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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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버가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비판에 반박하자 홈즈도 다시 재반론을 합니다. 사실 주버의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는 제목부터 그렇고 내용에서도 도발하는 면이 없지않았는데 홈즈도 새로운 반론에서 날을 살짝 더 세웁니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홈즈는 반박문의 도입부에서 주버가 1914년 여름 소 몰트케가 취한 전략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 대해 비판하는게 아니라 주버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빈정거립니다. 홈 즈 자신은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 비슷하게 우익을 통한 포위기동을 실시하려 했다고 설명했는데 주버는 이것을 싹 무시하고 홈즈는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슐리펜 계획으로 회귀한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 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8월 27일 소 몰트케가 제1군에게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일이 없는데 주버는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멋대로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홈즈의 반론은 처음에 했던 반론과 동일합니다. 주버가 계속해서 사료를 오독하고 자신의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슐리펜 계획이 무조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 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의 계획은 매우 융통성이 강한데 주버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버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는 홈즈가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는데 홈즈는 주버야 말로 사료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초기 부터 우익에 주력을 두고 베르덩-벨포르(Belfort) 를 잇는 프랑스군의 요새선을 포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안에서는 돌파의 중점이 메지에흐(Mézières)-라 페레(La Fère) 방면이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 이지요.
다음으로는 1905년 비망록에 대한 주버의 주장을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독일군의 병력 부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일단 존재하지 않는 사단으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을 위해서는 80개 보병사단과 16개 보충사단(Ersatz-division)이 필요한데 1905/06년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에는 72개 사단만이 배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이에 대해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일반적으로 해당 년도의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즉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1906년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의 작성은 그 전해의 1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즉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1905년 12월 경에는 이미 1906/07년의 부대전개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에는 26개 군단과 12개 예비군단, 3개 예비사단 등 총 79개 사단이 배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볼프강 푀르스터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이라는 점 입니다. 즉 주버가 선행연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8개 군단에 해당되는 병력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홈즈는 전시에 동원되는 예비병력으로 부족한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슐리펜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슐리펜은 이미 1891년부터 이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전쟁성은 예산 문제로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총참모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8개 군단의 편성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전시에 예비군을 대량으로 동원해 신규부대를 편성할 생각을 했다는 점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습에서 슐리펜은 당시 동원 가능했던 19개 예비사단 대신 16개 예비군단(32개 예비사단)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이 96개 사단이 있더라도 서부전선의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점을 들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일 가능성을 부정했는데 홈즈는 이것도 주버가 전후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8개 보충군단(Ersatzkorps)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의 독일군이며 8개 보충군단만 편성되면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생각하고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면전쟁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슐리펜계획은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에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먹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독일 정보당국이 러시아군의 동원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슐리펜이 가장 신경쓴 것은 러시아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질이었다. 홈즈는 그 근거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러시아군을 평가한 몇 편의 문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이 남긴 문서를 보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대해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작성이 되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모로코 위기 당시 러시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홈즈는 첫번째 반론에서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들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분석하면 슐리펜이 이 무렵부터 우익을 강화해 포위섬멸전을 펼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한 재반론에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 반격을 통해 격파하는 방안을 더 중요시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실시한 뒤 프랑스군을 로렌에서 격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히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할 경우 국경의 요새선으로 퇴각할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 경우 독일은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은 1904년 참모부연습의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강력한 우익으로 포위기동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는 것 이지요.
1904년의 두 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홈즈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두 번째 참모부 연습은 1905년 비망록과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우려한 것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 독일측에서 로렌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공세를 중단하는 것 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지적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오자 우익에서 2개 군을 차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이 맡은 임무는 프랑스군의 2선급-3선급 부대에 대한 견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주버의 해석이야 말로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슐리펜이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우익만 가지고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쵤너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쵤너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라 페레, 랭스 방면까지 공격하는 것이 명백하며 이것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 즉 서부와 동부 양면에서 전략적 방어를 취했던 워게임에 대해서는 주버의 설명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무엇보다 주버가 1905년 겨울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오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의 논평 중에서 “Wir würden demnach zu bekämpfen haben…”이라는 구절을 주버는 "Therefore we will have to fight against..."로 번역하는 오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해석하면 "Thus we would have to fight against..."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슐리펜은 양면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훈련에서 가정한 상황이 모두 현실화 될 경우에 양면전쟁을 치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게다가 슐리펜은 논평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홈즈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이를 위한 실제 전쟁계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