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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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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