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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6일 월요일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전차 무용론

전차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전차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제4차 중동전쟁이 가져온 충격이 있겠지요.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전력에 쓴맛을 보자 전차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방어력과 기동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일련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목소리들이 다시 사그러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라는 글은 대전차화력의 강화로 전장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빅맨의 이 글은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상전을 펼치기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2차대전 초반에 전차가 잠시 맹활약하면서 전차의 시대가 오는 듯 했지만 결국 대전차 화력의 증대로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 입니다. 글에서는 몇몇 실전 사례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붉은 군대는 나치의 우세한 기갑전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러시아의 언론들은 전쟁 첫해, 그리고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둔 뒤 여러차례 포병을 “전장의 신”으로 불렀으며 대전차포와 일반 야포를 핵심적인 대전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포병으로 전차를 상대하여 저지하고,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드러났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 가장 많은 전차와 기타 기갑장비를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군대는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치가 열등한 수단으로 간주한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베르너(Max Wern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결과 나치의 기갑군은 “무력화 되었으며 글자 그대로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2년에 들어와 소련군이 독일군을 보다 잘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게 된 원인은 대전차전을 위해 개발된 많은 수의 향상된 기동력과 향상된 성능을 가진 신형 야포와 같은 포병을 강화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 데 있다.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는 나중에 원수로 진급한 보로노프(Никола́й Н. Во́ронов) 대장의 지휘에 따른 강화된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물론 전쟁 중이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료가 극히 제한되기는 했겠지만 저자는 소련이 1942년에 전차군을 편성하는 등 기갑전력의 강화에 주력했다는 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 소련 기갑부대의 공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은 꽤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전역을 바라보든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의 전차 및 급강하폭격기가 영국의 아프리카 주둔군에 초반의 패배를 안기기는 했지만 영국군이 중근동 전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포병을 중시하고 전차의 활용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42년 6월 13일, 영국군의 1개 여단이 독일군 88mm의 매복에 걸려 난타당한 기갑 부대의 참패 이후 전차를 앞세우는 전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주포의 양각이 제한적인 전차에 대해 야포의 우세함이 뚜렷하다는 것은 거의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2)

만약 영국군이나 미군이 1944년 이전에 동부전선과 같은 규모의 독일군 기갑전력과 맞서야 했다면 이런 판단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군단급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하반기 이후로는 독일군의 소규모 기갑전력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기갑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차 무용론은 미국에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1943년 4월 21일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영국 포병 병과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기존의) 우세를 되찾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신형 전차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상의 공격 작전에 있어 포병은 기갑에 비해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3)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군 고위층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험을 통해  기갑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1942년 12월 14일 부터 1943년 1월 25일 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일선 기갑부대의 실태를 조사한 디버스(Jacob L. Devers) 장군이 내린 결론이란게 “M4는 전장에서 가장 우수한 전차다”라는 정도였다니 말입니다.4)  영국군의 전투경험은 미군에게 매우 악영향을 끼쳤는데 맥네어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투 이후 대전차대대의 상당수를 견인식 3인치포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배치된 미군의 30개 대전차 대대중 11개 대대가 견인식 대전차포를 장비했다고 하지요.5)

다시 빅맨의 글로 돌아가 보지요. 빅맨은 이 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기동력 자체는 타격력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동력의 가치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화력을 기동력 있게 제공해 줄 수 있는데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것은 기동력이 아닌 화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과 장갑에 중점을 둔다면 화력이 애매해 지게 된다. 전차의 화력이란 전차가 본질적으로 기관총에 대한 대응병기라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장갑, 기동력 그리고 화력은 1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 밀집된 소총과 기관총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차의 문제점은 대전차 무기를 동원해 전차에 맞서기 전 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6)

이 글이 쓰여질 무렵 미군은 아직 프랑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차포의 우세를 점쳤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Fred K. Vigman, “Eclipse of the Tank”, Military Affairs, Vol. 8, No. 2 (Summer, 1944), p.103
2) Fred K. Vigman, ibid, p.103
3) “Germany's Gamble on Tank And Dive-Bomber Held Lost” New York Times(1943. 4. 21)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0
5)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p.72~75
6) Fred K. Vigman, ibid, p.107

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어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

어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 한 토막...

영국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 이었다. 그리고 (데즈몬드 영의) 책이 총선 기간에 발간된 것과 비슷하게 영화(사막의 여우)도 1951년 보수당이 재집권을 위한 선거운동을 펼치던 시기에 개봉되었다. 실제로 BBC는 엘 알라메인 전투 기념일에 처칠과 몽고메리가 연설한 것을 방송하는 것은 특정 정당에 유리한 행위라고 판단해서 그 대신 ‘사막의 여우’의 영화음악을 방송하는 기발한 행동을 했다.

Patrick Major, “‘Our Friend Rommel’ : The Wehrmacht as ‘ Worthy Enemy ’ in Postwar British Popular Culture”, German History Vol. 26, No. 4, p.525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채 안된 시점인데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2008년 6월 5일 목요일

2차대전 중 미-영 공군 지휘관들의 갈등 문제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군요.

비록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육군, 해군에서 있었던 것 만큼 지휘관들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군이나 해군보다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고위 장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전쟁 이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 연합원정공군(AEAF, 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대장(Air Chief Marshal)은 같은 영국인인 테더(Arthur Tedder)를 싫어했으며 또 자신의 하급자이며 제 2전술항공군(Second British Tactical Air Force) 사령관인 커닝햄(Arthur Coningham)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커닝햄 역시 자신의 상급자인 리-맬러리를 혐오했기 때문에 테더의 역할 중 하나는 커닝햄과 리-맬러리 사이를 중재하는 것 이었다.
1943년 12월 미 전략공군(U. S. Strategic Air Force) 사령관에 임명된 스파츠(Carl Spaatz) 중장역시 리-맬러리와 사이가 나빴으며 그는 전술공군 출신이 자신의 전략 공군부대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점은 당시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사령관이었던 해리스(Arthur Harris) 대장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폭격기부대를 마치 자신의 “영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제 8공군 사령관 둘리틀(James Doolittle) 중장도 제 8공군 예하의 전투기부대를 폭격기 호위 대신 전술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들이 의견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협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또한 공군과 육군 지휘관들간의 관계도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력이 뛰어난 아이젠하워 조차도 리-맬러리의 성질은 견뎌내질 못 했으며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젠하워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이었던 비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중장에 따르면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를 제외하면 아이젠하워의 인내심을 바닥낼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인물은 리-맬러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제 1군사령관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제 9공군 사령관 브레러튼(Lewis Brereton) 소장이나 제 9전술항공군 사령관 퀘사다(Elwood Quesada) 소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괴팍한 제 21집단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던 커닝햄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실제로, 몽고메리는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자신의 사령부 건물을 커닝햄과 같은 곳이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브룩(Alan Brook) 원수가 몽고메리를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갈 것을 자청할 정도였다. 결국 몽고메리와 커닝햄이 서로 이웃한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1944년 9월이 되어서 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해소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휘관들간의 관계는 연합군 공군의 조직력이 평균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보인 원인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D-데이가 있기 수 개월 전에 영국측은 미군이 자신들의 전략 폭격기 부대를 영국군의 통제하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영국군 내부에서도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를 전술 공군적 사고방식을 가진 리-맬러리의 휘하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반하는 이상한 절충이 이뤄졌다. 리-맬러리는 명목상 원정공군 사령관이었지만 전략 폭격기 부대와 예하 전투기 부대는 (실제로는 해리스와 스파츠가 지휘했지만) 형식상 공군참모총장(Chief of the Air Staff)인 포탈(Charles Portal)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4월 14일(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빨랐다)에 오버로드 작전에 투입되는 모든 공군부대는 전구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전략공군 부대의 운용은 아이젠하워의 공군 대리인 테더가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는 스파츠와 해리스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전술공군만이 사령관인 리-맬러리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절충안은 지휘관들간의 분란을 막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존재했다. 고위 지휘관들의 아래 단계에서, 즉 영국과 미국의 전술 지휘관들의 관계는 대개 좋았다. 83 Group 사령관인 브로더스트(Harry Broadhurst) 소장(Air Vice Marshall)은 미국측의 퀘사다와 사이가 좋았으며 퀘사다는 커닝햄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 – 테더, 커닝햄, 브레러튼, 스파츠, 해리스 – 은 항공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거의 매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보통 오전 11시에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그 전날 있었던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날 작전의 지침을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오버로드 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간의 관계와 항공 전역의 지휘 체계는 연합군이 성공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Alan Wilt, "The Air Campaign", D-Day 1944,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4), pp.135~139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

2007년 9월 26일 수요일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 John Buckley


이 녀석은 필요 이상으로 비싼 Frank&Cass에서 나온 책 입니다.

이 책의 전반적인 인상은 “꽤 재미있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인걸” 입니다.

저자인 Buckley는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영국 육군 기갑부대의 전술적 실패와 전차의 열악한 성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기갑부대가 고전을 거듭한 원인을 단순히 전차의 성능적 열세와 전술단위의 역량 부족에만 돌리는 것으로는 노르망디 전역의 기갑전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의 영국 기갑부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육군 기갑부대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수행했으며 1944년 8월 이후로는 전술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이 뚜렷했다는 것 입니다. 또 전후 독일군의 회고나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영국군의 우수한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에 주목한 나머지 전차부대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는데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을 담당한 것은 전차와 보병이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는 티거와 판터를 제외한 다른 독일군의 기갑차량에 대해서 동등하거나 우세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한 4호전차와 돌격포의 경우 화력면에서 다소 우수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셔먼이나 크롬웰 보다 부족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여기에 대해 Buckley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점은 작전과 전술교리, 방어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노르망디의 지형,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입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영국군의 고급 지휘관들과 사단장 급 지휘관들의 역량 부족을 심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특히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상당히 좋은 지휘를 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꼽는 몽고메리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는 ‘당연히(?)’도 Goodwood 작전입니다. Buckley는 영국군 고급지휘관들은 전반적으로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전술과 교리도 영국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입은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영국군은 1944년까지도 제대로 된 보전협동 전술이나 교리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노르망디 같은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야 겨우 보전협동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격자에게 불리한 노르망디의 지형도 영국 기갑부대에 큰 손실을 강요한 요인 중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독일군의 기갑부대 역시 방어가 아닌 제한적인 반격 작전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 만큼이나 큰 손실을 입었다고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몇몇 작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전차개발자들이 아프리카 전선의 경험에 주목해 전차의 화력은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 1944년의 실패를 불러온 요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아프리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갑자기 독일군의 정예 기갑사단들과 대규모로 맞닥뜨리게 됐는데 정착 영국군 전차들의 화력은 대전차포를 상대할 경우를 상정한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노르망디의 지형에서는 방어력 보다는 화력이 중요했고 방어력이 비교적 우수한 처칠 전차 조차도 이 점에서 문제였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는 우수한 화력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 매복에 유리한 4호전차와 돌격포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쭉 읽고 나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는데 정리해 보면 다 한번씩은 들어 봤던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책의 앞부분에서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이 수행한 중요한 작전들에 대해 잘 정리해 놓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