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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9일 금요일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개인적으로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볼까 하는 글이 몇 편 있었는데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이 확 지나갔군요. 오늘 소개할 글은 한달전인 8월9 일 Foreign Affairs 인터넷 판에 실린 마이클 만델바움Michael Mandelbaum 교수의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 How Budget Cuts Will Limit the United States’ Global Role”이란 글 입니다. 이미 한달이나 지난 글이긴 한데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 중에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늦게나마 번역해서 올립니다.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 : 예산 삭감이 미국의 국제적인 역할을 어떻게 제약할 것인가
-마이클 만델바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8월 2일에 서명한, 연방예산 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미국의 부채 한도를 상향한 법안을 이끌어낸 치열한 협상은 적자를 통제하려는 전투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 전투는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것이며, 어렵고, 그리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것 중 하나는 이미 수년전 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대외 정책 및 안보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이다. 이것은 미국의 힘을 세계 전역에 투사하는데 새로운 제약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일 년만에 얼마만큼이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바로 지난해의 포린 어페어즈 5/6월호에 나는 책 세 권에 대한 서평을 실었는데 이 세 권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미국이 그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세 명의 저자들은 미국의 이익과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이 보다 신중한 대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그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측한 것 처럼 미국의 재정 상태는 그러한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이행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책들의 저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처럼) 더 좋든 혹은 (내 자신의 견해 처럼) 더 나쁘건 간에.

8월 2일의 법안은 향후 10년간 1조 달러의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중 3500억 달러가 국방 예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법안은 그 다음 10년간 1조5천억 달러의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의회 특별 위원회가 이러한 삭감 목표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일괄적인 예산 감축이 강요될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국방부의 예산은 6천억 달러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다.

설사 자동적인 예산 감축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국방 예산과 그 밖에 미국의 다른 대외 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은 다음 10여년간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재정을 굳건한 기반위에 올려놓기 위해 필요한 적자 감축의 규모는 엄청나기 때문에 민주당 측에서 사회의 안보와 의료보험은 손대길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도 감축하게 될 것이며 공화당 측에서 증세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증세가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정부에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받는 것은 더 적어진다면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 처럼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지지하는데 관대함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국방예산이 감축되는 데에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는 냉전 기간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느꼈던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국방 지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는 그들이 위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좌우된다. 최소한 얼마동안은 세계가 특별히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방 예산을 둘러싼 정치가 국방부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연방 예산에서 자신들의 몫을 지켜낼 수도 없는 상태이다. 민주당 내에서 외교와 안보 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 세력은 없다. 공화당 측에는 국가 안보정책에 있어 대규모 군사력과 강경한 대외정책에 헌신하는 매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는 두개의 다른 집단이 있다. 사회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s들은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무관심하며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을 지지한다. 이제 티 파티 운동의 입장을 표명하는 공화당에서 가장 영향령 있는 집단은 그들의 주요 목적을 위하여 국방 예산을 희생시킬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과거에 해왔던 것 보다는 훨씬 적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어떤 부분이 중단 될 것이며 또 중단 해야 할 것인가? 내가 2010년에 낸 책, The Frugal Superpower에서 논했던 것 처럼 21세기의 외교 정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이 가장 쉽게 그만 둘 수 있는 일은 냉전 이후의 첫 20년 동안 소말리아, 아이티,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군사 개입이다. 이러한 작전들은 각자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모두 다 원치 않는, 장기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국가 건설이라는 심각한 과업을 미국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들은 정부 체제가 붕괴한 곳에 그것을 재건해 주거나 그러한 것이 아예 존재 하지 않는 곳에 정부 체제를 세워주는 일이었다. 국가 건설이라는 정책은 세 가지의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러한 정책이 자신을 방어하는 데는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지만 다른 이들을 통치하거나 다른 이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도와주는데는 관심이 없는 미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유능하고, 또한  민주적인 기구를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잘 봐줘야 보잘 것 없는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성공을 거둔 국가 건설이 미국의 안위나 안보에는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군이 철군하고 난 뒤 아프가니스탄이 미군이 오기 이전 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번영하게 된다면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국가 건설이란 대외 정책을 보다 경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록에서 제1순위로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추진되고 있던 군사개입과 국가 건설이라는 문제를 이어받았고 이것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갔다. 비록 미국이 2011년 3월에는 리비아에서 비슷한 군사개입을 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나토의 역할을 강조한 작전 수행 방식은 미국이 개입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 하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 건설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둔다 해도 미국에게는 국제적으로 주된 역할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그 국가가 그들의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를,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규모로 제공하고 있다. 즉 미국은 실질적인 세계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The United States functions, that is, as the world’s de facto government.

미국은 세계의 기축 통화, 달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개방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무역로를 지키고 있다. 바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력은 비록 공식적인 적대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서로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이 지역의 국가들에게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심각한 위협을 미국이 나서서 직접 해결해 줄 것임을 보증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대부분 이렇게 이익이 되는 임무를 지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국방 예산을 적게 쓴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코앞에 닥친 경제적 제약의 시기에 세계 정부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는 그와 관련된 예산이 얼마나 많이 감축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것은 미국의 정치 체제가 특히 복지 비용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여 어느 정도 재정 적자를 감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불가피한 예산 감축이 미국을 넘어서 반향을 일으킬 것은 확실하다.

저는 이 글이 평소 제가 생각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필자는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국력을 아껴야 할 시점이 다가왔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지역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꼽고 있지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은 이익이 되는 임무beneficial missions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난번에 블로그에 썼던 「제국의 유지비용」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면 결국 이런 과정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이 되는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꽤 골치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미국의 대외 정책 입안가들이 이 글에 나타난 기조를 따르게 된다면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는 안보적으로 평온한 시기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2009년 2월 21일 토요일

안도감

1달러당 원화가 1,500원대를 돌파한 것을 보니 말이 안나옵니다.

지난해 말 정부의 개입으로 1,200원 중후반까지 떨어졌을 때 지금 책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여러권을 질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더 떨어지길 기대하다가 늦게 주문했으면 지금쯤 울화통이 치밀어 실신했을 듯 싶군요.

경제 관련 뉴스들을 보면 1,400원을 한 번 넘어가면 상승세가 꺾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고점일지, 아니면 계속 상승할 지 궁금하군요.

이번 용역이 끝나고 돈 받을 때 쯤에는 환율이 1,200원 이하로 떨어졌으면 싶습니다.

2009년 2월 3일 화요일

언제나 환율이 문제

현재 추진 중인 어떤 일 때문에 조금 뒤에 약속이 있습니다.

며칠 전 그 회사의 사장님과 통화를 했을 때 다른건 다 괜찮은데 환율이 걱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환율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데 오늘 뉴스를 보니 장중 환율이 1달러 당 1,400원대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올해 초의 경제 전망 중 1/4분기에는 환율이 1,300원 대에서 1,400원대를 오가다가 2/4분기 이후 안정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나쁜 쪽으로는 잘 들어 맞는군요. 환율 때문에 잘 풀릴 일도 꼬이지나 않을런지 걱정입니다. 업무는 물론이고 지름 생활에도 곤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진짜 골치 아프죠;;;;

이놈의 환율은 언제쯤 안정이 될 것인지;;;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1$ = 1328.1₩

오늘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훈훈한 경제뉴스;;;;;



1$ = 1328.1₩




우와앙~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독서생활에 지장이...

환율 폭등 1,079원..3년9개월래 최고(종합) - 연합뉴스

이건 뭐 대책이 없죠;;;;;;

유로도 여전히 강한데다 달러까지 이모양이니 난감합니다. 사야할 책이 산더미 같은데...

2008년 7월 6일 일요일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

역시,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서 파생된 글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더군요. 바보이반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전에 한번 읽었던 비더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의 회고록이 생각났습니다. 비더만은 평범한(?) 보병사단의 평범한(?) 장교였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인데다 결정적으로 포로생활을 아주 운좋게 마친 경우입니다. 비더만의 회고록에서 그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 봤습니다.

1945년~1946년 겨울의 이야기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업반은 눈 덮인 숲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어야 했다. 숲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해졌다.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베고 톱으로 나무를 켠 뒤 다시 그것을 해머와 쐐기로 쪼갰다. 이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용소 주위의 토지는 거의 콘크리트 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붙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시체는 보다 부드러운 늪지대에 매장해야 했다. 우리는 늪지의 땅을 긁어서 파내어 죽은 사람들이 안식을 취할 곳을 만들었다. 나는 시체 매장반으로 작업을 나갔을 때 산딸기를 발견해서 그것을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자로티(Sarotti)가 있었다. 물론 자로티는 그의 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명한 북해 지역 항구도시의 사업가 집안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의 자로티 초콜렛 공장을 경영했었다. 그의 침상은 바로 나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의 머리가 한 쪽으로 젖혀져 턱에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자로티의 시체를 밤 사이에 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늪으로 가져가 매장했다.
사망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급증했고 그 중에는 온스트메팅엔(Onstmettingen) 출신의 교사 헤르만과 엔드링엔(Endringen) 출신의 젊은 드레셔,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1945년과 1946년 겨울 사이에 내가 있던 수용소에 있던 포로 중 3분의 1 이상은 그들의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임시 공동묘지에서 마치게 되었다.

Gottlob Herbert Bidermann , Translated by Derek S. Zumbro, In Deadly Combat :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pp.302-303

그리고 1946년 봄이 되고 보다 큰 수용소로 이송된 비더만은 대우가 약간 개선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교 포로들에게 특별히 배급되는 물자를 받았는데 그것은 열 다섯 개피의 담배와 하루 5그램의 설탕이었다. 사병 포로들은 마호르카 담배를 받았다.

Ibid. p.306

우리는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망률은 작년의 사망률 보다는 낮았다.

Ibid. p.307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포로가 된 지 2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쓰여진 이 편지들에 답장을 보냈고 이 답장들은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우들과 알자스 출신의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의 현명한 정치인이 포로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것 이었다. 독일 출신의 포로들도 곧 석방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비록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식량 배급도 개선되었다.

Ibid. p.308

그리고 모범수(?) 비더만은 1948년에 석방되어 고향 땅을 밟게 됩니다. 이점에서 1950년에 석방된 일반 포로나 1955년에야 석방된 무장친위대나 경찰 출신 포로에 비하면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가. 비더만의 회고록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발터 셰흐터를(walter Schaechterle) 대위는 쿠어란트 집단군에서 통신장교로 있었다. 어느날 아침 셰흐터를 대위는 스페인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형편없는 식사에 항의해 노동을 거부했다. 이들은 사병들도 자신들의 항의에 참여해 주길 기대하고 행동을 했으나 사병들은 수용소내의 반파시스트 집단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곧 분노한 경비병들이 막사로 쳐들어와 총부리로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발터 셰흐터를과 두 명의 스페인인 장교는 따로 분리되어 격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사보타지 혐의로 종신형–보통 25년 정도-을 선고 받았고 키르기스탄 동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셰흐터를이 이송되기 직전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에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발터의 아버지는 비티히하임(Bietigheim)에 있는 리놀륨 공장의 이사로 있었고 2년이 넘도록 스웨덴을 통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발터의 아버지는 소련 고위 관료들에게 막대한 양의 미국 달러를 바친 뒤 마침내 아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1950년대에 펠바흐(Fellbach)에서 발터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재회를 축하했다.

Ibid. p. 309

과연 달러신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자본주의 만세!

2007년 2월 6일 화요일

[妄想大百科事典]US Dollar

skyhawk님의 지적에 따라 일부 수정 했습니다

US Dollar

세계의 유일신.

달러신은 중세 중부 유럽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던 탈러(Thaler)신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달러신 숭배가 시작된 것은 1785년 7월 6일의 일이라고 알려져있다.

달러신이 전 세계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7월 브레튼우즈(Brettonwoods) 종교회의 이후이다. 이 회의에서 세계 44개국의 종교학자, 율법학자들이 모여 그 동안 세계를 타락시킨 근본 원인이었던 황금신에 대한 유일 숭배를 타파하고 달러신이 황금신이 가진 신성을 고루 갖췄다는 이위일체론을 채택하여 달러신 숭배를 전 세계의 공식 신앙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브레튼우즈 종교회의 이후 뉴욕과 워싱턴은 전 세계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60-70년대를 거치면서 달러신의 영향력이 점차 퇴락했고 마침내 닉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달러신에 대한 이위일체론에 대해 불신을 표명하면서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

1976년 1월에 열린 킹스턴(Kingston) 종교회의 이후 달러신 숭배는 상당히 퇴락했으나 아직까지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신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섬기던 소련과 동유럽권에서도 달러신은 공공연히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달러신 숭배는 일반적이었다. 아랍권의 여러 토후국들도 공식적으로는 알라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달러신을 숭배하고 있다.

1998년 5월, 유럽의 개혁성향 종교인들은 새로 유로(Euro)신을 섬기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이후 유로 신앙이 동유럽과 중동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신 숭배는 여전히 굳건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평화를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