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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3일 수요일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장교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1949년의 주한미군사고문단 문서들을 읽다 보니 중간에 아주 재미있는 문서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판매된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클럽의 지배인인 J. C. Harold 상사가 작성하고 클럽 담당 장교인 William R. Alderman 중위가 서명한 것인데 구체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Officers Club Yong Dung Po Installation Merchandise Inventory


저 내역에 따르면 1949년 5월 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물품은 코카콜라였고 그 다음은 맥주였습니다. 이 두 품목의 판매량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이 당시 한국 근무는 극도로 인기가 없었고 한국으로 발령나는 장교나 사병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 생활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장교들은 한국 생활의 고달픔을 콜라나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달랜 모양입니다.

어쨌든 꽤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만약 다른 시기의 자료도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했겠지만 5월 한달치 밖에 못구한게 조금 아쉽군요.

그리고. 어쨌든 결론이 없으면 심심하니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승리의 코카콜라!

2007년 4월 29일 일요일

보불전쟁 이전 프랑스군의 기강 해이 문제

계속 해서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Louis Jules Trochu)장군은 1864년 메츠(Metz)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트로슈는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남긴 프로이센 장교는 프랑스군의 신형 소총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에 주목했다. 한 부사관이 소총을 보여주고 분해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동안 병사들의 잡담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마침내 한 장교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내무반이 아니다!(Silence! Vous n’êtes pas à la foire!)”

파리 근교의 부대를 방문한 다른 프로이센 참관인은 프랑스 군의 훈련은 매우 늦게 시작되고 종종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 장교들은 부대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쪽에서 남긴 기록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육군의 감찰관은 1896년 7월 엑스-앙-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한 뒤 소총, 총기 수입도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병사들은 체육시간에 여기 저기 늘어져 빈둥거리며 군악대원은 군가를 모르고 펜싱 교관은 펜싱을 제대로 못 하며 또 많은 수의 부사관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병들을 잡아 넣느라고 영창이나 군교도소를 들락 거린다고 지적했다. 앙드레라는 상병은 감옥에서 도둑 한명을 탈옥시켜 주둔지에서 그 도둑과 함께 훔친 돈으로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감찰관은 제 99보병연대의 시찰을 마친 뒤 장교들이 “건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감찰관이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하고 기록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사병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프랑스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군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격 뿐이었다. 장기간의 군복무와 믿고 본받을 만한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은 제멋대로에 기강이 엉망이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요소가 없었다. 그러니 1840년대에 프랑스군의 개편을 주도한 뷔고(Thomas Bugeaud) 원수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한 점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명령 받는 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것은 못 참는 다는 점이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3~44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광경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볼 수 있지요.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

계속해서 날림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쓸만한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시간도 잘 안나고 그렇습니다. 당분간 쓸만한 저작들에서 발췌한 날림 번역글이 계속 올라갈 듯 싶습니다.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The legacy of failed mobilization)

1차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를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사상 – 즉 우익사상이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전후 20년간 이탈리아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었다. 우익사상은 국민동원의 실패에 대한 반동이었고 특히 1920년 이후 시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전무했으며 이탈리아 정부가 전시동원을 통해 만들려 했던 국민적 단합을 우익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개인에게)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바로 국가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박멸하는 것 이었다. 독일과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1920년대 독일의 우익 “호교론자”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1918년 11월에 노동자들이 “등 뒤에 칼을 꽃았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등 뒤의 칼”에 대한 주장이 이미 전쟁 중인 1916년에 등장했는데 전쟁 초반부터 연달아 터진 참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적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충원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은 이런 소문을 더 부채질 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군사적 전통이 일천한 까닭에 수준 높은 장교집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의 분열은 상처로 남았다. 전쟁으로 각인된 야심과 적개심은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에서 얻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쳐부숴야 했지만 쳐부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총력 동원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처럼 비춰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극성을 부린 지역은 전쟁 중에 동원체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새로우며 진정한 동원체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이 꿈꾸는 이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용맹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완벽하게 동원된 전사였다.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패배주의자, 탈영병, 병역기피자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사실 “믿음, 복종, 투쟁”은 파시스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따르게 하려 했던 것 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쟁을 수행할 때와 같은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창설될 당시부터 군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자본가들이 구사대로 고용하던 깡패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파시스트들은 “행동대(squadrismo)”의 폭력행위에서 전우애 같은 안도감과 참호전투 같은 흥분을 전시 보다 “훨씬 안전한” 조건에서 체험했다. 파시스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병대(Milizia Volontaria di Sicurezza Nazionale)를 만들었고 이와 유사한 준군사조직이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됐다. 제복, 경례, 제식훈련, 목총(으로 하는 총검술) 그리고 행군은 이런 조직의 하루 일과였다. 파시즘은 이렇게 전쟁을 흉내내면서 전쟁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 냈다. 이러한 영속적인 동원체제는 결코 동원해제 될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이 만들어낸 전쟁에 대한 패러디였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많아졌다. 파시즘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이것을 “전투”라고 칭했다.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밀과의 전투”, 1927년의 화폐 개혁은 “리라와의 전투”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미래의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출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군사적 비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계속해서 언급됐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문제였다. 파시즘은 그 특성 대문에 평화시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의 사상에 전쟁의 심리적 긴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이유는 단지 전쟁이 평화시에는 얻을 수 없는 심리적 의무감을 불어넣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 환기해야만 파시즘이 가지는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들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애국적이고 국가적인 목표가 있으면 사회에 대한 억압과 전제적인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의 적”들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호한 수단을 통해 박멸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박멸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지속적인 전시 체제 속에서 박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강요된 애국심”은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변혁기에 “강요된 애국심”은 사회적 투쟁과 기술적 진보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는데 이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규율, 사회의 위계질서, 가부장적 질서, 애국심 등의 사회적 가치들은 전쟁 그 자체를 재정의 함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도 “총력전” – 제대로 말하면 “총력전”을 펼치는데 실패한 – 의 트라우마는 평화에 대한 관념을 제약했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분열돼 있었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전에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은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었으나 전쟁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보다 체계적이고 극도로 조직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을 통해 국가총동원의 경험으로 드러난 이탈리아 사회의 분열과 나약함을 극복하려 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약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번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적, 애국적 이상은 무솔리니의 통치기간 동안 파시즘의 지배 원리로 작용했다. 애국심은 정권의 목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가 가진 정당성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동적으로 국가와 국가적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파시스트들이 1차세계대전의 국가 총동원 경험을 통해 만든 파시즘의 내부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러 면에서 전쟁을 위한 “총동원”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개념의 어설픈 전주곡이었다. 전쟁 시기에나 일어나야 할 일들이 평화시에도 일어난 것 이었다.

Paul Corner and Giovanna Procacci,『The Italian experience of ‘total’ mobilization 1915~1920』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237~239

2007년 4월 12일 목요일

어떤 영국 장군의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 : Hubert Gough의 사례

뭐랄까, 게으른 데다가 이런 저런 일들의 압박으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습니다. 결국 또 번역입니다. 고프라는 대인관계가 불량한 장군의 이야기이긴 한데 영국 육군 장교단의 골치였던 파벌 문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프와 동료 장교들간의 관계(Relations with Fellow Officers)

1차 대전 이전의 영국 장교단은 매우 소규모 집단이었고 몇 개의 파벌(cliques)로 나뉘어 있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프(Hubert Gough)는 이미 나중에 그와 함께 서부전선의 고급 지휘관이 될 장교들과 (좋건 나쁘건 간에)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프가 참모대학에서 교관으로 있을 때 참모대학장은 훗날 제 4군 사령관이 되는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소장이었다. 고프의 동료 교관으로는 전쟁 당시 군단장을 역임한 헤이킹(Richard Haking)과 두케인(John du Cane), 그리고 고프의 바로 전에 제 7사단장을 지낸 ‘토미’ 캐퍼(Capper)가 있었다. 이 외에는 나중에 고프의 참모장이 된 키젤(Launcelot Kiggel)이 있었다. 고프는 말년에 키젤에 대해서 별다른 이유 없이 “약해 빠지고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참모대학의 학생으로는 고프의 동생 조니(Johnnie Gough)가 있었다.
1914년의 커래이(Curragh) 사건은 육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커래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 3기병여단 소속을 포함해서 더블린에 있던 대부분의 장교들은 얼스터의 신교도들과 충돌할 것을 우려해서 직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여기에 강력히 저항한 장교들 중에는 고프 형제가 있었다. 뒤에 영국육군 총사령관(Chief of the Imperial General Staff)을 지낸 ‘울리’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 선 장교로는 프렌치(Sir John French)원수, 제 4경기병 연대(4th Hussar)의 하웰(Phillip Howell) 중령이 있었다. 고프는 1915년 말 프렌치 원수가 영국원정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건방지고 보잘 것 없는 바보(an ignorant little fool)”라고 조롱하며 즐거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프 형제와 절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윌슨(Henry Wilson)이 있었다. 윌슨은 커래이 사건에서 약간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윌슨은 1916년 10월 제 4군단장으로 임명돼 당시 예비야전군을 지휘하고 있던 고프의 명령을 받게 됐다. 비록 윌슨은 특별히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고프는 약간은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윌슨의 지휘 능력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프는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제 3차 이프르 전투의 책임 문제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양이 된 것은 모두 윌슨이 뒤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프는 윌슨에 대한 적대감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고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 장(chapter)를 할애해 윌슨을 비난했고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출연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는 윌슨에 대해 이렇게 빈정거렸다.

“(한때) 윌슨이 내 지휘하에 들어온 일이 있었지. 그는 나를 철저히 기만했어. 뭔가 쓸만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고.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서 자신과 친한 높은 신분의 여자들에게 편지만 쓰고 앉아 있었지.”

영국 육군이 배출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군인”이었던 윌슨과 비교하면 고프의 정치적 능력은 보잘 것 없었다. 1918년 3월, 윌슨은 육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해서 고프에게 받은 빚을 갚아줬다.

나중에 야전군 사령관이 된 고프, 바잉(Julian Byng), 버드우드(Willian Birdwood)는 1900년의 보어전쟁에서 같이 복무했다. 이 무렵 고프는 자신의 일기에 바잉에 대해 혹평을 늘어놓았다. 훗날 바잉의 전기 작가는 고프는 괴상하고 의심많은 성격 때문에 친밀한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고프의 바잉에 대한 질투는 1차 대전이 끝난 뒤에 그의 언행을 통해 잘 드러난다. 고프는 바잉의 능력은 (1915년부터 1917년 까지 캐나다 군단을 지휘했을 때를 지적하며) “식민지 친구들과 죽이 잘 맞는 것이었을 뿐이며 그 친구는 군사 지식이 빈곤한데다 뇌를 가졌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혹평했다. 그리고 1918년 독일의 춘계 대공세에서 바잉이 후퇴한 것에 대해서는 “병신같이 무능했다”고 비난했다. 1916년에 바잉의 캐나다 군단은 고프의 지휘하에 들어왔고 두 사람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잉이 고프의 말대로 뇌가 있건 없건간에 1917년 4월 바잉이 지휘한 비미 계곡 전투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1918년 춘계공세에서의 퇴각 역시 바잉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은 지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바잉이 명예와 부를 얻고 마침내 1920년에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자 고프는 이것을 아주 신경 썼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고프는 나중에 야전군을 지휘하게 된 기병장교 “황소” 알렌비(Edmund Allenby)와는 어정쩡한 관계였다. 고프와 알렌비는 부하들을 극도로 긴장시키는 공통점이 있었다. 본(John Bourne)은 두 장군에 대해서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폭군”이었다고 평했다. 고프는 1차대전 이전에 알렌비의 휘하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고프는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한 반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고프는 서부전선에 복무하던 당시 알렌비는 “특별한 이유없이 융통성 없는 명령만 남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매우 공정했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부하들에게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최소한 알렌비는 1차 대전당시의 기병병과 출신 장군들 중에서는 가장 평이 좋은 편이었다. 고프는 또 다른 기병출신 장군인 체트워드(Philip Chetwode)에 대해서는 “게을러 터졌으며 얼간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고프는 보어전쟁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던도날드(Dundonald)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앵글시(Anglesey)는 고프의 이런 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고프가 인정했듯이 그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진급한 것이 (대인관계에) 가장 큰 원인이 됐다. 고프는 46세에 야전군 사령관이 됐는데 롤린슨이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은 53세였다. 군단장으로 복무할 당시 고프는 키치너가 하는 말 때문에 자신이 부하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고프의 지휘스타일은 고프가 자신과 동기이거나 더 선배인 장교들을 다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졌다고 보고 있다. 이야기를 좀 더 공정하게 하기 위해 한 초급장교의 경험을 소개하겠다. 그 장교는 서부전선에서 고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고프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기 때문에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전쟁 뒤에 고프가 한 발언들은 그가 1918년에 지휘관 직위에서 면직된 것 때문에 느낀 실망감과 분노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프는 그다지 훌륭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Gary Sheffield, An army commander on the Somme : Hubert Gough; Command and Control on the Western Front : The british army’s experience 1914-18, Spellmount, 2004, pp74-76

역시 어디건 간에 인간 관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2007년 3월 20일 화요일

2차 대전 중 소련장교에 대한 농담

2차대전 당시 소련군 병사들 사이에서 돌던 우스개라고 하는군요.

어느날 저녁, 한 장교가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농담을 했다. 병사들은 농담을 듣고 모두 웃었는데 유독 한명의 병사는 무뚝뚝하게 있는 것이었다. 장교는 정치위원을 불러서 가만히 있는 병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라고 했다.
정치위원이 병사에게 물었다.

“동무, 혹시 집에서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들었소?”

그 병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전우들은 모두 무사하고 또 자기 자신도 별 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 이었다. 정치위원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웃지 않은거요?”

그 병사가 대답했다.

“저는 다른 연대 소속입니다. 저 분은 제 연대장이 아닙니다.” (웃는 것도 장교의 명령에 따라야 할 정도로 장교의 권위가 높았다는 이야기)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199


이 이야기가 웃기십니까?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데자뷰?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그리고 4년 후.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흔히 싸우면서 닮아 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독일쪽은 전쟁 전에 준비한게 있다보니 전쟁 말기까지도 쓸만한 지휘관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만 하위 전술제대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하지요.

2007년 1월 14일 일요일

붉은군대의 간부 계급체계 : 1919~1941

1. 적백내전기~1935년

붉은군대의 군 계급체계는 적백내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편됐습니다.

레닌과 많은 혁명가들은 전문적인 장교집단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붉은군대를 차별 없는 “사회주의”적인 군대로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은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결과 붉은군대는 기존의 계급제도와 장교(Офицер)라는 명칭을 폐지하는 대신 직위별 호칭과 “지휘관(Командир)”이라는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부사관과 장교계급의 상징성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고 혁명 이후 도입돼 1924년에 그 기틀이 잡혔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 간부의 호칭을 계급대신 “중대지휘관”, “연대지휘관”등 직위에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제국 시절부터 군대물을 먹은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지요.

혁명 이후의 간부 계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소대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사단지휘관(Начальник дивизии)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보시면 군단지휘관이 빠져있는데 내전기의 야전군 규모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단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독소전쟁 초반인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 처럼 야전군 사령부가 직접 사단을 지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군단지휘관이라는 계급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1924년에 정립된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대의 직위를 1등급부터 14등급까지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급지휘관
1등급 :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 반지휘관(Командир звена)
2등급 : 소대 부(副)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 중대 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중급지휘관
3등급 :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4등급 : 중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роты) / 독립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взвода)
5등급 :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6등급 : 대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 독립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otdel’noy roty)

고급지휘관
7등급 :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약칭 Комбат)
8등급 : 연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а полка) / 독립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батальона)
9등급 :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약칭 Компол)

상급지휘관
10등급 : 사단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약칭 Комбриг)
11등급 : 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약칭 Комдив)
12등급 : 군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корпуса, 약칭 Комкор)
13등급 : 야전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 군관구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округа) / 전선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фронтом)
14등급 :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약칭 Комарм) / 군관구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округом) /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2. 1935년~1941년

소련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적백내전기 트로츠키가 확립한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군 병력이 증가하고 또 전문적인 장교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적백내전 시기에 확립된 제도로는 계속해서 팽창하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평등한’ 계급 내에서 직위만 가지고 지휘를 한다는 게 생각 만큼 비효율 적이었고 가뜩이나 생활수준도 열악한 장교들에게 권위 없이 책임만 지워놓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게 좀 비정상 이었겠지요.
마침내 국방인민위원회는 1935년 9월 22일 직위별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계급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국은 장군 계급에 대해서는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고 특수 병과의 경우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해 1935년의 계급제도는 뭔가 어정쩡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도입된 붉은 군대의 장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Лейтенант)
중위(Старший лейтенант)
대위(Капитан,)
소령(Майор)
대령(Полковник)
여단지휘관(Комбриг)
사단지휘관(Комдив)
군단지휘관(Комкор)
2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1-го ранга)
소비에트연방원수(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35년 개편안에 따른 특수 병과의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2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2-го ранга)
2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보조군의관(Военфельдшер)
보조수의관(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하급군법무관(Младший военный юрист)

중위급
: 1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1-го ранга)
1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상급보조군의관(Старший военфельдшер)
상급보조수의관(Старший 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대위급
: 3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
3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3-го ранга)
군의관(Военврач)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상급군법무관(Старший военюрист)

소령급
: 2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2-го ранга)
2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2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2-го ранга)

대령급
: 1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1-го ранга)
1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1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1-го ранга)

여단지휘관급
: 여단공병지휘관(Бригинженер)
여단군수관(Бригинтендант)
여단군의관(Бригнврач)
여단수의관(Бригветврач)
여단법무관(Бригвоенюрист)

사단지휘관급
: 사단공병지휘관(Дивинженер)
사단군수관(Дивинтендант)
사단군의관(Дивврач)
사단수의관(Дивветрач)
사단법무관(Диввоенюрист)

군단지휘관급
: 군단공병지휘관(Коринженер)
군단군수관(Коринтендант)
군단군의관(Корврач)
군단수의관(Корветврач)
군단법무관(Корвоенюрист)

2급 야전군지휘관급
: 야전군공병지휘관(Арминженер)
야전군군수참모(Арминтендант)
야전군군의관(Армврач)
야전군수의관(Армветврач)
야전군법무관(Армвоенюрист)

한편, 1935년 이후의 군 정치위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하급군정치원(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
중위급 : 군정치원(Политрук)
대위급 : 상급군정치원(Старший политрук)
소령급 : 대대정치위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대령급 : 연대정치위원(Полковой комиссар)
여단지휘관급 : 여단정치위원(Бригадный комиссар)
사단지휘관급 : 사단정치위원(Дивизионный комиссар)
군단지휘관급 : 군단정치위원(Корпусной комиссар)
2급 야전군지휘관급 : 2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급 : 1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1-го ранга)

새로 개편된 계급체계에는 소비에트연방원수 계급이 신설됐는데 부존늬, 예고로프, 보로실로프, 블뤼헤르, 투하체프스키가 1935년 11월 20일자로 소연방원수로 임명됐습니다.

1937년 8월 20일에는 소위의 바로 아래에 준위(Младший лейтенант), 준기술관(Младший воентехник) 계급이 신설 됐습니다.

계급제도는 다시 1940년 5월 7일 개편됩니다. 이 개편의 특징은 마침내 붉은군대에 “장군”과 “제독”의 호칭이 다시 도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새로 도입된 장군 호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단지휘관 -> 해당 계급 없음
사단지휘관 ->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군단지휘관 -> 중장(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2급 야전군지휘관 -> 상장(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1급 야전군지휘관 -> 대장(Генерал армии)

그리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 계급과 이에 준하는 상급대대정치위원(Старший 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계급이 새로 신설됐으며 부사관 계급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습니다. 이렇게 1940년에 확립된 계급 체계는 전쟁 기간 중 부분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큰 변동 없이 유지됐습니다.

1940년 장군(Генерал) 호칭이 도입됨에 따라 직위별 호칭제도는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계속된 직위별 호칭제도의 잔재는 1945년 종전 시 까지도 계속 남아 고참 병사들의 경우 장교들을 기존의 직위별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계급체계의 변화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2년에는 장교 호칭이 통일 되면서 특수병과에 남아있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으며 같은해 10월에는 이중지휘체계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의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교”라는 호칭이 1943년부터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트로츠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적 군대”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고 소련의 장교단은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사회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2007년 1월 5일 금요일

R. Reese의 소련 장교 집단 구분

제가 자주 울궈먹는 러시아 군사사 연구자인 Reese는 건국 초기 소련의 장교집단을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리스 샤포쉬니코프”로 대표되는 “순수한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집단에 바실레프스키와 충격군 이론의 제창자인 트리안다필로프, 스베친 등을 포함 시키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주로 짜르 체제에서 영관급 정도의 계급에 고급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아 군대는 당의 도구라는 관점에 충실하고 당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중 스베친은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당 내에서 어떤 요직도 노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로 대표되는 “준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준 전문 군인 집단은 공산당에 가입한 비중이 높으며 당의 정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투하체프스키는 당과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레닌그라드 군관구로 좌천(?)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골로 가지요.
이 집단에는 야키르, 초창기 전차 개발에 공헌한 칼렙스키, 아이데만, 우보레비치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집단의 특징은 1차 대전 당시 주로 부사관,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으며 정치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입니다. 혁명 직후 공산당에 가입한 경우가 많으며 투하체프스키와 우보레비치, 야키르는 당 중앙위원까지 올라가지요. 칼렙스키는 나중에 통신위원장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 집단은 보로실로프로 대표되는 “비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주로 스탈린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고 대부분 농민출신에 고등 군사교육이 부족했던 편 입니다. 여기에는 독소전 초기 키예프 피박의 주인공인 부존늬 같이 능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전문 군인 집단을 매우 불신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 집단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상당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하나는 21세기의 미국인 리즈의 분석은 혁명 당시 보로쉴로프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보로쉴로프는 1920년대 초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1. 노동계급 출신의 "혁명적 지휘관"과 2. 짜르 체제에서 하급 간부였던 혁명적 농민 출신의 지휘관, 3. 짜르 체제의 엘리트 군 간부 출신 지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리즈의 구분과 보로쉴로프의 구분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또 Reese의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John Erickson이 The Soviet High Command에서 장교집단을 “전문 군인 집단”과 “비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분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를 시도했다는 점 입니다. 즉 전문 직업군인 집단을 다시 “순수한” 직업군인 집단과 “정치 지향적” 직업군인 집단으로 구분 함으로서 1937년의 군 숙청에서 왜 투하체프스키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덜이 났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포쉬니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정치 불개입과 당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 충실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투하체프스키 집단은 당의 중공업화에 찬성하면서도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고 스탈린 세력의 불쾌감을 자극합니다.

그 후의 결론은 다들 잘 아시지요?

2006년 11월 21일 화요일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재탕!!!)

원래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내용인데 현재 그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인해 폐쇄됐으므로 여기다가 재탕을 해볼까 합니다.

==============(이 하 재 탕)==============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급여 체계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는 25개의 급여등급(Besoldungsgruppen)으로 나뉘는 기본급과 전시 주둔지역의 부대에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출을 위해 지급되는 전시수당(Wehrsold), 주둔지의 주택 비용으로 지급되는 주택수당(Wohnungsgeldzuschuß), 자녀를 가진 군인에게 지급되는 자녀양육수당(Kinderzuschläge), 특별수당(Zulage)등이 있습니다.

1. 기본급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은 25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여 등급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본급여는 주택수당과 합산되어 지급 됩니다. 주택 수당은 계급 등급에 따라 I부터 VII까지 7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전쟁 초기의 급여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래의 금액은 “연봉”입니다.

A. 장성급(Besoldungsgruppe 1~ Besoldungsgruppe 4)

Besoldungsgruppe 1, Wohnungsgeldzuschuß I(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1a)
26550 마르크
국방군 총 사령관(der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각 군 총 사령관(die Oberbefehlshaber der Wehrmachtteile)
원수 – 1942년부터
대제독(Großadmiral) – 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2, Wohnungsgeldzuschuß I
24,0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상급대장(Generaladmiral), 대장, 해군대장(Admiral)

Besoldungsgruppe 1은 1942년 4월부터 Besoldungsgruppe 1a와 Besoldungsgruppe 1b로 나뉘었습니다. Besoldungsgruppe 1b에는 상급대장과 해군 상급대장이 포함됩니다. 대장과 해군대장은 기존의 Besoldungsgruppe 2에 들어갑니다. Besoldungsgruppe 1가 두개의 등급으로 나뉜 것은 1940년부터 원수 계급이 생기면서 새로 생긴 계급에 맞는 급여 등급이 필요해서 였습니다. 1942년에 새 급여 체계가 생기기 전 까지 원수와 대제독은 행정부의 장관급의 급여를 받았다고 하는 군요.

Besoldungsgruppe 1b, Wohnungsgeldzuschuß I
25,5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 상급대장

Besoldungsgruppe 3, Wohnungsgeldzuschuß I
19,000마르크
중장, 해군중장(Vizeadmiral), 군의, 수의병과 중장급(Generalstabarzt, Admiralstabarzt, Generalstabveterinar)

Besoldungsgruppe 4, Wohnungsgeldzuschuß II
16,000마르크
소장, 해군소장(Konteradmiral), 군의, 수의병과 소장급(Generalarzt, Admiralarzt, Generalveterinar)

B. 영관급(Besoldungsgruppe 5~7)

Besoldungsgruppe 5, Wohnungsgeldzuschuß II
12,600마르크
대령과 대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rzt, Flottenarzt, Oberstveterinar)

Besoldungsgruppe 6, Wohnungsgeldzuschuß III
9,700마르크
중령과 중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feldarzt, Geschwaderarzt, Oberfeldveterinar)

Besoldungsgruppe 7, Wohnungsgeldzuschuß III
7,700~8,400마르크
소령과 소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barzt, Marineoberstabarzt, Oberstabveterinar)

C. 위관급(Besoldungsgruppe 8~ Besoldungsgruppe 16)

Besoldungsgruppe 8
Wohnungsgeldzuschuß III : 4,800~6,9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Stabarzt, Marinestabarzt, Stabveterinar), 호봉(Dienstaltersstufe)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4,800~6,0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 호봉 1등급

※Dienstaltersstufe를 번역할 뾰족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의미가 가장 비슷할 듯한 호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9,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700-4,000-4,200마르크
중위

Besoldungsgruppe 10,
2,400-2,700-3,000-3,400-3,700-4,000-4,200
소위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4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등급부터 3등급까지

Besoldungsgruppe 11,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800-4,200마르크
중위, 소위급 간부(군의, 수의 병과, Oberarzt, Marineoberassistenzarzt, Oberveterinar, Assistenzarzt, Marineassistenzarzt, Veterinar)

Besoldungsgruppe 12, Wohnungsgeldzuschuß III
7,650-8,680마르크
군악병과 중령(Ober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3, Wohnungsgeldzuschuß III
6,350-6,750-7,150
군악병과 소령(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4, Wohnungsgeldzuschuß IV
5,000-5,250-5,500마르크
군악병과 대위(Stab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5, Wohnungsgeldzuschuß IV
3,960-4,160-4,360-4,590-4,848마르크
군악병과 중위(Ober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6
2,930-3,170-3,470-3,620-3,770마르크
군악병과 소위(Musikmeister)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3 등급

D. 부사관급(Besoldungsgruppe 17~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17,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600-3,800-4,000마르크
주임원사급(병기 정비(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말 편자 수리(Oberhufbeschlagslehrmeister))

Besoldungsgruppe 18
2,500-2,700-2,850-3,050-3,250-3,400-3,600마르크
원사급(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6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5등급

※ 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Oberhufbeschlagslehrmeister, 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는 상사(Stabsfeldwebel) 보다 위의 계급입니다. 원사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독일 국방군의 분류상 부사관 계급이고 마땅한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주임원사와 원사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19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550마르크
상사(Stabsfeldwebel), 상사급 병기 담당관(Waffenwarte)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742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934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454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838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b, Wohnungsgeldzuschuß V
2,400마르크
중사, 중사급 군의(Unterarzt) 수의병과(Unterveterinar)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1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394마르크
하사,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520마르크
하사,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하사,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b, Wohnungsgeldzuschuß V : 2,340마르크
하사,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322마르크
병장,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424마르크
병장,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514마르크
병장,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b, Wohnungsgeldzuschuß VI : 2,040-2,160마르크
병장, 12년 미만 근무

E. 사병급(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5)

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064마르크
상병,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166마르크
상병,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256마르크
상병,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b, Wohnungsgeldzuschuß VI : 1,536-1,920마르크
상병,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4, Wohnungsgeldzuschuß VI : 1,680-1,740-1,800마르크
일병

Besoldungsgruppe 25, Wohnungsgeldzuschuß VII : 1,410마르크
이병

2. 전시수당(Wehrsold)

전시수당은 독일군이 유럽 각지를 점령한 뒤 현지에 주둔하는 병력에게 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추가로 지급하기 위해서 도입 되었습니다. 전시 수당 지급은 16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아래의 수치는 월 급여 입니다.

1a : 국방군 총사령관, 각군 사령관 : 300마르크
1b : 상급대장 : 270 마르크
2 : 대장 : 240 마르크
3 : 중장 : 210 마르크
4 : 소장 : 180 마르크
5 : 대령 : 150 마르크
6 : 중령 : 120 마르크
7 : 소령 : 108 마르크
8 : 대위 : 96 마르크
9 : 중위 : 81 마르크
10 : 소위 : 72 마르크
11 : 상사, 중사 : 60 마르크
12 : 하사, 상급수습사관(Oberfahnrich) : 54 마르크
13 : 병장, 수습사관(Fahnrich) : 45 마르크
14 : 상병 : 42 마르크
15 : 일병, 근무 연한 2년 이상의 이병 : 36 마르크
16 : 근무연한 2년 이하의 일병과 이병 : 30 마르크

전시 수당이 지급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 1940년 9월 1일부터
노르웨이 : 1940년 10월 1일부터
프랑스, 덴마크 : 1940년 11월 1일부터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 1941년 7월 1일부터
발트 3국, 구 폴란드 동부, 구 핀란드 영토 : 1941년 7월 1일부터

3. 자녀 양육수당(Kinderzuschläge)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Reichswehr의 자녀 양육수당은 다음과 같이 지급되었습니다.

한 자녀 : 월 10 마르크
두 자녀 : 월 20 마르크
세자녀, 네자녀 : 각 25 마르크
다섯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이 규정은 1938년 6월 30일 까지 시행 되었고 1938년 7월 1일부터 적용된 새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녀 : 10 마르크
두 자녀 : 20 마르크
세 자녀 : 25 마르크
네 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그러다가 1941년 1월 1일 부터는 일괄 20 마르크로 통일되었습니다.

4. 특별수당(Zulage)

잠수함 승무원이나 강하병의 경우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습니다. 특수 병과이고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입니다.

강하병특별수당(Fallschirmschützenzulage)은 강하부대의 모든 부대원들에게 계급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월 75마르크가 지급 되었습니다. 강하학교등의 교육 기관에서 훈련 중의 강하 부대원은 월 3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잠수수당(Tauchzulage)은 잠수함이 출항한 날짜를 기준으로 일 단위로 지급 되었습니다. 1941년 3월 1일부터 적용된 규정에 따르면 소위 이상의 장교는 하루에 일괄 4 마르크를, 상사와 중사는 3마르크를, 하사부터 상병까지는 2.50마르크를, 그 이하의 사병들은 1.5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수당(Afrikazulage)는 북아프리카에 파병된 장교와 사병들에게 특별히 지급 된 수당입니다. 사막이 사람 살기에 좋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수당은 장교의 경우 매일 4 마르크, 부사관의 경우 매일 3 마르크, 사병의 경우 매일 2 마르크를 지급 받았습니다.

지뢰제거수당(Zulage für Minensuchen)은 공병들에게 특별히 지급된 수당으로 지뢰 제거에 투입된 기간동안 매일 1 마르크씩 지급 되었습니다.

5. 장성급직위 지출경비(Dienstaufwandentschädigungen der Generale)

이 수당은 장성급 이상 고위 지휘관들이 작전 지역에서 직책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급되는 경비 입니다. 이 수당은 직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책정 되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야전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군단장급, 군관구, 상급 지휘부(예를 들면 포병지휘부) 지휘관 : 150 마르크
사단장급 지휘관 : 월 50 마르크

1940년 이후 새로 생긴 원수급 장성들은 월 400마르크를 지급 받았다고 합니다.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1930년대 소련군 장교의 생활 수준(번역글)

저는 서방에서 소련, 러시아군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Roger R. Reese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회사적인 접근방법도 좋거니와 문장이 매우 쉽고 읽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도 매우 좋지요. 이 글은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p125-p127에서 발췌 번역한 글 입니다.

소련군 장교의 주거는 매우 형편없어서 붉은군대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또 장교 모집에도 장애요인 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전부터 주택 문제는 군대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31년에는 붉은군대의 장교 5만 명이 숙소를 제공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주택이라는 것도 그 상태가 형편없었다. 심지어 고급 장교들의 관사 조차 일반 시민들의 아파트처럼 낡고 비좁았다. 20년대, 30년대, 그리고 심지어 40년대 까지도 장교들은 수준 이하의 복지에 대해 불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장교들의 생활수준은 사회의 비슷한 계층의 민간인들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혜택도 주지 않는 조국을 지키는데 대해 관심이 낮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주둔한 부대들을 대대적으로 서부 국경지대로 재배치 하자 번듯한 주택에서 거주하던 장교들은 서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촌 촌락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엄청난 숫자의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돼 1930년대에 소련 육군이 우크라이나에 새 부대들을 편성하고 장교들을 전출 시키자 장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더 멀고 사정이 열악한 극동 지역에서 근무할 장교를 확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장교들은 종종 도시민들이 그랬듯 공동 주택에 거주했다. 예를 들어 1932년 “붉은별”지는 한 항공여단의 장교용 아파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장교용 아파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건물벽의 회반죽은 갈라져 떨어지고 있었고 문과 창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블록에 있는 세 개 동은 세면장이 없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 장교는 군 소식지에 보낸 편지에서 비가 오면 아파트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엉망이 된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는 비가 오면 꼭대기 층에서 가장 아래층 까지 빗물이 흘러내린다고 적었다. 그리고 창문이 엉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유리가 떨어지고 없었다. 문은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져 찬바람이 들어왔다.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1년전 겨울에 이 장교의 가족들은 그나마 관사조차 배정 받지 못해 병사들의 내무반에서 병사들과 지내야 했다. 숙소가 너무 부족해 학교의 교실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장교용 주택이 난방이 안되거나 아예 안되는 것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가족을 가진 장교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기혼 장교들은 두 세대가 방 두 세칸 짜리 아파트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또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놀이터도 매우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1930년대 초반에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많은 장교들은 관사가 부족한데다 일반 주택도 얻기가 힘들어 부대에서 퇴근하지 않고 지내는 지경이었다. 비슷한 사례를 들면 1931년에 모스크바 경비부대의 장교 1,730명은 관사를 지급 받지 못했고 또 다른 529명은 “매우 나쁜” 주택에 거주했다. 장교와 그 부인들이 불평을 많이 한 것은 애초에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군인 가족들은 일반 시민의 생활수준도 엉망이라는 점에 대해 거의 위안을 받지 못했다.

장교의 주거 수준은 장교 집단의 구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었다. 제 1차 5개 년 계획 실시 이전에 고학력의 젊은이들에게는 기회가 풍부했다. 많은 장교들이 군대를 제대해 다른 직장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찾았고 아이러니 하게도 장교에 지원하는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 조차도 군대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기 시작했다. 사례를 하나 들면 세르게이 슈테멘코는 그가 1933년 모스크바의 차량화 및 기계화학교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나는 학교 근처인 레포르토보에 살았다. 나는 첫 해에 호스텔에서 거주했고 2년차가 되자 9제곱미터 짜리 방 한 칸을 배정해 준 뒤 키예프에 있는 내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내 어머니는 침대에서 주무시고 나와 아내는 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나의 어린 딸은 바로 옆의 욕조에서 재웠다. 1년 뒤 우리는 학교 부지 일부에 새 건물을 짓는데 참여했고 그곳으로 이사하자 엄청난 호사를 누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슈테멘코와 다른 장교들이 이런 생활 수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에 낮은 교육수준을 가졌고 10대 후반이 되면 입을 하나 덜기 위해 가족에서 내몰리는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슈테멘코는 농업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하자 고향 친구와 함께 군에 지원했고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 교육 과정으로 차출됐다. 그 결과 슈테멘코는 1926년에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포병 학교에 입교했다. 아무리 군대의 복지 수준이 낮더라도 슈테멘코가 고향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만약 그가 고향에 남았더라면 공사장의 잡부나 짐꾼, 나뭇꾼으로 지내며 공용 건물의 다락이나 국영 전당포의 구석진 방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슈테멘코가 군대에 계속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슈테멘코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군대와 당은 주로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층에서 장교를 선발했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매우 흔했다.

그러나 붉은군대만이 2차 대전 이전에 장교의 생활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육군도 역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련과 사정이 비슷했다. 1930년대에 정부가 장교 봉급 인상과 복지 향상을 거부하자 많은 프랑스 군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영국육군은 진급 적체 때문에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군 장교는 대위까지 진급하는데 평균 14년이 걸렸으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데 6년, 소령에서 다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9년이 걸렸고 이때쯤 되면 전역을 고려해야 했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군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드(Brian Bond)와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일반적인 영국인들은 장교의 복지수준이 2급 수준의 인력이나 바보들에게나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 있다.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성공하는 길은 사회나 정치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의 장교는 1차 대전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나페(Siegfried Knappe)의 연구에 따르면 1937년 기준으로 독일군의 중위는 월급만 가지고도 자동차 한대와 승마용 말 한 마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생활 수준도 좋은 편이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2차 대전 이전 장교를 확보하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독일 육군의 장교집단과 사회계층 1900-1925 (재탕!)

19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몇 개 꼽는다면 시민 계층의 성장을 그 중 하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가장 후진적이라는 러시아도 농노제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민계층의 성장은 서유럽에서는 좀 보수적인 축에 끼는 독일에서도 활발했고 보수의 아성인 군대까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미 독일 통일 전인 1860년의 통계를 보더라도 프로이센 군 장교단의 35%는 귀족이 아닌 시민 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