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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9일 수요일

레마겐 교두보 전투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 해임에 관한 잡설

포스팅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에 문기야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레마겐 교두보 전투 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이 해임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육군 공간사 The Last Offensive는 레마겐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와 밀리킨 소장John Millikin의 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군사령관 하지스 장군은 작전 초기 부터 레마겐 철교와 교두보를 담당한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의 지휘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스와 제1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라인강 양안에 배치된 미군부대에 대한 통제가 형편없으며 라인강 동안의 미군부대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3월 9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의 진격이 느리고 독일군이 육안관측으로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할 수 없도록 공세를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밀리킨 장군은 3월 9일 제9기갑사단장 레오나드 장군에게 레마겐 철교 일대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제하도록 하고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모두 제9보병사단장 크레이그 장군이 관할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하지스 장군의 불평은 끊이질 않았다. 제3군단은 얼마전 까지 패튼의 제3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군 사령부는 밀리킨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스와 그의 참모진은 공공연하게 “레마겐 교두보 일대의 지휘를 7군단장 콜린스 장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리킨 장군이 직면한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직접 레마겐 다리까지 나가 지휘했지만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실시된 작전의 경우 초기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지원 부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통신부대가 부족했다. 차량통행이나 포격으로 레마겐 철교에 부설한 전화선은 자주 끊어졌고, 파편이나 라인강의 빠른 물살 때문에 강을 따라 가설한 전화선도 제 기능을 못했다. 레마겐 철교가 혼잡했기 때문에 연락장교들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전통신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레마겐 교두보로 재배치된 보병부대들은 도착하는 대로 시급히 필요한 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심지어 연대단위 편성 조차 유지하지 않은채 투입하기도 했고 여러 사단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게 다반사였다. 작전 자체가 짧은 시간동안 우발적으로 일어난데다 지형 문제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런식으로 부대를 운용하니 문제는 더 커졌다.
밀리킨 장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것 보다는 체계적이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월 8일에 3단계에 걸쳐 교두보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단계는 레마겐 철교의 북쪽과 남쪽으로 2.5마일을 진격해 독일군이 더이상 철교를 소화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단계에 확장의 목표는 독일군의 포병관측을 중단시키는 것 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북쪽으로는 본Bonn, 남쪽으로는 안더나흐Andernach,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독일군이 교두보를 더이상 포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략) 

밀리킨 장군은 교두보가 확대되는 경과를 바르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교두보의 부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란Lahn 강 유역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카셀Kassel 회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해 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에 두기로 했다. 이것은 앞서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동의한 것 이었다. 밀리킨은 이렇게 해야 독일군이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하는 것을 가장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이 제일 먼저 북쪽으로 진격해 콜린스 장군의 제7군단의 도하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전 4일차인 3월 11일까지도 이 점을 밀리킨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날 밀리킨은 처음으로 철교를 건너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로 갔다. 하지스는 3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하며 주공을 이 방향에 두어야 한다고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밀리킨은 이정도의 언급만으로 하지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제78보병사단의 정면을 축소하고 제9보병사단의 대부분을 북동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12일 교두보 남쪽과 동남쪽을 인계받기 위해  제99보병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밀리킨은 제99보병사단의 부대들을 원 소속사단으로 복귀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북쪽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 장군은 제130보병사단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미군에 대한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넌 미군이 레마겐 교두보에 증원군을 더 투입한다면 미군을 격퇴할 만한 병력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델 원수의 판단 덕분에 밀리킨 장군이 주공을 투입한 지구에서 미군의 진격은 둔화됐다. 이때문에 하지스 장군은 계속해서 밀리킨의 지휘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그동안 레마겐 교두보는 꾸준히 확장됐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의 지휘방식을 여전히 불신했다. 그는 3월 15일에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을 만나 밀리킨을 해임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브래들리는 하지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밀리킨의 후임을 알아보라고 한 뒤 제1군 사령부를 떠났다. 이틀 뒤 제90보병사단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소장이 제1군 사령부에 도착해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하지스는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리고 하지스는 밀리킨이 제3군단장에서 해임됐다고 통보했다. 밀리킨은 하지스가 말을 마칠때 까지 기다렸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Charles B. MacDonald, The Last Offensiv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 pp.223~229.



이 일화를 보면 하지스라는 인물은 꽤 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밀리킨 장군이 애초에 제3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으로 한 것은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스가 상급 사령부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이죠. 미육군 공간사의 서술을 보면 확실히 밀리킨 소장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밀리킨 소장의 해임이 결정된 3월 15일에 있었던 브래들리와 하지스의 회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1945년 3월 15일자 제1군 사령관 일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경 브래들리 장군은 참모장 앨런 장군을 대동하고 제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어제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아직 별 세개만을 달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과 하지스 장군, 그리고 참모진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비공개로 회의를 한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라인강 서안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교두보를 동쪽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서는 안된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SHAEF의 공식 방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은 이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북쪽에서 대규모 도하를 하기 전에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몽고메리가 전화를 걸고 5분 뒤에 미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더이상 양동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장 앨런 장군은 패치 장군이 패튼 장군에게 보낸 전문 이야기를 꺼냈다. 패치와 패튼은 서로 즐겁게 장난을 쳤다. 패치 장군은 “제3군이 라인강에 꼴지로 도착한 것을 축하함. 그럴 줄 알았음.”라는 전문을 보냈다. 패튼 장군은 답신으로 “라인강을 첫 번째로 도하할 부대가 전문을 보내줘 정말 감사함.” 그리고 브래들리 장군은 독일 장군 세명이 항복하기 위해 미군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농담을 꺼냈다. 독일 장군들은 대공포병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적의가 없으며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이려고 루거 권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미군들은 루거 권총을 얻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장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우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레마겐 교두보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로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나빠졌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쪽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쪽을 선호했고 우리 제1군이 확보한 교두보에 중점을 둘 의도가 없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과 밀리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제3군단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사람은 밀리킨 장군이 유능하긴 하지만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하지스 장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까지는 레마겐 교두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밀리킨 장군은 패튼 장군 휘하에 있을때도 의견 충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패튼은 제3군단을 제1군에 떠넘긴 것이다. 새로운 제3군단장 후보로는 하몬Ernest N. Harmon, 밴 플리트, 개피Hugh Joseph Gaffey 등이 거론됐다. 하지스 장군은 하몬 소장을 선호했지만 브래들리 대장은 제15군 사령부가 하몬 장군의 인사이동에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제3군단은 아직 하지스 장군의 의도대로 고속도로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0.5마일만 더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다. 오늘 제99보병사단이 돌출부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제9보병사단) 60보병연대는 로르샤이트Lorscheid를 점령했으며 (제9보병사단) 47보병연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채석장을 점령하고 장교 2명과 사병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교두보 전체에 걸쳐 약 2,000야드를 진격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9보병사단의 성과가 평소 사단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약간 불만을 표했다. 하지스 장군은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19-4639.


이 일지에서도 하지스 장군이 상급 사령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이 잘 나타납니다. 제1군이 라인강돌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영국군인 몽고메리를 정치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리고 최대한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제3군단장 밀리킨 소장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밴 플리트 평전 『승리의 신념: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에서는 밀리킨의 보직해임에 대해 미육군 공간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다른 서술이 하나 보입니다. 이 부분도 직접 인용을 하겠습니다.



바로 이날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은 보직해임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영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하지스 장군과 존 밀리킨 장군간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밴은 과거에 패튼 장군이 자신 앞에서 ‘벌지’ 전투에 임하는 밀리킨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한 사실을 기억하였다. 이제 밴 플리트 장군은 밀리킨이 물러나고 자신이 그 공백을 메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밴은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휘권인수가 좋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1군사령부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준비시켰다. 브래들리의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밴 플리트 장군은 가볍게 짐을 꾸리고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대동한 채 지휘관 전용항공기에 탑재 가능한 지프 1대만을 싣고 제1군사령부로 향했다. 

밴 플리트가 도착하여 신고를 마치자 하지스 중장은 그에게 밀리킨 장군을 대신하여 제3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밀리킨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라고 하지스가 말했다. 이에 밴은 “밀리킨도 제가 제3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지스는 “아니, 자네가 가서 직접 말하게. 밀리킨에게 제1군사령부로 출두하라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하며 급한 업무를 핑계로 돌아섰다. 밴은 자신이 직접 밀리킨 장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언짢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보직해임은 군 전통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나 하지스 둘 중 한 사람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보직해임을 통보하거나, 보다 나은 것은 직접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시키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다. 밴은 또한 그 자신이 밀리킨보다 후임이고, 몇 개월 전 제3군단의 벌지공격 때만 해도 제90사단장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난처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은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이동하였다. 

밴 플리트는 지휘소에 있던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의 소식을 전했다. 밴은 당시 밀리킨의 표정에 나타났던 충격받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으로서 보직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급장교의 경우 그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통 군 생활이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직해임의 경우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다. 설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보직해임이 부당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밴은 솔직히 밀리킨의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보직해임으로 자신이 득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밀리킨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야하는 일에 몹시 당혹해 하였다. 

밴은 불편한 심정으로 밀리킨과 함께 군단 지휘소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식을 밀리킨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밀리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밴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직해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밀리킨은 하지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지스는 그의 보직해임을 확인해 주었다. 끝내 밀리킨은 전화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레마겐의 철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1군사령부의 부대일지에는 3월 17일 하지스 장군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보직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밴이 밀리킨의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밀리킨이 하지스 장군에게 확인전화한 것을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193~194쪽.


다시 미1군사령관 일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의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후 두시에 하지스 장군은 지휘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 환영인사를 하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밀리킨 소장의 후임을 보내준 것을 아주 기뻐했다. 오후 2시 50분에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는 밀리킨에게 해임 사실을 알리고 원한다면 내일 군단사령부를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밀리킨 소장이 말했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61-4665.


하지스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밀리킨의 해임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비록 벌지전투 시기 부터 군단지휘능력에 비판을 받아왔다고는 하나 레마겐 교두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굳이 군단장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지전투 당시 미국 군단장들의 지휘방식에 대해 책을 쓴 해롤드 윈튼Harold R. Winton은 밀리킨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밀리킨이 해임된데는 그의 책임도 없지 않다. 3월 11일에 제9보병사단 참모장은 하지스 장군의 부관에게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가 혼란하기 때문에 군단장이 직접 전방을 시찰하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지만, 밀리킨은 교두보에 거의 오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밀리킨이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1군의 “일가족”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데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Harold R. Winton, Corps Commanders of the Bulge: Six American Generals and Victory in the Ardenne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p.354~355.

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에 실린 발레리 자물린의 ‘Could Germany Have Won the Battle of Kursk if It Had Started in Late May or the Beginning of June 1943?’을 번역한 것 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 장성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서방 학자들이 쿠르스크 전투의 패인을 거듭된 작전 연기로 인해 소련군이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것 입니다. 꽤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번역을 해봤습니다.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발레리 자물린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이나 6월 초에 벌어졌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이 1943년 5월 부터 6월까지 공세를 여러차례 연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특히 서구 역사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타델레 작전이 처음 연기된 것은 194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이 아직 공세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심지어 제9군은 공세를 위해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킬 시간 조차 없었다.) 이때는 모두가 공세를 연기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5월 4일에 열린 쿠르스크 공세에 관한 회의에서 공세를 다시 연기할 뜻을 밝히고 이것을 5월 6일에 공식적으로 명령함으로서 공격일이 6월 12일로 다시 연기되자 독일 국방군 수뇌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는 그가 43년 하계공세의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한 티거 전차와 판터 전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을 연기하는 것은 계속됐다. 독일의 군수산업계는 1943년 5월은 물론 6월의 첫 10일 동안에도 티거와 판터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또다시 공세를 6월 21일로 연기했다가 다음에는 7월 3일로 연기했다. 히틀러는 6월 25일이 되어서야 치타델레 작전의 개시 일자를 7월 5일로 확정했다. 바로 이날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 날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독일군 장성들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부터 공세를 거듭해서 연기한 것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육군 원수였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1951년에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를 4주나 늦게 시작했으며 ‘독일군 지휘관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공세가 너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1) 1943년 7월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벨고로드 방면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펼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955년 독일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클라이스트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치타델레 작전이 최소한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실시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이러한 주장은 주로  6월 초 까지 소련군은 겨울 전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전력도 크게 감소한 상태였지만 6월에 공세를 지연시킴으로서 소련군 수뇌부가 소모된 일선 부대들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게 됐다고 설명한다.
학계에서는 미국의 스티븐 뉴튼Steven NewtonKursk:The German View라는 저작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중부전선군을 공격한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의 자료에 근거해 이 주장을 학술적으로 가다듬었다.3)  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통계들, 특히 소련군의 각 부대별 전력에 대한 수치들이 모두 다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이 글에서는 최근 러시아 연방군 문서보관소에서 공개된 쿠르스크 전투 시기 붉은 군대의 기밀 해제된 자료들을 통해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뤄보기로 한다. 

소련군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승리를 거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 번째 이유는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에 투입된 부대들의 준비태세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최고사령부가 대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1943년 4월 부터 6월에 걸쳐 방대한 규모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첫 번째 이유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1943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그리고 1943년 7월 오룔과 벨고로드 방면에서 공격해온 독일국방군의 주공을 직접 맞아 싸운 각 야전군의 전력 보충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5월 쿠르스크 일대에 배치된 소련군의 준비태세가 높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서구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하계전역 계획과, 작전이 잠시 중단된 봄 기간에 쿠르스크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1943년 4월 12일 크렘린에서 스탈린, 소련군 부사령관 주코프 소연방 원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소연방 원수, 부참모장 안토노프 상장의 참석하에 열린 회의에서는 봄의 라스푸티차가 끝나고 땅이 마르는 즉시(대략 5월 경) 독일 국방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취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5월까지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을 최대한 보충하도록 하고, 해당 전선군의 군사위원회는 방어작전 계획을 수립하는데 총참모부와 긴밀히 협조하도록 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각각 4월 25일과 28일에 방어준비계획을 완성했다고 보고했다. 최고사령부는 두 전선군사령부에서 제출한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 계획을 승인하고4) 5월 10일까지 예하 부대들이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자를 각 사령부에 통보했는데 그 날자는 적어도 1943년 6월 1일 이내일 것이라고 보았다.5)
1943년 4월 12일에 결정된 사안들이 5월 10일까지 완료된 덕분에 소련측은 기본적으로 독일군이 쿠르스크 지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상대로 언제든지 성공적인 방어전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6월초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전력이 이미 다음달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때 확보하고 있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후술할 통계수치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정확하게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30일 로코소프스키 상장6)이 지휘하는 중부전선군에는 총 304,464명의 장교와 사병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5월 5일까지 여기에 61,167명이 증가해 총 365,641명이 되었다.7)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중부전선군 병력의 7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같은시기에 독일 제9군의 주공을 상대한 푸호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13군의 병력은 42,552명에서 114,456명으로 증가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85퍼센트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병력이 증가한 주된 이유는 제13군에 3개 사단이 증원된데 기인하지만 원래 소속되어 있던 사단의 병력도 18퍼센트로 대폭 증가했다.(평균 6,378명에서 7,527명으로) 소련 제13군이 하계 전역을 준비하던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보충병력을 받은 시기가 바로 1943년 4월이었다. 5월 29일까지 제13군에 추가로 14,701명이 증원되어 총 병력은 129,157명에 달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 한편 중부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말 451,179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되던 날 확보하고 있던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8)
바투틴 원수가 지휘하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 보충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병력은 4월 5일에 208,391명이었는데 5월 5일까지 143,068명이 증원되어 총 351,459명 또는 7월 5일까지 확보하기로 계획한 기준 병력의 84퍼센트에 달했다.9) 4월 5일에서 5월 5일까지 독일군의 주공 축선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된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에 30,262명의 보충병력이 배치되었고 총 병력은 장교와 사병 72,836명에 달했다.(예하 소총병 사단의 평균 전력은 5,982명에서 7,666명으로  28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조공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배치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중장의 제7근위군은 9,047명의 보충병력을 받아 총 병력이 67,231명으로 증가했다. 제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 사단의 평균 병력은 5,965명에서 7,600명으로 27퍼센트 증가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30일 기준으로 409,975명으로 증가했다.(7월 5일 당시 병력의 98퍼센트)  그리고 제6근위군과 제7근위군의 병력은 6월 5일 기준으로 각각 장교 및 사병 79,937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100%)과 71,332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93퍼센트)으로 증가했다.
포병 전력의 증강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중부전선군과 여기에 배속된 제13군의 야포와 박격포 숫자는 5월 6일에 이미 1943년 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에 달했다.(로켓포는 제외한 수치이다.) 5월 29일 중부전선군은 4,544문의 야포 및 대전차포와 7,161문의 박격포를 보유했는데 이것은 각각 7월 5일 보유량의 87퍼센트와 89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제13군의 좌익을 방어하며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낸 제70군은 야포 796문(7월 5일 보유량의 93퍼센트)과 박격포 1,280문(7월 5일 보유량의 98퍼센트)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 보충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부전선군은 5월 3일 기준으로 674대의 전차와 38대의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0) 이것은 7월 5일 보유량의 4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예하의 제13군은 137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1)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보유량의 64퍼센트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전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 원인은 1943년 겨울과 봄 전역에 투입된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기동부대들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던데 있다. 일부 전차군단은 총 전력이 완편 상태의 전차대대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문에 최고사령부는 3월말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소속의 기동부대들을 최우선적으로 증강하라.12)  4월 내내 공장에서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들은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에 최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이 덕분에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증강되었다. 예를 들면 1943년 4월 1일 부터 4월 15일까지의 불과 2주 남짓한 시기에 보로네지전선군 소속의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은 219대의 신품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6,432명의 병력을 보충 받았다.13)  그 결과 4월 9일에 276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던 보로네지 전선군은 4월 21일에 540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에 더해 전선군 소속의 야전정비부대들도 파손된 차량을 열심히 수리했다. 여기에 더해서 최고사령부는 4월 28일자로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중장의 제1전차군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시켰다. 북서전선군에 배속되어 있던 제1전차군은 3월에 쿠르스크 지구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제1전차군과 더불어 다른 독립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되었다.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은 5월 5일에 거의 완편상태에 도달하여 48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7월 5일까지 보충용으로 보급받은 기갑차량은 61대에 불과했다.14)
그래서 5월 초에는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전선군 보다 기갑전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5월 15일 기준으로 보로네지전선군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 1,380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수량의 76퍼센트에 해당했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의 기갑차량 보유량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했다. 6월 5일에 중부전선군은 제13군 소속의 기갑차량 171대(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를 포함해 총 1,216대(7월 5일 보유량의 72퍼센트)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다.15) 

서방의 저명한 군사학자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적 차원에서 공자가 방자에 대해 최소한 3배에서 2배의 숫적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여러 군사이론에서 말하는 공리일 뿐만 아니라 소련이 전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16) 히틀러는 치타델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기갑전력 규모에 대하여 논해 보자. 예를들어 1943년 5월 4일에 독일 제9군이 배속된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 442대의 전차(3호전차와 4호전차, 티거는 없었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71퍼센트인 314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 같은 날 남부집단군은 1,087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67퍼센트인 728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17) 그러므로 이미 1943년 5월 시점에서 이 중요한 기갑전력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의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1.5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돌출부 남쪽의 소련군은 1.3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군에게 불리한 상황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치타델레 작전에 부정적이어서 이 작전을 ‘멍청한 짓’이라고 했던 제6기갑사단장 휘너스도르프 장군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전체 작전이 ‘부대 지휘의 기초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뉴튼이 모델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주장한 것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주장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뉴튼은 1943년 5월 초 모델이 히틀러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독일 제9군과 소련 중부전선군의 기갑전력 비율을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뉴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일측의 정보평가는 소련 중부전선군이 1943년 4월말에서 5월초 사이에 전차와 자주포를 1,500여대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는 1,0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정보평가는 모델이 공세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치명적인  오류였다. 모델은 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1,500여대를 가진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세에 필수적인 기갑전력, 특히 판터와 티거를 증원해 달라고 요청할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자신 보다 200여대 정도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공세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제9군은 공세를 늦춘 결과 기갑전력이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소련군은 거의 두배나 늘어났다.” 

가장 먼저, 뉴튼이 제시한 수치와 양군의 전력비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월 초에 독일 제9군이 보유한 전차는 800여대가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전체를 통털어도 그 절반에 불과했으며 소련 중부전선군은 이에 대해 거의 1.5배나 되는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중부전선군은 674대, 독일 중부집단군은 442대 였다. 두 번째로, 유명한 1943년 5월 4일 뮌헨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모델이 보낸 서한을 회람하고 공세를 5월에서 6월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제9군에 기갑전력을 증원하는 문제는 회의의 주요 안건이 아니었다. 애초 부터 독일 제9군은 그리 많은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기갑전력은 남부집단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델의 제9군에 기갑전력을 대규모로 증원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모델은 이미 4월 초 부터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만슈타인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포병 및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전투공병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될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은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방어선이 강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불편한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제1파 공격부대가 소련군의 주 방어선과 제2방어선을 돌파해 기갑부대가 작전 공간에 돌입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제9군은  이미 5월 무렵에 방어선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을 돌파한 뒤 소련군의 방어선 종심 깊숙히 공세를 확대하는데 투입할 최소한의 기갑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소련 중부전선군의 방어선을 확실히 돌파하기 위해서 보병의 진로를 열고, 야전 축성을 격파하고, 역습에 나설 소련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중전차를 제1파 공격부대에 배속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43년 4월 초 독일 육군본부는 그달 말 까지 제9군에 티거 전차를 배치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5월 3일 까지도 티거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다. 즉 모델은 소련군의 기갑전력이 독일 제9군 보다 1.5배 우세해서 더 많은 기갑전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티거, 판터, 페르디난트와 같은 중장갑과 강력한 화력을 가진 기갑차량을 요구한 것 이었다.그리고 필자는 미국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모델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정원에 미달하는 상태였던 보병사단의 보병 전력을 보충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찾았다.18)  보병사단의 병력 보충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4월 20일에 처음으로 쿠르스크 공세 개시일을 연기했다.19) 그래서 모델 상급대장은 소련군의 방어진지 구축 상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을 첨부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내 공세 자체를 취소하던가, 아니면 보병사단에 병력을 보충하고 중전차를 보급하는 작전적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고 했다.그러므로 모델이 소련 중부전선군의 실제 기갑전력 규모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개시할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가 없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1943년 5월 상순에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전투력을 보충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각 사령부의 보고서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병력과 장비가 전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작전 부대에 배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전선군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무기와 장비 중 상당수는 여전히 보급창에 집적되어 있거나 열차편으로 하역될 기차역을 향하는 중이었다. 예를들면, 바투틴은 1943년 5월 11일 최고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보로네지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방어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췄다. 제38, 40, 6근위군, 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사단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8,000명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제69군 예하 소총병사단들의 병력은 6~7,000명 수준이다. 제35근위소총병군단20) 소속 사단들은 완편상태이다. 장비의 대부분은 수일 내로 철도편을 통해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1943년 5월 14일 밤 까지는 대부분의 무기 보급이 완료될 것이다. 이 밖에 무기를 수송하는 열차 9대가 아직 이동 중에 있어 일선부대에 도착하는 것은 5월 18일에서 20일 사이로 예상된다. 이들 열차편이 도착하게 되면 각 부대는 박격포, 대전차소총, PPSh 기관단총, 연대포는 편제의 100퍼센트, 소총은 편제의 74퍼센트, 경기관총은 편제의 57퍼센트, 중기관총은 편제의 65퍼센트, 45mm 대전차포는 편제의 71퍼센트, 76mm 사단포는 편제의 80퍼센트, 122mm 곡사포는 편제의 70퍼센트를 갖추게 될 것이다.제69군 예하 사단들은 1943년 5월 20일 까지 최소한 병력 8,000명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전차 부대들은 대부분 완편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5월 중순에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모든 부대가 높은 수준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그들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했다.(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로네지전선군은 최고사령부에 쿠르스크 지구에서 선제 공격을 취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첫번째 날자(5월 8일)가 지나가자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는 초조함을 느꼈고 적군이 공세를 취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최고사령부에 선제공격을 개시할 지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의 요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코프와 안토노프, 그리고 나는 스탈린이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말도록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21) 

하지만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들이 아직 전투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부가 먼저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바실레프스키의 증언 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을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선제공격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1943년 6월 초 소련군의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리면서 이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4월 12일 전략적 방어를 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적군의 예상 공격 축선을 특정한 뒤 1개월의 기간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부대들, 특히 주공 축선에서 작전하게 될 야전군들에 장비와 보충 병력을 보냈다. 5월 10일까지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은 계획대로 병력과 야포의 숫자라는 두가지 중요한 지표에서 7월 5일 기준의 80퍼센트를 초과했다.(기갑전력 측면에서는 각각 40퍼센트와 75퍼센트였다.) 6월 5일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총 병력이 7월 5일 기준의 98퍼센트를 넘어섰고, 야포는 거의 90퍼센트, 전차와 자주포의 숫자는 72퍼센트에서 76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므로 두 전선군은 5월 중순에는 기본적으로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 중부집단군은 같은 시기에 치테델레 작전 이전까지 보급받기로 되어 있었던 최소한의 기갑차량도 다 받지 못한 상태였다. 중부집단군 예하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들은 아직 병력과 장비를 편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하계 공세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측은 이미 5월에는 당시 독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이 5월 말 까지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만슈타인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이었다.22)  

치타델레 작전을 좌절시킨데는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아군의 준비 태세 뿐만 아니라 교모하고 종심 깊게 구축된 방어선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독일 장군들과 서방의 학자들은 독일군의 패배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을 꼽을 때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해 왔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1943년 5월에서 6월 사이 로코소프스키와 바투틴의 주요 업무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이들이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고 병사들이 방어시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훈련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초순 총참모부 검열단이 실시한 검열 결과에 따르면 보로네지전선군 방어 지구 주방어지대의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은 대부분의 방어 진지 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제2방어지대와 제3방어지대에서는 구축 방식과 형태에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결함이 발견됐다.(조명지뢰를 방어선 중간에 매설했다던가, 참호를 너무 얕게 팠다던가, 위장이 형편없었다던가와 같은) 이러한 문제점들은 6월 초 까지 대부분 개선되었다. 예를들어 제6근위군은  5월 5일까지 90,000개의 대전차지뢰 중 17퍼센트, 64,000개의 대인지뢰 중 16퍼센트 만을 매설했다.(7월 5일 까지는 모두 매설됐다.) 제7근위군 지구도 비록 인접 부대에 비하면 사정이 나았지만 5월 16일까지도 지뢰 매설이 크게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까지 대전차지뢰 65,000개 중 22.4퍼센트, 대인지뢰 84,000개 중 16.9퍼센트가 매설되었다.23) 그러나 6월 5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6근위군은 대전차지뢰는 계획량의 50퍼센트, 대인지뢰는 계획량의 62퍼센트까지 매설했다. 제7근위군은 대전차지뢰 46.2퍼센트, 대인지뢰 35.7퍼센트를 매설했다.그러나 5월까지 지뢰 매설이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방어선의 전차가 기동가능한 지역이 독일군의 기갑차량들에게 활작 열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주방어지대 전방과 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각 방어지대 사이와 제2, 3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남아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봄의 진흙탕으로 물자수송과 공병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폭약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4월 말 부터 폭약류의 보급이 지체되기 시작했고 각 전선군 사령부는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물자, 특히 독일제 포탄과 지뢰 같은 노획 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획 물자를 사용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주관적인 요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1943년 6월 18일 붉은군대 공병감 보로브예프 중장은 명령49호를 하달했는데 이 명령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5월 23일에 보로네지전선군이 관리하고 있던 보로네지 지구의 대전차지뢰 임시야적장에서 폭발이 있었다. 보로네지전선군은 이곳에 2,700개의 대전차지뢰를 모아두고 있었다. … 독일제 T-35 대전차지뢰들은 뇌관이 없는 상태로 수송됐으며 기폭장약이 들어있는 상태로 낱개 단위로 야적장에 쌓여 있었다. 폭발의 원인은 쌓여있던 지뢰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노무자들은 사전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제 지뢰의 폭발 방식과 취급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참모진은 운반 작업을 조율하거나 감독하지도 않았다. 이 폭발로 지뢰 2,700개와 트럭 2대가 파괴되고 군인 7명과 야적장 부근에 있던 민간인 노무자 15~20명이 사망했다. 대전차지뢰 야적장은 교통량이 많은 주요 보급로에 인접해 있었다.”24)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두 전선군의 방어선 구축은 거의 70퍼센트 가량의 완공율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1943년 6월 1일 이후로는 독일측이 치타델레 작전을 계속 연기했더라도 5월 초와 마찬가지로 붉은군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쿠르스크 돌출부의 양쪽에 집결한 독일군은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에 대해 군사이론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필수 요소로 꼽는 숫적 우세를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수의 병력, 기갑차량, 야포를 확보할 수 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43년 5월이 되면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후방의 스텝군관구에는 상당한 규모의 최고사령부 예비대가 집결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1943년 5월이건 6월이건 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쿠르스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이 치타델레 작전을 여름이 시작될 무렵 개시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저 불리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헌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을 비롯한 서방측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관점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만슈타인 본인도 독일군 수뇌부가 쿠르스크에 배치된 소련군의 전투력을 오판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전후에 소련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1943년 하계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측이 전시동원과 군수산업에서 그토록 뛰어난 조직 역량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붉은군대야 말로 머리 하나를 자르면 새로 두개의 머리가 생기는 ‘히드라’ 그 자체라고 평했다.25)


주석

1) V. Khristoforov, V. Makarov, and B. Khavkin, ‘Fel’dmarshal fon Kliest na Liubianke’ [Field Marshal von Kleist in the Lubianka Prison], Rodina 6 (2010) p. 94.  
2) E. Manstein, U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3 
3) S. Newton, Kurskaia bitva nemetskii vgliad [Kursk: The German View] (Iauza, EKSMO, Moscow, 2006), pp. 463–476. 
4)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 TsAMO RF, F.16-A, Op.321, D.138. 
6) 로코소프스키는 1943년 4월 28일에 원수 칭호를 받았다.  
7) TsAMO RF, F.62, Op.1720, D.14,L.23. 
8) TsAMO RF, F.16-A, Op.321, D.138. 
9) TsAMO RF, F.203, Op.2843, D.425, L.425. 
10) TsAMO RF, F.62, Op.321, D. 16, L. 86obr. 
11) TsAMO RF, F.62, Op.321, D.16, L.86. 
12) 최고사령부 지령: 제23전차군단과 제2전차군단, 제1근위기계화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 46090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자 46091호, 제3근위전차군단을 제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2호, 제1근위’돈’전차군단, 제12전차군단, 제15전차군단, 제18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3호.  
13) V. N. Zamulin, Kurskii izlom: Reshaiushchaia bitva Velikoi Otechestvennoi [쿠르스크의 전환점: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투 (Iauza, Eksmo, Moscow, 2008), pp. 101–102.  
14) TsAMO RF, F.203, Op.2843, D.426: ‘Boevoi sostav 6 gv., 7 gv., 40, 38 A, 1 TA za 5 maia i 5 iulia 1943’ [1943년 5월 5일과 7월 5일 제6근위군, 제7근위군, 제40군, 제38군, 제1전차군의 전력]. 
15) TsAMO RF, F.62, Op.321, D.16, L.127, 127 obr. 
16) D. Glantz and D. House, Kurskaia bitva: Reshaiushchii povorotnyi punkt Vtoroi mirovoi voiny [쿠르스크 전투: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 (Astrel’, Moscow, 2006), p. 80. 이 책은 글랜츠와 하우스가 쓴 The Battle of Kursk (University Press of Kansas, Lawrence, KS, 1999) 러시아어 번역본이다. 
17) 군사사연구소(IVI) 부속문서고 , F.191, Op.233, D.108. 1943년 5월 3일 부터 1944년 6월 1일 까지 기갑총감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한 보고, 제1편, 소연방 총참모부 군사사국, 1947, pp. 6–7. 
18) NARA, T.312. R.317.F.7886042, 7886046. 
19) NARA, T.312. R.317. F.7886050. 
20) 전선군사령부의 예비대였다. 
21) A. M. Vasilevsky, Delo vsei zhizni, Kn. 2 [Cause of an Entire Life, Book 2] (Politizdat, Moscow, 1988), p. 24. 
22) E. Manstein, Poteriannye pobedy, p. 543. 
23) TsAMO RF, F.38A, Op.9022, D.5, L.21. 
24) TsAMO RF, F.69A, Op.10751, L.11, Ll.37, 38. 
25) Manstein, Po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6.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