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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7일 금요일

현리 전투 경험담 하나...

현리전투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한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분석이 이루어져 왔고 많은 경험담이 활자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매우 극적인 사건인 만큼 관련된 기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끌리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많으시겠지만 현리전투를 육군 신병으로 경험한 인물의 경험담입니다. 현리 포위망 내에서 겪은 경험을 제법 자세히 서술해 놓아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글 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 첫 전투로 맞이한 현리전투에서 겪은 공포와 공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라서 좀 길게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런 병영생활일망정 그런대로 익숙해 가던 1951년 5월 중순, 그 곳(9사단 보충대)에 배치된 지 스무 날 쯤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새벽 천막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연병장에 뛰쳐나온 우리들 신병 셋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장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사단 앞의 연병장은 말할 것도 없고, 냇가 건너편의 골짜기까지 군인들로 꽉 찬 것이 아닌가.

내가 속했던 사단만의 병력은 분명 아니었다. 당시는 개개인의 부대인식표가 없어서 다른 사단의 병력이 섞인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어림짐작해 보건대 1개 사단 병력은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활기찼던 군인이 아니고 지칠 대로 지친 참담한 몰골의 패잔병들이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대기 하나 없는 이등병 주제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잔뜩 주눅 든 채 취사반에서 밥을 타다가 배식하면서 귀동냥한 결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 포위되었다는 것 이었다.(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의 포위가 유명한 현리전투라고 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낭을 챙긴 뒤,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중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한쪽엔 쌀, 한쪽엔 ‘씨레이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포위망 돌파에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각자 지닐 만큼의 식량을 휴대하라는 것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들 이등병은 한쪽 얻어먹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씨레이션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니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 이어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참들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별일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고참들은 이런 포위는 항용 있어온 일이라는 듯 2~3일분 식량만 챙겼는데, 그 이상은 짐스럽기만 할 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셋은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것이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배낭속을 몽땅 비우고 7일분 씨레이션을 짊어졌다.

(중략)

그 동안 부대 앞의 냇가를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트럭들의 질주행렬이 이어졌으나, 출발한 지 1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기총소리가 났고, 이어 피격당한 흔적이 완연한 트럭들이 다시 돌아왔다. 말은 질주행렬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차량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사단본부 앞 연병장 정도나 될까, 그 밖에는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임간(林間) 도로였기 때문에 남쪽 길목만 막으면 우리 사단 뿐만 아니라 같은 골짜기에 있던 다른 사단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독안의 쥐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사단 본부가 진주하면서 길이 만들어졌지만, 북쪽은 그것조차도 없는 오지였다. 지금은 국도가 아닌 웬만한 지방도로도 포장이 되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지만, 당시 강원도 산간의 도로는 포장은 커녕 간신히 일방통행이나 가능할까, 마음대로 오고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니 희생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부대 앞의 연병장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서 105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박격포 등을 배치하여 사격을 개시하였고, 사격이 끝나자 포들을 분해하여 땅속에 묻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적군이라는 말없는 설명인 셈이었다. 그 많은 씨레이션과 쌀더미, 퇴로가 막힌 트럭들엔 휘발유가 뿌려졌고, 우리들은 불길을 뒤로 하고 방향도 모른 채 고참병의 뒤를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정양섭, 『어이없는 참전기 : 어느 북파공작원의 회상』(지식산업사, 2004), 76~79쪽

그야말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현리”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아직 패주의 초반이기 때문에 그냥 고참병들의 분위기에 따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이 포위망 속의 1주일은 방향은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앞사람만 따라다녀야 했던 1주일 이었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후퇴, 그것도 포위망 속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방황이라고 해야 옳았다.

웬놈의 피리소리는 그렇게도 처량하던지, 다른 군인들은 그 피리소리가 공격 시에도 울렸다고 했으나 내가 듣기엔 밤중, 그것도 유독 달밤에만 울린 것 같았다. 처음엔 처량하기만 했으나 날이 가면서 피리소리만 나면 소름이 끼쳤다.

(중략)

어차피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포위망 속이라면, 그럴수록 분산되어 3~4명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습격받을 기회도 적어서 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심정은 흩어지면 꼭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자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무리가 커질수록 공격받을 가능성은 늘어나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참모 등 서슬 퍼렇던 그 많은 고급 장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포위 첫날 부터 볼 수 없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눈에 띄던 위관급 장교들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오를 이룬 후퇴로 지휘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가는 사람은 앞선 대로, 뒤쳐지는 사람은 뒤쳐진 대로 뒤섞이다 보니 완전한 오합지졸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뭇가뭇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무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도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앞사람의 뒤만 따라갔다. 살 길을 찾아서가 아니고 그 밖에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막연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기습을 받을수록 우리들의 몰골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철모는 불편해서 벗어버렸다 해도 작업모조차 쓰지 못한 맨대가리가 있는가 하면,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는 그만두고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춘 군인보다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점차 늘어났다. 나 자신도 세 번째로 당한 밤중의 기습에서 M1 소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이어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데다가, 넝쿨 때문에 총을 지닌 채로는 도저히 숲 속을 해쳐 나갈 수 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들은 말이 있어서 방아틀뭉치만은 빼내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총기를 그대로 버리는 것과는 달리 방아틀뭉치를 뽑으면 그 총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버릴 때는 총기 대신 방아틀뭉치만은 지니고 돌아와야 처벌을 면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방아틀뭉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양섭, 위의 책 79~82쪽

포위된 상태가 길어지면서 점차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특히 훈련과 전투경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한국군이었던 만큼 공황상태가 지속되면서 모든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몇몇 부대는 상당한 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양섭의 회고에 따르면 현리 포위전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석 달 가까이 방위군에서 고생한 끝에 입대한 것 이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때문에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어서 행렬의 뒤끝에서 빨리 오라는 고참들의 재촉을 받으며 따라가던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뒤쳐졌던 나를 뒤에서 쫓아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앞지르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전투태세로 산개하고는 빨리 가라고 호통쳤다. 장교고 사병이고 모두가 쥐구멍만 찾는 판국에 자신들의 반격에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라고 소리치다니 도데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너희들같이 도망이나 다니는 패잔병들도 군인이냐는 투였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공용화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개인화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적지 않은 판에 그들은 개인장비는 물론 60밀리 박격포까지 갖춘 완전한 전투부대였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공수된 특전사 병력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 추격해 오는 적군과 일전을 준비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신기하기 조차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해볼 때, 그들도 연대나 대대 같은 상급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설사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작전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반격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소대 자체의 자의에 따른 반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속했던 사단의 경우 신설 사단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사(지금의 상병)면 분대장, 중사(하사)면 선임하사 급인데 견주어, 그들은 중사가 분대장 급으로 나 같은 이등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최하가 하사 급이었다.

그들은 18연대라고 했다. 18연대면 사변 전 옹진전투에서부터 용명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같은 한국군이라도 ○○연대는 아무리 공격해 보아야 고지점령은 커녕 당하기만 한다고 해서 ‘○○연대 공격하나마나’. ××연대의 경우 아무리 보급품을 줘 보아야 모두 적군의 손에 빼앗기기 때문에 ‘××연대 보급 주나마나’였는데 반해, 18연대는 아무리 포위당해도 모두 빠져나온다고 해서 ‘18연대 포위당하나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연대나 ××연대에 견주면 18연대야 말로 전투부대였다.

정양섭, 위의 책 86~88쪽
하지만 이런 양호한 사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포위망 내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정양섭이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이야기는 부대 단위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옆의 동료 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용감한 고참병이 몇몇 사병과 함께 기습하는 적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보니, 불과 10여명도 안 되는 분대 단위의 기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할 때마다 희생자는 늘어났고 앞뒤로 흩어졌던 병사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게 되어 또 습격을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7일분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아쉬운대로 기아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지니지 못했던 군인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지 사흘만에 만난 여군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그것이었다. 말은 여군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군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부대인식표는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계급장은 커녕 군인다운 징표가 전혀 없는 달랑 군복뿐인 여자였다. 당시의 전투사단 편제에 여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신분이 수상한 여자였다.

남자들은 각자 배낭 속에 적으나마 비상식량을 지녔고 또 작업복 위에 ‘판초’를 갖추어 웬만한 안개비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군은 먹을 것은 둘째로, 우의조차 갖추지 않은 입은 옷 그대로의 단벌인 채로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려 지나가는 길섶에 누워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장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끝장이었다. 모두가 굶주린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씨레이션은 바닥이 날 것이 뻔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배가 고프면 숲 속에 혼자 쳐져서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작업복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그것마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뒤쳐져 우물우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내 수통속의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시고 나면 허리에 찬 수통에선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고, 그렇게 되면 한 모금 달라는 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을 것 이어서,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아예 물통이 빈 것 처럼 행세해야 했다.

그 래서 운 좋게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을 만날때 까지는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냇물이 있어 물통을 채울 수는 있었으나 당장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를 적군이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낙오될지도 모르는 것이 더 겁이 났다.

정양섭, 위의 책 90~91쪽

이 책의 저자인 정양섭은 원래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현역으로 빠진 경우인데 하필 처음으로 경험한 전투가 현리전투이다 보니 당시의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18연대와 같이 긍정적인 사례도 있긴 합니다만 현리전투 자체가 작은 미담으로 덮기엔 너무나 큰 참사지요. 정양섭은 장교들의 부정부패, 고참들의 폭력, 형편 없는 군기문제 등 삼류군대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을 때 마다 씁슬하기 짝이 없습니다.

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 및 경찰의 장비현황

원래 주말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요 며칠간 다른일이 있어서 쓰지 못했습니다. 이럴때는 역시 땜빵용으로 뭔가 내용이 있는 표를 하나 올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미삼아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장비현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 것은 한국군 및 경찰의 전반적인 장비현황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아래의 표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이 1950년 6월 15일 작성한 두번째 반기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현황을 잘보여주는 자료인데 특히 전쟁 직전 병력과 장비현황을 파악하는데 있어 유용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부대별로 분류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인 현황은 알 수 있습니다.

표를 누르면 커집니다

아무래도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당분간은 이런 땜빵용 포스팅이 주를 이룰 것 같습니다.

2010년 10월 6일 수요일

어떤 희망사항


이 블로그가 늘 그래왔듯 썰렁한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미군이 서부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독일군과 대규모 기갑전을 벌이면서 미제 전차가 독일군의 전차에 비해 여러모로 열세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런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 한 패튼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지요. 미육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신형전차의 배치를 서두르게 됩니다. 나중에 M-26으로 불리게 될 이 물건은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이젠하워도 M-26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마샬(George C. Marsha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육군의 장비 중 지프와 M-1 소총 말고는 독일군의 무기보다 나은게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신형 T-26을 대량으로 확보하기만 한다면, 특히 강화된 90mm 포를 탑재한 더 최신형의 전차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기갑부대는 기동성과 숫자는 물론 화력 면에서도 우위에 서게 될 것 같소.”

Forrest C. Pogue, George C. Marchall : Organizer of Victory 1943-1945(Viking Press, 1973), p.553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이 편지를 마샬에게 보낸 것은 1945년 3월 12일 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희망사항과 달리 미군 기갑부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질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1949년 5~6월경 한국군의 연대별 장비현황

2009년 2월에 "한국군 소총에 대한 잡담"이 란 글을 쓰면서 1949년 당시 한국군 7, 10 보병연대의 장비 현황을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두개 연대를 사례로 든 것은 당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이 두 연대의 것 뿐이어서였습니다. 참고한 자료는 1949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 각 야전부대에 대한 검열을 실시했을 당시 검열부대가 미군사고문단에 제출한 장비내역인데 원래는 검열결과표에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 따로 떨어져 다른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각 사단/여단별 검열결과표를 구해서 살펴보게 되었는데 검열결과표의 경우 일정과 인력문제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났습니다. 일부 연대는 대대단위까지 장비현황이 조사되어 있었던 반면 상당수의 연대는 장비현황이 부록으로 포함되어 검열결과표에는 정작 내용이 없거나 또는 간단하게 부족분만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문제인데 부족분은 표시해도 초과분은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하지 않은 장비의 수량을 정확히 알 수 가 없다는 것 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정리된 8개 연대의 현황을 대략 정리해 봤습니다. 검열이 실시된 이후 부대가 새로 증편되는 등 한국군이 확대개편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1년 뒤인 한국전쟁 발발당시에는 이것보다 장비현황이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장비
인가량
1연대
(1949. 5. 16)
5연대
(1949. 6. 4)
7연대
(1949. 6. 17)
9연대
(1949. 5. 16)
권총
103
103?
103?
103
102
M1소총
1,303
1,303?
965
1,360
1,303?
M1카빈
1,194
657
1,072
637
287
99식소총
87
87?
87
230
?
BAR
81
81?
30
72
53
기관단총
(비인가)
0
?
?
?
?
M1919A4
18
18?
5
18
18?
M1919A7
24
24?
22
9
12
M2 cal.50
10
10?
1
10
10?
박격포
(60mm)
27
21
5
22
27?
박격포
(81mm)
18
18?
1
15
15
바주카포
100
100?
12
50
10
[표 출처 : 5, 15, 16연대의 장비 현황은 RG338, KMAG, Box 11, Report of Inspection of Second Division, KA; Report of Inspection for 3rd and 5th Divisons, KA; 1, 9, 17연대의 장비현황은 RG338, KMAG, Box 10, Report of Inspection of 7th Brigade, KA; Report of Inspection of 1st Korean Infatry Division; 7, 10연대의 장비현황은 RG 338, KMAG, Box 17, Organization of Army, Efficiency Reports, 1949.]


장비
인가량
10연대
(1949. 6. 17)
15연대
(1949. 6. 20)
16연대
(1949. 6. 10)
17연대
(1949. 5. 23)
권총
103
103
103?
103?
103?
M1소총
1,303
530
1,300
603
1,252
M1카빈
1,194
740
842
777
1,165
99식소총
87
1,000
87?
1,081
?
BAR
81
74
56
67
30
기관단총
(비인가)
0
?
?
31
?
M1919A4
18
18
18?
17
18?
M1919A7
24
8
7
21
4
M2 cal.50
10
10
5
6
10?
박격포
(60mm)
27
27
25
9
27?
박격포
(81mm)
18
15
10
10
14
바주카포
100
67
99
70
99
[표 출처 : 5, 15, 16연대의 장비 현황은 RG338, KMAG, Box 11, Report of Inspection of Second Division, KA; Report of Inspection for 3rd and 5th Divisons, KA; 1, 9, 17연대의 장비현황은 RG338, KMAG, Box 10, Report of Inspection of 7th Brigade, KA; Report of Inspection of 1st Korean Infatry Division; 7, 10연대의 장비현황은 RG 338, KMAG, Box 17, Organization of Army, Efficiency Reports, 1949.]

이 표에서 재미있는 점은 어떤 연대의 경우 비인가장비인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어떠한 경로로 입수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 야전부대가 기관단총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연대의 장비현황은 군사고문단의 다른 문서를 찾아보면 나오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관련자료를 구할 때 마다 이 도표를 갱신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