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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더글라스 내쉬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글 중에서

지난번에 쓴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에서 잠깐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논쟁과 이 논쟁에서 기 사예르를 옹호한 더글라스 내쉬의 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글은 내쉬가 Army History 1997년 여름호에 기고한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라는 글인데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바 있습니다.
2차대전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기 사예르의 회고록은 많은 오류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와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이 한차례 진행된 바 있습니다. 내쉬는 구술작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이 가지는 문제점, 구술자료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케네디Edwin L. Kennedy. Jr가 지적한 것 처럼 사예르의 회고록에는 많은 자잘한 오류들이 있다. 즉 화기의 구경, 차량의 명칭, 부대 그리고 용어 같은 것이다. 이런 오류 중 많은 것들은 영문판의 군사용어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애당초 사예르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으며 번역을 하면서 독일 군사용어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어휘를 무리해서 끼워맞춘 것이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용어들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예르는 초고를 연필로 썼는데 알아보기 힘든 부분 때문에 처음 출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사예르는 전쟁이 끝난 뒤 잠시 프랑스군에 복무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에 프랑스 군사용어가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한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사예르는 열 여섯살에 입대했다는 점이다. 사예르는 3년 뒤 전쟁 포로가 되어 독일군에서 제대했는데 이 때는 열 아홉살의 청년이었다. 사예르는 겨우 어린애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독일어를 제대로 말할 줄도 몰랐으며 세부적인 군사지식에 대한 안목도 없었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갑자기 접하게 된데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는데 사예르가 자신이 경험한 것 들을 뚜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사예르가 사소한 사실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긴 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정확하다는 것이고 이점은 저자의 신뢰성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22년이 지난 뒤에 이런 사소한 사실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인간답고 훨씬 믿을만 하지 않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 중 수개월의 전투를 경험한 뒤 대략 25년쯤 흐른 뒤에 모든 자잘한 사실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군사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군사사 전공자나 직업군인, 혹은 취미로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군복, 무기, 군장, 그리고 차량 등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세부적인 사실들은 사예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것 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사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심지어 대충 서술한 것이다.

케네디가 가장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부분은 사예르가 군복에 부착하는 표식의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예르는 부대의 소매띠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필자는 현재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퇴역 소령, 헬무트 슈페터씨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을 비난하는 것 만으로도 사예르의 회고록 전체가 조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할 것이다.(케네디의 글을 인용하자면 “[소매띠의]  위치를 잘못 기억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가 없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이 독일육군의 정예 부대로서 부대원들의 오른쪽 소매에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의 소매띠는 쥐텔린Süttelin 서체로 Großdeutschland라는 글자를 수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오늘날의 레인저 부대 마크나 다른 특수부대의 상징만큼 명예로운 상징이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 또한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들은 왼팔에 달았다. 사예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소매띠를 받았을 때 왼팔에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썼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른팔에 달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예르는 소매띠에 대해서 틀린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점이 뭘 입증해 준다는 것인가? 사예르의 회고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세부적인 군사지식이 아니라 느낌과 분위기, 그리고 경험이다. 소매띠의 위치 같은 내용은 사예르가 너무나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공포나 무용담과 비교하면 하잘데 없는 것에 불과하다. 사예르는 그저 소매띠를 어디에다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오류가 그렇게 까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예르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부주의한 면을 자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참전용사들에겐 흔한 일이다. 나는 해외근무기장Overseas service stripes을 어느 쪽에 다는지 모르는 2차대전 참전용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필자의 조부는 1944년 6월 6일 82공수사단 소속으로 생-메르-에글리제Sainte-Mère-Église에 강하한 분인데 자신이 82공수사단 마크를 달았는지 비공인 508강하연대 마크를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가 노인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세부적인 지식들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대 휘장과 같은 것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사예르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짓이다.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 Army History No.42(Summer, 1997), pp.15~16

더글라스 내쉬는 그의 대표작 Hell's Gate: The Battle of the Cherkassy Pocket January - February 1944에서 잘 보여주었듯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가 내쉬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 처럼 내쉬는 사예르의 회고록을 둘러싼 논쟁에서 군사적인 지식들의 오류를 근거로 비판하는 측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쉬가 구술 경험이 풍부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전쟁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관심사가 같을 수가 없고 전쟁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이지만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속의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쉬와 같은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은 반가운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