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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9일 토요일

탱크 사냥꾼

트위터에 신녕-영천지구 전투 당시 국군 6사단의 대전차전투에 대한 썰을 풀었는데, 이야기 나온김에 해당 증언을 소개해 봅니다.


변규영(卞圭瑛)(당시 제6사단 19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 소위·예비역 중령·현 석공 원주주재 사무소장·49)  
6사단 본부 군수처에서 상사로 근무하면서 신녕(新寧)까지 후퇴했다가 장교가 모자라 830일에 현지임관되어 소대지휘를 맡았읍니다. 영천으로 가는 신녕 고개 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적 16연대가 10여대의 탱크로 공격해서 19연대는 큰 피해를 봤어요. 적 탱크 때문에 장병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어요. 적 탱크 포탄이 30리 떨어진 영천 읍내까지 날아갔으니까요. 
94일께인데 새벽 1시에 10여대의 적 탱크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일렬종대로 신녕고개 위로 올라왔어요. 아군이 다 후퇴한 것으로 알았는지 보병엄호도 없이 아주 유유히 올라와요. 내 소대원들은 겁이 나서 벌벌떨어요. 군수처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이때 처음으로 적 탱크를 보았지만 춘천에서부터 저놈 때문에 사단이 쫒긴 생각을 하니 이가 부드득 갈립디다. 한번 겨루어보자는 결심이 생겼어요. 강성의(姜成義, 전사), 모 등 2명의 일등중사에게 수류탄 10여발씩을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내가 혼자서 탱크에 기어오를테니 너희들은 나에게 수류탄을 공급하고 엄호사격을 하라. 그리고 내가 죽거들랑 결혼 6개월된 마누라에게 죽은 날짜나 알려줘라고 당부했어요. 
고갯길을 내려가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 14대의 탱크가 우르렁거리며 지나가요. 탱크들이 나의 매복지점 앞을 지나가는데도 겁이 나서 떤 것은 아닌데 뛰어오르기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엎드려 기회를 보았지요. 좀 있으려니 도로파괴용 매설지뢰가 폭파하여 5미터 직경의 큰 웅덩이가 파지며 선두 탱크가 처박힙디다. 그러니 뒤따르던 탱크들이 차례로 정지해요. 이어 도로지뢰 폭파지점에서 3백미터 아래의 교량에 설치된 TNT가 터졌어요. 그러니까 또 한 대가 개울에 떨어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모두 8대가 꼼짝 못하게 됐고 나머지 꽁무니의 6대는 도망칩디다. 앞 탱크의 뚜껑이 열리면서 적병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셋이서 카빈으로 사살했어요. 
이어 나 혼자 뛰어나가 다음 탱크의 뚜껑을 주먹으로 두드렸어요. “! 빨리 열어했더니 저희 편인 줄 알고 뚜껑을 엽디다. 수류탄 1발을 집어넣었죠. 이런 식으로 차례로 부쉈는데, 마지막 탱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길가에 엎드려 있는 사병한테서 수류탄을 받아서 달려드는데 기관총을 냅다 쏩디다. 엎드리며 굴러 길가에 숨었다가 다시 탱크에 올라서서 뚜껑을 두드리며 너희 편 탱크는 다 죽었다. 문 열고 나오라고 했더니 장교 1명과 사병 4명이 손을 들고 나와요. 
이때 동이 트고 있었는데 김익렬 연대장, 김종오 사단장, 미군 고문 등 많은 19연대 장병들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어요. 나 혼자서 모두 적 탱크 6(지뢰에 걸린 것 까지 8)를 부수거나 생포했어요.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에요. 보병의 호위 없이 좁은 고갯길에서 탱크는 맥을 못써요. 이 전공으로 나는 임관 7일만에 중위로 특진하고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읍니다. 
다시 영천 동북쪽 포항가두(지금의 제2육사 근처)에서 영천공방전을 하다가 적 포탄에 오른쪽 다리가 날아갔어요. 탱크 부술 때 같이 나갔던 강성의 중사는 이때 전사했는데 강 중사는 6·25전에 북에서 혼자 월남한 사람이에요. 단독으로 수색활동을 귀신같이 잘하던 사람인데 지금도 내가 그 사람의 사진을 꼭 갖고 다니지만, 통일된 후에나 찾아갈 사람이 혹 나타날는지요.  
中央日報社, 民族證言: 2을유문화사, 1972, 282~284

변규영씨의 증언 내용은 한국군에서 간행한 공간사와 약간 차이가 있으니 공간사의 해당 전투에 대한 서술도 함께 소개합니다. 일단 날자가 다릅니다. 물론 이 정도는 기억의 착오라고 할 수 있겠죠. 국방부 공간사에도 변규영씨가 대전차 특공대를 지휘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다릅니다.


다음날(9월 1일) 21:00쫌 적은 전차 2대와 보병 1개 소대로 편성된 보전 협동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아군 포화가 집중되자 곧 고개 중턱에서 철수하였다. 날이 밝은 뒤 대대장은 전날 밤의 교전 상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결과 이는 적의 차기 작전을 위한 위력수색이라고 판단하고 적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대대 수색대를 적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날 오후 행동을 개시한 대대 수색대는 덕천-인각사(麟覺寺)-화수동 일대의 적정을 수색하였으나 적 부대 배치 지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때문인지 그들이 공격을 개시할 뚜렷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이러한 수색활동을 끝마친 대대 수색대는 대대로 복귀 도중 넌덧마을 뒷산 고개에서 피난가지 않고 그 마을에 남아 있던 장임실(張任實, 당시 64세) 외 2, 3명의 노인을 만났다. 그들은 수색대원들을 보자 반가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늘 새벽 우리 동네에 많은 인민군과 열 서너 대의 전차가 왔네. 그들은 오늘 밤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면서 우리들보고 마을에서 떠나라고 했네. 그래서 지금 우리 늙은이들은 덕천으로 피난가는 중이네"라고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 그대로의 적정을 알려 주었다. 그 노인들의 말대로라면 두세시간 이내에 적이 공격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수색대장은 고맙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지름길로 달린 끝에 노을이 질 무렵에는 대대장에게 수색결과를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넌덧마을 노인들이 전해 준 첩보는 비록 신빙성이 희박하다고는 하지만 전날 밤의 적 위력수색과 일맥상통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체없이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적의 보전협동공격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1. 적 전차가 갑령 고갯마루에 설치된 대전차지뢰지대에 들어설 때 까지 사격을 엄금한다.
2. 적 선두 전차가 파괴되면 즉시 넌덧마을-갑령고개 중턱 일대에 지원포병의 화력을 집중하며, 대대내의 모든 화기도 일제히 사격한다.
3. 전차특공대는 갑령 고개의 두 번째 도로, 굴곡 지점 서쪽 능선에서 매복대기할 것이며, 아군 포병 지원사격이 끝나는 즉시 적 후미 전차부터 먼저 공격한다.
4. 각 중대는 전차특공대가 적 전차를 공격할 때 이를 엄호한다.
5. 사격개시 신호: 예광탄 3발. 
그로부터 약 1시간이 경고한 20:00쯤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대대 방어지역에 집중되기 시작하더니 5, 6분이 경과하자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포격으로 아군 방어진지를 강타하였다. 이 바람에 대대 방어진지는 잠깐 동안에 초연으로 휩싸이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는가 하면, 제3중대와 대대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적정 파악마저 어렵게 되었다.
바로 이 때쯤 넌덧마을 부근에서는 수 미상의 적 전차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렇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하에서 대대장은 철수 건의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직 방어진지의 사수를 강조하여 마지 않았다. 
약 30분간에 걸친 적의 포격이 대대 방어지역 후방으로 연신된 얼마 뒤, 드디어 적 선두 전차가 어렴풋한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아군 진지에서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쥐죽은 듯 잠잠하기만 하였다.
고갯마루 20m 앞 까지 육박한 적 선두 전차는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지뢰지대 전방에서 일단 정지하더니 헷치를 열고 상반신을 전차 밖으로 내민 전차장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대대 관측소와의 거리는 불과 50m 안팎! 이 광경을 보다못한 어느 병사는 총을 겨냥하고 이것을 제지한 대대 작전장교의 손은 떨고 있었다. 잠시 뒤에 적 선두 전차가 다시 움직이자 그 후방 300~400m 지점에서 정지했던 2번 전차도 뒤를 따랐다. 몇 초 뒤 "쾅"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적 선두 전차가 길 옆으로 비스듬히 전복되었다.
그 직후 대대 관측소에서 예광탄 3발이 발사되어 붉은 포물선 세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순간 대대의 모든 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며, 넌덧마을-갑령 고개 중턱에는 제16포병대대의 일제사격(TOT)이 집중되었는데 동 대대 포격은 신속하고 정확하여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약 20분이 경과하였을 때 쯤 대대장은 모든 사격을 중지시켰다. 이 때를 기다리던 변 소위는 전차특공대를 지휘하여 두 번째 굴곡 지점에서 후진중인 적 후미 전차에 3.5inch 로켓탄을 집중사격한 것을 필두로 고개 아래에서 차례로 적 전차 7대를 파괴하고 승무원 다섯 명을 사로잡았다. 
이 날 밤의 적 공격은 단 1회로 끝이 났다. 갑령 고개에서 파괴된 적 전차 8대 중 승무원이 전차 안에서 전사한 전차는 선두와 후미 전차 두 대였고 전차특공대에 대항을 시도한 전차는 단 한대 뿐이었다. 나머지 다섯 대의 승무원들은 아군 포격이 집중될 때 이미 탈출했는지 전차특공대가 접근하였을 때에는 전차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동이 튼 얼마 뒤에 대대는 전장을 정리하여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트럭 2대분이 되는 각종 화기를 노획하였다. 대대장은 갑령 고개 북쪽에도 적 전차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미군 전방항공통제장교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도록 협조하였다.이리하여 06:00쯤 갑령고개 상공에 나타난 우군기는 갑령고개-화수동과 그 북쪽 28번 도로상에 있는 적 전차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이를 모두 불태웠다. 신녕전투가 끝난 뒤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제19연대 제1대대가 파괴한 8대를 포함하여 총 21대의 적 전차가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신령ㆍ영천전투』 , 1984, 161~165쪽.


2017년 4월 9일 일요일

다부동 전투당시 북한군 기갑차량 손실원인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올려봅니다.


이 표는 다부동전투가 끝난 뒤 미 1기병사단 방어구역에서 발견된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를 정리한 겁니다. 조사는 두 차례 이루어졌는데 재조사 결과 손실원인이 바뀐 경우가 몇건 있습니다. 작전연구에서 장비 손실원인을 추정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2차 조사에서 결론이 바뀐 것이 19건 중 12건이란 점은 꽤 흥미롭습니다. 한차례의 조사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잔해를 바탕으로 손실원인을 추정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영국군의 보고서 “1944년 6월 6일 부터 8월 31일까지 독일 전차의 손실 원인에 대한 분석”을 보면 영국군은 분석 대상이 될 전차의 잔해도 주의깊게 선정해서 유기된 차량에 사격한 흔적으로 판정되면 샘플에서 제외하기까지 합니다.


표. 다부동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기갑차량의 손실원인
차종
1차조사결과
(50.9.27)
2차조사결과
(50.10.11)
비고
SU-76
야포(확실)
승무원이 유기(확실)
차량번호 1324
SU-76
-
야포(추정)

SU-76
항공폭탄(추정)
야포(확실)

T-34/85
승무원이 유기(추정)
승무원이 유기(확실)
바주카포 피격흔
T-34/85
야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차량번호 328
T-34/85
항공기(추정)
90mm전차포(확실)

SU-76
전차포(추정)
3.5인치 바주카(확실)

T-34/85
항공기 로켓 또는 야포(추정)
네이팜탄(확실)

SU-76
야포 또는 전차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차량번호 13XX
SU-76
야포 또는 전차포(추정)
90mm전차포(확실)

T-34/85
추정불가
90mm전차포(확실)

T-34/85
추정불가
네이팜탄(확실)
차량번호 320
90mm 관통흔
SU-76
추정불가
박격포 또는 야포(추정)

SU-76
추정불가
승무원이 유기(확실)

SU-76
기계고장(추정)
승무원이 유기(확실)
차량번호 1326
SU-76
항공기 로켓(추정)
-

T-34/85
네이팜탄(확실)
-

T-34/85
네이팜탄(확실)
-

T-34/85
네이팜탄(확실)
-

(Robert J. Best, ORO-T-261, The Structure of a Battle: Analysis of a UN-NK Action North of Taegu, Korea, September 1950(1954. 1. 20),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A1-2-A Organizational History Files Box 105, pp.368~370)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소련 전차부대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얻은 전훈

지난번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라는 포스팅에서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 열린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었는데,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기갑부대의 운용에 관한 재검토라고 생각됩니다. 전차의 운용 문제는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논의됐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월 14일과 17일에 있었던 회의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는 전차의 분산운용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니 녹취록이 불완전하게 작성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죠.


먼저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에서 있었던 관련 발언을 인용해 봅니다.



시니친Синичкин(북서전선군 전차-장갑차 병과 정치위원): 여러분. 이 회의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는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서부 우크라이나 사태(폴란드 병합)과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있었던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운용에 관한 것 입니다. 
먼저 전차와 보병간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차 부대에 복무했습니다만 대규모 훈련에서 보전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 보전협동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전차여단을 소총병군단에 배속시키고 각 군단장에게 보전협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T-26이나 T-38을 장비한 전차대대는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정비 부대가 없거나 보전협동을 총괄할 주체가 없어 전투력이 형편없었습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전차를 분산 운용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소총병사단 예하의 전차대대는 폐지해야 합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지휘 체계입니다. 군관구와 전선군, 야전군 단위에서 전차부대를 올바르게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го управления РККА은 감독 및 검열 업무를 담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부대가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부대에 대한 명령권과 명령을 감독할 권한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붉은군대와 전선군, 야전군, 군관구의 전차부대 행정 구조는 공군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전차부대에 대한 지휘를 강화하고 훈련을 총괄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휘와 훈련을 담당하는 부서는 전차 부대의 현황에 관해 해당 군사위원회와 지휘관에 보고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 문제에 대해서 몇마디 더 하겠습니다. 여러 작전에서 전차 부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전차부대의 간부는 제대로 선별되지 못했습니다. 예를들어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예하 전차부대들의 인사 교체를 대위 한명에게 맡겼습니다. 이 대위가 어떻게 혼자서 간부들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전차부대 간부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들에 대해 검토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지휘관을 선정하는데 혼란이 초래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이 전차부대의 인사권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이게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에 관한 것 입니다. 여러분. 아군의 전차는 대구경 포탄은 커녕 일반적인 37mm 포탄 조차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적의 대전차 화력을 감안해, 대구경의 주포와 더 두꺼운 장갑을 갖춘 전차를 도입해야 할 때 입니다. 

스탈린: T-26 전차의 45mm 주포*의 성능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시니친: 충분합니다. 하지만 KV전차는 45mm 주포*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탈린: 75mm 급 주포*라면 충분하겠습니까? 

시니친: 예. 그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신형전차들을 최대한 빨리 배치해야 합니다.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24-25에서 재인용.



* - 원 영어번역문에는 '장갑(Armor)'으로 되어있는데 문맥상 전차의 무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주포'로 옮겼습니다.

1940년 4월 17일에 있었던 마지막회의에서는 당시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의 국장이었던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가 핀란드전 시기 기갑부대의 전훈에 대한 총괄 평가를 했습니다. 여기서 전차부대의 분산운용을 강력히 비판하고 집중운용을 위해 편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쿨릭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1급 야전군지휘관, 포병 총감, 회의 진행자): 파블로프 동지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2급 야전군지휘관,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 이번 전쟁에는 우리가 보유한 모든 종류의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야 겠습니까?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던 전차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렇다 할 대전차무기가 없어 기관총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식민지전쟁에 쓰려고 개발한 것들을 개량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은 아군 전차의 운용 경험과 그 실상에 대해 잘 아실 것 입니다. 저는 제7군 소속 전차부대 전체와 제13군 소속 전차부대 일부의 작전을 검토했습니다. 제34전차여단과 다수의 전차를 보유했던 한 전차대대가 전멸한 일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다른 부대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중 전차부대 지휘관들은 무지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 12월 제138소총병사단이 실시한 보전협동작전과 최근 전선에 투입됐던 제100소총병사단의 보전협동작전을 비교하면 낮과 밤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12월에 제138소총병사단을 지휘한 사단장은 허세가 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단의 각 병과간 협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100소총병사단의 사단장은 매우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차 부대와 밀접하게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동지여러분, 저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 군대가 지나치게 허장성세를 부리지만 전투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입니다. 이제 핀란드의 전장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핀란드 전역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하지만 키비니에미Kiviniemi에서 전차군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전차군단을 투입해서 핀란드군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것은 야전군 지휘관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였습니다. 

쿨릭: 그 결정은 잘 못된 것이었소. 

파블로프: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한 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또한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문에 아군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돌파를 활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연대지휘관 바라노프가 지휘하는 전차여단을 투입한 바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주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노프의 전차여단은 1개 소총병대대를 배속받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보병을 배속받은 전차여단을 독립적인 임무에 투입하는 구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전차여단들(35, 40전차여단 등)은 대대단위로 분산되어 소총병사단에 배속됐습니다. 이들은 공군이 ‘지원 요청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물론 대대단위로 분산된 전차들도 잘 싸웠고 때로는 탁월한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붉은군대는 여러가지 악재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단단위로 전차를 분산 운용한다면 다른 전쟁에서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제가 딱 잘라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가 전차와 타 병과의 협동 작전에 대해 가르쳐 온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전차부대는 아무런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7,000여대의 전차를 소총병사단에 배속시켜 분산운용했기 때문에 전차부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T-37과 T-36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차종은 매우 약하고 무력했습니다. T-37전차의 기동력으로는 진창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전차를 배속받은 소총병사단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전차부대를 연대본부나 사단본부를 호위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사실입니다. 

파블로프: 핀란드전에 투입된 전차는 7,000여대에 달합니다. 전차여단에 편성되어 여단 단위로 작전한 전차대대들은 여단본부가 지속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훨씬 유용했습니다. 여단 참모장교들 뿐만 아니라 여단 정치장교들도 예하 전차대대들의 지휘통제에 참여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렐류센코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동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공격할때 정치장교들은 보병진지로 가서 보병들이 전차를 엄호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그래서 보전협동이 매우 원활히 이루어졌습니다. 전차여단이 파견한 전차와 보병의 협동작전을 항상 감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게 뭐겠습니까. 당장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들을 전차여단을 증강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키예프 군관구의 4개 전차여단은 각각 전차 14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이 축소된 것 입니다. 만약 전시동원에 들어간다면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은 준비를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원래 키예프 군관구 소속이던 전차들을 원대복귀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가 지휘관으로 있는 한 전차부대들의 편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차가 필요하다면 부대 전체를 배속 변경하면 됩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력 보충 문제입니다. 전차부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새로 병력을 보충 받을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T-26 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T-26이 BT전차보다 우수하다고 할 것이고, BT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반대로 이야기 할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애국심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에 애정을 가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사 T-26과 BT전차가 중기관총을 막을 능력은 없다해도 말입니다. 적 대전차포 진지가 무력화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옳은 말 입니다. 하지만 전차병은 단일한 보충체계를 통해 보충되어야 합니다. 
당과 정부는 전차 생산에 반영할 사항들을 지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앞으로는 45mm 대전차포는 물론 3인치급의 포탄도 방어할 수 있는 전차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한 방어력을 갖춘 신형 전차가 지금 생산 중입니다. 현재 우리는 부상을 입은 전차병들이 어디에 수용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귀향 조치를 받아 가족과 재회할 때에나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은 전차여단을 다음과 같이 편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 전차여단은 더 많은 전차병과 지휘관들을 훈련할 수 있는 훈련대대를 가져야 합니다. 치료를 받고 원대복귀한 지휘관들은 먼저 훈련대대에 배치된 뒤 새로운 보직을 받아야 합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전차 조종수는 어떻게 합니까? 

파블로프: 보충대대가 전차여단의 모든 보충인력을 담당합니다. 저는 전차여단의 보직을 거치지 않은 장교는 군관구사령부에 발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차여단에 배속될 장교들은 먼저 보충대대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정 시절에 하던 방식이지만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충부대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갑 장교들이 필요합니다. 여단에 배속된 장교들을 교육훈련에 차출하는 것은 안됩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인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부대의 부상병들을 돌보았으며 부상병들도 그들을 돌보는 게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이탈하는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수륙양용 T-37 경전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전차는 특수한 차종이므로 예비대에 넣어야 합니다. 군단 직할의 강력한 대대로 편성해 필요한 경우 군단장의 승인하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신형전차 문제에 있어서, 저는 여러 동지들이 국방인민위원장이나 스탈린 동지께 전문을 마구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은 우리에게 군 조직 문제를 올바른 방법으로 다룰 기회를 주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신형 전차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기존의 전차가 형편없다는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리고는 ‘T-34와 KV 전차를 보내주십시오. 이 전차들은 다른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고 우리 담당 지역에 적합합니다’라고 합니다. 사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 요청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총참모부가 신형 전차를 어떤 군관구에 대량으로 배치하겠다고 결정하면, 다른 군관구에서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군사훈련 및 T-34와 KV전차를 T-26, T-37, BT전차 등과 함께 운용하는 방식을 가르칠 것 입니다. 구식전차들은 메뚜기떼 처럼 T-34와 KV전차의 뒤를 따라 어떠한 임무라도 수행해야 하며, 또한 적의 대전차 방어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포병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포병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종종 전차는 무시하곤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보병은 전차의 지원 없이는 머릿이 한마리 죽이지 못합니다. 보병은 전차 없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이동식 포병이오. 

파블로프: 전차는 직사를 하지만 포병은 간접사격을 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장갑을 두른 포병이오. 

파블로프: 저와 보로노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이상 우리 두 사람의 협력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병과 기갑 병과를 갈라놓아 협력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첫 번째 요점입니다. 두 번째로, 보로노프 동지께서 좋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보병과 포병의 협력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기갑 병과 장교가 보병 병과 장교보다 보병전술과 작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이런 장교는 전차부대에 필요 없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파블로프 동지가 옳습니다. 

파블로프: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갑 병과는 전차 부대의 교범 보다 보병 교범을 더 신경써서 연구해야 합니다. 전차 부대는 보병 부대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차를 이런 식으로 운용해서는 안됩니다. ‘7km 앞으로 진격해 숲에 있는 적을 소탕하라’ 또는 ‘우리가 식사하거나 세면을 하고 있는데 전차 부대가 경비를 서지 않는다면 너희 중대를 포격해 버리겠다.’  

스탈린: 그건 근거없는 풍문이오. 

파블로프: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거 아니요? 

파블로프: 아닙니다. 전차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부적절한 운용 때문입니다. 제86소총병사단에는 용맹한 지휘관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사단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연대에 말 20마리를 배속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대에 배속된 차량이 야지에서 제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요구는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루마니아로 진격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남부 지역의 군사-지리 현황을 연구했습니다. 루마니아 지역의 기후와 토양은 말이 끄는 수레라 할 지라도 두달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 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는 차량을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이 차량은 겨우 100m를 달리고 고장나 버렸습니다. 이 차량은 GAZ-65입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궤도차량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파블로프: 그렇습니다. 자동차 부대의 경우 기동이 힘든 진흙탕 길 때문에 트럭을 운용하는데 부담이 클 것 입니다. 트럭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연대에 배속된 트럭들을 모두 모아서 사단의 중앙 통제를 받는 특수 연대, 혹은 특수 대대로 운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비부품을 확보하고 정비하는데 용이할 것입니다. 그렌달Владимир Давыдович Грендаль 동지는 예비부품 공급과 정비가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기동부대들을 위해 민간 차량들을 대규모로 징발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다시 민간에 돌려줘야 합니다. 예비부품 수급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공장은 전선의 부대에 예비 부품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했습니다. 공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군이 보유한 차량 중 많은 수가 예비부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비 시설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스탈린: 차량 정비를 이야기 하는거요? 

파블로프: 예비부품을 확보해야 차량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자비하고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습니다. 각 군관구에는 군수보급과 전차-장갑차부대를 담당하는 부서를 별도로 설치해야 합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동원 및 훈련을 통제하고 예상되는 전역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전차-장갑차부대 총국의 조직을 분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해당 총국의 관할이오. 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소. 

파블로프: 스탈린 동지. 저는 전차-장갑차병과 총국을 분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군사훈련만을 담당할 조직이 필요합니다.  

1940년 4월 17일 저녁 회의, Ibid., pp.259~263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