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 심화되어 갔으며 특히 농촌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부의 무거운 징세에 억눌린 농민들은 굶어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집단농장에서 달아났다. 1932년 상반기에 집단농장에 속한 가구의 숫자는 러시아공화국에서 137만800가구, 우크라이나에서는 4만1200가구로 줄어들었다. 농촌지역의 사회적 불안은 심각했다.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 Объединённо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가 작성한 1931년 10월에서 1932년 3월 시기의 자료 중 일부에 따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공화국에서 총 616건의 폭동이 발생했으며 총 5만5400명이 폭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굶주린 농민들이 곡물의 강제 징발에 저항하고 정부의 곡물 저장소를 습격하는 것 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간부 중 한 명이 인민위원협의회 의장 몰로토프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폴타바 부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1932년 5월 3일 우스티노브치(Устиновцы)에서 여성 300여명 정도가 마을 인민위원장을 사로잡은 뒤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고골레보(Гоголево) 기차역으로 행진한 뒤 그곳의 창고 문을 때려 부쉈다. 처음에는 창고 관리인이 소화기를 뿌려 군중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여자들은 소화기를 뿌리자 유독한 가스라고 오인했다. 그러나 다음날 농민들은 다시 몰려들었다. 무장한 경찰과 정치보안부에서 파견한 인력이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파견되었다. 창고에 있던 곡물들은 다음날 이송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5일, 챠스니코브카(Часниковка) 마을에서 출발한 비슷한 숫자의 여성들이 센챠(Сенча) 기차역의 창고를 습격해 밀가루 서른 일곱 자루를 가져갔다. 5월 6일에는 바로 전날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농민들이 기차역을 다시 습격해 150푸드(пуд, 약 2.5톤)의 밀을 털어갔다. 공산당원들은 허공에 총을 쏘며 농민들을 해산시키려 하다가 그냥 달아나 버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 50명의 무장 경찰과 공산당원들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약 400명의 군중들이 역에 몰려들어 화물차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5월 7일에는 기마 경찰과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더 많은 농민들을 상대해야 했다.
5월 5일 에는 사가이닥(Сагаидак) 기차역에서 약 800명의 군중이 곡물창고를 지키고 있던 경찰 두 명과 마을 당원들을 습격해 창고 문을 열었다. 이들은 약 500푸드의 곡식을 빼앗아 이 중 400푸드를 현장에서 배분한 뒤 나머지 100푸드를 가지고 갔다. 5월 6일에는 리만(Лиман)과 페둔키 마을의 농민 400여명이 곡물을 약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났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42~43
밥 굶은 아줌마는 정말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