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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3일 수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서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 중 이 논쟁에 새롭게 참여한 로버트 폴리의 논문을 소개했습니다. 로버트 폴리는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이라는 논문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수립 시기를 1899-1900년으로 높여 잡았습니다. 테렌스 주버는 새롭게 논쟁에 개입한 폴리에 대해 War in History 2004년 2호에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이라는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2)
주버의 반론

이 논문은 총 6쪽으로 매우 소략합니다. 주버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은 6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안입니다. 하지만 주버는 1899년 4월 1일부로 효력을 발휘한 부대전계계획 I은   불과 6개월도 못되어 수정안이 등장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의 주장과는 달리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에는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과 달리 슐리펜은 1898년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전쟁 초기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쪽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테렌스 주버가 주사료로 활용한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주버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고 있던 1930년대에는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는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디크만의 연구는 1904년까지 작성하다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빌헬름 디크만이 실제로 1905년 이후의 전쟁계획에 대한 ‘1차사료’를 확인했는지는 불확실 하다는 것 입니다. 테렌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독일 군부가  1920년대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기밀자료였던 전쟁계획을 볼 수 없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유지하려는 군 고위층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폴리가 제기한 병력 규모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폴리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 23개 군단(46개 현역사단)과 19개 예비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96개 사단을 명시하고 있는데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은 물론 실제 독일군의 병력은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1899년 4월 1일의 부대전개계획 I은 65개 사단, 그리고 1914년에 실제로 동원 가능했던 것이 72개 사단이니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치더라도 독일군의 병력은 24개 사단이나 부족하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를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전투서열 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가장 중요한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도 중요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주버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우익과 중앙의 병력 비율이 거의 1:1 수준인데 슐리펜 계획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프랑스군이 아르덴느로  선제공격해 올 경우 역습에 나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하다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 비망록의 유사성은 돼지와 말의 유사성 정도이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이 우익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정도는 돼지와 말의 유사성이 다리 네 개를 가진 정도인 것과 같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문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독일이 서부전선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함으로써 우익으로 병력을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요새가 건설중이라는 것은 당시의 슐리펜도 알고 있었을 텐데 요새가 완성된 이후에야 슐리펜 계획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들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 완성되었다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 요새들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는 것 입니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원래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계속해서 1-8을 연재해야 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일단 2003년에 들어와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버와 홈즈의 논쟁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부터는 주버와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 그리고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간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2003년 부터 시작된 테렌스 주버와 로버트 폴리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Here comes a new challanger!!!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독일 군사사를 전공하던 로버트 폴리가 새롭게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폴리는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10-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폴리의 주된 논점은 슐리펜 계획의 실체는 인정하되 그 형성 시기를 훨씬 이른 시점으로 잡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미 1899년의 전쟁 계획에서 부터 슐리펜 계획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다이믈링(Berthold von Deimling)의 회고록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이믈링은 1900년 중령 계급으로 총참모부에 발령받아 전시 전투서열 작성의 감독과 전시 부대전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업무인 만큼 슐리펜의 전쟁 계획 수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이믈링은 1930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가 총참모부에 발령받았을 때 이미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폴리는 다이믈링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계획은 바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 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 할 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는데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이고 부대전계획 II는 동부전선에 조금 더 중점을 두는 계획입니다. 폴리는 주버와는 달리 부대전개계획 I이 서부전선에 집중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조건에서 양면전쟁도 고려한 계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이 해석은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23개 정규군단, 19개 예비사단, 11개 기병사단, 13개 향토여단(Landwehr brigade)+1개 향토연대를 집중하고 동부전선에는 소규모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이것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과 유사합니다.

한편, 슐리펜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을 염두에 두고 1898년 10월에 작성한 대 프랑스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개전 2주에서 3주차에 동원을 완료한 뒤 선제공격을 개시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슐리펜은 독일의 동원 완료는 4주가 걸릴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군의 주공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를 거쳐 독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들여서 우익의 1군과 2군, 그리고 좌익의 6군으로 양익 포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1군과 2군은 포위 섬멸을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또한 국경의 요새지대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군은 전쟁준비가 잘 되어 있고 프랑스로 이어지는 유라(Jura) 산맥은 요새화가 되어 있어 돌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먼저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군과 2군이 마스(Maas)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요새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1군과 2군의 좌익은 3군(4개 군단+2개 예비사단) 이, 우익은 7군(6개 예비사단)이 엄호합니다. 그리고 우익을 엄호하는 3군은 1군과 2군을 후속해 마스강을 도하합니다. 한편 8개 군단으로 구성된 4군과 5군은 자르브뤼켄(Saarbrücken)과 자르부르크(Saarburg)를 잇는 선에 전개해 상황이 유리할 경우 낭시(Nancy) 방면으로 진출, 낭시 동쪽의 요충을 점령한 다음 낭시와 툴(Toul)-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6군(4개 군단+6개 예비사단) 은 상 알자스에 전개해 독일군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군이 공격해 온다면 동부전선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하면 서부전선에서 증원군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폴리는 이것이 1905년 비망록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익에 12개 군단과 8개 예비사단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다음으로 우익의 우회기동도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것 보다는 훨씬 작아서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 포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슐리펜 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포함해 기존의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의 완성 시점을 훨씬 내려 잡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은 해당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한 것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1899/1900년의 부대전개계획과 1905년의 비망록 모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먼저 1898/1900년 계획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해 올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1905년 비망록은 그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1905년 시점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 없이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에서 독일군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의 병력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계획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1899년의 14호 계획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 19개 군단과 12개 예비사단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병력을 밀집 배치하고 그 좌익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우회기동을 큰 규모로 실시하지 않더라도 포위 섬멸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898년에 14호 계획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필자는 이 정보가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 지만 프랑스가 1903년 3월 15호 계획을 채택하자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39개 보병사단과 12개 예비사단, 8개 기병사단을 4개 야전군으로 편성했는데 이 중 제4군을 독일군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침공을 대비해서 보다 북쪽으로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1905년 시점에서 독일군은 15호 계획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프랑스군이 독일군 우익의 돌파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의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독일군의 우익을 더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요새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알자스와 로렌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따라 메츠, 디덴호펜(Diedenhofen, 프랑스 명 티옹빌Thionville), 스트라스부르크의 요새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부터는 신형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를 강화하는 공사가 수행되었습니다. 폴리는 국경지대의 요새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그만큼 더 우익의 공세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로버트 폴리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이 이미 1899/1900년에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테렌스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시점을 1904년 이후로 보는 것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2차대전 후반기 소련군 소총병사단의 규모

2차대전 당시 소련은 가공할 동원능력을 발휘해 전쟁 초반의 수많은 참패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이 전쟁 발발 첫 6개월 동안 입은 인명손실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전사, 포로, 행방불명, 부상)이 무려 4,473,820명이었다고 하니 전쟁 첫 해에 붕괴되지 않았다는게 놀라울 지경이죠.1) 하지만 소련은 전쟁 첫해에 무려 600여만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보여줍니다.2) 글자 그대로 전멸당한 부대만큼 새로운 부대를 다시 만들어 내보내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 것이지요.

전쟁 초기 이런 총알받이의 역할을 수행한 근간은 바로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이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도 부족하고 게다가 기동력 조차 낮은 소총병 사단들은 개전 초반 독일군의 밥이었습니다. 비록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는 하나 작전과 전술 단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누적된 인명손실이었습니다. 소련이 독일보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많다고는 해도 1942년에 7,369,278명, 1943년에 7,857,503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었으니 병력 충원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은 계속해서 편제병력을 줄여 나갑니다. 1942년 3월 18일의 편제에서 소총병사단의 총병력은 12,725명이었는데 이것이 1942년 7월 28일 편제에서는 10,386명, 1942년 12월 10일 편제에서는 9,435명, 1943년 7월 15일 편제에서는 9,380명으로 줄어듭니다.4) 문제는 편제 병력을 계속 줄여도 병력소모가 커서 편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1942-43년 동계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의 소총병 부대들의 실제 병력은 부대에 따라 편제의 55~9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의 하계 전역에서는 편제의 75~80% 정도였고 편제의 90%를 넘어가는 부대는 극히 드문 실정이었다고 합니다.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공세를 맞아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심깊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병력 보충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수준은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1943년 7월 5일, 독일 제4기갑군의 공격에 맞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근위군1943년 7월 5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8,590
52 근위소총병사단8,900
67 근위소총병사단8,003
71 근위소총병사단8,796
89 근위소총병사단8,189
90 근위소총병사단8,417
375 소총병사단 8,647
[표: Валерий Замулин, Курский Излом(Эксмо, 2007), с.904]

이 정도 병력은 당시 수준에서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방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소련군의 1943년 하계 대공세 중 하리코프에 대한 루미얀체프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가 병력 충원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평균 병력은 사단 당 7,180명으로 편제의 75%에 불과했습니다.6)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의 여파가 나타난 셈이지요.  

소총병사단들은 1943년 부터 시작된 반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소련군이 1943년에서 1945년 까지 입은 총 병력손실 중 84.23%가, 그리고 사망자는 85.95%가 보병부대에서 발생한 것 이었습니다.7) 1941-42년과 달리 1943년 후반 이후의 소련군은 수십개 사단이 송두리째 전멸당하는 사태는 없었고 그 덕분에 각각의 부대들도 ‘작전 중의 소모’만 감당하면 되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지만 문제는 이 ‘작전 중의 소모’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1943년 9월 20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38군 소속의 소총사단들의 병력 현황을 예로 들어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전과 루미얀체프 작전이라는 공세작전을 마치고 추격전을 위해 병력 보충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38군1943년 9월 20일 병력
71 소총병사단3,755
136 소총병사단5,376
163 소총병사단5,045
167 소총병사단8,488
180 소총병사단8,517
232 소총병사단7,138
240 소총병사단8,442
340 소총병사단5,404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49]

이른바 근위 사단이라는 부대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역시 9월 20일 같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근위소총병사단들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병력 수준과 비교해 보면 전투 손실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6근위군1943년 9월 20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4,064
52 근위소총병사단4,977
67 근위소총병사단4,103
71 근위소총병사단5,451
90 근위소총병사단4,651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53]

1944년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욱 더 심각해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 작전 당시 소련군의 주공축선에 배치된 소총병사단들의 평균병력은 6,000~6,5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8)

소련군이 점령된 영토를 해방하면서 그만큼 더 병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소모전 때문에 전쟁 말기로 갈수록 소총사단의 병력 규모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작전에 투입된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예하 47군의 경우 작전 시작직전 병력 5,000명을 넘는 소총병사단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주력 공격부대인데도 말입니다!)9)


47군1945년 4월 5일 병력
185 소총병사단4,203
260 소총병사단4,111
328 소총병사단4,163
80 소총병사단4,210
76 소총병사단4,190
175 소총병사단4,189
82 소총병사단4,055
132 소총병사단 4,597
143 소총병사단4,40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상황이 조금 나은 5충격군(Ударной Армий)의 병력 현황도 47군 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5충격군1945년 4월 10일 병력
230 소총병사단5,032
248 소총병사단5,006
301 소총병사단5,638
89 근위소총병사단5,470
94 근위소총병사단5,823
266 소총병사단5,520
60 근위소총병사단5,348
295 소총병사단5,383
416 소총병사단4,64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10]

최후의 공세를 앞두고 준비를 갖춘 사단의 병력 수준이 편제의 절반 남짓한 수준인 것을 보면 소련군 또한 인력 소모가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94
2) David M. Glantz, Colossus Reborn : The Red Army at War, 1941-1943(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540
3) Kreivosheev, ibid, p.94
4) Steven J. Zaloga and Leland S. Ness, Red Army Handbook 1939-45(Sutton, 1998), p.35
5) Glantz, ibid, p.190
6) David M. Glantz,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ust 1943(Frank Cass, 1991), p.223
7) Kreivosheev, ibid, p.219
8)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 The Battle for Whiter Russia 1944(Lynne Rienner, 2000), pp.41~42
9)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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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안녕하세요.

진도가 참 안나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직도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2010년 말에 테렌스 주버가 테렌스 홈즈를 비판하는 논문을 또 냈습니다. 한마디로 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초장기 연재가 되겠군요. 일단 지금까지 나온 논문과 책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매우 게으르다는 점도 문제군요.

2003 년 부터는 홈즈 외에도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논쟁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지만 이 연재물에서는 논쟁을 시간 순서대로 다루기 보다는 개별 연구자별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합니다. 일단은 현재까지 진행 중인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 논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지난번 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에 서는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인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을 소개했습니다. 테렌스 홈즈는 주버의 반론에 대해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대응합니다.

먼저 지난번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테렌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홈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1. 테렌스 홈즈의 주장에 따르면 슐리펜 계획에서 독일군 주력, 즉 독일군 우익이 파리를 우회해서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조직적으로 후퇴할 경우 취하는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학설들은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하는 것이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테렌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홈즈가 예로 든 21, 22군단과 근위예비군단은 이미 1902년에 서류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이 부대들을 편제에 맞춰 편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슐리펜은 항상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숫적으로 위협적인 규모였으며 슐리펜은 이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상 동부전선을 비워두고 서부에 주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4. 홈즈는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참모부 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 지역이다. 이 시기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 기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5.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과 소몰트케가 입안한 계획은 유사하지 않다.


홈즈는 War in History 10-4에 기고한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주버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서 주력부대가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냐의 문제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에 나선다면 독일군 주력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슐리펜은 그럴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의 예상 반응에 대해 여러가지 예측을 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프랑스군이 수세로 일관하되 독일군 주력이 메지에흐(Mézières)-덩케르크 선에 도달할 경우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주력이 엔(Aisne)-랭스(Rheims)-라 페레(La Fère)를 잇는 선에 도달했을 때 측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라 페레 방면으로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프랑스군이 조직적으로 철수를 단행할 경우인데 이때는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해 최대한 독불국경 가까운 곳에서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할 기회를 포착하길 원했으며 프랑스군이 새로운 방어선 까지 퇴각하는 것은 독일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여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를 실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Oise) 강을 건너는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 강을 도하할 경우 파리 동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것은 프랑스군의 주력이 공세에 나서고 독일군 주력은 우아즈 강을 건너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방어에 주력하면서 조직적으로 철수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주버가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비판한 독일군의 가용병력 문제입니다. 홈즈는 먼저 주버가 지적한 Kriegskorps문제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비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자신이 푀르스터의 연구를 잘못 이해했지만 주버도 푀르스터의 주장과 자신이 잘못 인용한 푀르스터의 견해를 혼동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푀르스터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푀르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0개 예비사단이 있었으나 1906/07년 부대전계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으로 가용병력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푀르스터의 주장을 교차검증할 사료가 없다는 주버의 비판에 대해서는 독일의 1차대전 공간사(Der Weltkrieg 1914 bis 1918)중 전시동원을 다룬 Kriegsrüstung und Kriegswirtschaft 1권을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독일의 공간사에 따르면 독일군의 예비사단이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27개 사단으로 증가했으며 이것은 푀르스터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것 입니다. 또 한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이 971개 대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명시된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을 대대로 환산하면 970개 대대가 되므로 푀르스터의 주장은 타당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1905년 비망록에서 1906/07년 부대전개계획 보다 2개 사단이 더 많은 53개 현역사단과 28개 예비사단을 명시한 것에 대해서는 전시동원이 이루어질 경우 추가로 편성되는 사단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1개 현역사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04년에 2개의 Kriegskorps가 해체되면서 여기에 소속될 여단과 연대 일부는 남아서 다른 군단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이러한 여분의 부대를 유사시 통합하면 신규 사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자스의 15군단은 1개 보병연대를 더 가지고 있었고 로렌의 16군단은 1개 보병여단을 더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통합하면 1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는 전시에 16군단 예하에 43사단이 편성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개 예비사단에 대해서는 예비 보병대대들을 통합해 편성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슐리펜은 이 정도 병력도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하는데는 부족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이 시작되는 대로 8개의 보충군단(Ersatzkorps)를 편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도 병력이 여전히 부족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 슐리펜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세초기에는 우익에 23개 현역군단이 투입되고 공세가 진행됨에 따라 좌익에 있던 2개 군단이 추가로 우익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진격이 계속되어 우아즈강에 도달할 무렵 후방은 예비군단과 향토여단(Landwehr-birgade)이 담당하게 됩니다. 우선 안트베르펜 공격에 최소 5개의 예비군단을 투입하고 주력부대가 공격하지 않고 지나간 요새들을 견제하는데 14개의 향토여단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주력 부대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하는데 2개 예비군단과 1개 예비사단, 2개 향토여단을 배정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을 실시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합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8개의 보충군단을 더 편성한다면 이중 6개 군단을 파리 봉쇄에 사용하고 주력인 현역부대들은 우회하면서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을 적시에 동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데 홈즈는 슐리펜이 의문을 가진 것은 기술적으로 보충군단 중 몇개를 우익에 투입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동쪽으로 우회 기동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이 사실상 슐리펜이 총참모장에서 퇴임한 이후 작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부대 운용에 대한 권한이 없는 슐리펜이 보충군단 편성과 같은 신규 부대 편성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8개의 보충군단 편성은 바로 1904년 참모부연습에서 편제상에 없던 신규부대를 동원한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반박합니다. 즉 슐리펜은 이미 현역시절 부터 유사시 부족한 병력을 신규부대 동원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반영됐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양면전쟁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비록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의 취약점이 폭로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여전히 유럽전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프로이센을 텅 비워두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에 크게 의존해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과 동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I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중 서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 I에서는 동프로이센에 10개 사단을 남기고 주력을 서부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버는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I를 중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디크만의 연구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양면전쟁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독일군의 부대 전개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므로 디크만의 연구는 한계가 있습니다. 홈즈는 주버도 인용한 1905/06년의 계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 동부전선에 10개 사단, 서부전선에 62개 사단을 배치하지만 전쟁이 서부전선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72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서 81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부대전개계획 I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설 역량이 감소했다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방어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네 번째로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결전이 아르덴느와 로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홈즈는 이 주장에 대해서 뵈티허(Friedrich von Boetticher)가 1930년에 쓴 ‘근대전쟁의 스승(Der Lehrmeister des neuzeitlichen Krieges)’이라는 소논문을 인용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뵈티허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아 프랑스군이 로렌으로 공격해 올 경우 우익에서 소수의 병력을 차출해 좌익을 증원하는 한편 나머지 병력으로 우회기동을 실시, 랭스와 베르덩 사이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우익의 주력 부대로 공세를 감행,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 작전 56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연습을 종료했습니다. 홈즈는 여기서 첫번째 연습은 바로 우아즈 강을 도하하는 슐리펜 계획의 첫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고 두번째 연습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 즉 비망록에 명시된 두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05년 11~12월에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주버는 홈즈가 문법적인 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반박합니다. 슐리펜은 마지막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 양면전쟁의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단 주버는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 독일 단독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것 자체가 오독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은 워게임에서 독일이 고립된 상태로 양면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슐리펜은 워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홈즈는 슐리펜도 러시아군이 점차 러일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계획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양자 사이에 유사점이 적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몇가지 사례를 들어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1914년 8월 27일 제1군 사령관 클룩(Alexander von Kluck)에 내려진 명령은 진격방향을 남서쪽에서 보다 서쪽으로 돌려 루앙(Rouen)과 망테(Mantes)를 잇는 선으로 진출, 세느강에 도달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것은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이것을 소몰트케가 파리 자체를 포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파리를 우회하는 것과 그 자체를 포위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소몰트케는 1911년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평에서 국경지대의 프랑스 요새선을 무력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익을 최대한 강화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전후에 남긴 저술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에 따르면 소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이 계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가 슐리펜과 차이를 보인 것은 네덜란드를 공격하지 않는 것 정도였는데 소몰트케는 네덜란드까지 침공할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그만큼 우익의 타격력이 감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소몰트케는 전후에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물론 전쟁 초기 소몰트케는 로렌 지방에 슐리펜의 원래 구상 보다 6개 사단이 더 많은 16개 사단을 배치해 우익을 다소 약화시키기도 했으며 프랑스군 주력이 알자스-로렌으로 침공해 올 경우 우익의 상당부분을 이 방면으로 돌릴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소몰트케가 실질적으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기본 개념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화된 독일군 좌익은 우익의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정면의 프랑스군을 능동적으로 붙잡아두는 임무를 가지고 있엇습니다.
한편, 주버는 독일군의 병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게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슐리펜의 원래 계획 처럼 파리를 봉쇄하는 것은 실시할 수 없었고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프랑스군 주력이 후방의 위협을 느껴 (유사시 강력한 보루가 될 수 있는) 파리를 버리게 하고 남동쪽으로 몰아 내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슐리펜의 기본적인 개념은 유지되었다는 것이 홈즈의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