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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헝가리식 절멸전쟁? (재탕)

원래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번역 글인데 이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폐쇄됐는지라 여기에 재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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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헝가리식 절멸전쟁? 헝가리군과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1942년


1. 도입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정규군의 개입 문제는 독일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함부르크 사회학 연구소(Hamburger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독일 국방군 전시회”개최는 독일 사회의 “씻을 수 없는 과거” 문제를 새로운 논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에 개입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일 국방군이 행한 범죄의 정도와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이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동유럽 출신 자원자들이 폴란드와 소련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개입한 문제와 이른바 “동방군단(Osttruppen)”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중동부 유럽 국가의 독일동맹군들이 “이념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며 각기 다른 분석을 하고 있다. Alexander Dallin은 독일 점령하의 오뎃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민간인을 잘 대했다고 지적했지만 독일의 점령 정책 자체는 매우 가혹한 것 이었다고 평가했다. John Armstrong 역시 하버드 대학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의견을 지지했는데 하버드 대학의 자료에 헝가리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한편 Peter Gosztony(동부전선의 헝가리군을 연구한 몇 안되는 학자이다.)는 헝가리는 독일군에 비해 민간인을 훨씬 온건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1942년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지휘관들이 전선후방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분석하여 헝가리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남부 후방군사구역(rückwährtiges Heeresgebiet Süd)에서는 독일, 헝가리군과 현지 자원병들이 중 동부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증대하는 일반 주민들의 소요와 날로 커져가는 빨치산 활동을 상대하여 독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사구역 북부(체르니히프와 수미)는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과 훈련 상태였지만 빨치산 활동이 심각한 지구를 맡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 보안 부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손실이 증대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임무를 맡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반면 독일측은 헝가리가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측의 논쟁은 인력과 장비 부족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끄라이나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로 넘어갔다. 헝가리군은 빨치산 세력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은 독일군은 물론 우끄라이나의 협조적인 세력에게도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이러한 보복은 효과가 없으며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헝가리군 장군 한 명은 자신의 관할구역 내 빨치산 출몰지역의 남성 중 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을 모두 사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독일측은 헝가리측에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가혹한 보복은 게릴라 활동만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1942년 9월에서 10월까지 게릴라 출몰지구의 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초토화 시키기로 합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 빨치산 작전 수행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런식의 대응은 약간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빨치산전에 대해서 독일측이 조사 분석한 문헌(주로 벨로루시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을 보면 독일측은 우끄라이나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끄라이나 대부분이 탐욕스러운 에리히 코흐(Erich Koch)의 우크라이나 제국위원회(Reichskommissariat Ukraine)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드네쁘르강 동안의 광대한 지역은 1942년부터 1943년 까지 독일의 군정 통치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파괴적인 경제 수탈등 가혹한 독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독일군 고위 간부들은 친 우끄라이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에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관인 칼 폰 로끄(Karl von Roques)중장과 부사령관이고 나중에 로끄의 후임이 된 에리히 프리데리치(Erich Friderici) 중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에 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우끄라이나 토착민들을 빨치산 활동에 대한 보복 같은 가혹한 독일의 점령정책 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들의 정책은 인간 존중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지만 독일측이 1942~43년 기간동안 우끄라이나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점령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에 이미 그 기초가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헝가리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Gosztony는 헝가리군이 독일군 보다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꺼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측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부 후방군사구역에서 발생한 가장 잔혹한 보복 작전은 대부분 헝가리군이 수행한 것 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대해 독일측과 헝가리측이 벌인 논쟁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측 역시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적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독일군의 기준은 항상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1943년에 독일의 우끄라이나 지배가 끝장날 때 까지 친 우끄라이나적 성향을 유지했으나 이런 온정주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전쟁이 격화되어 가면서 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희박해 졌다. 독일 지휘관들의 재량권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로 우끄라이나인들의 우호적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군 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끄라이나 주민에 대한 강제 노동 징발 – 로끄와 프리데리치가 강력히 반대했다. - 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측의 빨치산 소탕 방식 역시 사실은 헝가리군 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 물론 독일측은 자신들이 훨씬 온건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독일측의 잔인한 대응역시 우끄라이나 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릴라 전에 대한 독일 지휘관들의 명령 역시 매우 모순적인 것 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치루려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상의 적”을 분쇄하려는 투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2년에 독일측이 행한 빨치산 토벌작전 기록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독일 지휘관들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줬음이 드러났다. 1942년 9월에서 10월사이에 독일측이 민간인 소개를 실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개된 민간인들을 위한 준비는 매우 형편없이 준비 되었다. 독일측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작전의 일부만을 행했을 뿐이며 나머지 “더러운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부대 관할로 넘어갔다. SS와 경찰 부대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헝가리군 지구에서 헝가리군을 지원하여 여러 차례의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국방군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합동 작전이 순조롭게(reibunglos)진행되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었다. 또한 잔학행위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직할의 비밀 야전 헌병(geheim Feldpolizei)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 대한 독일측의 비난은 자기 위선이나 뻔뻔한 기만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 지휘관들이 자국군의 잔학행위와 헝가리군의 잔학행위를 구별지워 판단하려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아마도 독일 지휘관들이 자국의 동맹군을 비난한 것은 독일군이 예의 바르고 전문적인 집단이라는 환상과 자국 군대가 41년 6월 22일 이후 자행한 일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반영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측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이 논문의 초점은 헝가리군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 전쟁(Vernichtungkrieg)”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잔학행위의 원인은 무었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

이 연구는 독일, 러시아, 헝가리의 1차 문헌을 이용하여 이루어 졌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과 그 예하 부대의 작전 일지가 포함되어있다. 이 기록은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군사 분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1942년 부분은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으며 민간인과 접촉이 빈번했던 비교적 하급 제대의 기록까지 있다. 관련 기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연방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측 문헌으로는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조직과 지하 공산당 조직, 이들을 지원한 NKVD의 기록과 1944년 초까지 독일 점령기간을 연구한 지역 정부의 연구 기록등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예쁘의 국가 중앙 문서보관소와 체르니히프, 수미 현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자료는 1997년에 필자가 체르니히프와 수미에 당시 살았던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수집하였다.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의 군사사 기록 보관소(Hadtörtnélmi Levéltar)에 보관된 자료를 참조했다.


2. 1942년 3월까지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바바로사 작전초기에 독일 국방군은 빨치산에 대한 문제는 겪지 않았다. 스딸린은 전쟁 이전에는 빨치산 부대 조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전쟁 초기에 효율적인 조직을 편성하지 못 했다. 초기에 편성된 빨치산 조직은 지역당 조직과 NKVD에 의해 조직되어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 못 했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독일은 침공전에 준군사 조직이나 민간인의 저항이 있을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보복은 유대인과 공산당 등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집단에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총 사령부는 1941년 7월 12일에 이러한 방침을 확정했다. 남부 후방 군사구역 사령관 폰 로끄는 우끄라이나는 우호적인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육군 총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정의롭다는 인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보타지 행위에 대해서 우끄라이나인 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돌려야 한다. 보복 역시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한해서만 행해야 할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명령은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폰 로끄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있을 경우 모두 “특별 사건(besondere Ereignisse)”으로 분류하여 자신에게 분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빨치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1년 10월 이전에 대량 보복은 단 한 건이 있었다. 1941년 8월 29일 제 454 보안 사단 소속의 82 차량화 헌병 대대는 체르보녜 마을에서 우끄라이나인들이 빨치산이라고 고발한 유대인 6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0월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방군은 동진하면서 공산당이 좀더 조직적으로 지하조직과 빨치산을 편성한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빨치산은 낙오된 소련 정규군이나 퇴각하는 정규군 부대를 지원하여 직접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드녜쁘르강 만곡부 지역에서는 수주간 보안 사단과 빨치산 부대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 후방군사구역은 제 6 군으로부터 제 62 보병사단을 증원 받아 뽈따바 지구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여기서부터 남부 후방군사구역의 대 민간인 정책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폰 로끄의 명령에 반해 남부 후방군사구역 예하 병력은 군사구역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우끄라이나인 마을을 불태우는 보복을 시작했다. 생포된 빨치산이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순찰하는 독일군이 즉결 처형을 했다. 보복 작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군사구역 사령부가 다른 동부 전선의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대 빨치산 작전에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민간인의 살상에도 불구하고 군사구역 사령부는 12월에 친 우끄라이나적 점령 정책을 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우끄라이나 인을 “아리안”인종으로 규정했다. 프리데리치는 12월 14일자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일에 대한 우끄라이나 민간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우끄라인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이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은 안된다.”

한편, 12월부터 헝가리군이 후방군사구역에 투입되어 빨치산 소탕에 참여했으며 곧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군사구역 예하의 헝가리 군은 “헝가리 동부 수비 집단(königliche ungarische Besatzunggruppe Ost)”으로 불리웠으며 제 102, 105, 108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2월 18일 에서 19일, 독일측은 체르니히프 북동쪽 75km 에 위치한 꼬류끼프까 지구에서 1,7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빨치산 집단을 파악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들이 소련 제 4군의 장교와 중앙당 간부, 그리고 지역당의 열혈당원, 유대인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박격포와 자동화기, 그리고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12월 20일, Kálman Csiby대령이 지휘하는 제 105 여단 2 대대가 게릴라 소탕을 위해 출동했다. 이틀 뒤 대대는 게릴라 700명을 사살했으며 잔여 인원은 중부 집단군 지구로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대인 90명을 작전 중 사살했으며 최소한 마을 한 곳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기록되었다. 독일측 기록에는 이 지역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다. 그러나 105 여단이 이후의 전투에서 형편없는 전과를 올린점에 미뤄 본다면 빨치산 700~800명 사살은 확실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100명 이상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의 러시아측 문헌은 이 소탕 작전에서 114명이 학살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12월에 체르니히프 지구 빨치산이 배포한 삐라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 헝가리측의 사상자 숫자로 볼 때 교전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빨치산은 보복으로 학살된 민간인 이었다. 여단의 보고서에는 헝가리군이 전사 7명과 부상 10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 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우끄라이나의 경찰 보조원(Hilfspolizei, 보통 Hipo 라고 부름)중에서 11명이 전사, 9명이 행방불명, 27명이 부상당했다.

꼬류끼프까 지구 전투는 이후 헝가리군의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격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군사구역의 북쪽 경계는 체르니히프 일대에 형성되었다. 헝가리군은 데스나강과 벨로루시아와 러시아 경계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지구의 빨치산은 체르니히프 지하당 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미래의 소련 연방영웅 페도로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월 에서 3월까지 독일군이 혼란한 전선일대로 집중된 동안 후방의 헝가리 제 105 여단은 페도로프가 지휘하는 빨치산 부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은 헝가리군과 점령군에 협력하는 우끄라이나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빨치산 부대는 홀미 일대에서 26명의 우끄라이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 17명을 죽였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집 34채를 불태웠다. 2월 5일에 옐니예 에서 두 명의 헝가리 병사가 매복 공격에 사살 되었으며 12일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105여단 소속 병력이 매복 공격을 받아 31명의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군은 보복작전에서 루끼-후또르 마을을 불태우고 139명의 “빨치산”을 “사살” 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공격은 더욱 더 대담해 졌다. 3월 2일, 헝가리 제 46 보병연대는 홀미와 꼬노똡 일대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두명이 행방불명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0일 뒤에 페도로프는 제 105 경보병사단(이전의 105여단이 개편된)의 전투단을 아바니브까 마을에서 습격해 4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또한 빨치산은 30명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6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독일측 보고서에 따르면 빨치산은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경찰 보조원의 아이들의 손을 자르고 19명의 주민을 강제로 입대 시켰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은 빨치산과 그 후원세력을 “전투원”이 아닌 “범죄자”로 파악했다. 늘어나는 손실로 헝가리군의 사기는 낮아졌다. 지휘관들은 증원병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독일측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임무를 맡겼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민간인에 대한 대우도 가혹해 졌으며 빨치산 소탕도 한층 더 과격해 졌다. 생포된 빨치산이 그를 감시하던 경비병 두 명을 죽이자 105 사단측은 1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빨치산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측도 헝가리측의 불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헝가리 제 105 사단장 Kolossváry 준장과 체르니히프의 독일 제 194 야전사령부(Feldkommandantur) 지휘관 뷔어펠(Würfel)중령의 요청에 따라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는 페도로프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토벌을 위해 증원 병력을 투입했다. 703 경비 대대(Wachbattalion)과 544 향토 대대(Landesschützen-battalion)가 증원되어 헝가리군 2개 대대와 함께 옐리녜 남쪽의 삼림지대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이 전투단은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 예하의 비밀 야전 헌병 3개 분견대(Abteilung)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는 독일측의 정보가 매우 정확했으며 일부 우끄라이나 경찰의 탈주와 영하 15~3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성공적 이었다. 페도로프 집단은 900명중 22명이 사살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측 주장에 따르면 27명이 사살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전술적인 측면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뒤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Csendes 중령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점령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며칠 뒤 헝가리군이 마을로 다시 갔을 때 마을 주민 대다수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Csendes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체포에 저항하는 주민 30명을 사살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일 비밀 야전 헌병에 인계했다.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옐니녜 주변에서 민간인 536명이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 중 230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고멜에 있는 민간인 수감시설로 이송되었다. 군사구역 사령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데 고멜은 중부 집단군의 관할 구역이었으며 프리데리치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4년 해방 뒤 NKVD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고멜에서는 민간인들 중 노인들만 석방되고 여성과 어린이는 학살됐다고 한다.

군사구역 사령부측이 민간인 학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독일측은 작전의 성공적 종료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군사구역 북부 지역은 평정 된 것 처럼 보였다. 703 경비 대대 대대장은 그의 나이 먹은 부하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했다. 신병 치료차 떠나있던 폰 로끄 역시 복귀한 직후 작전의 성과를 치하했다. 만약 독일측이 헝가리군의 작전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 이다. 그러나 Csendes의 추정은 독일군에 비해 덜 낙관적 이었다. 그는 최소 300명 이상의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Kolossváry 준장은 작전의 성과에 만족했으나 작전 기간 중 자신의 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로 되어 있는데 독일-헝가리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Kolossváry 준장의 비판

Kolossváry 준장은 1942년 초 105 사단의 작전 경과를 상급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경 사단의 역경”이라는 제목으로 네 장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먼저 105 사단의 절반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상태 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장교와 병사들은 정신력으로 훈련과 육체적인 문제를 극복해 왔으나 부족한 보급과 좋지 않은 기후, 그리고 지속되는 전투 손실로 지휘관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의지”가 없이는 부대의 상황이 악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세부적으로 기록했다. 1월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7명이 심각한 동상으로 절단 수술을 받았으며 250명이 2도 동상에 걸렸다. 사단 예하의 각 대대는 각각 호로드니아, 바흐마취 니즈인, 노브로로드-세베르스끼, 얌삘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대중 일부는 체르니히프의 야전 병원과 사단 본부로부터 최고 70~8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사단의 주둔 지역은 철도망이 부실했으며 빈약한 도로 사정으로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보급 문제는 매우 열악했으며 편지 배달도 원활하지 못 했다. 사단의 한 대대는 연 초의 작전 기간 중 거의 2500km를 행군했으며 주둔지의 거주 사정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가내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우크라이나 가옥”이었다. 의무 지원은 기초적인 수준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급품에 이 같은 기생충이라도 붙어 있는 경우에는 집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3월 말 까지의 소탕작전에서 105 사단은 101명의 전사자와 129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들은 좋지 않은 날씨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체르니히프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군이 겪은 여러가지 고통 중에서도 가장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외국인 지휘관과 병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기상 상황에 대해 잘못 된 정보를 주며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그들의 행태”였다. 그는 소련측이 이런 불만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사이의 균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빨치산은 그들이 약탈하고 방화한 마을을 헝가리군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독일측은 이러한 사태가 사전에 아무런 논의도 없이 발생한데 해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측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으며 이런 문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Kolossváry 준장은 결론에 가까워 지면서 자신의 작전 구역의 빨치산이 숫적으로 매우 우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나폴레옹 전쟁당시 가장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당시에도 역시 활발한 게릴라 활동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은 빨치산의 세력 확대에 매우 유리한 상황 조성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자신의 담당 구역의 면적, 각 부대의 행군 범위, 3월의 작전에서 사살한 빨치산 숫자(그는 5,132명으로 추정했다.)등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단이 맡고 있는 고정 거점 방어를 우끄라이나 부대에 넘기고 각 대대를 사단의 통제하에 운용하며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대전차포와 기관단총의 보급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측에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들은 매우 간단한 요구사항이었다. Kolossváry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폰 로끄의 참모진들은 헝가리측에 추가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폰 로끄는 그의 후임인 프리데리치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측이 병력과 장비 부족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폰 로끄는 헝가리군의 상태에는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Kolossváry가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폰 로끄는 육군총사령부 군수국에 헝가리측의 곤궁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보복에 대한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헝가리군과 독일군측에 상당기간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Kolossváry의 보고서에서는 헝가리군과 독일 상급 사령부 사이의 의견 불일치 문제를 주로 지적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석을 했다. 그러나 다시 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민간인에 대한 헝가리군의 태도는 한층 더 격해 졌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는 헝가리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하계 대공세와 보복에 대한 논의


봄의 홍수와 페도로프 집단의 퇴각으로 헝가리군의 담당 지구는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빨치산과의 특별한 교전은 없었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새로운 하계 공세인 BLAU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10만 평방 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 1,3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6월에 군사구역의 관할 구역이 수미 지구까지 확대되면서 브랸스끄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점을 둔 강력한 빨치산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일부 빨치산 부대는 수미에 확보한 전방 기지를 기반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얌삘 남쪽과 서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6월 말이 되자 군사지구 사령부는 중부 집단군 으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으며 시도르 꼬빡 일대에 있는 대규모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헝가리 108, 105 사단의 일부 병력과 소련군 포로로 편성한 “투르키스탄” 대대, 공군의 비행장 경비 병력 1개 중대, 꼬노똡 에서 차출한 건설 부대 병력(Gruppe Becker, 베커 집단), 1개 전차 중대, 공병, 대공포 등 1,2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작전은 6월 20일부터 26일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으며 독일측은 기대이하의 성과로 헝가리측과 논쟁을 벌였다. 헝가리측은 250명을 작전 중 사살하고 143명을 생포한 뒤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상당수의 포로를 독일 비밀 야전헌병의 감시하에 뿌띠블리 지구로 이송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모두 빨치산 주력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헝가리군 사령관 Imre Bogányi 중장은 지역 민간인들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기간 중 민간인들이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중에도 노바 슬로브다, 야치녜, 체레뽀보, 이바니프스끼, 세슐린등의 마을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작전 구역의 남성중 15~60세의 남성은 모두 사살하고 생포해서 이송한 포로들도 사살해야 하며 여자 포로들 중에서도 가슴 밑에 별 무늬 문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주로 사용한 표지)을 한 경우는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ogányi 중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6월 25일에 베류흐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의 책임을 물어 베류흐에서 10명의 인질을, 그 인접 마을들에서 각각 5명씩의 인질을 처형했다.

이와 관련된 독일측 기록으로는 노바 슬로바다와 칼리체, 리노보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 행위는 인접 부대인 바익스 집단 사령관 폰 바익스 상급대장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7월 3일에 바익스는 브리데리치에게 헝가리군이 마을을 파괴하는 행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행위는 얌삘과 세레디냐-부다 일대의 빨치산 활동을 감소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익스는 독일 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으며 헝가리측의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뿌띠블은 텅 비었다. 헝가리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1,300명의 비적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12곳의 마을과 460톤의 곡물이 헝가리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헝가리군을 피해 달아났다. 헝가리군을 긴급히 (독일군 부대로)교체 시켜야 한다고 본다.”

프리데리치는 작전 기간중 뿌띠블을 시찰했다.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서 프리데리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이것을 육군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똑같이 기록했다. 한편, 프리데리치나 그의 참모진 중 한명은 Bogányi가 인질을 대량 처형하자고 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뿌띠블 작전 직후 프리데리치는 빨치산전에 대한 지침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지침은 누구를 “포로”로 대우하고 누구를 “빨치산”으로 구분 할 것인가를 언급한1941년에 내려진 명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새 지침에는 “잔악한 유대-볼셰비즘적 전쟁 방식”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있었으며 이전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도 추가 되었는데 교전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투항하는 빨치산은 처형을 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반면 소련 정규군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 항복하건 규정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집단 처벌”이라는 규정을 새로 도입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제약을 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발적인 게릴라에 대한 절멸 전쟁은 유조의 요소가 있다.” 또한 죄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독일적 정의관에 반하는 행위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프리데리치는 모스끄바는 빨치산에게 독일군이 민간인에 대한 대량 보복을 하게 부추김 으로서 “주민들 사이에 독일군과 그 지원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실제로 처형해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사용할 전술이 아니다. 이것은 작전이 끝나고 행하는 보복성 행위이다. 추가 조사 과정에서 밝혀낸 결과 이 때문에 주민들의 우호도가 감소하고 마을 전체가 빨치산에 협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보복만 무자비하게 가함으로서 독일이 지지기반을 잃고 있으며 필요한 물자의 징발, 귀중한 노동력의 상실, 빨치산에 대한 지지만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이전에도 예하 부대의 잔학 행위를 단속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폰 로끄는 1941년 7월에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리데리치의 경우는 헝가리군의 행위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리데리치의 새로운 게릴라전 방침과 Bogányi가 옹호하는 무차별적 보복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마을 주민 전체가(in ihrer Gesamtheit) 빨치산 활동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야전부대가 주민들의 빨치산 관여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에 프리데리치가 내린 명령의 의도는 의문의 대상이다. 아마 프리데리치 자신도 보복을 “완전히” 금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새 명령을 하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 비밀 야전 헌병 부대는 니즈인 마을에서 독일 헌병 하사 한 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로드꼬 마을의 민간인 116명을 처형했다. 이 학살은 그 지구의 독일군 지휘관(194 야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지만 프리데리치는 이 잔학행위에 대해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뿌띠블리 마을에서와 같이 반복적인 마을 초토화와 대량 학살을 감소시키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Bogányi는 노바 슬로보다 마을을 6월 26일에 초토화 시켰다고 보고했는데 1943년 10월과 11월에 작성된 소련 뿌띠블리 지구당의 보고서에는 바로 7월 6일에 헝가리군이 다시 노바 슬로보다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7월 7일의 학살에서 헝가리군은 마을 주민 407명을 사살하거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헝가리군의 군율 문란과 작전 수행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다시 보복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194 야전사령부 사령관은 7월 18일에 뿌띠블리의 시장으로부터 헝가리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뿌띠블리 시장은 헝가리군이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야전사령부측은 군사 지구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했다.

“빨치산 무리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 붙이는 작전은 효과가 없다. 빨치산 집단은 지나가면서 머무르는 마을 마다 식량과 물자를 징발하며 지역 주민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유지들은 빨치산이 지역에 출몰한다는 점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빨치산 주력을 포위 격멸해야만 지역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며칠 전에 니즈인 마을에서 116명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같은 기간에 194 야전사령부 예하의 307 지역사령부(Ortskommandantur 307)는 헝가리 105 경사단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민가를 파괴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제 450 투르키스탄 대대의 장교 한명은 프리데리치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헝가리군이 삼림 지대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보고되고 군사구역사령부가 헝가리측에 항의를 전달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헝가리군은 독일측의 비난에 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데리치는 보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린지 3일 뒤에 빨치산 작전에 대한 새로운 전술 지침을 하달했다. 이 문건은 현재 없으나 네 명의 지휘관(제 213 보안사단, 제 194 야전사령부, 제 198 야전사령부, 헝가리 주둔군)이 이에 대해 보낸 회신이 남아 있다. 이 네통의 회신은 모두 남아 있으며 원래 명령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재 구성할 만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술 지침의 핵심은 “예하 부대의 자원으로 좀더 공세적인”행동을 취하라는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프리데리치는 상급 사령부에 빨치산 소탕에 투입할 전력이 부족함을 여러 차례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리데리치는 자신이 증원병력을 요청했음에도 상급 사령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좀더 정교한 전술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Bogányi는 이 지침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예하 부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고 “이미 이런 문제점은 충분히 겪고 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에게 분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 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Bogányi는 전문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회신에서 불만만 제기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해결안을 같이 적었다. 이것은 3월 31일에 Kolossváry가 올린 보고서와 유사한 내용 이었다. 물론 Bogányi의 답장에는 직접적으로 대응 보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전술적 측면 보다는 지역 주민이 빨치산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는 독일 비밀 야전 헌병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빨치산 출몰 지역과 빨치산을 지지하는 마을은 경제활동을 봉쇄해 버려야 하며 필요하다면 봉쇄로 기아를 유발 시킬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북부 관할 구역의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것 이었다. Bogányi는 빨치산 출몰지역의 성인 남성을 모조리 노동 수용소로 이송해서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Bogányi는 7월 2일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에 의거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Bogányi의 제안이 있기 전에 북쪽 지역의 민간인 소개를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민간인 소개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며 9월 10일에 집단군 사령부에 세레디냐-부다 와 데스나 강 동안의 벨리까 베리즈까, 홀루비브까, 리스녜, 빌료시브까, 스챠하일리브까, 즈놉-노보호로지께, 류바히프, 우끄라이스끼, 체르보니, 바실리브까 일대의 민간인을 소개하고 이 일대의 자재와 물자를 이송시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인과 물자의 소개가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한 것 같으며 10월까지 완료 된 것으로 보인다. 소개된 주민들은 제 213 보안사단과 197 야전사령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주리 주 서부와 필리핀 봉기, 보어 전쟁, 일본군의 만주 지역 게릴라 작전과 말라야, 케냐, 베트남 전쟁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민간인 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 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부 후방군사구역이 실시한 민간인 소개 작전이 효과적 이었는가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샤먼의 코트(재탕)

예전에 아마존에 실린 독자들의 서평을 보고 한번 사 봐야지 하다가 귀차니즘 발동과 지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통에 사보질 못 했는데 2주 전쯤 지하철역에서 번역판을 5,000원에 사게 됐다. 이것과 함께 만화 한국전쟁도 있었는데 탄약이 부족해 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책의 번역은 재미있게 잘 된 것 같다. 물론 원판을 아예 못 읽어 봤으니 단정하긴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와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A History of Pagan Europe 과 유사하다. A History of Pagan Europe이 기독교가 동진하면서 붕괴된 유럽의 전통 문화를 차례대로 보여줬다면 "샤먼의 코트"는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기독교화된 유럽이 동진하면서 붕괴된 시베리아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외래 문화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리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6세기 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이다.
러시아인들은 동진하면서 요새도시를 세워 주변지역을 러시아화 하고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면서 전통 사회를 파괴하고 덤으로 환경도 파괴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했으나 대포와 총, 그리고 각종 전염병으로 무장한 러시아인들 앞에 처절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공격중에 최악의 공격은 "사회주의"에 의한 것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종교를 강요했고 스탈린 체제는 사상의 강요 보다 학살을 택했다. 스탈린 보다 온건한 편 이었던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전통사회를 붕괴시킨건 마찬가지였고 소련이 붕괴될 무렵에는 더이상 말살할 만한 전통 문화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됐다.
스탈린 시기의 전통문화 말살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강제 기독교화와 비교하더라도 그 야만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 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의 적들을 박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에서 샤먼을 집어 던지고 총살하고 강제 노역으로 혹사시켜 죽이고...

결국 현재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박제화된 과거의 흔적 뿐이다.

책의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베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은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해 준다.

전반적으로 슬픈 이야기로 일관된 슬픈 책이다. 우울할 때 읽으면 쥐약이고 기분이 들떠 있을때 읽으면 좋을 듯...

아주 멋진 책이다.

그리고 덤으로..

1. 이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

2.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비드야 단다론"이라는 부랴트족 불교 승려는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도 다른 라마교 승려들과 수도하면서 포교도 했다고 한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장 자크 아노가 이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제법 재미있을 듯.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