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뇌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뇌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손님 접대?

10월항쟁의 여파로 경상북도가 어수선하던 1946년 10월 14일, 경찰 고문관으로 있던 태프트(John L. Taft) 중위는 고령군으로 파견된 서울 경찰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령면 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태프트 중위는 서울 경찰대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부근의 해인사로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인사에 도착한 태프트 중위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 1946년 10월 14일 1500경에 서명자(본인)는 고령면에 도착해 고령면 경찰서에서 서울에서 파견되어 1946년 10월 6일부터 고령에 주둔해 있던 45명의 경찰관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점검을 했다. 경찰서장은 본인에게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모두 50명의 폭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폭도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온 해인사(1129-1403)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서명자(본인)가 1630경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경찰들과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지도자라는 지역 유지들이 기생(customary female entertainer)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폭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태프트 중위는 즉시 다음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습니다. 태프트 중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a. 1946년 10월 9일을 즈음하여 고령면 경찰서장이 해당 지역 관리들과 만나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을 대접하고 ‘위문(comfort)’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때 보리 세 가마가 경찰에 넘겨졌다.

b. 다음날인 10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지역 관리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면의 유지 60명이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서울 경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50,000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에서 즉시 30,000원이 모금 되었으며 추가로 17,000원이 금융조합을 통해 대출되었다. 고령면에 10,000원 (모금)이 할당되었으며 (고령)군의 다른 면들에는 각각 5,000원이 할당되었다.

c. 1946년 10월 12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면장을 만나 고령면이나 고령군 차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기생 40명 정도를 불러 잔치를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잔치는 1946년 10월 14일에 열리기로 되었으며 소요 비용은 15,000원 이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가뜩이나 국립경찰에 대한 평판이 나쁘던 차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미군정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직후 경상북도 경찰청은 고령 경찰서장을 해임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는 다시 진상 조사를 위해 대구의 99군정단(Military Government Group)에 특별조사를 명령합니다. 99군정단은 1946년 12월 10일, 리치먼드 소령(Fred C. Richmond)을 고령군에 파견했습니다.

조사단은 특별 조사를 통해 고령 경찰서장에게 전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단이 면담한 증인들은 경찰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령 경찰서장이 나서서 서울 경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이 면담한 경상북도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묘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령 경찰서장이 직위에서 해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울 파견대를 위한 기부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능하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해임되었습니다.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1946. 12. 2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공식적인 조사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봉하마을에 가서 보물찾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뉴스를 보던 중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보이더군요.

盧 "명품시계, 아내가 버렸다" (연합뉴스)

봉하마을 어디인가에 1억짜리 시계가 굴러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봉하마을에 가는 분들은 보물찾기를 해 보는 것도 좋겠군요.

2008년 7월 6일 일요일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

역시,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서 파생된 글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더군요. 바보이반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전에 한번 읽었던 비더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의 회고록이 생각났습니다. 비더만은 평범한(?) 보병사단의 평범한(?) 장교였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인데다 결정적으로 포로생활을 아주 운좋게 마친 경우입니다. 비더만의 회고록에서 그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 봤습니다.

1945년~1946년 겨울의 이야기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업반은 눈 덮인 숲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어야 했다. 숲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해졌다.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베고 톱으로 나무를 켠 뒤 다시 그것을 해머와 쐐기로 쪼갰다. 이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용소 주위의 토지는 거의 콘크리트 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붙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시체는 보다 부드러운 늪지대에 매장해야 했다. 우리는 늪지의 땅을 긁어서 파내어 죽은 사람들이 안식을 취할 곳을 만들었다. 나는 시체 매장반으로 작업을 나갔을 때 산딸기를 발견해서 그것을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자로티(Sarotti)가 있었다. 물론 자로티는 그의 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명한 북해 지역 항구도시의 사업가 집안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의 자로티 초콜렛 공장을 경영했었다. 그의 침상은 바로 나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의 머리가 한 쪽으로 젖혀져 턱에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자로티의 시체를 밤 사이에 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늪으로 가져가 매장했다.
사망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급증했고 그 중에는 온스트메팅엔(Onstmettingen) 출신의 교사 헤르만과 엔드링엔(Endringen) 출신의 젊은 드레셔,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1945년과 1946년 겨울 사이에 내가 있던 수용소에 있던 포로 중 3분의 1 이상은 그들의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임시 공동묘지에서 마치게 되었다.

Gottlob Herbert Bidermann , Translated by Derek S. Zumbro, In Deadly Combat :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pp.302-303

그리고 1946년 봄이 되고 보다 큰 수용소로 이송된 비더만은 대우가 약간 개선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교 포로들에게 특별히 배급되는 물자를 받았는데 그것은 열 다섯 개피의 담배와 하루 5그램의 설탕이었다. 사병 포로들은 마호르카 담배를 받았다.

Ibid. p.306

우리는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망률은 작년의 사망률 보다는 낮았다.

Ibid. p.307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포로가 된 지 2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쓰여진 이 편지들에 답장을 보냈고 이 답장들은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우들과 알자스 출신의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의 현명한 정치인이 포로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것 이었다. 독일 출신의 포로들도 곧 석방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비록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식량 배급도 개선되었다.

Ibid. p.308

그리고 모범수(?) 비더만은 1948년에 석방되어 고향 땅을 밟게 됩니다. 이점에서 1950년에 석방된 일반 포로나 1955년에야 석방된 무장친위대나 경찰 출신 포로에 비하면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가. 비더만의 회고록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발터 셰흐터를(walter Schaechterle) 대위는 쿠어란트 집단군에서 통신장교로 있었다. 어느날 아침 셰흐터를 대위는 스페인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형편없는 식사에 항의해 노동을 거부했다. 이들은 사병들도 자신들의 항의에 참여해 주길 기대하고 행동을 했으나 사병들은 수용소내의 반파시스트 집단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곧 분노한 경비병들이 막사로 쳐들어와 총부리로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발터 셰흐터를과 두 명의 스페인인 장교는 따로 분리되어 격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사보타지 혐의로 종신형–보통 25년 정도-을 선고 받았고 키르기스탄 동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셰흐터를이 이송되기 직전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에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발터의 아버지는 비티히하임(Bietigheim)에 있는 리놀륨 공장의 이사로 있었고 2년이 넘도록 스웨덴을 통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발터의 아버지는 소련 고위 관료들에게 막대한 양의 미국 달러를 바친 뒤 마침내 아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1950년대에 펠바흐(Fellbach)에서 발터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재회를 축하했다.

Ibid. p. 309

과연 달러신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자본주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