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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일 일요일

Thomas E. Hanson저,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

몇달 전에 네비아찌님과 트위터로 한국전쟁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다가 올해에 출간된 토마스 핸슨(Thomas E. Hanson)의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에 대한 소감문을 하나 써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늘 그래왔듯 공수표를 발행한 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간단한 감상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의 신분이 육군장교라는 점은 이 책의 문제의식에 꽤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점은 뒷 부분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해묵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책임이 바로 “2차대전 직후 평화분위기에서 무리하게 육군을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와 5년간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전투준비를 소홀히 한 극동군사령부 및 8군 사령부”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답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육군을 감축하고 준비태세를 위험할 정도로 떨어트린 트루먼 행정부와 군수뇌부에 있으며 일본 현지의 8군 사령부는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상당부분을 미8군 예하부대들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 확립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핸슨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인식을 확립한 페렌바흐(T. R. Fehrenbach)의 저서 This Kind of War와 애플만(Roy E. Appleman)이 저술한 미육군의 공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입 니다. 저자는 페렌바흐가 한국전쟁 초기 연전연패의 책임은 미군 수뇌부와 일선의 부대 모두에 있다는 입장을 정립했으며 이것이 이후 수십년간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약간 재미있는 점은 페렌바흐가 미해병대를 높이 평가하고 미육군을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 그런가?) 또한 이런 논리를 비판해야 할 미육군도 공간사를 통해 이런 시각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꽤 단순합니다. 먼저 2차대전 이후 트루먼 행정부와 군 최고 수뇌부의 안이한 안보정책이 육군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잘 알려진 것 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외에 대규모 육군을 주둔시킨 경험이 적었으며 트루먼 행정부는 2차대전으로 변화한 국제정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육군이 방대한 점령지 유지를 위해 대규모 지상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 국방예산의 감축과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 때문에 미육군은 급속히 감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초대 국방부장관 포레스탈과 2대 국방부장관 존슨 모두 미국의 안보를 해군이나 공군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육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육군에 대한 예산도 크게 삭감되어 일본에 주둔한 미8군의 예하 사단들은 1950년이 되면 인력과 장비면에서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 육군 감축으로 인한 장교단의 감축 또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을 불러왔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주일미군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를 분석한 4~7장 입니다. 분석의 대상은 25보병사단의 27보병연대, 7보병사단의 31보병연대, 24보병사단의 19보병연대,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입니다. 저자는 이 4개연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8군이 점령기간 중 부대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 예산 삭감으로 인한 장비와 훈련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예하부대들은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널리 유포된 “게이샤들과 놀아나느라 기강이 해이해진 육군” 이라는 인식을 깨고자 합니다. 비록 미육군이 개전 초기에 연전연패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선 부대의 장교나 사병들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육군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미국의 거시적인 안보정책에 있다는 것 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군사사를 연구하는 군인답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통해 오늘날 미국 안보정책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여전히 충분한 육군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특히 부시 행정부 초기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정부의 잘못된 안보정책의 댓가를 전장에 투입된 장병들이 치뤄야 했던 한국전쟁으로 부터 배울 것을 강조합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강력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군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는 점 때문에 육군에 대한 변호로 읽힐 소지도 다분하지만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잡담 하나. 공수표 하나를 처리했으니 공수표 하나를 또 발행해야 겠군요. 그래도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라고 관련저서들이 꽤 나왔는데 그 중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올해에 낸 한국전쟁에 대한 소개글도 써볼까 합니다.

2008년 7월 18일 금요일

대인배 워커 장군

1950년 11월, 슬금 슬금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실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 1기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타격을 받았으며 최전선에서는 다수의 중국군 포로가 생포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지휘관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8군 사령관 워커 중장도 전선 시찰을 나가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워커 중장도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 녀석은 중국인인것 같아. 하지만 LA에 멕시코인이 많다고 해서 LA를 멕시코 도시라고 하진 않잖아."

"Well, he might be Chinese, but remember they have a lot of Mexicans in Los Angeles but you don't call LA a Mexican city."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 America and the Korean War』, Hyperion, 2007, p.383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며칠 전에 썼던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라는 글에 대해 배군님이 혁명군에서 대육군으로라는 아주 근사한 답 글을 써 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삼각편제와 사각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세기 후반 사단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보병사단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재탕 + 약간 수정)

배군님 블로그이탈리아군과 관련된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서 나도 한번 부화뇌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글을 아주 약간 고쳐서 재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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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군부는 1941년 5월 30일에 구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파병 규모를 결정했다. Gerhard Schreiber의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에 따르면무솔리니가 처음에 계획한 파병 규모는 1개 군단급으로 군단 사령부는 편성 당시 “Corpo d’Armata Autotrasportabile”라는 명칭을 달았고 예하에 제 9 차량화 사단“Pasubio”, 제 52 차량화 사단 ”Torino”와 제 3 쾌속사단(Divisione celere) “Principe Amedeo duca d’Aosta”을 배속 받았은 상태였다. 이중 제 9 차량화 사단과 제 52 차량화 사단은 포병연대와 사단 직할대만 차량화 되었고 보병 연대들은 도보 부대였다.
쾌속사단은 전차가 배속된 기병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2개 기병대대로 구성된 2개 기병연대, 그리고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 Bersaglieri 연대가 기간 전력이다. 이와 함깨 전차 1개 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 7월 9일에 이탈리아 원정군은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 약자로 CSIR - 로 명명됐다. 여기에 군단 직할로 제 63 “검은 셔츠” 여단과 트럭 대대 9개 등이 배속되었으며 총 병력 62,000명에 차량 5,500대, 말과 노새 4,600마리, 야포 220문과 대전차포 94문, L3/33 경전차 60대등으로 편성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에 덤으로 추가된 공군 병력에 대해서는 Hans W. Neulen의 Am Himmel Europas 64쪽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영어판도 있는데 영어판은 아직 못 읽어 봤다.

항공대 사령관 – Carlo Drago 대령

22 독립 전투 항공단 – Giovanni Borzoni 소령
- 359 전투 항공대
- 362 전투 항공대
- 369 전투 항공대
- 371 전투 항공대
- MC 200 51대, CA 133 3대, SM 81 2대

61 독립 정찰 항공단 – Bruno G. Ghierini 중령
- 34 정찰 항공대
- 119 정찰 항공대
- 128 정찰 항공대
- Ca 311 32대, Sm 81 1대

245 수송 비행대 – Ernesto Caprioglio 대위, SM 81 10대
246 수송 항공대 – Nicola Fattibene 대위, SM 81 10대, 1941년 11월 25일에 러시아로 이동

무솔리니의 사위이고 외무상 이었던 치아노는 독일이 최정예 부대들을 투입한 소련 전선에 겨우 반 차량화된 이탈리아군을 파병해 봐야 “가난한 이웃”정도로 취급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파병에 부정적 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은 7월 10일부터 8월 5일까지 주둔하고 있던 Verona 일대를 출발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탈리아군 중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Pasubio 사단으로 8월 11일에 전투에 투입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원정군은 남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동계 공세를 비교적 잘 막아 냈다.

추가 파병에 대한 논의는 1941년 가을에 시작되는데 10월 25일에 러시아 원정군을 15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2개군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이 나고 1942년 4월 2일에는 제 8군 사령부가 러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와 함께 알피니 군단(Corpo d'Armata Alpino), 제 2 군단이 러시아로 투입됐다. 파병군의 증강과 함께 명칭은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Armata Itaiana in Russia)”으로 변경 됐다. 1941년에 파병된 CSIR은 1942년 7월 9일 자로 제 35 군단으로 개칭되고 이탈리아에서 도착한 제 8 군 사령부 예하로 배속 됐다.

1941년에 파병된 사단들은 이탈리아군에서는 비교적 장비가 충실한 편 이었으나 1942년에 투입된 보병사단들은 사단 포병연대가 75mm 2개 대대와 100mm 1개 대대로 화력이 독일군 보병사단에 비해 한참 떨어졌고 사단의 대전차 전력도 1개 중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동부전선에서 굴리기에는 확실히 모자란 전력이었다.

G. Schreiber의 글 269쪽에 따르면 이탈리아 제 8 군은 9월 말에 총 병력 229,000명에 차량 16,70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 오토바이 4,470대와 트랙터 1,130대, 야포 946문, 대전차포 297문, 대공포 52문, 박격포 1,297문과 L6 경전차 31대, 돌격포 1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P.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 217쪽에는 1942년 가을의 전력이라고 하면서 이탈리아 제 8군이 병력 227,000명에 경기관총 2,850정, 중기관총 1,800정, 박격포 860문, 20mm 대공포 225문, 야포 960문, 47mm 대전차포 380문, 76/47mm 대전차포 52문, L6 경전차 55대, 돌격포 19대, 차량 16,700대, 트랙터 1130대, 오토바이 4,47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는 후자가 조금 더 뒤의 전력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자료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수치도 있는데 이건 아마 통계를 낼 때 장비 구분을 다르게 해서 그런 것 같다.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직전의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Peter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의 권말 부록 B에 비교적 잘 나와 있다. 여기에 따르면 1942년 12월 14일에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아래의 부대 중 제 2 사단과 제 3 사단은 산악 사단으로 불리는데 알피니 사단과는 구별 된다. 알피니 사단은 전문적인 고산 지대 전투를 훈련 받은 부대로 독일의 “Gebirgsjager”에 해당하며 산악사단은 경보병에 가까운, 굳이 비교하면 독일의 “Jager” 사단 정도에 해당된다. 고지대에서의 작전을 위해 편성되었지만 전문적인 산악 전투 훈련은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 제 8 군

독일 제 29 군단

제 2 보병 사단 Sforzesc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5일 자로 사단에 배속), 3개 포대(75mm, 군 직할대, 11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4문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12월 14일자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 전투부대들을 모두 군 직할대로 빼앗기고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당시에는 1개 자전거 연대와 사단 포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52 차량화 보병사단 Torino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9월 21일에 사단에 배속), 2개 포대(149mm, 제 2 군단 직할대, 8월 9일에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6문

제 35 군단

제 9 차량화 보병 사단 Pasubio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1개 대대 “중”, 1개 대대 “보통”
포병 – 9 개 포대(75mm×6, 105mm×3,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12일에 사단에 배속,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전투력 76%), 1개 포대(210mm, 군 직할대, 11월 25일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19문, 기타 6문

검은 셔츠 여단 “1월 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대전차포 – 47mm 11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298 보병사단이 배속 되어 있었습니다.


제 2 군단

제 3 보병사단 Raven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5개 포대(105mm, 18문, 군단 포병, 10월 13일 에 사단 배속)
대전차포 – 47mm 36문, 기타 13문

제 5 보병사단 Cosser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독일군 제 318 연대 – 3개 대대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75mm 10문, 10월 22일에 군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검은 셔츠 여단 “3월 2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47mm 대전차포 16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385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알피니 군단

제 4 알피니 사단 Cuneense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2개 포대(75mm, 12월 1일자로 군으로부터 배속), 3개 포대(149mm, 11월 11일 자로 군단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5문, 기타 36문

제 3 알피니 사단 Jul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대전차포 – 47mm 44문, 기타 6문

제 2 알피니 사단 Tridenti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기병 1개 대대 전투력 “강” → 이 기병 대대는 12월 2일에 군 직할대로 있던 기병 여단에서 배속됐다.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4개 포대(75mm, 기병여단 소속, 12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기병여단
-제 3 기병연대 Savoi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제 5 기병연대 Novar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Rossi 집단
-오토바이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제 67 기갑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로 부터 차출, L6/40경전차 40대)
-제 13 (자주)대전차 포 집단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L40 da 47/32 돌격포 11대)

제 156 보병사단 Vincenza –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에 포병 연대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독일 제 27 기갑사단과 385 보병사단이 12월 16일에, 독일 제 387 보병사단이 12월 20일에 추가로 증원됐다.

여기서 “기타”로 표기한 이탈리아군 대전차포는 대부분 PaK 97/38 으로 보통 독일쪽 문헌에서 이탈리아군의 “s.Pak” 이라고 표기한 것들은 대부분 이놈이라고 한다.

David Glantz의 From the Don to the Dnepr의 부록에 딸린 이탈리아 제 8 군의 전투 서열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기갑 대대가 Sforzesca 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위의 자료는 독일측의 1차 문헌을 참고로 한 것이어서 아마도 Glantz 의 저서에 있는 전투서열이 잘못 된 것으로 생각된다. Glantz의 저서에는 이탈리아 제 2 군단에 야포 132문, 35 군단에 156문, 29 군단에 170문, 알피니 군단에 216문의 야포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소련군의 공계 공세 시점에 이탈리아 원정군 항공대의 전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 되어 있었다.(H. Neulen 61쪽)

21 독립 전투 항공단
- 356 전투 항공대
- 382 전투 항공대
- 361 전투 항공대
- 386 전투 항공대
- MC.200 32대, MC.202 11대

71 독립 정찰 항공단
- 38 정찰 항공대
- 116 정찰 항공대
- BR 20 17대, Ca 311 14대

246 수송 항공대 – SM.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