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렐류센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렐류센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소련 전차부대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얻은 전훈

지난번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라는 포스팅에서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 열린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었는데,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기갑부대의 운용에 관한 재검토라고 생각됩니다. 전차의 운용 문제는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논의됐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월 14일과 17일에 있었던 회의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는 전차의 분산운용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니 녹취록이 불완전하게 작성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죠.


먼저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에서 있었던 관련 발언을 인용해 봅니다.



시니친Синичкин(북서전선군 전차-장갑차 병과 정치위원): 여러분. 이 회의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는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서부 우크라이나 사태(폴란드 병합)과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있었던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운용에 관한 것 입니다. 
먼저 전차와 보병간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차 부대에 복무했습니다만 대규모 훈련에서 보전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 보전협동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전차여단을 소총병군단에 배속시키고 각 군단장에게 보전협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T-26이나 T-38을 장비한 전차대대는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정비 부대가 없거나 보전협동을 총괄할 주체가 없어 전투력이 형편없었습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전차를 분산 운용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소총병사단 예하의 전차대대는 폐지해야 합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지휘 체계입니다. 군관구와 전선군, 야전군 단위에서 전차부대를 올바르게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го управления РККА은 감독 및 검열 업무를 담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부대가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부대에 대한 명령권과 명령을 감독할 권한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붉은군대와 전선군, 야전군, 군관구의 전차부대 행정 구조는 공군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전차부대에 대한 지휘를 강화하고 훈련을 총괄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휘와 훈련을 담당하는 부서는 전차 부대의 현황에 관해 해당 군사위원회와 지휘관에 보고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 문제에 대해서 몇마디 더 하겠습니다. 여러 작전에서 전차 부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전차부대의 간부는 제대로 선별되지 못했습니다. 예를들어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예하 전차부대들의 인사 교체를 대위 한명에게 맡겼습니다. 이 대위가 어떻게 혼자서 간부들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전차부대 간부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들에 대해 검토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지휘관을 선정하는데 혼란이 초래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이 전차부대의 인사권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이게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에 관한 것 입니다. 여러분. 아군의 전차는 대구경 포탄은 커녕 일반적인 37mm 포탄 조차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적의 대전차 화력을 감안해, 대구경의 주포와 더 두꺼운 장갑을 갖춘 전차를 도입해야 할 때 입니다. 

스탈린: T-26 전차의 45mm 주포*의 성능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시니친: 충분합니다. 하지만 KV전차는 45mm 주포*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탈린: 75mm 급 주포*라면 충분하겠습니까? 

시니친: 예. 그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신형전차들을 최대한 빨리 배치해야 합니다.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24-25에서 재인용.



* - 원 영어번역문에는 '장갑(Armor)'으로 되어있는데 문맥상 전차의 무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주포'로 옮겼습니다.

1940년 4월 17일에 있었던 마지막회의에서는 당시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의 국장이었던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가 핀란드전 시기 기갑부대의 전훈에 대한 총괄 평가를 했습니다. 여기서 전차부대의 분산운용을 강력히 비판하고 집중운용을 위해 편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쿨릭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1급 야전군지휘관, 포병 총감, 회의 진행자): 파블로프 동지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2급 야전군지휘관,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 이번 전쟁에는 우리가 보유한 모든 종류의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야 겠습니까?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던 전차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렇다 할 대전차무기가 없어 기관총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식민지전쟁에 쓰려고 개발한 것들을 개량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은 아군 전차의 운용 경험과 그 실상에 대해 잘 아실 것 입니다. 저는 제7군 소속 전차부대 전체와 제13군 소속 전차부대 일부의 작전을 검토했습니다. 제34전차여단과 다수의 전차를 보유했던 한 전차대대가 전멸한 일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다른 부대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중 전차부대 지휘관들은 무지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 12월 제138소총병사단이 실시한 보전협동작전과 최근 전선에 투입됐던 제100소총병사단의 보전협동작전을 비교하면 낮과 밤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12월에 제138소총병사단을 지휘한 사단장은 허세가 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단의 각 병과간 협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100소총병사단의 사단장은 매우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차 부대와 밀접하게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동지여러분, 저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 군대가 지나치게 허장성세를 부리지만 전투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입니다. 이제 핀란드의 전장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핀란드 전역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하지만 키비니에미Kiviniemi에서 전차군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전차군단을 투입해서 핀란드군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것은 야전군 지휘관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였습니다. 

쿨릭: 그 결정은 잘 못된 것이었소. 

파블로프: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한 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또한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문에 아군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돌파를 활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연대지휘관 바라노프가 지휘하는 전차여단을 투입한 바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주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노프의 전차여단은 1개 소총병대대를 배속받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보병을 배속받은 전차여단을 독립적인 임무에 투입하는 구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전차여단들(35, 40전차여단 등)은 대대단위로 분산되어 소총병사단에 배속됐습니다. 이들은 공군이 ‘지원 요청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물론 대대단위로 분산된 전차들도 잘 싸웠고 때로는 탁월한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붉은군대는 여러가지 악재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단단위로 전차를 분산 운용한다면 다른 전쟁에서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제가 딱 잘라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가 전차와 타 병과의 협동 작전에 대해 가르쳐 온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전차부대는 아무런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7,000여대의 전차를 소총병사단에 배속시켜 분산운용했기 때문에 전차부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T-37과 T-36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차종은 매우 약하고 무력했습니다. T-37전차의 기동력으로는 진창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전차를 배속받은 소총병사단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전차부대를 연대본부나 사단본부를 호위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사실입니다. 

파블로프: 핀란드전에 투입된 전차는 7,000여대에 달합니다. 전차여단에 편성되어 여단 단위로 작전한 전차대대들은 여단본부가 지속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훨씬 유용했습니다. 여단 참모장교들 뿐만 아니라 여단 정치장교들도 예하 전차대대들의 지휘통제에 참여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렐류센코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동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공격할때 정치장교들은 보병진지로 가서 보병들이 전차를 엄호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그래서 보전협동이 매우 원활히 이루어졌습니다. 전차여단이 파견한 전차와 보병의 협동작전을 항상 감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게 뭐겠습니까. 당장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들을 전차여단을 증강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키예프 군관구의 4개 전차여단은 각각 전차 14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이 축소된 것 입니다. 만약 전시동원에 들어간다면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은 준비를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원래 키예프 군관구 소속이던 전차들을 원대복귀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가 지휘관으로 있는 한 전차부대들의 편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차가 필요하다면 부대 전체를 배속 변경하면 됩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력 보충 문제입니다. 전차부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새로 병력을 보충 받을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T-26 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T-26이 BT전차보다 우수하다고 할 것이고, BT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반대로 이야기 할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애국심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에 애정을 가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사 T-26과 BT전차가 중기관총을 막을 능력은 없다해도 말입니다. 적 대전차포 진지가 무력화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옳은 말 입니다. 하지만 전차병은 단일한 보충체계를 통해 보충되어야 합니다. 
당과 정부는 전차 생산에 반영할 사항들을 지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앞으로는 45mm 대전차포는 물론 3인치급의 포탄도 방어할 수 있는 전차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한 방어력을 갖춘 신형 전차가 지금 생산 중입니다. 현재 우리는 부상을 입은 전차병들이 어디에 수용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귀향 조치를 받아 가족과 재회할 때에나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은 전차여단을 다음과 같이 편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 전차여단은 더 많은 전차병과 지휘관들을 훈련할 수 있는 훈련대대를 가져야 합니다. 치료를 받고 원대복귀한 지휘관들은 먼저 훈련대대에 배치된 뒤 새로운 보직을 받아야 합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전차 조종수는 어떻게 합니까? 

파블로프: 보충대대가 전차여단의 모든 보충인력을 담당합니다. 저는 전차여단의 보직을 거치지 않은 장교는 군관구사령부에 발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차여단에 배속될 장교들은 먼저 보충대대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정 시절에 하던 방식이지만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충부대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갑 장교들이 필요합니다. 여단에 배속된 장교들을 교육훈련에 차출하는 것은 안됩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인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부대의 부상병들을 돌보았으며 부상병들도 그들을 돌보는 게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이탈하는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수륙양용 T-37 경전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전차는 특수한 차종이므로 예비대에 넣어야 합니다. 군단 직할의 강력한 대대로 편성해 필요한 경우 군단장의 승인하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신형전차 문제에 있어서, 저는 여러 동지들이 국방인민위원장이나 스탈린 동지께 전문을 마구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은 우리에게 군 조직 문제를 올바른 방법으로 다룰 기회를 주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신형 전차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기존의 전차가 형편없다는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리고는 ‘T-34와 KV 전차를 보내주십시오. 이 전차들은 다른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고 우리 담당 지역에 적합합니다’라고 합니다. 사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 요청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총참모부가 신형 전차를 어떤 군관구에 대량으로 배치하겠다고 결정하면, 다른 군관구에서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군사훈련 및 T-34와 KV전차를 T-26, T-37, BT전차 등과 함께 운용하는 방식을 가르칠 것 입니다. 구식전차들은 메뚜기떼 처럼 T-34와 KV전차의 뒤를 따라 어떠한 임무라도 수행해야 하며, 또한 적의 대전차 방어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포병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포병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종종 전차는 무시하곤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보병은 전차의 지원 없이는 머릿이 한마리 죽이지 못합니다. 보병은 전차 없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이동식 포병이오. 

파블로프: 전차는 직사를 하지만 포병은 간접사격을 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장갑을 두른 포병이오. 

파블로프: 저와 보로노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이상 우리 두 사람의 협력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병과 기갑 병과를 갈라놓아 협력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첫 번째 요점입니다. 두 번째로, 보로노프 동지께서 좋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보병과 포병의 협력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기갑 병과 장교가 보병 병과 장교보다 보병전술과 작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이런 장교는 전차부대에 필요 없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파블로프 동지가 옳습니다. 

파블로프: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갑 병과는 전차 부대의 교범 보다 보병 교범을 더 신경써서 연구해야 합니다. 전차 부대는 보병 부대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차를 이런 식으로 운용해서는 안됩니다. ‘7km 앞으로 진격해 숲에 있는 적을 소탕하라’ 또는 ‘우리가 식사하거나 세면을 하고 있는데 전차 부대가 경비를 서지 않는다면 너희 중대를 포격해 버리겠다.’  

스탈린: 그건 근거없는 풍문이오. 

파블로프: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거 아니요? 

파블로프: 아닙니다. 전차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부적절한 운용 때문입니다. 제86소총병사단에는 용맹한 지휘관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사단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연대에 말 20마리를 배속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대에 배속된 차량이 야지에서 제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요구는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루마니아로 진격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남부 지역의 군사-지리 현황을 연구했습니다. 루마니아 지역의 기후와 토양은 말이 끄는 수레라 할 지라도 두달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 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는 차량을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이 차량은 겨우 100m를 달리고 고장나 버렸습니다. 이 차량은 GAZ-65입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궤도차량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파블로프: 그렇습니다. 자동차 부대의 경우 기동이 힘든 진흙탕 길 때문에 트럭을 운용하는데 부담이 클 것 입니다. 트럭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연대에 배속된 트럭들을 모두 모아서 사단의 중앙 통제를 받는 특수 연대, 혹은 특수 대대로 운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비부품을 확보하고 정비하는데 용이할 것입니다. 그렌달Владимир Давыдович Грендаль 동지는 예비부품 공급과 정비가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기동부대들을 위해 민간 차량들을 대규모로 징발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다시 민간에 돌려줘야 합니다. 예비부품 수급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공장은 전선의 부대에 예비 부품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했습니다. 공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군이 보유한 차량 중 많은 수가 예비부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비 시설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스탈린: 차량 정비를 이야기 하는거요? 

파블로프: 예비부품을 확보해야 차량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자비하고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습니다. 각 군관구에는 군수보급과 전차-장갑차부대를 담당하는 부서를 별도로 설치해야 합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동원 및 훈련을 통제하고 예상되는 전역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전차-장갑차부대 총국의 조직을 분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해당 총국의 관할이오. 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소. 

파블로프: 스탈린 동지. 저는 전차-장갑차병과 총국을 분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군사훈련만을 담당할 조직이 필요합니다.  

1940년 4월 17일 저녁 회의, Ibid., pp.259~263에서 재인용.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