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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2007년 1월 17일 수요일

17-18세기 프랑스 군대와 여성

중세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민간인을 달고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에는 군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상인, 장인, 그리고 대포를 조작하는 기술자(17세기 이전까지 대포는 민간인 기술자가 발사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체계적으로 포병을 양성한건 프랑스가 최초라고 하지요), 약간의 거지와 건달, 그리고 잡일을 거들거나 매춘을 하는 여성이 포함됐습니다. 16-17세기 유럽 군대를 연구한 저작들을 보면 이 시기의 군대에는 전투원의 1.0~1.5배 정도의 민간인이 따라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여성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숫자였을 것 이라는게 군사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G. Parker나 J. Lynn등등) 17세기 중반까지도 여성들은 전투 부대를 따라다니며 식사 준비, 빨래, 간호 등의 일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예산을 무지막지 잡아먹었다는 점 입니다.

프랑스 군대도 이 점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대들과 비슷했습니다. 루이 14세 때까지 프랑스군 병사들은 허드렛 일을 거들 하인(goujats)를 거느리는 것을 법으로 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사관 정도면 두 명 까지 거느릴 수 있었다는군요. 이 경우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례가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 빨래도 해주고 밤일도 해준다면야 나쁠게 없겠죠. 여기에 외국인 용병들은 가족을 달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들은 부대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한 독일인 부대는 부대와 같은 숫자의 가족을 달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죠.
루이 14세는 부대비용 절감을 위해 전투 부대에 딸린 여자의 숫자를 줄여보려 노력했습니다만 이걸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 했습니다. J. Lynn에 따르면 루이 14세가 요단강을 건너간지 한참 지난 1772년의 기록에 프랑스군 전체에 걸쳐 보병 1개 대대당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여성이 잡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빨래 같은 잡다한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야전 지휘관들은 여자들이 전쟁터로 따라 오는 것을 좋게 봤다지요.
잡일을 거드는 여성 외에 vivandieres라고 불리는 여성 잡상인(?)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부대를 졸졸 따라다니며 술, 담배를 판매했다고 하는군요. 술과 담배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들 잡상인들은 부대 주둔지 내에 천막을 치고 영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야전 지휘관들로부터 보장 받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병사들의 결혼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반 사병들은 결혼하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대신 결혼할 경우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월급도 아까운데 거기다가 입을 더 보태는게 좋게 보일리는 없었겠지요. 특히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둔지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은 다른 지역 여성과의 결혼보다도 엄격하게 금지됐습니다. 장교도 비슷한 규정을 적용 받았다고 하지요. 기혼자는 모병 대상에서 엄격히 걸러졌기 때문에 루이 14세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육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년전쟁 시기인 1630~40년대의 프랑스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40%~45% 정도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태양왕 시기에 기혼자 비중이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결혼 자체는 엄격하게 통제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할 경우에는 군인 가족의 복지에 일정한 혜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1706년에 병사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부대 관사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듭니다.

이 밖에 전투원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꽤 재미있는 이야기이니 따로 다루는게 좋을 것 같군요.

2006년 9월 1일 금요일

루이 14세 - 프랑스 보병의 현대화를 가로 막다

굳이 말 안해도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성능이 좋은 신무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높은데 계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짱 황인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프랑스의 자아도취 지존 루이 14세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 뿐 아니라 군대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간섭은 늘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진 않았는데 프랑스 군대가 수발총으로 무장을 교체하는 것이 다른 국가들 보다 뒤졌던 이유 중 하나가 루이 14세의 간섭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군대는 9년 전쟁 이전까지도 각 연대의 척탄병 중대만이 완전히 수발총을 장비 했을 뿐 일반 보병의 수발총 장비는 네덜란드 보다도 뒤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리슐리외 시기인 1640년대에 수발총을 도입한 것을 감안하면 지독하게 보급이 느렸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가 수발총 보급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1680년대 중반 기준으로 프랑스에서는 수발총의 가격이 16리브르, 기존 머스켓은 9리브르였다. 여기에 루이 14세가 수발총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으며 전쟁상 루부아가 이런 국왕의 성향에 부채질을 했던 모양이다.
무엇 보다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데 인건비만도 장난이 아니게 들어갔기 때문에 비싼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
그 결과 일반 보병 중대의 수발총 장비율은 극도로 낮았는데 1670년 편제에 따르면 일반 보병 중대는 수발총 사수가 네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척탄병이었다.

그러다가 9년 전쟁에서 수발총을 대량으로 장비한 적들에게 여러 차례 쓴 맛을 본 뒤에야 뒤늦게 수발총 보급을 늘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됐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의 골치거리인 영국 또한 수발총의 보급이 상대적으로 느렸는데 1690년대 까지도 영국군 보병의 약 40%는 화승식 머스켓을 장비했다고 한다.

꽤 재미있는 것은 루이 14세가 젊은 시절 무기 설계에 관심이 많아 몇 종류의 머스켓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다들 손재주가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