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일 토요일

한국 해병대의 크롬웰 전차에 대한 최영섭 대령의 회고담

한국전쟁 당시 한국 해병대가 영국제 크롬웰 전차 1대를 운용한 사실은 꽤 유명합니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는 1951년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군이 해안포로 운용하던 크롬웰 전차를 노획해서 수리한 뒤 운용을 했습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역시 백두산함(701함)에서 항해사, 포술사로 참전하신 최영섭 대령의 회고록(2013)에 크롬웰 전차의 일화가 상세히 기록된 덕분일 겁니다. 한국 해병대의 크롬웰 전차 이야기는 한국전쟁기의 독특한 일화 중 하나입니다. 최영섭 대령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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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0일) 1500시경, 미 순양함과 해군상륙부대 간의 통신연락을 위해 미 해군장교 1명과 통신병 2명이 701함에 왔다. 최 소위는 이들을 데리고 302정에 탔다. 1630시, 함정편성 상륙부대는 302정과 발동선 2척에 분승하여 701함, 301정 및 306정 호송 하에 팔미도 해역을 출발했다. 1700시 2척의 순양함과 한척의 구축함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상륙부대를 실은 302정과 발동선은 영종도 남쪽해안을 돌아 1800시경에 만석동 기계제작소 해안으로 상륙했다. 미 해군장교는 미 순양함에 보고하고 302정장도 701함장에게 보고했다.
곧이어 1900시경 310정편으로 도착한 덕적도부대가 상륙했다. 이때 월미도와 인천역 쪽에 있던 적이 소총사격을 가해왔다. 상륙부대의 상륙성공을 확인한 최 소위는 미 해군을 인솔하여 302정편으로 701함에 돌아왔다. 김종기 부대장은 작년 9.15 인천상륙작전 때에도 해병대 제2대대를 지휘하여 이곳 레드비치 만석동으로 상륙했었다. 따라서 김 부대장은 이곳 지형지물을 손바닥 보듯이 훤했다. 김 부대장은 덕적도부대 3개 소대를 선두에 세우고 함정부대를 그 좌편에 배치하여 기상대고지를 향해 공격했다. 덕적도부대 3개 소대는 고지 서측으로 부터 공격하고 함정 2개 소대는 고지 북측으로 전개했다. 적은 소총, 따발총 그리고 경기관총으로 대항했다. 고지 정상 약 200m 거리에 접근하여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이때 각 소대장은 자기 '소대'를 큰소리로 '중대' 또는 '대대'로 부르며 지휘했다. 적은 대부대에 의해 포위된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2100시경 기상대고지를 점령했다. 이곳에는 상륙부대의 공격과 함포사격으로 죽은 시체가 널려있었다. 야간이라 교통호에서 죽은 시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김종기 부대장은 통신병을 불렀다.

"해군, 해병대 합동특공대는 2100시 기상대 고지를 점령함. 확인된 적군 사살 11명, 아군 피해 없음."

701함장은 즉시 미 순양함 헬레나 함장에게 보고했다. 상륙군을 떠나보낸 후, 상륙부대에 대한 안위와 작전의 성공여부에 대한 불안으로 701함 장교들의 분위기는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적정에 대해 아는 것은 김 하사관의 정찰보고와 월미도, 기상대고지에 대한 맹렬한 포격으로 적의 방어 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2100시, 김종기 부대장의 '기상대고지점령' 보고는 적막 속의 함정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었다. 모든 함정에서 '만세'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김종기 부대는 적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적군 지휘본부가 있는 시청으로 진격했다.
2300시, 시청을 점령하고 부대본부를 설치했다. 사무실에 걸려 있는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뜯어내 짓밟아버렸다. 깃대에 올려 있는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올렸다.

11일 0600시, 부대는 월미도로 진격했다.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적군은 상륙부대가 기상대 고지를 점령할 무렵 모두 도주했다. 월미도 남쪽능선 아래에는 엄폐된 참호에 야포 8문이 있었다. 섬 동남쪽 비탈에는 참호 속에 나뭇가지를 덮어씌워 위장한 탱크 한 대가 있었다. 김 부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0700시, 월미도 완전 점령함. 적 탱크 1대, 적 야포 8문 노획함"

701함에서는 또다시 새벽하늘을 가르는 '만세' 소리가 터졌다. 미 순양함 헬레나 함장에게 즉각 알렸다. 상륙부대는 적 야포와 탱크, 기타 무기가 더 있나 섬 주위를 수색했다. 또한 노획한 야포를 사용할 수 있나를 점검했다. 적군은 도망칠 때 야포의 사격장치를 뜯어내 땅속에 묻거나 숲속에 버렸다. 수색과정에서 적이 매설해 놓은 지뢰가 터져 부상자 3명이 발생했다. 부상자는 어선에 태워 701함으로 후송하여 치료했다. 군의관은 경상이라며 곧 회복한다고 했다.

노명호 함장은 기관장과 포술장에게 월미도에서 노획한 탱크와 야포를 수리해 우리가 쓸 수 있으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기관사 강명혁 중위가 전기장 김생룡 병조장, 내연사 이종문, 이길선 및 조종래를 선발하고 포술부에서는 갑판사관 최 소위가 포술요원 3명을 선출하여 월미도에 상륙했다. 이때 미 순양함에서 파견한 5명의 미 해병이 동행했다.
최 소위는 김 부대장에게 "특공대에 참가한 3인치 포요원 홍양식과 이유택 그리고 정인화를 불러주십시오. 야포 수리에 필요합니다."건의 드렸더니 곧 시청에 주둔하고 있던 세 사람을 월미도로 불렀다. 강명혁 중위는 우선 위장해 놓은 나뭇가지를 제거하고 참호 조위의 흙을 파헤쳤다. 기관부 요원들은 탱크 엔진과 전기회로를 점검하고 고장난 곳을 수리했다. 강 중위가 운전석에 들어가 시동 스위치를 돌렸다. 엔진이 '부릉, 부릉' 소리를 내며 멋지게 시동이 걸렸다. 처음 타보는 탱크지만 기어를 넣으니 움직였다. 기어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시운전을 했다. 기관부 요원과 구경하고 있던 부대원들이 손뼉을 치며 "적 탱크 잡았다!" 소리 높이 외쳤다.

최소위는 배에서 인솔해온 포 요원과 상륙특공대에 지원하여 용감히 싸운 3인치포 사수 홍양식, 선희수 이유택 그리고 척도수 정인화 하사관들에게 "적은 이곳 월미도에 야포 8문을 참호 속에 은폐해 놓았다. 적은 도망치면서 야포 사격장치를 뜯어내 땅속에 묻거나 숲속에 감추었다. 적이 숨긴 포 부품을 찾아내 조립해 보자. 잘 되면 이것을 가지고 적을 추격해 쏘자. 이곳 월미도에는 사방이 지뢰가 깔려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모두 야포 부품 찾기에 나섰다. 약 한시간 동안 수색 끝에 '브리지브록'등 부품을 찾아 모았다. 포 요원들은 야포 한 문, 한 문씩 조립했다. 야포 4문을 복구했다. 홍양식 2조가 "갑판사관님, 4문은 완전히 복구했는데 나머지 4문은 부품이 없어 안 되겠습니다. 조립한 4문은 격발이 잘됩니다. 시험사격 해 볼까요?" 물었다. 숲속에 숨겨놓은 탄약을 찾아냈다. 야포 1문에 탄약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꽝' 소리와 함께 탄알이 날아갔다. 모두 손뼉을 치며 "야포 잡았다"고 외쳤다.

정오경 최 소위는 속히 귀함하라는 함장지시를 받고 배에 돌아오자 미 순양함에서 LCVP(상륙정) 한척이 701함에 와 계류했다. 제95기동함대사령관 스미스 소장이 참모 일행과 통역을 맡은 해군 법무장교 최병해 대위를 대동하여 701함에 올랐다. 스미스 소장은 노명호 함장에게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UN지상군 작전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그 공로를 치하했다. 노명호 함장과 최 소위는 스미스 소장 일행과 같이 LCVP를 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스미스 소장은 참모에게 어젯밤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상륙한 만석동에 접안하라고 지시했다. 기계제작소 안벽에 이르자 김종기 부대장이 영접했다. 스미스 소장은 김 부대장의 손을 잡고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고 치하했다. 김 부대장은 최병해 대위의 통역으로 작전상황을 보고했다. 스미스 소장은 인천역 쪽으로 걸어가 월미도와 인천 시내를 한참동안 관찰하고 동행한 일행과 사진촬영을 했다. 스미스 소장은 참모에게 인천항 부두시설 상태를 속히 조사하라고 지시한 후 김 부대장에게 노획한 탱크와 야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물었다. 김 부대장이 월미도 남쪽에 있으며 지금 수리 중이라고 대답하니 참모에게 그곳으로 가자고 지시했다.

일행은 LCVP를 타고 월미도 남쪽으로 이동하여 해안에 닿았다. 탱크와 야포가 보였다. 강명혁 중위와 기관부 요원들이 탱크를 수리 중 이었다. 김 부대장이 이곳 해안에는 적이 매설한 지뢰가 있어 위험하니 상륙하지 마시라고 권고했다. 이때 오전에 와 있던 미 해병대 대원이 내려와서 미 해군 참모와 통역장교 최병해 대위를 안내하여 탱크와 야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탱크와 야포를 유심히 살펴본 후 사진을 찍고 내려갔다.

스미스 소장 일행은 미 순양함으로 돌아갔다. 강명혁 중위는 기관부 요원을 탱크에 태우고 상륙부대 본부가 있는 시청으로 향했다. 최 소위는 야포 4문을 이끌고 탱크 뒤를 따랐다. 해군, 해병대특공대 상륙군이 인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이 시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해군 만세!', '해병대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김생용 병조장이 시민들이 든 태극기를 받아 탱크 위에 높이 올렸다. 탱크와 야포가 시청에 이르자 상륙군들이 뛰어나와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했다. 오후에 강명혁 중위와 최 소위는 대원들과 같이 탱크에 야포 1문을 끌고 숭의동 쪽으로 갔다. 강 중위는 신나게 탱크를 몰았다. 길모퉁이를 돌 때 회전반경이 길어 부딪치기도 하며 애먹었지만 전진하는 것은 트럭 운전하듯이 잘 몰았다.

인천시 동쪽 46번 도로와 남쪽의 42번 도로가 마주치는 지점에 탱크를 세우고 야포에 탄약을 장전하여 적군이 이동한 부평 쪽을 향해 쐈다. 이때 남쪽 42번 길에서 지프차 한대가 달려왔다. 가까이 오더니 지프차를 세우고 미군 장교가 내려 "Hello, I am US Army."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중위 계급장을 단 미군 장교는 수색대원으로 한국 해군,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천시를 점령했다는 정보를 받고 상황을 확인하고자 왔노라고 했다. 강 중위와 최 소위는 그에게 상륙작전 전투와 인천시 현황을 설명했다. 그는 설명을 다 들은 후 '파인!' 하면서 곧 본대로 돌아가 보고하겠다고 했다. 미군 장교는 탱크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더니 "아니, 이 탱크 어디서 갖고 왔느냐?"고 물었다. "적군이 인천 방어를 위해 월미도에 구축한 방어진지에 있던 탱크를 노획해 이곳으로 몰고 왔다"하니 "이 탱크는 영국군 탱크인데"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미군 장교는 "내일 본대와 같이 인천으로 올 때 다시 만나자" 하며 지프차를 타고 되돌아갔다. 시청으로 돌아올 때는 최 소위가 탱크를 몰았다.

(중략)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 우리 해군, 해병대 상륙부대가 노획한 전차에 얽힌 스토리는 이렇다. 영국군 제27여단은 UN군으로 1950년 8월 28일 6.25전쟁 초기에 참전했으며 제29여단은 증원군으로 1950년 11월 18일 부산으로 들어와 곧 개성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UN군은 중공군의 신정공세 때 한강 이남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서울지역의 7만 5000명 병력과 장비 그리고 수많은 서울시민과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은 또 다시 서울을 떠나 임시로 부설한 부교를 통해 긴급히 한강을 넘어야 했다.
영국군 제29여단은 1월 3일, 임진강 남쪽 고양시 지역에서 밀려드는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며 UN군과 피난민이 철수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때 제29여단과 제170박격포대대는 중공군 제115, 116, 117 3개 사단과 중공군 제45포병연대에 맞서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300여명의 인명과 탱크 10여대를 잃었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왕은 이곳 실마리 전적지를 찾아 추도 행사를 거행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한 통신병은 귀국 후 임종을 맞이하면서 실마리 전투에서 같이 싸운 전우들에게 "나 죽은 후 내 뼈를 한국 실마리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그 유언을 들은 전우는 그의 유골함을 안고 김포공항에 내려 실마리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셔대대 전적비 옆에 묻었다.
6.25전쟁에 영국은 항공모함 1척을 포함하여 17척의 함정과 지상군 연병력 약 4만 4천명을 파병했다. 이들 영국군은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고 한국국민의 자유를 위해 공산 침략군과 격렬히 싸워 1,079명이 전사하고 2,674명이 저상을 입었다. 2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해군, 해병대 상륙부대가 월미도에서 노획한 탱크는 영국군 제29여단이 1951년 1월 3일 임진강 남쪽 고양시 지역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빠앗긴 탱크 10대 중의 한대로 추정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 발전된 데는 6.25전쟁에서 UN군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영섭, 『6ㆍ25 바다의 전우들: 바다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에 대한 노병의 회상록』, 세창미디어, 2018(수정보완판), 18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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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바로 월미도에서 스미스 제독의 참모진이 촬영한 크롬웰입니다. 북한군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의 전술기호와 승무원들이 포탑측면에서 쓴 Hydra라는 별명이 그대로 남아있는게 확인 됩니다.



최영섭 대령의 추론은 정확합니다. 실마리 전투 당시 후위를 맡아 분전했으나 큰 손실을 입은 8th Royal Irish Hussars는 센추리온 전차를 주력으로 장비했지만 1개 중대는 크롬웰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크롬웰 전차를 장비한 중대는 Royal Ulster Rifles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후퇴 과정에서 보유한 크롬웰 전차 다수를 중국군에게 상실했습니다.

※ 곰늑대님의 코멘트를 보고 추가합니다. 해군본부에서 2010년에 간행한 『6ㆍ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390쪽에서는 이후 영국군에서 크롬웰 전차 'Hydra'를 회수해 갔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차는 제2차 인천상륙작전 종료 직후 다른 전리품과 함께 부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영국해병대에서 밤사이 가져가 버렸다. 당시 노명호 함장과 김종기 부대장이 영국사령부에 항의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당시 701함 기관사였던 박찬 병조장의 증언, 1966년 4월 7일)"

댓글 2개:

  1. 이것 참 보고 있자니 굉장히 짠한 이야기네요. 노획한 야포 4문을 써 보겠다고 상륙작전 진행 도중에 기술인력을 데리고 전쟁터에서 부품 수색을 하고, 기껏 노획한 전차도 괜찮다 소리를 여러번 들었어야 했으니...

    제 알기로는 전쟁 끝나고 영국군이 철수할 당시 해병대에 공여된 크롬웰은 모두 회수해 갔다고 들었는데 이 히드라의 경우는 어떻게 됐는지 혹시 정보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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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군본부에서 간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따르면 이후 인천항의 한 창구에 히드라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영국군이 와서 무단으로 회수해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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