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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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이전 글에서 소개한 테렌스 홈즈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는 테렌스 주버의 충격적인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면서 지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주버의 재반론을 소개하기 전에  홈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슐리펜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계획을 완성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직전이었고 그때문에 그 이전의 훈련에는 이러한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슐리펜이 실시한 각종 훈련을 분석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버는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사료를 오독하게 된 것이다.

주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접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주버는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합니다.(이 논문은 좀 짧습니다) 주버는 먼저 “우익으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기동”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우익의 주공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24개 사단을 포함해 총 82개 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실행한 계획에서도 우익에는 54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그쳤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장래에 편성될 부대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정보기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25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그뢰너 등 슐리펜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인물들은 슐리펜의 마지막 전쟁계획인 1905-06년 계획에서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회고했는데 주버는 이것이 (서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 에서 일관되게 명시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원사료를 분석하지 않고 1938년에 집필된 쵤너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의 결과 우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데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상정한 상황을 혼동한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는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로 돌입하기는 했으나 북프랑스까지 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슐리펜계획”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과 “슐리펜계획”을 관련시키는 것이 “제법 대단한 상상력(quite remarkable powers of imagination)”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워게임(Kriegsspiel)이 실제 작전계획, 즉 슐리펜계획과 동떨어진 일탈적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버는 여기에 대해서도 좀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즉 홈즈의 설명에 따른다면 슐리펜은 퇴임하기 직전에 너무나 무료해서 쓸데없는 워게임을 한게 된다는 겁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11-12월 워게임은 모로코 사태로 촉발된 긴박한 정세, 즉 독일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쟁을 벌여야 할 수 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자신이 주사료로 사용한 디크만의 원고를 홈즈가 무시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의 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슐리펜 퇴임이후에 대한 홈즈의 해석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버는 소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1904년 참모부연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홈즈의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소몰트케는 진짜 전쟁계획은 놔두고 우발계획만 연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소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11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홈즈의 설명을 따를 경우 소몰트케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아르덴느로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우익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진격하는 양상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프랑스군의 주력을 우회기동으로 포위하는게 아니라 벨기에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은 파리 서쪽으로의 우회기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홈즈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군의 주공이 파리와 베르덩 사이로 우회하게 되는 등 모순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1911년의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실제 병력은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합니다. 또 소몰트케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3:1수준으로 조정했는데 이것은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봅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합니다. 독일 제1군은 5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것과 같은 파리 서부로의 우회기동에는 13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불과 5개 군단으로는 파리 서부로 우회할 경우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버의 설명입니다. 주버는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은 단지 센강 하구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댓글 2개:

  1. 1라운드는 Terence 對 Terence의 논쟁이군요. 주버의 책만 어설프게 읽은 상황에서 판단을 쉽게 내리기는 어렵지만, 홈즈의 설명이 좀 더 논리적이라고 보아집니다. 주버의 책을 읽다가 든 느낌은 결론을 정해놓고 그것에 부합하는 자료만을 활용한다고 할까요? 재임기간의 여러 기동훈련, 참모부 훈련과 그에 대한 검토를 통해 1905년의 비망록이 나왔다는 홈즈의 설명이 보다 타당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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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길 잃은 어린양10:16 오후

    넵. 맞습니다. 제목에 1-X로 붙인 것들은 모두 테렌스와 테렌스 사이의 논쟁입니다. 논쟁의 대상이 달라질 때 마다 앞의 숫자를 바꿀 생각입니다. 그밖에 논쟁과 간접적으로 관계된 글은 번외편으로 S-X로 나갈 생각이고요.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주버가 비판받는 이유가 사료의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건데 이점은 앞으로 소개할 독일쪽의 반론이 나오면서 본격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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