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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금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에. 1-2라고 번호를 달긴 했습니다만 사실 특별한 내용은 아니고 사용되는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먼저 2009년 10월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썼을 때는 Aufmarschpläne를 ‘기동계획’으로 옮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을 다시 읽다 보니 ‘기동계획’이 아닌 다른 용어로 옮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1차대전을 전후한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 내에 Aufmarschabteilung이라는 부서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기동계획과’로 옮기자니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서가 부대 이동과 배치를 담당하기 때문에 단순히 기동계획으로 옮기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더군요. 그래서 Aufmarschpläne도 다른 용어로 옮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생각을 하다가 영어권에서 Aufmarsch를 Deployment로 옮기는 것을 보고 ‘전개’로 옮기면 좋겠다 싶더군요. 실제 부서의 역할을 고려하면 좀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Aufmarschpläne를 ‘부대전개계획’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Stabsreisen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Staff Ride가 되는데 이것을 한국군에서는 ‘전적지 답사’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독일군 총참모부에서 실시한  Stabsreisen은 단순히 ‘전적지 답사’로 옮기면 영 어색하지요;;;; 결과적으로 ‘참모부 연습’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독일어 용어를 옮길 때 고민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앞으로도 고민되는 용어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해 볼 생각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A. 논쟁의 시작

앞서 이야기 했듯 1999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던 테렌스 주버는 논문 한편으로 군사학계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주버는 1999년 War In History에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은 10년이 넘는 대논쟁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실제로 존재했던 작전 계획이 아니라 1차대전 직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내내 독일 군부의 전쟁 수행에 비판적이었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을 필두로 한 민간인들이 패전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기 이전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슐리펜계획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러한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한 직후라는 사실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는 1차대전 이후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한스 델브뤽이 1차대전 중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자 전쟁 이전부터 델브뤽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군부에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해 처음 언급한 인물은 독일 육군의 장군이었던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에 발표한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이라는 저작을 통해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전쟁계획을 다루면서 장교단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쿨은 관련된 글을 발표하면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소(小)몰트케가 제1군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한 슐리펜의 원안을 수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쿨의 뒤를 이어 국립문서보관소 소속으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하고 있던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 또한 슐리펜이 퇴임 직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특히 우익을 강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델브뤽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편, 1차대전 직전 총참모부에서 부대 전개 및 배치를 담당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또한 전후의 저작에서 슐리펜의 계획을 언급하며 델브뤽의 비판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1차대전 초 총참모부에서 철도 업무를 담당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전쟁부 장관을 지내게 된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도 쿨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슐리펜계획이 널리 알려지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문제는 1945년 영국공군이 포츠담을 폭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독일군의 문서고가 파괴되어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쿨, 푀르스터, 그뢰너 등은 당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자료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불타버렸기 때문에 슐리펜계획에 대한 주요 사료 중 2차대전 후 까지 남은 것은 슐리펜이 1906년 퇴임을 전후해 작성한 비망록(Denkschrift)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비망록 자체가 작전계획으로써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격해올 경우 주공인 우익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1차대전 직후 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중 하나로 96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1906년은 물론 1914년에도 불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역사가들이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독일 통일 이후 공개된 구동독 소유의 문헌들을 활용했는데 그것은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슐리펜계획에 대한 연구 원고, 그리고 슐리펜과 몰트케가 몇몇 훈련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 등이었습니다.
필자인 주버는 특히 빌헬름 디크만의 원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은 역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했으며 대략 1930년대 후반에 문제의 원고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의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과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등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B. 디크만의 연구에 대한 검토

이 글에서는 먼저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넘어갑니다. 주버는 대(大) 몰트케에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독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던 시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방어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제한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대 몰트케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1888년의 계획에서는 서부전선의 방어에 11개 군단을, 동부전선의 공세에 7개 군단을 할애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제한적인 공세를 실시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었는데 그 경우 6개 군단으로 낭시(Nancy)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엇습니다.
주버는 슐리펜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계획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의 최초 부대전개계획인 1893/94년 계획에서 4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15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두고 동부전선의 15개 사단 중 11개 사단을 실레지엔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향한 공세에 배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1894년 비망록에서 먼저 낭시를 공격한 뒤 그 다음에는 툴(Toul)과 베르덩(Verdun) 사이의 요새선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버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비망록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류라고 강조합니다. 즉 슐리펜의 최초 계획은 어디까지나 몰트케의 계획을 이어받은 것에 머물렀다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1895/96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는 1895/96년 계획에서 주목할 점은 동부전선에 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1895/96년 계획에는 동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이 A안과 B안으로 나뉘어 있는데 A안은 동프로이센에서 나레프(Narew)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고 B안은 1893/94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레지엔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디크만의 분석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5/96년 계획을 작성한 시점에서 B안 보다는 A안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6/97년 부대전개계획에서는 동프로이센에서 15개 사단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이것을 슐리펜의 계획이 완전히 몰트케가 구상한 것으로 회귀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1897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입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독일 내에서는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6년 경에 이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의 1897년 비망록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요새지대를 우회하는데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툴과 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첫번째 안은 해당 지역이 부대기동에 곤란했기 때문에 부적합했던 반면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두번째 안은 해당지역이 대규모 부대의 기동에 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해야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주력에 2개 군을, 주력의 좌익을 엄호하기 위해서 1개 군을, 그리고 프랑스군을 묶어두기 위해 3개 군을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버는 이것을 실제 작전으로 옮기기에는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했기 대문에 1897년 비망록의 연구내용은 1897/98년과 1898/99년의 부대전개계획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당시 독일군의 배치를 보면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이 2:1로써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서부에 48~46개 사단, 동부에 20~22개 사단)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슐리펜이 1897년 부터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에도 이어지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두 개의 안 중 두 번째 안(Aufmarsch II)은 기존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한 편, 슐리펜은 1898년 말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먼저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린 뒤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주버는 1898년 비망록이 매우 실험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슐리펜은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을 2:1로 한 기존 계획으로는 어느 방면에서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에게 숫적으로 압도당해 선제공격이 어려우므로 독일군의 병력동원이 완료될 때 까지 방어를 한 뒤 서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구상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반격을 시작할 때 독일군의 주공은 (아마도 프랑스군의 좌익이 치고올) 아르덴느를 향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반격시 독일군의 주공은 2개 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버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아르덴느를 통한 반격에서 포위망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898년 비망록에서 나타난 ‘반격’의 개념이야 말로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전략이었으며 그가 퇴임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주 버가 인용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1898년 비망록의 내용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의 첫번째 안(Aufmarsch I)을 수정할 때 반영되었지만 여전히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는 등 기존 계획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0/01년의 부대전개계획 중 Aufmarsch I의 병력배치는 1899/1900년 안과 큰 차이가 없으나 구체적인 병력 배치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즉 베르덩 북쪽의 주공을 3개 군으로 강화하고 주공의 좌익을 방어하는 3개 군을 1개 군으로 축소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리고 주버는 1900년 1월 18일 당시 총참모부 제3부참모장(Oberquartiermeister III)으로 재직 하고 있었던 베셀러(Hans Hartwig Beseler)의 작전연구(Operationsstudi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조하면서 주공을 우익에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베셀러는 주공을 리에쥬(Liege)-나무르(Namur)와 베르덩 사이의 약 90km에 이르는 정면에 집중시켜 독일국경에 집결한 프랑스군 주력을 단기간에 격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주 버는 그렇기 때문에 서부에 대한 작전은 슐리펜과 베셀러가 공동으로 완성한 것이며 슐리펜의 1897년, 18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1900년 작전연구가 이후 서부전선에 대한 슐리펜의 전략구상을 지배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슐리펜 계획’으로 본 1905년 비망록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편, 주버는 1900/01년 부대전개계획의 Aufmarsch II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900/01년 Aufmarsch II는 44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집중해 오스트리아군 40개 사단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전략적인 대공세를 펼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서부 뿐 아니라 동부에서도 공세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슐리펜이 서부에 대한 공격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기존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동 부에서 전략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서부에서는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배경이 슐리펜에게 서부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먼저 막아낸 뒤 반격하는 방안을 계속 연구하도록 했다고 해석합니다. 슐리펜은 1899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프랑스군의 좌익에 대해 역습을 감행할 것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즉 서부에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를 하게 될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고정방어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정방어 대신 반격을 통한 기동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이런 인식이 1900년과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동원 4주차에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9개 군단을 동부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1901년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둔 뒤에도 3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남겨둬야 했는데 그 이유는 국경지대 전투에서 격파할 수 있는 프랑스군은 2개 야전군 규모로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멸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버는 ‘슐리펜 계획’에서 나타나는 프랑스군의 철저한 격멸이 1901년 연습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한 편 1901/02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동부에 배치할 사단을 41개로 줄이고 다시 1902/03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이것을 다시 24개 사단으로 줄여버리는데 이것은 대 몰트케의 구상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02/03년 Aufmarsch I 입니다. 1902/03년의 Aufmarsch  I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좌익에 대한 독일군의 반격을 예측할 것을 상정하고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는 대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3개군이 공격에 동원되고 이 중 제4군이 베르덩 방면으로, 제5군과 6군이 낭시와 트루에 드 샤흐므(trouée de Charmes) 방면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버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우익에 주공을 집중하는 방식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 입니다. 이점은 슐리펜이 1902년 5월 16일에 작성한 글을 인용하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주버에 따르면 슐리펜은 이 글에서 베르덩 북쪽으로 주공을 지향하더라도 좌익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할 위험이 높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슐리펜이 여전히 동부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근거로 봅니다.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비록 전쟁 발발시 동부전선에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실시하는 것 이었지만 슐리펜이 1902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13개 군단과 10개 예비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버는 이 당시 슐리펜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먼저 동부전선에 압력을 가하면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공세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강력한 요새선에서 나온 프랑스군을 독일군의 철도망이 지원할 수 있는 국경에서 격파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마지막으로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65개 사단을 서부에, 10개사단을 동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I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 존의 통설은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에서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을 취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슐리펜은 1903~4년에 이르기 까지 동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규모의 공세만을 계획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경우는 대부분 프랑스군이 공세로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였다고 봅니다.  물 론 주버는 디크만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합니다. 즉  디크만이 원고를 집필할 당시 부대전개계획 이외의 자료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실제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en)과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비망록과 참모부연습(Stabsreisen)의 결론을 활용해 총참모부의 의도를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가 담고 있는 내용으로도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C.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

주 버가 다음으로 제시하는 자료는 슐리펜이 1904년 실시한 참모부 연습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입니다.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략개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슐 리펜은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West)에 대한 논평에서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병력 문제입니다.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현역 부대 외에 16개 예비군단(Reserve Korps), 즉 32개 예비사단과 14개 향토사단(Landwehr-divisionen)도 동원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제로 동원 가능한 것은 19개 동원사단에 불과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전시 총력전 상황에서는 동원가능한 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벨기에 침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이 벨기에를 거쳐 공격해 올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국경지대에 정면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둔화 시킨뒤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예상 반격로는 벨기에를 경유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논평에서 서부전역이 시작될 경우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두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메지에흐(Mézières)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방안의 문제점은 뮤즈강을 건넌 주력과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부대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베르덩-릴(Lille) 사이를 돌파하는 것으로 이 지역은 베르덩-벨포르를 연결하는 지역과 달리 요새화 정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슐리펜은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은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은 몇몇 장교들에게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라인강 하류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경우 프랑스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했는데 크게 두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일부는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재배치에 맞서 병력을 좌익에 집중할 것이라고 본 반면 다른 일부는 독일군의 취약한 좌익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후자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을 칠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과 중앙에 집결한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며 최악의 경우 로이텐 전투가 보다 큰 규모로 재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일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 등의 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 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습 과정에 대한 논평이 이어졌습니다. 이 훈련에서 독일군은 17개 군단(34개 사단)을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시키고 아이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그 측면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펠 남쪽으로는 다시 메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마찬가지 임무를 맡았고 9개 군단의 예비가 팔츠(Pfalz)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가장 좌익인 스트라스부르 일대에는 예비군으로 편성한 사단과 3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40개 사단을 동원해 메츠-스트라스부르 지구를 공격했고 이와 별도로 조공 18개 사단이 트리에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취약한 독일군의 좌익에 주공을 지향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훈련에서 상정한 상황은 동원 16일 차에 1, 2, 3군이 네덜란드-벨기에의 국경을 넘은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취약한 좌익을 타격한 것 이었습니다. 독일측은 우익의 병력은 아르덴느를 통해 남진시키고 프랑스군이 독일 영내로 침입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팔츠에 집결해 있는 예비대를 포함해 3개 군을 반격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동원 19일 째에 메츠-쯔바이브뤼켄(Zweibrücken)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반격에 나선 독일군은 프랑스군 보다 우세한 포병의 지원에 힘입어 방어로 전환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결국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연습은 동원 21일차에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주버는 이 연습과정이 겉보기에는 1905년 비망록, 즉 이른바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는 3개 군에 해당되는 대병력이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해 있다는 점이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병력이 프랑스와의 국경 일대에 골고루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대규모 우회 기동을 통한 대규모 섬멸전을 명시하고 있는데 1904년 연습에서는 1~3군이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을 넘긴 하지만 소규모 우회기동에 그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주 버는 마지막으로 1904년 연습에는 아직 편성되지 않은 다수의 부대가 등장하는데 이점은 1905년 비망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즉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 훈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으로 1904년에 실시된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연습은 첫번째 연습과 유사하지만 투입하는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연습에는 향토사단은 한 개도 상정되지 않았고 단지 23개 예비사단 만이 명시되었을 뿐 입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동원 13일 차에 23개 군단을 투입해 상(上) 알자스 방면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우익에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공격을 강행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베르덩-릴 방면으로의 돌파를 중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슐리펜은 논평에서 프랑스군은 독일측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 병력을 집결한 것을 알게 된다면 공세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독일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번째 연습에서 독일군은 첫 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의 병력을 남진시켰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돌파한 프랑스군 우익은 라인강을 도하해 충분한 병력(8개 군단)을 전개시킬 공간을 확보할 목적으로 튀빙엔 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은 모젤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메츠의 독일군은 바로 이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 반격을 감행해 격파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연습에서는 메츠의 독일군이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프랑스군 중앙의 6개 군단과 라인강을 도하한 우익의 8개 군단은 공격을 계속 실시하고 독일군은 두개의 프랑스군 집단에 대해 내선의 우위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은 지휘관이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의 압박 때문에 프랑스군 좌익을 상대하던 병력을 빼돌려 프랑스군 좌익은 포위 섬멸되는 것을 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연습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좌익을 섬멸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에 의해 포위당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주버는  이 두 번째 연습 또한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 계획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이야기되는 1905년 참모부 연습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은 1905/06년의 부대전개계획과 동일한 부대 배치에 슐리펜이 직접 독일군쪽을 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 연습에서는 23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으로 이루어진 6개 군이 메츠에서 베젤에 이르는 지역에 전개되었고 메츠 이남의 좌익에는 3개 군단과 5개 예비사단만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각각 세명의 참모장교가 맡아 세차례의 연습이 실시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이 실시한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바로 주력을 벨기에로 돌리고 벨기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슐리펜은 메츠에 집결된 병력으로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해 격파했는데 주버는 메츠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는 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았는데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자르부르크 방면으로 주공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슐리펜은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우익의 병력 상당수를 프랑스군 주공을 저지하는데 돌립니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연습도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세 번째로 당시 소령이었던 쿨이 프랑스군을 맡은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두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주력을 맞상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 연습이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슐리펜 계획의 일부로 해석되온 원인은 1930년대 후반에는 이미 ‘슐리펜 계획’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퇴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한 1905년 겨울의 워게임(Kriegsspiel)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 이라는 것이 실재했다면 슐리펜이 자신의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연습에서 이 계획을 시험했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이 마지막 연습에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전략방어를 취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슐리펜은 1905년의 워게임에서 먼저 동부전선으로 침공해 온 러시아군을 격퇴한 뒤 그 병력을 서부로 돌렸습니다. 한편 서부 전선의 상황은 조금 재미있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1905년 겨울 워게임에서는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침공해 벨기에가 독일편에 서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서부전선에서는  먼저 침공해온 프랑스군을 동원 26일째 까지 격퇴한 뒤 제한적인 반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부대와 추가로 동원되는 부대와 함께 동원 42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아르덴느에서 포위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은 종결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 말기에 실시한 여러 연습들은 하나같이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D.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비평

주버는 이제 ‘슐리펜 계획’ 문건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돌립니다. 주버는 기존의 연구들은 러일전쟁의 결과 슐리펜이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동부전선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1906년 독일군의 정보기관은 러시아군이 전쟁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 방면에 25개 사단을, 오스트리아 방면에 22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1950년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처음 시작된 이후 모든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이 실존한 계획이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가 보기에 1905년 비망록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육군 강국을 두고 병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슐리펜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여러 문건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주버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슐리펜이 상정한 ‘최악의 시나라오’ 였을 뿐 슐리펜의 실제 의도는 아르덴느와 같이 독일 국경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결전으로 격파하는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1905년 문건에 대한 분석도 꽤 흥미로운 편 입니다. 주버는 먼저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1905년 비망록 파일에는 총 11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1:800,000축적의 6번 지도가 ‘슐리펜 계획’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6번 지도는 1:300,000축적의 2번지도(동원 22일차)와 3번지도(동원 22일차에서 31일차까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지도들에는 단지 독일군이 특정 일자에 진출해야 할 목표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프랑스군의 배치나 전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도3은 파리까지의 이동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작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어느 정도 소요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기존의 연구들은 40일 이내에 전역이 종결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 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40일 이내에 전역을 종결한다는 것은 소(小)몰트케의 발언인데 연구자들이 이것을 슐리펜 계획에도 있는 것 처럼 잘못 이야기 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3은 독일군의 주공을 릴(Lille) 남쪽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입니다.
다 음으로는 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를 가정한 지도인데 흥미롭게도 1904년과 1905년 참모부연습 처럼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병력 일부를 남쪽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역시 ‘슐리펜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 중 슐리펜이 직접 작성한 것 이외의 것은 이후에 추가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슐리펜 계획의 개요를 보여주는 지도 2, 3, 6, 7은 몰트케의 것 이라는 것 입니다.


E. 소(小)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

주버는 다음으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맞다면 슐리펜의 후임인 소 몰트케가 이에 따라 훈련을 진행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이 글에서 사례로 든 것은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입니다.

먼저 1906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로이센에 6개 군단(12개사단)과 9개 예비사단 등 총 21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우익에 15개군단(30개 사단), 메츠에 1개 군단, 로렌에 7개 군단, 스트라스부르에 2개 군단, 알자스에 2개 군단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과는 완전히 다른 부대 배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케는 이 연습에서 벨기에를 통해 우익의 30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신 이들을 메츠 방면의 반격에 투입하는 방안을 취했습니다. 결전을 국경지대에서 치른다는 것 입니다.

1908년의 참모부 연습은 프랑스가 로렌으로 직접 공격해 오는 상황과 함께 벨기에의 협조를 얻어 아르덴느를 통해 공격해 오는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아르덴느로 공격을 해 올 경우 2개 군이 동원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한 독일군의 배치는 4개 군을 메츠와 아헨 사이에 두고 1개 군을 메츠 동쪽에, 1개 군을 로렌에, 1개 군을 로렌 남부-알자스에 두는 것 이었습니다. 이 경우 독일군은 아르덴느를 향해 공격을 시작할 것이었지만 결전을 치를 곳은 프랑스군 주력이 출현하는 곳 이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만약 프랑스군 주력이 메츠-스트라스부르 방면으로 향한다면 4개 군을 메츠-코블렌츠 일대에 집결시킨 뒤 남서 방향으로 반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군과 2군은 주공의 우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프랑스군의 주공이 좌익이라면 1군과 2군이 상대하거나 4군과 5군이 대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주공이 메츠로 향한다면 1군과 2군이 남진해서 이를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주버는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을 통해 소 몰트케는 프랑스 침공 보다는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상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해석합니다.


주버의 결론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버는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정설이었던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해석은 슐리펜이 처음에는 동부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점차 서부전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정판이 바로 ‘슐리펜 계획’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슐리펜이 1898년 부터 1905년까지 쓴 글과 그가 실시한 여러 연습들을 보면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국경지대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에서 소 몰트케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 차원의 대규모 섬멸전을 계획한 사실이 없다.


이 결론은  꽤 충격적인 것 이었고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0년에 걸친 논쟁의 막이 오르게 된 것 입니다.

2010년 7월 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 0

이제 그동안 예고편만 때려댔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원래는 2009년에 논쟁을 간단하게 정리한 글을 썼는데 중간에 빼먹은 논문도 많고 게다가 2010년에 논쟁의 주인공인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새로운 논문을 쓰기도 했으니 그동안 진행된 논쟁을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예전 글에서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빼먹은 논문들을 모두 정리할 생각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논쟁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많은데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다른 분들도 저와 같으시리라 짐작해 봅니다. 위에서 적은 것 처럼 이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과 서적들을 최대한 소개할 것이기 때문에 글을 몇 편으로 나눠서 연재하려고 합니다. 작년에 썼던 글들은 제 귀차니즘과 블로그 글을 손에 책 잡히는 대로 쓰는 습관 때문에 논쟁 중간에 발표된 논문들을 생략하고 넘어가는 폐해(!!!)가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런 폐해를 줄여보려 합니다.


슐리펜 계획

먼저 슐리펜 계획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군사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계획의 하나인 만큼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은 아주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간략히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네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의 실체를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 전 까지 학계의 통설은 슐리펜 계획의 입안자인 독일군 총참모장 슐리펜이 양면전쟁의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단기결전으로 승리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이때문에 우익에 주력을 최대한 집중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 입니다.
기존의 통설은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게 될 경우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해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총참모장에 임명된 슐리펜도 이점을 염두에 두고 개전 초반에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결전을 치르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때문에 1870/71년 전역과 같이 프랑스 국경을 조기에 돌파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퇴임하게 될 때 까지 다양한 대안을 구상했으며 그 결과 최종적으로 1905년에 슐리펜 계획이 완성됩니다. 이 계획은 서부전선에서 조기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 독일군의 가용한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것 이었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들을 무력화 하기 위해서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과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력은 독일군의 우익을 담당할 1, 2, 3군이었으며 이 중에서도 최우익에서 포위망을 형성할 1군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독일군의 주력은 벨기에를 돌파한 뒤 대규모 포위 기동을 실시하고 특히 최우익을 맡은 제1군은 루앙(Rouen)을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포위망을 형성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대규모 포위망으로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슐리펜 계획은 마무리 될 것 이었습니다.
실제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작전이 이렇게 수행되었고 전후 독일측의 공간사도 동일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는 없었습니다.


주버의 주장, 슐리펜 계획의 실재 여부에 대한 논쟁의 시작

그런데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이 논문은 꽤 도발적인 내용으로 이후 10년이 넘는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에 대한 논쟁의 시발점이 됩니다. 이 논쟁에는 여러명의 학자가 참여했으나 주버가 처음 논문을 투고한 War in History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테렌스 주버가 논쟁의 포문을 연 뒤 그를 상대한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와의 논쟁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발표해 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뒤 테렌스 홈즈와 논쟁을 진행하다가 2003년 같은 학술지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포했을 때 까지입니다. 이때까지의 논쟁은 주버와 홈즈간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논쟁에 대한 주요 논문과 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Terence Zuber,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 War In History 1999; 6(3)

Terence M. Holmes,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 War In History 2001; 8(2)

Terence Zuber,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1; 8(4)

Terence M. Holmes,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2; 9(1)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German War Planning 1871-1914(Oxford University Press, 2002)

Terence M. Holmes, “Classical Blitzkrieg: The Untimely Modernity of Schlieffen's Cannae Programme”,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2003;  67(3)

Terence Zuber,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 War In History 2003; 10(1)


두 번째 단계는 이 논쟁에 다른 1차대전 전공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으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ㆍ지지하면서 논쟁에 개입했습니다. 이어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 독일의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 등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판이 아주 커졌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논문과 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Robert T. Foley,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3; 10(2)

Terence M. Holmes,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 War In History 2003; 10(4)

Terence Zuber,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 War In History 2004; 11(2)

Terence Zuber,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Sources and Interpretations(Boydell Press, 2004)

Annika Mombauer,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2005, 28(5)

Robert T. Foley, “The Real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6; 13(1)

Terence Zuber, “Der Mythos vom Schleffenpla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Annika Mombauer, “Der Moltkeplan : Modifikation des Schlieffenplans bei gleichen Ziele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Robert T. Foley, “Der Schlieffenplan : Ein Aufmarschplan für den Krieg”,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 (Schöningh, 2006)

Gerhard P. Groß,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Schöningh, 2006)

Terence Zuber, Everybody Knows There Was a `Schlieffen Plan': A Reply to Annika Mombauer, War In History 2008; 15(1)

Gerhard P. Groß,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 War In History 2008; 15(4)

Terence M. Holmes, "All Present and Correct: The Verifiable Army of the Schlieffen Plan", War In History 2009; 16(1)

Terence Zuber, 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A Reply to Gerhard Gross, War In History 2010; 17(2)

두번째 단계 부터는 약간 복잡해 집니다.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이 대거 개입했기 때문에 주버가 반박논문을 발표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아니카 몸바우어가 2005년에 발표한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반박논문은 2008년에 씌여졌으며 게르하르트 그로스의 2006년 논문,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에 대한 반박 논문은 201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연재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요 논문과 저작들을 모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글에서 좀 불성실하게 이야기를 진행한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나 할까요. 좀 느긋하게 연재하되 하나도 빠짐없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2010년 4월 24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 - 계속되는 논쟁

제가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썼을때 논쟁과 관련된 주요 논문 몇 개를 빠트렸기 때문에 자료를 보강해서 새로운 글을 쓰겠다고 이야기 했었지요.

그런데 슐리펜 계획이 실제 독일군의 작전 계획이 아니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면서 논쟁을 촉발시킨 테렌스 주버가 이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2010년 2호에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주버의 새 논문은 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으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새로운 독일 자료를 가지고 그를 비판한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Gross)의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입니다. 이제 게르하르트 그로스가 주버의 반박을 재반박할 차례로군요. 이로서 이 논쟁은 10년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버는 자신의 밥줄인 이론을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쓸 글에서 이야기 하겠습니다만 주버는 1905년의 Generalstabsreise West에서 실시된 워게임이 슐리펜 계획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그로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그로스가 새로 발굴했다는 자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것들을 보다 세부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그치고 있을 뿐 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슐리펜 계획" 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이 당시 편성되어 있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반박이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주 버의 새로운 논문은 제가 앞으로 쓸 예정인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쓸 글은 지금까지 발표된 주요 논문을 최대한 소개하는 방향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어쨌든 논쟁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기세입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책 몇 권

지난주에 주문한 책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유로화가 비싸서 독일 책은 많이 사지 못하는 터라 책 상자를 받아 드니 즐겁더군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라면 포장이 부실했다는 겁니다.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을 때 완충제 대신 종이를 구겨넣은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집어 넣은 게 아니라서 상자 아랫 부분은 모두 젖어 있었습니다. 책들은 비닐로 밀봉포장 해 놓아 전혀 상하지 않았지만 영수증이 젖어서 너덜너덜해 졌더군요.


그런데 영수증이 걸레가된 와중에도 포도주 광고가 실린 전단지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신기하여라...


 이번에 받은 책 중 군사사와 관계된 것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의 두 녀석 중 오른쪽에 있는 Österreich-Ungarns Kraftfahrformationen im Weltkrieg 1914-1918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차량부대의 편성과 장비, 운용을 다루고 있는데 방대한 1차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책의 뒷부분에서 장갑차 부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히 오스트리아군의 장갑차 부대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이었던 이탈리아군과 동맹군이었던 독일군의 장갑차 운용에 대해서도 비교해서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산업화 시대의 전쟁, 특히 1차대전 시기의 기계화이다 보니 아주 좋은 물건을 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 있는 Österreicher in der Deutschen Wehrmacht: Soldatenalltag im Zweiten Weltkrieg는 2차대전 중 독일군에 복무한 오스트리아 인들의 군사 경험에 대한 내용인데 예상했던 것 보다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군들의 군사경험, 전쟁범죄, 나치 체제에 대한 순응 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서술하고 있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그런지 서술의 밀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통독을 해 보면 평가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Pflicht zum Untergang: Die deutsche Kriegs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은 Schönigh 출판사가 내고 있는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네번째 책 입니다.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수행을 분석하고 있는데 특히 전쟁 말기 부대편성과 병력수급, 장비문제를 다룬 3장 1절과 전쟁 말기 서부전선의 경험이 전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부분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Der Schlieffenplan: Analysen und Dokumente은 역시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란 글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서구 군사학계의 논쟁에 대해쓴 일이 있지요.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 다소 산만한 글이 되었는지라 독일쪽 견해도 참고해서 다시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이책을 그 이유에서 사게 됐습니다. 이책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문과 슐리펜 계획에 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테렌스 주버의 슐리펜 계획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은 주버의 논문과 주버를 반박하는 논문을 합쳐 네편이 실려있고 나머지 논문들은 슐리펜 계획에 관련된 다른 주제의 논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꽤 근사한 부록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언급된 작전안의 지도입니다.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을 쓰려면 자주 봐야 할 테니 같은 크기로 복사를 할 생각입니다.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휴같지 않은 연휴는 잘들 지내셨습니까?

얼마전 이야기 했듯 그동안 남발한 공수표를 조금씩 수습해 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유명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에 대한 한 논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논쟁은 10년간 계속되면서 매우 재미있는 단행본과 논문들을 생산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이 논쟁의 진행상황과 그 부산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논쟁의 시작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학술지에서 거부를 당하고 있었는데 War In History의 공동편집자였던 군사사가 휴 스트라찬(Hew Starchan)은 War in History에 이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엄청난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슐리펜 계획'이란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 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 총참모부 출신의 군인들이 1차대전 직후 군부에 쏟아진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공간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은 전쟁 기간 중 독일군 총참모부의 전쟁지휘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군부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비판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후 1차대전 중의 군문서는 기밀로 분류되어 제한적인 장교들만이 접할 수 있었으며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등 이 문서를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장교들은 독일군부의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슐리펜이 훌륭한 전쟁계획을 남겼으나 후임자인 몰트케가 이를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해 전쟁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에 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이 있었으나 원사료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계획이었다는 점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후 1990년대 까지 원사료를 활용한 연구는 1950년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슐리펜의 (실제로는 1906년 1월 경 작성한 된) 1905년 비망록(Denkschrift)을 발굴한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연구가 사실상 유일한 것이었으나 리터 또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연구들은 1920년대에 확립된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뒤 냉전기간 동안 기밀로 묶여있던 공산권의 자료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었다. 경제사가이며 군인이었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이 1930년대 후반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연구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기간 중 작성한 작전계획에 대한 여러 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슐리펜이 1890년대 후반 부터 퇴임 직전까지 작성한 비망록을 분석하면 슐리펜은 다양한 전쟁계획을 검토했으며 서부에 대한 공세 외에도 동부에 대한 공세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1904년에 총참모부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상정하고 실시한 두차례의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은 주공을 우익에 두고있지 않다. 그리고 이 참모부연습에는 실제 편성된 부대 뿐 아니라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다. 슐리펜이 1905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등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병력배치를 하고 있지만 프랑스군의 주력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할 경우 우익에 배치된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슐리펜 계획'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슐리펜은 1905년 겨울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참모부연습에서는 '전략방어'를 취했다.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 중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것은 없다.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면 이 계획에 입각한 훈련이 실시되었어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부대들 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늘날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단지 그가 구상한 여러 '참모부연습' 중 하나일 뿐이다. 슐리펜이 사망하기 직전인 1912년에 작성한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자료로 인용되었으나 이 비망록은 슐리펜이 현역 시절 실시했던 여러 참모부연습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실제 결전은 벨기에에서 벌어질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또한 슐리펜의 후임인 소(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전쟁계획으로 넘겨받았다면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이 계획, 즉 1905년 비망록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몰트케는 1906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경우 슐리펜이 1904년 훈련에서 제안한 바 있었던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대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했던 대로 메츠(Metz)를 통한 반격을 실시하고 있다. 몰트케가 실시한 1908년의 참모부연습도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할 경우 반격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방어를 취하고 독일이 전략적인 공세로 나선다는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주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슐리펜과 소 몰트케는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반격으로 이것을 격파하고 프랑스 영내로 침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즉 '슐리펜 계획'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홈즈의 반론과 주버의 재반론

이렇게 주버가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거대한 떡밥'을 던지자 이 바닥에서 침 좀 뱉는다는 인물들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웨 일즈 대학의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는 같은 학술지의 2001년 8권 2호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홈즈의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주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인 1905년 비망록을 슐리펜의 다른 비망록, 또는 참모부연습과는 매우 다른 돌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버는 당시의 전략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명백해 졌으며 이것은 슐리펜이 서부 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주버는 이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공세적 작전계획인 12호 계획은 러시아와의 양면 공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는 실시될 수 없었으며 슐리펜은 이 점을 명백히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한 것 또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분쇄하더라도 단순히 반격을 통해 독일-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점은 슐리펜이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강조한 바 있다.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이들이 국경지대의 요새로 퇴각해 방어로 전환할 경우, 즉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계획이었다. 주버가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슐리펜은 국경지대의 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슐리펜 계획'인 1906년 1월의 비망록이 작성된 배경은 슐리펜이 여러 차례의 도상 훈련과 정보를 종합해 국경지대를 통한 반격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는 데 있다. 슐리펜은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의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슐리펜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은퇴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버는 1904년 참모부연습이 주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1904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05년의 참모부연습은 주버의 주장과는 달리 '슐리펜 계획'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의 핵심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은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슐리펜 계획이 될 1905년 비망록을 완성한 것이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해 최단시일내에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하는데 있었으며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방어를 취하며 단계적 후퇴를 실시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방안이었다. 또한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슐리펜이 그 계획을 1906년에 즉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충분히 증강될 장래를 예승하고 작성했기 때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버는 소 몰트케가 초기에 1905년의 비망록에 따른 훈련 대신 1905년 참모부연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나 소 몰트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초기에는 그가 벨기에를 통한 대규모 우회 기동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에 이르면 소 몰트케도 1905년의 비망록을 다시 검토한 끝에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또한 프랑스가 공세적인 계획을 강화함으로써 슐리펜이 우려한 것 처럼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를 통한 방어를 취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주버의 오류는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포위하는데 있다고 인식한 데 있다. 파리를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에 성공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방안이었으며 슐리펜 계획의 고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주버는 이러한 오류 때문에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비망록을 잘못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주버는 홈즈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War in History 2001년 8권 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투고합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이란 실재로 존재했으나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우익을 강화하여 파리-베르덩을 잇는 중간선에서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으며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포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대안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강화한 우익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고 있던 부대들을 포함시킨 것은 슐리펜이 앞으로 진행될 독일군의 증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계획은 그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또한 홈즈는 무리하게 1904년의 참모부연습과 '슐리펜 계획'을 연결하고 있다. 1904년의 참모부연습은 '슐리펜 계획'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1938년 독일군 장성이었든 폰 죌너(von Zoellner)가 썼던 글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홈즈는 죌너의 주장에 따라 1905년 참모부연습이 슐리펜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1905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로렌 지방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돌리고 있다. 그리고 홈즈는 슐리펜의 전략 구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홈즈에 따르면 소 몰트케는 1911년 경에는 슐리펜 계획을 재검토하고 수용했다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병력은 슐리펜 계획에 명시된 것에는 한참 미치지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 계획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제1군의 임무는 독일군의 우익인 세느강 하구를 방어하는 것이었지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1904~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 등 핵심적인 사료에 대한 해석을 두고 주버와 홈즈간에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부분은 위에서 진행된 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니 '생략'할까 합니다.

한편,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박사학위를 취득한 주버는 자신의 주장을 더 강화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과 German War Planning

주 버가 2002년에 낸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기본적으로 1999년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을 더 추가한 것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동일한 것 입니다. 중간에 있었던 홈즈와의 논쟁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내용이 풍부해졌습니다.

먼저 1장에서는 1차대전 직후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의 내용을 확대한 것으로 1920~30년대의 여러 논쟁들과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역사적 사실로 확립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슐리펜의 전쟁계획들이 성립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 몰트케의 전쟁 계획들과 1880년대 후반의 군사적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는 없었던 새로 작성된 부분입니다. 2장에서는 대 몰트케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해 러시아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대 몰트케는 1870년대 후반까지는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강화하고 또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계획을 수정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 몰트케의 재임 말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신속한 승리도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 졌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이 포기되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국경지대의 요새와 기술의 발전으로 포병의 파괴력이 강화되는 등 대 몰트케가 다시금 서부전선으로 관심을 돌리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4장은 1999년 논문의 핵심으로 슐리펜이 취임 이후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작전계획을 분석하고 있으며 1905년 비망록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5 장은 소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과 작전계획, 그리고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부분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홈즈의 주장에서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1911년 부터 1914년 까지 프랑스, 러시아의 전쟁계획과 이에 대한 독일군의 정보, 그리고 이것이 이 시기 전쟁계획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서 다소 미흡했던 부분이 1차대전 직전 소 몰트케의 작전 계획이 어떻게 수립되어 실행되었는가 였는데 단행본에서는 그점이 보충되었습니다. 주버는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각 야전군 사령부 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독일 제 1군의 임무는 프랑스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주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제 2군이 소 몰트케의 1914년 작전계획의 주공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국경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경 지대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이 회복되기 전 까지 프랑스 영토를 최대한 점령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강화하면서 논문 분량의 제한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9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914년에 실행된 작전은 도데체 뭐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단행본에서는 그 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다시 2004년에 German War Planning, 1890~1914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이 자료집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에 취임한 다음 부터 1차대전에 발발하는 1914년, 그리고 1차대전 직후 슐리펜의 작전 계획에 대해 전개된 논쟁에 대한 사료를 영어로 번역해 싣고 있으며 각 사료 마다 주버의 간략한 해제가 달려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 언급한 대 몰트케 시기의 작전 계획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기본적으로 논쟁의 핵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존 주장들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계속되는 논쟁

한편, 이 논쟁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참여로 근 10여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주 버와 홈즈의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인 2003년, 역시 1차대전 연구자인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War in History 10권 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참여했으며 2005년에는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 몸바우어의 논문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가 War in History 15권 4호에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그로스는 주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작전계획에 대해서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와 해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반면 독일군 총참모부의 기동계획(Aufmarschpläne)은 검토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주버는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격을 가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동원 완료 이전에 선제공격에 나설 경우에 취할 방안이었으며 이 비망록에서는 두번째 방안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 공세에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슐리펜의 구상에서 적의 선제공격에 대해 반격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이 적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 이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슐리펜이 선제공격에 대응한 반격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 참모부연습은 단순히 슐리펜이 참모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실시한 것에 불과하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한 주버는 슐리펜이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연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슐리펜은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벨기에를 돌파해 루앙 부근에서 세느강을 도하,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실시한 바 있다. 주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실제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독일 육군의 증강과 동원태세 강화를 위한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슐리펜은 재임 기간 중 육군의 증강에 과도할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무렵에는 전쟁부의 축소된 방안을 수용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버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제시된 병력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사단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슐리펜은 여러 훈련에서 실제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당시 총참모부의 장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 서류상의 사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 작전계획은 될 수 없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다.
그 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의 작전계획은 슐리펜의 다른 작전계획이나 훈련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낮다. 슐리펜의 기동계획, 참모부연습, 전쟁연습 등을 검토하면 슐리펜은 비록 위험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항상 포위기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슐리펜은 이미 1897년의 비망록에서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를 돌파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르덩 북쪽으로의 우회기동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이 비망록은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의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벨기에 전체를 침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의 우회 기동은 프랑스군을 국경지대에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약체화 되어 프랑스군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감소하자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벨기에를 돌파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비록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취한 계획은 슐리펜의 1905년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부전선에서 주도적으로 공세를 실시하고 우익을 강화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의 계획을 상당부분 이어받은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주버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10여년간 지속된 이 논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 졌으며 논쟁 참여자 중 한 명인 로버트 폴리의 지적대로 1차대전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논쟁과 관련해 아직 검토하지 못한 논문이 많다 보니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주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직까지는 전통적인 해석이 좀 더 타당성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슐리펜 계획과 관련해 주버의 연구 외에도 흥미로운 저작들이 몇 권 등장했는데 이것들은 뒤에 입수하는 대로 평을 해볼까 합니다.(또 공수표 발행이군요!)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