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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월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2012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3호에 기고한 “The Battle of Kursk: New Findings”이라는 글입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담당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글 인데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 전술제대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번역했던 같은 필자의 “프로호롭카: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필자: 발레리 자물린
영문번역: 개리 딕슨Gary Dickson 

쿠르스크 전투의 초기 5일간은 소련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정확히 말해 이 시점 부터 전세가 소련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역사학계는 이 시기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특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전개된 사건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오룔 방면에서 쿠르스크 축선으로 가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의 주공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벨고로드 방면에서 왔다. 많은 병력이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기 때문에 보로네지 전선군은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예비대의 부족으로 보로네지 전선군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온 전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특히 전차와 같은 장비를 대량으로 상실하여 전투의 결과에 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비록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전선군 사령관인 바투틴이 조급하게,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 중 가장 많은 것이 1943년 7월 6에서 8일 사이에 프로호롭카와 오보얀 축선으로 돌파해 온 적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련의 반격을 결정한 일이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부대의 작전통신내용과 전투보고서를 대량으로 공개하였다. 이러한 사료에 힘입어 연구자들은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투틴과 그 예하의 야전군 사령관들이 주고 받은 전문을 읽어본다면 바투틴이 초기의 수일간 작전의 전개 과정과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매우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바투틴과 그의 참모진은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확한 예측을 하고, 상황의 전개에 맞춘 결정을 내렸다. 바투틴 장군은 대규모의 전략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통달했으며,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해하여 적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7월 5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의 목표를 파악하여 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주로 동부전선의 남부지역의 상황을 파악한 것과 그의 직관력, 전선군의 작전을 매일 분석한 것에 기반하여 평가를 내렸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공 축선에 배치된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의 방어 구역의 전황, 그리고 가용한 전선군 예비대의 규모는 바투틴의 계획과 결단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은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적의 움직임을 매번 저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바투틴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전투의 결과는 바투틴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계획은 수개월에 걸쳐 수립되었지만 쿠르스크 전투 초기의 이틀간은 계획대로 작전이 전개되지 못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기갑부대들은 치스챠코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이 수많은 장애물과 야전축성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축한 두개의 방어선을 돌파해 버렸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신속한 돌파에 비상이 걸렸다. 독일군은 고작 18시간 만에 제1방어선을 돌파했고 제2방어선은 더 빨리 뚫어버린 것이었다. 전투는 바투틴이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지만 바투틴은 자신의 판단력을 확신할 수가 없었고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차례의 강력한 반격으로 상황을 회복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주도권을 쥐었고 바투틴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바투틴은 상황을 호전시키고 적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7월 6일 부터 8일까지 몇 개의 반격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했다. 바투틴이 이렇게 침착함을 잃어버린 까닭은 전선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점 외에도 바투틴 개인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에도 있었다. 그리고 바투틴은 몇몇 야전군 사령관을 포함한 예하 지휘관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현대의 전장에서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믿을 수 가 없었다.1)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 초기 단계에서 반격을 실시할 때 마다 준비가 부실했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고, 예하 부대들의 능력, 특히 전차부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격계획 수립은 각 야전군 사령부가 담당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일반명령과 임무만을 하달한 뒤 나머지 계획 수립 과정은 야전군 사령부에 일임하였다. 하지만 야전군 단위의 지휘관과 참모진의 훈련수준은 다양한 병과를 조율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계획을 수립하는데 충분하지가 못했다. 

다양한 병과를 조율하는 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붉은군대의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제일선의 모든 야전군을 포함한) 야전군 단위에서는 특히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야전군 단위의 장교들은 기갑 전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고, 전차라는 무기의 능력에 대해 잘 몰랐으며, 전차 부대의 훈련 수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기갑참모진2)은 규모가 작고, 훈련이 부실한데다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이 부족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의 결심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된 핵심 간부들은 전차부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 부대를 운용하는 계획을 마치 보병 부대를 운용하는 것 처럼 수립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기갑 작전에 적합한 지형이라던가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독일 전차의 성능적인 우세라던가 아군 전차 부대의 능력 같은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43년에 소련군의 독립중전차연대(전차 21대)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 중대 정도에 불과했으며, 전차여단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대도 보다 못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교단의 훈련 수준 문제에 더하여 반격에 참여할 야전군간의 조율이 전선군 사령부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점도 있다. 이같은 방식은 특히 지상군에 항공지원을 제공하거나 공격부대의 전면에 있는 적의 거점을 파괴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3)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군 기갑참모처는 반격 명령을 내릴때 기갑 작전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하달해야 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 기갑참모인 슈테브뇨프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Штевнёв  중장은 쿠르스크 전투가 일어나기 겨우 일주일 전에 임명되어 그의 업무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슈테브뇨프와 그의 참모진은 반격시 전차군단과 전차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그대신 이들은 기술적인 조언과 명령 이행 사항만을 담당하고 작전적인 문제는 전선군 작전참모처에 일임하고 전차군단과 야전군의 협동작전 문제는 개별 군단장이 알아서하도록 방기하였다. 기갑참모들은 전투 초기 부터 기갑부대의 작전과 적의 전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직속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개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는 나태하고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투틴 본인 조차도 기갑 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실은 7월 6일로 예정하고 계획되었다가 그 전날 밤 스탈린에 의해 취소된 제1전차군의 반격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바투틴은 자제력을 잃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7월 6일 오전에 제40군과 제6근위군을 투입하는 새로운 반격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투틴은 소련군이 아직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소모하기 보다는 두개의 강력한 집단을 편성해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력부대인 제4기갑군의 양 측익에 공격을 가해 독일군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7월 6일 시점에서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은 비현실 적이었다.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40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직접 맞서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6근위군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6근위군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은 우세한 적에 맞서 전선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많은 수의 참모장교들과 장성들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방어전을 수행하는 와중에 반격까지 하라는 것은 부담만 지우고 이들의 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반격을 계획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위였다. 

7월 6일의 전투 경과를 보면 소총병군단의 사령부들, 특히 제6근위군 예하 군단의 사령부들이  맡은 책임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실제로 군단사령부들은 단지 야전군사령부와 사단본부 사이에서 명령문과 보고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락 업무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단사령부의 고위 간부들은 이렇다 할 결단력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핵심은 군단사령부들이 예하 부대들과 보조를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데 있다. 제69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군단장들은 7월 2일에야 전선에 도착해 7월 4일 부터 군단을 지휘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7근위군과 제40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사령부의 편성 명령은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한 직후에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임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장교라 할 지라도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단 사령부의 장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대응하고,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신속히 회복하고, 상급 부대 및 인접 부대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심지어 미리 준비된 방어선에서 조차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추는 임무 등을 하지 못했다. 

1943년 초에 붉은군대가 소총병군단을 대규모로 편성하면서 군단 수준에 걸맞는 참모 업무에 숙달된 고위 장교와 장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부족 현상은 붉은 군대 전반에 만연해 있었으며 보로네지 전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제40군 참모장 바튜냐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тюня 소장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군단사령부의 참모진은 국방인민위원회 예비로 있는 지휘관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지휘관의 대다수는 실전 경험이 크게 부족하다. 이들은 군사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군단사령부 참모로서의 실제 업무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이들이 실전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을 바로 잡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투 초기에 군단사령부는 예하 부대를 너무 졸렬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야전군사령부가 강제로 군단사령부의 임무를 모두 대신해야 했다.4) 

이로인해 방어 작전의 첫 며칠동안은 각 부대들이 필요한 수준의 상호 협력과 효율성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는 군단의 임무 상당수를 직접 맡아서 군단사령부의 부담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자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는 야전군사령부 참모진의 업무가 과도해지고 통신망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서 야전군사령부가 명령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명령을 이행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으며 그나마 명령이 충분히 이행되지도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문들은 야전군사령부들이 명령과 지시사항이 이행되고 있는지 바르게 파악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점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직위에 있는 고급 장교들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치스챠코프는 물론 바투틴 까지도 제6근위군의 상황에 대해 계속 우려했다. 7월 7일 보로네지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제23소총병군단장 바흐로메프Павел Прокопьевич Вахрамеев 소장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위해임하였다. 바흐로메프가 해임된 이유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군율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지나치게 음주를 했다는 것 이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 나카트긴 대령은 군단사령부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하급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8월 25일에 제6근위군 사령관 명의로 내려진 명령 제0125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이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근위 대령 나가트킨은 참모장으로서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예하 사단 본부와의 연락도 취하지 못하여 전방 부대의 배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단 참모진은 전투에서 군단장을 보좌할 수가 없었다.”5) 

이것은 제6근위군의 지휘를 복잡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7월 6일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전선의 상황이 복잡해 진 것이었다. 전 지역이 개별적인 부대 단위로 분열되어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다. 제1전차군과 함께 오보얀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몇개의 소총병사단은 치스챠코프가 코체토브카 마을에 주지휘소를 세우고 직접 지휘했다. 리포븨이 도네츠Липовый Донец 강변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몇개 사단은 부사령관 라구틴П. Ф. Лагутин 소장이 사즈노에Сажное 마을에 보조지휘소를 세우고 지휘했다. 이 두 집단은 제1전차군과 제69군의 예하 부대로 인해 단절되어 사실상 독립적으로 작전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두 집단을 조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통신과 보급을 유지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일부 소총병사단, 예를 들어 제51근위소총병사단은 30km에 이르는 전선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작전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했다.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은 같은 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같은 참호를 쓰면서도 사단과 군단 사이는 물론 두 군사령부 간에도 효과적으로 작전을 조율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6근위군에 파견된 총참모부 소속의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의 전투 구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야전군은 지속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보병부대와 전차부대의 협동작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군사령부 작전참모처에 있는 지도에는 제1전차군 예하부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때문에 인접 부대의 측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무의미한 손실마저 발생하는 지경이다.”6) 

바투틴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전투가 끝난 뒤에 했다. 바투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맡았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에 실려있다. “우리 사령부, 무엇보다도 나는 반격을 구상하지 말고 적의 우월한 기갑 부대를 격퇴하는 것만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일곱번 재 본 다음 한번에 잘라라”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판단을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적군은 제2방어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뚫어 버릴 것 처럼 보였습니다.”7) 

대규모의 전역이나 전투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인적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바투틴의 입장이 어땠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적의 강력한 기갑부대가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을 두들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고사령부는 물론 스탈린이 직접 바투틴에게 그가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적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었다. 사실 바투틴은 이상적인 장군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으며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다는 인상은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투틴은 매우 산만한 사람이었다. 바투틴은 언제나 그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전선군 사령관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다른 장군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만명의 목숨과 운명이 달려있었다. 바투틴이 수년간 참모업무를 통해 얻은 경험은 그의 성격과 지휘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바투틴은 가끔 그의 참모들이 해야 할 업무 중 상당량을 직접 처리하기도 했으며 일선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다. 

“로코소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간혹 바투틴의 업무 방식에 놀라곤 했다. 바투틴은 지시사항이나 명령문의 문구를 직접 수정했으며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문을 보내 야전군이나 사령부와 대화했다. 참모장은 어디에 뒀단 말인가? 나는 마을 한 구석에서 보골류고프 장군을 찾아내 그에게 어째서 전선군 사령관이 참모 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보골류고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바투틴은 모든 업무를 직접 담당한다는 것이었다.”8) 

바투틴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거의 이렇게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달랐고 바투틴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바투틴은 사실상 그를 보좌할 사람이 없었다. 전선군 군사위원회 위원 흐루쇼프나 부사령관 아파나셴코Иосиф Родионович Афанасенко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파나셴코는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업무에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참모장 이바노프 중장은 경험이 매우 많았지만 7월 6일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제69군 사령관을 돕기 위해 전출되었다. 물론 총참모부에 있을 당시 바투틴과 가깝게 지냈던 바실레프스키 소련방 원수는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보로네지 전선군에 필요한 예비대를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바투틴이 담당하고 있는 방대한 업무까지는 어떻게 해 줄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은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전투 초기의 수일간 보로네지 전선군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새로 발굴된 문서들은 7월 6일 바투틴이 남부집단군의 공격부대들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반응한 것이었지만 그 다음인 7월 7일과 8일에 계획한 반격 준비는 바투틴에게 강요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바투틴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역량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중부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는 바투틴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로코소프스키는 7월 6일에 제13군과 그 우익에 인접한 제70군의 방어선에 뚫린 돌파구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이것이 실패하자 즉시 전술을 바꿨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연구에서는 이것을 로코소프스키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편향적인 분석은 보로네지전선군과 중부전선군의 전력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치타텔레 작전의 첫째날 독일 중부집단군의 돌격집단인 제9군 소속의 기갑군단들은 제13군과 제70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8~12km를 진격하였다. 제13군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과 제2전차군(16, 19전차군단, 제11근위전차여단)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반격을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6전차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예하의 제107전차여단만 하더라도 전차 50대 중 46대를 잃었다. 제16전차군단장 그리고레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Григорьев 소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전차 지원이 없어져서 본다레프Андрей Леонтьевич бондарев 중장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은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차를 전차호에 넣고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화력지원을 하라. 전차부대는 적의 보병과 경전차가 상대일 때 이들이 포격에 와해된 이후 반격을 허용한다.”9) 

로코소프스키가 이 상황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렸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 전선군에 비해 야포와 박격포와 같은 필요한 수단이 더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총참모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중부전선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로코소프스키는 1,000문의 야포와 방사포를 보유한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된 제4포병군단과 같은 강력한 증원을 받은 반면 바투틴은 250대의 전차를 지원받는데 그쳤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결과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보로네지 전선군은 대공포를 제외하고 4,012문의 야포와 4,539문의 박격포(82mm와 120mm)를 보유한 데 비해10) 중부전선군은 5,213문의 야포와 5,512문의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1) 총사령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 전선에는 포병군단 대신 포병전력이 부족한 제2, 10전차군단의 2개 기동 군단이 증원됐다. 이 때문에 바투틴과 로코소프스키는 충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이 가진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제13군 사령관은 전차를 동반한 반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제17근위소총병군단에 제1근위포병사단, 제378대전차포연대, 제237전차연대를 지원했다. 본다레프 장군은 이같은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전차를 반격에 투입하지 않고도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역사책들을 보면 쿠르스크 전투의 둘째날에 총사령부의 예비대가 보로네지전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반면 중부전선군은 아무런 도움 없이 방어전을 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투틴은 중부전선군 보다 더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7월 8일 오후까지 3일간에 걸쳐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만 가지고 싸웠다. 남서전선군에 있던 제2전차군단이 보로네지전선군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 오후 2시였으며, 제10전차군단은 7월 9일 오후에야 투입되었다. 제5근위군은 7월 11일 오전에야 전투에 돌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하루 늦은 7월 12일 오전에 투입되었다. 

적이 새로운 부대로 공격을 개시한 가장 힘든 시점에 니콜라이 페도로비치 바투틴은 그가 보유한 병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방어선의 이점을 활용하여 예하 부대의 기동을 훌륭히 해냈다. 바투틴은 제한적인 전력만을 가지고 다른 어떤 상대도 아닌 유럽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운 것이었다.


주석 
1) 원문: низкое уровне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й подготовки и оперативного кругозора... 
2) Отдел бронетанковых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х войск (БТ и ТВ) 
3) управление БТ и ТВ фронта  
4) САМО РФ, ф.203, оп.2843, д.520, л.20 
5) САМО РФ, ф.1207, оп.1, д.138, л.150 
6) САМО РФ, ф.355, оп.5113, д.235, л.53 
7) Ротмистров П.А. Стальная гвардиия. М., Воениздат. 1984. С. 204 
8) К. К. Рокоссовский. Солдатский долг. М., Воениздат. 1997. с. 304–306 
9) Г. А. Колтунов, В. Г. Соловьёв. Курская битва. М., Воениздат. 1970. с. 118 
10) Ibid., p.53. 
11) Ibid., p.50.


2014년 7월 5일 토요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핵무기 사용계획에 대한 어떤 제독의 비판

196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전쟁계획을 보다보면 미국과 NATO만큼이나 핵무기의 대량 사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섬뜩합니다. 예방공격을 위한 계획들을 보면 전술핵은 물론 전략로켓군도 동원되는 점이 눈에 띄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려 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이 점에서는 미국과 NATO의 계획도 마찬가지 이긴 합니다만.) 이런 정신나간 계획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언급했었던 서독 국방장관 슈트라우스의 발언에 나타난 것 처럼 핵무기라는 존재는 당대의 전략가들을 꽤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소련해군의 데레뱐코 제독이 당서기장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은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소련 군인들이 핵무기 사용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단 한가지 사안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미래에 살아갈 행성은 어디이며, 이들이 군대를 보내 영토를 정복하려고 계획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우리 군대를 어떤 혼란에 빠트릴지 알고는 있을까요? [중략]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전쟁 초기에 추구해야 할 전략적인 목표는 아군, 특히 공수부대와 차량화 부대를 활용한 신속한 돌파와 공격을 통해 서유럽 중부에 있는 침략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신속하게 대서양까지 진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군이 진격하게 될 전 전선에 걸쳐 방사능으로 토지와 물, 공기가 오염된 장벽을 만들겠다는 자들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아군이 하루에 최대 100km를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공격 자체가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서유럽과 같이 좁은 지역에서 핵무기를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방사능에 오염된 수백만의 민간인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서풍으로 인해 우리의 군대와 소련의 우랄 지역에 이르는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까지 수십년 동안 방사능 오염에 시달리게 될 것 입니다. [중략] 핵미사일을 이용해서 승리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전략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대 전쟁의 다양한 양상과 방법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 데레뱐코Константин И Деревянко 제독이 1961년 8월 1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 

Matthias Uhl, ‘Soviet and Warsaw Pact Military Strategy from Stalin to Brezhnev : The Transformation from “Strategic Defense” to “Unlimited Nuclear War”, 1945-1968’,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2), p.40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으로 국제정세가 뒤숭숭합니다. 뭐, 제가 이쪽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지만 워낙 중요한 사태다 보니 시간이 나는대로 외신 보도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량이 방대하고 현안에 대해 아는게 적다 보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현재 미국의 태도에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편인데 제 시각과는 방향이 다른 글을 한편 읽게 되어서 번역을 해 봅니다. 포린 폴리시에 제임스 트라웁James Traub이 기고한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라는 글인데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이기는 게 뭐 대수냐!”는 담대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뭐, 시각에 따라서는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국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대응하자는 이야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게 읽히긴 합니다만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카터가 아니다, 그는 아이젠하워다.

그리고 오바마는 서방이 전쟁에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푸틴이 전투는 승리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제임스 트라웁

헝가리 정부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의 전차들이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헝가리의 봉기 군중이 마지막으로 보낸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었다. “그들이 지금 막 미군이 한두시간 내에 부다페스트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왔다. … 우리의 상황은 나쁘지 않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미군은 부다페스트로 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을 동유럽에서 몰아내겠다고 호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헝가리의 봉기는 분쇄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도부는 아이젠하워가 소련에게 굴종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은 아이젠하워가 “자유국가들의 동맹이 존립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몰고 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러시아가 또 다시  인접국가를 침공하자 미국 대통령도 또 다시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아이젠하워와 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오바마는 쉽게 재선된 아이젠하워가 받았던 비난 보다 더 심한 강도의 비난을 받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침공한데 대해 오바마가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 그가 나약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전 세계의 악당들은 오바마의 불안정한 리더쉽을 보면서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이 더욱 더 퍼지고 있다. 공화당의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은 얼마전 트위터에 2012년 미국 외교관 크리스 스티븐스Chris Stevens가 리비아에서 살해됐을때 리비아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격적인 행동”이 초래됐다고 썼다. 그레이엄은 당파적인 입장에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오바마를 비판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수많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동료 데이빗 로트코프David Rothkopf는 오바마와 지미 카터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허약한 대통령의 기준으로 “카터를 꼽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여기에 인간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악당들이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위협을 가하는 수 밖에 없다. 악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멈출 것이다. 내 동생을 때리면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럼즈펠드의 그 유명한 “나약함이 도발을 불러온다.(Weakness is provocative.)”는 격언의 바탕이 되었다. 럼즈펠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중동의 다른 모든 악당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며 이런 악당들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을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럼즈펠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라크 침공의 경험을 통해 호전적인 태도가 나약함 보다도 더 도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생활이나 국제 관계를 막론하고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충동은 참기가 힘들다. 악당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멋지게 보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악당은 거들먹 거리며 걸어다니고 약한 사람들은 움추려든다. 우리는 잔인한 짓만 빼고 악당들 처럼 자유롭기를 갈망한다. 월터 미티Walter Mitty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처럼 놀이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골목대장이라면 악당들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빅 브라더에 짜릿함을 느낀다.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 베를린 장벽을 없애버려요!”라고 절규하도록 만든 로날드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게 만든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세계는 부시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악당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수 도 있을 정도의 위협을 가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적국이 우리가 신경쓰는 것 이상으로 희생양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경우가 그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헝가리를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푸틴이 친서방적인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크림 반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믿는것과 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크림 반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었으며 로시아 흑해함대의 기지였으며, 오랫동안 부동항을 갈망해온 러시아를 만족시키는 지역이다. 푸틴 같은 깡패(thug)는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위협을 받는다면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야만적인 폭력말이다. 오바마가 보다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푸틴이 손을 뗄 것이라는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 이건 마치 “누구 때문에 중국에서 패배한 것이냐?”와 같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나약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난과 같은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식이다. “누구 때문에 벵가지에서 패배한 것이냐?” 아니면 시리아 라던가.

아이젠하워는 결국에는 소련이 서방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바마 또한 푸틴에 대해서 아이젠하워가 소련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푸틴이 탁월한 전략가라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위원인 윌 인보든Will Inboden은 오바마의 행동은 어린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하는 수준인데 푸틴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를 핵무기를 가지지 못한 사우디 아라비아로 만들었을 뿐이다. 러시아는 땅에서 캐내는 것 말고는 수출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산유국에 불과하다. 푸틴이 잭나이프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수준이라면, 나머지 세계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수준이다.

오바마의 대외정책 수행을 카터와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아이젠하워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오바마처럼 전임자로 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국방 예산이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적은 수단으로 더 많은, 혹은 사용하는 수단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다.(스티븐 세스타노비치Stephen Sestanovich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에서 아이젠하워와 오바마를 “긴축”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내가 지난주에 기고한 글에서 쓴 것 처럼, 오바마가 대외 정책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는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포함한 지난 정권에서 이어진 분쟁들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것이다.

오바마가 대외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계속되는 문제는 오바마의 정책에 결단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갈수록 외골수로, 상상력이 결여된 축소지향적인 방향을 추구하는데 있다. 오바마는 임기를 시작할 때 핵무기 비확산과 기후 변화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국제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때 부터 시작된 통제할 수 없는 분쟁을 중단할 수 없으며, 미국 국민들은 그의 개혁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알게됐다. 결국 오바마의 열정은 사그러들었고 그의 (사고:역자) 지평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오바마는 미국이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시리아가 그런 경우였다. 오바마는 시리아에서 자행되는 최악의 만행에 대해 단호해 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행동은 나쁜 일이다. 한때 오바마가 제창했던 희망과 그가 안주하기로 선택한 편안한 장소와의 거리는 아이젠하워의 말뿐인 반공주의와 그의 실용적인 타협안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 백악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브라이언 카툴리스Brian Katulis는 최근 오바마가 더이상 미국 국민들에게 국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도 오바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 싶다.

나는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바마가 하는 일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의 실패는 그의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바마가 초기 부터 러시아에 대해 보다 대결적인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오바마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군비통제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문제에서 그랬던 것 처럼 동맹국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틴이 꿈꾸는 것 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었다면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통합되는 것 같은 용납할 수 없는 위협에 직면하여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이 거세지도록 선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오바마가 2년 전에 시리아의 반군을 훈련시키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오바마가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 것이 그의 임기 내내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오바마가 푸틴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인들을 압제로 부터 구출하기 위해 개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바마는 몇가지 제제조치와 올 6월에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인 G-8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를 결합하여 러시아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푸틴 개인에 대한 숭배에 붙들려 있는 이상 오바마가 취하게 될 조치들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고립된다면 푸틴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다. 동구와 서구가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이나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결은 한쪽에 일방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냉전 당시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서구는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여 대결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는 이런 시각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국가가 우크라이나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무너진 작은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올 여름쯤에 나올 국제관계나 군사전략 관련 저널들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테니 그때쯤 잘 정리된 재미있어 보이는 글들을 더 번역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Journal of Strategic Studies나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서 특집을 내줬으면 좋겠네요.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어떤 전문

1990년대 이후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들은 그동안 우리가 정황으로만 추정하거나 다소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문서들 중 하나가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주북 소련대사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이 서한은 미국의 폭격에 견딜수 없게 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신속한 휴전 체결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 외에도 김일성의 몇가지 요구사항이 눈에 띄는데 남한에 보복 폭격을 할 수 있도록 공군력을 증강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윌슨센터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영어 번역본을 중역해서 올려 봅니다.


긴급

바실레프스키 동지께.

비신스키 동지께.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 동지께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합니다.

라주바예프


배부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흐루쇼프, 비신스키, 소콜로프스키



“친애하는 대사동지, 이 전문의 내용을 스탈린 동지께서 검토해 주시도록 전달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이시오프 비사리오노비치,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볼 때 휴전협상이 무기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여간의 협상 결과 우리는 사실상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동적인 방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적은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주 최근에 적은 조선 전역의 발전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군의 작전으로는 상황을 호전 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초래되어 누적되고 있습니다.

평양이라는 단 한개 도시에 대해 (7월 11일과 7월 12일 밤의) 단 한번의 24시간 동안의 야만적인 공습으로 6천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지들은 당연히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 인민을 고통과 부당하고 무의미한 피해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능동적인 군사작전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합니다.

1. 방공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10개의 대공포 연대(3개 연대는 중구경, 7개 연대는 소구경)를 편성할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탈린 동지께서 중국 동지들에게 5개 연대, 우리에게 5개 연대 분의 장비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이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조선, 적어도 평양까지는 주간에 전투기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인민군 공군은 언제라도 능동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얼마 뒤에는 조선인민군 조종사 40명이 소련에서 Tu-2기 훈련을 마칠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조종사들이 Tu-2기와 함께 귀국해서 즉시 능동적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중요한 적의 거점에 피해를 주기를 원합니다.

3. 적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지상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적 공군이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개성에서 진행되는 협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0일과 1952년 7월 9일의 각서에 따라,  그리고 1951년 10월 6일의 각서 내용을 1952년에도 적용하여 동지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기술 장비와 물자를 주실 필요가 간절합니다.

4. 동시에 개성에서는 조속한 휴전 체결과 교전 중지,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른 모든 포로의 송환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것 입니다.

지상과 공중에서 군사 작전의 성격이 변화한다면 적에게 이에 상응하는, 우리에게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전문과 비슷한 내용을 마오쩌둥 동지에게도 보냈습니다.

조선 인민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베풀어 주신 헌신적인 막대한 원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동지의 지시와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보적인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동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일성.


평양, 1952년 7월 16일.”



이 전문에서는 북한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휴전을 체결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 상태에서의 휴전이 북한에게 불리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스스로가 언급한 무의미한 희생의 원인이 김일성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입맛이 씁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김일성 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멍청한 일은 잊을만 하면 되풀이 되지요.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번역글]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날림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작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4호에 기고한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이라는 글 입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과장된 신화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널리 퍼져나갔는가를 추적한 꽤 흥미로운 글 입니다. 냉전시기 소련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시기 독소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독일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냉전기 소련의 역사서술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2차대전 중 소련 야전부대의 정보 수집과 처리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발레리 자물린(쿠르스크 주립대학)


1943년 쿠르스크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조국전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이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은지 70여년이 되어가지만 러시아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신화 중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것은 바로 ‘프로호롭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일 것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이 2000년 이래로 프로호롭카역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에 대해 수많은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여 이 전투의 규모와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고 정확하게 규명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 전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였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유포되고 있다. 이 ‘신화’를 유포시킨 원동력은 소련과 러시아의 정부 기관이 편찬한 수많은 문헌들이다. 이러한 관찬 서적에서 제5근위전차군 소속의 4개 군단과 무장친위대 소속의 2개 기갑척탄병사단이 격돌한 이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라고 불리웠다.1)  동시에 이러한 책의 저자들은 그들의 “저작은 근거가 빈약하지 않으며.... 앞서 출간된 저작들이 밝혀낸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2)


사실 프로호롭카의 전설은 1943년 여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수십년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문서보관소의 문서들이 기밀해제되고 나서야 이 신화의 형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전투의 규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련 시기 역사서술에서는 1943년 7월 12일 양군을 합쳐 총 1,200대에서 1,50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자주포가 정면으로 격돌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역사상의 신화들이 그렇듯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5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중장과 그의 참모진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프로호롭카에서 제5전차군(제5전차군은 두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과 격돌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력에 관한 첫번째 공식 문헌은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부의 보고서로서 1943년 7월 12일에 작성된 것이다. 이날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정보장교들과 전방의 정찰대는 정보 보고서에 들어갈 정보들을 꼼꼼하게 수집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적군은 프렐레스트노예Прелестное-얌키Ямки  방면에는 아돌프히틀러 전차사단, 다스 라이히 전차사단, 토텐코프 전차사단3)의 전차 250여대의 지원을 받는 3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했으며,  크리브초보Кривцово-카자츠예Казачье 방면에는 100대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하여 제69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총공격에 나섰다”고 기록했다.4)


전투가 급박하게 전개된데다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엄청난 전력이 집결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이 보고서에 실린 숫자를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프렐레스트노예-얌키 방면에서 작전을 펼친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모두 제2SS 기갑군단 소속이었다.)과 (기차역 남쪽의) 크리브초보-카자츠예 방면에서 공격해온 제3기갑군단이 실제로 보유한 전차 숫자와 비교하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장교들은 매우 훌륭한 분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월 11일 오후 7시 45분 경 제2SS기갑군단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 273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3기갑군단은 1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하지만 필자가 연방국방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자료를 근거로 했을때 제2SS기갑군단 지휘부는 아돌프 히틀러사단의 모든 기갑차량(77대)와 다스라이히 사단의 모든 기갑차량(95대)을 제5근위전차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한 반면 토텐코프 기갑척탄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 122대 중에서는 오직 34대만 투입했다. 토텐코프 사단은 나머지 기갑전력을 제5근위전차군의 인접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투입했다.


1943년 7월 24일,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된 뒤 보로네지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흐루쇼프 중장은 직접 작성한 ‘1943년 7월 12일 쿠르스크주 프로호롭카 지구에서 전개된 전차전에 대하여’라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첨부했는데 이 보고서는 스탈린에게 직접 제출된 것이다.6) 즉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넣은 것은 이 통계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전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제5근위전차군은 7월 12일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다음과 같은 전력을 투입했다. 제18전차군단(전차 149대), 제29전차군단(전차 199대 및 자주포 20대), 제2전차군단(전차 52대), 그리고 제2근위전차군단의 전력 대부분(전차 94대). 로트미스트로프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전개된 남쪽의 전투에는 제5근위전차군의 선견대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기계화군단(합쳐서 총 148대의 전차와 10대의 자주포)을 투입했다.7) 즉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그 유명한 전차전이 전개된 이곳에서, 7월 12일에 소련군의 전차와 자주포 514대가 독일군의 전차와 돌격포 206대를 상대했으며 남쪽에서는 소련군의 기갑차량 158대가 독일군의 기갑차량 100대와 격돌한 것이다. 즉 7월 12일에 양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1,200대의 기갑차량 중 실제로 전투에서 격돌한 것은 978대였다는 것이다.(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720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258대)


하지만 역사서에 실리게 된 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추정한 추정치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통계였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가 서명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 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는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전차전은 전례없는 규모로 전개되어 양쪽을 합쳐 1,500대 이상의 전차와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야포와 박격포, 항공기가  전선의 협소한 지역에 투입되었다.”8)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남서쪽에서는 7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을, 남쪽에서는 2개 기갑사단과 1개 차량화사단을 투입하였으며 기갑차량은 1,000대에 달했다. 그리고 대략 700~800대의 전차를 보유한 6개 기갑사단으로 추정되는 전력이 제5근위전차군과 직접 교전했다는 것이다.9)


이 보고서에서 프로호롭카 지구의 전투에 독일군이 투입한 것으로 추정한 사단의 내역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48기갑군단의 모든 예하부대를 포함시켰는데 정작 이 부대는 오보얀Обоянь과 오보얀 서쪽으로 공격중이었으며 프로호롭카 근처로는 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을 상대로 투입된 집단”에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들은 예비대로 있었으며 치타델레 작전에는 투입된 적도 없었다.(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이 3개 사단이 프로호롭카를 남쪽에서 공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야전군 참모부의 정보업무에 대해서는 항상 많은 비판이 있었고 특히 1943년 동계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1943년 4월 19일 스탈린이 모든 단위의 제대에 정찰 및 정보 조직을 강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라는 특별명령에 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보로네지 전선군은 전선군 사령부의 정보참모처를 포함한 각급제대의 정보업무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주된 문제점은 정보장교들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정보를 분석하는데 문제가 많았으며 적의 병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전선군 단위의 정보 부서는 야전군 단위의 정보 부서와 비교했을때 훨씬 효율적이었다.


제5근위전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다. 7월 12일 밤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적의 제9기갑사단과 제17기갑사단, 그리고 새로 증원된 제6기갑사단은 남부지구(필자 주 : 프로호롭카 남부)에 400~600대의 전차를 투입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이 수치는 7월 14일 오후 3시 35분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에도 실려있다.11) 하지만 실제로 프로호롭카 남쪽 축선에서 공격해 오던 켐프 분견군은 7월 14일 06시 기준으로 제503중전차대대를 제외하고 82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503중전차대대의 가동가능한 티거는 6대에서 10대 사이였다.12) 게다가 가동가능한 전차 40대를 보유해 가장 양호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코로차 Короча방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반면 남쪽에서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던 제19기갑사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은 28대에 불과했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7월 13일 오후 로트미스트로프와 회의를 하면서 의심을 드러냈다. “정말 동지가 보고한 것 처럼 적군이 이렇게 많은 수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이오?”13) 로트미스트로프도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본인은 남부방면의 적 전차가 300대에서 400대를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 기갑집단의 규모에 대해 보고를 한 것은 항공 정찰을 한 부대입니다. 그래서 적의 기갑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된 것 입니다.”14)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장교들은 필자에게 특정 축선의 적 기갑전력을 추정하기 위해서 두가지의 기초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먼저 확인된 독일군 기갑사단의 숫자에 독일군 편제표의 전차 숫자(200대)를 곱해서 총 전력을 추정한 뒤 전투에 투입된 기갑사단은 전투를 하루 치를 때 마다 10~15대씩 전차 숫자를 줄여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1943년 여름에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편제가 3개 전차대대(200대)에서 2개 전차대대(166대)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지상군 사령부는 적 기갑전력의 추정치를 얻기 위해 항공정찰을 사용했다. 항공정찰 결과가 나오면 이것을 사령부에서 추정한 추정치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찰기 조종사들은 실제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상군 지휘관의 추정치에 맞춰줘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지만 독일군 역시 위장과 기만에 능란했다. 예를 들어, 프로호롭카의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15일 제69군의 공병 정찰부대는 독일군이 기만에 사용한 것들을 발견했다. 독일군은 더미를 이용해서 프로호롭카 남쪽에 가짜 전차부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15) 그러므로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프로호롭카 남쪽에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보고한 항공정찰부대는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추산하면서 가짜 전차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야전군들의 정보부서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다. 만약 야전군 단위의 정보부서들이 제 역할을 수행했다면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위에서 언급한 보고서의 내용 처럼) 독일 제6기갑사단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을 믿지 않고 대신 이 사단이 1943년 7월 6일 이래로 제7근위군과 제69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7월 14일 오전에는 겨우 14대의 가동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16) 다른 한편으로 적군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군 지휘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전투를 엉망으로 지휘하거나 예하 부대들이 전선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 사소한 실수 까지도 독일군의 전력이 우세한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기갑전력을 과장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 때문에 제5근위전차군의 문서에는 로트미스트로프가 바투틴과의 회의에서 추정했던 것 처럼 프로호롭카 남쪽의 독일군 집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을 300대로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참모처가 추정한 것에 따르면 이것 조차 세배 이상 과장된 수치였다. 어째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300대로 추정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제5근위전차군의 보고서에서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을 언급한 것은 이 추정치에 신뢰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련군의 야전군 단위 사령부는 확고하게 정해진 업무 절차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포로를 잡거나 문서를 노획하지 못할 경우 인접 부대의 정면에 한두개의 적군 사단이 출현했다는 정보는 그냥 추정하여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물론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나 다른 어떤 부대도 쿠르스크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는 동안 독일군이 투입했다고 추정된 위에서 언급한 부대들의 존재를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무전 감청 부대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통신소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한번 포착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보는 확실하게 입증되지 못했다. 사실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지휘부가 7월 12일 이후 보로네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 사단의 투입을 준비하기 위해 이 지역을 실제로 방문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적군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독일군 3개 사단의 출현은 그저 추정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도 이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서 보고서에는 그대로 포함시켰다. 이 사실은 로트미스트로프가 제5근위전차군이 상대한 부대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제11기갑사단도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로트미스트로프가 의도적으로 신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로 돌아가서 이 보고서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를 몇대라고 기록했는지 살펴보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700~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독일 기갑부대에 맞섰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서는 “제5근위전차군과 배속받은 전차군단(제2전차군단과 제2근위전차군단)은 79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17)  하지만 예하 부대의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수치가 조금 달라진다. 가동 가능한 전차만 808대가 있었던 것이다.18)  하지만 보고서 작성자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의 오류는 사소한 것이며 수리를 받고 전열에 복귀한 차량의 숫자를 포함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포착한’ 800여대의 독일 전차에 이와 거의 동일한 규모의 소련 전차(793대)를 합한 다음, 다시 여기에서 7월 12일 오전 남쪽에서 진격해오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차출된 전차 100대를 제외하면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1,500대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중요한 문제를 하나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약  흐루쇼프가 보고서에 포함시킨,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가 집계한 통계를 따른다면 18~20km 떨어진 프로호롭카 일대의 두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1,0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된다. 그런데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집계한 통계에서는 총 1,500대에 달하는 전차가 훗날 프로호롭카의 전차전장으로 불리게 되는 프로호롭카 열차역 남서쪽의,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골짜기로 분리된 좁은 지역(5×12km)에서 격돌했다고 되어있다.


이렇게 해서 프호로브카 전투에 투입된 기갑차량의 숫자를 다르게 추산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것을 각각 “전선군의 주장”과 “전차군의 주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전선군의 주장”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비교적 현실에 가까운 반면 “전차군의 주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다. 어째서 제5전차군 사령부는 전투가 벌어진 뒤 한달에 걸쳐서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고 그 좁은 장소에 그토록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되었다고 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프로호롭카 전투가 벌어지고 난 직후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의 부대들은 1943년 7월 12일 반격을 가했지만 명령 받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충격부대’인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은 대략 10~11시간의 전투만으로 전투이 투입한 차량의 50%를 잃어버렸다. 1943년 7월 16일 방어전투가 종결될 무렵 제5근위전차군은 실질적으로 모든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자주포 중에서 334대가 완전히 격파되어 전장에 널려있었고 200여대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다.19)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말렌코프가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이끄는 조사단이 이 엄청난 피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되었다. 조사단의 조사는 2주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직위해제해서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하느냐를 두고 문제가 제기되었다. 7월 말까지 로트미스트로프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으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노력으로 스탈린의 분노는 가라앉았으며 1943년 8월 말 로트미스트로프는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급 쿠투조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프로호롭카에서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전투는 승리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의 개요’라는 보고서가 쓰여졌다. 이 보고서는 두 개의 판본이 있다. 1943년 8월에 먼저 붉은군대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Управление командующего бронетанковыми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ми войсками 에 제출된 선행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1943년 9월 30일에 최종본이 승인받았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문제는 두 개의 판본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느냐는 것이다. 선행보고서는 분량이 짧다. 이 보고서는 일정 기간의 전투를 종료한 뒤 작성하는 전형적인 야전군 단위 제대의 보고서이다. 이러한 보고서의 목적은 전투 경험을 공유하고 상급사령부에 부대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기키 위한 제안을 하는데 있다. 동시에 이러한 보고서는 해당 사령부가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그리고 사령부 그 자체)를 상급사령부의 눈에 들도록 만들고 결과가 어쨌든 간에 전투 중에 범한 오류와 실패에 ‘연막을 치는’ 기회를 만들었다.(이미 끝난 전투는 현재 진행되는 전투에는 영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의 개요’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로트미스트로프도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전투 보고서를 통해 프로호롭카에서 행한 엄청난 손실을 낸 역습으로 생긴 부정적인 인상을 덮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다른 소련 장군들처럼 수백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하고 수많은 독일군을 죽였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대신 전투가 엄청난 규모였다고 조작해서 제5근위전차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독일 기갑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보고서에서 전차 1,500대라는 숫자를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언급은 이 글의 윗부분에서 인용했으며 두 번째 언급은 완전히 뜬금없게도 이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 실려있다. 이렇게 해서 제5근위전차군의 참모진은 일어났던 전투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군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는 대신 선전선동을 하는데나 쓸법한 문장과 표현을 사용했다.


“7월 12일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는 양군을 합쳐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 전차군의 예하 부대는 적에게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적이 더 진격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나 일정 기간 동안 방어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20)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역자) 이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당시의 다른 보고서들과 비슷하며 노골적인 왜곡이나 자화자찬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이해할 만하다. 보고서를 작성한 참모장교들에게는 이 보고서를 읽을 사람이 이 보고서에 강조하고자 하는 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휘부의 실책이 아니었다. 전투는 전무후무한 규모로 전개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투가 전무후무한 규모였다는-역자) 개념이 (보고서의-역자) 수많은 자료에 파묻혀서는 안됐던 것이며 이러한 개념은 보고서의 시작 부터 끝까지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소련의 역사가들은 “전선군의 주장”이 아니라  “전차군의 주장”을 바탕으로 서술하게 된 것일까? 군대의 기록관리체제는 기록 관리에 필요한 기밀성과 특별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의 보고서와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작전문서로서 앞서 예로 든 “증언” 또는 “요약” 보고서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즉시 봉인되어 수십년간 군 문서보관소에 보관된다. 정보참모처의 보고서를 포함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의 기록은 1993년까지 기밀로 분류되어 연방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은 2007년에야 공개되었다. 반면 제5근위전차군이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에 제출한 “전투작전개요”는 이미 1943년 8월에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43년에 전쟁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하여 전투 수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적용하고 부대를 운용하기 위하여 야전군급 이상의 사령부에 만들어졌다. 이 조직에는 부대와 고급 사령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각 병과의 정기간행물이나 총참모부의 전쟁경험 연구 총서, 각급 군사학교의 강의와 세미나 등에 실리는 글을 집필하는데 필요한 분석 자료를 준비하는 것을 담당하는 장교를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의 전투는 8월 말경 마무리 되었고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은 기갑부대들의 전투 작전을 분석한 문헌을 간행할 임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1943년 9월 10일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 부장인 사포지코프Г. Сапожков 대령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 국장인 베치늬П. П. Вечный 소장에게 두 편의 글을 제출했다. 그 중 한편의 제목은 “벨고로드 축선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7월에 수행한 작전”이었다. 이 글은 제5근위전차군이 주장한 내용을 기반으로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0월 31일에 베치늬 소장은 사포지코프 대령이 작성한 글과 (마찬가지로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개요”를 바탕으로) 곤차로프 대령이 작성한 “오늘날의 방어 작전에서의 전차부대”21)라는 글의 초고를 상급 사령부의 간부들을 교육하는 전차 및 기계화부대 군사 대학의 부교장에게 제출해 상급부대가 이 글을 활용하도록 했다.22)


위에서 언급한 글들은 모두 1943년 말에서 1944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비록 총참모부의 전쟁경험연구 총서는 널리 읽히는 글이 아니었고 일반 도서관에 비치되지도 않았지만 고급 사령부의 참모진을 대상으로 정리된 정보는 사실상 거의 모든 고급 간부와 장군들이 읽게 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정보는 기밀 정보의 제약을 넘어섰으며 이로써 신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신화는 소련인들을 수십년간 뿌듯하게 해 주었고 장교들을 교육하는 군사학교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총참모부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의 간부들이 제5근위전차군이 만든 정보를 교차 검증해서 이것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막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가 없었다. 1943년 8월 초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의 참모 장교 중 한명이었던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 까지 제5근위전차군이 수행한 작전에 대한 글 한편이 총참모부에 제출되었다. 이 글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작전을 극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1,500대라는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된 장대한 규모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23)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글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의 간부들을 포함한 총참모부의 간부들은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포지코프 대령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도 이 글의 열람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 부서는 야전군과 전선군이 제출한 문건에 실린 통계를 교차 검증할 의무가 없었다. 각 부대가 제출하는 보고서에 있는 정보는 그냥 정확한 것으로 간주해서 글을 집필하는데 그냥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총참모부의 다른 부서들은 보고서를 교차 검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포지코프 대령과 베치늬 장군이 담당한 부서에 황당한 허풍을 걸러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 학문적 영역(기갑 및 기계화부대 학교와 같은)과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1,500대라는 전차가 투입됐다는 신화가 퍼져나간 주된 원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1,500대라는 전차의 숫자가 널리 알려지고 여기 저기서 인용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이 일은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뒤 이 전설을 만드는데 일조한 장군들은 이 이야기를 그들이 쓴 책과 글, 그리고 각종 연설을 통해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신화가 대중에게 퍼져나간 과정은 덜 흥미롭다. 여러편의 저작에서 소련의 대중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1953년에 출간된 마르킨 대령의 “쿠르스크 전투Курская битва”라고 주장하고 있다.24)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에게 알려진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담은 첫번째 책은 총참모부 군사실에서 편찬한 쿠르스크전투Битва под Курск로서 이 충실한 단행본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25)  이 책은  1943년 총참모부에 제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그래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전례없는 규모”였다고 평가하고 있다.26)


하지만 이 신화가 훨씬 더 많은 대중에게 퍼지도록 한 것은 마르킨 대령의 연구였다. 총참모부에서 출간한 책은 다시 출간되지 않았지만 마르킨의 책은 대규모로 두 차례나 간행되었다. 게다가 제2쇄가 출간된 1958년은 소련에서 민간 연구자들도 참여한 제2차세계대전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이때 소련 지도부는 처음으로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간사를 여섯권의 단행본으로 간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마르킨의 저작이 간행될 당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저작은 매우 드물었고 문서보관소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킨의 책에 들어있는 정보는 다른 문헌과 대중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 당시는 해외에서도 제2차세계대전사와 소련의 연구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흐루쇼프 집권기의 소련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간행된 저작들이 서방으로 소개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중 마르킨의 저작은 이 시점에서 1943년 여름에 전개된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 유일한 저작으로 널리 읽혔다. 서방의 독자들이 7월 12일의 전투에서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마르킨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이 전설이 더욱 더 퍼져나가는데 일조한 것은 로트미스트로프였다. 로트미스트로프는 1960년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회고록을 발표했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가 주로 활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트미스트로프 본인의  명성이 높았던 데다가 그는 (1960년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쇼프 중장이 쿠르스크 전투 동안 했던 행동을 크게 칭찬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은 얇은 소책자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의 신화가 더 확산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고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다룬 부분은 다른 저작에 널리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대조국전쟁사история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에서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해야 했을 때 편찬책임자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을 인용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조국전쟁사의 집필진 중 한명이었던 콜투노프는 필자에게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간행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총참모부의 자료에 있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1,500대의 전차라는 동일한 수치를 담고 있는 점이 당시 집필진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점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1964년, 20여년간 소련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퍼져나간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만들어낸 신화는 약간 수정된 형태로 대조국전쟁사 제3권에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제5근위전차군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공인받은 자료로 취급되게 되었다. 대조국전쟁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정된 내용은 미미했다. 7월 12일의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에서 “대조국전쟁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차전”이라는 약간 겸손한 간판을 달게되었다. 하지만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잘못된 수치는 그대로 실렸다.27)


두번째는 로트미스트로프가 전투에 대한 평가와 규모를 과장하는 등의 미심쩍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드높이는 것을 싫어했던 고위 장성들이 1960년대 부터 목소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 들이었으며 이들의 의견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예를들어 소연방 원수 주코프는 프로호롭카 전투는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로트미스트로프의 노력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므로 로트미스트로프는 좀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고 썼다.28)


로트미스트로프는 그의 동료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비판이 받아들여지는 점을 알아채고는 1963년 부터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된 전차의 숫자를 1,500대에서 1,200대로 줄이는 방식으로 비난을 완화해 보려 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군사사저널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ий журнал 편집장과의 면담에서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제5근위전차군이 투입했던 전차의 숫자를 800대에서 500대로 줄였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이 7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이를 직접 상대한 제5근위전차군의 제1제대는 500대를 조금 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29)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1,500대가 아니라 1,2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제5근위전차군이 1943년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양측이 1,6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이 중 100대를 좌익인 프로호롭카 남쪽에 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300대의 전차는 어떻게 된 것인가?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르면 “제5근위전차군의 제2제대와 예비대는 양 측면에 가해지는 적의 위협을 소멸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즉 로트미스트로프는 300대의 전차를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프로호롭카 역 북쪽의 프숄강 너머)으로 보내버렸다. 실제로 7월 12일에 234대의 전차가 양익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이러한 이동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에 서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서 그대로 격돌했다고 서술하는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두 번째, 로트미스트로프가 이 인터뷰에서 한 설명에 동의한다면 300대의 전차가 우익에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전투작전개요”에서 7월 12일 저녁 이 지구에 투입된 2개 여단은 92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서술과 상충된다.30)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들은 비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로트미스트로프는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고 다른 사람이 그의 주장에 반박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대조국전쟁사’ 3권이 출간된 1964년 이후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각종 문헌과 매체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군사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1,200대라는 수치를 인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공식 역사서인 대조국전쟁사에서는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6년 설립된 군사사연구소의 수뇌부는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업데이트’ 하는 것을 추천했다. 달리 말하면 두개의 수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사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콜투노프가 이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콜투노프는  군사사연구소장 솔로브예프와 함께 집필해서 1970년에 출간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로운 책에서 두개의 이야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콜투노프는 ‘전투작전개요’에서 명시하고 있는 700대의 전차로 구성된 독일군의 기갑집단을 두 지역으로 나눠서 배치했다. 이것은 남서쪽에서 500대의 전차를 가지고 공격해온 독일 제2SS기갑군단과 200대의 전차를 가지고 남쪽에서 진격해 온 제3기갑군단의 전차를 합한 숫자였다. 또한 콜투노프는 제48기갑군단도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무시했다.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에 수백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도 제외했다. 이렇게 해서 로트미스트로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콜투노프는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했던 가동가능한 전차의 숫자(793대)는 고치지 않았다. 대신 7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의 ‘전차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1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제3기갑군단을 상대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콜투노프의 방식은 로트미스트로프가 불만을 가지게 했지만 콜투노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넣은 구절은 그런 불편한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양측의  전차와 자주포 1,200대가 격돌했으며 프로호롭카 남쪽에서는 300대가 격돌했다. 그러므로 두 전장에 투입된 숫자를 합하면 총 1,500여대의 기갑차량이 프로호롭카 남서쪽과 남쪽의 전투에서 격돌한 것이다.”31)


소련의 “고위층”은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면서 1,500대와 1,200대라는 숫자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진실로 여겨져 온’ 신화가 완성되고 오늘날 까지도 러시아의 여려 연구와 출판물에 일부 반영되는 ‘수정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
1) 예를들어 N.F. Naidenov, U neznakomogo poselka [At an unknown village], p. 69 (Belgorod:
State Military-Historical Museum ‘Prokhorovskoe pole’, 2006)를 참고하라.
2) Ibid., p. 7.
3) 이 부대들은 기갑사단으로 편제되고 장비되었지만 공식적으로 기갑척탄병, 또는 차량화사단으로 불렸다.
4) TsAMO RF, F.203, Op.2843, D.452, L.95.
5) N. Zetterling and A.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Portland, Frank Gass, 2000, Tables A6.4 – A6.10.
6)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Voenno-istoricheskii zhurnal [Vizh], 9 (2007), p. 27.에 실려있다.
7) V.N. Zamulin, Zasekrechennaia Kurskaia bitva [The Classified Kursk battle], Moscow, Iauza -
EKSMO, 2008, p. 770.
8) TsAMO RF, F. 5 gv. TA, Op. 4948, D.19, L.7
9) TsAMO RF, F. 5 gv. TA, Op. 4948, D. 19, L. 5.
10) TsAMO RF, F.203, Op.2843, D.461, L.65.
11) Ibid.
12)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Tables A6.7–A6.9.
13) TsAMO RF, F.203, Op.2843, D.461, L.62
14) Ibid., L.63.
15) TsAMO RF, F.426, Op. 10765, D.13, L.10.
16)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A6.7.
17)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6
18) V. Zamulin, Demolishing the Myth. The Tank Battle at Prokhorovka, Kursk 1943: An Operational Narrative, Solihull, UK, Helion & Company, 2011, Table 21.
19) Ibid., Table 28.
2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20.
21) TsAMO RF, F.3416, Op.1, D.16, L.36
22) TsAMO RF, F.3416, Op.1, D.16, L.1.
23) TsAMO RF, F.5 gv. TA, Op. 4948, D.51, L.1-27.
24) I.I. Markin,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53.
25) N.M. Zamiatin, P.S. Boldyrev, F.D. Vorob’ev, N.F. Artem’ev, and I.V. Parot’kin, Bitva pod Kurskom: Kratkii ocherk [The Battle of Kursk: A Concise Study], Moscow, Voenizdat, 1945.
26) Ibid., p. 20.
27) Istoriia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History of the Great Patriotic War], Volume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8) G.K. Zhukov, Vospominaniia i razmyshleniia [Recollections and reflections], Vol.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9) ‘Rasskazyvaiut komandarmy’ [‘Army commanders speak’] Voenno-istoricheskii zhurnal, 7 (1963),
p. 77.
3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9.
31) G.A. Koltunov and B.G. Sokolov,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70, 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