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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4일 일요일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

1940년 프랑스 전역은 6주만에 독일의 전무후무한 대승리로 끝났고 유럽 최고의 육군국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는 힘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주력은 아르덴느 삼림지대 북쪽으로 투입된 반면 독일군의 주공은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집중됐기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 양군 모두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급 이상의 기갑전투는 별로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부대가 역시독일군의 군단급 기갑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사례가 한 건 있긴 합니다. 바로 1940년 5월 12일부터 14일 까지 회프너가 지휘하는 독일 제 16차량화군단(XVI. Armeekorps(mot.)) 소속의 제 3, 4기갑사단이 프랑스 육군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 지휘관 René Prioux 중장) 소속의 제 2, 3경기계화사단(DLM, 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외에 독일 제 5, 7기갑사단이 프랑스군 제 1기갑사단과 격돌한 Flavion 전투도 있는데 프랑스군이 1개 사단이므로 군단급 기갑전투라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이 전투는 1940년 여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거의 유일한 군단급 기갑전투이기 때문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기동부대의 실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1. 양 측의 전력

이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군 제 16 차량화군단

제 3기갑사단(Horst Stumpff 소장) : 1호전차 117대, 2호전차 129대, 3호전차 42대, 4호전차 26대, 지휘전차 27대
제 4기갑사단(Johann Joachim Stever 중장) : 1호전차 135대, 2호전차 105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0대
-> Jeffrey A. Gunsburg의 Battle of the Belgian Plain에는 제 4기갑사단이 1호전차 141대, 2호전차 111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5대를 보유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군단

제 2경기계화사단(Gabriel Bougrain 준장) : S35 87대, H35 및 H39 87대, AMZ-ZT 63대
제 3경기계화사단(Langlois 소장) : S35 87대, H35 및 H39 150대
-> Karl-Heinz Frieser의 Blitzkrieg-Legende 302쪽 에는 이 전투에 프랑스군이 176대의 S35와 239대의 H계열 전차를 투입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전차의 구성을 보면 독일측은 중형전차 64~68대를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S35만 87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H35나 H39는 모두 37mm 전차포를 탑재하고 있으며 보병지원 용도에 걸맞게 45mm의 정면장갑을 가진 반면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인 1호, 2호는 기껏해야 20mm 미만의 기관포/기관총을 장비했으며 방어력도 소화기나 겨우 막는 수준에 지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 프랑스군은 사단 마다 독일군의 경전차보다 화력이 우세한 P-178 장갑차를 45대씩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3, 4기갑사단은 각각 56대의 정찰용 장갑차를 장비했지만 독일군이 장비한 장갑차들은 모두 20mm 기관포 이상은 장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전차 전력은 독일측이 37mm 대전차포와 47mm 대전차포를, 프랑스군이 25mm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측이 조금 우세하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포병의 경우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사단 포병이 최하 105mm급을 장비한 대 반해 프랑스군은 75mm 포를 장비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2. 황색작전 개시와 독일 16차량화군단의 벨기에 국경 돌파

“황색작전”의 1939년 10월 29일 계획안에서 독일 제 6군의 공격 축선에는 5개 기갑사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아르덴느가 주공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이 축선에는 제 3, 4기갑사단만 투입되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독일 제 16차량화군단의 2개 기갑사단은 제 6군의 중핵으로 주공 부대가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하는 동안 연합군 주력을 고착, 견제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 제 6군은 2개 기갑사단으로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기갑부대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회프너의 임무는 Gembloux를 점령하고 연합군 주력을 견제하는 것 이었습니다. 만약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회프너의 군단을 격파한다면 프랑스 제 1군은 병력을 차출해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돌파하는 독일군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황색작전 발동과 함께 독일군은 에반 에말(Eben Emael) 요새를 점령하고 알베르 운하를 돌파해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이 교두보를 통해 공격을 개시할 독일군의 선봉은 제 4기갑사단 이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 영내에 진입하기 전 까지는 4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3기갑사단은 4기갑사단을 후속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4기갑사단은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한 뒤 신속히 벨기에 영내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네덜란드군이 주요 기동로의 교량을 폭파하면서 후퇴했기 때문에 10일 저녁까지 네덜란드 영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이 벨기에로 진입한 것은 5월 11일 오전이었습니다. 벨기에 영내로 진입하면서 프랑스군 선발대와 교전해 경전차(?) 1대가 격파되긴 했지만 이날 오전 동안 산발적인 연합군의 공습을 제외하면 진격은 순조로운 편 이었습니다.
오후 12시15분에 제 4기갑사단을 제 16차량화군단에 배속시킨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회프너는 계획대로 이 제 3, 4의 두개 기갑사단을 Gembloux를 향해 진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4시30분 경에 서쪽으로 퇴각는 벨기에군 병력이 포착돼 제 6군 사령부는 제 4기갑사단에 일부 병력을 차출해 벨기에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병력이 벨기에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투입됐고 오후 늦게야 원래 계획대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제 16군단이 진격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은 11일 오후 5시45분이었습니다.

한편, 제 4기갑사단을 후속하는 제 3기갑사단의 진격도 매우 느려서 3기갑사단이 뮤즈(Meuse)강을 도하한 것은 원래 작전계획보다 5시간 30분 늦은 11일 오후 6시 30분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에 제 4기갑사단의 우익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제 4기갑사단의 비전투 직할대는 여전히 Maas 동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상급 사령부의 명령 변경과 제 3기갑사단의 늦은 진격 때문에 이날 밤 9시가 돼서야 제 4기갑사단에 12일의 작전지시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이 12일에 확보해야 할 목표는 Hannut였습니다. 11일 저녁, 12일의 사단 주력의 공격에 앞서 사단 기갑수색대대(제 7기갑수색대대)가 Hannut 동쪽 5km인 Geer-Tal 까지 진출해 위력 수색을 실시하고 포로 수 백명을 생포했습니다.

3. 프랑스 기병군단의 대응과 양군의 조우

한편, 프랑스 기병군단은 먼저 선발대인 제 2경기계화사단을 5월 10일 오전 4시 30분에 벨기에 영내로 투입했고 그 뒤를 이어 제 3경기계화사단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이 겨우 벨기에 영내로 진입한 11일 오전에 이미 Gembloux 지구에 도착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장 Prioux는 프랑스 제1군 사령부에 독일군이 알베르 운하와 뮤즈강을 돌파하기 전에 이 선에서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벨기에군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Gembloux 지구에 전개해 방어준비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벨기에군은 이 지역에 방어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10일과 11일에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독일군은 12일 오전 5시 30분 경 Gembloux 북동쪽 30km 지점인 Hannut 근교에 도달했습니다. Hannut는 독일 제 16군단의 1차 목표였고 회프너는 예하의 2개 기갑사단에게 Hannut를 확보한 뒤 여기서 다시 공격을 재개, Gembloux 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은 오전 8시 20분경 Hannut 외곽에 진입해 프랑스군의 정찰대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장 슈테버(Johann Joachim Stever) 중장은 프랑스군의 기계화 부대가 투입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접촉한 부대가 제 1경기계화사단이라고 오인 했으며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진격으로 연료가 부족해 일단 Hannut 서쪽에 대한 공격은 잠시 보류해야 했습니다. 연료는 12일 오후에야 낙하산으로 보급됐다고 합니다.
이날 첫 번째 전차전은 제 35기갑연대 5중대가 Hannut 서쪽에서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 제 11용기병연대 1대대 소속의 H-35/39 전차와 교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5중대 소속의 3호전차들이 프랑스 11용기병연대의 전차 7대(독일측은 11대 격파를 주장)를 격파하고 프랑스군을 퇴각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이 교전에서 전차 5대가 피격되고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전차들의 고질적인 약점인 시야 불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 입니다. 독일측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독일 전차들이 100~150m 이내로 접근 할 때 까지도 독일 전차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한편,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독일 6군 사령부는 회프너에게 “적이 전면 퇴각”하고 있으니 신속히 추격해 Gembloux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 시각 독일 4기갑사단은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주력과 조우,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오전 9시 20분에 제 4기갑사단에 Hannut-Braives를 잇는 선을 확보하고 남서쪽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슈테버 중장은 오전 8시경 공격을 재개, Hannut 남서쪽의 Crehen을 공격했습니다. Crehen은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의 제 5경기계화여단(5e Brigade Légère Mécanique) 2 흉갑기병연대(2e Régiment de Cuirassiers)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전의 전투로 11~12대의 전차를 잃고 11시 무렵 Merdorp에서 퇴각했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은 제 5경기계화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후 3시경 제 2경기계화사단의 1개 전차중대를 투입해 Merdorp를 탈환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오후에 여세를 몰아 Crehen을 공격했지만 보병의 지원 없이 시가지로 진입했다가 S-35 4대를 잃고 다시 Merdorp 방향으로 퇴각합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나타난 것은 완전편제의 2개 경기계화사단 이었기 때문에 슈테버 중장은 4기갑사단 만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일부터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제 3기갑사단이 Hannut 지구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8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독일 제6군 사령부는 항공정찰을 통해 Gembloux 지구에 프랑스군 차량화 보병사단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회프너에게 신속히 프랑스 기병군단을 분쇄한 뒤 프랑스군이 Gembloux 지구의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2일 독일 제 6군의 상황은 회프너의 제 16차량화군단이 Hannut 지구에서 프랑스군 기동부대와 교전하는 동안 보병으로 편성된 4군단소속의 18보병사단이 이 16군단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오고있었고 27군단은 여전히 벨기에군 소탕 때문에 리에쥬(Liege) 북쪽에 묶여있었습니다. 즉 제 16차량화군단의 좌익인 남쪽 측면은 뻥 뚫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일 오후 8시, 슈테버는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고 회프너는 13일 오전을 기해 제 3기갑사단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날 저녁 양군은 다음날 전투를 위해 Hannut 부근의 촌락들을 둘러싸고 소규모 교전을 계속했습니다. 독일측은 에버바흐 중령의 지휘하에 대대급 전투단을 편성해 Hannut 서쪽의 Thisnes를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에버바흐가 탄 지휘전차가 격파됐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Thisnes를 빼앗기고 퇴각했습니다. 12일 야간과 13일 새벽에 걸쳐 독일군 보병은 오전에 있을 전차부대의 공격을 위해 Hannut 서쪽의 마을들을 공격해 상당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프랑스군도 12-13일 야간에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교란 사격을 산발적으로 퍼부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은 차량 몇 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4. 독일 3기갑사단의 도착과 13일 전투, 프랑스 기병군단의 퇴각

13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13일 새벽 5시30분에 30대의 S-35 전차를 투입해 Crehen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주요 거점에 매복시켜 프랑스군의 전차대를 저지합니다. 프랑스군은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을 거점으로 배치된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5월 13일 오전, 마침내 독일 제 4군단 소속의 제 18보병사단이 도착해 제 16차량화군단의 우익에 전개하기 시작했고 제 16차량화군단 소속의 2개 기갑사단도 계획에 따라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회프너의 계획은 13일 저녁까지 제 3기갑사단은 Gembloux 동쪽 10km 지점인 Thorenbais, 제 4기갑사단은 Thorenbais 남쪽의 Perwez을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5, 6기갑연대는 오전 11시 30분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을 상대하는 프랑스군의 제 6경기계화여단 소속 제 11차량화용기병연대(11e Régiment de Dragons Portés)는 이미 북쪽의 독일 18보병사단과 교전하고 있는데다가 우세한 독일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자 크게 고전했습니다. 제 6경기계화여단장 Loges 대령은 배속받은 제 1흉갑기병연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대전차포에 걸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결국 11용기병연대는 오후 2시경에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잘 버티다가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후퇴하게 됩니다.

제 3기갑사단 좌익(남쪽)의 4기갑사단은 사단의 좌익에 “뤼트비츠 전투단(Gefechtsgruppe Lüttwitz, 사단수색대대, 사단대전차대대 1중대, 9기관총대대(Maschinengewehr-Bataillon 9), 654 대전차대대(Panzerabwehr-Abteilung 654)로 편성됨)과 제 79기갑공병대대를 배치해 프랑스 제 2경기갑사단을 견제하도록 하고 사단 주력은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전력으로만 보면 뤼트비츠 전투단은 프랑스군 1개 사단을 막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프랑스 전차부대의 공격은 집중적이지 않은 중대 단위의 산발적 공격에 불과해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은 먼저 오전 11시 45분부터 15분간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뒤 보병을 투입해 촌락들을 제압하고 오후 1시가 돼서야 예비로 있던 2개 기갑연대를 투입했습니다. 서쪽으로 진격하던 35기갑연대는 Merdorp에서 프랑스군의 제 2흉갑기병연대 소속 전차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독일측에게는 다행히도 오전의 공격준비 사격으로 대전차포 진지 다수가 제압 된데다 프랑스군은 보병 매우 부족해 전차들이 보병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측은 보병을 투입해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퇴했습니다. Merdorp를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S-35 3대와 6대의 H-35/39를 잃고 후퇴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제 4기갑사단은 Merdorp에서 프랑스군 400명을 생포하고 25mm 대전차포 4문과 전차 5대를 노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독일 제 27군단 소속의 제 269보병사단이 제 4기갑사단의 좌익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의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하게 되자 제 4기갑사단을 상대하던 전차부대들을 돌려 제 269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공을 그대로 얻어 맞게 돼 버립니다. 불과 12km밖에 안되는 지구에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의 전차가 집결해 공격을 개시하자 그 효과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13일까지의 전투에서 총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었습니다. 독일 3기갑사단은 1호 전차 2대와 2호전차 1대를 잃는데 그쳤고 4기갑사단의 피해는 확실치 4기갑사단의 전차 손실은 확실치 않으나 병력 손실은 12일부터 13일 까지 전사 36명, 부상 104명, 행방불명 13명 이었습니다. 이날의 전투 결과는 독일군의 승리였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 사단은 독일군 3개 사단(제 3, 제 4기갑사단, 제 18보병사단)에 압도돼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났으며 프랑스 제 2경기계화 사단은 불과 3개 대대급에 불과한 4기갑사단의 좌익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제 3경기계화군단 방어선이 뚫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비록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임무는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었지만 원래 계획은 15일 까지, 그리고 변경된 계획에서도 14일 까지는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프랑스군의 패배라고 하겠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예비대를 모두 투입한 상태에서 피해가 가중되자 오후 3시30분 경 군단사령부에 철수허가를 요청합니다. 군단장 Prioux 중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시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먼저 오후 4시부터 제 3경기계화사단이 교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5시부터 우익의 제 2경기계화사단도 후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날 저녁 8시 경 Beauvechain-Perwez를 잇는 선 까지 퇴각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회프너는 프랑스 기병군단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뒤 제 3, 제 4기갑사단에 추격을 명령합니다.

5. 5월 14일 전투와 프랑스 제 1군 주력과의 교전

13일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군단에 큰 피해를 입힌 독일군은 14일 오전 5시 공격을 재개합니다. 제 4기갑사단은 계속해서 원래 목표인 Gembloux 방향으로 전진했습니다. 슈테버는 36 기갑연대를 선두에 세우고 35 기갑연대가 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무렵 숲속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의 공격으로 전진이 지연됐으며 슈테버는 다시 보병을 투입해 숲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을 격퇴해야 했습니다.
한편, 3기갑사단은 5기갑연대로 사단 우익(북쪽)을 방어하도록 하고 6기갑연대만 서쪽으로 전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랑스군 기계화부대가 출현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공격이 지연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3기갑사단은 프랑스 제 4군단의 모로코 보병사단이 방어하는 Gembloux 북쪽의 Ernage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2일부터 14일 까지 전개된 전투로 프랑스 기병군단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제 3경기계화사단만 보유 전차 중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은 5월 16일까지 49대의 전차를 "완전손실"로 잃었다고 하며 이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Hannut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더 적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프랑스 기계화 부대는 객관적으로는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 1군의 주력인 보병군단들이 Gembloux 지구에 증원돼 전체적으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증원된 부대는 3군단 소속의 제 2북아프리카보병사단(Divisions d’infanterie nord-africaine)과 제 1차량화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ee)과 4군단 소속의 모로코 보병사단 및 제 15차량화보병사단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저녁부터 4개 보병사단과 지원 전차부대를 투입해 독일 제 16군단에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회프너는 오후 늦게 까지 큰 피해 없이 진격이 계속되다가 새로운 프랑스군 부대가 출현해 맹렬히 반격을 개시하자 크게 놀랐습니다.

14일 저녁까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은 마침내 목표지점인 Gembloux 외곽에 도달했으며 프랑스군 4개 보병사단과 상대하게 됐습니다. 회프너는 14일 오후 동안 공격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보병사단들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다가 다음날 공격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일에 걸친 대규모 전차전은 독일측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우세한 것이 확실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제 3경기계화사단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 전차들을 중대 단위로 분산 배치했고 제 2경기계화사단 역시 중대별로 산발적인 공격만 거듭해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독일측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가 독일군이 연대단위로 작전하는데 비해 프랑스군은 대대 이하 단위로 작전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급 이상의 S-35 전차를 집중 운용했다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소형 포탑에 시계가 불량하고 무전기가 부족한 프랑스 전차들은 무전기를 장비하고 각급 지휘관들의 일사분란한 지시에 따라 단위부대로 전투를 벌이는 독일군의 전차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전차는 수치상으로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전차 역시 사람이 타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전차에 탑재된 47mm포는 1940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 쓸만한 물건이었지만 이 전차포가 탑재되는 포탑은 시야가 불량하고 전차장 한명이 지휘부터 사격까지 겸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측의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은 기병군단의 임무를 주력 부대가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독일군을 저지하는 소극적인 것에 한정했고 이 때문에 11-12일에 전체적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방어로 일관했습니다.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제 2경기계화사단은 제 3경기계화사단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공세적으로 과감하게 작전한 결과 전투 초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요.

1941년 여름, 역시 숫적으로 우세했던 소련 전차부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와해돼 버리는데 소련군 역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서적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Oldenbourg, 1995)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the Belgian Plain",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56, April 1992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Gembloux",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64, Jan 200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1(Schiffer, 1996)
Ernest R. May, Strange Victory(Hill and Wang, 2000)
Joachim Neumann, Die 4. Panzer-Division 1938-1943 : Bericht und Betrachtung zu zwei Blitzfeldzügen und zwei Jahren Krieg in Russland(Selbstverlag, 1985)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