에서 널리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독일제 쌍안경은 아군의 것 보다 특별히 우수하지 않다.

ibid., pp.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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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브루스Thomas K. Bruce 소위, 중형전차소대 소대장

본인은 프랑스 전역에 오래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적군과 아군의 장비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왔다.

개인적으로 독일 전차는 모두 아군의 M4 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적 전차의 장갑은 아군 전차의 장갑 보다 훨씬 더 철갑탄을 잘 막아낸다. 아군 전차의 장갑이 독일 전차의 장갑 보다 나은 점 한가지는 고폭탄에 대한 방어력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아군 전차의 장갑은 고폭탄을 맞을 경우 맞은 부위가 파이는 정도이지만 독일 전차의 장갑은 금이 가거나 깨져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번은 내가 지휘한 전차가 100야드 거리에서 지연신관을 장착한 75mm 고폭탄으로 4호전차의 포탑 전면 장갑을 완전히 관통한 일이 있다.

이 밖에 다른 대전차무기를 비교하면, 아군의 것은 독일제 보다 열등하다. 특히 바주카포는 독일제가 훨씬 우수하다. 본인은 직접 독일제 바주카포를 시험해 봤는데, M4 전차에 시험사격을 했을때 모든 부위를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밖에 대부분의 장비는 독일제가 미제에 비해 열등하다. 특히 독일군의 차량과 피복류는 아군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ibid.,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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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터 몽고메리Coulter M. Montgomery 중위, 제66전차연대

아군 전차의 조준경 조준선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배율이 충분치 않다. 신형 조준경은 구형에 비해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배율이 부족하다. 독일제 조준경은 렌즈의 품질이 우수한 듯 하다. 아군 전차의 페리스코프를 10배율이나 12배율로 만들수는 없는가? 페리스코프의 시야를 희생할 필요는 없지만 배율이 너무 낮다. 포수가 페리스코프를 사용하는게 너무 불편하다. 전차의 궤도도 넓어져야 한다. 신형 E8 현가장치는 기존의 현가장치 보다 훨씬 접지력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독일 전차의 접지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전차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다. 전차의 내부 구조는 아군 전차가 독일 전차 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76mm포를 탑재한 전차가 그렇다. 76mm포를 탑재한 전차는 75mm를 탑재한 전차 보다 훨씬 편하다. 전차병들의 고충을 아는 사람이 설계했다고 생각된다.

우리 부대에서는 T26 전차를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를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신형 전차는 독일 전차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주포와 방어력을 갖췄다고 알고 있다.

기타 장비.

경전차. 75mm포를 탑재한 신형 경전차는 훌륭하다. 이 전차는 거의 모든 임무에 투입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M5는 전차로서 쓸만한 물건이 아니다. 독일군 경전차는 상대해 본 일이 없어서 아군의 경전차와 비교 평가할 수 없다.

반궤도장갑차. 아군의 것이 독일제 보다 우수하다. 하지만 독일제 보다 나아봤자 쓸데가 없다. 반궤도 장갑차는 접지력이 형편없고 방어력도 낮아 대부분의 적 화기를 막아내지 못한다.

트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아군의 2½톤 트럭은 세계 최고의 트럭이다. 독일제 트럭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 아군의 지프도 마찬가지로 최고다.

아군의 소화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하지만 30구경 기관총의 총열 교체를 좀 더 쉽게 할 필요는 있다. 독일제 기관총은 총열을 순식간에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아군 기관총은 지속사격 능력과 정확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아군의 중화기도 좀 더 잘 만들수는 없었는가? 아군 화포, 특히 전차포의 포구초속이 좀 더 높았으면 한다. 독일군과 영국군은 더 많은 장약을 넣은 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포를 만든다.

바주카포. 바주카포를 처음 개발한건 우리다. 그런데 이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다. 독일제 바주카와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다. 위력 뿐만 아니라 명중율도 독일제가 높다.

피복류. 아군의 피복은 훌륭하다. 독일군의 군복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다만 일부 품목은 적군이 더 훌륭하다. 아군의 고글은 정말 저질이다. 독일제가 훨씬 좋다. 그리고 독일군의 동계 장비는 아군보다 우수한 것 같다.

ibid., pp.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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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헌리John M. Hunley 소위, 박격포 소대장.

개인적으로 아군의 81mm 박격포는 보병 지원 임무에 있어서 독일제 81mm 박격포와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갑부대의 화력 지원에 있어서는 독일제 120mm 박격포가 훨씬 유용하다고 확신한다. 기갑부대의 화력 지원을 위해서는 155mm 곡사포 수준의 사거리와 파괴력, 그리고 현재 사용되는 아군의 박격포 보다 훨씬 정확도가 높은 무기가 필요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자주박격포의 차대는 반궤도 장갑차 보다 중장갑을 갖춘 차량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경전차나 중형전차의 차대에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가를 올리면 좋을 것이다. 최근의 작전 처럼 평야 지대에서 박격포의 짧은 사거리로 인해 전차 부대를 근거리에서 지원해야 하는 경우 반궤도장갑차를 장비한 박격포 소대는 적의 직사 중화기에 극도로 취약했으며, 특히 마을이나 요새화된 거점을 우회해야 하는 경우 그런 위험이 있었다. 이런 위협을 극복하려면 중장갑을 갖춘 차대가 필요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박격포와 포탄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먼저 접촉신관을 장착한 M56포탄의 위력이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근접신관을 장착한 M43A1과 M56, M57 포탄도 적에게는 큰 위협이다. 만약 M56포탄에 접촉 모드와 지연 모드를 선택할 수 있는 신관을 장착하게 된다면 기존의 목적은 물론 다른 목적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박격포 소대를 완전 궤도 차량으로 편성하면 전차를 훨씬 잘 따라다닐 수 있으며 참호나 도랑 같은 장애물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p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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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A. 루이스O. A. Lewis 중위

독일군은 무연화약을 사용하고 있어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군의 전차포는 쏘자 마자 위치가 발각된다.

독일군이 사용하는 1인용 천막은 위장무늬가 들어가 있고 접어서 판초로도 사용할 수 있어 아군이 사용하는 것 보다 좋다.

ibid.,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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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세이델Frank Seydel Jr., 소위, 소대장.

본인은 3월 3일 독일 보징호벤Bosinghoven에서 약 600야드 정도의 거리에서 두대의 5호전차와 교전했다. 이때 나는 76mm포 탑재 전차를 타고 있었고 초탄은 피모철갑탄(APC)을 썼다. 초탄은 명중했으나 그대로 튕겨나갔다. 500야드 거리에서 다시 한발을 더 발사해 명중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에 철갑탄과 고폭탄을 합쳐 10발을 더 발사하고 나서야 독일 전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독일군의 전차는 우수한 장갑을 가졌지만 포탑 선회속도가 형편없이 느리다는 점을 알게 됐다. 적 전차를 격파한 뒤 내 전차를 좀 더 유리한 위치로 이동시켜서 불타는 적 전차를 관찰한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다.

ibid.,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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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쇼펠William L. Schaufel 중위, 중대장

1945년 2월 27일 독일 오버아모트Oberamot에서 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내 중대의 제2소대는 약 3,600야드 거리에서 6호전차 두대의 공격을 받았다. 셔먼 두 대가 격파됐다. 우리는 초속 3,400피트 76mm 고속철갑탄(HVAP)을 7발 발사했으나 모두 경사장갑에 튕겨나갔다. 6호전차의 우수한 광학장비와 포구초속의 높은 주포 때문에 아군은 화력에서 열세였다. 타이거 전차에 연막탄을 발사하자 적은 철수했다. 독일군은 연막을 치는 것이 포병이나 전폭기에 목표물을 지시하는 행동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호전차의 경우 고속철갑탄은 1,500야드 거리에서 효과가 있다. 아군 전차는 5호전차 보다 포탑 선회속도가 빨라서 적의 측면으로 우회기동을 할 때 유리하다. 우리는 4호 자주포의 측면으로 기동한 뒤 800야드 거리에서 76mm포로 사격을 해 이를 격파했다. 적 자주포는 회전포탑이 없는게 단점이다. 이 전투는 1944년 11월 16일 독일의 플로버리히Floverich에서 있었다. 이때 우리는 4발의 피모철갑탄과 지연신관을 장착한 고폭탄을 사용했다.

아군 전차는 차고가 높아서 적에게 훌륭한 목표물이다. 그리고 방사형 엔진은 출력도 낮은데다가 정비에 많은 손이 간다.

ibid.,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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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럴 오일러Ural E. Oyler 중위, 소대장.

독일군의 포구초속이 높은 전차포와 M4 중형전차의 75mm 주포를 비교하면 아군의 전차포는 실망스럽다. 과거 많은 전투에서 아군은 우리와 동일한 구경의 전차포를 사용하는 적과 교전했다. 독일 우박Uback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군은 포구초속이 높은 75mm 포의 공격을 받아 항공지원을 받을 때 까지 전진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군도 독일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포구초속이 높은 전차포가 있었다면 진격이 지체될 일도 없었을 것이며 전투 초반에 피격된 전차를 제외하고는 손실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탄약을 비교평가하면, 먼저 우유병 처럼 생긴 탄피를 도입해서 포구초속을 더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군이 사용하는 75mm 탄약은 독일군의 75mm 탄약 보다 형편없다. 마찬가지로 아군의 76mm 철갑탄의 관통력도 높여야 한다.

아군 전차의 고무패드가 달린 궤도와 독일 전차의 궤도를 비교해보면 아군의 모든 궤도차량의 궤도폭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 기갑차량과 교전을 했을때 아군 전차가 연약한 지반에서는 독일 전차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를 숱하게 목격했다.

신형 M4A3E8 전차는 많은 개량이 이루어져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고 있다. 차체 정면 장갑과 포탑 측면 장갑이 여전히 약하다는 점을 빼면 전차병들이 바라던 바를 적용하고 있다. M4A3E8에 고속철갑탄(HVAP)를 대량으로 보급한다면 독일 전차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본다.

ibid., 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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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런스 스워드Clarence R. Sward 소위, 소대장.

1944년 11월 17일 독일 푸펜도르프에서 게레온스바일러 방면으로 공격하던 중 M4 전차 1개 중대가 나의 경전차 소대를 앞서 철길을 건넜다. 아군 전차들이 400야드 정도 전진했을때 독일군이 사격을 개시했고 아군 중형전차들도 응사했다. 20분 동안 중형전차 9대와 경전차 1대가 격파됐지만 독일 전차는 단 한대도 격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목격한 적 차량은 전차 혹은 자주포 네대였다.

ibid.,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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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록William E. Larock 소위, 소대장.

1944년 11월 16일 내가 탄 M5A1 경전차는 40야드 거리에서 독일군의 바주카포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직경 1인치 정도의 구멍이 뚫렸고 파편이 차내로 튀어들어왔다. 피격된 부위는 차체 좌측면 후부였다. 어쩌면 최소 두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조종수가 평소 피격된 위치에 외투를 둘둘 말아서 보관하고 있었던 덕분에 사망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세명이 부상을 당해 2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차체 내부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ibid.,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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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코스토우Peter Kostow 중위, 제67전차연대 C중대 소대장.

50야드 거리에서 독일군 8명을 발견하고 37mm 산탄(Canister)를 발사한 일이 있다. 독일군은 포탄의 발사음과 폭발에 겁을 먹고 항복했다. 하지만 포로들은 상처 하나 없었다.

경전차를 몰고 적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적의 5호전차 2대를 만나 수많은 37mm 철갑탄을 발사했지만 무력했다. 적은 우리 경전차 두대를 격파해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우리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ibid.,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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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화이트James A. Whiter Jr., 중위, 제67전차연대 중대장.

본인이 소대장 보직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독일의 게레온스바일러 인근에서 아군의 좌측으로 우회하려는 5호전차 한대를 발견하고 소대의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800야드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해 적 전차가 후퇴하도록 했다. 교전을 계속하면서 거리가 1500야드까지 벌어졌다. 나의 소대는 75mm M4전차 3대와 76mm M4전차 2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목격한 명중탄만 해도 75mm와 76mm를 합쳐 10발이었다. 5호전차는 엄폐가 가능한 지점에 도달하자 내가 탄 차량에 명중탄을 날렸고 내 전차는 관통당해 화염에 휩싸였다. 개인적으로는 포구제퇴기가 달린 M4A3E8이 여지껏 내가 본 아군 차량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고속철갑탄을 대량으로 보급받을 수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ibid.,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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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오스본Thomas H. Osborne 중위, 제67전차연대 I중대 부중대장

2500야드 거리에서 적 6호전차를 목격한 일이 있다. 적 전차는 측면을 우리쪽에 드러내고 있었고 두개의 수로가 지나가는 능선 위에 호를 파서 차체를 숨기고 있었다. 다른 부대가 전진하려고 했으나 두 대의 전차만 잃고 후퇴해야 했다. 적 전차는 능선 위에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버틴 끝에 탄약이 소모되어 후퇴했다. 이때 내가 지휘한 소대는 적의 6호전차를 몰아내기 위해 수많은 철갑탄, 연막탄, 고폭탄을 발사했다. 우리 소대만 최소한 75mm 철갑탄 10발에서 15발 정도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었고 적 전차의 승무원들도 아군의 공격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ibid., p.109.

2016년 6월 6일 월요일

한국전쟁기 미육군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 비율에 관한 잡담


한국전쟁 당시 전차전은 주로 1950년 7~10월 사이에 일어났고, 전차는 대부분의 기간에 보병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7~10월 사이의 전차전도 대부분 소대 이하의 규모로 전개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군 전차들은 화력지원을 위해 고폭탄 중심으로 탄을 탑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8월 말, 미 8군 소속 전차대대들의 전차 포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1950년 8월 31일 미 8군 소속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현황

73대대
70대대
6대대
89대대
72대대
76mm
76mm HE
-
4,753
-
5,618
4,033
76mm APCT
-
-
-
933
671
76mm HVAP
-
790
-
136
98
76mm 백린연막탄
-
667
-
786
566
90mm
90mm HE/ MT신관
1,372
386
1,286
353
600
90mm HE/ PD신관
3,070
863
1,075
767
1,343
90mm HE
1,960
563
1,875
500
875
90mm APCT
946
266
887
236
444
90mm HVAP
99
28
93
22
43
90mm 백린연막탄
209
59
196
45
91
“Ordnance Daily Activity Report”(1950. 8. 31), War Diary: Headquarters Eighth United States Army Korea(1950. 8. 31), RG407 Records of the Adjutant General's Office U.S. Army: Command Reports, 1949 - 1954(Entry NM3 429), Eighth Army(EUSAK).

철갑탄 대비 고폭탄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실제 포탄 소모량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만, 보유량만 가지고도 당시 미군 전차 부대의 운용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번역글] T-34에 대한 재론(再論)

불법 날림 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8-1호(2015)에 실린 보리스 카발레르치크의 “Once Again About the T-34”를 번역한 것 입니다. 원 글은 러시아어로 발표된 것이라 영어 중역입니다. 본문의 주석에도 있지만 필자인 카발레르치크는 꽤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주해서 지금은 미국인입니다. 해롤드 오렌스타인의 번역 자체는 훌륭하다는 느낌입니다만 기술적인 용어가 많아서 저의 번역에 문제가 많을 듯 싶습니다.

이 논문의 기초 사료가 된 보고서는 인터넷 곳곳에 공개되어 있고 해외 포럼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으니 내용 자체는 익숙한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래도 필자인 카발레르치크의 논평도 꽤 흥미롭습니다.


참고삼아 몇년 전에 번역했던 스티브 잘로가의 글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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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에 대한 재론(再論)1)


필자: 보리스 카발레르치크(Boris Kavalerchik)
영문번역: 해롤드 오렌스타인(Harold S. Orenstei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가 그 유명한 소련의 T-34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T-34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전차는 수많은 영화와 그림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옛 전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물에도 묘사되어 있다. 전설적인 T-34에 대한 문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대개 이러한 것들은 T-34의 장점만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전차는 당시의 기준으로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추었고 기동력도 우수했다. 중요한 것은 이 세가지 요소가 균형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어느 한가지 요소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T-34의 주무장은 장포신의 76mm포였다. 이 포는 독소전쟁 초기 전장에 투입된 모든 목표물을 격파할 수 있었는데 장갑을 갖춘 목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군이 중장갑을 갖춘 중전차를 투입하고 기존의 중형전차들도 장갑을 강화하자 T-34의 무장은 신형의 훨씬 강력한 85mm포로 교체됐다.
T-34의 방어력은 장갑의 두께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경사장갑과 장갑판을 조립하는 개선된 용접방식에 기인했다. 개선된 용접방식을 채택함으로써 T-34는 높은 생산성을 가지게 됐을 뿐 아니라 용접공의 숙련도나 건강, 정신 상태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용접이 가능했다.
T-34는 강력한 디젤엔진과 폭이 넓은 궤도를 채택하여 기동성이 우수했다. 여기에 사용된 디젤엔진은 출력과 토크 값이 높아 성능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차에 사용했던 가솔린 엔진에 비해 생산성이 높고 화재위험도 적었다. 폭이 넓은 궤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접지압이 낮았고 야지기동 능력이 우수했는데 특히 러시아의 도로 사정이 엉망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 점이 중요했다.


이와 같은 T-34의 장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언급되었기에 잘 알려져 있다. T-34는 우수한 성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소량만 생산된 값비싼 전차가 아니라 수만대가 생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소전쟁 발발 직전 부터 1945년까지 총 52,000대에 달하는 각종 형식의 T-34와 이 전차에 기반한 6,000대의 자주포를 비롯한 파생형 차량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전쟁이 끝날때 까지 살아남은 차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대조국전쟁 기간 중 붉은군대의 중형전차 손실은 생산량의 80%에 달했으며 이 중 절대다수가 T-34였다.(Krivosheev, p.479) 그토록 찬양받는 T-34의 손실이 이렇게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손실 원인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T-34의 손실 원인 중에는 순수한 기술적인 문제가 몇가지 있었고 이 글에서는 바로 그 기술적인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전차를 포함한 모든 장비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전차를 기술적 걸작이라고 칭할 수도 있고 고철 덩어리라고 평할 수도 있다. 하나의 장비에 대한 평가를 한가지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평가는 여러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언론검열국2)이 검열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T-34는 힌두교도가 소를 떠받드는 것 같은 숭배의 대상이 됐으며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소련의 공식 선전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차는 T-34라는 평가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T-34가 최강의 전차라는 논의의 근거를 독일측이 제공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패전국 독일의 장성들은 전후 패전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한 변명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무능한 히틀러, 소련의 열악한 교통망, 동장군 등등. 이러한 변명 중에는 T-34가 독일군의 전차와 대전차포를 압도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독일 장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보다는 T-34의 강력한 성능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체면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T-34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종류의 전투차량을 다른 것과 비교할 때 기초적인 전술적, 기술적 특성을 활용한다. 이와 같은 통계는 전차의 무게, 주포의 구경, 장갑의 두께, 엔진 출력, 최대속도와 같은 지표를 반영하고 있고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 밖에 나와있는 일부분만 보고 빙산에 대해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실험장에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전차를 시험한 내용을 담은 시험 보고서를 봐야 한다. 기갑차량에 관심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종류의 보고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개 이런 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43년 5월 영국군은 튀니지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티거 중전차 한대를 노획했다. 이 전차를 분석한 보고서가 단행본으로 공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이 책은 여러개의 도표, 사진, 축적도 등을 담고 있었으며 총 200쪽 분량이었다.(Fletcher)


미국과 영국은 T-34와 KV전차3)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험을 실시했으며 자세한 시험을 거친 뒤 티거 전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 소련제 전차를 획득했을까? 그것은 렌드-리스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렌드-리스 프로그램은 미국 정부가  히틀러에 맞서는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군장비, 무기, 탄약, 전략물자,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대여해 주고, 미국 또한 마찬가지로 동맹국으로 부터 물자를 빌리는 것 이었다. 미국이 렌드-리스 프로그램을 통해 동맹국에게서 물자를 빌린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렌드-리스 프로그램에 따르면 미국으로 부터 원조를 받는 동맹국은 가능한 만큼 미국에 지원을 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소련은 미국에 목재, 모피, 크롬과 망간, 백금, 금을 제공했다. 또한 소련이 획득한 독일의 군사기술과 소련의 군사기술도 교환의 대상이었는데 여기에는 전투용 장비도 포함되었다. 예를들어 1945년에 소련은 미국으로 부터 최신형 M-26전차를 제공 받았다. 그리고 소련이 동맹국에게 보낸 장비 중에는 T-34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6월 3일 니즈니 타길에 위치한 우랄 전차공장에 파견된 군사대표 코지례프 중령은 모스크바로 부터 1개월 내에 세대의 T-34전차를 외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라는 서면명령을 받았다. 이 중 한대는 미국에 보낼 예정이었다. 다른 두대의 발송지는 나중에 통보하겠다고 되어 있었다.(TsAMO D. 936, pp. 52–53) 우랄 전차공장이 선정된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이당시 우랄 전차공장이 생산하는 T-34는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것들 보다 품질이 나았기 때문이다. 1941년 가을에 T-34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니즈니 타길로 피난해서 현지에 있던 기관차 공장과 합병했다. 우랄 전차공장은 굳건한 전통이 있었으며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의 공장번호 183번을 넘겨받았다. 물론 우랄 전차공장의 담당자들도 외국인들에게 체면을 구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능시험을 통과한 가장 우수한 전차 3대를 골랐다. 이 3대는 당시까지 적용된 개선사항을 모두 반영한 최신형이었다.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해당 차량들은 차량의 내외부를 깔끔히 정리했으며 연료와 윤활유를 가득 채웠다.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 페인트는 세겹이나 칠했다. 차체 하부의 물이 새어 들어올 수 있는 틈에는 그리스를 가득 발랐고 해치와 구멍, 각 부위의 틈새는 세심하게 밀봉처리를 했다. 그리고 차체 내부에는 방습제를 넣은 주머니를 달았다. 또한 세대의 T-34는 자세한 운용 및 정비 교범이 첨부되었다. 또한 엔진, 무장, 무전기에는 별도의 교범이 첨부되었으며 조립공정을 담은 설명서와 예비부품, 장비품도 포함되었다. 1942년 8월에 이 중 한대의 T-34가 KV전차와 함께 미국으로 보내졌다. 10개월 뒤인 1943년 6월에는 또 다른 한대의 T-34와 KV전차가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보내졌다.(TsAMO D. 1744, pp. 58, 64) 마지막 한대의 T-34는 전차공업위원회가 보관하게 됐다. 이 전차는 오늘날 모스크바의 연방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국에 도착한 T-34의 시험은 1942년 11월 29일에 시작되어 거의 1년간 계속됐다. 이 실험은 당시 미육군의 장비 실험장이었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북쪽의 에버딘 시험장에서 이루어졌다. 첼랴빈스크 트랙터공장에서 생산된 KV전차도 이곳에서 시험받았다. 시험이 끝난 뒤 두 종류의 전차에 대한 두꺼운 보고서가 작성되었으며 사본 한 부는 소련에 보내졌다. 영국 또한 자국에서 T-34를 시험한 결과를 소련에 통보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보고서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의 내용들은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있다. 전차애호가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43년 8월에 작성되어 붉은군대 정보총국 제2국장 흘로포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Хлопов소장이 서명한 ‘T-34와 KV 시험에 참여한 미국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 기업체 대표자, 군간부, 군사위원회 성원들의 해당 전차에 대한 평가’이다.(TsAMO D. 1712, pp. 91-99) 많은 사람들이 이 보고서를 미국에서 소련 전차를 시험한 결과를 요약한 내용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보고서의 제목과 여기에 서명한 책임자의 지위를 고려하면 이 보고서를 단지 미국측 시험 보고서나 그 요약본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평가’라는 단어를 볼때 시험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대한 의문은 이 보고서의 사본을 스탈린, 전차공업위원회 위원장 말리셰프, 붉은군대 기갑총국장 페도렌코 상장에게 제출한 정보총국의 임시 국장 일리쵸프Иван Иванович Ильичёв 중장을 통해 풀 수 있다. 일리쵸프가 보고서에 첨부한 서한을 보면 이 보고서는 붉은군대 정보총국 소속 장교가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 기술자는 그의 의견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과 미군 장교, 전문가들, 군사위원회 성원들, 그리고 미국 기업들이 파견한 대표자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TsAMO D. 1712, p. 90a) 이 보고서의 내용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각 ‘평가’ 내용을 하나 하나씩 인용하고 그에 대한 논평을 하겠다.

“전차의 상태:

중형전차 T-34는 343km를 주행한 뒤 완전히 고장이 났으며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고장원인: 엔진 내부에 엄청난 양의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그 원인은 엔진의 에어클리너가 너무 조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스톤과 실린더가 망가져 고장이 났으며 수리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전차의 시험은 중단될 예정이며 KV전차 및 3인치포 탑재 M-10 전차와의 사격시험이 예정되어 있다. 사격시험을 마친 뒤에는 에버딘으로 이송해 전시할 예정이다. KV중전차에도 기계적 문제가 속출하고 있지만 아직 가동은 가능하며 시험을 계속하고 있다.”


T-34가 쉽게 고장났다는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당시 T-34의 공장 보증한도는 1,000km 주행이었지만 실제로는 생산된 차량 대부분이 보증한도 근처도 달려 보지 못했다. 붉은군대 기갑총국장 페도렌코 장군에게 제출된 기갑병과 과학연구시험소 소속의 시험장의 통계를 보면 T-34는 평균 200km 미만을 주행하면 창정비를 받아야만 했다. 에버딘에 보내진 T-34는 되려 평균보다 양호한 것 이었다.
게다가 1942년 당시 소련 전차산업이 처한 환경은 최악이었고 전차의 성능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저하되었다. 그 중 하나는 새로운 장소로 피난한 공장들의 생산 조직을 재편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대규모의 생산설비를 이동한 뒤 다시 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은 생소한 일 이었다. 수많은 고정 설비와 기계 장치, 다른 공장들과의 생산 체계,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자원이 사라졌다. 경험이 풍부한 노동자와 숙련공, 기술자의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공장 노동력의 평균 수준도 급락했다. 공장 노동 경험이 없는 사람을 대규모로 동원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여성과 청소년이 다수 포함되었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헌신적으로 일했으며 전선의 군인들을 돕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지식과 경험, 전문적인 기술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전차를 만드는 것 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전차 손실이 엄청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생산 품질에 대한 요구 기준을 낮출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엔진에 시동만 걸려도 합격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결과 1942년도에 생산된 T-34 중 다수는 30~35km만 주행해도 창정비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문제점은 몇가지 측면에서 정당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에 전차는 실제 기계적 수명을 다 할 때 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짧건 간에 말이다. 당시 일선에 배치된 소련군 전차의 ‘기대수명’은 철로로 수송되고 정비를 받는 기간을 제외한다면 평균 4~10일, 혹은 1~3회의 공격작전에 투입될 때 까지였다. 1942년에는 평균 66.7km를 주행하면 기계고장, 혹은 전투로 인해 완전손실이 되었다. 이것은 T-34가 창정비를 받아야 하는 기계수명의 3분의 1 정도였다. 즉 대부분의 전차는 고장이 날 기회 조차 없었다.


또한 당시 전차의 심장이었던 б-2 디젤엔진(T-34와 KV 두 차종에 장착되는)이 아직 초기의 ‘기술적 결함’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 엔진 공장에서는 б-2 엔진의 수명을 최소 100시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б-2 엔진은 연구소의 환경 하에서는 어느 정도 작동했지만 실제로 전차에 장착되면 기껏해야 70시간 정도 밖에 버티지 못했다. 에버딘 시험장에서 시험하던 T-34의 엔진은 72.5시간을 가동한 뒤 고장이 났는데 이 중에서 58.45시간은 저부하 상태, 14.05시간은 부하가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KV전차의 엔진은 66.4시간을 가동한 뒤 고장이 났고 이 중에서 20.02 시간만 부하가 걸리지 않았다는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Bakhmetov et al., pp.25, 26) 그리고 б-2 엔진의 가장 큰 결함은 연료 소모량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엔진은 다른 디젤엔진에 비해 연료 소비량이 12% 많았다. 그리고 윤활유 소모량은 다른엔진에 비해 3~8배나 많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1942년 가을 무렵에는 연료 부족 보다는 윤활유 부족 때문에 T-34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전차공업위원회 기술부에 따르면 T-34는 평균적으로 200~220km를 주행한 뒤 연료보급을 해야 했지만 윤활유 교체는 평균 145km를 주행한 뒤에 해야 했다.(Technical Manual No.9-759, p. 32) 반면 같은 시기 미국과 독일 전차는 T-34 처럼 엔진오일을  자주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예를들어 T-34와 동급이라 할 만한 M4A3셔먼 전차는 400km를 주행할 때 마다 엔진오일을 교체해야 했다.(Technical Manual No.9–759, p. 32) 독일의 4호전차는 2,000km를 주행한 뒤에 엔진오일을 교체해도 됐다.(Perrett, p. 15)  


“전차의 외형:

미국측에서는 단 한명의 예외 없이 우리 전차의 차체 형태를 좋게 평가했다. 특히 T-34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T-34의 차체 형태가 미국측이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차종 보다 우수하다는 데 동의했다. KV전차의 경우 미군이 현재 사용하는 전차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측이 T-34의 차체형태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T-34의 차체형태는 당시 기준으로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그 유명한 독일 판터 전차의 차체 형태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어떤 무기를 접한 적군이 그것을 복제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무기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하지만 경사장갑을 적용한 최초의 전차는 T-34가 아니다. T-34의 시제품은 1937년 독학으로 공부한 발명가 치가노프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BT-SV전차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치가노프는 프랑스의 FCM36 경전차에 영향을 받았다. FCM36은 용접한 40mm 두께의 경사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FCM36전차의 생산대수는 100대에 그쳤다. 그러니 T-34야 말로 경사장갑을 채택한 전차 중에서는 최초로 대량생산에 들어간 차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갑:

T-34와 KV 전차의 장갑재에 대한 화학 분석에 따르면 두 차종의 장갑판은 대부분 연철이지만 표면경화처리가 되어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미국측은 장갑판의 경화방식을 변경하여 장갑판의 두께는 줄이면서 방어력을 강화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다면 전차의 중량을 8~10% 정도 줄일 수 있으며 (속도를 증가시키고 접지압을 낮추는 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T-34의 장갑방어력은 충분했지만 개선될 필요가 있었다. T-34의 장갑구조는 1930년대 말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45mm 구경의 철갑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 이었다. 충분한 방어력을 얻기 위해서 장갑판에 열처리를 해서 경도를 높였다. 그리고 T-34의 ‘전우’ 였던 미국의 셔먼 탱크의 장갑판은 경도가 균일하고 품질도 훌륭했다. 그래서 셔먼의 장갑은 T-34의 경도높은 장갑판과 달리 적의 포탄이 명중했을 때 장갑판에 균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특히 관통을 당했을 경우 그러했다. 그러므로 T-34의 장갑판은 결함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측은 T-34를 시험한 뒤 작성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경화처리는 표면에만 적용됐으며 균일하지도 않다.
2.장갑판의 강도가 부족하다. 장갑은 주로 연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학적 구성도 일정치 않다.
3.장갑판의 경도는 공식적인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으며 부위별로 차이가 난다.
4.용접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이와 같은 단점이 앞서 언급한 제조 공정상의 문제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가지 문제점을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어 T-34의 주조제 포탑도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물로 만든 장갑은 용접으로 조립한 장갑 보다도 품질이 조악했는데 그 이유는 주물로 장갑을 만들때 압연 강판에 사용하는 мз-2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мз-2철은 민수품목으로 사용될 때 и8-с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с라는 철자는 이 제품의 사용처를 명시하는 것 이었다. 즉 용접 조립에 사용되는 압연강을 제조하는 철이었다.4)  이 제품은 주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мз-2로 만든 주조장갑은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단 포탑 장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T-34의 차체 내부의 보우빔(Bow Beam)도 주조 방식으로 만들면서 내부에 직경 0.5인치 정도의 수축기공(shrinkage porosity)으로 둘러싸인 공동이 생겼고 이로 인해 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5) 반면 전차 생산에 мз-2철만 사용함으로서 사용하는 재료와 열처리 방식이 단일화 되었기 때문에 작업공정이 단순화 되고 노동생산성도 높아졌다. T-34/85의 주조포탑은 71л철로 만들었는데 이 철은 바로 주조작업용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Postnikov, pp. 22, 24, 26) 이로 인해 주조장갑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이건 1944년의 일이었다.


1943년 11월 24일 메릴랜드의 워터타운 조병창에서 작성한 공식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터타운 조병창의 연구실에서는 에버딘 시험장에 있는 T-34와 KV전차의 장갑재 샘플을 얻어 재질을 분석했다.


“Mn-Si-Ni-Cr-Mo강과 Mn-Si-Mo강의 실리콘 함유량은 1.0~1.5% 수준으로 높다. 장갑재의 구성요소들은 각 부위에 필요한 경도를 충족할 만큼의 경화능성을 제공한다…T-34중형전차의 장갑재는 최대한의 관통 저항력을 얻기 위해 열처리를 통해 매우 높은 경도 수준(429~495 브리넬)을 얻었지만 그대신 구조적 안정성6)이 저하되었다…. 압연강으로 만든 장갑과 주물로 만든 장갑의 인장력을 시험한7) 결과 미국 내에서 사용하는 철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높은 인장력을 보이고 있다…..압연강판의 품질은 부위별로 최상과 최하를 오갈 정도로 들쑥날쑥하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부위 별로 조립 방식에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장갑재의 일부는 그 두께 때문에 충분한 수준의 강도를 가지고 있지만 경화 처리 자체는 불완전한 경우가 있다.(Experimental Report No. WAL. 640/91, pp. 1, 5, 9)”


이 평가는 한 미국인의 주관적 평가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기록이나 번역 과정에서 왜곡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미국인 전문가들의 공식적인 의견이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 기술자들은 장갑재의 화학적 조성과 기계적 특성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열처리 방식으로 인해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차체:

가장 큰 문제점은 차체 하부의 경우 물 속에 들어가면 물이 새어 들어오고 차체 상부는 비가 내릴 경우 물이 새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폭우가 내리면 더 많은 물이 틈을 타고 차체 안으로 스며들어와 전자 장비를 고장 내고 탄약을 못 쓰게 만든다. 탄약의 적재 방식은 호평을 받았다.”


물이 새어 들어오는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


1.용접면의 불량.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미국측은 T-34의 용접 상태가 불량한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전기 용접으로 용접면이 장갑판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때 이것을 적절한 기술적 방식으로 제거하지 않을 경우 쉽게 균열을 발생 시킬 수 있다. T-34의 경우 이런 일이 가끔 발생했다.(Kolomiets, pp. 295-296, 304)
2. 해치를 포함해 승무원이 드나드는 부분, 전차의 점검창이나 각 부위의 결합부, 포탑과 차체의 상면, 각종 커버, 조준경 등에 있는 틈.
3. 관측창, 피스톨 포트, 엔진 커버와 같은 작은 구멍.
4. 포탑링의 볼베어링.


기본적으로 T-34는 설계단계에서 틈이 생기는 부분에는 고무로 밀봉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1942년 초 소련은 극심한 고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무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하던 공장들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독일군이 진격해 오면서 이들 공장은 새로운 지역으로 피난해서 생산을 시작해야 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부터 1942년 5월까지 고무 생산 공장들은 전쟁전에 비축한 원료와 렌드-리스로 들어온 원료로 고무를 생산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고무 소비를 줄이려 했고 고무가 반드시 필요한 부문에만 고무가 공급됐다. 고무를 아끼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1942년 1월 부터 1943년 8월까지 T-34의 보기륜은 외부에 타이어를 씌우는 대신 내부에 고무 쿠션을 넣는 방식으로 생산됐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 43) 또한 노동 소요를 줄이고 기계류의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조립 후 마무리 공정을 대거 생략했고 특히 차체의 경우 그게 심했다.  그 결과 부품 사이에는 공간이 발생했다. 이때문에 T-34는 물이 잘 샐 수 밖에 없었다.
T-34의 주포 포탄은 대부분 전투실 바닥에 있는 특수한 탄약상자에 적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상자당 2~3발이 수납되었다. 안전성의 측면에서는 이것이 최상이었다. 그래서 에버딘에서 T-34를 시험한 관계자들은 이 점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도 문제는 있었다. 전차의 차고가 높아지면 탄약을 꺼내는 것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고 전차 안으로 물이 스며들기라도 하면 탄약상자에 들어있는 포탄이 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미국 기술자들은 이 때문에 탄약에 녹이 슬었다고 지적했다.


“포탑:

가장 큰 문제점은 포탑 내부가 너무 좁다는 것이다. 미국측은 우리 전차병들이 어떻게 양가죽으로 된 겨울복장을 하고도 포탑에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전차의 포탑 선회 장치는 매우 불량했다. 모터가 매우 약해서 자주 과부하가 걸렸고 불꽃이 자주 튀었으며 이때문에 포탑 선회모터에 달린 저항기가 타버렸다. 또한 선회장치의 기어 이빨이 뭉개지기도 했다. 미국측은 유압식을 택하거나 아예 수동으로 돌리는게 낫다고 평가했다.”


T-34의 포탑이 비좁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놀랄일도 아니다. T-34의 포탑은 이 전차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45mm포 탑재 A-20전차의 포탑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비좁은 포탑에 훨씬 더 큰 포미와 제퇴 공간이 필요한 76mm포를 탑재했으니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비좁은 포탑 내부 공간 때문에 전차병들은 단순히 불편함만 느낀 것이 아니라 포탑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 조차 어려웠고 특히 외부 관측을 위해 움직이는데 제약이 심했다. 이때문에 전차장이 T-34에서 내리는데 최소한 11초는 소요됐다. 그러니 전차에 불이라도 붙으면 몇 초 사이로 전차병의 생사가 갈렸다. 내부 공간이 비좁고 탄약 배치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T-34는 기동을 하면서 분당 세발 정도 밖에 쏠 수 없었다.(TsAMO D. 41, p. 15) 포탑링의 직경이 1,420mm로 매우 좁았기 때문에 승무원을 한명 더 태워 전차장이 사수를 겸하지 않게 할 수도 없었다. T-34/85에서는 포탑링의 직경이 1,600mm로 커져서 포탑 승무원을 세명으로 늘리고 85mm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반면 셔먼의 포탑링은 1,753mm였다. 셔먼의 승무원은 T-34의 승무원보다 1.5배는 많은 공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미국측에서  T-34의 전차병들이 내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측의 포탑선회장치에 대한 비판은 주관적이다. 셔먼에는 두 종류의 포탑선회장치가 있었다. 유압식과 전기식이다. 유압식이 보다 잘 작동했기 때문에 셔먼의 각 형식 중 대부분이 유압식포탑선회장치를 채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압식포탑선회장치 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는 유압식과 호환이 가능한 전기식포탑선회장치를 달고 있었다.
물론 T-34의 포탑도 수동으로 선회가 가능했다. 수동식 선회장치는 정밀한 조준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속도를 3단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전기식선회장치는 신속한 선회에 사용하는 것 이었다. 포탑의 신속한 회전은 전투, 특히 근접전에서 매우 중요했다. 전기식선회장치 때문에 T-34는 14.3초에 포탑 회전을 마칠 수 있었다.(Tank T-34, p. 41) 그렇기 때문에 전기식선회장치를 채택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설계와 생산 공정은 수준이하였는데 특히 에버딘의 시험에 사용된 T-34에 탑재된 선회장치가 그러했다.


“무장:

ф-34 전차포는 매우 훌륭하다. 매우 단순하고 고장도 거의 없으며 운용이 편리하다. 단점은 미제 3인치 전차포에 비해 포구초속이 낮다는 것이다.(전자는 초당 3,200피트, 후자는 초당 5,700피트이다.)


미국측이 T-34에 탑재된 ф-34를 높게 평가한 것은 당연하다. 이 전차포는 당대의 걸작 중 하나였다. 단순하고 값도 싸며, 크기도 작도 신뢰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수치는 다소 이상하다. ф-34 전차포에 철갑탄을 사용했을때 포구초속은 662미터(2,172피트)였다.(Ust’yantsev and Kolmakov, p. 210)  1942년 부터 생산된 M4셔먼 전차는 75mm M3 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 전차포는 철갑탄을 사용했을때 포구초속이 619미터(2,030피트)였다. 그러므로 포구초속으로 비교하면 M3 전차포는 ф-34 전차포 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설사 HVAP T45탄을 사용한다고 해도 포구초속은 869미터(2,850피트)에 불과하다.(Hunnicutt, p. 562) 또한 T45탄은 시험적으로 소량만 생산된 것으로 일선 부대에는 지급되지 못했다. 보고서에서 포구초속을 실제의 두배 가량인 1,737미터(5,700피트)로 기재한 것은 논의가 필요하다. 제2차대전이 끝난 뒤에 등장한 APFSDS탄 정도나 되어야 이정도 속도가 나오며 게다가 이 탄은 활강포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작성 당시의 오류이거나 번역 당시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조준경:

이 조준경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는 것이 중평이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조준경은 물론 현재 미국이 개발 중인 조준경 중에서도 이것 보다 우수한 것은 없다고 한다.”


T-34의 주포 조준경은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편에 속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에버딘 시험장의 시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조준경 중에서 가장 우수한 물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획한 독일 전차의 시험은 T-34의 시험 이후에 이루어졌다. 독일 전차의 조준경은 구조나 생산품질 측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고 쉽게 복제생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딘에 보내진 T-34에 탑재된 тмфд 조준경은 당시 미군 전차에 사용하던 조준경 보다는 우수했다. 이 조준경은 당시 기준에서 충분히 유용한 제품이었고 600~800미터 거리까지는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이보다 먼 거리에서는 포격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조준경의 주요한 단점은 렌즈에 사용된 재료의 질이 낮았다는 점이다. 렌즈의 투명도가 낮고 기포가 있었다. 1941년 8월 부터 1943년 10월까지 소련에서 생산된 전차포 조준기의 품질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이 시기에는 조준경에 사용할 원재료의 생산지가 적의 손에 있었으며 숙련된 인력도 구하기 어려웠고 광학장비를 생산하는 공장들은 동부로 이동해야 했다. 조준경과 관측장비는 종종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조립되고 조정되었다. 게다가 이런 비숙련 노동자들 조차 과로와 굶주림,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위해서는 극단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살아남은 광학장비 전문가들이 다시 전선에서 차출되어었고 광학장비 생산과 관리에 필요한 특수장비와 원재료는 미국으로 부터 렌드-리스를 통해 조달했다. 전쟁 후기에는 노획한 독일제 조준경을 기반으로 한 신형 조준경이 개발됐다.(T-34/85에 탑재된 тш-16 조준경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전쟁 후반기에는 소련 전차에 사용되는 조준경의 품질이 크게 향상됐다.

“무한궤도:

미국측은 철제 무한궤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선에 투입된 미제 전차의 철제 무한궤도와 고무 무한궤도에 대한 평가를 얻기 전에는 고무 궤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미국측의 관점에서 소련 전차의 궤도는 너무 얇게 만들어졌다는게 단점이다. 아군 전차의 궤도는  소화기의 사격과 지뢰에 쉽게 파괴된다. 궤도를 연결하는 핀은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사용된 철의 재질도 저질이다. 이때문에 궤도가 쉽게 마모되고 종종 끊어지기까지 한다. 처음에 미국측은 기동륜으로 궤도핀을 당겨서 기동하는 방식을 좋게 평가했지만 궤도가 마모되고 나면 궤도핀이 휘어지고 이로인해 종종 궤도 자체가 끊어지기도 했다. 미국측은 궤도를 좀더 두껍고 무겁게 만들기 위해서 장갑 두께를 조금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미국측은 궤도가 넓은 점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사람이 기술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식이 있었다면 미제 전차도 고무 무한궤도는 사용하지 않는 다는 점을 명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철 케이블로 보강한 고무 궤도는 경장갑차량, 특히 10톤 미만의 반궤도장갑차에 주로 사용됐다.(16톤급 차량에 대해서도 고무궤도를 시험하기는 했다. Ogorkiewicz, p. 103) 셔먼 전차의 경우 궤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고무 패드를 단 강철 궤도를 사용하기는 했다. 궤도의 고무 패드는 기동시 소음을 줄여주고 도로 주행시 승차감을 향상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모든 지형에서 그런 효과를 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련은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이었기 때문에 도로 표면의 손상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비포장 도로에서는 전차의 접지압을 낮추는 것이 더 중요했으며 특히 야지에서 기동할때 그러했다. T-34의 무한궤도는 이런 환경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T-34가 셔먼보다 우월하다고 하겠다. T-34의 접지압은 0.72kg/cm인 반면 셔먼은 0.96kg/cm이다. 야지 기동 능력은 셔먼이 T-34보다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 공정의 문제로 인한 결함이 있었다. 주된 원인은 무한궤도 생산량이 부족한데 있었다. 무한궤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랄 전차공장은 1942년 2월 1일 부터 10일까지 생산한 전차 중에서 68%만 전선에 보낼 수 있었다. 나머지 전차는 궤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한궤도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궤도 제작에는 부적합한 공장에서도 궤도를 생산해야 했다. 그 결과 생산된 무한궤도의 절반이 불량품이었다. 궤도는 자주 부러지고 궤도의 핀이 찌그러지거나 떨어져 나갔다.(Svirin, ‘Lapti’ dlya T-34, pp. 39–40) 궤도핀의 문제점은 에버딘에서 실시한 시험에서도 드러났다. 그리고 미국측은 이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T-34의 궤도는 시험중에 몇 차례 끊어졌다.


“현가장치:

T-34의 현가장치는 형편없다. 미국측은 수년전 크리스티 현가장치를 시험한 결과 이것의 채용을 단호히 거부한 바 있다. T-34의 현가장치에 사용된 스프링은 저질의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쉽게 늘어지고 이로 인해 차체가 주저앉는 현상이 있다. KV전차의 현가장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가장치에 사용한 스프링의 조악한 재질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당시에는 스프링에 사용할 철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1942년 3월 부터 1943년 5월까지 스프링에 사용할 수 있는 철을 생산할 수 없었다. 스프링 생산에 필요한 철은 렌드-리스를 통해 공급되었고 그 양도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스프링 생산에 필요한 철은 최대한 절약해야 했다.
현가장치에 사용된 스프링의 품질이 조악했던 또 하나의 원인은 열처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T-34에 사용되는 부품들의 열처리는 장갑판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균일하지가 못했다.
또 한편으로는 현가장치의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T-34는 기본적인 구조를 BT전차로 부터 이어받았다. 그리고 BT전차는 기본적인 설계를 미국의 발명가 존 월터 크리스티의 시제품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크리스티 현가장치는 장점(리턴 롤러가 필요 없어 구조가 단순하고, 대형 보기륜을 채택해 리턴 롤러가 없어도 궤도의 마찰이 적으며, 현가장치 자체가 측면 방어력을 강화함)과 단점(스프링하 중량이 무거워 주행감이 나쁘고, 차체에서 현가장치의 스프링 축이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며, 현가장치를 제외하면 측면 방어력이 낮아진다)을 가지고 있었다. 요약하면, 크리스티 현가장치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라 할 수 있었으며 소련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사용했다.
T-34의 현가장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완충장치가 없어서 내부 마찰이 적기 때문에 거친 지형에서 고속으로 기동시 전차의 차체가 끊임없이 요동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 현가장치에도 완충장치는 달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이 현가장치 구조상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측은 완충장치가 없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셔먼 전차도 완충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셔먼의 현가장치 또한 문제는 있었다. 소련과 미국의 다음 세대 전차들은 독립된 토션바 현가장치를 채택했다. 토션바 현가장치는 현대 전차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현가장치이다. KV전차는 토션바 현가장치를 채택했지만 미국측은 이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엔진:

디젤엔진은 성능이 좋고 가볍다. 전반적으로 미국 기술자와 군 관계자들은 전차에 디젤엔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데 동의했지만 미국의 디젤엔진 생산 기업들은 모두 미해군에 납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육군은 디젤엔진을 획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T-34에 사용하는 디젤엔진의 단점은 공기정화기의 성능이 범죄수준이라는 점이다. 미국측은 공기정화기를 이렇게 설계한 것은 의도적인 사보타지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측에 제공한 설명서에서 공기정화기를 유조(油槽)여과장치로 칭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실험실과 야외에서 시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a)전반적으로 공기정화기가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정화하지 못하고 있다.b)공기정화기의 처리능력으로는 설사 공회전을 하고 있다 해도 엔진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한다. 그결과 엔진이 충분한 출력을 낼 수 없으며 실린더로 들어간 먼지가 실린더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엔진내부 압력을 낮춰서 출력을 더욱 더 떨어트린다.  또한 기계적인 관점에서 필터는 매우 조악하게 만들어졌다. 용접을 한 부위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고 이때문에 엔진오일이 새는 등의 문제가 있다. KV 전차의 필터는 조금 더 나은 수준이지만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충분한 양의 정화된 공기를 공급하지는 못한다. 엔진 시동장치는 아주 형편없다.(출력이 낮고 신뢰성도 떨어진다.)”


당시 미국측도 셔먼 전차의 일부 형식에는 디젤엔진을 탑재했었다는 점은 언급하고 넘어가자. 디젤엔진을 탑재한 셔먼은 렌드-리스 프로그램을 통해 소련에 공급됐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군 용으로는 거의 대부분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차량만을 보급했다. 이것은 일선부대에 연료 보급을 단순화하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디젤엔진을 필요한 만큼 조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군의 잠수함, 소해함, 상륙정, 소형 선박에 최우선적으로 디젤엔진을 공급했다.
T-34의 공기정화기에 대한 미국측의 비판은 모두 타당하다. 기본적인 구조가 매우 원시적이었다. 공기정화에 사용되는 부품은 기본적으로 오일을 바른 망에 불과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비용도 저렴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이었다. 공기정화기의 기능은 형편없었다. 공기정화능력은 거의 전적으로 망의 간격이 얼마나 균일하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이 망이 최대한 균일하게 만들어졌다 해도 제때 청소하고 기름을 쳐주지 않으면 공기 중 입자의 수준이 1g/㎥만 되더라도 공기정화능력의 79.6% 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TsAMO D. 1712, p. 100) 공기정화기가 처리하지 못하는 먼지는 그대로 엔진 실린더로 들어와 마모를 일으키면서 실린더 라이너와 피스톤 링을 닳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실린더압을 떨어트리고 오일 소모량을 늘렸다. 100호 시험공장의 기술자들은 1943~44년에 б-2엔진의 공기중 입자에 의한 오염 효과를 연구하기 위한 특별 시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공기중에서 걸러낸 먼지가 일반적인 펄라이트 주철 보다 단단한 입자로 날카롭게 뭉쳐져 엔진 오일과 뭉쳐지면 마모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피스톤 링과 피스톤 실린더, 흡기 밸브를 마모시킨다. 그 결과 엔진출력이 저하되고 엔진 오일과 윤활유 소모를 늘리며, 조기에 엔진 고장을 일으켜 정비 소요를 일으킨다.(Ust’yantsev and Kolmakov, p. 50)”


게다가 공기정화기가 걸러낸 먼지는 빨리 망의 구멍을 틀어막아 엔진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했다. 여름철에는 엔진을 10시간 가동할 때 마다 공기정화기의 망을 등유로 청소한 뒤 1~1.5리터의 항공기용 오일을 부어줘야 했다. 겨울철에는 매 20~25시간 마다 동일한 정비를 해 주어야 했다.(Tank T-34, p. 79) 게다가 먼지가 심할때는 이와 같은 정비를 매 2~3시간 마 다 해 줘야 했는데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결과 엔진의 실제 출력은 낮아지고 쉽게 고장났다. 1942년 하계 전역 당시 б-2엔진 중 일부는 먼지가 심한 날엔 10~15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30~50시간 정도 가동하면 고장이 나 버렸다.(Ust’yantsev and Kolmakov, p. 50) 반면 1942년 생산에 들어간 미국의 M4A3 전차에 장착된 공기정화기는 400km를 주행한 뒤에 오일을 교체해 주면 충분했고 먼지가 심할 경우엔 하루에 한번 오일을 교체해 주면 되었다.(Technical Manual No. 9-759, p. 26)
에버딘의 T-34 시험에 참여한 미국 기술자들이 T-34의 공기정화기를 제대로 정비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T-34의 엔진이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에버딘 시험장에는 소련에서 파견한 대표 기술자 마트베예프가 있었다. 마트베예프의 임무 중 하나는 미국 기술자들에게 T-34와 KV의 운용법 및 유지정비를 가르치는 것 이었다. 에버딘의 시험에 참여한 소련측 인원의 보고서를 보면 미국 기술자들 처럼 꼼꼼하고 철저한 정비인력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T-34에 사용된 포몬Pomon식 공기정화기의 문제점은 오래 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미 1941년 1월 소련 전차생산기업을 대표한 말리셰프가 참석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이 채택됐다. “1941년 7월 1일까지 신형 엔진 공기정화기를 개발해 탑재하도록 한다.” 하지만 공기정화기 문제에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다. 99.4%의 정화능력을 가진 신형 원심형 사이클론 공기정화기는 1942년 말에 가서야 첼랴빈스크의 키로프 공장에서 생산하는 T-34에 탑재되기 시작했으며 이것 조차도 전체 생산물량에 적용되진 못했다. 신형 공기정화기 조차 먼지가 심한 환경에서는 3~4시간을 운용할 때 마다 청소하고 윤활유를 교체해야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IS 중전차 용으로 개발된 다중사이클론식 공기정화기가 등장한 뒤였다. 다중사이클론식 공기정화기는 대기중 입자수준이 3g/㎥인 환경에서도 100%의 정화능력을 보여주었으며 8시간을 가동할 때 까지 정비가 필요없었다.(TsAMO D. 1712, p. 100) 1944년 부터 이 공기정화기가 T-34/85에 탑재되기 시작했다.

출력이 낮은 시동장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디젤엔진에 시동을 걸 때는 같은 출력의 가솔린 엔진에 비해 더 높은 토크값과 크랭크샤프트 회전속도가 필요하다. 디젤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 두 배 높은 실린더압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의 부품들도 더 크다. 즉 훨씬 더 관성이 커야 한다. 디젤엔진의 내부 부품들은 연료와 공기를 혼합하기 위해서 더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즉 전기식 시동장치, 특히 출력이 더 큰 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한번에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경우 배터리를 더 빨리 소모할 수 밖에 없다. T-34의 경우 엔진시동을 위해 예비 공기공급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차에 컴프레서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비 공기공급장치도 문제였다. 예비 공기공급장치는 공기를 수동으로 넣어줘야 했는데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T-34 이후에 개발된 소련 전차에는 컴프레서가 탑재되었고 엔진 시동을 위한 공기공급 체계가 정착되었다.

“변속기:

한마디로 형편없다.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KV 전차의 변속기를 수리하던 미국 기술자는 여기에 탑재된 변속기가 자신이 12~15년 전에 접했던 것과 동일한 구조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버딘 시험장에서는 뉴저지 린든Linden에 있는 US 휠트럭레이스US Wheel Truck Rayes사에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이 회사에서는 A-23변속기의 설계도를 보냈다. 놀랍게도 우리측의 변속기 설계도와 A-23 변속기 설계도가 일치했다. 미국 기술자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미국측 설계를 베꼈기 때문이 아니라 15~20년 전에 미국에선 기각된 설계안을 베꼈기 때문이었다. 미국 기술자들은 우리의 전차 설계자들이 이런 변속기를 설치한 것은 전차 조종수에 대한 비인간적 잔혹행위라고 말했다.(즉, 조작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T-34의 변속기도 매우 형편없었다. 시험 기간 중 T-34의 변속기의 기어 이빨은 모조리 뭉개졌다. 기어 이빨에 대한 화학적 분석 결과 열 처리가 매우 형편 없었으며 미국에서 기어에 적용하는 산업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지적에는 약간의 혼동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뉴저지주의 소도시 린든에 있었던 US 휠트랙레이어사US Wheel Track Layer는 월터 크리스티의 회사였다. 일단 보고서에는 회사 명칭에 오자가 세개나 있다. 이것을 제외하면 대략 옳은 설명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KV가 아니라 크리스티가 개발한 M1940 전차의 손자뻘이라 할 수 있는 T-34의 변속기이다.  크리스티는 1930년 두 대의 시제품 전차를 소련에 판매하면서 설계도를 함께 넘겼다. 물론 T-34의 변속기는 M1940의 것에 비해 보강된 것이긴 했지만 전차의 중량이 증가한 반면 기본적인 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미국 기술자가 한눈에 크리스티 전차의 변속기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T-34의 변속기는 그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 이었다. 이 변속기는 전방기어가 4단 뿐이었는데 이것은 가솔린엔진에 비해 동작하는 속도 영역이 훨씬 좁은 디젤엔진을 사용하고 있는데다 중량은 더 무거운 T-34 같은 전차에는 부족했다. 이 변속기는 샤프트축을 따라 평기어가 움직이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시대착오적인 것 이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는 자동차와 전차의 변속기에 맞물림기어와 동시클러치를 쓰는게 일반적이었다. T-34와 같은 방식의 기어를 사용하는데는 조종수의 숙련도가 중요했다. 그리고 주의해서 기어를 넣는다 해도 충격부하가 걸렸다. 그리고 리드 반경Lead-in Radius때문에 평기어에서 실제로 동작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기어를 변경하는게 불가능했다. 그 결과 주행시 기어의 이빨의 특정 부위에 부하가 집중되었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열처리 방식의 문제로 인해 에버딘에서 실시한 시험에서 T-34의 변속기 기어의 이빨이 쉽게 뭉개진 것 이었다. 또 미국측이 조종수에게 잔인하다고 언급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측은 기어 변속 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들을 몇가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자.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등장한 소련제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동력계통이 취약했음을 지적해야 겠다. 소련의 전차 설계자들은 전차와 같이 복잡한 무기체계를 올바르게 만들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없었다. 소련 기술자들이 최대한 외국의 경험을 통해 검증된 기술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KV전차의 변속기도 외국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는게 놀랄 일은 아니다. KV전차 개발의 중심 인물이었던 샤슈무린Николаем Федоровичем Шашмурин의 증언에 따르면 KV전차의 변속기는 수석 설계자인 두호프Никола́й Леони́дович Ду́хов가 설계했으며 이를 승인한 것은 키로프 공장의 설계주임 코틴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이었다. 이들은 변속기의 기본적인 설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미국 잡지에서 얻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유명한 캐터필러사의 전신인 홀트 트랙터에서 사용했던 변속기였다. 이런 낡은 기술도 절실했던 것이다.


“조향 클러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조향 클러치를 사용하지 않은지 수년이 지났으며 심지어 농업용 트랙터에도 쓰지 않는다.(전차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자체의 불합리함은 둘째치고 소련제 클러치는 조잡하게 만들어져있고 사용된 철의 재질도 저질이다. 이때문에 쉽게 마모되고 불순물이 드럼으로 쉽게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안정적인 조종을 담보할 수 없다.”


이 당시 클러치-브레이크 조향 시스템이 시대에 뒤떨어졌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단순한 디자인에 더해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클러치 방식을 사용하면 정확하게 조정을 해야 했으며 정지한 궤도의 에너지를 움직이는 궤도로 전환하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T-34는 선회하려면 일단 한번 멈춰야 했고, 멈추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는 그대로 조향클러치와 궤도로 전달되어 마모가 일어나게 했다.(최고의 품질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이 결합되어 이같은 결함은 더욱 커졌다. 소련의 차세대 전차들은 클러치-브레이크 조향 시스템 대신 기어식 조향 시스템을 채택했다.

“총평:

미국측은 T-34와 KV가 매우 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리 전차는 미국 전차에 비해 등판능력이 우수하다. 장갑판의 용접방식은 매우 조잡하고 엉성하다. 무전기의 경우 연구실의 환경에서는 잘 동작했다. 하지만 조립 마무리가 엉성하고 무전기를 보호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전차에 장착한 뒤에는 전차의 엔진 진동에 영향을 받아 10마일 이상이 되면 정상적인 통신이 불가능했다. 반면 무전기의 작은 크기와 무전기가 적절한 위치에 장착된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각 부품의 가공 수준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형편없었다. 특히 미국 기술자들은 T-34에 달린 변속기 레버의 조악한 디자인과 형편없는 조작감에 불만을 표했다. T-34와 KV 전차의 메커니즘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첫 줄을 보면 다소 이상한 모순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소련 전차가 동시기 미국 전차 보다 둔하단 말인가? 1942년 당시 T-34의 톤당마력은 17.8마력이었고 셔먼의 톤당마력은 13.2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T-34의 동력체계상의 결함 때문에 엔진의 높은 출력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34의 변속기는 조작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4단 기어는 평탄한 도로 위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고 야지에서는 3단 기어가 최대였다. 즉 평균시속은 25km에 불과했다. 게다가 기동 중에 기어를 변경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는데 특히 2단에서 3단으로 올릴때가 그랬다. T-34의 초기 생산분의 경우 조종수가 기어를 변경할 때 46~112kg의 힘을 가해야 했으며 조종수의 오른쪽에 위치한 무전수도 기어 변경을 도와줘야 했다.(Drabkin, p. 26) 미국 기술자들은 변속기 레버를 두 명이 조작해야 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이런 불편한 조작감에 변속기 자체의 구조적 결함과 기어의 부족 때문에 기어비gear ratios가 형편 없었다. 1941월 9월 이후의 생산분에서는 3단 기어의 기어비가 변경되어 기어를 변경하는데 들어가는 힘이 31kg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거친 지형에서 기동할 때는 기어를 자주 변경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 조차 힘든 일 이었다. 그래서 실전에서 T-34는 주로 2단 기어로 움직였다. 즉 최대 시속이 15km 밖에 되지 않았다. 신형 5단 기어가 나온 뒤에야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 1943년 부터 5단 기어가 T-34의 일부에 장착되기 시작했다. 5단 기어를 적용한 뒤에는 야지에서 4단 기어로 기동할 수 있었으며 최고 시속도 두 배 가량 높아졌다. 반면 1단 기어로 경사진 지형을 오를 때는 구형 변속기를 쓰는 T-34라 해도 셔먼에 비해 우세한 톤당 마력비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T-34의 통신수단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1943년 이전에는 T-34에 71-тк-3 무전기가 장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무전기는 전차가 기동할 때는 18km, 전차가 엔진을 멈추고 정지했을때는 25km라는 나쁘지 않은 수준의 교신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신 모드로 사용할 때나 가능한 최대 교신범위였다. 쌍방향 음성 통신을 할 때는 4km가 최대 교신범위였다. 무전기는 생산과 운용이 까다로운 장비였다. 이 무전기에는 튜닝에 필요한 조정 스위치 다섯개가 있었지만 분리감도가 형편없고 간섭보호가 잘 되지 않아  실제로는 튜닝이 매우 어려웠고 특히 기동 중 원거리 교신을 시도할 때 더욱 그랬다. 그리고 71-тк-3은 꽤 부피가 커서 대략 100리터 정도 됐다.(Makarov, p. 18)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미국 기술자들은 왜 이 무전기를 높게 평가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에버딘에 보낸 T-34는 실전 차량에 쓰이는 것과는 다른 무전기인 9-р무전기가 탑재됐다. 당시 영국제 무전장비는 수준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소련은 1942년 영국제 무전기의 생산면허를 취득했다. 소련은 1942년 말 부터  9-р무전기의 대량생산을 시작했는데 이 무전기는 최대 18km까지 양방향 음성통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진정한 도약은 1944년에 일어났다. 이 해 부터는 생산되는 모든 T-34/85에 이 무전기를 탑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기껏해야 소대장, 중대장 차량과 그 이상의 상급 지휘차량에만 무전기가 장착됐다. 일반적으로 보통 전차는 송신기는 커녕 수신기도 없었다.  T-34의 전차장이 포수를 겸했고 관측 시야도 불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전장에서 전차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련 전차의 각 부품이 얼마나 저질이었는가는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1942년에는 특히 그 수준이 최악이었는데 여기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 수많은 설계자와 기술자, 노동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노력으로 T-34의 품질은 꾸준히 향상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새로 생산된 T-34는 5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전쟁 초기에 생산된 차량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 이었다. 렌드-리스로 지원된 장비와 기술, 공작기계와 설비, 물자들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소련 전차병들도 전차를 관리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였다.


“결론 및 제안:

1. T-34와 KV의 공기정화기는 즉시 정화능력과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2. 장갑판을 가공하는 기술을 변경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같은 두께의 장갑으로 더 좋은 방탄 성능을 강화하거나 장갑의 두께를 줄여서 전차의 중량과 생산에 소요되는 강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3. 무한궤도를 더 무겁게 만들어야 한다. 
4. 현재의 구식 변속기를 미국식 변속기로 교체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전차의 기동력이 향상될 것이다. 
5. 조향 클러치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6. 작은 푸품들의 디자인을 단순화하고 신뢰성을 높이는 한편 조정이 필요한 요소들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7. 미제 전차와 소련제 전차를 비교했을때, 후자를 조종하는게 훨씬 더 힘들다. 소련군 전차병이 기동 중에 기어를 변경할 때는 훨씬 더 큰 숙련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클러치식 조향장치를 사용하고, 자주 고장나는 부품을 고치면서  전차가 가동 가능하도록 유지하는데는 더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다. 즉 소련의 경우 전차병의 훈련에 필요한 요소가 많다. 
8. 에버딘에서 시험한 표본으로 미루어 보면 소련측은 전차를 생산하면서 가공, 마무리, 그리고 작은 부품의 기술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문에 전체적으로 잘 설계된 전차들의 모든 장점이 상쇄되고 있다. 
9. 소련 전차들은 디젤 엔진 탑재, 훌륭한 외형, 두꺼운 장갑, 성능 좋고 안정성 높은 무장, 무한궤도의 훌륭한 디자인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조종성과 기동성, 화력과 속력, 기계적 신뢰성, 그리고 조작의 편리성 측면에서 미국제 전차보다 뒤떨어져 있다.”


결론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이미 언급한 것 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소련 기술자들에겐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측이 지적한 T-34의 문제점은 오래 전 부터 잘 알려진 것 들이었다. 1940년 11월 6일 국방인민위원 티모센코는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T-34의 설계 변경안을 아홉개 제시했다. 여기에는 승무원 숫자를 늘릴 것, 시야를 개선할 것, 통신 수단을 개선할 것, 신뢰성을 높일것, 현가장치를 토션바 형식으로 바꿀 것, 변속기를 유성기어식으로 바꿀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p. 28-29) 티모센코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T-34의 시제차량과 초기 양산차량을 시험한 결과 때문이었다. 티모센코가 지적한 문제점은 미국측의 지적 사항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이때문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T-34를 배치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중단됐으며 T-34M형(A-43)의 개발이 시작됐다. T-34M형은 여러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이었다. 변속기의 기어를 두배로 늘리고, 도션바 현가장치를 도입하며, 포탑링의 직경을 1,700mm로 늘리고, 승무원에 사수를 추가해 전차장의 업무를 줄이는 것 등이었다. 또한 전차장 큐폴라를 설치하는 것도 포함됐다. T-34를 대신해 T-34M의 생산을 시작할 예정 시기는 1942년 1월 이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로 이 모든 것이 무산됐다.(Svirin, Esli by voyna povremenila, p. 3)
전례 없는 규모의 격렬한 전쟁으로 막대한 양의 군장비가 소모되고 손실도 엄청났기 때문에 평화시에는 결코 하지 않을 완전히 다른 해결 방식이 필요했다. 수량도 적고 생산 일정이 늦춰지더라도 신형 전차를 도입할 것이냐, 아니면 각종 결함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당장 생산 가능한 전차를 최대한 많이 생산할 것이냐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일선에서는 앞으로 더 좋은 전차가 나올 때 까지 기다리면서 버틸 여유가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적에 맞설 충분한 양의 무기 없이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없었다. 잔혹한 소모전이 이어지면서 연합국에 비해 인력과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 승리할 가능성이 사라져갔다. 무기 생산량에서 연합국과 경쟁할 수 없었던 독일이 무기의 질을 향상시키고 기적의 신무기를 만들어서 전세를 뒤집어 보려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갑 분야에서는 티거와 판터가 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 두차종의 압도적인 전투력으로도 적은 생산량을 벌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차종도 나름대로의 결함이 있었다. 독일은 티거와 판터의 품질을 향상시킬 여유가 없었고 이 전차들은 기술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전장에 투입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무기 생산에 있어 숫자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미국은 훨씬 우수한 무기를 만들 기술력이 있었다. 미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된 셔먼의 경우 1942년 부터 1945년 사이에 T-34와 비슷한 숫자가 생산됐다. 하지만 평균적인 고장율을 고려하면 셔먼의 생산대수가 T-34의 여섯배는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43년에 들어와 셔먼이 독일 전차에 비해 화력면에서 뒤처진다는 점이 명백해 졌을때 미국측은 반쪽짜리 해결책을 내놓았다. 미국은 1944년 부터 셔먼전차에 구식 75mm포 보다 훨씬 포신이 긴,  신형의 보다 강력한 75mm포를 탑재했으며 여기에 포구초속이 높은 HVAP탄을 개발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전차병들은 이전 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독일 전차와 교전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거와 판터는 셔먼을 더 먼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으며 셔먼의 주포는 이들에 무력했다. 셔먼에 신형 90mm포를 탑재하고, 여기에 쾨니히스티거의 장포신 88mm포의 장갑관통력과 비견할만 HVAP탄을 사용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셔먼의 포탑을 대형화 하면 기술적으로도 가능했지만 셔먼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채택하지 않았다.(Hunnicutt, p. 212) 그 결과 대전 말기의 퍼싱 전차에 이르러서야 미국 전차는 90mm 전차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T-34의 기술적 결함, 특히 낮은 신뢰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그 원인은 다양해서 생산공정, 기술, 그리고 설계의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공정과 기술의 문제는 전쟁 초기 소련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백개의 공장이 황급히 이동을 해야 했고, 생산 공정간의 연계가 무너졌으며, 수많은 인력과 물자, 자원을 상실하게 됐다. 결국 새롭고 부적합한 환경 하에서 숙련된 인력을 비롯한 생산에 필요한 여러가지 요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차 생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 또는 단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생산 품질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전쟁 이전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졌다. 기술이 있다 해도 적용할 도리가 없었으니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터 탈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설계는 해당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물적 기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적 기반을 상실하고 환경이 크게 변화했다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과 자원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설사 최선이 아니라 할지라도 임시변통의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오나, 과로와 굶주림, 그리고 때로는 질병에 시달리고 적의 공습을 받으면서 까지 수만대의 무시무시한 T-34를 전선으로 보낸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T-34의 결함 중 상당수가 설계 단계에서 생겨났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T-34는 1930년대 말에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전쟁으로 돌리고 설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 이 복잡한 문제를 정리해 보자. T-34의 설계자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코시킨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쿠체렌코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Кучере́нко, 모로조프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등 세 명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당시 이들의 기술과 지식 수준은 어떠했으며, 이들의 작업 환경은 어떠했고, 이들은 T-34 프로젝트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코시킨은 1898년 야로슬라블Ярослáвль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베르들로프Свердло́в 공산 대학을 졸업한 뒤 1921년 부터 1924년까지 뱌트카에서 공산당 업무를 맡았다. 그는 비교적 늦게 엔지니어가 됐다. 그는 1934년 레닌그라드 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키로프 레닌그라드 실험기계공업공장에서 설계기사, 직장 당비서, 설계부주임을 맡았다. 그가 설계 업무를 한 것은 겨우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고 T-29 전차와 T-46-5 전차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 두 차종은 실험적인 차량이었고 대량생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1936년 12월 28일 코시킨은 하리코프의 183공장에 발령되어 제190전차설계국의 설계주임이 되었다. 그가 그곳에서 담당한 유일한 프로젝트는 BT-9 전차였는데 이 프로젝트는 목표한 성능에 미달하고 기계적 결함이 많이 취소됐다. 예를 들어 전차의 보조 롤러의 서스펜션 암은 전방을 향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후방으로 향해야 했다.(Kolomiets, pp. 15–16) 하지만 그의 동료들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설계국에서는 코시킨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업무를 조율하고 추진하는데 있어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했다. 특히 당시 중요했던 것은 그가 설계국의 동료들을 정치적 탄압으로 부터 보호하고 심지어는 체포된 사람까지 석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코시킨의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쿠체렌코 또한 매우 젊었다. 그는 1908년 1월 6일 태어났으며 T-34 개발에 참여했을 때는 갓 서른이었다. 그는 1930년 하리코프 교통공업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생산현장에서 탁월한 전문가였으며 T-34의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T-34는 높은 생산성을 가지게 되었고 전시의 극도로 혹독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된 전차가 될 수 있었다. 쿠체렌코야 말로 설계국과 생산 공장을 긴밀하게 연결해 준 인물이었다.
T-34의 설계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공학적 문제를 해결한 것은 주로 모로조프였다. 그는 매우 유능했으며 독학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1904년 10월 29일에 태어났으며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에 취직했다. 처음에 맡은 업무는 사무직이었으나 곧 도면을 복사하는 업무를 맡았고 다시 제도를 담당하게 됐다. 그는 군대에서 항공기술병으로 복무한 뒤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면서 전차설계국의 설계자가 되었다. 모로조프는 1929년 부터 1931년까지 하리코프 공학기술학교의 야간반에 다녔다. 하지만 그가 정식으로 공학 학위를 취득한 것은 1950년 이었다. 모로조프는 딕Адольф Яковлевич Дик이 이끄는 실험설계국이 담당한 BT-20전차의 동력계통의 설계를 담당했다. 그리고 곧 코시킨이 이끄는 제24설계국에서 A-20과 A-32의 설계를 담당하게 됐다. 코시킨이 장기간 병가를 내면서 모로조프가 그를 대행하게 됐고, 1940년 9월 26일 코시킨이 사망하자 곧 제183공장의 설계주임이 되었다. 모로조프가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업무 능력을 갖췄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시 그의 지식과 경험 부족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쟁 기간 중 소련 기갑부대의 중추였던 T-34의 개발에 이토록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투입됐을까? 사실 당시에는 T-34가 그토록 중요한 전차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당시 소련 최고의 전차 기술자들은 레닌그라드에 모여있었다. 바릐코프Николай Всеволодович Барыков, 긴즈부르그Семё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и́нзбург, 두호프, 코틴, 트로야노프Лев Сергеевич Троянов, 체이츠, 그리고 다른 수많은 재능넘치고, 훌륭한 교육을 받고,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들은 레닌그라드에 있었다. 하리코프에도 소규모의 지역 설계국이 있긴 했으나 이곳은 주로 1930년 4월 28일 미국의 크리스티로 부터 시제품을 구매한 뒤 생산면허를 취득한 BT계열 전차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지원업무를 맡고 있었다.(Zheltov et al., Tanki BT , p. 4) 이 설계국은 크리스티 전차를 점진적으로 개량해 BT-2, BT-5, BT-7, BT-7M에 이르는 독자적인 모델을 내놓았다. 하지만 하리코프 설계국에서 나온 새로운 설계안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험적 모델에 그치고 말았다. 신형전차의 대량생산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에는 유능한 전문가가 부족했다. 하리코프 전차설계국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설계주임이었던 알렉세옌코и. н. алексеенко는 특별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채 레닌그라드로 떠나버렸다. 1931년에는 알렉세옌코의 후임으로 피르소프가 부임했다. 그리고 설계집단에서 본격적인 설계국으로 개편됐다.(Veretennikov et al., pp. 23–24) 숙청으로 설계국의 인력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 설계국은 숙청 기간 중 시도 때도 없이 직원들이 체포됐으며 단순한 실수나 착오만으로 사보타지 혐의자가 되었다. 1937년의 대숙청으로 공장의 임원이었던 본다렌코와 설계국장이자 가장 유능하고 경험많은 기술자였던 피르소프 본인도 체포됐다.
1937년 8월 제183공장은 신형의 무한궤도/바퀴 겸용 전차를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하리코프 설계국에 유능한 인원을 보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딕이 이끄는 기계화-차량화 학교 졸업생들이 대거 충원됐다. 딕이 이끌고 온 집단을 중심으로 하리코프 공장에서 가장 유능한 설계자들이 모여들었다. 딕은 이들을 공장의 기사장 직속의 독립설계국으로 배치했는데 이 독립설계국은 당시 설계주임이었던 코시킨을 제외하고 있었다. BT-20으로 명명된 이 전차의 예비 설계안은 한달 반 가량 지연됐다.누군가가 딕에 대한 익명의 투서를 써서 딕은 체포되었다. 딕은 정부가 부여한 과업을 이행하는 것을 막고 기한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10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독립설계국은 해체됐다.
BT-20을 완성하는 임무는 코시킨에게 주어졌다. 코시킨은 이를 위해 새로운 특별설계국을 만들었는데 이 설계국은 나중에 кб-24로 개칭됐다. 코시킨의 새 설계국은 새로운 기술자를 충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한궤도와 바퀴주행 겸용이었던 BT-20 개발 뿐만 아니라 BT-20의 완전 궤도식 버전도 개발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코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개발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무슨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설계안을 변경하는 대신 BT 계열 전차에 적용된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하리코프 공장의 기술자들이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도 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 이었다.
그 결과 T-34는 근본적으로 BT-7M과 차체와 포탑 형태, 장갑의 두께, 무장, 그리고 완전 궤도식이라는 점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T-34의 기본적인 부품과 조립 공정은 근본적으로 BT-7M을 보강한 것 뿐 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BT전차의 시제품은 크리스티 전차였다. 이것은 1920년대에 개발됐으며 중량은 BT-7M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T-34는 BT-7M 보다 두 배는 무거웠다. T-34에 4단 변속기를 적용한 결과가 어떠했는가는 앞서 설명했다. 최종구동장치도 BT-7M을 그대로 베낀 것 이었다. 하리코프 설계국의 업무는  기어비 5.7의 대형감속기어를 설계하는 것 이었다. 하리코프 공장의 생산 기술 사이 이 감속기어에는 일반적인 평기어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기어비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중감속기어가 필요했다. 하지만 T-34의 최종구동장치는 BT 전차의 일단감속기어를 답습한 것 이었다. 설계상의 용적에 이것을 넣기 위해서 리드 기어의 톱니 갯수를 10개로 줄여야 했다. 하지만 기계공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기어의 톱니가 17개 이하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T-34의 최종구동장치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부품인 드라이빙 기어가 약해진 것이다. 그 결과 T-34의 모든 부품 중에서 최종구동장치가 가장 신뢰성 낮은 부분이 되었다. 1942년 1월 1일 부터 8월 25일 사이에만 T-34의 최종구동장치 파손이 188건이나 보고되었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생산 공장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Zheltov et al., Neizvestnyi T-34, p. 52) 그 원인은 단지 생산상의 오류가 아니라 설계 단계 부터의 결함이었던 것이다.

T-34 개발자들의 지식과 경험 부족은 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불운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부터 배워나갔다. 특히 모로조프가 그러했다. 그가 설계한 차기작인 T-44는 T-34에 비해 훨씬 진보했지만 여전히 신뢰성과 안정성이 부족했다. 결국 T-44는 공식적으로 육군에 채용되긴 했으나 사실상 대량생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이어 등장한 차기작 T-54는 당시 기준으로 모든 면에서 탁월한 전투차량이었다. 강력하고 생산단가도 저렴하며 신뢰성도 높았다. T-54/55가 수많은 개량을 거치며 세계 각국에서 10만대 이상 생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생산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 무렵 모로조프와 그의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T-34와 다른 여러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경험을 쌓았다. 이들의 경험에는 밝은 면 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있었지만 하나 같이 유익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모로조프의 설계국이 제2차대전 기간 중 귀중한 경험을 쌓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해도 T-54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 처럼 신뢰성 있는 전차로 만들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T-54의 첫 시제품은 1945년 3월에 시험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은 1949년이었다. 불행하게도 T-34의 설계자들은 충분한 경험과 기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성공적이었다. T-34의 차체 자체는 추가적인 중량을 감당할 수 있었고 크기도 컸기 때문에 내부에 들어가는 개별적인 구성품을 개량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시간도 적게 걸렸으며 차체를 재설계 할 필요도 없는데다가 생산 속도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5단 변속기는 4단 변속기와 완벽하게 호환됐다. T-34/85는 T-34의 최초 새산분 보다 20%나 더 무거웠지만 구동계통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성능 감소도 제한적이었다.T-34는 설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하는 전장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전쟁 전 기간 동안 생산될 수 있었다.
T-34의 단순한 설계가 전쟁 당시 소련의 제한적인 공업 생산 능력에 적합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이 점은 전차의 생산 뿐만 아니라 야전에서의 정비에도 적용됐다. 또 다른 장점은 전차의 조종이 쉬웠다는 점이다. 이 덕분에 T-34의 대량생산에 맞춰 전차병을 양성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또한 T-34를 조종하는데 필요한 수준은 당시 붉은군대의 인적자원의 교육 및 기술 수준과도 대략 합치했다.
평시와 전시에 적용되는 군용차량의 성능, 신뢰성, 내구성 기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시에는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이 높게 평가받지만 전시에는 단지 소모성 물자에 불과하다. 군용차량의 질적 수준 또한 예상되는 수명주기내에서 용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만 맞추면 된다. 하지만 노동력과 중요한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서 생산성은 높아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생산된 전차라도 평시에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신뢰성과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현대화 개수를 받아야 한다. 소련에서 전후에 실시한 차량 현대화 프로그램은 укн8)이라고 한다. 1945년 부터 1966년 까지 제2차대전 기간 동안 생산된 T-34를 비롯한 수천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이 프로그램의 적용을 받았다.(Svirin, Tankovaya mosch SSSR, p. 566) 그 결과 T-34의 보증 주행거리는 단지 제원표 상이 아니라 실제로 2,000km에 달하게 됐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T-34의 수명은 늘어났으며 그 덕분에 수천대의 대체용 차량이 필요없어져 막대한 자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결론을 대신해 T-34의 시험에 참여한 에버딘 시험장의 기술자들이 작성한 공식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미국 기술자들은 T-34의 결함을 지적하면서도 그 장점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T-34 중형전차는 기본적으로 훌룽한 차량이다. 숙련되지 않은 인력으로도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이 전차의 돋보이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1.외형이 나쁘지 않고 차고가 낮다.2.설계가 단순하다.3.야지 주행 성능이 우수하다. 

차체와 포탑 장갑에 경사장갑을 채택해 방어력이 탁월하다.”(Bakhmetov et al., pp. 25–26)


이와 같은 높은 평가는 비슷한 시기 영국 기술자들이 T-34를 시험한 뒤 내린 평가와도 일치한다. 영국에 보내진 T-34를 연구한 뒤 작성한 기초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전차의 설계는 효율적인 전차의 기본 요소, 전쟁의 요구사항, 소련군 병사의 특성, 그리고 러시아의 환경과 가용한 생산시설을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물이다. 소련의 공업화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 졌으며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적에게 점령되어 공장 설비와 노동력의 다수를 잃고 나머지를 황급히 철수시켜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성능의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것은 최고의 공업적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Preliminary Report 20 II)


소련의 對히틀러 동맹국이 내린 이 평가에 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석
1) ‘еще раз о T-34’를 해롤드 오렌스타인이 번역했다. 보리스 카발레르치크는 1957년 과거 소련령이었고 현재는 벨라루스 공화국에 속한 고멜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라루스 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민스크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대학에서 군사교육을 이수한 뒤 군사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받고 최종적으로 예비역 전차소대장이 되었다. 카발레르치크는 1989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뉴저지에 거주하면서 ECI 테크놀로지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
2) 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по делам литературы и издательств
3) KV전차의 명칭은 소련방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4) 러시아어로 용접은 сва́рк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철에는 с라는 기호가 붙은 것이다.
5) 나중에 T-34의 보우빔은 압연강판으로 만들게 됐다.
6) 즉, 장갑재가 훨씬 깨지기 쉬워졌다는 뜻이다.
7) 영어 번역본은 The elongation and reduction of area임.
8)이것은 ’설계상의 결함 제거(устранение конструктивных  недоста́тков)의 약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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