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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3일 수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서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 중 이 논쟁에 새롭게 참여한 로버트 폴리의 논문을 소개했습니다. 로버트 폴리는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이라는 논문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수립 시기를 1899-1900년으로 높여 잡았습니다. 테렌스 주버는 새롭게 논쟁에 개입한 폴리에 대해 War in History 2004년 2호에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이라는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2)
주버의 반론

이 논문은 총 6쪽으로 매우 소략합니다. 주버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은 6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안입니다. 하지만 주버는 1899년 4월 1일부로 효력을 발휘한 부대전계계획 I은   불과 6개월도 못되어 수정안이 등장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의 주장과는 달리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에는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과 달리 슐리펜은 1898년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전쟁 초기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쪽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테렌스 주버가 주사료로 활용한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주버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고 있던 1930년대에는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는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디크만의 연구는 1904년까지 작성하다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빌헬름 디크만이 실제로 1905년 이후의 전쟁계획에 대한 ‘1차사료’를 확인했는지는 불확실 하다는 것 입니다. 테렌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독일 군부가  1920년대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기밀자료였던 전쟁계획을 볼 수 없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유지하려는 군 고위층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폴리가 제기한 병력 규모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폴리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 23개 군단(46개 현역사단)과 19개 예비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96개 사단을 명시하고 있는데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은 물론 실제 독일군의 병력은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1899년 4월 1일의 부대전개계획 I은 65개 사단, 그리고 1914년에 실제로 동원 가능했던 것이 72개 사단이니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치더라도 독일군의 병력은 24개 사단이나 부족하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를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전투서열 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가장 중요한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도 중요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주버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우익과 중앙의 병력 비율이 거의 1:1 수준인데 슐리펜 계획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프랑스군이 아르덴느로  선제공격해 올 경우 역습에 나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하다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 비망록의 유사성은 돼지와 말의 유사성 정도이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이 우익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정도는 돼지와 말의 유사성이 다리 네 개를 가진 정도인 것과 같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문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독일이 서부전선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함으로써 우익으로 병력을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요새가 건설중이라는 것은 당시의 슐리펜도 알고 있었을 텐데 요새가 완성된 이후에야 슐리펜 계획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들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 완성되었다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 요새들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는 것 입니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원래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계속해서 1-8을 연재해야 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일단 2003년에 들어와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버와 홈즈의 논쟁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부터는 주버와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 그리고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간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2003년 부터 시작된 테렌스 주버와 로버트 폴리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Here comes a new challanger!!!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독일 군사사를 전공하던 로버트 폴리가 새롭게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폴리는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10-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폴리의 주된 논점은 슐리펜 계획의 실체는 인정하되 그 형성 시기를 훨씬 이른 시점으로 잡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미 1899년의 전쟁 계획에서 부터 슐리펜 계획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다이믈링(Berthold von Deimling)의 회고록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이믈링은 1900년 중령 계급으로 총참모부에 발령받아 전시 전투서열 작성의 감독과 전시 부대전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업무인 만큼 슐리펜의 전쟁 계획 수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이믈링은 1930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가 총참모부에 발령받았을 때 이미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폴리는 다이믈링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계획은 바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 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 할 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는데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이고 부대전계획 II는 동부전선에 조금 더 중점을 두는 계획입니다. 폴리는 주버와는 달리 부대전개계획 I이 서부전선에 집중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조건에서 양면전쟁도 고려한 계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이 해석은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23개 정규군단, 19개 예비사단, 11개 기병사단, 13개 향토여단(Landwehr brigade)+1개 향토연대를 집중하고 동부전선에는 소규모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이것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과 유사합니다.

한편, 슐리펜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을 염두에 두고 1898년 10월에 작성한 대 프랑스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개전 2주에서 3주차에 동원을 완료한 뒤 선제공격을 개시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슐리펜은 독일의 동원 완료는 4주가 걸릴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군의 주공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를 거쳐 독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들여서 우익의 1군과 2군, 그리고 좌익의 6군으로 양익 포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1군과 2군은 포위 섬멸을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또한 국경의 요새지대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군은 전쟁준비가 잘 되어 있고 프랑스로 이어지는 유라(Jura) 산맥은 요새화가 되어 있어 돌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먼저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군과 2군이 마스(Maas)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요새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1군과 2군의 좌익은 3군(4개 군단+2개 예비사단) 이, 우익은 7군(6개 예비사단)이 엄호합니다. 그리고 우익을 엄호하는 3군은 1군과 2군을 후속해 마스강을 도하합니다. 한편 8개 군단으로 구성된 4군과 5군은 자르브뤼켄(Saarbrücken)과 자르부르크(Saarburg)를 잇는 선에 전개해 상황이 유리할 경우 낭시(Nancy) 방면으로 진출, 낭시 동쪽의 요충을 점령한 다음 낭시와 툴(Toul)-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6군(4개 군단+6개 예비사단) 은 상 알자스에 전개해 독일군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군이 공격해 온다면 동부전선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하면 서부전선에서 증원군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폴리는 이것이 1905년 비망록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익에 12개 군단과 8개 예비사단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다음으로 우익의 우회기동도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것 보다는 훨씬 작아서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 포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슐리펜 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포함해 기존의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의 완성 시점을 훨씬 내려 잡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은 해당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한 것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1899/1900년의 부대전개계획과 1905년의 비망록 모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먼저 1898/1900년 계획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해 올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1905년 비망록은 그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1905년 시점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 없이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에서 독일군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의 병력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계획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1899년의 14호 계획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 19개 군단과 12개 예비사단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병력을 밀집 배치하고 그 좌익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우회기동을 큰 규모로 실시하지 않더라도 포위 섬멸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898년에 14호 계획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필자는 이 정보가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 지만 프랑스가 1903년 3월 15호 계획을 채택하자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39개 보병사단과 12개 예비사단, 8개 기병사단을 4개 야전군으로 편성했는데 이 중 제4군을 독일군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침공을 대비해서 보다 북쪽으로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1905년 시점에서 독일군은 15호 계획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프랑스군이 독일군 우익의 돌파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의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독일군의 우익을 더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요새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알자스와 로렌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따라 메츠, 디덴호펜(Diedenhofen, 프랑스 명 티옹빌Thionville), 스트라스부르크의 요새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부터는 신형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를 강화하는 공사가 수행되었습니다. 폴리는 국경지대의 요새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그만큼 더 우익의 공세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로버트 폴리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이 이미 1899/1900년에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테렌스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시점을 1904년 이후로 보는 것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안녕하세요.

진도가 참 안나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직도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2010년 말에 테렌스 주버가 테렌스 홈즈를 비판하는 논문을 또 냈습니다. 한마디로 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초장기 연재가 되겠군요. 일단 지금까지 나온 논문과 책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매우 게으르다는 점도 문제군요.

2003 년 부터는 홈즈 외에도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논쟁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지만 이 연재물에서는 논쟁을 시간 순서대로 다루기 보다는 개별 연구자별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합니다. 일단은 현재까지 진행 중인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 논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지난번 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에 서는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인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을 소개했습니다. 테렌스 홈즈는 주버의 반론에 대해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대응합니다.

먼저 지난번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테렌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홈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1. 테렌스 홈즈의 주장에 따르면 슐리펜 계획에서 독일군 주력, 즉 독일군 우익이 파리를 우회해서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조직적으로 후퇴할 경우 취하는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학설들은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하는 것이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테렌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홈즈가 예로 든 21, 22군단과 근위예비군단은 이미 1902년에 서류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이 부대들을 편제에 맞춰 편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슐리펜은 항상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숫적으로 위협적인 규모였으며 슐리펜은 이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상 동부전선을 비워두고 서부에 주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4. 홈즈는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참모부 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 지역이다. 이 시기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 기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5.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과 소몰트케가 입안한 계획은 유사하지 않다.


홈즈는 War in History 10-4에 기고한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주버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서 주력부대가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냐의 문제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에 나선다면 독일군 주력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슐리펜은 그럴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의 예상 반응에 대해 여러가지 예측을 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프랑스군이 수세로 일관하되 독일군 주력이 메지에흐(Mézières)-덩케르크 선에 도달할 경우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주력이 엔(Aisne)-랭스(Rheims)-라 페레(La Fère)를 잇는 선에 도달했을 때 측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라 페레 방면으로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프랑스군이 조직적으로 철수를 단행할 경우인데 이때는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해 최대한 독불국경 가까운 곳에서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할 기회를 포착하길 원했으며 프랑스군이 새로운 방어선 까지 퇴각하는 것은 독일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여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를 실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Oise) 강을 건너는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 강을 도하할 경우 파리 동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것은 프랑스군의 주력이 공세에 나서고 독일군 주력은 우아즈 강을 건너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방어에 주력하면서 조직적으로 철수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주버가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비판한 독일군의 가용병력 문제입니다. 홈즈는 먼저 주버가 지적한 Kriegskorps문제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비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자신이 푀르스터의 연구를 잘못 이해했지만 주버도 푀르스터의 주장과 자신이 잘못 인용한 푀르스터의 견해를 혼동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푀르스터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푀르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0개 예비사단이 있었으나 1906/07년 부대전계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으로 가용병력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푀르스터의 주장을 교차검증할 사료가 없다는 주버의 비판에 대해서는 독일의 1차대전 공간사(Der Weltkrieg 1914 bis 1918)중 전시동원을 다룬 Kriegsrüstung und Kriegswirtschaft 1권을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독일의 공간사에 따르면 독일군의 예비사단이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27개 사단으로 증가했으며 이것은 푀르스터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것 입니다. 또 한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이 971개 대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명시된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을 대대로 환산하면 970개 대대가 되므로 푀르스터의 주장은 타당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1905년 비망록에서 1906/07년 부대전개계획 보다 2개 사단이 더 많은 53개 현역사단과 28개 예비사단을 명시한 것에 대해서는 전시동원이 이루어질 경우 추가로 편성되는 사단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1개 현역사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04년에 2개의 Kriegskorps가 해체되면서 여기에 소속될 여단과 연대 일부는 남아서 다른 군단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이러한 여분의 부대를 유사시 통합하면 신규 사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자스의 15군단은 1개 보병연대를 더 가지고 있었고 로렌의 16군단은 1개 보병여단을 더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통합하면 1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는 전시에 16군단 예하에 43사단이 편성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개 예비사단에 대해서는 예비 보병대대들을 통합해 편성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슐리펜은 이 정도 병력도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하는데는 부족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이 시작되는 대로 8개의 보충군단(Ersatzkorps)를 편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도 병력이 여전히 부족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 슐리펜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세초기에는 우익에 23개 현역군단이 투입되고 공세가 진행됨에 따라 좌익에 있던 2개 군단이 추가로 우익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진격이 계속되어 우아즈강에 도달할 무렵 후방은 예비군단과 향토여단(Landwehr-birgade)이 담당하게 됩니다. 우선 안트베르펜 공격에 최소 5개의 예비군단을 투입하고 주력부대가 공격하지 않고 지나간 요새들을 견제하는데 14개의 향토여단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주력 부대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하는데 2개 예비군단과 1개 예비사단, 2개 향토여단을 배정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을 실시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합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8개의 보충군단을 더 편성한다면 이중 6개 군단을 파리 봉쇄에 사용하고 주력인 현역부대들은 우회하면서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을 적시에 동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데 홈즈는 슐리펜이 의문을 가진 것은 기술적으로 보충군단 중 몇개를 우익에 투입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동쪽으로 우회 기동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이 사실상 슐리펜이 총참모장에서 퇴임한 이후 작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부대 운용에 대한 권한이 없는 슐리펜이 보충군단 편성과 같은 신규 부대 편성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8개의 보충군단 편성은 바로 1904년 참모부연습에서 편제상에 없던 신규부대를 동원한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반박합니다. 즉 슐리펜은 이미 현역시절 부터 유사시 부족한 병력을 신규부대 동원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반영됐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양면전쟁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비록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의 취약점이 폭로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여전히 유럽전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프로이센을 텅 비워두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에 크게 의존해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과 동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I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중 서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 I에서는 동프로이센에 10개 사단을 남기고 주력을 서부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버는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I를 중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디크만의 연구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양면전쟁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독일군의 부대 전개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므로 디크만의 연구는 한계가 있습니다. 홈즈는 주버도 인용한 1905/06년의 계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 동부전선에 10개 사단, 서부전선에 62개 사단을 배치하지만 전쟁이 서부전선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72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서 81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부대전개계획 I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설 역량이 감소했다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방어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네 번째로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결전이 아르덴느와 로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홈즈는 이 주장에 대해서 뵈티허(Friedrich von Boetticher)가 1930년에 쓴 ‘근대전쟁의 스승(Der Lehrmeister des neuzeitlichen Krieges)’이라는 소논문을 인용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뵈티허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아 프랑스군이 로렌으로 공격해 올 경우 우익에서 소수의 병력을 차출해 좌익을 증원하는 한편 나머지 병력으로 우회기동을 실시, 랭스와 베르덩 사이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우익의 주력 부대로 공세를 감행,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 작전 56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연습을 종료했습니다. 홈즈는 여기서 첫번째 연습은 바로 우아즈 강을 도하하는 슐리펜 계획의 첫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고 두번째 연습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 즉 비망록에 명시된 두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05년 11~12월에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주버는 홈즈가 문법적인 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반박합니다. 슐리펜은 마지막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 양면전쟁의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단 주버는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 독일 단독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것 자체가 오독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은 워게임에서 독일이 고립된 상태로 양면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슐리펜은 워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홈즈는 슐리펜도 러시아군이 점차 러일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계획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양자 사이에 유사점이 적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몇가지 사례를 들어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1914년 8월 27일 제1군 사령관 클룩(Alexander von Kluck)에 내려진 명령은 진격방향을 남서쪽에서 보다 서쪽으로 돌려 루앙(Rouen)과 망테(Mantes)를 잇는 선으로 진출, 세느강에 도달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것은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이것을 소몰트케가 파리 자체를 포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파리를 우회하는 것과 그 자체를 포위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소몰트케는 1911년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평에서 국경지대의 프랑스 요새선을 무력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익을 최대한 강화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전후에 남긴 저술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에 따르면 소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이 계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가 슐리펜과 차이를 보인 것은 네덜란드를 공격하지 않는 것 정도였는데 소몰트케는 네덜란드까지 침공할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그만큼 우익의 타격력이 감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소몰트케는 전후에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물론 전쟁 초기 소몰트케는 로렌 지방에 슐리펜의 원래 구상 보다 6개 사단이 더 많은 16개 사단을 배치해 우익을 다소 약화시키기도 했으며 프랑스군 주력이 알자스-로렌으로 침공해 올 경우 우익의 상당부분을 이 방면으로 돌릴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소몰트케가 실질적으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기본 개념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화된 독일군 좌익은 우익의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정면의 프랑스군을 능동적으로 붙잡아두는 임무를 가지고 있엇습니다.
한편, 주버는 독일군의 병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게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슐리펜의 원래 계획 처럼 파리를 봉쇄하는 것은 실시할 수 없었고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프랑스군 주력이 후방의 위협을 느껴 (유사시 강력한 보루가 될 수 있는) 파리를 버리게 하고 남동쪽으로 몰아 내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슐리펜의 기본적인 개념은 유지되었다는 것이 홈즈의 주장입니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주버가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비판에 반박하자 홈즈도 다시 재반론을 합니다. 사실 주버의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는 제목부터 그렇고 내용에서도 도발하는 면이 없지않았는데 홈즈도 새로운 반론에서 날을 살짝 더 세웁니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홈즈는 반박문의 도입부에서 주버가 1914년 여름 소 몰트케가 취한 전략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 대해 비판하는게 아니라 주버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빈정거립니다. 홈 즈 자신은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 비슷하게 우익을 통한 포위기동을 실시하려 했다고 설명했는데 주버는 이것을 싹 무시하고 홈즈는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슐리펜 계획으로 회귀한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 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8월 27일 소 몰트케가 제1군에게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일이 없는데 주버는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멋대로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홈즈의 반론은 처음에 했던 반론과 동일합니다. 주버가 계속해서 사료를 오독하고 자신의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슐리펜 계획이 무조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 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의 계획은 매우 융통성이 강한데 주버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버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는 홈즈가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는데 홈즈는 주버야 말로 사료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초기 부터 우익에 주력을 두고 베르덩-벨포르(Belfort) 를 잇는 프랑스군의 요새선을 포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안에서는 돌파의 중점이 메지에흐(Mézières)-라 페레(La Fère) 방면이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 이지요.

  다음으로는 1905년 비망록에 대한 주버의 주장을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독일군의 병력 부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일단 존재하지 않는 사단으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을 위해서는 80개 보병사단과 16개 보충사단(Ersatz-division)이 필요한데 1905/06년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에는 72개 사단만이 배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이에 대해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일반적으로 해당 년도의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즉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1906년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의 작성은 그 전해의 1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즉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1905년 12월 경에는 이미 1906/07년의 부대전개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에는 26개 군단과 12개 예비군단, 3개 예비사단 등 총 79개 사단이 배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볼프강 푀르스터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이라는 점 입니다. 즉 주버가 선행연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8개 군단에 해당되는 병력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홈즈는 전시에 동원되는 예비병력으로 부족한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슐리펜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슐리펜은 이미 1891년부터 이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전쟁성은 예산 문제로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총참모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8개 군단의 편성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전시에 예비군을 대량으로 동원해 신규부대를 편성할 생각을 했다는 점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습에서 슐리펜은 당시 동원 가능했던 19개 예비사단 대신 16개 예비군단(32개 예비사단)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이 96개 사단이 있더라도 서부전선의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점을 들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일 가능성을 부정했는데 홈즈는 이것도 주버가 전후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8개 보충군단(Ersatzkorps)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의 독일군이며 8개 보충군단만 편성되면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생각하고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면전쟁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슐리펜계획은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에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먹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독일 정보당국이 러시아군의 동원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슐리펜이 가장 신경쓴 것은 러시아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질이었다. 홈즈는 그 근거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러시아군을 평가한 몇 편의 문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이 남긴 문서를 보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대해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작성이 되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모로코 위기 당시 러시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홈즈는 첫번째 반론에서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들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분석하면 슐리펜이 이 무렵부터 우익을 강화해 포위섬멸전을 펼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한 재반론에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 반격을 통해 격파하는 방안을 더 중요시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실시한 뒤 프랑스군을 로렌에서 격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히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할 경우 국경의 요새선으로 퇴각할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 경우 독일은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은 1904년 참모부연습의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강력한 우익으로 포위기동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는 것 이지요.
1904년의 두 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홈즈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두 번째 참모부 연습은 1905년 비망록과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우려한 것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 독일측에서 로렌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공세를 중단하는 것 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지적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오자 우익에서 2개 군을 차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이 맡은 임무는 프랑스군의 2선급-3선급 부대에 대한 견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주버의 해석이야 말로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슐리펜이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우익만 가지고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쵤너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쵤너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라 페레, 랭스 방면까지 공격하는 것이 명백하며 이것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 즉 서부와 동부 양면에서 전략적 방어를 취했던 워게임에 대해서는 주버의 설명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무엇보다 주버가 1905년 겨울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오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의 논평 중에서 “Wir würden demnach zu bekämpfen haben…”이라는 구절을 주버는 "Therefore we will have to fight against..."로 번역하는 오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해석하면 "Thus we would have to fight against..."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슐리펜은 양면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훈련에서 가정한 상황이 모두 현실화 될 경우에 양면전쟁을 치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게다가 슐리펜은 논평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홈즈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이를 위한 실제 전쟁계획이었습니다.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이전 글에서 소개한 테렌스 홈즈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는 테렌스 주버의 충격적인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면서 지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주버의 재반론을 소개하기 전에  홈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슐리펜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계획을 완성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직전이었고 그때문에 그 이전의 훈련에는 이러한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슐리펜이 실시한 각종 훈련을 분석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버는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사료를 오독하게 된 것이다.

주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접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주버는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합니다.(이 논문은 좀 짧습니다) 주버는 먼저 “우익으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기동”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우익의 주공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24개 사단을 포함해 총 82개 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실행한 계획에서도 우익에는 54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그쳤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장래에 편성될 부대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정보기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25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그뢰너 등 슐리펜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인물들은 슐리펜의 마지막 전쟁계획인 1905-06년 계획에서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회고했는데 주버는 이것이 (서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 에서 일관되게 명시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원사료를 분석하지 않고 1938년에 집필된 쵤너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의 결과 우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데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상정한 상황을 혼동한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는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로 돌입하기는 했으나 북프랑스까지 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슐리펜계획”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과 “슐리펜계획”을 관련시키는 것이 “제법 대단한 상상력(quite remarkable powers of imagination)”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워게임(Kriegsspiel)이 실제 작전계획, 즉 슐리펜계획과 동떨어진 일탈적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버는 여기에 대해서도 좀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즉 홈즈의 설명에 따른다면 슐리펜은 퇴임하기 직전에 너무나 무료해서 쓸데없는 워게임을 한게 된다는 겁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11-12월 워게임은 모로코 사태로 촉발된 긴박한 정세, 즉 독일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쟁을 벌여야 할 수 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자신이 주사료로 사용한 디크만의 원고를 홈즈가 무시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의 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슐리펜 퇴임이후에 대한 홈즈의 해석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버는 소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1904년 참모부연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홈즈의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소몰트케는 진짜 전쟁계획은 놔두고 우발계획만 연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소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11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홈즈의 설명을 따를 경우 소몰트케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아르덴느로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우익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진격하는 양상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프랑스군의 주력을 우회기동으로 포위하는게 아니라 벨기에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은 파리 서쪽으로의 우회기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홈즈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군의 주공이 파리와 베르덩 사이로 우회하게 되는 등 모순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1911년의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실제 병력은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합니다. 또 소몰트케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3:1수준으로 조정했는데 이것은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봅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합니다. 독일 제1군은 5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것과 같은 파리 서부로의 우회기동에는 13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불과 5개 군단으로는 파리 서부로 우회할 경우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버의 설명입니다. 주버는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은 단지 센강 하구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예고편을 올렸을 때 천천히 연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천천히 올리고 있군요;;;;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 테렌스 홈즈의 첫 번째 반론


테렌스 주버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논쟁의 막이 오르자 군사사연구자들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에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인 학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주버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주버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가 시작했습니다. 홈즈는 주버가 논문을 발표했던 War in History 8권 2호(2001)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란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이 반박논문은 핵심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는 주버의 분석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이 논문에서 주버의 주장은 참신하지만 근본적으로 1905년 비망록 자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작 주사료가 되어야 할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이 크게 부족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에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을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버의 주장에 대해 슐리펜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적의 주력을 ‘어떤 곳에서 상대하건 간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를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소(小)몰트케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병력부족문제에 대해서도 주버와는 반대로 설명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난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작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홈즈는 슐리펜은 실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력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는 조금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서 비판을 시작합니다.
홈즈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에 대한 평가도 주버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 것을 독일군의 정보보고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홈즈는 이에 대해 주버가 제한적인 사료를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공세계획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합니다. 주버가 첫 번째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하는 계획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양면공세를 펼칠때나 가능한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없이 프랑스가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슐리펜으로서는 독일측이 먼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인 공세로 나서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주버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홈즈는 근거로서 1905년 비망록이 프랑스의 국경지대 방어선에 대해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은 변화된 전략환경에 대한 슐리펜의 고민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슐리펜이 퇴임직전 실시한 마지막 연습에서 러일전쟁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요새선에 대한 정면공격 대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포위섬멸을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은 주버가 설명한 대로 국경지대에서의 포위 섬멸이 불가능할 경우 취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 반격을 통한 포위섬멸전에 집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파리를 포위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국경지대에서의 포위섬멸전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는 주버의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이 비망록의 핵심은 엔(Aisne)강 서안, 랭스(Rheims)에서 라 페레(La Fere)를 잇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은 이 방어선의 좌익으로 우회하면 반드시 프랑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파리 동쪽의 방대한 지역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엔강 서안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마른강과 세느강의 방어선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파리라는 대도시가 이 방어선의 좌익에 강력한 보루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대안은 파리의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 홈즈의 설명입니다. 즉 홈즈는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슐리펜도 이러한 상황은 가능한 피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우익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1905년 비망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 번째 안에서는 ‘가능하다면’ 프랑스군의 주력을 파리 동쪽, 즉 랭스와 라 페레를 잇는 선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첫 번째 안에서도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 처럼 프랑스군 주력이 마른과 센강 서안으로 퇴각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안과 여섯번째 안에 이르면 파리를 우회포위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시 한번 주버가 제기한 문제 하나에 대해 답을 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까지의 각종 연습에서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이 실시되지 않았는가? 홈즈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슐리펜은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이것이 1905년 비망록에 반영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독일군의 우익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되 최대 진출선을 라 페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파리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할 경우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독일군 우익의 기동이 제한되는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비판합니다. 슐리펜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주력을 포착해 섬멸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주력이 어디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파리를 우회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포위섬멸전의 주역이 독일군 우익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음으로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과 슐리펜이 재임중에 실시한 여러 연습간에 이질성을 강조하는데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프랑스가 방어를 취할 경우에만 서부전선에서 선제공격을 고려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홈즈는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즉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앞서 주버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의 능력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 연습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서부전선에 대한 작전개념은 어디까지나 그가 1897-98년에 작성한 비망록과 베셀러가 1900년에 작성한 작전연구에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의 1897-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작전연구가 ‘슐리펜 계획’의 개념과 유사한 점은 주공인 우익을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게 한다는 점 말고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우익의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1897-98년 비망록은 우익에 8개 군단을,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10~11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우익의 규모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우익의 규모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 총참모부 철도국(Eisenbahnabteilung)의 국장이었던 슈탑(Hermann von Staabs)과의 회의에서 슈탑이 모젤 이북에 집결할 병력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이후라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1903~1904년이 ‘슐리펜 계획’이 구체화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것 입니다.
홈즈는 이 시기에 정립된 기본 개념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홈즈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우익이 최대한 진출해서 프랑스군이 어떠한 대응을 취해도 포위될 수 밖에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이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더라도 그 후방에 있는 다른 방어선에 막힐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파리라는 강력한 거점을 끼고 있는 방어선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이어지는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계속해서 홈즈는 주버가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에 35.5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지만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에 17개 군단만을 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1904년 4월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이 약했기 때문에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이 끝난 뒤 최종논평에서 우익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할 경우 우익에 위치한 주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의 5개군을 베셀(Wesel)-디덴호펜(Diedenhofen) 일대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에 명시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아헨-트리어 지구의 철도망이 증설되면서 슐리펜이 우익의 주력을 보다 더 북쪽으로 배치하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메츠의 요새를 강화해서 우익의 측면을 더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했습니다. 홈즈는 이 결과 1905년 참모부연습을 실시할 무렵에는 병력, 부대집결지, 초기 목표 등에서 슐리펜계획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고 봅니다.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워게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워게임 모두 우익을 활용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홈즈는 이러한 주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아 실시한 첫 번째 연습에서는 독일군 우익의 포위기동에 의해 프랑스군 주력이 격파되었으며 쿨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세 번째 연습에서도 주버의 설명과는 달리 우익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단지 슈토이벤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두 번째 연습에서만 슐리펜이 우익의 상당수를 로렌 방면으로 돌렸지만 이경우 조차 주력의 5개 군 중 2개군을 돌린데 불과했으며 우익에 남은 나머지 3개군은 주력이 빠진 프랑스군의 2선급 부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홈즈는 이 연습에 대한 쵤너(Zoellner)의 논평은 슐리펜의 구상이 옳다는, 즉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한 뒤 우익으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를 참조한 주버가 사료를 오독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두 번째 워게임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일부 병력을 돌린 것이 부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프랑스군이 로렌을 공격할 경우 우익은 지체없이 공세에 나서도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05년 11~12월에 실시된 워게임에 대한 해석도 주버와는 다릅니다. 이 워게임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전략방어를 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을 작성하기 전에 실시한 마지막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이 워게임이야 말로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 이후 가지고 있었던 구상을 살펴본다면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야 말로 슐리펜의 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의 병력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독일군의 증강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반면 홈즈는 이것을 말 그대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위해 병력 증강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小) 몰트케는 총참모장에 취임한 직후 슐리펜으로 부터 넘겨받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주버는 이 점에 주목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지요.
홈즈는 소 몰트케는 프랑스군이 전략적 방어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 상당기간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이점은 1906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 몰트케가 이후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공세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홈즈는 소 몰트케 취임 이후 국경지대, 특히 메츠의 요새를 강화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로렌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는데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이런 환경에서는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베르덩 북쪽으로 주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독일군과 직접 격돌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홈즈는 결국 이 때문에 1911년에 소 몰트케가 그동안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홈즈는 소 몰트케가 1911년에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 했다는 주버의 해석은 옳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말고는 주버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 중에서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을 명시한 지도(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홈즈에 따르면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는 대부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책은 슐리펜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 몰트케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슐리펜은 대규모 포위섬멸을 위해 우회기동을 구상한 반면 소 몰트케는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개념에서 우회기동에 주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도 3과 6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주버는 지도3에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작전계획으로서의 미비함을 강조하는데 홈즈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재검토했을 때 파리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소 몰트케의 목표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신속히 프랑스를 격파하고 서부전선의 병력을 돌려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은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소 몰트케가 1914년 8월 전역에서 어떤 식으로 야전부대를 지휘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 몰트케는 1914년 8월 30일 독일 제2군이 생 캉탱 방면에서 반격을 받자 제1군과 2군에게 진격방향을 남서에서 남쪽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 주력이 파리로 퇴각하지 않고 반격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격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입니다. 즉 홈즈는 실제 전역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적 주력의 섬멸이 최우선이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