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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9일 금요일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개인적으로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볼까 하는 글이 몇 편 있었는데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이 확 지나갔군요. 오늘 소개할 글은 한달전인 8월9 일 Foreign Affairs 인터넷 판에 실린 마이클 만델바움Michael Mandelbaum 교수의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 How Budget Cuts Will Limit the United States’ Global Role”이란 글 입니다. 이미 한달이나 지난 글이긴 한데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 중에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늦게나마 번역해서 올립니다.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 : 예산 삭감이 미국의 국제적인 역할을 어떻게 제약할 것인가
-마이클 만델바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8월 2일에 서명한, 연방예산 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미국의 부채 한도를 상향한 법안을 이끌어낸 치열한 협상은 적자를 통제하려는 전투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 전투는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것이며, 어렵고, 그리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것 중 하나는 이미 수년전 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대외 정책 및 안보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이다. 이것은 미국의 힘을 세계 전역에 투사하는데 새로운 제약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일 년만에 얼마만큼이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바로 지난해의 포린 어페어즈 5/6월호에 나는 책 세 권에 대한 서평을 실었는데 이 세 권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미국이 그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세 명의 저자들은 미국의 이익과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이 보다 신중한 대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그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측한 것 처럼 미국의 재정 상태는 그러한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이행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책들의 저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처럼) 더 좋든 혹은 (내 자신의 견해 처럼) 더 나쁘건 간에.

8월 2일의 법안은 향후 10년간 1조 달러의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중 3500억 달러가 국방 예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법안은 그 다음 10년간 1조5천억 달러의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의회 특별 위원회가 이러한 삭감 목표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일괄적인 예산 감축이 강요될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국방부의 예산은 6천억 달러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다.

설사 자동적인 예산 감축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국방 예산과 그 밖에 미국의 다른 대외 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은 다음 10여년간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재정을 굳건한 기반위에 올려놓기 위해 필요한 적자 감축의 규모는 엄청나기 때문에 민주당 측에서 사회의 안보와 의료보험은 손대길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도 감축하게 될 것이며 공화당 측에서 증세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증세가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정부에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받는 것은 더 적어진다면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 처럼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지지하는데 관대함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국방예산이 감축되는 데에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는 냉전 기간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느꼈던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국방 지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는 그들이 위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좌우된다. 최소한 얼마동안은 세계가 특별히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방 예산을 둘러싼 정치가 국방부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연방 예산에서 자신들의 몫을 지켜낼 수도 없는 상태이다. 민주당 내에서 외교와 안보 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 세력은 없다. 공화당 측에는 국가 안보정책에 있어 대규모 군사력과 강경한 대외정책에 헌신하는 매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는 두개의 다른 집단이 있다. 사회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s들은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무관심하며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을 지지한다. 이제 티 파티 운동의 입장을 표명하는 공화당에서 가장 영향령 있는 집단은 그들의 주요 목적을 위하여 국방 예산을 희생시킬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과거에 해왔던 것 보다는 훨씬 적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어떤 부분이 중단 될 것이며 또 중단 해야 할 것인가? 내가 2010년에 낸 책, The Frugal Superpower에서 논했던 것 처럼 21세기의 외교 정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이 가장 쉽게 그만 둘 수 있는 일은 냉전 이후의 첫 20년 동안 소말리아, 아이티,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군사 개입이다. 이러한 작전들은 각자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모두 다 원치 않는, 장기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국가 건설이라는 심각한 과업을 미국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들은 정부 체제가 붕괴한 곳에 그것을 재건해 주거나 그러한 것이 아예 존재 하지 않는 곳에 정부 체제를 세워주는 일이었다. 국가 건설이라는 정책은 세 가지의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러한 정책이 자신을 방어하는 데는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지만 다른 이들을 통치하거나 다른 이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도와주는데는 관심이 없는 미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유능하고, 또한  민주적인 기구를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잘 봐줘야 보잘 것 없는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성공을 거둔 국가 건설이 미국의 안위나 안보에는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군이 철군하고 난 뒤 아프가니스탄이 미군이 오기 이전 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번영하게 된다면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국가 건설이란 대외 정책을 보다 경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록에서 제1순위로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추진되고 있던 군사개입과 국가 건설이라는 문제를 이어받았고 이것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갔다. 비록 미국이 2011년 3월에는 리비아에서 비슷한 군사개입을 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나토의 역할을 강조한 작전 수행 방식은 미국이 개입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 하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 건설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둔다 해도 미국에게는 국제적으로 주된 역할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그 국가가 그들의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를,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규모로 제공하고 있다. 즉 미국은 실질적인 세계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The United States functions, that is, as the world’s de facto government.

미국은 세계의 기축 통화, 달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개방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무역로를 지키고 있다. 바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력은 비록 공식적인 적대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서로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이 지역의 국가들에게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심각한 위협을 미국이 나서서 직접 해결해 줄 것임을 보증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대부분 이렇게 이익이 되는 임무를 지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국방 예산을 적게 쓴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코앞에 닥친 경제적 제약의 시기에 세계 정부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는 그와 관련된 예산이 얼마나 많이 감축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것은 미국의 정치 체제가 특히 복지 비용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여 어느 정도 재정 적자를 감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불가피한 예산 감축이 미국을 넘어서 반향을 일으킬 것은 확실하다.

저는 이 글이 평소 제가 생각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필자는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국력을 아껴야 할 시점이 다가왔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지역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꼽고 있지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은 이익이 되는 임무beneficial missions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난번에 블로그에 썼던 「제국의 유지비용」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면 결국 이런 과정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이 되는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꽤 골치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미국의 대외 정책 입안가들이 이 글에 나타난 기조를 따르게 된다면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는 안보적으로 평온한 시기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2011년 3월 6일 일요일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중동의 정세가 급박히 돌아가다 보니 쏟아지는 기사들을 읽는 것도 일이군요. 리비아가 사실상 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 국내 언론에서 이집트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문제도 현재 진행형이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집트쪽이 훨씬 흥미가 당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3월 19일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투표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무바라크가 장기집권을 해 온 배경에는 문제 투성이의 이집트 헌법이 있고 이 헌법은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의 불만 대상이기도 합니다.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이 나왔는데 제가 읽은 것 중에서 재미있었던 글을 조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먼저 오늘 소개할 이 글은 지난 2월 15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판에 실린 Nathan J. Brown의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이 라는 글 입니다.(제목은 아주 살짝 의역을 했습니다) 물론 이집트 군부가 지난 2월 26일에 헌법개정안을 내놓고 이번달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약간 늦은 감이 없진 않습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집트 헌정 전통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잘 설명한 만큼 현재의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는 적절하리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만큼 이집트의 헌법 개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통치가 종식된 다음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 나가려는 이집트 인들은 당연하게도 이집트의 헌정사(constitutional past)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제점들을 뽑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군사위원회가 무바라크에게서 권력을 양도받은 이후 이집트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은 직접적인 법률과 법적 절차에 대해 명확하게 요구하려 하고 있다.

현재의 헌법은 1971년 처음 제정되어 그 후 수년간 여러 번 수정되었지만 이집트의 헌법 자체는 1세기 이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는 1882년에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며 이때 의회는 행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집트가 1923년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획득했을때 의회체제와 왕정을 통합하려는 두 번째의,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법안이 어렵게 나마 만들어졌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1923년 헌법이 폐기되는 와중에 이집트의 법학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입각한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54년 이집트의 새로운 군사 통치자들은 법학자들의 법안을 보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들의 사상적, 조직적 요구에 적합한 일련의 법안을 선포했다. 이 새로운 법은 이집트의 국가조직을 1970년 사망할 때 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직을 차지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모든 권한을 가지는 일당체제에 넘겨버렸다.

이집트는 1971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보다 복잡했으며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안와르 알 사다트는 나세르의 뒤를 잇는 과정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정당과 안보 기구등 여러 조직에 자신의 경쟁자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다트는 동시에 이집트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주의에서 종교쪽으로 조심스럽게 전환하는 방식으로 재조정하고자 했다. 사다트는 새 헌법을 제정해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다트는 대규모의,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페미니스트, 이슬람 율법학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들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사다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당은 약화시키고 명목상으로 법적 기구들은 강화하는 한편 나세르식의 독재체제에서 가혹했던 점은 멀리 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법안은 모두에게 미미한 것을 약속한 반면 대통령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헌 법은 개인의 자유, 민주적인 절차,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했다. 새 헌법은 사회주의와 이슬람 양쪽을 긍정했다. 하지만 모든 공약에는 동시에 함정이 있었고 모든 자유에는 대통령의 권한이나 이집트의 강력한 안보 기구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하는 궁극적인 허점이 있었다.

지난 40여년간 이집트의 대통령은 헌법을 땜빵으로 고쳐서 이용해 왔다. 사다트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조치를 더 취하는 한편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 많은 양보를 했다. 사다트는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의 정당 - 현재 몰락하고 있는 국가민주당 - 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형식적으로 다원화된 정치 체계로 대체했다. 하나를 양보하면 그 만큼 반대로 얻어내는 것 이었다. 1980년, 언론을 통제하던 하나의 정당이 해체되자 그 권한은 새로운 국가언론위원회로 넘어갔다.

무바라크는 대부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헌법을 방치해 뒀는데 그는 이집트가 사상과 국가 기구의 개편을 계속 하는 대신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일부이나마 점진적인 변화를 했으며 간혹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도입한 제한적인 다당제에서 정당의 참여를 확대했으며 1980년대에는 야당성향의 언론들이,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독립 언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의 정치적 행보는 여전히 일직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국가 체제가 가혹한 독재기구에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억압기구들이 부활했으며 이슬람 과격파는 물론 훨씬 온건한 무슬림 형제단을 상대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80년대에 들어와 이집트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 중 일부가 주로 사법부의 주도하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제정된 새 사법부법은 이집트의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 자율성을 주었으며 정부 조직이 당사자인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는 일반 시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원래 사법부의 다른 조직들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인  최고헌법재판소였다. 이집트의 사법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여나갔고 실제로 이집트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선거법에 대한 일련의 판결들은 보다 개방적인 투표 절차를 취하게 했다. 2005년에 이르자 의회의 5분의 1은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밖의 다른 군소 정당들은 정권과 연합했지만 느슨한 정당 체계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 졌다.

무바라크 정권은 2007년에 들어와 1971년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폐기하는 일련의 헌법 개정안을 내 놓았다. 여기에는 선거를 사법부의 완전한 관할에서 정권이 관할하는 위원회들의 통제하에 넣는 것, 형식상으로 대통령 후보로 다수의 입후보자를 허용하되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자들을 최대한 제한하는 것, 무슬림 형제단이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그리고 (유죄판결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내리기 위해 사건들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군사재판에 넘기는 것과 같이) 이전에는 극도의 긴급 수단이었던 것들을 헌법에 삽입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저항 운동이 행동 지침으로 헌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놀랄일도 아니었다. 수년간 반정부 활동가들과 개혁 운동가들은 1971년 헌법에 있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들이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약간의 헌법 조항을 넣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2007년 개정안은 법안 전체에 교묘한 덫을 깔아놓았다. 땜질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반정부 지도자들이 “혁명”을 말하기 시작했을때 이들은 단지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것 뿐 만 아니라 1971년 헌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은 2월 11일 헌법적 절차가 방기되고 2월 13일에는 헌법이 효력 정지되자 기세가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군부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면 근본적인 개혁이 가시화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정권이 반대파와 협상하려는 의지에 좌우되며 정치적 재건을 위한 진정으로 포괄적인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파에게 극도로 위험 부담이 큰 전략이다.

20세기의 이집트 인들은 올바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법률의 힘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 그에 반대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집트 인들은 훌륭한 법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현재 새로운 헌정 질서의 요소에 대해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에서 노동 운동에서 시작한 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집단은 포괄적인 개혁 방안에 합의할 것이다.

반대파들은 대통령의 권한 축소, 주로 더 독립적이고 강력한 사법기구의 형식을 골자로 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제도적 보장, 사법부의 선거 관리, 특수 법정의 폐지와 (1939년 이래로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이집트의 국가 긴급사태 중지,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확고한 수단, 그리고 제대로 된 다당제 체계 등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된 변화들은 세가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첫 번째는 이집트 국민들이 기존의 제도를 훨씬 더 신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자유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다당제 정치 체제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수평적인 신뢰의 메커니즘을 활성화 하여 이집트의 여러 헌법 조직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요소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헌정사에 대해 심도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 이집트는 제도적 절차를 갖춘 국가이지만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 들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진정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헌법 조문에 명시된 모호한 약속들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식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제안할 필요는 없지만 이집트의 헌법을 제정할 담당자들은 제도적 기구들이 명확하게 구분된 범주에서 통제되는 “분권”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일일까?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집트가 깊은 전통과 전문적인 기준을 가진 오래된 헌정적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헌법적 절차가 정체성과 이슬람에 대한 상징적인 논쟁을 촉발하겠지만 이렇게 이론이 분분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현재 이집트의 헌법에 있는 일부 조항들은 대부분의 진영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헌정 혁명에 대한 진정한 장애물은 사방에 널려있다. 우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집트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기존의 헌법들은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집트에는 제헌의회와 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어본 전통이 없다. 이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정당들이 협상에 참여해 진행과정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 정파는 실질적인 이익에 따라 합의를 도출하려 할 것이며 반대세력들은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합의에 임할 것이며 그 과정은 느리고 고될 것이다.

만약 군부 통치자들이 덜 급진적인 해결책을 밀어붙인다면 합의는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집트 정부는 현재 (개혁에 대해) 매우 온건한 발언을 하는 한편 아주 미약한 의지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 실제로 군부 지도자들은 그저 현재의 헌법을 수정하는데 그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민주적이거나 포괄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절차는 과거 헌법을 고치거나 대통령을 선출할 때의 방식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인다. 지도자들이 먼저 결정을 내린 다음에야 국민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현시점에서는 이집트의 군부 지도자들의 뜻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군부 지도자들은 아직 그들의 선배들이 행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정권을 전복시켰던 장교단은 민정 이양을 약속했던 모하메드 나귀브(Mohammed Naguib)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헌법안은 대부분 나귀브가 통치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하지만 1954년 나세르가 나귀브를 쫒아내고 현재 이집트 혁명세력이 무릎을 꿇린 바로 그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하려면 지금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는 장군들에게 나귀브의 영혼이 마법을 부려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3월 2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를 번역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입니다.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What I Found in North Korea

며칠 전 언급했던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을 번역해 봤습니다. 이미 언론에도 많이 언급이 되어 뒷북인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 일단 저는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헤커 박사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들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별도로 붉은 색 표시를 했습니다.

지난 11월 12일, 내가 마지막으로 영변 핵 시설을 방문했을 때 북한 과학자들은 나와 나의 동료, 루이스(John W. Lewis)와 칼린(Robert Carlin)에게 작은규모의, 최근에 완성된 산업수준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건설중인 실험용 경수로를 보여줬다.

나는 두 곳의 케스케이드(cascade) 실에 2,000개의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것과 최신의 통제실이 갖춰진 것에 놀랐다. 그리고 먼길을 거쳐 평양으로 귀환한 뒤 이 발견의 정치적 의미가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의 핵 개발을 제한하는 것과 한반도의 조용한 긴장상태가 지금보다 중요한 적은 없었다. 특히 지난달 하순 남북한이 서해에서 충돌한 사건을 고려한다면 특히 더 그러하다.

비록 나와 다른 비확산 전문가들은 오래전 부터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한 근거에 의거해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십수개의 1세대 원심분리기가 아니라 완전한 가동상태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는 최신형 원심분리기들이 셀수 없이 줄지어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북한측은 우리에게 원심분리기 시설은 2009년 4월 부터 건설을 시작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특수한 원자재와 부속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원활하게 가동되는 원심분리실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한의 주장은 신뢰할 수가 없다. 북한이 이러한 물자들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는가는 국제적인 핵 비확산 체제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북한이 자체적으로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이나 강철합금, 고리자석, 베어링, 진공밸브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이러한 설비들이 오래 전 부터 다른 장소에서 건설되어 가동에 들어갔으며 새로운 시설로 옮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이다. 원심분리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품목들은 파키스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조달 체계를 통해서 조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파키스탄의 전직 대통령 무샤라프(Pervez Musharraf)는 그의 회고에서  파키스탄 과학자 칸(A. Q. Khan)이 2000년 즈음에 원심분리기 24대 분에 해당하는 농축 시작용 부품(enrichment starter kit)을 조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칸이 2004년 체포되기 전에도 북한 과학자들이 칸의 연구소와 밀접하게 협력했으며 칸의 연구소는 원심분리설비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실시했다. 또 2001년 말에는 CIA가 의회 보고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위해서 러시아와 독일로 부터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물자들을 획득하려 한다는 정보를 밝혔다. 그리고 최소한 몇몇 부품은 북한이 독자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북한과 이란이 미사일 기술에 대해 밀접한 교류를 시작한 이래로 두 국가의 협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북한의 원심분리 시설은 이란이 국제 사찰단에 공개한 것 보다 훨씬 정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란이 차세대 원심분리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북한은 우라늄 처리와 원자로 기술에 있어 이란 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것을 이란에 제공하는 것도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우라늄 원심분리 계획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설에 대한 사소한 흔적과 징후들은 평가를 골치 아프게 한다. 북한이 현재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표는 북한이 다른 나라, 이 경우에는 파키스탄으로 부터 물자를 조달하려는 활동과 기술협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2002년, CIA는 이러한 징후들을 가지고 북한이 2000년대 중반 부터는 연간 두 개의 고농축 우라늄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바 있다. 2002년 10월,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 증거를 가지고 북한과 대립했고 이로써 비핵화를 조건으로 궁극적인 관계 정상화로 나가려 했던 1994년의 합의 체제는 끝을 보게 되었다. 합의가 파탄나자 북한은 이를 구실로 핵비확산조약을 탈퇴하고 폐연료봉으로 폭탄을 생산하기 위한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첫 번째 핵폭탄을 만들었다.

이 때를 되돌아 보면 2002년 10월의 대립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원인은 정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합의 체제를 무너뜨린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정치적 결단에 있다. 영변에서 북한측은 우리에게 나중에는 보다 큰 원자로를 만들 것이며 원자로 기술과 연료 문제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우리를 안내한 북한 외무성 관리는 북한이 과거 경수로를 만들고 자체적인 농축시설을 만들겠다고 위협했지만 “헤커 박사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북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미국의 행동이 그들을 이 길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북한에 경수로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1985년 소련과 두 개의 경수로를 제공받는 협정을 체결한 이래로 진지하게 경수로를 추진했다. 합의체제는 핵무기 제조에 유리하지만 원자력 발전에는 불리한 흑연감속로를 대체하려는 것 이었다. 반면 경수로는 폭탄 제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전력 생산에는 매우 좋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고 예상대로 UN의 규탄이 나오자 북한 정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는 주체적인 원료와 기술에 기반해 100퍼센트 작동하는 경수로를 개발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제 북한은 호언했던대로 25~3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소형의 실험용 경수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북한이 진짜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경수로가 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도 쓰일 수 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경수로에서 만들어낸 플루토늄은 기존의 흑연감속로에서 생산한 플루토늄 처럼 폭탄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사실 북한이 플루토늄 폭탄에 필요한 연료를 더 필요로 한다면 경수로를 만드는 대신 기존의 흑연감속로를 재가동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원자로의 건설은 몇 가지의 정책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경수로는 농축 우라늄을 필요로 하는데 만약 원자로 연료로 사용할 농축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북한은 이것을 쉽게 고농축우라늄 폭탄의 원료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이란의 핵 계획에 대해 우려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 시설들을 공개하면서 미국의 정책 입안가들에게 진지하게 고려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경우 시설 공개는 핵 계획이 외교 정세에서 북한에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미국의 대선 일정에 맞춰 사전에 조율된 계획의 일부일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국제 사회가 2009년 4월의 로켓 발사를 비난한 뒤 공식적으로 6자 회담에서 탈퇴하고 국내 정치용으로, 그리고 국제 사회에 북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핵 기폭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게 위해 2차 핵실험을 실행했다.

동시에 북한은 소형 경수로를 설계하고 영변의 연료봉생산시설의 일부를 전환하고 원심분리기를 설치하여 농축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우리의 방문 일정을 그들이 계획을 완료한 시점에 맞추었다. 북한은 이를 통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전력 생산용 경수로에 대한 야심에 한발짝 다가서면서 우라늄 농축 계획의 필요성을 정당화 하려 했다.

진실은 북한이 처음 부터 핵무기와 전력 생산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플루토늄과 우라늄 계획을 함께 진행해 왔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반 핵무기와 전력 생산 때문에 플루토늄 계획을 선호했었으나 동시에 1994년 합의 체제의 일환으로 미국이 전력 생산을 위한 경수로를 제공한다면 플루토늄 폭탄 계획은 맞바꿀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칸 박사와 접촉하고 합의 체제가 매우 느리게 이행되면서 1990년대 후반 폭탄 생산을 위해 우라늄 계획을 다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무렵에는 많은 정보 보고서가 보여주었 듯 북한은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을 본격적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2002년 10월의 외교적 대립은 북한이 2003년 플루토늄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고 그 뒤의 핵실험을 통해 폭탄 개발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려 했다.

북한이 이번에 우리게에 보여준 현대화된 원심분리시설은 북한이 결코 폭탄 생산을 위한 우라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충분한 원자재와 부품을 획득하였고 이것들을 가공하고 조립해서 작동되는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은폐된 시설에 설치해 가동에 들어간 뒤 다시 영변으로 그것들을 재빨리 옮겨서 설치했다. 우리가 목격한 원심 분리 시설은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의 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핵무기 생산시설을) 과거 한 차례 사찰을 받았던 장소에 설치해 놓고 외국인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위한 시설도 현재 북한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제는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이다. 우리가 추정하기로는 북한은 이미 네개에서 여덟개의 초보적인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양의 고농축우라늄을 보유한다고 해도 북한의 위협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고농축 우라늄으로 폭탄을 만드는 것은 더 쉽지만 보다 복잡하고 소형의 폭탄을 만드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북한이 현재의 폭탄 보유량을 유지하거나 폭탄을 조금 더 생산할 생각이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재가동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북한이 핵무기 보유량을 본격적으로 늘릴 생각이라면 현재의 농축시설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거나 별도의 비밀 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당장 원심분리기를 늘릴 수는 없을 것이다. 원심분리기를 늘리는 것은 중요한 재료와 부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북한의 광범위한 불법 조달 경로를 봉쇄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늘리는 것 보다 더 골치아픈 것은 북한이 핵물질이나 핵물질 생산 시설, 특히 원심분리기 기술과 같은 것을 수출할 가능성이다. 게다가 북한은 경수로와 농축 시설을 공개함으로써 사실상 비핵화의 개념을 재정립했고 외교적 방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가까운 시일 내에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을뿐만 아니라 경수로 계획과 원심분리시설도 계속해서 추진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플루토늄 계획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거의 성공할 수 있었지만 우라늄 계획은 그와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라늄 계획은 플로토늄 만큼이나 골치 아프지만 플루토늄 계획 보다 훨씬 그럴싸하게 평화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외무성의 관료는 북한이 2005년 6자 회담 공동성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계속해서 지지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시발점으로 미국이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 성명을 재확인 해 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장기간의 외교적 과정의 최고점이었던 이 문서는 양국 정부가 상대국에 대해 적대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과거의 적대 관계에서 자유로운 새 관계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확인하는 것 이었다.

이제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핵 문제에 국한시키지 말고 전반적으로 재검토 해야 할 시점에 왔다. 근본적이고 항속적인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미국 정부는 내가 “세가지 No”에 대한 답으로 하나의 Yes 라고 부른 것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 (세 가지 No는) 더 이상의 핵폭탄 생산을 하지 않을 것, 핵폭탄의 개량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핵 물질의 수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and no exports) (한 가지 Yes는) 미국이 북한의 근본적인 안보적 불안을 공동 성명의 취지 내에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외무성의 안내인에게 북한이 세가지 No와 하나의 Yes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명확하게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도 이에 대답할 것 입니다.”

북한이 원심분리시설을 공개한 것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그 어느 때 보다도 어려우면서 시급하게 하고 있다.

엉성한 날림 번역 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인 요지를 전달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듯 싶습니다;;;;

일단 저는 북한이 핵 무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헤커 박사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특히 제 마음에 가장 걸리는 헤커 박사의 제안 입니다. 더 이상의 핵폭탄 생산을 하지 않을 것, 핵폭탄의 개량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핵 물질의 수출을 하지 않을 것(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and no exports)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긴 합니다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지 의문입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이 핵확산 방지를 위해 북한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핵 무기를 묵인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이 깜깜합니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글

며칠전 포린 어페어즈 웹사이트에 북한의 우라늄 시설을 방문한 시그프리드 헤커(Siegfried S. Hecker) 박사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조금전 RSS피드를 확인하다가 읽었는데 꽤 흥미로운 글이니 다른 분들도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지금 조금 바빠서 전문을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시기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북한이 2009년 부터 시설을 건설한 것이 맞으며 이명박 정부의 '강경책(?)'에 책임이 있다는 근거로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헤커 박사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2009년 4월 부터 건설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That is not credible)'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야권과 야권 편향적 언론들은 2009년 부터 건설을 시작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이 글은 한번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커 박사는 자신이 시찰한 시설의 설비들이 이미 훨씬 오래전에 만들어져 최근에 옮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략 한번 훑어봤는데 골치아픈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