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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

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데이빗 글랜츠의 인터뷰

『독소전쟁사』를 함께 작업했던 분들과 진행하던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1권 일부는 번역된 상태였지만 3부작이 아직 완결된 상태도 아닌데다 분량 자체가 많아서 접촉해본 출판사들이 약간 부담을 느낀게 큰 원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고 마지막 3부가 나온 뒤에 다시 협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스탈린그라드 3부작 대신 2차대전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새 프로젝트는 2013년 쯤 출간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는 지금 준비중인 책이 예정대로 2012년에 마무리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들 중에서는 이미 원서를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번역본을 기다리시던 분도 많으실 것 같아 더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직 원서를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World War 2, 2010년 5/6월호에 실린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David M. Glantz Fights for the Truth About Stalingrad)”라는 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짧은 인터뷰는 글랜츠가 3부작 중 앞의 두권의 핵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어떤 성격의 저술인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입니다. 인터뷰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퇴역 육군 대령 데이빗 글랜츠는 최근 공개된 소련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찬 책을 출간했다. 글랜츠의 목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이어진 신화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글랜츠가 최근 출간한 서사적인 대작, To the Gates of Stalingrad와  Armageddon in Stalingrad는 역사상 가장 장대했던 전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예를 들면, 글랜츠와 공저자 조나단 하우스는 붉은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잔혹한 비밀경찰 NKV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이다. “비밀경찰의 자료들은 사기의 저하라던가, 검열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탈영병의 숫자라던가 하는 것들을 놀랄만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 이 전투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추론에 의거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해 쓰여진 적은 없었지요.”

산토로(Gene Santoro) :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글랜츠 : 제 뜻은, 신화를 걷어내고 실제 사실의 복원을 시작하기 위해서 양측의 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입니다.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수행되었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작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군사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에 속한 것 입니다.

산토로 : 왜 스탈린그라드를 선택하셨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은 1950년대 초반 이래 수백권에 달합니다. 초기의 많은 저작들은 독일측의 회고록이나 특정한 독일측 인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저작들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독일측 자료에다 주로 소련 제62군을 지휘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회고록과 같은 제한된 소련측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저작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전체적인 측면과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 입니다.

산토로 : 예를 들자면?

글랜츠 : 한가지 일반적인 관점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달리 1942년 블라우 작전 당시 스탈린은 땅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련군을 매우 빨리 퇴각하게 했으며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선 까지 물러선 뒤에는 반격에 나섰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 입니다.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 전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전략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어디서건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붉은군대는 스탈린그라드로 밀려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했다는 것 인가요?

글랜츠 :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블라우 작전의 초기에는 소련군의 역습, 반격, 심지어는 대규모의 반격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반격은 7월에 독일군의 북익에 가해졌습니다. 스탈린은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군과 그 밖의 새롭게 편제된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이러한 반격에는 소련군이 500에서 1,000여대 정도의 전차를 투입해 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반격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글랜츠 : 최초의 반격은 매우 형편없이 지휘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소모를 강요한 것을 제외한다면. 7월 말에도 반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두개의 새로 편성된 소련 전차군이 돈강 만곡부에 투입되었고 새로 편성된 62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대규모의 전차전이 거의 3주간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산토로 : 왜 그랬습니까?

글랜츠 :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보병 전력이 1941년 보다 약화되어 있었으며 기갑 부대의 진격을 뒤따르는 많은 보병 부대가 루마니아군이나 이탈리아군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병력은 포위망을 벗어나 잠적하거나 나중에 붉은군대에 재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랜츠 : 독일 제6군이 진격하면서 양 측방, 특히 돈 강을 따라 이어진 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6군의 병력 중 진격에 투입할 수 있는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돈강 만곡부를 정리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이 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 입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돈 강을 도하한 뒤 기갑군단을 선봉에 세운 양익으로 볼가강까지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각각 북쪽과 남쪽방향에서 진입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점령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무엇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북익의 독일 기갑군단을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 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독일군 3개 사단이 40km에 걸쳐 방어에 묶여있도록 한 것 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시가전이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북쪽 외곽의 공업지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공세의 남익은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소련군이 취한 대응이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산토로 : 파울루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글랜츠 :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제압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었던 전력은 보병군단 1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약간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제6군 전력의 3분의1 정도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 기갑부대를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부대를 서쪽에서 부터 돌입시켜 블럭 단위, 도로 단위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갑사단들이 소모될 때 까지 공격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시가지 중앙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공격하려 했을 무렵 독일 기갑전력은 소모되었고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쯤되면 독일군의 연대는 대대규모가, 사단은 연대규모가 되었고 제6군은 기껏해야 군단 규모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지 않도록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양이었습니다. 1만명의 사단이 다음날이면 500명만 남곤 했습니다. 소련군의 많은 사단이 소모되고 남은 수준의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정예부대로 묘사되는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시가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절반정도의 훈련만 마치고 장비는 편제의 3분의1 만 갖춘채로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해진 제284소총병사단은 3개 연대 중 1개 연대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로프-어-도프(rope-a-dope : 로프에 기대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하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법) 전술과 같았습니다. 소련군 총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와 정치위원 흐루쇼프가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 이었습니다. 총사령부는 예료멘코와 흐루쇼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겐 고기 분쇄기였습니다. 투입하는 사단 마다 소모되었고 이때문에 측면에서 새로운 사단을 차출해야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의 손실규모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 초기에는 전투가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도 이 사단들은 약체화 되었거나 소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소모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입니다. 11월 초가 되면 독일군은 사단들이 소모된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진정한 소모전이었던 겁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공세를 계속해 나갔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은 B집단군에 소속된 공병대대를 모두 긁어모았습니다. 이들은 11월 11일의 마지막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을 제외하면 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선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헝가리군도 이미 최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B집단군의 좌익은 동맹군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던 셈입니다. 소련군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지점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산토로 : 스탈린은 어떠한 유형의 지도자였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이 전쟁 첫 해에는 사소한 부분 까지 간섭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역이 전개될 무렵에는 군지휘관들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에 따라 소련군 지휘관들은 큰 범주에서만 스탈린의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의 완고함과 반격에 대한 고집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붉은군대가 한번 패배를 겪으면 와해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중요한 가정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42년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겪고 난 뒤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자비하게 인력을 소모하더라도 계속 싸우면  숫적으로 열세인 적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대략 1400만명의 군 사망자(military dead)를 냈습니다. 이러한 댓가를 치르면서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전투로 단련된 우수한 독일 국방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중소분쟁 당시 소련군의 T-62 회수/파괴작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1에 실린  D.S. Riabushkin와 V.D. Pavliuk의 글 “Soviet Artillery in the Battles for Damanskii Island”를 읽다 보니 127쪽에서 130쪽 까지 중소분쟁 당시 중국측이 소련군의 T-62를 노획한 경위가 짤막하게 실려있었습니다. 회수작전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전개되었는지라 간단히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1969년 3월 15일, 이만 국경수비대의 지휘관 레오노프(Д. В. Леонов) 대령은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제135 차량화소총병 사단 전차대대에서 1개 전차소대를 차출합니다. 이 대대는 T-62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노프 대령은 4대의 T-62 중 545호차를 타고 선두에서 서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군도 아무 생각없이 후방을 비워놓은 것은 아니었고 레오노프 대령은 선두에서 전진하다가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강의 빙판에 구축한 지뢰밭에 걸려서 전차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과정에서 레오노프 대령과 545호차의 장전수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인 레오노프 대령이 전사하자 나머지 세대의 T-62는 퇴각했습니다.

문제는 T-62가 신형전차로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점 입니다. 소련군은 즉시 지뢰밭에 격파되어 방치된 545호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국군이 545호차를 견인해가려는 것은 뻔한 것 이었기 때문에 작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작전은 3월 16일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이날 지방선거가 열려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회수작전은 선거 다음날인 3월 17일 개시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소련군의 기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작전 개시와 함께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해 제13독립 로켓포대대의 BM-21 로켓포와 제378포병연대의 M-30 122mm포 24문과 D-1 152mm포 12문을 동원해 반격했습니다. 이중 제3대대 7, 8포대의 152mm 포는 중국군이 투입한 4대의 ISU-122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소련군의 포격은 효과적이어서 중국군의 ISU-122 한대가 완파되었고 다른 한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대의 ISU-122는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견인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45호차에 견인 케이블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한명이 전사하고 한명이 부상당한 것 입니다.

견인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군은 그냥 T-62를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이 너무 적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은 충분했으나 전차의 내부에 폭약을 설치하지 않고 전차의 바닥에 놓고 터뜨려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폭약으로 격파하는 것이 두 번 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보유한 괴물 박격포, 240mm구경의 M-240 2문이 급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240mm 박격포도 별 효과가 없어서 좀 더 정확한 152mm 포를 투입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제378포병연대 8포대 소속의 152mm포 2문이 투입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고폭탄으로 사격했으나 얼음을 깨뜨려 T-62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이를 위해 3월 말 378포병연대 2대대의 122mm포 12문이 동원되어 얼음을 깨뜨려 버립니다. 545호차가 강바닥이 주저앉자 소련측은 작전이 성공이라고 판단하고 4월에 포병부대들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다만 중국군이 어떻게든 회수하려는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T-62가 가라앉은 지점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기관총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은 위력적인 소련군의 포병이 철수하자 T-62 회수작전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해군 소속의 잠수부들을 차출해서 회수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중국군은 4월 20일 경부터 먼저 잠수부들을 동원해 545호차의 포탑을 먼저 회수했습니다. 강 건너의 소련군은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중국군은 10일 내내 근성을 발휘해 매일 밤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잠수부들을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2일 야간에 걸처 강바닥에 가라앉은 545호차의 차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해 전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근성을 발휘해 꽤 근사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베이징에 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08년에 545호차를 보고 중국인들의 근성에 경의를 표한바 있지요.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2차대전 후반기 소련군 소총병사단의 규모

2차대전 당시 소련은 가공할 동원능력을 발휘해 전쟁 초반의 수많은 참패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이 전쟁 발발 첫 6개월 동안 입은 인명손실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전사, 포로, 행방불명, 부상)이 무려 4,473,820명이었다고 하니 전쟁 첫 해에 붕괴되지 않았다는게 놀라울 지경이죠.1) 하지만 소련은 전쟁 첫해에 무려 600여만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보여줍니다.2) 글자 그대로 전멸당한 부대만큼 새로운 부대를 다시 만들어 내보내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 것이지요.

전쟁 초기 이런 총알받이의 역할을 수행한 근간은 바로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이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도 부족하고 게다가 기동력 조차 낮은 소총병 사단들은 개전 초반 독일군의 밥이었습니다. 비록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는 하나 작전과 전술 단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누적된 인명손실이었습니다. 소련이 독일보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많다고는 해도 1942년에 7,369,278명, 1943년에 7,857,503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었으니 병력 충원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은 계속해서 편제병력을 줄여 나갑니다. 1942년 3월 18일의 편제에서 소총병사단의 총병력은 12,725명이었는데 이것이 1942년 7월 28일 편제에서는 10,386명, 1942년 12월 10일 편제에서는 9,435명, 1943년 7월 15일 편제에서는 9,380명으로 줄어듭니다.4) 문제는 편제 병력을 계속 줄여도 병력소모가 커서 편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1942-43년 동계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의 소총병 부대들의 실제 병력은 부대에 따라 편제의 55~9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의 하계 전역에서는 편제의 75~80% 정도였고 편제의 90%를 넘어가는 부대는 극히 드문 실정이었다고 합니다.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공세를 맞아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심깊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병력 보충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수준은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1943년 7월 5일, 독일 제4기갑군의 공격에 맞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근위군1943년 7월 5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8,590
52 근위소총병사단8,900
67 근위소총병사단8,003
71 근위소총병사단8,796
89 근위소총병사단8,189
90 근위소총병사단8,417
375 소총병사단 8,647
[표: Валерий Замулин, Курский Излом(Эксмо, 2007), с.904]

이 정도 병력은 당시 수준에서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방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소련군의 1943년 하계 대공세 중 하리코프에 대한 루미얀체프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가 병력 충원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평균 병력은 사단 당 7,180명으로 편제의 75%에 불과했습니다.6)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의 여파가 나타난 셈이지요.  

소총병사단들은 1943년 부터 시작된 반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소련군이 1943년에서 1945년 까지 입은 총 병력손실 중 84.23%가, 그리고 사망자는 85.95%가 보병부대에서 발생한 것 이었습니다.7) 1941-42년과 달리 1943년 후반 이후의 소련군은 수십개 사단이 송두리째 전멸당하는 사태는 없었고 그 덕분에 각각의 부대들도 ‘작전 중의 소모’만 감당하면 되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지만 문제는 이 ‘작전 중의 소모’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1943년 9월 20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38군 소속의 소총사단들의 병력 현황을 예로 들어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전과 루미얀체프 작전이라는 공세작전을 마치고 추격전을 위해 병력 보충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38군1943년 9월 20일 병력
71 소총병사단3,755
136 소총병사단5,376
163 소총병사단5,045
167 소총병사단8,488
180 소총병사단8,517
232 소총병사단7,138
240 소총병사단8,442
340 소총병사단5,404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49]

이른바 근위 사단이라는 부대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역시 9월 20일 같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근위소총병사단들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병력 수준과 비교해 보면 전투 손실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6근위군1943년 9월 20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4,064
52 근위소총병사단4,977
67 근위소총병사단4,103
71 근위소총병사단5,451
90 근위소총병사단4,651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53]

1944년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욱 더 심각해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 작전 당시 소련군의 주공축선에 배치된 소총병사단들의 평균병력은 6,000~6,5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8)

소련군이 점령된 영토를 해방하면서 그만큼 더 병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소모전 때문에 전쟁 말기로 갈수록 소총사단의 병력 규모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작전에 투입된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예하 47군의 경우 작전 시작직전 병력 5,000명을 넘는 소총병사단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주력 공격부대인데도 말입니다!)9)


47군1945년 4월 5일 병력
185 소총병사단4,203
260 소총병사단4,111
328 소총병사단4,163
80 소총병사단4,210
76 소총병사단4,190
175 소총병사단4,189
82 소총병사단4,055
132 소총병사단 4,597
143 소총병사단4,40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상황이 조금 나은 5충격군(Ударной Армий)의 병력 현황도 47군 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5충격군1945년 4월 10일 병력
230 소총병사단5,032
248 소총병사단5,006
301 소총병사단5,638
89 근위소총병사단5,470
94 근위소총병사단5,823
266 소총병사단5,520
60 근위소총병사단5,348
295 소총병사단5,383
416 소총병사단4,64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10]

최후의 공세를 앞두고 준비를 갖춘 사단의 병력 수준이 편제의 절반 남짓한 수준인 것을 보면 소련군 또한 인력 소모가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94
2) David M. Glantz, Colossus Reborn : The Red Army at War, 1941-1943(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540
3) Kreivosheev, ibid, p.94
4) Steven J. Zaloga and Leland S. Ness, Red Army Handbook 1939-45(Sutton, 1998), p.35
5) Glantz, ibid, p.190
6) David M. Glantz,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ust 1943(Frank Cass, 1991), p.223
7) Kreivosheev, ibid, p.219
8)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 The Battle for Whiter Russia 1944(Lynne Rienner, 2000), pp.41~42
9)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