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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9일 화요일

[번역글] 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은 The Armor Journal 3호(2015년 여름호)에 실린 마이크 헤인스Mike Haines의 “The Lima Locomotive Works: First Sherman Tanks”를 번역해 봤습니다. 리마 기관차 공장의 셔먼 생산 역사와 이곳에서 생산한 차량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 때문에 이 잡지를 샀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짤막하고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돈이 아까우니 번역이라도 해 봅니다.


**********


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마이크 헤인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를 대량으로 상실한 영국은 상실한 차량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3,650대의 전차를 조달해야 했지만 영국은 충분한 생산 능력이 없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차 조달 사절단’을 보냈다. 미국 또한 유럽의 위기 때문에 전차를 필요로 했다. 또한 영국의 전차 원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차 보다 더 무거운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증설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기관차와 철도 화차 생산 공장들이 전차와 같은 중장비 생산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생산경험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전차 조달 사절단은 오하이오 리마Lima의 리마 기관차 공장과 접촉해 전차 생산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리마 기관차 공장Lima Locomotive Works, 이하 LLW는 1859년 소규모 농기구 수리공장으로 시작했으며 이때의 사명은 리마 농업사Lima Agricultural Works였다. 1869년 제재업자 에프라임 셰이Ephraim Shay가 리마 농업사에 자신이 설계한 목재 수송용 기관차를 생산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설계안은 기어식 구동장치를 가지고 있어 기존의 피스톤식 구동계를 가진 기관차 보다 견인력이 강했다. 리마 농업사는 셰이가 설계한 기관차를 생산하기로 하고 면허생산을 시작했다. 2년 뒤 리마 농업사의 주력 상품은 기관차가 되었다. 리마 농업사는 1870년 조직 개편을 거친 뒤 사명을 변경했다. 새 사명은 리마 기계 회사Lima Machine Company가 되었고 1892년 새로 설립된 리마 기관차 공장에 매각됐다. 합병 이후에도 이 회사는 한동안 판매량이 떨어진 셰이 기관차를 생산했다. 1920년대에 리마 기관차 공장은 훨씬 강력한 증기기관차를 개발했으며 이 기관차는 수퍼파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형 기관차는 증기기관 업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리마 기관차 공장은 다시 한번 중요한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은 LLW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LLW측이 100대의 M3 전차를 생산해 영국에 공급한다면 전차 생산을 위해 20만 평방피트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도록 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LLW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차 생산 공장 건설이 거의 마무리 되어 M3 생산 준비가 갖춰질 무렵 신형 T6 중형전차의 설계와 시험이 거의 완료됐다. 1941년 12월 T6 전차는 정식 채용됐으며 용접식 차체는 M4, 주조식 차체는 M4A1으로 명명됐다. 이 때문에 공장이 완공도 되기 전에 100대의 M3을 생산하기로 한 계약이 M4A1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T6 중형전차의 설계는 M3 전차의 개발과 시험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됐다. M3 전차는 영국군이 프랑스 전선에서 상대한 75mm 단포신 4호전차와 대등한 화력을 지닌 전차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 임시 변통으로 채용한 차량이었다. 미국의 중형전차 개발계획 초기에는 75mm포를 탑재할 수 있는 포탑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M3은 주포를 차체 오른쪽에 장착하고 포탑에는 37mm포를 탑재했다. 하지만 M3이 생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75mm M2 주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탑이 개발되어 T6의 개발이 시작됐다. 전차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M3와 M4는 모두 기존의 M2 중형전차의 차체 하부를 개량해서 사용했다. T6의 시제품은 주조로 만든 일체형 차체 상부에 차체 양 측으로 승무원 해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T6의 시험이 완료될 무렵 차체 측면의 승무원 해치가 차체 측면 방어력을 떨어트리고 탄약 탑재량을 제한한다는 점 때문에 이를 제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LLW는 아직 M3 생산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 처럼 M4 생산을 위해 라인을 전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LLW는 M4 셔먼 탱크를 최초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영국 정부는 생산 대수를 400대로 늘리도록 계약을 변경했으며 1942년 2월 LLW에서 첫 번째 셔먼이 생산됐다. 첫 번째 생산차량은 1942년 3월 메릴랜드의 에버딘 시험장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 생산차량은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장 마이클 디워Michael Dewar를 기리기 위해 ‘마이클’로 명명됐다. ‘마이클’은 오늘날 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영국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LLW는 1942년에 820대의 M4A1을 생산했으며 1943년에는 835대를 생산했다. LLW에서 초기에 생산한 셔먼은 M3에 장착된 것과 비슷한 여닫이식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뒤에 일반적인 페리스코프식 포수 조준경으로 대체되었다.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된 셔먼의 생산 대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대 남짓으로 추정된다. 초기 생산분 셔먼의 또다른 특징은 차체에 장착되어 조종수가 발사하는 2정의 고정식 0.30 구경 기관총이었다. 이것 또한 조기에 폐지되었다. 또한 초기 생산분 중에는 조종수와 무전수용 직안식 관측창이 달린 차량도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생산대수를 파악할 수 없다. 직안식 관측창 또한 조기에 폐지됐다.


LLW에서 생산한 셔먼들은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들과 동일한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는 변속기 커버가 3단에서 주조식 일체형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폭이 좁은 M34 포방패를 달고 있었으나 개량형들은 폭이 넓은 M34A1 포방패를 장착했다. 초기에 생산된 커버 달린 조준경이 장착된 D50878형 포탑은 나중에 우측면 장갑이 강화되고 피스톨 포트가 제거된 D50878형으로 개량됐다.


LLW에서 생산한 후기의 셔먼들은 LLW공장 생산형 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차체를 들어올릴때 케이블을 연결하는 돌기이다. 이 돌기는 일반적으로 차체 양 측면에 대칭으로 장착된다. 하지만 1943년 늦여름 LLW에서 생산한 차량들은 차체를 주조할때 돌기까지 일체형으로 만들었으며 측면으로 45도 기울어져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리즐리형 홈Grizzly groove’이다. 이 홈은 폭 5~6인치로 차체 후부 윗 부분에 파여있다. 이 홈은 캐나다에서 생산한 그리즐리와 램 전차에도 있는데 엔진 점검창 주변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또한 프레스드 스틸 카Pressed Steel Car에서 생산한 M4A1 중 일부도 이런 홈이 파여있지만 여기서 생산한 셔먼들은 앞서 말한 차체 돌기가 일체형이 아니다.


1943년 9월 LLW의 셔먼 생산 계약이 만료됐다. 이때까지 생산된 셔먼은 1,655대였다. LLW는 1943년에 전차 외에도 110대의 M12 훈련용 포탑을 만들었다. 이것은 셔먼 포탑에서 장갑을 제거한 장비였다. 또한 LLW는 M32 전차구난차량의 개발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LLW는 M4를 기반으로 시험용 차량 T5를 제작했다. T5E1은 M4A1 차체 기반이었고 T5E2는 M4A2 차체 반이었다. LLW는 1943년과 1944년에 26대의 M32B2(T5E2)를 생산했으며, 1945년에는 20대의 M32B3(T5E3)을 생산했다. 또한 LLW가 생산한 기관차와 크레인도 전쟁 수행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LLW는 전차 생산 공장을 크레인과 굴착기 생산으로 전환했다. 기관차 공장에서는 계속 기관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차가 주류가 되면서 LLW는 시류를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1947년에는 디젤엔진을 생산하는 오하이오 해밀턴Hamilton에 위치한 General Machinery Corporation과 합병했다. 합병한 회사의 명칭은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너무 늦었다. 합병 이후 회사는 147대의 디젤 기관차를 생산했지만 이 제품들은 경쟁력이 없었다. 리마 해밀턴은 기관차 부분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1950년 볼드윈 기관차 공장Baldwin Locomotive Works과 합병했다. 새로운 법인의 명칭은 볼드윈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1951년에는 기관차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다만 중장비 생산은 계속했다. 1971년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클라크 이큅먼트Clark Equipment에 매각됐으며 1981년 마침내 문을 닫았다.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군수물자 생산을 계속했다. 그 중 하나는 M48 차체를 생산해 포드에 공급하는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2½톤 트럭과 5톤 트럭을 레커차로 개조하는 것 이었다.


오하이오 리마의 LLW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불과 1,655대의 셔먼을 생산하는데 그쳤지만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전차 생산으로 유명하다. LLW가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는 M1, M1A1, M1A2 에이브럼스 전차의 생산과 창정비를 담당하는 통합체계생산센터Joint Systems Manufacturing Center가 있다. 이곳은 스트라이커 계열 장갑차의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리마를 자유 세계의 전차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 및 경찰의 장비현황

원래 주말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요 며칠간 다른일이 있어서 쓰지 못했습니다. 이럴때는 역시 땜빵용으로 뭔가 내용이 있는 표를 하나 올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미삼아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장비현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 것은 한국군 및 경찰의 전반적인 장비현황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아래의 표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이 1950년 6월 15일 작성한 두번째 반기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현황을 잘보여주는 자료인데 특히 전쟁 직전 병력과 장비현황을 파악하는데 있어 유용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부대별로 분류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인 현황은 알 수 있습니다.

표를 누르면 커집니다

아무래도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당분간은 이런 땜빵용 포스팅이 주를 이룰 것 같습니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1949년 5~6월경 한국군의 연대별 장비현황

2009년 2월에 "한국군 소총에 대한 잡담"이 란 글을 쓰면서 1949년 당시 한국군 7, 10 보병연대의 장비 현황을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두개 연대를 사례로 든 것은 당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이 두 연대의 것 뿐이어서였습니다. 참고한 자료는 1949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 각 야전부대에 대한 검열을 실시했을 당시 검열부대가 미군사고문단에 제출한 장비내역인데 원래는 검열결과표에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 따로 떨어져 다른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각 사단/여단별 검열결과표를 구해서 살펴보게 되었는데 검열결과표의 경우 일정과 인력문제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났습니다. 일부 연대는 대대단위까지 장비현황이 조사되어 있었던 반면 상당수의 연대는 장비현황이 부록으로 포함되어 검열결과표에는 정작 내용이 없거나 또는 간단하게 부족분만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문제인데 부족분은 표시해도 초과분은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하지 않은 장비의 수량을 정확히 알 수 가 없다는 것 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정리된 8개 연대의 현황을 대략 정리해 봤습니다. 검열이 실시된 이후 부대가 새로 증편되는 등 한국군이 확대개편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1년 뒤인 한국전쟁 발발당시에는 이것보다 장비현황이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장비
인가량
1연대
(1949. 5. 16)
5연대
(1949. 6. 4)
7연대
(1949. 6. 17)
9연대
(1949. 5. 16)
권총
103
103?
103?
103
102
M1소총
1,303
1,303?
965
1,360
1,303?
M1카빈
1,194
657
1,072
637
287
99식소총
87
87?
87
230
?
BAR
81
81?
30
72
53
기관단총
(비인가)
0
?
?
?
?
M1919A4
18
18?
5
18
18?
M1919A7
24
24?
22
9
12
M2 cal.50
10
10?
1
10
10?
박격포
(60mm)
27
21
5
22
27?
박격포
(81mm)
18
18?
1
15
15
바주카포
100
100?
12
50
10
[표 출처 : 5, 15, 16연대의 장비 현황은 RG338, KMAG, Box 11, Report of Inspection of Second Division, KA; Report of Inspection for 3rd and 5th Divisons, KA; 1, 9, 17연대의 장비현황은 RG338, KMAG, Box 10, Report of Inspection of 7th Brigade, KA; Report of Inspection of 1st Korean Infatry Division; 7, 10연대의 장비현황은 RG 338, KMAG, Box 17, Organization of Army, Efficiency Reports, 1949.]


장비
인가량
10연대
(1949. 6. 17)
15연대
(1949. 6. 20)
16연대
(1949. 6. 10)
17연대
(1949. 5. 23)
권총
103
103
103?
103?
103?
M1소총
1,303
530
1,300
603
1,252
M1카빈
1,194
740
842
777
1,165
99식소총
87
1,000
87?
1,081
?
BAR
81
74
56
67
30
기관단총
(비인가)
0
?
?
31
?
M1919A4
18
18
18?
17
18?
M1919A7
24
8
7
21
4
M2 cal.50
10
10
5
6
10?
박격포
(60mm)
27
27
25
9
27?
박격포
(81mm)
18
15
10
10
14
바주카포
100
67
99
70
99
[표 출처 : 5, 15, 16연대의 장비 현황은 RG338, KMAG, Box 11, Report of Inspection of Second Division, KA; Report of Inspection for 3rd and 5th Divisons, KA; 1, 9, 17연대의 장비현황은 RG338, KMAG, Box 10, Report of Inspection of 7th Brigade, KA; Report of Inspection of 1st Korean Infatry Division; 7, 10연대의 장비현황은 RG 338, KMAG, Box 17, Organization of Army, Efficiency Reports, 1949.]

이 표에서 재미있는 점은 어떤 연대의 경우 비인가장비인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어떠한 경로로 입수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 야전부대가 기관단총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연대의 장비현황은 군사고문단의 다른 문서를 찾아보면 나오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관련자료를 구할 때 마다 이 도표를 갱신할 예정입니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1954년에 제안된 어떤 한국군 해병대 개편안

한국전쟁 직후 한국군의 재편성 시기의 기록을 보면 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미국측이 검토하다가 폐기한 한국군 편제를 보면 아주 재미있지요. 여기서는 1954년에 검토되었던 한국군 해병사단 창설안 중 하나를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17일자로 되어 있는 미해군 군사고문단 소속의 해병대 군수고문관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미군 해병사단의 편제에 근접하는 규모로 확대개편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편성할 경우 필요한 군수지원품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전투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빈(M2) : 876정
소총 (M1) : 2,206정
자동소총(M1918A2) : 212정
권총(M1911A1) : 1,247정
기관총 (M1917A1) : 118정
기관총(50구경 M2) : 87정
유탄발사기 : 1,400정
105mm 유탄포 : 42문
155mm 유탄포 : 18문
3.5인치 바주카포 : 320문
60mm 박격포 : 53문
81mm 박격포 : 89문
4.2인치 박격포 : 30문
75mm 무반동포 : 15문
화염방사기 : 188대
전차 (M26/M4A3 105mm) : 85대
40mm 대공포 : 32문
LVT-A : 18대
LVT-4 : 224대

이 안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대를 사단급으로 확대개편하고 지원부대를 증편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총 2786만6452달러가 소요되었고 여기에 1년치의 군수품을 합하면 총 비용은 8500만3349달러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배정한 비용이 1천만 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아닐수 없었습니다.(그 사이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지원내역에 들어있는 장비를 보면 M-26전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 육군에 배치되고 있던 전차가 M4A3E8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원조안 대로 한국 해병사단을 편성했다면 장비상으로 한국군 최강의 전력이 되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여기에 언급된 원조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 육군 20개 사단 계획에 필요한 예산만 해도 막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해병대까지 요란하게 무장시킬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실현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계획들은 실제로 실행되는 계획보다 근사한 법이지요.

*'Expansion Program for the Korean Marine Corps plus support for one(1) year, Cost of',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Korean War Corps Expansion Pro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