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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어떤 기묘한 인도주의



나는 네이팜 폭격이 정말 싫소. (이 무기는)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인화성 물질로 공포에 질린 민간인들을 태워버리기 때문이오. 
(중략) 
지상군이 근접 전투를 하는 경우라던가 공군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서 네이팜탄을 사용하는 것은 괜찮소. 하지만 수많은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위해 네이팜을 사용하는건 이와 다른 문제요. 
1952년 8월 21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밀서신. Edwin A. Martini, 'World on fire: the politics of napalm in the Global Cold War' Cold War History 16-4(2016), p.468에서 재인용.


처칠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북한 폭격을 비판하면서 한 소리라고 하는군요. 네이팜이 잔인한 무기라는게 틀린말은 아닌데 이 소리를 처칠이 했다니까 정말 기분이 묘하군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당시 독일 민간인에게 독가스를 사용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영국쪽의 요구 때문에 실제로 독가스탄을 투하하는 계획까지 수립된 바 있지요.

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어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

어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 한 토막...

영국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 이었다. 그리고 (데즈몬드 영의) 책이 총선 기간에 발간된 것과 비슷하게 영화(사막의 여우)도 1951년 보수당이 재집권을 위한 선거운동을 펼치던 시기에 개봉되었다. 실제로 BBC는 엘 알라메인 전투 기념일에 처칠과 몽고메리가 연설한 것을 방송하는 것은 특정 정당에 유리한 행위라고 판단해서 그 대신 ‘사막의 여우’의 영화음악을 방송하는 기발한 행동을 했다.

Patrick Major, “‘Our Friend Rommel’ : The Wehrmacht as ‘ Worthy Enemy ’ in Postwar British Popular Culture”, German History Vol. 26, No. 4, p.525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채 안된 시점인데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군대의 동성애 혐오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

Nimishel님의 블로그에서 미군의 동성애자 관련 규정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난 글이 하나 있어서 불법날림번역을 조금 해 봅니다. 왜 군대가 동성애자, 특히 게이에게 적대적인가에 대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설명한 글인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군대가 동성애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원인은 아마도 적을 '여성화'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동성애자는 이 책의 3장과 4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게이들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들고 체구가 크며 강한 존재들이다. 게이 군인들이 일반 군인들과 다른 점은 성과 지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군대 내의 게이는 군인을 군대 외부의 여성, 즉 고향이나 부대 인근의 사창가, 항구의 여성, 또는 핀업(pin up) 사진이나 지갑속 사진으로 존재하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에 대해 지배적인 성적 행위자로써 만드는 것을 애매하게 만드는 존재다. "남자간의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동성애자로 알려진 남성의 존재는 ... 남성이 아닌, 즉 여성으로 상징되는 적에 대해 폭력을 가해야 하는 ... 남자로 이루어진 집단의 사회적 동질성을 흔들어 놓는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군대는 계급을 넘어서는 친교에 대해 규제를 가하고 금지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병사들이 가져야 할 호전적인 '남자다움'에 대한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남성의 가치 중 으뜸으로 치는 정력은 "동성애자에게는 해당 되는 것이 아니며" 동성애자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여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남자, 즉 '두 영혼의 사람들(berdache)'이 전쟁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평생을 여자 옷을 입고 여자의 역할(성적으로도)을 하는 남자들은 체구도 크고 강하지만 관습적으로는 여자로 취급받는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들은 생물학적 성에 따라 일반적인 전사로 취급 받았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는데 제약을 받았다. 두 영혼의 사람들은 보통 보급품과 무기를 운반했으며 전사자들을 매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17세기 일리노이 부족의 경우와 같이 두 영혼의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하더라도 활과 화살은 사용하지 못 했으며 곤봉만을 써야 했다. 여자들이 전투나 사냥에 쓰이는 특정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서 그들의 육체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여성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남성성과 반대되고 상무정신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자면 1967년 당시 반전 시위대들은 보통 절반 정도가 여성이고 나머지는 "남성적인 근육질의 사내"나 "긴 머리의 히피", 또는 언제라도 경찰과 맞서 싸울 "군복을 걸친 남자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거의 모든 반전시위에서" 남성 반대자들로 부터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faggot"나 "queer"라는 조롱을 받았다. 반전시위대가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들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게이 군인들에게 덧씌워진 오늘날의 동성애 혐오자들의 인식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동성애자 혐오는 "동성애가 남성의 여성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문화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남자간의 동성애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성을 강화하고" 이것을 통해 "군사적 동원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의 신성대(神聖隊)에서는 병사들간의 동성애가 공개적으로 장려되었다. 남자들을 그들의 애인들과 같은 열에 배치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있기 때문에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남자 병사들간의 성적인 관계는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기능을 했다. 이성애자인 병사가 자신의 전우에게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우를 위해 싸울 동기를 만들었고 그리스의 군인들은 이러한 동기에 성적인 결속을 추가했다.

테베의 경우는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흔치 않은 경우이다. 군대 내에서 게이 병사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은 각 나라의 군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20세기 미군은 전시(병사의 필요는 높지만 인적 자원은 부족한)에는 게이 병사들을 용인하고 평시에는 용인하지 않는 것을 반복해왔다. 이런 경향은 여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시에는 이상적인 군대에 부합되도록 규칙이 강화되었지만 전쟁이 되면 규칙은 유연해졌다. (현재 미군은 완전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병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병사의 필요성이 아주 절박한 것도 아니어서 어정쩡하다고 할 수 있다.)

간혹 게이 병사에 대한 불관용 정책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해 사형을 부과하는 것이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 친위대의 장교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영국 해군에서도 19세기 초 까지 동성애 행위를 한 장교는 돛대에서 목을 매달았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중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놈의 해군 전통은 입에 담지도 말게. 해군의 전통이래 봤자 럼주나 처먹고 남색질에 채찍질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나?[Don't talk to me about naval tradition. It's nothing but rum, sodomy, and the lash])"

역 설적이게도 오늘날 서구의 전쟁에서 병사가 전우에게 느끼는 격한 사랑의 감정은 근대 사상에서 여성성으로 간주하는 정서적인 유대를 만들기도 한다.(이 경우에는 군대가 필요로 한다) 이러한 유대감은 쉽게 성적인 것으로 바뀐다. 1차대전 당시 시에서는 남자간의 사랑을 이렇게 찬양했다. "남자간의 사랑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네."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는 (자신의 자서전과 작품에서) 그가 21세 이전까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삭제했다. 히르쉬펠트에 따르면 1차대전 중 지휘관들은 군대내의 동성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동성애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면" 독일군 병사 중 게이는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1차대전 당시 "적지 않은 수의" 게이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독일의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를 피해 망명했던 사람들 이었다. 히르쉬펠트는 독일의 게이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되찾거나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1차대전 장시 영국 "젊은이들(lads)"에게 인기를 끌었던 동성애를 다룬 문학작품이 나타나지 않았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74-376

이 글의 저자인 골드스타인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전쟁이란 폭력적이 남성성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쟁 중 적군에 대한 강간이 자행되는 경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적군에 대한 동성애적 강간이 이루어지는 배경에도 적군에게 굴복시켜야 할 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문화적인 의미가 깔려 있다는 것 입니다.(대표적인 예로 들은 것이 잔뜩 발기한 성기를 곧추세우고 페르시아군을 뒤쫓는 그리스 병사를 묘사한 도기이죠) 꽤 잘 들어맞는 설명같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잡담 하나. 본문에 언급된 히르쉬펠트의 저작은 1934년에 출간된 The sexual history of the world war인데 2006년에 University Press of Pacific에서 복간해 쉽게 구해볼 수 있습니다.

2008년 2월 22일 금요일

윈스턴 처칠의 덜 알려진 저작 - The Unknown War

서산돼지님이 쓰신 윈스턴 처칠의 문장력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이 나서 적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윈스턴 처칠이 '훌륭한 정치가'였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만 처칠이 ‘좋은 글쟁이’ 였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는 정치인 치고는 상당히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또 그 저작들 중에는 읽을만한 책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칠의 저작 중에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작도 있습니다.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The Unknown War'입니다.

The Unknown War는 처칠의 1차대전 회고록 이라고 할 수 있는 The World Crisis의 외전(?)격인 저작으로 1931년에 출간됐습니다.(제가 읽은 것은 1932년에 나온 미국판 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처칠은 책의 서두에서 To our faithful allies and comrades in the Russian Imperial Army라고 써서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서방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동부전선의 실상을 조명하려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뭐, 유감스럽게도 The Eastern Front 1914~1917의 저자인 Norman Stone이 1970년대에 지적한 대로 처칠의 저서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무관심의 대상입니다. 이런 무관심은 여전한지 2006년에 Schöningh 출판사에서 나온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한 책의 제목은 Die vergessene Front(잊혀진 전선)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Norman Stone은 처칠의 저작에 대해서 호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저작이기도 하겠지만 처칠의 문장은 영어권에서는 좋게 평가 받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책의 대부분이 1914~1915년의 기간에 할애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 책의 본문은 381쪽인데 이 중 357쪽까지가 브루실로프 공세 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30쪽도 채 안되는 것 입니다. 도데체 왜 이런 난감한 구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1914~1915년 전역에 대한 묘사는 Stone의 평가대로 꽤 훌륭한 것 같습니다.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함락시킬 때 까지는 상당히 재미있더군요. 물론 그 후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로는 휙휙 날아갑니다만.

이 책은 1950년대에 한국의 대학들에 원조된 미국방부의 수많은 기증 도서 중 한 권 이다 보니 아직 학생이신 분들은 재학 중인 학교의 도서관을 잘 찾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Norman Stone의 동부전선에 대한 저작도 꽤 호평을 받은 물건입니다. Niall Ferguson이 ‘Without question one of the classics of post-war historical scholarship’이라고 평했더군요. 이 책은 가격도 싸고 구하기도 쉬우니 1차대전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합리적 수익분배 유형 - 1944년 동유럽 분할 문제

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