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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이전 글에서 소개한 테렌스 홈즈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는 테렌스 주버의 충격적인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면서 지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주버의 재반론을 소개하기 전에  홈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슐리펜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계획을 완성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직전이었고 그때문에 그 이전의 훈련에는 이러한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슐리펜이 실시한 각종 훈련을 분석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버는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사료를 오독하게 된 것이다.

주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접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주버는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합니다.(이 논문은 좀 짧습니다) 주버는 먼저 “우익으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기동”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우익의 주공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24개 사단을 포함해 총 82개 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실행한 계획에서도 우익에는 54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그쳤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장래에 편성될 부대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정보기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25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그뢰너 등 슐리펜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인물들은 슐리펜의 마지막 전쟁계획인 1905-06년 계획에서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회고했는데 주버는 이것이 (서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 에서 일관되게 명시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원사료를 분석하지 않고 1938년에 집필된 쵤너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의 결과 우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데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상정한 상황을 혼동한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는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로 돌입하기는 했으나 북프랑스까지 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슐리펜계획”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과 “슐리펜계획”을 관련시키는 것이 “제법 대단한 상상력(quite remarkable powers of imagination)”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워게임(Kriegsspiel)이 실제 작전계획, 즉 슐리펜계획과 동떨어진 일탈적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버는 여기에 대해서도 좀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즉 홈즈의 설명에 따른다면 슐리펜은 퇴임하기 직전에 너무나 무료해서 쓸데없는 워게임을 한게 된다는 겁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11-12월 워게임은 모로코 사태로 촉발된 긴박한 정세, 즉 독일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쟁을 벌여야 할 수 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자신이 주사료로 사용한 디크만의 원고를 홈즈가 무시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의 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슐리펜 퇴임이후에 대한 홈즈의 해석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버는 소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1904년 참모부연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홈즈의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소몰트케는 진짜 전쟁계획은 놔두고 우발계획만 연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소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11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홈즈의 설명을 따를 경우 소몰트케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아르덴느로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우익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진격하는 양상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프랑스군의 주력을 우회기동으로 포위하는게 아니라 벨기에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은 파리 서쪽으로의 우회기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홈즈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군의 주공이 파리와 베르덩 사이로 우회하게 되는 등 모순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1911년의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실제 병력은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합니다. 또 소몰트케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3:1수준으로 조정했는데 이것은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봅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합니다. 독일 제1군은 5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것과 같은 파리 서부로의 우회기동에는 13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불과 5개 군단으로는 파리 서부로 우회할 경우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버의 설명입니다. 주버는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은 단지 센강 하구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예고편을 올렸을 때 천천히 연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천천히 올리고 있군요;;;;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 테렌스 홈즈의 첫 번째 반론


테렌스 주버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논쟁의 막이 오르자 군사사연구자들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에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인 학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주버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주버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가 시작했습니다. 홈즈는 주버가 논문을 발표했던 War in History 8권 2호(2001)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란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이 반박논문은 핵심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는 주버의 분석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이 논문에서 주버의 주장은 참신하지만 근본적으로 1905년 비망록 자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작 주사료가 되어야 할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이 크게 부족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에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을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버의 주장에 대해 슐리펜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적의 주력을 ‘어떤 곳에서 상대하건 간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를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소(小)몰트케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병력부족문제에 대해서도 주버와는 반대로 설명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난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작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홈즈는 슐리펜은 실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력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는 조금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서 비판을 시작합니다.
홈즈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에 대한 평가도 주버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 것을 독일군의 정보보고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홈즈는 이에 대해 주버가 제한적인 사료를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공세계획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합니다. 주버가 첫 번째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하는 계획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양면공세를 펼칠때나 가능한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없이 프랑스가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슐리펜으로서는 독일측이 먼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인 공세로 나서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주버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홈즈는 근거로서 1905년 비망록이 프랑스의 국경지대 방어선에 대해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은 변화된 전략환경에 대한 슐리펜의 고민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슐리펜이 퇴임직전 실시한 마지막 연습에서 러일전쟁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요새선에 대한 정면공격 대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포위섬멸을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은 주버가 설명한 대로 국경지대에서의 포위 섬멸이 불가능할 경우 취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 반격을 통한 포위섬멸전에 집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파리를 포위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국경지대에서의 포위섬멸전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는 주버의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이 비망록의 핵심은 엔(Aisne)강 서안, 랭스(Rheims)에서 라 페레(La Fere)를 잇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은 이 방어선의 좌익으로 우회하면 반드시 프랑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파리 동쪽의 방대한 지역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엔강 서안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마른강과 세느강의 방어선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파리라는 대도시가 이 방어선의 좌익에 강력한 보루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대안은 파리의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 홈즈의 설명입니다. 즉 홈즈는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슐리펜도 이러한 상황은 가능한 피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우익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1905년 비망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 번째 안에서는 ‘가능하다면’ 프랑스군의 주력을 파리 동쪽, 즉 랭스와 라 페레를 잇는 선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첫 번째 안에서도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 처럼 프랑스군 주력이 마른과 센강 서안으로 퇴각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안과 여섯번째 안에 이르면 파리를 우회포위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시 한번 주버가 제기한 문제 하나에 대해 답을 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까지의 각종 연습에서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이 실시되지 않았는가? 홈즈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슐리펜은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이것이 1905년 비망록에 반영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독일군의 우익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되 최대 진출선을 라 페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파리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할 경우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독일군 우익의 기동이 제한되는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비판합니다. 슐리펜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주력을 포착해 섬멸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주력이 어디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파리를 우회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포위섬멸전의 주역이 독일군 우익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음으로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과 슐리펜이 재임중에 실시한 여러 연습간에 이질성을 강조하는데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프랑스가 방어를 취할 경우에만 서부전선에서 선제공격을 고려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홈즈는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즉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앞서 주버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의 능력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 연습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서부전선에 대한 작전개념은 어디까지나 그가 1897-98년에 작성한 비망록과 베셀러가 1900년에 작성한 작전연구에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의 1897-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작전연구가 ‘슐리펜 계획’의 개념과 유사한 점은 주공인 우익을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게 한다는 점 말고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우익의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1897-98년 비망록은 우익에 8개 군단을,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10~11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우익의 규모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우익의 규모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 총참모부 철도국(Eisenbahnabteilung)의 국장이었던 슈탑(Hermann von Staabs)과의 회의에서 슈탑이 모젤 이북에 집결할 병력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이후라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1903~1904년이 ‘슐리펜 계획’이 구체화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것 입니다.
홈즈는 이 시기에 정립된 기본 개념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홈즈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우익이 최대한 진출해서 프랑스군이 어떠한 대응을 취해도 포위될 수 밖에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이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더라도 그 후방에 있는 다른 방어선에 막힐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파리라는 강력한 거점을 끼고 있는 방어선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이어지는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계속해서 홈즈는 주버가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에 35.5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지만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에 17개 군단만을 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1904년 4월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이 약했기 때문에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이 끝난 뒤 최종논평에서 우익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할 경우 우익에 위치한 주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의 5개군을 베셀(Wesel)-디덴호펜(Diedenhofen) 일대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에 명시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아헨-트리어 지구의 철도망이 증설되면서 슐리펜이 우익의 주력을 보다 더 북쪽으로 배치하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메츠의 요새를 강화해서 우익의 측면을 더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했습니다. 홈즈는 이 결과 1905년 참모부연습을 실시할 무렵에는 병력, 부대집결지, 초기 목표 등에서 슐리펜계획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고 봅니다.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워게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워게임 모두 우익을 활용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홈즈는 이러한 주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아 실시한 첫 번째 연습에서는 독일군 우익의 포위기동에 의해 프랑스군 주력이 격파되었으며 쿨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세 번째 연습에서도 주버의 설명과는 달리 우익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단지 슈토이벤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두 번째 연습에서만 슐리펜이 우익의 상당수를 로렌 방면으로 돌렸지만 이경우 조차 주력의 5개 군 중 2개군을 돌린데 불과했으며 우익에 남은 나머지 3개군은 주력이 빠진 프랑스군의 2선급 부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홈즈는 이 연습에 대한 쵤너(Zoellner)의 논평은 슐리펜의 구상이 옳다는, 즉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한 뒤 우익으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를 참조한 주버가 사료를 오독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두 번째 워게임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일부 병력을 돌린 것이 부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프랑스군이 로렌을 공격할 경우 우익은 지체없이 공세에 나서도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05년 11~12월에 실시된 워게임에 대한 해석도 주버와는 다릅니다. 이 워게임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전략방어를 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을 작성하기 전에 실시한 마지막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이 워게임이야 말로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 이후 가지고 있었던 구상을 살펴본다면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야 말로 슐리펜의 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의 병력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독일군의 증강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반면 홈즈는 이것을 말 그대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위해 병력 증강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小) 몰트케는 총참모장에 취임한 직후 슐리펜으로 부터 넘겨받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주버는 이 점에 주목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지요.
홈즈는 소 몰트케는 프랑스군이 전략적 방어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 상당기간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이점은 1906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 몰트케가 이후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공세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홈즈는 소 몰트케 취임 이후 국경지대, 특히 메츠의 요새를 강화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로렌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는데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이런 환경에서는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베르덩 북쪽으로 주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독일군과 직접 격돌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홈즈는 결국 이 때문에 1911년에 소 몰트케가 그동안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홈즈는 소 몰트케가 1911년에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 했다는 주버의 해석은 옳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말고는 주버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 중에서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을 명시한 지도(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홈즈에 따르면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는 대부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책은 슐리펜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 몰트케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슐리펜은 대규모 포위섬멸을 위해 우회기동을 구상한 반면 소 몰트케는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개념에서 우회기동에 주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도 3과 6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주버는 지도3에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작전계획으로서의 미비함을 강조하는데 홈즈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재검토했을 때 파리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소 몰트케의 목표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신속히 프랑스를 격파하고 서부전선의 병력을 돌려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은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소 몰트케가 1914년 8월 전역에서 어떤 식으로 야전부대를 지휘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 몰트케는 1914년 8월 30일 독일 제2군이 생 캉탱 방면에서 반격을 받자 제1군과 2군에게 진격방향을 남서에서 남쪽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 주력이 파리로 퇴각하지 않고 반격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격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입니다. 즉 홈즈는 실제 전역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적 주력의 섬멸이 최우선이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A. 논쟁의 시작

앞서 이야기 했듯 1999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던 테렌스 주버는 논문 한편으로 군사학계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주버는 1999년 War In History에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은 10년이 넘는 대논쟁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실제로 존재했던 작전 계획이 아니라 1차대전 직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내내 독일 군부의 전쟁 수행에 비판적이었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을 필두로 한 민간인들이 패전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기 이전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슐리펜계획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러한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한 직후라는 사실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는 1차대전 이후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한스 델브뤽이 1차대전 중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자 전쟁 이전부터 델브뤽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군부에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해 처음 언급한 인물은 독일 육군의 장군이었던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에 발표한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이라는 저작을 통해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전쟁계획을 다루면서 장교단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쿨은 관련된 글을 발표하면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소(小)몰트케가 제1군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한 슐리펜의 원안을 수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쿨의 뒤를 이어 국립문서보관소 소속으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하고 있던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 또한 슐리펜이 퇴임 직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특히 우익을 강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델브뤽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편, 1차대전 직전 총참모부에서 부대 전개 및 배치를 담당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또한 전후의 저작에서 슐리펜의 계획을 언급하며 델브뤽의 비판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1차대전 초 총참모부에서 철도 업무를 담당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전쟁부 장관을 지내게 된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도 쿨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슐리펜계획이 널리 알려지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문제는 1945년 영국공군이 포츠담을 폭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독일군의 문서고가 파괴되어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쿨, 푀르스터, 그뢰너 등은 당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자료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불타버렸기 때문에 슐리펜계획에 대한 주요 사료 중 2차대전 후 까지 남은 것은 슐리펜이 1906년 퇴임을 전후해 작성한 비망록(Denkschrift)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비망록 자체가 작전계획으로써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격해올 경우 주공인 우익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1차대전 직후 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중 하나로 96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1906년은 물론 1914년에도 불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역사가들이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독일 통일 이후 공개된 구동독 소유의 문헌들을 활용했는데 그것은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슐리펜계획에 대한 연구 원고, 그리고 슐리펜과 몰트케가 몇몇 훈련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 등이었습니다.
필자인 주버는 특히 빌헬름 디크만의 원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은 역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했으며 대략 1930년대 후반에 문제의 원고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의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과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등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B. 디크만의 연구에 대한 검토

이 글에서는 먼저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넘어갑니다. 주버는 대(大) 몰트케에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독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던 시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방어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제한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대 몰트케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1888년의 계획에서는 서부전선의 방어에 11개 군단을, 동부전선의 공세에 7개 군단을 할애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제한적인 공세를 실시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었는데 그 경우 6개 군단으로 낭시(Nancy)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엇습니다.
주버는 슐리펜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계획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의 최초 부대전개계획인 1893/94년 계획에서 4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15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두고 동부전선의 15개 사단 중 11개 사단을 실레지엔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향한 공세에 배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1894년 비망록에서 먼저 낭시를 공격한 뒤 그 다음에는 툴(Toul)과 베르덩(Verdun) 사이의 요새선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버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비망록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류라고 강조합니다. 즉 슐리펜의 최초 계획은 어디까지나 몰트케의 계획을 이어받은 것에 머물렀다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1895/96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는 1895/96년 계획에서 주목할 점은 동부전선에 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1895/96년 계획에는 동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이 A안과 B안으로 나뉘어 있는데 A안은 동프로이센에서 나레프(Narew)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고 B안은 1893/94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레지엔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디크만의 분석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5/96년 계획을 작성한 시점에서 B안 보다는 A안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6/97년 부대전개계획에서는 동프로이센에서 15개 사단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이것을 슐리펜의 계획이 완전히 몰트케가 구상한 것으로 회귀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1897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입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독일 내에서는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6년 경에 이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의 1897년 비망록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요새지대를 우회하는데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툴과 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첫번째 안은 해당 지역이 부대기동에 곤란했기 때문에 부적합했던 반면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두번째 안은 해당지역이 대규모 부대의 기동에 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해야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주력에 2개 군을, 주력의 좌익을 엄호하기 위해서 1개 군을, 그리고 프랑스군을 묶어두기 위해 3개 군을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버는 이것을 실제 작전으로 옮기기에는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했기 대문에 1897년 비망록의 연구내용은 1897/98년과 1898/99년의 부대전개계획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당시 독일군의 배치를 보면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이 2:1로써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서부에 48~46개 사단, 동부에 20~22개 사단)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슐리펜이 1897년 부터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에도 이어지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두 개의 안 중 두 번째 안(Aufmarsch II)은 기존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한 편, 슐리펜은 1898년 말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먼저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린 뒤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주버는 1898년 비망록이 매우 실험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슐리펜은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을 2:1로 한 기존 계획으로는 어느 방면에서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에게 숫적으로 압도당해 선제공격이 어려우므로 독일군의 병력동원이 완료될 때 까지 방어를 한 뒤 서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구상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반격을 시작할 때 독일군의 주공은 (아마도 프랑스군의 좌익이 치고올) 아르덴느를 향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반격시 독일군의 주공은 2개 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버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아르덴느를 통한 반격에서 포위망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898년 비망록에서 나타난 ‘반격’의 개념이야 말로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전략이었으며 그가 퇴임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주 버가 인용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1898년 비망록의 내용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의 첫번째 안(Aufmarsch I)을 수정할 때 반영되었지만 여전히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는 등 기존 계획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0/01년의 부대전개계획 중 Aufmarsch I의 병력배치는 1899/1900년 안과 큰 차이가 없으나 구체적인 병력 배치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즉 베르덩 북쪽의 주공을 3개 군으로 강화하고 주공의 좌익을 방어하는 3개 군을 1개 군으로 축소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리고 주버는 1900년 1월 18일 당시 총참모부 제3부참모장(Oberquartiermeister III)으로 재직 하고 있었던 베셀러(Hans Hartwig Beseler)의 작전연구(Operationsstudi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조하면서 주공을 우익에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베셀러는 주공을 리에쥬(Liege)-나무르(Namur)와 베르덩 사이의 약 90km에 이르는 정면에 집중시켜 독일국경에 집결한 프랑스군 주력을 단기간에 격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주 버는 그렇기 때문에 서부에 대한 작전은 슐리펜과 베셀러가 공동으로 완성한 것이며 슐리펜의 1897년, 18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1900년 작전연구가 이후 서부전선에 대한 슐리펜의 전략구상을 지배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슐리펜 계획’으로 본 1905년 비망록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편, 주버는 1900/01년 부대전개계획의 Aufmarsch II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900/01년 Aufmarsch II는 44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집중해 오스트리아군 40개 사단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전략적인 대공세를 펼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서부 뿐 아니라 동부에서도 공세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슐리펜이 서부에 대한 공격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기존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동 부에서 전략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서부에서는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배경이 슐리펜에게 서부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먼저 막아낸 뒤 반격하는 방안을 계속 연구하도록 했다고 해석합니다. 슐리펜은 1899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프랑스군의 좌익에 대해 역습을 감행할 것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즉 서부에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를 하게 될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고정방어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정방어 대신 반격을 통한 기동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이런 인식이 1900년과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동원 4주차에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9개 군단을 동부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1901년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둔 뒤에도 3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남겨둬야 했는데 그 이유는 국경지대 전투에서 격파할 수 있는 프랑스군은 2개 야전군 규모로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멸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버는 ‘슐리펜 계획’에서 나타나는 프랑스군의 철저한 격멸이 1901년 연습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한 편 1901/02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동부에 배치할 사단을 41개로 줄이고 다시 1902/03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이것을 다시 24개 사단으로 줄여버리는데 이것은 대 몰트케의 구상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02/03년 Aufmarsch I 입니다. 1902/03년의 Aufmarsch  I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좌익에 대한 독일군의 반격을 예측할 것을 상정하고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는 대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3개군이 공격에 동원되고 이 중 제4군이 베르덩 방면으로, 제5군과 6군이 낭시와 트루에 드 샤흐므(trouée de Charmes) 방면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버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우익에 주공을 집중하는 방식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 입니다. 이점은 슐리펜이 1902년 5월 16일에 작성한 글을 인용하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주버에 따르면 슐리펜은 이 글에서 베르덩 북쪽으로 주공을 지향하더라도 좌익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할 위험이 높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슐리펜이 여전히 동부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근거로 봅니다.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비록 전쟁 발발시 동부전선에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실시하는 것 이었지만 슐리펜이 1902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13개 군단과 10개 예비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버는 이 당시 슐리펜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먼저 동부전선에 압력을 가하면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공세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강력한 요새선에서 나온 프랑스군을 독일군의 철도망이 지원할 수 있는 국경에서 격파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마지막으로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65개 사단을 서부에, 10개사단을 동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I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 존의 통설은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에서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을 취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슐리펜은 1903~4년에 이르기 까지 동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규모의 공세만을 계획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경우는 대부분 프랑스군이 공세로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였다고 봅니다.  물 론 주버는 디크만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합니다. 즉  디크만이 원고를 집필할 당시 부대전개계획 이외의 자료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실제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en)과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비망록과 참모부연습(Stabsreisen)의 결론을 활용해 총참모부의 의도를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가 담고 있는 내용으로도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C.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

주 버가 다음으로 제시하는 자료는 슐리펜이 1904년 실시한 참모부 연습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입니다.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략개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슐 리펜은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West)에 대한 논평에서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병력 문제입니다.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현역 부대 외에 16개 예비군단(Reserve Korps), 즉 32개 예비사단과 14개 향토사단(Landwehr-divisionen)도 동원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제로 동원 가능한 것은 19개 동원사단에 불과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전시 총력전 상황에서는 동원가능한 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벨기에 침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이 벨기에를 거쳐 공격해 올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국경지대에 정면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둔화 시킨뒤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예상 반격로는 벨기에를 경유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논평에서 서부전역이 시작될 경우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두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메지에흐(Mézières)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방안의 문제점은 뮤즈강을 건넌 주력과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부대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베르덩-릴(Lille) 사이를 돌파하는 것으로 이 지역은 베르덩-벨포르를 연결하는 지역과 달리 요새화 정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슐리펜은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은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은 몇몇 장교들에게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라인강 하류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경우 프랑스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했는데 크게 두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일부는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재배치에 맞서 병력을 좌익에 집중할 것이라고 본 반면 다른 일부는 독일군의 취약한 좌익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후자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을 칠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과 중앙에 집결한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며 최악의 경우 로이텐 전투가 보다 큰 규모로 재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일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 등의 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 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습 과정에 대한 논평이 이어졌습니다. 이 훈련에서 독일군은 17개 군단(34개 사단)을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시키고 아이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그 측면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펠 남쪽으로는 다시 메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마찬가지 임무를 맡았고 9개 군단의 예비가 팔츠(Pfalz)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가장 좌익인 스트라스부르 일대에는 예비군으로 편성한 사단과 3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40개 사단을 동원해 메츠-스트라스부르 지구를 공격했고 이와 별도로 조공 18개 사단이 트리에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취약한 독일군의 좌익에 주공을 지향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훈련에서 상정한 상황은 동원 16일 차에 1, 2, 3군이 네덜란드-벨기에의 국경을 넘은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취약한 좌익을 타격한 것 이었습니다. 독일측은 우익의 병력은 아르덴느를 통해 남진시키고 프랑스군이 독일 영내로 침입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팔츠에 집결해 있는 예비대를 포함해 3개 군을 반격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동원 19일 째에 메츠-쯔바이브뤼켄(Zweibrücken)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반격에 나선 독일군은 프랑스군 보다 우세한 포병의 지원에 힘입어 방어로 전환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결국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연습은 동원 21일차에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주버는 이 연습과정이 겉보기에는 1905년 비망록, 즉 이른바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는 3개 군에 해당되는 대병력이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해 있다는 점이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병력이 프랑스와의 국경 일대에 골고루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대규모 우회 기동을 통한 대규모 섬멸전을 명시하고 있는데 1904년 연습에서는 1~3군이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을 넘긴 하지만 소규모 우회기동에 그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주 버는 마지막으로 1904년 연습에는 아직 편성되지 않은 다수의 부대가 등장하는데 이점은 1905년 비망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즉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 훈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으로 1904년에 실시된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연습은 첫번째 연습과 유사하지만 투입하는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연습에는 향토사단은 한 개도 상정되지 않았고 단지 23개 예비사단 만이 명시되었을 뿐 입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동원 13일 차에 23개 군단을 투입해 상(上) 알자스 방면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우익에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공격을 강행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베르덩-릴 방면으로의 돌파를 중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슐리펜은 논평에서 프랑스군은 독일측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 병력을 집결한 것을 알게 된다면 공세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독일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번째 연습에서 독일군은 첫 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의 병력을 남진시켰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돌파한 프랑스군 우익은 라인강을 도하해 충분한 병력(8개 군단)을 전개시킬 공간을 확보할 목적으로 튀빙엔 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은 모젤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메츠의 독일군은 바로 이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 반격을 감행해 격파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연습에서는 메츠의 독일군이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프랑스군 중앙의 6개 군단과 라인강을 도하한 우익의 8개 군단은 공격을 계속 실시하고 독일군은 두개의 프랑스군 집단에 대해 내선의 우위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은 지휘관이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의 압박 때문에 프랑스군 좌익을 상대하던 병력을 빼돌려 프랑스군 좌익은 포위 섬멸되는 것을 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연습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좌익을 섬멸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에 의해 포위당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주버는  이 두 번째 연습 또한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 계획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이야기되는 1905년 참모부 연습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은 1905/06년의 부대전개계획과 동일한 부대 배치에 슐리펜이 직접 독일군쪽을 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 연습에서는 23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으로 이루어진 6개 군이 메츠에서 베젤에 이르는 지역에 전개되었고 메츠 이남의 좌익에는 3개 군단과 5개 예비사단만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각각 세명의 참모장교가 맡아 세차례의 연습이 실시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이 실시한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바로 주력을 벨기에로 돌리고 벨기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슐리펜은 메츠에 집결된 병력으로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해 격파했는데 주버는 메츠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는 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았는데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자르부르크 방면으로 주공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슐리펜은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우익의 병력 상당수를 프랑스군 주공을 저지하는데 돌립니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연습도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세 번째로 당시 소령이었던 쿨이 프랑스군을 맡은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두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주력을 맞상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 연습이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슐리펜 계획의 일부로 해석되온 원인은 1930년대 후반에는 이미 ‘슐리펜 계획’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퇴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한 1905년 겨울의 워게임(Kriegsspiel)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 이라는 것이 실재했다면 슐리펜이 자신의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연습에서 이 계획을 시험했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이 마지막 연습에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전략방어를 취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슐리펜은 1905년의 워게임에서 먼저 동부전선으로 침공해 온 러시아군을 격퇴한 뒤 그 병력을 서부로 돌렸습니다. 한편 서부 전선의 상황은 조금 재미있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1905년 겨울 워게임에서는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침공해 벨기에가 독일편에 서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서부전선에서는  먼저 침공해온 프랑스군을 동원 26일째 까지 격퇴한 뒤 제한적인 반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부대와 추가로 동원되는 부대와 함께 동원 42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아르덴느에서 포위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은 종결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 말기에 실시한 여러 연습들은 하나같이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D.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비평

주버는 이제 ‘슐리펜 계획’ 문건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돌립니다. 주버는 기존의 연구들은 러일전쟁의 결과 슐리펜이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동부전선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1906년 독일군의 정보기관은 러시아군이 전쟁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 방면에 25개 사단을, 오스트리아 방면에 22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1950년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처음 시작된 이후 모든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이 실존한 계획이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가 보기에 1905년 비망록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육군 강국을 두고 병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슐리펜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여러 문건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주버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슐리펜이 상정한 ‘최악의 시나라오’ 였을 뿐 슐리펜의 실제 의도는 아르덴느와 같이 독일 국경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결전으로 격파하는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1905년 문건에 대한 분석도 꽤 흥미로운 편 입니다. 주버는 먼저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1905년 비망록 파일에는 총 11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1:800,000축적의 6번 지도가 ‘슐리펜 계획’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6번 지도는 1:300,000축적의 2번지도(동원 22일차)와 3번지도(동원 22일차에서 31일차까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지도들에는 단지 독일군이 특정 일자에 진출해야 할 목표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프랑스군의 배치나 전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도3은 파리까지의 이동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작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어느 정도 소요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기존의 연구들은 40일 이내에 전역이 종결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 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40일 이내에 전역을 종결한다는 것은 소(小)몰트케의 발언인데 연구자들이 이것을 슐리펜 계획에도 있는 것 처럼 잘못 이야기 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3은 독일군의 주공을 릴(Lille) 남쪽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입니다.
다 음으로는 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를 가정한 지도인데 흥미롭게도 1904년과 1905년 참모부연습 처럼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병력 일부를 남쪽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역시 ‘슐리펜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 중 슐리펜이 직접 작성한 것 이외의 것은 이후에 추가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슐리펜 계획의 개요를 보여주는 지도 2, 3, 6, 7은 몰트케의 것 이라는 것 입니다.


E. 소(小)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

주버는 다음으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맞다면 슐리펜의 후임인 소 몰트케가 이에 따라 훈련을 진행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이 글에서 사례로 든 것은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입니다.

먼저 1906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로이센에 6개 군단(12개사단)과 9개 예비사단 등 총 21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우익에 15개군단(30개 사단), 메츠에 1개 군단, 로렌에 7개 군단, 스트라스부르에 2개 군단, 알자스에 2개 군단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과는 완전히 다른 부대 배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케는 이 연습에서 벨기에를 통해 우익의 30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신 이들을 메츠 방면의 반격에 투입하는 방안을 취했습니다. 결전을 국경지대에서 치른다는 것 입니다.

1908년의 참모부 연습은 프랑스가 로렌으로 직접 공격해 오는 상황과 함께 벨기에의 협조를 얻어 아르덴느를 통해 공격해 오는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아르덴느로 공격을 해 올 경우 2개 군이 동원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한 독일군의 배치는 4개 군을 메츠와 아헨 사이에 두고 1개 군을 메츠 동쪽에, 1개 군을 로렌에, 1개 군을 로렌 남부-알자스에 두는 것 이었습니다. 이 경우 독일군은 아르덴느를 향해 공격을 시작할 것이었지만 결전을 치를 곳은 프랑스군 주력이 출현하는 곳 이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만약 프랑스군 주력이 메츠-스트라스부르 방면으로 향한다면 4개 군을 메츠-코블렌츠 일대에 집결시킨 뒤 남서 방향으로 반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군과 2군은 주공의 우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프랑스군의 주공이 좌익이라면 1군과 2군이 상대하거나 4군과 5군이 대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주공이 메츠로 향한다면 1군과 2군이 남진해서 이를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주버는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을 통해 소 몰트케는 프랑스 침공 보다는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상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해석합니다.


주버의 결론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버는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정설이었던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해석은 슐리펜이 처음에는 동부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점차 서부전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정판이 바로 ‘슐리펜 계획’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슐리펜이 1898년 부터 1905년까지 쓴 글과 그가 실시한 여러 연습들을 보면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국경지대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에서 소 몰트케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 차원의 대규모 섬멸전을 계획한 사실이 없다.


이 결론은  꽤 충격적인 것 이었고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0년에 걸친 논쟁의 막이 오르게 된 것 입니다.

2010년 7월 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 0

이제 그동안 예고편만 때려댔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원래는 2009년에 논쟁을 간단하게 정리한 글을 썼는데 중간에 빼먹은 논문도 많고 게다가 2010년에 논쟁의 주인공인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새로운 논문을 쓰기도 했으니 그동안 진행된 논쟁을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예전 글에서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빼먹은 논문들을 모두 정리할 생각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논쟁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많은데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다른 분들도 저와 같으시리라 짐작해 봅니다. 위에서 적은 것 처럼 이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과 서적들을 최대한 소개할 것이기 때문에 글을 몇 편으로 나눠서 연재하려고 합니다. 작년에 썼던 글들은 제 귀차니즘과 블로그 글을 손에 책 잡히는 대로 쓰는 습관 때문에 논쟁 중간에 발표된 논문들을 생략하고 넘어가는 폐해(!!!)가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런 폐해를 줄여보려 합니다.


슐리펜 계획

먼저 슐리펜 계획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군사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계획의 하나인 만큼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은 아주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간략히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네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의 실체를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 전 까지 학계의 통설은 슐리펜 계획의 입안자인 독일군 총참모장 슐리펜이 양면전쟁의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단기결전으로 승리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이때문에 우익에 주력을 최대한 집중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 입니다.
기존의 통설은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게 될 경우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해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총참모장에 임명된 슐리펜도 이점을 염두에 두고 개전 초반에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결전을 치르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때문에 1870/71년 전역과 같이 프랑스 국경을 조기에 돌파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퇴임하게 될 때 까지 다양한 대안을 구상했으며 그 결과 최종적으로 1905년에 슐리펜 계획이 완성됩니다. 이 계획은 서부전선에서 조기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 독일군의 가용한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것 이었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들을 무력화 하기 위해서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과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력은 독일군의 우익을 담당할 1, 2, 3군이었으며 이 중에서도 최우익에서 포위망을 형성할 1군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독일군의 주력은 벨기에를 돌파한 뒤 대규모 포위 기동을 실시하고 특히 최우익을 맡은 제1군은 루앙(Rouen)을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포위망을 형성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대규모 포위망으로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슐리펜 계획은 마무리 될 것 이었습니다.
실제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작전이 이렇게 수행되었고 전후 독일측의 공간사도 동일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는 없었습니다.


주버의 주장, 슐리펜 계획의 실재 여부에 대한 논쟁의 시작

그런데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이 논문은 꽤 도발적인 내용으로 이후 10년이 넘는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에 대한 논쟁의 시발점이 됩니다. 이 논쟁에는 여러명의 학자가 참여했으나 주버가 처음 논문을 투고한 War in History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테렌스 주버가 논쟁의 포문을 연 뒤 그를 상대한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와의 논쟁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발표해 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뒤 테렌스 홈즈와 논쟁을 진행하다가 2003년 같은 학술지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포했을 때 까지입니다. 이때까지의 논쟁은 주버와 홈즈간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논쟁에 대한 주요 논문과 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Terence Zuber,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 War In History 1999; 6(3)

Terence M. Holmes,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 War In History 2001; 8(2)

Terence Zuber,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1; 8(4)

Terence M. Holmes,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2; 9(1)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German War Planning 1871-1914(Oxford University Press, 2002)

Terence M. Holmes, “Classical Blitzkrieg: The Untimely Modernity of Schlieffen's Cannae Programme”,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2003;  67(3)

Terence Zuber,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 War In History 2003; 10(1)


두 번째 단계는 이 논쟁에 다른 1차대전 전공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으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ㆍ지지하면서 논쟁에 개입했습니다. 이어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 독일의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 등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판이 아주 커졌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논문과 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Robert T. Foley,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3; 10(2)

Terence M. Holmes,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 War In History 2003; 10(4)

Terence Zuber,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 War In History 2004; 11(2)

Terence Zuber,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Sources and Interpretations(Boydell Press, 2004)

Annika Mombauer,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2005, 28(5)

Robert T. Foley, “The Real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6; 13(1)

Terence Zuber, “Der Mythos vom Schleffenpla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Annika Mombauer, “Der Moltkeplan : Modifikation des Schlieffenplans bei gleichen Ziele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Robert T. Foley, “Der Schlieffenplan : Ein Aufmarschplan für den Krieg”,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Gerhard P. Groß,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Schöningh, 2006)

Terence Zuber, Everybody Knows There Was a `Schlieffen Plan': A Reply to Annika Mombauer, War In History 2008; 15(1)

Gerhard P. Groß,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 War In History 2008; 15(4)

Terence M. Holmes, "All Present and Correct: The Verifiable Army of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9; 16(1)

Terence Zuber, 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A Reply to Gerhard Gross, War In History 2010; 17(2)

두번째 단계 부터는 약간 복잡해 집니다.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이 대거 개입했기 때문에 주버가 반박논문을 발표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아니카 몸바우어가 2005년에 발표한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반박논문은 2008년에 씌여졌으며 게르하르트 그로스의 2006년 논문,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에 대한 반박 논문은 201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연재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요 논문과 저작들을 모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글에서 좀 불성실하게 이야기를 진행한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나 할까요. 좀 느긋하게 연재하되 하나도 빠짐없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