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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塞翁之馬!?

"우리는 방사능오염지대를 돌파하는 부대가 어느 정도의 손실을 입을 것인지 예측을 해 본 뒤로는 방사능오염지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1956년이나 1957년쯤에 중앙아시아에서 진격을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실험을 하려고 군사훈련을 실시한 일이 있습니다. 실험장소에 소형 핵무기를 터뜨린 뒤 부대가 핵구름을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비극으로 끝났으며 겨우 최근에 와서야 이것을 다루는 글들이 몇편 간행되었습니다. 나는 이 훈련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조종사는 핵구름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해서 경질당했습니다. 명령에 따랐던 그 조종사의 동료들은 몇 달 안돼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때 소련에서 이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했다는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범죄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진짜 문제였으며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일이 벌어질것인지 알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우리의 무지와 부족한 생각으로 인한 댓가는 너무나 큰 것 이었습니다."

비탈리 츼기츠코Виталий Н. Цыгичко 박사,  2006년 4월 24~25일에 걸쳐 진행된 냉전기 유럽전역의 전쟁계획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Jan Hoffenaar and Christopher Findlay (eds.), Military Planning for European Theatre Conflict during the Cold War : An Oral History Roundtable Stockholm, 24–25 April 2006, (Center for Security Studies, ETH Zurich, 2007), pp.139~140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북핵 문제에 대한 안드레이 란코프의 최근 글 한편

재미있는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이해찬 "현정부 남북대결구도로 대북성과 사라져"

이해찬도 웃기지만 이종석이 북핵문제가 남북관계에서 분리시켜 다룰 수 있는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건 단지 북한 핵문제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최대의 약점이기 때문에 억지로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게다가 이종석은 당시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지난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정나미가 더 떨어집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노무현 정부 당시 이종석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했었죠.

사실 현 시점에서 북한 핵문제는 굉장히 손 쓰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매우 불편한데 뭔가 뾰족한 대책은 없어 보이는군요. 손을 쓸 수 있었지도 모르는 시기에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은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군요.

이런 관점에서 살짝 불편한 글 한편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안드레이 란코프가 지난 3월 7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 “Let North Korea Keep Its Nukes”입니다. 간단히 결론을 이야기하면 지금은 마땅히 취할 수단이 없으니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자는 내용입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도록 내버려 두자(Let North Korea Keep Its Nukes)
안드레이 란코프

미국과 북한간의 가장 최근의 협상이 2월 29일 끝났다. 북한측은 미국이 식량 원조를 하는 대가로 자국의 우라늄 농축 계획을 동결하고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데 동의했다.

서방 언론들은 예상했던 대로 핵 문제에 대한 회담이 재개될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고(물론 제한적이고 조건적이긴 했다), 미국 국무부는 협상을 “작은 첫 걸음(modest fist step)”으로 설명했다.

그렇다. 이 협상은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간에 전개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보이는 핵협상에 있어서 첫 번째 걸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도데체 무엇을 위한 걸음이란 말인가?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다. 미국이 천명하고 있는 목표는 북한의 핵무장을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그리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해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지난 20여년간 변함 없었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플루토늄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고 (물론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 했지만) 수 차례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실행했으며, 그리고 상당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늘날 까지도 비핵화는 요원하다.

이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미국의 정책은 구제불능이라 할 만큼 비현실적이니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북한 정권은 힘들여 획득한 핵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왜 그래야 하는가?

북한의 핵 능력은 평양의 지도층이 사담 후세인이나 무암마르 카다피와 같은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 억지력을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평양의 지도층은 후세인과 카다피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면 여전히 팔팔하게 권력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때 서방의 외교관들은 북한의 당국자들과 소통하면서 카다피가 진행 중에 있던 핵 계획을 포기한 것을 본받아야 할 훌륭한 사례로 들고는 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들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입장에서 핵무기는 엄청난 투자였다. 핵무기는 북한이 국제 사회로 부터 후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원조를 받아낼 수 있는 핵심 수단이며, 내부적인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제기능을 할 수 없는 북한 경제를 개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의 생존에 중요하다.

북한의 핵공갈은 아주 잘 먹혀왔다. 최근의 협상만 봐도 된다. 북한은 핵 개발을 늦추는데 합의하는 대가로 조건없는 대규모의 원조를 얻어냈다. 북한은 핵 무장 능력을 갖추고 있는 덕에 협상을 해서 원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비핵화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당근만 쓸모가 없는게 아니다. 채찍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의 압박과 국제 제재는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만들지 못했다. 김씨 정권이 끝난 이후에나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생각된다면 정권 교체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작전에 필요한 인적, 물적 대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클 수도 있다.

중국이 제제 체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제도 실패할 것이다. 중국이 성실하게 협조한다 하더라도 주로 희생될 것은 북한인들인데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제재조치는 북한 정권의 정책 변경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단지 수많은 북한 농민들의 죽음만 가져올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압박이 혁명을 불러올 수 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백만에서 2백만명이 굶주림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만약 압박이 가해진다면 북한 정권은 비핵화 조치를 취하는 척 하면서 또 다시 원조를 얻어내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들에게 제재조치란 유권자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재조치는 완전히 실패했으며 아마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유일한 실질적인 해결책은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정권이 내재된 무능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북한 외교관들은 그들의 현재 목표가 핵무기를 제한하는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북한은 현재 확보하고 있는 플루토늄과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계속 유지하는 대신 핵 계획을 동결하고,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투발 수단을 개량하는 것을 멈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은 그 댓가로 정기적인 식량원조와 2기의 경수로라는 당근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해결책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핵비확산조약에서 탈퇴하여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길로 나간 유일한 국가이다. 만약 북한이 처벌을 받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불량 국가들도 이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북한이 이런 작은 조치를 취하는 것에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에 극단적인 불쾌감을 느끼진 않더라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기생충 같은 공갈꾼(parasitic blackmailer)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란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두개의 나쁜 것 중에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핵 문제에 대한 타협이 실제로 덜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미국이 무얼 하던지 간에, 북한의 핵 계획은 최소한 김씨 왕조가 북한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북한의 핵 계획은 갈수록 발전하고 위험해 질 것이다. 지난 수년간 북한의 핵 기술자들은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라늄 계획은 통제하고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서 미국에게 더 높은 가격에 흥정을 할 수가 있으므로 개발에 나섰을 것이다.(실제로 우라늄 계획은 시작 단계에서 부터 가치를 빨리 높일 수 있는 수출 품목으로서, 궁극적으로 미국의 원조와 교환하기 위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만을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으로 고집해 나가다면 우리는 북한의 핵 계획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북한이 시리아와 미얀마에서 벌인 모험에서 드러난 것 처럼 확산될 위험도 존재한다.

조만간에 미국은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은 포기하지 않은 채로 핵 계획을 동결할 뜻을 보이는데 대해서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정상적인 “보상”을 해 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공식 발표에서는 궁극적인 비핵화에 대한 공약이 요란하게 강조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거래가 금방 이루어 지지는 않겠지만, 만약 김씨 일가가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이상 북한의 권좌에 남아있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타협을 마지 못해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핵 협상은 여기에 참여한 미국측 관계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작은 첫 걸음”이 될 것이다.

2012년 2월 26일 일요일

1961년, 한국군 제1군 기동훈련에 대한 논평 중 핵무기 운용에 관한 내용

한국군이 1950년대 부터 전술핵 운용 훈련을 해 왔다는 것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1950~60년대 한국군의 전술핵 운용 훈련에 관해서는 저도 관련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접하긴 했습니다만 구체적인 자료는 읽어 보지를 못했는데, 얼마전 1962년에 육군대학에서 낸 『軍事平論』22호를 훑어보다 보니 1961년 10월 17일에서 11월 4일까지 실시한 제1군 기동훈련에 대한 논평에서 전술핵 운용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950~60년대의 전술핵 운용에 대한 자료는 저도 처음 본 것이라서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논평의 저자는 당시 중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연구관 겸 교관으로 있던 김황봉(金黃鳳) 입니다. 그때 복사한 것을 몇 달 쌓아두고 있다가 오늘 군사평론을 꺼내 볼 일이 있어서 또 읽어 보았습니다. 이왕 꺼낸 김에 이 논평에 실려있는 전술핵 운용에 관한 내용들만 발췌를 해 봅니다.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핵무기 운용

금번 훈련에서 일반적으로 핵무기의 전술적 운용이 원만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 거대한 파괴력의 핵무기를 정확하게 사용하였을 때 비로소 결정적으로 전과를 확대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선결문제는 정확한 핵표적의 선정을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핵 표적 선정방법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장교는 이미 기지(旣知)의 사실이지만 여기에 개략적이나마 간단히 소개하여 본다면 G-2, G-3에 의하여 잠재표적을 설정하고 다음 이것에 의하여 잠정표적을 선정한다. 이것이 완료되면 핵무기의 배당수에 따라 실제 부대가 기동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표적의 우선순위를 결정 타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역시 임기(臨機)표적이나 요청사격을 위하여 보유되는 예비량의 핵무기 사용도 표적선정에 있어서 확실한 정보에 의하여 심중(深重)한 판단으로서 정확한 요청사격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금번 기동훈련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적의 이동표적이나 적에 관한 첩보의 불확실한 것으로 말미암아 핵무기의 요청사격이 몇번이나 각하 당하는 예가 있었다. 또 한가지의 결함으로서는 이 거대한 파괴위력을 가진 핵무기의 사격이 기동계획과 결합되었을 때 전과확대의 최대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인데 기동계획과 협조되지 않는 핵무기 일방의 사격은 가치있게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번 훈련기간을 통하여 목격한 결함을 지적할 수가 있다.

金黃鳳, 「第1軍 機動訓練에 對한 小考」, 『軍事平論』22(1962. 1), 49쪽

그리고 아군이 핵무기에 타격 받았을 경우의 대응에 대한 논평도 흥미롭습니다.

6. 핵 상황하에서의 사체처리 및 후송 문제

핵무기 1발로 1개 중대병력이나 수개 대대병력까지 순시간(瞬時間)에 사상 및 파괴시킬 위력을 보유하고 있음은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번 훈련은 핵 상황하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은 수차 말한 바 있고 또 핵무기 투발로 인하여 이번 훈련에 많은 인원 및 장비가 사상되고 파괴된 상황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시에 다수의 인원이 사상을 당하였을 때 지휘관이나 참모의 조치가 대단히 막연한 입장에 처해 지는 것이다. 1개 중대 및 기타의 병력이 완전히 손실을 입었을 때 손실병력에 대한 보충이나 예비대로서 대치하는 등의 전술적 문제는 용이하게 해결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사상자의 처리와 후송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려되어 있지 않는 것을 지목할 수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할 과제가 아닐 것으로 본다.
이 문제에 부가해서 말할 것은 사단의무중대나 연대의무중대 등이 장차의 핵상황하에서 전기한 바와 같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시 현재의 편제병력과 장비로서 능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를 고려하여 볼 때 편성면에서나 장비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처리 및 후송문제에 이르는 기술적인 면도 연구되어야 하겠다.

金黃鳳, 「第1軍 機動訓練에 對한 小考」, 『軍事平論』22(1962. 1), 51쪽

저도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인데 추후 1950년대부터의 핵무기 운용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해 본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늙은 사자의 몸부림

2차대전 직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매우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이 몰락해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라면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영국의 몰락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B급 강대국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특히 핵무기의 등장은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게 있어서도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요즘 읽은 논문중에서 처칠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총참모부가 작성한 1952년 Global Strategy Paper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핵무기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냉전에 있어 주된 억제력(main deterrent)이며 전쟁 발발시 연합국의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즉, 핵무기)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국이 미국의 정책과 냉전 계획, 그리고 전시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영국이 정책 수립이나 공세 계획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핵무기를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원자폭탄을 보유하지 않는 심각한 정치적 불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에게 가장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아야 한다.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p.209~210

강대국으로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핵무기는 그럴수 있는 상징이라는 이야기죠. 2차대전 이전의 전함처럼. 하지만 이후 영국의 핵정책을 보면 안습입니다. 본격적인 핵경쟁에 나서기에는 국력이 모자라고 결국 상징적인 수준의 핵전력을 보유하는 데 그치게 되니 말입니다.(물론 유사시 물귀신작전을 펼 정도는 되겠습니다만)

물론 이때 영국이 확보한 국제적인 지위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안습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역사를 보면 강대국 경쟁에서 탈락한 비참한 패배자들이 산적해 있으니 말입니다. 영국의 몰락정도는 양호한 편이죠.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육탄 10용사와 정신전투법

슈타인호프님이 '육탄 10용사'에 대한 글을 한 편 쓰셔서 엮인 글을 하나 써 볼까 합니다.

선전 도구로서 육탄 10용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당시 육탄 10용사는 정부의 매우 좋은 선전대상이었습니다. '북괴'에 비해 물질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정신력과 자기희생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원동력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방부가 발간하던 『國防』1949년 6월호에는 육탄 10용사를 찬양하는 특집 기사가 여러 편 실렸는데 그 중 재미있는 글 하나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호라 장재(壯哉)여! 오호라 비재(悲哉)여 육탄십용사!

그대들은 세계전사에 볼수없는 쾌거를 감행하였나니 이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전투력의 극치를 세계에 선양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극도발달에 의하여 원자력 내지 우주선(宇宙線) 이용이 가능하다고 하는 금일에 있어서 그러한 신비력을 발양한 것은 다만 한국용사의 아름다운 희생에서만 수긍되는 것이니 이것은 세계만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전투정신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 기념비가 않일 수 없다.

과학의 힘을 믿고 싸우는 민족! 무기의 위력 만을 의지하고 싸우는 군대! 그것은 언제나 정신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니 과학 보다도 무기 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군인의 정신 그것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시픈 소이(所以)다.

대동아전쟁, 이른바 동양평화를 위하고 싸왔다는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도 원자탄의 히로시마 폭격이 제아모리 인간살생을 혹독히 하였다 하드라도 좀더 강렬한 전투력과 필사의 정신력이 대비하고 있었다면 원자력쯤은 문제밖에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과학을 무시하는 전쟁, 무기를 소홀히 하는 전법은 20세기 현금(現今)에 있어서 용인될 수 없는 지론일른지 모르지만 원자력이나 무기 역시 인간의 정신활동의 범위권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임으로 나는 정신 제일주의를 고집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전사를 들추어볼때 저 불란서의 쨘다-크의 기책도 오로지 정신에서 출발하여 정신에 끝이였고 나폴레온의 알프스 정복도 과학력이나 무기력(武器力)이 아니였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것은 물론 무기력, 과학력의 소치라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앞서는 것은 전국민의 정신쇠퇴에 기인함이 더욱 컷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군인만이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민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쟁에 임함으로써 언제나 필승을 기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통해서 어느나라의 역사를 들추어 보드라도 잘 알수있는 것이니 용사를 길러낸 총후의 지성이 없다면 제아모리 출중한 군인이라고 하드라도 목숨을 나라에 받칠 동기를 맨들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패망한 영웅이 되어 있는 독일의 히틀러나 이태리의 뭇소리니를 보드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과학력과 무력을 위주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신력에 입각한 민족혼의 규합이였고 정신전투의 신봉자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전투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유물론적 이념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찬미하는 우리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절대이념인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인 것이다.

李鍾泰, 「꽃으로 떠러진 十柱花郞」, 『國防』(1949. 6), 6~7쪽

당시 한국군의 궁색한 상황과 안보적 불안을 고려하면 이렇게 정신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것도 이해를 못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정신력으로 원자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긴 좀 심하죠... 그나저나 민주주의 국가의 군인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니 이것도 참;;;;;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문제

sonnet님께서 아데나워 총리의 핵무기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저도 독일과 핵무기 문제에 대해서 읽은 것이 조금 있어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생각해 보니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라 원래 읽은 내용과 약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단 내용을 올려봅니다.

1964년 11월에 있었던 미국 국방부장관 맥나마라와 독일연방공화국 국방부장관 하셀(Kai-Uwe von Hassel)간의 회담에서는 소련의 침공시 대응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관련 문서는 1998년에 기밀해제 되었습니다. 이 회담의 요약본에 따르면 독일측은 전술핵 사용을 독일 영토내로만 한정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 Bernd von Freytag-Loringhoven) 장군은 설명을 계속하면서 만약 초기에 ADM(Atomic Demolition Munitions)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군의 공격 작전을 중단시키지 못 한다면 서방측은 방어 지대에서 재래식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침략군의 숫적 우세를 감안한다면 서방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방어군이 격파될 위험에 처한다면 전술핵무기(nuclear battlefield weapons)를 지체없이 선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만약 핵무기의 선별적인 사용으로도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면 확대(escalation)가 불가피해질 것이다.

(중략)


(독일) 국방부장관은 독일측의 개념은 지연지대(Delaying Zone) 내에서는 오직 ADM만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독일측은 ADM의 사용은 서독의 영토내로 한정할 것이기 때문에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ADM을 사용한다면 침략군에게 공격을 계속할 경우 더 높은 단계의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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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inuing with the briefing, Gen von Freytag pointed out that if early firing of ADMs did not force the aggressor to cease his offensive operations the West would have to continue the conventional battle in the defense area. In view of the numercial superiority of aggressor forces, the West must expect heavy losses.

If the defending forces are in danger of destruction, nuclear battlefield weapons must be selectively employed immediately. If selected employment of nuclear weapons does not stop the aggressio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avoid escalation.

(중략)


The Defense Minster summarized the German Concept, stating that in the Delaying Zone the Germans would use only ADMs. The FRG believes this will not lead to escalation because these would be employed on West German Soil. This would also be a clear demonstration to the aggressor that continuation of the attack would result in a Higher Level of Response.

'Memorandum of Conversation : Secretary McNamara's Meeting with FRG MOD von Hassel, 12-13, November', RG 200, Box 133, pp.5-6

독일측의 입장이 안습인 것은 핵무기를 함부로 쓰면 핵보복으로 독일이 쑥대밭이 되겠지만 쓰지 않으면 빨갱이들에게 밀려버린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독일 영토에서만' 전술핵을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초기에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바르사뱌 조약기구의 공세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프라이탁 로링호벤 장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만약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전면 핵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박살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핵무기를 쓰자고 제안해야 하니 안습입니다.

2009년 7월 15일 수요일

독일 영토 내에서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딜레마

요즘은 Ingo Trauschweizer의 The Cold War U.S. Army를 읽고 있습니다. 책이 다루는 주된 내용이 냉전기 미육군의 편제와 교리 문제이다 보니 전술핵 사용 문제가 많이 언급되는데 간혹 동맹국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이 책의 125쪽에 실린 1961년 7월 14일 슈트라우스(Franz J. Strauss) 독일 국방장관이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회담했을 때 했다는 발언이 눈길을 끌더군요.

슈트라우스는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에 대해 맥나마라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1평방마일 당 210명의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고 핵무기 공격에도 취약합니다. 핵무기는 전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쟁을 억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기묘하고 이상한 존재가 되겠지요.”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의 독일은 자칫 잘못하면 판돈으로 걸어 놓은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날 각오를 하고서라도 도박을 해야 할 처지였는데 아마 핵무기 사용은 그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도박이었을 것 입니다. 썼다 하면 쪽박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바르샤바 조약군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 그대로 딜데마 중의 딜레마가 아니었을 지.

슈트라우스와 맥나마라의 회담 녹취록은 나중에 한번 입수해 보고 싶습니다.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2월 27일 금요일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왜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eedman)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도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심심할 때 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오는 국가인 만큼 핵전략에 대한 의문도 많을 법 한데 의외로 ‘핵전략’에 대한 관련 서적 찾아 보기가 어렵더군요.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서적들은 많지만 순수하게 ‘핵전략’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서적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물론 도서출판615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제외하고) 도서검색을 해 보면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핵전략에 대한 서적들이 제법 번역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핵전략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는지 ‘핵전략’에 대한 서적이 소개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잊을 만 하면 기어 나오는 북한의 핵공갈에서 볼 수 있듯 핵무기가 가지는 정치적 위상은 냉전이 끝났어도 여전합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는 여전히 ‘최종’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프리드먼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는 핵무기 문제에 대한 잘 씌여진 개설서 입니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뒤 2003년에 제 3판이 나왔으니 거의 30년은 된 책이지요. 여전히 개설서로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꾸준히 나온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할 수 있겠습니다. 꾸준히 개정판이 나오면서 새로운 내용도 추가되었는데 1980년대의 핵 전략과 냉전 종식 이후의 핵무기 문제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본질적으로 미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냉전시기 핵무기 경쟁의 주된 참여자는 미국과 소련이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 프랑스, 중국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그나마 유럽은 중요하게 다뤄지는 편이라 7장이 유럽의 핵문제에 할애되어 있고 이 중에서 한 절은 영국에, 나머지 한 절은 프랑스와 서독의 핵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럽국가들에 대한 서술이 이렇다 보니 인도나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듣보잡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책 후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개설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책은 전략폭격의 하위 수단으로 인식되던 1940년대의 초보적 핵 전략에서 상호파괴확증전략(Mutual Assurance of Destruction)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핵전략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끼친 여러 이론들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분들에게 아주 유용한 참고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올 때 마다 우리도 핵무기를 가지면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걸 보면 왜 이런 책은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2월 8일 일요일

미국 합동참모 본부의 대소 작전계획 : 1945~1950

지난해 11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작전 연구안 Gunpowder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안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의 하위 개념으로 연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상위 계획인 미 합참의 전쟁계획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1945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 합참이 수립한 여러 개의 전쟁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석 달 째로군요.

이 글에서는 Steven T. Ross의 American War Plans 1945~1950의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서적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서 냉전 초기 미 합참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 합참의 평가

미 합참은 1944년부터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종결된 지 2개월 남짓 지난 1945년 10월 9일에는 합참 예하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유럽과 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합참은 이 보고서를 받아 들인 뒤 10월 16일에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검토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원해제 이후에도 병력 441만1천명, 113개 사단 및 410개 항공연대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측에 따르면 동원해제 이후의 미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합참은 만약 소련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다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1945년 10월 시점에서는 아직 냉전이 격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합참은 소련이 전쟁을 먼저 도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5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극도로 빈약하고 영국은 본토 방어에 급급하거나 기껏 해야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할 능력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미 합참은 계속해서 소련의 전략적 의도와 능력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1월 31일에 합참 예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가 제기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련의 전쟁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합동정보위원회는 소련은 경제 복구를 위해서 향후 5년간은 전쟁을 피하겠지만 만약 스탈린이 다른 국가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다면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합동정보위원회에서는 1946년 7월 9일에 전후 안정을 위해서 소련과 세력권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합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 합참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의 합참 정보평가에서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정했으며 소련이 1956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공군과 150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특히 이 평가에서는 소련이 재래식 전력의 우위 때문에 미국이 핵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상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이후 급속히 군사력을 감축하고 있었고 특히 육군이 집중적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지상전에서 소련을 저지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2. Pincher 계획과 그 보완계획 – 최초의 대소 작전계획

1946년 3월 2일, 합참 예하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핀처(Pincher)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시작한 도발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첫 번째 작전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그리스와 터키, 이란 방면으로 이익을 획득하려 압력을 가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터키를 장악한다면 이것은 영국의 중동에 대한 통제력에 큰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터키 침공은 영국과의 충돌을 가져와 이것이 3차대전으로 확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발발시 총 113개 사단과 동맹군 84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 중 40개 사단을 터키 및 중동 방면의 침공에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총 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수에즈 운하 지구를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영국의 참전과 동시에 서유럽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이 계획안은 미군과 영국,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라인강 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방면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로 철수해 포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소련군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이탈리아는 함락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핀처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초기부터 지상전에 휩쓸려 소모되는 것을 피하고 미국이 가진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살리는 방안을 추천했습니다. 서유럽은 포기하되 영국, 이집트, 인도, 이탈리아(방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을 거점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전략 폭격으로 대응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는 서유럽을 탈환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에 점령된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미 육군이 소모전에 말려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레닌그라드나 무르만스크, 리가 등 소련의 해안지역에 상륙하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핀처 계획의 초기안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병력 감축으로 제한된 미군의 능력을 고려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소련에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핀처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는 계속 되었는데 추가 연구에서는 극동에서 소련군이 공세로 나올 경우 만주와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주고 미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핀처 계획에서 승인된 이 방안은 이후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핀처 계획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력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미 합참은 소련이 동원을 시작하면 동원 시작 60일 이후 서유럽 전선에 총 27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42개 사단을 중동 방면에, 49개 사단을 극동 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반면 소련의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막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략 공군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상군 만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그리고 핀처 계획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이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4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군을 제외한다면 연합군 중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에 비해 장비가 구식이긴 하지만 훈련도가 높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또 터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를 폭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핀처 계획을 기반으로 1946년 12월 20일에는 이탈리아 방어 계획인 닭발톱(Cockspur) 계획, 1947년 8월 4일에는 이베리아 반도 방어 계획인 북소리(Drumbeat) 계획, 1947년 8월 29일에는 극동 방어 계획인 월출(Moonrise) 계획 등이 작성되었습니다.

한편, 핀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 단계의 대응만을 상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합참은 핀처 계획을 보완할 계획 작성을 시작합니다.

1947년 2월 13일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제출한 전쟁계획 JCS 1725/1은 핀처 계획의 연장선 상에서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 소련이 유럽 본토를 석권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북미의 주요 공업지대를 방어하고 영국과 수에즈 운하지대, 인도 북부 등의 핵심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략 폭격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석유 생산시설 중 80%가 영국이나 이집트에서 발진하는 미국 폭격기의 작전 범위내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터키를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터키를 잃게 되면 지중해 동부가 소련 공군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이집트를 통한 보급을 대서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터키가 소련군에 함락 될 경우 그 다음의 방어선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발발 1년 차에는 전략 방어를 취하고 전쟁 발발 2년 부터는 전략폭격을 중심으로 소련의 전쟁 수행역량을 감소 시킨 뒤 전쟁 발발 3년 째에 흑해와 카프카즈를 통해 소련 남부로 진격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상정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동원은 전쟁 1년 차에 육군 45개 사단과 공군 70개 항공단 및 56개 독립항공대대, 항공모함 9척, 전쟁 2년 차에는 육군 80개 사단과 공군 139개 항공단 및 113개 독립항공대대, 전쟁 3년 차에는 육군 90개 사단과 공군 264개 항공단 및 141개 독립항공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21척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육군의 규모는 2차대전 당시 동원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7월 말에 작성된 동원계획 JWPC 486/7에서는 소련에 대한 전략 폭격 중 핵공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능력의 86%, 항공기 엔진 생산능력의 99%, 각종 화기 생산능력의 56%, 전차 및 장갑차량 생산능력의 99%, 석유 생산능력의 52%를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해 소련의 사기를 꺾고 최선의 경우 이를 통해 소련의 항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핀처 계획을 보완하는 여러 계획들은 공통적으로 전쟁 초기의 전략 방어와 전략 폭격을 통한 대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알래스카, 중동, 파키스탄, 오키나와, 일본의 기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군이 강력히 지지하는 B-36 폭격기는 미국의 전략 폭격 및 핵 타격능력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계획에서 논의된 전후 처리 문제인데 소련이 항복하면 동유럽의 국경은 1939년의 국경으로 되돌린다는 합의가 잠정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혹시 히총통이 노린 것은 이것?!?!)


3. Broiler, Frolin 계획 – 비상대응계획

브로일러(Broiler) 계획은 핀처 계획과 1947년에 작성된 여러 동원 계획을 반영해 작성되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은 소련이 1948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를 상정한 계획으로 일종의 비상대응계획이었습니다. 합참의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1947년 8월 29일에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각종 계획을 반영해 1948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응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안은 같은 해 11월 8일 합참 브리핑에서 처음 발표됩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위해 충분한 원자폭탄을 확보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고 원자폭탄의 숫자도 부족하기 때문에 서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터키와 지중해 해안 일대, 이집트를 방어하는 것 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우세한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공군 기지를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폭격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반격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다시 1949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상정한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8년 2월 1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도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은 순식간에 서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장악하고 미국이 전략 핵폭격을 할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영국과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총 173개 사단과 동맹군의 68개 사단 및 25개 독립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1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고 전쟁 개시 150일 이내에 2만대로 증강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육군 9개 사단과 9개 독립연대,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하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에 유럽 본토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개전 70일 만에 프랑스까지 점령되고 만약 소련군이 스페인까지 침공할 경우 소련군은 개전 180일에 지브롤터까지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방면의 공격에서는 최악의 경우 개전 90일에 터키가 항복하고 175일 차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될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또한 서유럽이 함락되면 개전 12개월 뒤에는 서유럽에 전개한 소련공군이 하루 평균 전술폭격 1,550회를 실시하고 또한 V-2 개량형으로 영국을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한반도는 모두 포기하고 중국은 연안 일대의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 본토도 포기하되 일본은 반드시 사수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편, 반격은 거의 유일하게 전략 핵폭격에 의해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기지는 이집트와 인도 북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의 핵폭격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JWPC 486/7과 거의 동일한 것 이었습니다. 이 밖에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바그다드와 모술까지 반격한 뒤 2단계 작전으로 이란에서 소련을 축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중동에 대한 반격작전에는 미군 12개 사단과 영국군 8개 사단이 배정되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핵폭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한다면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상륙작전을 펼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계획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브로일러 계획을 간략화한 프롤릭(Frolic) 계획이 입안되었는데 브로일러 계획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의 취약상을 강조하고 전략 핵폭격을 중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은 핀처 계획 및 그 보완 계획들 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 지중해 재해권의 상실까지 염두에 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영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등 군축에 따른 미국 군부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 Bushwacker 계획

1948년 1월 3일, 합참의 전쟁 계획들을 검토한 군수위원회(Munitions Board)에서는 핀처 계획에 기반한 작전 계획들이 현재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합참에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8일, 기존의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작전 계획, 부시워커(Bushwacker) 계획이 입안됩니다. 부시워커 계획은 전쟁이 1952년 경에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수립되었습니다.
먼저 소련이 1952년에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 졌습니다. 부시워커 계획안에서는 소련이 1952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 전쟁 발발과 동시에 11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으며 동원 개시 180일 만에 50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지상군은 3만대의 전차와 77,500문의 견인포, 7,500문의 로켓포, 13,000대의 자주포 등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도 1952년에는 대부분 제트기로 이루어지는 2만대의 항공기를 보유할 것이며 특히 B-29에 필적하는 중폭격기 1,600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해군은 200척의 신형 고속 잠수함과 130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가지고 미군의 교통선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워커 계획에서는 소련이 1952년까지 원자폭탄을 보유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부시워커 계획은 소련이 미국의 의도를 과소평가하고 제한적 도발을 시작하면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은 소련 육군에 의해 단기간에 석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실시하고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수부대 투입도 가정하고 있는 등 소련이 보다 과감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시워커 계획 또한 다른 계획들과 유사하게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16일간 지속되며 소련의 전략적 공세와 미국의 전면적인 방어로 진행됩니다. 2단계는 미국이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면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고 3단계에서는 미국이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한다는 것 입니다. 특히 부시워커 계획은 미군의 증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1단계와 2단계는 신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의 효과가 없어 미국이 당장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미 육군을 1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증강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통해 소련인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1952년 까지는 충분한 수의 B-36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공군으로 소련의 20개 주요도시들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초기의 핵공격에도 저항을 계속한다면 다음 단계로 터키,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북아프리카 등에 기지를 확보하고 전략 폭격을 지속하고 추가적으로 소련 본토에 대한 지상공격을 준비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핀처 계획에 기반한 비상 작전계획인 브로일러, 프롤릭 계획과 같이 부시워커 계획을 기반으로 한 비상 작전계획도 수립되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에 이어 수립된 새로운 비상작전 계획은 크랭크축(Crankshaft)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 또한 이전의 비상 작전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 영국군은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중동, 중국, 한반도는 포기하고 해당 지역의 방어는 각국의 지상군에 맡기되 미국은 공군 및 해군 지원만을 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개전 60일차에 소련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개전 75일에, 시칠리아는 개전 105일에, 그리스는 개전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점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는 최대 개전 150일까지, 수에즈 운하지대는 개전 175일 무렵 소련군에 장악되고 이란과 아라크는 개전 60일차에, 그리고 중국과 남한은 개전 150일차에 점령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은 공군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는데 브로일러, 프롤릭 처럼 전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복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래전은 전략폭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수행될 예정이었습니다.
1단계의 반격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유전 지구에 감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공격에 이곳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생산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철수할 것이었지만 소련이 전략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장기전으로 가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유전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1단계 반격에는 미군 18개 사단과 영국군 9개 사단을 먼저 바레인에 상륙시킨 뒤 쿠웨이트-바스라를 장악하고 다음 단계로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소련군을 격퇴하는 것이 반격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확보한 뒤 이곳을 그리스와 터키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장악하면 다음 단계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참은 전면적인 전략 핵폭격과 뒤이어 그리스와 터키 까지 탈환한 상태에서도 소련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은 터키를 발판으로 우크라이나에 상륙,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소련 본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면 대규모의 육군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2차대전과 비슷한 90개 사단 수준으로 소련에서 지상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입안가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5. Halfmoon 계획 –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

한편, 미 합참은 1948년 4월 워싱턴에서 영국, 캐나다군 관계자와 함께 기존에 작성된 대소 작전계획을 토의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는 새로운 작전계획인 반달(Halfmoon)을 승인합니다.
반달계획은 전쟁 첫 해에 시행될 단기간의 비상 계획으로 기본적으로는 브로일러 계획과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소련이 1949년에 국지 도발을 감행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 또한 전쟁 종결 뒤에는 소련의 국경을 1939년 국경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반달 계획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계획들과 동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 한가지만은 기존 계획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계획에서는 서유럽이 소련에게 단기간내에 석권되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반달 계획에서는 서유럽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선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점령지역의 저항 활동을 촉진하고 만약 라인강이 돌파된다면 영국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은 프랑스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군 주력은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는다면 프랑스의 연안 지역으로 퇴각하고 스페인이 참전할 경우 피레네 산맥을 경유해 스페인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둔 연합군은 가능하면 독일 주둔군과 함께 라인강선으로 퇴각하고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라인강 방면으로의 퇴각이 봉쇄되면 이탈리아로 후퇴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스위스를 경유해 후퇴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그리스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은 전면전 발발시 서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한 것 입니다.
다른 지역은 기존의 계획과 유사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지대는 지중해와 중동일대의 방어 거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전략 방어를 실시할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기는 하겠지만 아시아 본토를 포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달계획은 전쟁 첫해에 적용될 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국이 처음으로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계획들과 차별화 되는 계획입니다. 이후 수립된 전쟁 계획들은 유럽 대륙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상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1949년 1월 28일 완성된 트로잔(Trojan) 계획은 기본적으로 반달계획을 바탕으로 한 전쟁 첫해의 전략 계획이었는데 전략 핵폭격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트로잔 계획에서는 전쟁 첫 해에 소련의 주요도시 70곳에 총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힌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트로잔 계획은 언급된 대규모 공군작전에 대규모의 군수지원이 필요하고 작전 기지가 될 수에즈 운하 지구의 비행장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광범위한 군축 때문에 트로잔 계획의 실행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트로잔 계획을 검토한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은 현재의 병력으로는 트로잔 계획을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6. Offtackle 계획 – 유럽에서의 적극적인 작전

각 군 수뇌부들은 반달 계획 및 트로잔 계획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트루먼 행정부의 군비 축소는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도했습니다. 특히 육군의 감축은 심각해서 트로잔 계획에 명시된 개전 초기의 능동적 방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해군 또한 예산 확보에서 공군에 밀려 극도로 불만이 많았고 그나마 감축을 덜 당했다는 공군 조차 원래 계획했던 70개 비행단을 확보할 수 없어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축소된 군사력에 맞춘 새로운 계획의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지상전력의 취약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일 합참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소련 육군은 총 104개 소총사단, 35개 기계화사단, 10개 전차 사단,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위성국의 90개 사단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육군은 겨우 10개의 현역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중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개 사단이었습니다. 나머지 9개 사단은 편제에 미달하는 병력과 장비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더욱 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원자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것 보다 본토 방공을 위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시급해 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합참의 정보평가는 소련이 1953년 중순까지 135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전략적 우위가 사라진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1948년 3월 17일에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유럽에 보다 적극적인 안보공약을 제공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유사시 라인강선의 적극적인 방어를 요구했고 미국도 1948년부터 이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군사원조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단기간에 전쟁을 개시한다면 이것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 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에게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전쟁 계획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반달계획은 처음으로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명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작전계획들을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4월 26일 합동참모본부는 예하 합동전략기획위원회에 새로운 비상 전쟁 계획의 수립을 지시합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전략적 공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전장이 될 서유럽에서는 영국-라인강 선을 잇는 방어선을 고수하고 라인강이 돌파되더라도 서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가피하게 서유럽 전체가 석권된다면 최대한 빨리 서유럽에 대한 상륙과 탈환을 계획하도록 했습니다. 즉 새로운 작전 계획은 기존에 취하고 있던 서유럽 포기를 완전히 폐기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 계획은 1949년 12월 합참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이 계획은 사실 여전히 부족한 병력으로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안보목표인 서유럽의 방어를 위해서는 전력이 증강될 때 까지의 단기간의 문제점은 감수한다는 것이 합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태클 작전은 처음으로 3차대전 이후의 정치적 질서 재편을 언급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도 전쟁 후 소련의 영토를 축소한다는 계획 정도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명확한 대소 정책의 뒷받침은 없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전쟁이 종결되면 동유럽에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공산 정부를 붕괴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능력 만이라도 와해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소 작전계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는데 오프태클 계획에서는 소련이 중동으로 침공해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이스라엘도 동맹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이 서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동시에 공세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제 1단계에서 라인강선을 방어하는 것은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계획들과는 다르게 라인강선이 돌파되더라도 꾸준히 지연전을 펼치고 서유럽에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해 반격의 발판을 삼는 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마지막 교두보에서 밀려나더라도 서유럽에 대한 탈환작전을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럽을 상실할 경우 영국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개전 2개월 이내에 영국에 총 144개 대공포연대와 전투기 1,152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미국 항모기동부대 또한 영국 방공전에 투입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중해 서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지상군과 공군을 신속히 증강하고 서유럽이 함락될 경우 북아프리카를 유럽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되었으나 만약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한다면 피레네 산맥에서 1차 방어를 하고 이곳이 돌파되면 지브롤터로 점진적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1단계에 서유럽에서 전략방어를 실시하는 동안 미공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략 핵폭격을 실시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개시 3개월 이내에 영국 주둔 전략폭격기 부대를 7개 항공단으로 증강해 소련의 서부 공업지대에 타격을 가할 것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3개월 이후 부터는 제 2단계로 전환해 전략 폭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병력 동원을 가속화해 유럽 탈환을 준비할 예정이었습니다. 동시에 서유럽 상륙작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칠리아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또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전쟁개시 12개월 에서 24개월 사이에는 제 3단계로 전환해 서유럽 탈환작전을 시작하도록 되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상륙작전에는 미군 41개 사단과 항공모함 전투단 10개, 그리고 43개 항공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은 셀부르에서 덴마크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 중 그때 상황에 적합하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감행될 것이었으며 서유럽에 상륙한 주력은 이탈리아에서 북상하는 부대와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어 서유럽의 소련군을 섬멸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이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결론이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군사적인 면 보다 서유럽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많이 작용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부에서는 오프태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7. Dropshot 계획 – 유럽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한편, 합참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1956년 7월 발생할 경우를 상정한 비상 계획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안은 다시 전쟁 발발시기를 1957년 1월로 늦추었고 당시 미군의 군비 축소를 고려해 최소한의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는 방향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이 연구안은 1949년 1월 31일 제출되어 드롭샷(Dropshot)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드롭샷 계획은 소련이 개전 당일 135개 사단과 20개 포병사단을 동원하고 개전 한달 이내에 248개 사단, 그리고 개전 1년 내에 500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은 76개 사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는데 이 경우 코탕탱 반도에 10개 사단, 브르타뉴에 20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북부 프랑스에는 대규모 육군을 지원할 만한 항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두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드롭샷 계획에서는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34개 사단을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말타, 크레타, 키프러스 등을 확보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이러한 작은 섬은 유럽 탈환의 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드롭샷 계획은 기존의 계획과 달리 중동을 장기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터키의 경우 전토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이 있을 경우 터키 남부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도 가능한 사수하되 소련군에게 점령될 경우 최대한 빨리 탈환작전을 펼치도록 예정됐습니다. 극동지역은 기존의 계획들과 동일하게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전략 방어를 하되 홋카이도는 유사시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브래들리 장군이 드롭샷 계획의 보강을 지시해 드롭샷 계획의 개정안이 1949년 12월 19일 합참에 제출되었습니다.
개정안에서는 작전에 필요한 병력 규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산정했습니다. 먼저 반격의 주력이 될 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 미공군은 3,529대, 영국 등 연합군은 5,058대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하고 개전 6개월 차에는 미공군이 4,270대, 연합군은 5,399대로 증강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30개월 차에 미공군은 11,152대까지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13척의 정규항모, 4척의 경항모, 9척의 호위항모를 동원하고 육군은 개전 첫 단계에 15개 사단, 그리고 개전 30개월 까지 74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증강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포함한 전 전선의 연합군은 같은 기간 동안 총 213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전략 핵공격에는 미군 19개 비행단, 영국군 7개 비행단 등 총 26개 비행단, 폭격기 780대가 배정되었습니다. 최 우선 공격목표는 소련의 핵공격 수단으로 여기에는 핵폭탄 제조 시설, 폭격기 기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을 파괴하는데 100발의 원자탄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목표는 석유 생산시설, 발전소, 철강을 포함한 금속 생산공장이었는데 이 목표를 공격하는데 최초의 30일간 180발의 원자탄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타격을 한 이후에도 복구를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핵폭격 및 통상 폭격을 실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의 공업 시설을 타격하는데 원자탄 73발이 배정됐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 1단계에 총 76개 사단(이중 미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고 2단계에서는 서유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미군을 55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2단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다면 그대로 동유럽과 소련으로 진격해 무장해제 및 점령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2단계에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는 대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동유럽에 대한 공세는 다시 세가지 안으로 뉘었습니다. 첫 번째는 North안으로 이 안은 108개 보병, 38개 기갑, 5개 공수사단과 90개 항공단을 동원해 쾰른을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력은 베를린을 해방한 뒤 계속 동진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조공은 크라쿠프에서 주력과 합류할 것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폴란드 남부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해 발칸반도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두번째 안은 Pincer안으로 이 안은 117개 보병, 30개 기갑, 9개 공수사단과 110개 항공단을 동원해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동시에 공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먼저 터키 남부의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해 그리스에 상륙한 뒤 교두보를 확대해 루마니아로 진출하고 이후 폴란드 남부로 공세를 확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연합군도 반격을 개시해 78개 사단이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로 진격,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안은 South안으로 이 계획은 총 182개 사단과 124개 항공단을 동원하는 등 세가지 안 중 가장 규모가 큰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주력은 터키에서 발칸반도로 진출, 베를린과 폴란드로 진격할 예정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유럽의 연합군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드롭샷 계획은 합참에서 승인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프태클과 함께 미국의 서유럽 방어 계획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NATO의 강화와 함께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 방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