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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5년 12월 22일 화요일

미국의 군사원조에 관련된 단편적인 이야기 하나

뜬금없는 잡생각이 들어서 써 봅니다.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된 한국군의 4개 야전포병대대(제30, 50, 51, 52야전포병대대)는 1952년 10월 6일 부터 10월 15일까지 총 9일간 143,749발의 105mm 곡사포탄을 발사했습니다.  가장 많은 포탄을 발사한 제52야전포병대대는 9일간 56,056발을, 가장 적은 포탄을 쓴 제 50야전포병대대는 같은 기간 동안 17,343발을 소모했습니다.1)  1개 대대가 9일 동안 대략 35,900발 정도를 사용한 셈입니다. 거칠게 계산하면 하루 평균 대대 3,990발, 포대당 1,330발 이군요.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4기갑사단 예하 제103기갑포병연대 소속의 105mm 5개 포대는 1943년 7월 5일 부터 9월 2일까지 대략 두달 정도 되는 기간 동안 105mm 곡사포탄 69,242발을 소모했습니다. 실제 전투기간은 46일이었는데2) 이걸 반영하면 하루에 5개 포대가 1,505발, 포대당 301발 정도를 쓴 셈입니다.

전투 상황의 차이가 있으니 양자의 단순 비교는 무리라 하더라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포탄 한발 만들지 못하는 제3세계의 군대가 미국의 원조만으로 손꼽히는 산업국의 군대 보다 더 많은 포탄을 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붙드는건 절대 안될 일이지만 미국이 있으면 편해지는게 사실은 사실입니다.^^




1) Bryan R. Gibby, “The Battle for White Horse Mountain: September-October 1952”, Army History(2013, Fall), p.42.
2) ”Stellungnahme zu dem Bericht der II./(Sf.) Pz.Art.Rgt 103 vom 20.8.43”(1943. 9. 7), H16/186, RG242 T78 R619,  p.3.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진천 전투 당시 김석원 사단장의 지휘(?) 방식


예전에 김석원 장군에 비판적인 미국 문서를 조금 포스팅한 일이 있는데 지나치게 미국 주장에 경도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의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김석원에 비판적이고 미군사고문단의 문서를 뒷받침 할 만한 증언도 존재합니다. 한국전쟁 초반 포병단 부단장이었던 김계원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이 군사적 지식이 부족해 사단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미군사고문단의 평가가 아주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처음 곡사포를 수령한 김성 대대장은 충분한 운용의 실습도 없이 곧바로 진천지구 전투에 투입이 된 것인데 긍지를 가지고 분투하였다. 소속의 대전차포 중대장 허현(許玄) 중위는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 확인차 진천지구 OP관측소에서 오르니 사단장 김석원 대령*은 일본도를 옆에 들고 카이젤 팔자수염을 연신 만지며 참모장 최경록 중령*에게 계속해서 돌격 앞으로만 외쳤다. OP가 무엇을 하달하는 곳인 줄 모르는 것인가.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니 측지관측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가관이었다. 직전 적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아군의 포탄이 떨어져야 함에도 죄 없는 동네 민가에 떨어져 화염에 싸인 집에서 놀라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는 불쌍한 주민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즉시 화력지원 통제소에 뛰어가 오차의 원인을 분석하고 미군 고문관에게는 포의 운용을 점검케하여 시정하였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2), 300쪽

*두 사람의 실제 계급은 각각 준장, 대령입니다. 저자가 말년에 회고를 하다 보니 기억에 오류가 있었던 듯 합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김석원이 유능한 지휘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는데 미국쪽 자료들과 일부 한국측 증언을 보면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석원의 지휘능력에 대한 비난은 그가 지휘한 사단에 배속됐거나 거쳐간 고문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제3사단 선임고문관 에머리치(Rollins S. Emmerich) 중령은 김석원의 지휘능력이 형편없고 공격성이 결여된데다 고문단이 사단을 지휘하는 동안 잠이나 자고 있었다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 에머리치 문서는 나중에 한번 번역해 보겠습니다.

김석원이라는 군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자료들은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는지라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한국전쟁 초기 채병덕 총참모장에 대한 김계원 포병단장의 회고

올해에 10.26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계원의 회고록이 나왔습니다. 김계원은 한국전쟁 초기 야전포병단장으로 국군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개전초기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입니다. 사실 김계원의 증언 중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국방부에서 한국전쟁사 편찬을 준비할 당시 했던 증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60~70년대에 구술받은 증언록을 편집해서 공개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는 이상하게도 김계원의 증언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정확도가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은 들지만 올해 출간된 김계원의 회고록과 작년에 출간된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료집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개전초기 채병덕 총참모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김계원 야전포병단장은 장로회 기독교인으로 1950년 6월 25일에는 일요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복귀해 포병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김계원이 국사편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한 개전 당일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면담자 : 개전 당일 오후에 방문한 의정부 전선은 어떻던가요?
김계원 : 정확한 전선 상황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정부 전선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확한 전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포병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력지원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지만, 어느 것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채병덕 장군이 와서 뭐라고 화를 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화력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군이 가지고 있는 포탄의 양이 이미 바닥이 나서 그 양반이 요구하는 더 많은 화력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면담자 : 일선에서도 계속 이동하셨나요?
김계원 : 나는 포병이라서 자동차로 자주 움직여 다녔습니다. 아까 말했던 최덕신 대위가 당시 포병학교 연대의 부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자, 나는 전방으로 출동했는데, 최덕신 대위는 마지막까지 포병학교를 지키다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나는 전방에서 활동하다가 의정부 방면에서 헤어져서, 몇 사람과 합류해서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52~53쪽.


국사편찬위원회와의 면담에서는 채병덕에 대한 표현이 완화되어 있는데 2013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지요.


부대의 열악한 통신시설로는 상황이 감지가 안 되어 나는 육군으로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준장1) 에게 올라갔다. 이곳 육군본부 또한 전방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상황의 요약은 6월 25일 새벽 서부 전방일선에서 북의 기계화부대에 의하여 38선이 돌파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육중한 몸의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적침의 사실을 통보받고 안면이 벌겋게 상기되어 급히 본부상황실에 도착했다.
“적의 기계화부대가 돌격해 내려오는데 대체 포병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포병의 상황을 보고 하려는데 틈도 주지 않고 또 흥분되어 말을 이었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채병덕 총참모장에 관한 당시의 증언을 보면 전황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상태가 겉으로 표출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필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이 심하게 손을 떨어서 담뱃갑에서 담배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증언을 했지요.


김계원이 서울 함락 이후 채병덕을 만났을 때 채병덕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면담자 : 철수하는 과정에 채병덕 장군이나 다른 지휘관을 만나셨나요?
김계원 : 한강을 도하한 직후에 채병덕씨를 만났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내 상관이었으니까요. 채병덕 장군도 일본 군대에서 포병 출신이었습니다. 포병 출신인데, 실제로 포병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기 만드는 것만 했지, 야전포병으로 전쟁을 해 본 경험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이었는데, 우리 포병 부대들이 “대포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했더니, 이분이 “가서 바로 대포 뺏어오지 못하면 자살하라”고 대답했다는 군요. 그래서 내가 “자살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의 포병을 뺏어오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힘들게 고전분투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처리하는 참모총장의 태도에 화가 나서 방에서 나와서 전방으로 갔습니다. 그때 신응균 장군은 일본에 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포병학교 학교장 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어설펐던 시기였습니다. 내 말도 잘 통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행정부에 있는 장교나 병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라서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았는데, 다만 포병학교에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던 최덕신 대위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최덕신 대위가 아무도 없는 포병학교를 지키느라고 혼자 남아있더군요. 

나종남 편집, 위의 책 53쪽.



1) 장창국 육군본부 작전국장의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김계원의 회고록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오류가 조금 있는데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회고록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2013년 9월 8일 일요일

어떤 군인의 회고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특무부대장, 육군 제주도 제1훈련소 부소장 등을 역임한 김종면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나종남 교수와 면담한 내용입니다. 이승만 시기에 군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역경을 겪은 탓인지 당시 상황에 대해 시니컬한 평가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이 분이 한국전쟁 중 훈련소 부소장으로 있을 당시를 회고한 내용이 꽤 흥미롭더군요. 이 내용을 읽고 나니 군인이야 말로 가장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해당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면담자 : 전쟁 중에 활동했던 다른 상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김종면 : 전쟁 중에는 주변에서 별 달아 줄 테니까 전선의 사단장으로 나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전방에는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 했다고 그랬지만 우리도 인해전술 많이 썼지요. 
대체로 미군은 산악지역에서는 거의 작전을 하지 않았고, 대체로 한국군이 산악지역 작전을 담당했습니다. 왜 동부전선에는 미군 부대가 없었고 한국군 부대만 작전을 했을까요? 동부지역은 아무래도 지형이 험하고 미군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의 효과가 적었으니, 자신들이 활동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또한 미군들은 어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서 적을 완전히 초토화 시킨 다음에 그 고지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군은 미군 고문관이 와서 "got damm!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는 것 입니다. 병사들이 많이 죽어도 올라가는 것 입니다. 내가 사단장으로서 병사들을 고지로 올려 보내는 것이 곧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입니다. 이처럼 부하를 죽이고 나서 계급장이나 훈장을 달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리고 훈장이라는 것도 실제로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이 받거나 달아야 할텐데, 항상 후방에 앉아서 사무실에 근무했던 사람들, 자격도 안되는 사람들이 훈장을 달고 다니더군요. 나는 훈장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무실에서 근무한 사람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적과 싸웠던 사람들에게 훈장을 줘야지요. 나는 나 스스로에게 6ㆍ25전쟁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할 자격이 있어요? 동작동에 갈 자격도 없는 것이지요. 
면담자 :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종면 :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가져야 할 정신 자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떤 자세가 되어야 할까요? 1952년에 내가 훈련소 부소장 시절에 부대에서 나에게 훈련병들을 상대로 정신훈화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구태여 정신훈화 할 것이 있냐? 정신 훈화 할 것이 없다. 정신훈화 한다는 사람들이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자고 이야기 하는데,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라면 네가 가서 꽂아야지 왜 병사들에게 그런 주문을 하느냐?"라고 대꾸했습니다. 
당시 훈련소에서 많은 병사들이 어려운 훈련을 안 나가려고 취사병에 지원하더군요. 물론 취사장에서는 배 든든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포복해서 철조망 밑을 지나가는 병사들 중에서는 교관의 숫자가 적으니, 교관 눈치 봐서 빨리 기어가지 않고 뛰어가면서 쉽게 훈련하려는 병사들도 많더군요. 그러니 훈련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부대에서는 나에게 정신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꼭 1~2분 정도 걸쳐서 짤막하게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연대의 모든 병력을 모아 놓고, "죽고 싶은 사람 손 들어봐라"라고 하면,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더군요. "부상당해서 병신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라"라고 해도 손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배우고 있는 훈련이 매우 힘들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물론 보리밥에 부식도 시원찮은 것을 먹고, 기운도 없는데 열심히 훈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나도 이해한다. 나도 그런 것은 하기 싫다. 그런데 왜 어려운 훈련을 해야 하느냐? 전쟁을 하는 것은 내가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을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은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여기서 훈련 제대로 안 받은 사람은 총에 맞아서 병신이 되거나, 상이용사로 돌아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백골이 되어 돌아오거나, 어떤 사람들은 시신도 못 찾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을 하는 것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마디로 훈련을 받고 싶으면 받고 안 받고 싶으면 안 받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내 정신교육이 있은 다음부터는 취사병으로 지원하겠다는 병사들이 줄어들더군요. 그러니까 연대장이 나에게 와서 "부소장님이 정신교육을 시킨 이후에는 취사병 하겠다는 병사가 없다"고 보고하더군요. 취사병은 하사관이나 고참병 해서 하면 되지 신병훈련 받는 녀석들을 골라서 취사병이나 당번병 시키면 훈련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훈련 효과가 좋아졌다고들 했습니다. 다행이었지요.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242~243쪽

2013년 8월 4일 일요일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의 인터뷰 녹취록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을 소개해 보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 같군요.

윌리엄스 중령 : 장군님. 우리 미군에 대해서는... 우리 미군이 한국전쟁, 아니 전쟁을 치를 때 마다 지나치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보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밴 플리트 : 아니오. 전혀. 전투에 임하는 군인은 불가피한 경우라면 기본적인 필수품 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 군인들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최고로 해 줘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우리는 미국 본토, 유럽, 그리고 한국의 산악지대 등 어디에서건 가장 훌륭한 급식을 했소. 아군은 매일 보급을 받았고 아이스크림 같은 특식도 자주 받았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를 모든 사단이 가지고 있었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은 걸쭉한 액체나 분말 형태였는데 물을 섞어서 얼리기만 하면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었소. 그리고 차량 종점이나 철도 종점,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보급부대를 두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지게(A frame)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게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식량, 탄약, 그밖의 보급품을 등에 짊어지고 전투부대에 전달했소. 그래서 아군이 보급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한국군은 별도의 급식을 받았는데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었소. 한국인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했지만. 급식은 대부분 밥이었고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고. 밥에 간장(soybean sauce)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소. 김치는 절인 배추인데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같은 음식이오. 김치는 밥을 먹을 때 맛도 내고 비타민도 보충해 주는 음식이었소. 한국군인은 하루에 11센트로 급식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에 급식비로 5달러는 소요됐던것 같소. 요리를 할 줄 아는 취사병들은 꽤 맛있는 급식을 했소. 하지만 몇몇 실력없는 취사병들은 근사한 스테이크도 망쳐버리곤 했지. 급식을 제대로 준비하는건 정말 문제였소. 이 문제를 돕기 위해 많은 강사와 감독관이 파견됐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 머디키언George Mardikian씨가 기억에 남는구려. 머디키언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소.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후버 전 대통령과 함께 식량구호활동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미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머디키언씨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요리 전문가가 되었소.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사장을 시찰한 뒤 급양담당 부사관들과 취사병, 그 외의 취사관련 인원들을 가르쳤소. 머디키언씨는 육군부의 지시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소. 그래. 우리 군의 급식은 최고였지.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47~48.

모든 군대가 병사들을 잘 먹이려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군대는 흔치 않지요. 후방에서 물자를 준비하고 이것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배급하는 과정이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방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풍부한 생산력과 이것을 전장으로 수송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뛰어난 행정 조직 등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고기를 수송하기 위해 냉동선을 선구적으로 운영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수함 까지 아이스크림 제조 기계를 갖출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쓴 것을 보면 그저 부럽다는 생각 말고는 드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밴 플리트가 이 인터뷰에서 미군의 급식이 최고라고 자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싶군요.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2013년 5월 12일 일요일

밴 플리트의 현리 전투 회고담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당한 패배 중 손꼽히는 참패입니다. 워낙 유명한 전투이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당시 제3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유재흥 장군에 관한 것 입니다. 특히 제3군단이 붕괴된 뒤 밴플리트 장군과 나눈 대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한 밴 플리트 대장의 회고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전략)


윌리엄스 중령 :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밴 플리트 : 아니, 아니. 5월에 중국군이 또 한번 공세를 감행했었소. 이 이야기를 하는게 좋겠네.


윌리엄스 중령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밴 플리트 : 적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동부와 중부에 병력을 증강하고 5월에 공세를 감행했소. (중국군은) 이 공세에서 꽤 많이 진격해서 돌출부가 형성되었지. 중국군은 공세가 중단될 때 까지 50마일 정도를 진격했소. 나는 4월의 공세를 통해 적은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적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고 탄약이 크게 부족했소. 적의 선두 제대는 농사 짓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죽을(die on the vine)” 것이었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소.


적군은 한국군 제2군단과 그 예하의 2개 사단을 쓸어버렸소.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 장군과 나는 동해안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 뒤 차량편을 구해서 군단장을 찾아가 만났소. 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이었소. 나는 유재흥에게 물었소.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어디 있소?(General Yu, where is your corps?)”


유재흥은 이렇게 대답했소.


“모르겠습니다.(I don’t know)”


“수송수단과 야포를 모두 잃었소?(Have they lost all of their transportation and artillery?)”


그는 이렇게 대답했소.


“그런 것 같습니다.(I think so.)”


나는 이렇게 말했소.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부로 해체할 것이오. 그 예하의 2개 사단도 마찬가지요.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General Yu, your corps is deactivatied as of now, and so are your two divisions. You will report back to General Chung, here with me, for reassignment. In the meantime, General Chung, you collect all the stagglers and equipment you can.)”


유재흥 장군은 나중에 2개국에서 대사를 역임했소. 우리 두 사람은 몇 번 만났고 지금 그는 한국 국방부 장관이오. 유재흥 장군은 좋은 친구요. 우리는 만날 때 마다 현리 전투의 일을 생각하며 웃곤 한다오.(He is very warm friend of mine, and every time we meet, we have a smile remembering that action.) 한국에서 나는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했소. 불행히도 베트남에서는 우리가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지.


다시 적군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적의 진격이 한계에 달했으며 적이 진격을 재개하려면 더 많은 준비와 재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나는 중국군의 공세 3일차에 제2보병사단과 웨스트모어랜드 대령이 지휘하는 제187공수여단... 전투단으로 적의 측후방을 공격했소. 이 두 부대는 돌파하여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아군 부대와 접촉하는데 성공했소. 대승을 거둔 것이오. 그리고 적군이 완전히 패배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군으로 상륙부대를 편성해서 원산을 탈환하고 적군의 후방을 점령하도록 하려고 했소.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일본으로 부터 상륙함정과 보급물자를 지원할 수 없으므로 승인을 거부했소. 나는 이렇게 말했소.


“맷. 이 작전은 추격전입니다. 그리고 추격전에는 병력의 일부만 투입하기 때문에 탄약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추격전의 사례를 연구해보면 내 말이 사실이란 걸 알 것이오. 패튼 장군이 프랑스에서 추격전을 펼친 것이나 다른 추격전 사례를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투입되었고 탄약 소모량도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소. 추격전을 펼치는 부대는 식량과 연료가 필요하지. 하지만 아군이 추격을 시작한 직후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나는 진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소.


윌리엄스 중령 : 제가 알기로는 현리에서 패배한 것은 한국군 제3군단 이고 유재흥 장군 예하의 사단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 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 내가 기억하기론 한국군 제2군단인데.


윌리엄스 중령 : 제2군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요.


밴 플리트 : 중령. 좋은 질문을 여러가지 해 주었는데 내가 따로 적어 놓은 것이나 다른 기록을 보고 답변하는 게 아니라 20여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한다는 것을 유의해 주시오.


(후략)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26~28.


다른 내용은 익히 알던 것이었는데 밴 플리트가 이런 참패를 당한 유재흥과 꽤 친해졌다는게 다소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현리 전투 패배를 가지고 서로 낄낄거릴 정도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1950년 6월 26일 전문

출국준비로 어수선해서 블로그질이 좀 뜸하군요;;;; 가끔씩 들러주시는 분들께 민망하니 한국전쟁과 관련된 날림번역글 하나 올려 봅니다.

이 전문은 1950년 6월 26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부국장 자하로프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에게 보낸 것으로 1994년 BBC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문서입니다.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긴하지만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문제를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글 같습니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한참 뒤에 작성되어 정리가 잘 되어있긴 합니다만 슈티코프가 작성한 이 문서는 개전 직후에 작성되어 당시의 분위기를 좀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개전 초반의 유리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수뇌부의 지휘능력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 주목할 만 합니다.





1급기밀 
자하로프 동지 앞. 
직접 전달할 것.


조선인민군의 군사작전 준비와 실행 과정에 대해 보고합니다. 
조선인민군은 총참모부의 계획에 따라 6월 12일 부터 38도 접경지대에 병력집결을 시작해 6월 23일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부대 재배치는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사고는 없었습니다. 
적의 정보부서가 군부대의 재배치를 감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으며 작전 실행 시기는 비밀로 했습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지형정찰은 소련 고문관의 참여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과정은 6월 24일까지 완료되었습니다. 6월 24일 각 사단장은 작전 일시와 시간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각 부대에서는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침공하여 군사적 공격을 도발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명령했다는 민족보위성의 명령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장교와 사병들은 반격명령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각 부대는 6월 24일 24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사작전은 조선 시간으로 오전 4시 40분 개시되었습니다.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은 20~40분의 직접 포격과 10분간의 탄막포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병은 왕성한 사기를 가지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공격 시작 후 첫 세시간 동안 공격부대는 3~5km를 진격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적에게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적은 옹진, 개성과 서울 축선에서만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적은 공격 첫날 12시가 지나서야 보다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전투에서 점령한 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옹진, 개성, 신읍리(新邑里, Sinyuri, しん ゆうり) .(1943년 총참모부가 간행한 1:1,000,000 지도) 
인민군은 춘천방면에서 12km를 진격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8km를 진격했습니다. 
공격 첫날 조선인민군 해군은 동해안에서 두 개의 상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첫번째 상륙집단은 강릉(Korio, こうりょう) 지구에 상륙했으며 해군육전대 2개대대와 1천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상륙집단은 울진에 상륙했으며 600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5시 25분에 시작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빨치산 부대가 울진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상륙과정에서 인민군의 함선과 남조선군의 함선 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교전 결과 남조선군의 트롤함 한척이 격침되었고 다른 한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북조선 함대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6월 26일 인민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전투를 치르면서 남조선 영내 깊숙히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6월 26일에는 옹진반도와 개성반도가 완전히 소탕되었으며 (인민군) 6사단은 (강화)만을 강행 도하하여 김포 비행장 방면의 인구밀집지대를 점령했습니다.  
서울 방면에서는 (인민군) 제1사단과 제4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을 점령했으며 제2사단은 (강원도의) 중심인 춘천(Siunsen, しゅんせん)을 점령했습니다. 
동해안에서도 진격이 계속됐습니다. 주문리(注文里, Tubuiri, ちゅうぶんり, 주문진)를 점령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고성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2사단, 신읍리를 지나 의정부(Geisif, ぎせいふ)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3사단 및 기계화여단과 하루종일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북(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민군의 작전 수행에 있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각 부대가 전방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상급부대에서 하급부대에 이르기까지 지휘부 간의 교신이 두절됐습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개전 첫날 부터 전투를 지휘하지 못 했으며 단 하나의 사단과도 제대로 된 통신을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상급 제대의 참모부와 교신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야전 부대와 그 상급 부대의 지휘에서는 참모진을 허가를 받지도 않고 교체했으며, 총참모부는 동해안에서 작전하고 있는 여단 및 제12사단과 교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조선인민군의 참모진은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동반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투 지휘가 졸렬했으며 포병 및 전차의 운용도 형편없었고 통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3. 그러나 우리의 군사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 부대 내에서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습니다. 
4. 군사작전이 개시될 무렵 북조선 인민들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신뢰와 조선인민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전반적으로 열성적이었습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이름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조국의 정세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적을 섬멸하고 조선을 통일하는 과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5.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부대간의 통신을 정상화하고 전투 지휘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조치가 마무리되고 인민군 사령부는 철원(Tepuges, てつげん) 지구로 이동했습니다. 민족보위상(최용건), 인민군 총참모장(강건), 그리고 군사고문단장과 여러명의 장교들이 사령부로 갈 것 입니다. 
남(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이틀간의 군사작전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드러났습니다. 
1. 적군은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싸우면서 남조선 내륙 깊숙히 퇴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조선군의 포로를 많이 잡지 못했습니다. 
2. 남조선 괴뢰정부는 후방에 있던 부대를 투입하고 있으며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3. 첫날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남조선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남조선 당국과 주한미국대사는 라디오 방송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침착하게 있을 것을 당부했습니다. 남조선군의 사령부는 남조선 군대가 승리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슈티코프 
No. 358/sh 
1950년 6월 26일

2012년 2월 26일 일요일

1961년, 한국군 제1군 기동훈련에 대한 논평 중 핵무기 운용에 관한 내용

한국군이 1950년대 부터 전술핵 운용 훈련을 해 왔다는 것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1950~60년대 한국군의 전술핵 운용 훈련에 관해서는 저도 관련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접하긴 했습니다만 구체적인 자료는 읽어 보지를 못했는데, 얼마전 1962년에 육군대학에서 낸 『軍事平論』22호를 훑어보다 보니 1961년 10월 17일에서 11월 4일까지 실시한 제1군 기동훈련에 대한 논평에서 전술핵 운용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950~60년대의 전술핵 운용에 대한 자료는 저도 처음 본 것이라서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논평의 저자는 당시 중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연구관 겸 교관으로 있던 김황봉(金黃鳳) 입니다. 그때 복사한 것을 몇 달 쌓아두고 있다가 오늘 군사평론을 꺼내 볼 일이 있어서 또 읽어 보았습니다. 이왕 꺼낸 김에 이 논평에 실려있는 전술핵 운용에 관한 내용들만 발췌를 해 봅니다.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핵무기 운용

금번 훈련에서 일반적으로 핵무기의 전술적 운용이 원만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 거대한 파괴력의 핵무기를 정확하게 사용하였을 때 비로소 결정적으로 전과를 확대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선결문제는 정확한 핵표적의 선정을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핵 표적 선정방법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장교는 이미 기지(旣知)의 사실이지만 여기에 개략적이나마 간단히 소개하여 본다면 G-2, G-3에 의하여 잠재표적을 설정하고 다음 이것에 의하여 잠정표적을 선정한다. 이것이 완료되면 핵무기의 배당수에 따라 실제 부대가 기동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표적의 우선순위를 결정 타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역시 임기(臨機)표적이나 요청사격을 위하여 보유되는 예비량의 핵무기 사용도 표적선정에 있어서 확실한 정보에 의하여 심중(深重)한 판단으로서 정확한 요청사격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금번 기동훈련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적의 이동표적이나 적에 관한 첩보의 불확실한 것으로 말미암아 핵무기의 요청사격이 몇번이나 각하 당하는 예가 있었다. 또 한가지의 결함으로서는 이 거대한 파괴위력을 가진 핵무기의 사격이 기동계획과 결합되었을 때 전과확대의 최대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인데 기동계획과 협조되지 않는 핵무기 일방의 사격은 가치있게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번 훈련기간을 통하여 목격한 결함을 지적할 수가 있다.

金黃鳳, 「第1軍 機動訓練에 對한 小考」, 『軍事平論』22(1962. 1), 49쪽

그리고 아군이 핵무기에 타격 받았을 경우의 대응에 대한 논평도 흥미롭습니다.

6. 핵 상황하에서의 사체처리 및 후송 문제

핵무기 1발로 1개 중대병력이나 수개 대대병력까지 순시간(瞬時間)에 사상 및 파괴시킬 위력을 보유하고 있음은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번 훈련은 핵 상황하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은 수차 말한 바 있고 또 핵무기 투발로 인하여 이번 훈련에 많은 인원 및 장비가 사상되고 파괴된 상황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시에 다수의 인원이 사상을 당하였을 때 지휘관이나 참모의 조치가 대단히 막연한 입장에 처해 지는 것이다. 1개 중대 및 기타의 병력이 완전히 손실을 입었을 때 손실병력에 대한 보충이나 예비대로서 대치하는 등의 전술적 문제는 용이하게 해결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사상자의 처리와 후송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려되어 있지 않는 것을 지목할 수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할 과제가 아닐 것으로 본다.
이 문제에 부가해서 말할 것은 사단의무중대나 연대의무중대 등이 장차의 핵상황하에서 전기한 바와 같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시 현재의 편제병력과 장비로서 능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를 고려하여 볼 때 편성면에서나 장비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처리 및 후송문제에 이르는 기술적인 면도 연구되어야 하겠다.

金黃鳳, 「第1軍 機動訓練에 對한 小考」, 『軍事平論』22(1962. 1), 51쪽

저도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인데 추후 1950년대부터의 핵무기 운용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해 본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3대장

이승만의 군부통치 방식 중 하나는 군 엘리트들을 서로 경쟁시켜 충성을 이끌어 내는 것 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 세명을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 이었습니다. 특히 1954년 2월 17일 이형근과 정일권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이른바 ‘3대장’ 파벌이 정립되게 됩니다. 소위 3대장 체제는 1957년 5월 이형근과 정일권이 밀려날 때 까지 계속되면서 이승만이 군부를 통제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3대장 이야기를 후배들 있는데서 꺼내니 다들 키득키득 웃는 겁니다. 원피스에 나오는 해군 3대장이 생각난다나요;;;; 3대장이라 할때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을 이야기하느냐 아니면 원피스를 이야기 하느냐를 가지고 세대구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국무총리 두 사람의 한국전쟁 회고, 그리고 잡담 하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은 상당히 잘 쓰여진 회고록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부분을 살펴보면 제법 정확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강교 폭파에 대한 서술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술과도 제법 맞아 떨어집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밖에도 건군기, 한국전쟁 이전 옹진반도 교전과 같은 부분의 서술도 그렇습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재건기 한국군에 대한 서술을 읽으면 조금 더 자세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 한 자료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강영훈 전 총리는 현리전투 당시 제3군단 부군단장으로 있었습니다. 회고록에서는 164쪽에서 166쪽 까지 세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분량이 짧아서 아쉽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는 잘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재흥의 책임 보다는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만 같은 책의 김석원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본다면 저자가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분량이 짧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된 후 주보급로를 차단당해 군단 전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상당히 잘 서술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특히 철수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은 매우 짧지만 인상적입니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영훈의 회고록은 또 다른 전직 국무총리의 회고록과 비교가 됩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소위로 임관된 뒤 한국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에 소속되었는데 바로 첫번째 실전을 악명높은 횡성전투에서 경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괴멸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전투를 횡성에서 겪었다면 기억 속에 깊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며 쓰고 싶은 내용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신영의 회고록은 이 점에서 완전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횡성전투에 대한 서술은 달랑 다섯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자면...

1951년 2월 12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고, 그날 밤 암호는 ‘겨울비’였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가 자정이 넘어서 부터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공세로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에는 중공군의 손실도 컸지만 우리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노신영, 『盧信永 回顧錄』, (고려서적, 2000), 32쪽

횡성의 참패에 대한 내용이 달랑 이것 뿐 입니다. 게다가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하게 서술을 해 놓았지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황당함을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신영은 당시 소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패전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서술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이 충실한 듯 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살살 피해가고 있어서 읽는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게 이 회고록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