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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7일 금요일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

국내에 나온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들은 대개 신해혁명을 다룬 다음 1차대전에 대한 설명은 간략히 하고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과 5∙4운동에 대한 서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국내에 출간된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를 모두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개설서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1차대전 같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중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개설서라 하더라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게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중국사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를 찾아 보다 보니 정말 중국과 1차대전의 관계에 대한 단행본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권의 연구는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과 함께 해외 중국학 연구의 양대 산맥인 영어권의 연구가 저 정도 라는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쉬궈치(Xu Guoqi, 徐国琦)의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는 바로 영어권의 중국사 연구에서 ‘공백’이라고 할 만한 1차대전기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유럽 파송 같은 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을 1차대전이라는 하나의 틀에 넣어 잘 정리해 놓은 글은 처음 접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연구서가 한 권 나온 일이 있긴 하다는데 이것은 중국 쪽 자료를 별로 이용하지 않고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자인 쉬궈치가 1차대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초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중국의 지식층은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병립은 다소 모순되게 느껴지는데 20세기 초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것의 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국력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국제질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강화된 민족주의는 5∙4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5∙4운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1차대전 중 근대적 민족주의가 함양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 수궈치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중국의 역할 자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 키건이나 니알 퍼거슨 등이 쓴 유명한 개설서들은 1차대전 중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중 중국 지식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청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은 아직 세계체제(World System)하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체제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중화’라는 개념 대신 ‘시민’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민’의 사상적기반으로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저자는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를 타고 수많은 근대적 언론매체들이 등장한 것은 대중(public)의 증가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적 ‘대중’은 중국의 국가적 운명과 주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대중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르는데 좀 오묘한 느낌이 드는 용어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중국 민족국가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문제로 골몰하고 있을 때 드디어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기회가 왔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 입니다.

저자는 중국정부가 1차대전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전쟁에 교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한다면 새로운 중국 국가는 평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량치차오(양계초, 梁啟超)와 같은 지식인들과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원세개의 측근이고 참정원(參政院) 참정으로 있던 량스이(梁士詒)는 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에게 참전을 부추겼고 원세개는 주중공사 존 조던(John Jordan)에게 영국이 칭타오를 공격할 경우 중국군 50,000명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1915년 말까지 계속해서 영국에게 참전의사를 밝힙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만약 중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의 참전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참전제안을 거부당하자 중국 정부는 우회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노동자 파견을 제안합니다. 이공대병(以工代兵) 이라는 정책은 역시 량스이의 발상이었다고 하는데 량스이는 1915년 영국측에 30만명의 노무자(이 중 10만명은 전선에 투입될 무장 노무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서부전선의 소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1915년 3월 프랑스가 중국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해왔고 영국은 1916년 8월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노무자들이 서부전선으로 파견됩니다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공헌은 철저히 무시당합니다. 당시 영국 외무상이었던 밸푸어(Arthur Balfour)는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해서 “1실링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는 군요.
물론 중국도 뒤에 공식으로 전쟁에 참전하긴 합니다만 애당초 중국군 파병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한 미국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군사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중국은 선전포고만 하고 전투는 참여하지 못 하게 됩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연합군에 기여한 것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참여한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 와중에 원세개가 다시 제정을 부활하려다 정권 자체가 무너져 버려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중국의 주장이 모두 무시당하면서 낭만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중화민국 초기의 외교정책은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 국제체제에 편입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무산되게 됩니다. 신해혁명 이후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적인 중국 지식인들은 1차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보인 태도를 통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깨닫고 이후 공산주의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지식인들이 냉전 초기까지도 국제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 이었는데 저자의 일부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노무자 파견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식민지 이긴 했지만 역시 수많은 노동자와 전투 병력을 파견한 베트남의 전쟁 기여도가 차라리 중국 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파병조차 하지 못했으니 기존 역사가들의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저자의 일부 논지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쉬궈치는 근대국가 건설문제를 국제전쟁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시각을 매우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일자가 다가와서 허겁지겁 읽느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은데 뒤에 다시 시간을 내서 숙독해볼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권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2008년 8월 10일 일요일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러시아의 병력동원과 철도 문제

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로스뚜노프 외, 『러일전쟁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s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008년 2월 22일 금요일

윈스턴 처칠의 덜 알려진 저작 - The Unknown War

서산돼지님이 쓰신 윈스턴 처칠의 문장력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이 나서 적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윈스턴 처칠이 '훌륭한 정치가'였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만 처칠이 ‘좋은 글쟁이’ 였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는 정치인 치고는 상당히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또 그 저작들 중에는 읽을만한 책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칠의 저작 중에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작도 있습니다.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The Unknown War'입니다.

The Unknown War는 처칠의 1차대전 회고록 이라고 할 수 있는 The World Crisis의 외전(?)격인 저작으로 1931년에 출간됐습니다.(제가 읽은 것은 1932년에 나온 미국판 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처칠은 책의 서두에서 To our faithful allies and comrades in the Russian Imperial Army라고 써서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서방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동부전선의 실상을 조명하려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뭐, 유감스럽게도 The Eastern Front 1914~1917의 저자인 Norman Stone이 1970년대에 지적한 대로 처칠의 저서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무관심의 대상입니다. 이런 무관심은 여전한지 2006년에 Schöningh 출판사에서 나온 1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대한 책의 제목은 Die vergessene Front(잊혀진 전선)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Norman Stone은 처칠의 저작에 대해서 호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저작이기도 하겠지만 처칠의 문장은 영어권에서는 좋게 평가 받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책의 대부분이 1914~1915년의 기간에 할애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 책의 본문은 381쪽인데 이 중 357쪽까지가 브루실로프 공세 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30쪽도 채 안되는 것 입니다. 도데체 왜 이런 난감한 구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1914~1915년 전역에 대한 묘사는 Stone의 평가대로 꽤 훌륭한 것 같습니다.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함락시킬 때 까지는 상당히 재미있더군요. 물론 그 후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로는 휙휙 날아갑니다만.

이 책은 1950년대에 한국의 대학들에 원조된 미국방부의 수많은 기증 도서 중 한 권 이다 보니 아직 학생이신 분들은 재학 중인 학교의 도서관을 잘 찾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Norman Stone의 동부전선에 대한 저작도 꽤 호평을 받은 물건입니다. Niall Ferguson이 ‘Without question one of the classics of post-war historical scholarship’이라고 평했더군요. 이 책은 가격도 싸고 구하기도 쉬우니 1차대전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2008년 1월 7일 월요일

독일군도 상륙작전을 할 줄 안다! : 1917년 10월의 알비온 작전

2008-01-07 / PM 10:50 본문 조금 추가하고 지도도 넣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감행된 대규모 상륙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에게 대재앙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이 전쟁에서 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독일군이 당당하게(?)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 해군은 사실상 항구에 틀어 박혀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손가락만 빨고 놀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독일 해군이 놀 곳이 있긴 있었으니 바로 발틱해 였습니다. 1917년 10월, 독일은 할일 없는 해군을 동원해 리가만의 세 섬, 사레마(Saaremaa, 독일/스웨덴어로는 Ösel)와 히우마(Hiiumaa, 독일/스웨덴어로는 Dagö), 무우(Muhu, 독일/스웨덴어로는 Moon, Mohn)에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은 꽤 멋진 이름을 달게 됐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알비온(Albion) 이었습니다.



1. 알비온 작전의 준비

알비온 작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해군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서 리가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리가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레마와 히우마를 먼저 떨어트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은 1915년 하반기부터 이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에 리가 지역에 대한 공세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일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결판을 낸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인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그의 무덤이 될 베르덩에 대한 공세 준비에 몰두하느라 해군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 보였습니다. 해군은 다시 1916년 3월에 보다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놓지만 여전히 팔켄하인의 관심은 베르덩에 있었습니다.

베르덩 공세가 결국 피박으로 끝나자 독일육군은 동부전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육군은 191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리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에 나온 첫번째 계획안은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제 8군이 드비나 강 까지 진출하는 비교적 소박(?)한 것 이었지만 팔켄하인의 후임인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좀 더 확대시키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17년 8월에 최종 승인된 계획안은 제 8군이 리가 전체를 장악하고 그 후속으로 상륙부대가 사레마, 히우마, 무우에 상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리가를 장악한 다음 단계인 상륙작전은 카텐(Hugo von Kathen)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 23예비군단이 수행할 계획이었고 상륙부대는 에스토르프(Ludwig von Estorff) 중장의 제 42보병사단 이었습니다. 제 42보병사단은 제 65보병여단 사령부와 함께 상륙작전을 위해서 사단 예하의 17, 131, 138 보병연대 외에 추가적으로 255 보병연대와 제 2자전거 보병여단, 그리고 독립 돌격중대들을 배속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해군과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서 1917년 8월 13일 해군작전국장인 카이저링크(Walther von Keyserlingk) 해군중장과 회의를 가집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은 9월 초 까지 리가를 함락시키고 그 이후 1개 사단을 투입해 세 섬을 제압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독일 해군의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항구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사기는 떨어지고 별다른 활동이 없다 보니 식량 배급도 줄어드는 악재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7년에 8월 2일에는 식량 사정의 악화에 불만을 품은 전함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드(Prinzregent Luitpold),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drich der Große), 카이저(Kaiser), 카이저린(Kaiserin), 베스트팔(Westphal)의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폭동은 진압되고 주동자 두 명이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비온 작전 직전 독일 해군의 상황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또 대해함대(Hochseeflotte) 사령관인 셰어 제독은 발틱해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셰어는 대해함대의 주 전장은 어디까지나 북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틱해로 병력을 쪼개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셰어 제독은 1917년 9월 11일에 열린 회의에 자신의 대리인인 우슬라(Ludolf von Usslar) 대령을 보내 알비온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여기에 발틱해 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Ostsee)인 하인리히공(Albert Wilhelm Heinrich von Preußen, 빌헬름 2세의 동생입니다)도 셰어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개입해 알비온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합니다. 빌헬름 2세의 작전 개시 명령은 9월 19일에 떨어졌고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제 8군 사령부는 9월 24일에 육군의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이것을 제 23예비군단에 하달합니다.

해군은 알비온 작전을 위해 제 3, 4전대(Geschwader)와 제 2초계집단(Aufklärungsgruppe), 제 2, 9어뢰전단(Torpedoboots Flottille) 을 중심으로 총 10척의 전함을 포함 300척의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이 중 병력 수송선은 19척 이었습니다. 함대의 지휘는 슈미트(Erhard Schmidt) 제독이 맡았으며 기함은 순양전함 몰트케 였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증강된 42보병사단으로 총 전력은 병력 24,596명, 말 8473마리, 야포 40문과 차량 2,490대였고 여기에 30일 치의 보급품이 함께 수송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행기 65대와 비행선 5대가 투입되는 말 그대로 입체전이 수행될 계획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독일군의 주력이 상륙할 사레마에 6인치 에서 12인치에 달하는 해안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의 기뢰를 부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독일 해군이 크게 우려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가 세 섬에 2개 보병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 해군이 상륙 저지를 위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 해군은 러시아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레마 섬의 북쪽, 타가만 일대를 상륙 지점으로 정했습니다. 타가만 일대는 6인치 해안포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타가만에 대한 상륙을 눈치채지 못 하도록 리가 만으로 통하는 Sõrve 반도에 기만 공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만 공격에는 제 4전대의 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쾨니히 알베르트 두 척이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12인치 포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척의 전함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제 1진인 4,500명은 타가만에 상륙해 상륙 지점의 6인치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그 뒤로 제 2진 3,000명이 상륙해 나머지 사단 부대가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2. 알비온작전의 개시

알비온 작전의 준비 단계인 지상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후티어의 제 8군은 러시아 제 12군에 사상자 25,000명과 야포 262문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히고 9월 3일에는 리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 제 8군의 손실은 4,200명에 그쳤습니다.

상륙은 9월 30일로 예정되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취소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을 총괄하는 제 8군 사령관 후티어는 기상 악화로 상륙이 연기되는 것을 우려해 마침내 10월 8일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륙 부대와 물자의 적재는 9일 시작되어 10일에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 상륙 부대가 출발합니다.

상륙부대는 12일 오전 3시에 타가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륙 부대는 타가만 북쪽 12km 지점에서 정지한 뒤 기뢰 제거작업과 상륙 부대의 전개를 시작했습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카텐 보병대장은 오전 4시 30분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고 상륙 부대의 제 1진인 제 138보병연대 1대대와 제 10돌격중대가 어뢰정에 탑승해 해안으로 돌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러시아군의 해안포대로 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함으로 해안포대에 대한 제압사격을 시작해 해안포들을 제압했습니다. 상륙부대의 제 1진은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오전 6시 18분까지 상륙과 장비 하역을 마쳤습니다.
주력 부대가 타가만에 상륙을 감행하는 동안 제 2자전거 보병여단이 주축이 된 조공 부대도 파메로트(Pamerot)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조공 부대의 화력지원은 전함 바이에른(Bayern)과 그로서 쿠어퓌르스트(Grosser Kurfürst)경순양함 엠덴(Emden)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기뢰지대에 들어가게 되어 전함 바이에른이 대파되었습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후속 부대인 제 138보병연대 주력과 제 131보병연대가 상륙했고 그 뒤를 제 17보병연대와 255보병연대가 따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 138연대 2대대를 실은 수송선이 기뢰와 접촉했고 이들은 수송선에서 내려 나무 보트로 상륙했습니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일 저녁까지 주력 부대는 물론 조공 부대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까지 상륙을 완료했습니다.

타가만의 상륙

하지만 다음날인 13일 기상이 악화되어 야포와 차량, 마필의 하역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파고가 심해 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호전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는 러시아군이 증원되거나 방어태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스토르프 중장은 위험하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포병의 지원없이 상륙한 보병부대만 가지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습니다. 에스트로프는 제 131보병연대는 남서쪽으로 진출해 Sõrve반도를 제압하고 제 255보병연대와 제 1자전거대대, 그리고 제 65보병여단이 지휘하는 17, 138보병연대는 사레마의 가장 큰 도시인 쿠레사레(Kuressaare 독일식 지명은 아렌스부르크Arensburg)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쿠레사레는 인구 5,000명에 사레마의 가장 큰 항구였고 또 비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공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오리사레(Orissaare, 독일식 지명은 오리사르Orrisar) 방면으로 진출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북익에서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것 이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이들을 지원할 항공기들이 작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항공기에 정찰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제외하면 작전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131보병연대는 Sõrve반도를 손쉽게 제압하고 12인치 해안포대의 러시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가 독일군에 손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의 핵심 부품을 파괴하고 무사히 철수했습니다.
한편, 제 255보병연대는 쿠레사레로 진격하는 도중 러시아군의 1개 기병연대(?)로부터 공격받았지만 이것을 격퇴시켰고 17연대와 138연대도 러시아군 방어선과 접촉해 이것을 돌파하고 포로 1,000명을 잡는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날 저녁 255연대의 정찰대는 러시아군이 쿠레사레를 버리고 퇴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토르프 중장은 러시아군을 신속히 추격하기 위해 다음날인 14일도 보병 부대만으로 추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에스토르프는 러시아군이 무우섬으로 퇴각하는 것을 신속히 저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중화기 없이 보병만으로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14일에는 비가 내려 보병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레사레를 점령한 3개 보병연대는 강행군으로 오리사레까지 진출, 조공 부대와 함께 러시아군을 협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독일 해군은 이날 러시아 해군의 구축함대와 교전, 구축함 그롬(Гром)을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신 독일군도 교전 도중 어뢰정 한 척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5일, 오리사레에 집결한 독일군은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군함 일부를 사레마와 무우 사이의 해협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미 오리사레에 도착해 있던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무우섬에 상륙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 138, 255보병연대가 포위된 러시아군을 소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으로 수비대장인 이바노프와 그의 참모진, 포로 5,000명을 생포하고 야포 8문, 기관총 8정과 말 200마리를 노획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무우의 수비대 7,000명도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해군 함정들도 사레마 수역에서 철수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교전으로 전노급 전함인 슬라바(Слава)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독일군의 소해정 몇 척과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일군과의 전력차가 커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발틱해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 해군의 잠수함 C32도 사레마 근처 해역에서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 당했습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해군 쪽에서 전사 131명과 부상 60명, 육군 쪽에서는 전사 54명과 부상 141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제 107, 118보병사단 등 2개 사단이 완전히 분쇄되고 포로 2만명과 포 141문, 그리고 사레마의 해안포 전부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고 평가됩니다.


참고자료

Richard L. DiNardo, Huns with Web-Feet : Operation Albion 1917, War in History 2005 12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7, Penguin, 1975, 1998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독일 육군의 기관총 도입과 운용 : 1894~1914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 농담거리가 생각이 안 나다 보니 이런 글이라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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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이 처음 선을 보이자 많은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유럽의 일류 육군국인 독일 또한 이 새로운 물건에 큰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1894년에 맥심 기관총의 실험을 참관한 빌헬름 2세는 기관총의 성능에 크게 감명을 받아 전쟁성에 기관총의 추가 시험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제의 취향 탓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독일 육군은 1895년에 기관총을 정식 채용합니다.

일선 부대가 기동훈련에서 기관총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8년이라고 합니다. 이 해에 동프로이센 제 1 군단의 엽병(Jäger) 대대는 기동 훈련에서 기관총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동훈련에서는 기관총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들은 기관총이 사격 시 총열의 과열 문제가 있고 기동 시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의 결과 엽병대대는 물론 정규 보병 연대 조차 기관총의 도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규 직업군인들 보다는 아마추어인 독일 황제가 기관총의 잠재력을 더 잘 파악 하고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군부에 기관총의 운용을 확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900년 9월의 기동훈련에서는 기병부대가 기관총을 운용했으나 기병 장교들 역시 기관총은 기동전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황제가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인 독일 보병 장교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 했으며 그 결과 1904년 까지도 독일 육군은 기관총을 독립 부대로 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총이 쓸만한 물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독일육군의 기관총 옹호자들은 기관총이 가진 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크레취마르(Kretzschmar), 플렉(A. Fleck), 메르카츠(Friedrich von Merkatz) 대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이 대표적인 기관총 옹호자였는데 이들은 기관총은 공격시 특정 지점에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플렉은 4정으로 이뤄진 기관총대(Maschinengewehr-abteilung : 대대가 아님)와 소총으로 무장한 100명의 보병(정면 80m로 산개)의 사격실험 결과를 통해 기관총 팀은 한 목표에 대해 5분간 3,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데 반해 보병 100명은 500발 내외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기관총의 유용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운용 시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 됐는데 가장 큰 문제는 보병부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기관총이 아군의 등 뒤에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점은 기관총 도입 초기에 빈번히 나타났으며 기관총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일본군의 경우 러일전쟁 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의 군인들은 기관총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 이전 까지 기관총의 화력은 포병의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규정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포병운용은 여전히 직접 사격을 통한 화력지원을 중요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병은 직접 화력지원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에 이동 및 사격 준비 사이가 매우 취약했는데 기관총은 바로 이 시점에서 포병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일 육군의 보수적인 장교들 마저 기관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기관총이 괴력을 발휘한 이후 였습니다. 독일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대량의 기관총을 운용해 효과를 거두자 기관총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 됐습니다.
독일은 1907년에 기관총 부대의 단위를 중대급으로 확대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4정에서 6정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에 총 12개의 기관총 부대가 중대급으로 확대되었고 1914년 발발 이전까지 현역 보병연대는 모두 기관총 중대를 가지게 됐으며 엽병 대대도 바이에른 1엽병대대와 바이에른 2엽병대대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총 중대를 배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기관총을 불신하던 보병과 기병 장교들 조차 기관총을 보병 및 기병연대의 편제에 넣어 줄 것을 전쟁성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사단마다 기관총대대(3개 중대 편성)을 넣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각편제 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각 연대별로 기관총 중대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1907년에는 기관총 팀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관총 1정 당 견인용 마필을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관총 1정 당 말 여섯 마리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성은 높였지만 전장에서는 적의 목표가 될 확률을 높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기관총의 소형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비록 일선 부대의 요구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MG 08이 도입됩니다. MG 08의 도입 이후 기관총 1정당 견인용 마필은 여섯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어 듭니다.(기병 사단 소속의 기관총대는 1정당 네 마리)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는 정규 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219개 중대, 엽병 대대에 배치된 것이 16개 중대, 예비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88개 중대, 기병 사단에 배치된 것이 11개 대(Abteilung), 보충사단에 배치된 것이 43개 대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향토연대(Landwehr-regiment)는 기관총 중대가 없었는데 사실 향토연대 급의 예비부대는 전쟁 와중에 소총부족으로 1916년까지 Gew 88을 지급 받을 정도였으니 기관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예비 사단 중에서는 제 1근위예비사단(Garde-reserve-division)이 좀 별종인데 이놈의 사단은 이름만 예비사단이었고 전쟁 발발 당시 정규 보병사단 편제를 갖춰 4개 기관총 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예비사단은 아니고 “근위(Garde)” 예비사단 이로군요. 그리고 제 1예비사단(Reserve-division)은 훨씬 더 해괴한 녀석인데 이 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예비 사단 주제에 예하 4개 보병연대 중 3개 연대가 기관총 중대를 2개씩 가지고 있어 기관총 중대가 7개나 됐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보병연대와 엽병대대에 배속된 일반적인 기관총 중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교 2명
부사관 및 사병 95명
말 45마리
기관총 7정(1정은 예비용)
탄약 수송용 마차 3대
야전 취사차 1대
장비 수송용 마차 1대
건초 수송용 마차 1대
화물 수송용 마차 1대

참고서적

Brose, Eric D.,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Cron, Hermann, Imperial German Army 1914~19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2001)
Echevarria Jr, Antulio J,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Stevenson , David,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Europe 1904~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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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

마른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람 잡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독일인들은 뭔가 화끈한 한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후세에 음흉한 이미지를 남긴 전쟁상 팔켄하인은 1914년 10월 초에 화학전을 위한 연구를 지시하고 재주 좋은 독일 엔지니어들은 150mm 유탄포로 발사하는 가스탄 시제품을 2주도 안되는 시간에 완성해 10월 27일 첫번째 실전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27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의 누브-샤펠(Nouve-Chapelle)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스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과는 조금 기묘한 것이 연합군은 독일군이 화학무기를 썼는지 전혀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은 이날의 성능시험에 만족했는지 바로 17,000발의 가스탄을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입니다.

독일군은 1915년 1월 15일에 동부전선의 볼리모프 전투에서 가스탄을 보다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즉, 본격적인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독일군은 공격준비사격 동안 15,000발의 가스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탄의 문제 때문인지 놀랍게도 가스탄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발사한 가스탄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 화학무기 사용은 독일군 고위지휘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은 도덕적으로 꺼림칙 한데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실전 시험에서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프르 전투에서는 전투 초반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는데 전과 확대에 필요한 예비대가 없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프르 전투에 투입된 화학전 부대는 바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해서 5월 31일 Humin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의 기후나 지형이 화학전에는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일단 사방이 평야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은 이날 220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1만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가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완강하게 저항해 독일군은 크게 고전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Humin 전투 뒤 동부전선에서 세 번에 걸쳐 독가스를 시험했는데 두 차례는 매우 난감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히 한번은 독일군이 가스탄 발사를 끝내고 얼마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가스가 그대로 독일군 방향으로 밀려왔고 이 황당한 상태에 처한 독일군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러시아군은 가스전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인 대응책을 고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가스 공격을 시작하면 해당 지역에 큰 불을 질러 독가스가 높이 올라가도록 만들어 독일인들에게 엿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론 1916년 이후 가스 사용 기술이 점차 세련돼 가면서 이런 임시적인 대응의 효과는 감소했고 러시아는 1차 대전기간 동안 50만 명을 가스 공격에 잃게 됩니다.

독가스는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여름에 걸친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믿고 쓰기엔 문제가 많은 물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 효과가 바람에 좌우된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욕을 먹어가면서 독가스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15-1916년 기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가스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연합군 병력은 연합군 전체 사상자의 0.85% 였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는 이것 보다는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007년 1월 21일 일요일

싱거운 위기(?) - 1887년 독일의 러시아 선제 공격계획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력에 힘입어 1890년까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1년에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그 동맹이 다소 불안하게 유지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동맹을 중시한 반면 대슬라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부터 공공연히 프랑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특히 독일 육군내에 러시아라는 새로운 가상 적국에 대해 경계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 터키와의 전쟁에서 직접 야전군을 지휘한 바 있었고 베를린회의에서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했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 즉위 이후 러시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육군의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해서 동원체제 개편, 신형 장비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독일측에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육군 개혁에 대해서는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을 참고 하시고.]

그리고 1887년 하반기부터 발칸반도, 특히 불가리아 문제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반독,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일이 터진 것은 1887년 11월이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동원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것은 발칸반도 문제 때문에 독일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군의 공격 시기는 1888년 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참모본부의 정세분석을 보고합니다.

독일은 러시아군의 총 병력이 824,000명이고 동원체제의 개편으로 전쟁이 개시되면 2,424,800명의 예비군이 동원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가 독일 전선에 투입 가능한 최대 병력을 약 25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제대로 동원만 되면 독일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훈련이 개선된 점과 보병화기와 포병이 개선된 점,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 내륙간의 철도망이 확대된 점은 독일측이 가장 큰 불안요인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에 러시아의 서부 철도망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실시해 폴란드의 철도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망 확충으로 병력 동원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 모른다는 점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가장 큰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군사적으로 약체라는 점도 동부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도 오스트리아 육군, 특히 보병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한다면 가능한 이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비스마르크에게 당장 병력 동원을 실시해 12월에서 1888년 1월 중으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몰트케는 1884년에 이미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선제 공격한다면 러시아의 동원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병력 우세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1885년 대 러시아 전쟁 계획은 제 4군(3개 군단, 4개 예비사단)과 제 3군(6개 군단, 5개 예비사단)으로 동원 개시 10일차에 국경을 돌파해 제 4군은 Kovno에 집결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파쇄공격을 감행하고 제 3군은 Pulutsk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격파해 전선을 단축한 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릴 때 까지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하는 것이 1885년 계획의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의 주장에 대해 1887년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조약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할 경우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독일이 러시아를 선제공격 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동맹의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고 독일 단독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와도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양면 전쟁을 치루는 경우 프랑스 우선 전략에 따라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결시켜야 하고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하는 일은 프랑스와 독일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만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기간이 유효한 마당에 성급하게 러시아를 도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1887년 겨울의 전쟁 위기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로 밝혀집니다.

1887년의 선제공격 계획은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습니다. 독일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판단합니다만 다행히도 알렉산드르 3세가 살아있을 때는 약간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결국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해 독일과 러시아 두 제국은 간판을 내리게 되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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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ndiana University Press
Konrad Kanis, Miliärführung und Grundfragen der Außenpolitik, Das Miliär und der Aufbruch in die Moerne 1860-1890, Oldenbourg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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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