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한국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한국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이승만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신익희의 통찰

부산정치파동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민군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군부 일각에서 이승만의 헌정유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기도한 것 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鐘贊) 중장은 미국에 쿠데타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 라이트너(E. Allan Lightner, Jr.) 미국 대리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찬 중장은 약간의 육군과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면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내무부장관, 원용덕 계엄사령관을 쉽게 체포하여 상황을 정상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권력에 관심이 없으며 새 대통령을 선출하면 일주일 내에 군대를 복귀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종찬 중장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만큼 미국의 지지만 있다면 쿠데타를 결행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1) 이종찬 중장은 정치 정상화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종찬 장군은 미국이 국회정상화를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제2병참사령부 예하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2)

이렇게 이종찬 중장이 쿠데타 또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에 협력하려 했던 것은 생각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신창현(申昌鉉)의 기록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조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전략)

이날 저녁 무렵 서상렬(徐相烈)이 문병차 내방하였다. 서상렬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북지(北支) 전선에서 전투에 가담하여 중국군을 토벌하다가 일본 진중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의 경호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경호대는 내무부에 예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해공에게 가깝게 수종하던 터수였다.
이날 이 사람이 와서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박사의 폭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뒤 분을 참을 수 없다면서 “대구에 있는 육군 참모총장과는 지기(志氣)가 상통(相通)하는 처지이니 군을 동원해서 이 폭정을 응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해공께서 “그거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느라 병력을 자꾸 증강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하지만 전체 국민에 대한 수치 비례로 보아 너무나 방대하여 앞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될지 모르겠으나 이 군부를 다루는 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오.
아직은 이박사의 과거 독립운동 역사로나 국제적 성망 등 카리스마적 위력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그분이 국헌을 뒤엎고 주권을 짓밟는다고 하여 군대의 힘을 빌어 확청(廓淸)하였다고 칩시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있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 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 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 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준조 절충(樽俎折衝)하고 토론ㆍ협상해 가며 차츰차츰 시정하고 광정(匡正)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라오. 나라와 민족의 일에 감정은 절대 금물이지. 우리가 길의 중요한 요지를 목이라고 하는데, 정치는 긴 목 잡고 한다는 것이라오. 감정도 금물이려니와 조급하게 굴어서도 안 되지요. 여기에 정치력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위험 천만한 일이야. 양호유환(養虎遺患) 되고 말아요.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후략)

신익희의 통찰력은 주목할 만 합니다. 물론 이종찬 중장은 신태영 국방부장관이 계엄군을 증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차출하라고 했을 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거절한 바 있고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은 태도로 존경받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마무리가 잘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군부가 쿠데타를 생각할 정도로 강력해진 시점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신익희가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군부통제와 통치능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민군관계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군부내 파벌을 이용한 이승만의 군부통제가 효율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요.4)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을 구상하다가 대안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이승만은 개인의 정치력으로 강력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통제자가 사라지자 군부를 견제할 존재는 국내정치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지요. 5ㆍ16 쿠데타를 이야기 할 때 부산정치파동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신익희가 예상했던 것 처럼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구악’을 일소하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그대로 권좌에 눌러앉아 이후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장기집권을 하게되지요. 1961년은 군대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그나마 군부와 균형을 맞출만한 집단은 ‘썩어빠진’ 기성 정치집단인 민주당 정도였고 기성 정치권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군부는 견제세력 없이 독주하게 됩니다.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고 군부를 통해 손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던 세력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1) ‘Oral History Interview with E. Allan Lightner, Jr.’(1973. 10. 26), Truman Library, p.114
2)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Young)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Allison)’(1952. 6. 1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 1, (USGPO, 1984), p.333
3) 申昌鉉, 『내가 모신 海公 申翼熙 先生』,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9) , 505~506쪽
4) 도진순ㆍ노영기,「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67~68쪽

2011년 8월 31일 수요일

고지전 단평

얼마전에 nishi님이 영화 고지전에 대한 제 감상을 물어보셨는데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한국일보 라제기 기자는 영화에 나타나는 남북한 군인들의 교류가 퇴행적인 욕망을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라는 평도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전쟁영화를 못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겠지요. 예. 솔직히 이 영화의 반전메시지가 지겹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한두편도 아니고. 솔직히 저는 반전영화는 1930년에 나온 서부전선 이상없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은 제법 진지한 척 폼을 잡으며 전쟁의 허무함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제 눈엔 조성모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에서 절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전쟁이 나쁘다는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수없이 계속해온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위해서 영화를 한 편 더 만들 필요는 없지요.

고지전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 뭔진 모르겠는데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본인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진지한 반전영화라기 보다는 반전영화 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저 그런 영화입니다.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엔 10년도 가지 않아 잊혀질 그저그런 영화입니다. 한국영화계는 남북문제를 다룰때 수십년간 작용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인지 지나치게 무리해서 그 반대로 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에서 가장 짜증나는건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겉멋만 잔뜩 든 골빈 영화인데 고지전은 그보다는 수준이 조금 낫지만 비슷한 영화로 보입니다. 솔직히 고지전을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영화 평론가 중에서 전쟁영화가 아닌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한국전쟁에 대한 진정한 걸작이 나오려면 일단 한국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과거의 역사로 사라져야 할 것 입니다. 한국전쟁이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한 걸작 보다는 진지한 척 하고 싶어하는 겉멋만 잔뜩 든 영화만 나올 가능이 훨씬 높습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민폐

유별나게 군대와 인연(?)이 많으셨던 시인 모윤숙 여사가 5ㆍ16직후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부대 순회강연을 다닐때의 일화랍니다.

어느 연대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오후가 되어 싸늘한 산바람이 일고 있을 때였다. 2~3,000명으로 헤아일 수 있는 사병이 모두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비된 사회자의 소개에 의해 연단에 올라섰으나, 도무지 마음이 편안치가 안았던 것은 내 말이 무슨 말이던 땅바닥에 앉아 듣는 사병에게는 너무 지나치는 푸대접이 아닐가 생각되어서 무엇보다 한 연대에 하나씩 속히 대강당을 지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줌이 옳겠다고 생각되었다.

毛允淑,「一線에 다녀와서 : 巡回講演 感想記」, 『國防』117호(1962. 1), 114쪽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살짝 짜증이 나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의 군대는 극도로 열악한 복무환경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요즘 군생활과는 비교할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고 우리의 모윤숙 여사도 그 중 한 분 이셨다지요. 당시 군부에서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군대 내에서도 정훈교육을 통해 관련 교육이 이루어졌고 모윤숙과 같은 지식인들의 강연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맨 땅바닥에 앉아서 지루한 강연을 들어야 했던 병사들은 어떤 생각이었을지 궁금하군요. 모윤숙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사창리 전투에 대한 미9군단장 호그 소장의 반응

한국군 6사단은 군사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흥미로운 부대입니다. 한국전쟁 초기 춘천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공훈을 세웠고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는 중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참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우수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습니다.

당시 6사단을 지휘했던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사창리 전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장도영 회고록의 사창리 전투 관련 서술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단은 이날 가급적 속히 중간목표선까지 진출하여 일몰전에 방어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지형상 사창리로부터의 포병지원이 가능한데다, 또 제7연대의 예비선을 전진시켜 23일 초월공격으로 화천-금화 도로상의 수개 요점을 점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22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갑자기 적의 저항이 심하여지며 반격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부득이 일선공격부대들은 진격을 멈추고 각 연대의 진출선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드디어 일몰이 되자 중공군은 새로운 부대로 대거 침공을 개시하여 우리 일선전후에 쇄도하였다. 피아의 공방전은 밤이 되면서 더욱 더 치열해졌다. 자정이 되자 적의 새로운 대부대가 포격을 증가시키며 파상공격을 계속해 왔고, 또 다른 부대들은 전에 없던 기병대와 혼성하여 사단 전구 후방에 침투, 각 지휘소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방어진지에서 이탈하여 공격 전진 중에 적의 대부대의 공격을 받은 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일선을 전날의 공격출발선까지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예비 7연대도 역시 전진하여 일몰전까지 방어에 들어가 사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밤에 사창리 예비진지로 후퇴하였다.

23일 새벽까지 공방전을 계속하는 동안 적의 새로운 대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계속 남하하였으며, 여명시에는 이미 우리 전선 후방 깊숙이 진출하였다. 사단은 부득이 주력을 사창리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예비 7연대는 다시 38선 일대의 진지를 점령케 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24일에도 역시 적은 계속하여 우리 일선부대와 교전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우리 후방으로 우회 포위하고 또 다른 부대들로 깊숙이 남하하여 우리 후방 요지들을 점거하는 작전을 반복하였다. 우리 사단은 중공군 제20군 소속 제58, 59, 60사단, 그리고 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 이었다. 25일에 이르러 우리는 가평북방까지 철수하여 방어선을 확보하고 국부적으로 반격을 감행하여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적의 진격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1)

장도영의 회고록에서는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다소 축소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잘 아시다 시피 사창리 전투는 6사단이 경험한 패배 중 가장 황당한 패배였습니다. 사창리 전투 직후 6사단이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황당하지요. 6사단의 패주는 군단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27여단이 투입되어 겨우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 공간사는 6사단의 패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4월 22일 오후, 한국군 6사단은 제19연대를 좌익에, 제2연대를 우익에 두고 와이오밍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대보다 3마일 정도 앞선 차량화수색대는 적과 접촉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 제9군단의 포병 관측기가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적이 남진하는 것을 포착하여 적의 접근을 알렸으며 이 소식은 제8군의 전선 전체에 전달되었다.

한국군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1600경 선두의 두 연대를 정지시키고 두 연대의 전투지경선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좋은 지역이었던 인접한 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도영 준장은 제7연대를 제2연대 뒤에 배치했다. 한국군 6사단은 날이 밝는대로 종심 5마일의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도영 준장은 지원부대로 6사단 포병대대외에 제16 뉴질랜드 야전포병연대(대대급)와 미군의 4.2인치 박격포 1개 중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미 9군단의 155mm 야포 1개 대대와 105mm 야포 4개 포대가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날이 지자 한국군 6사단은 사단 및 군단 지휘소의 지도에 표시된 진지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도영 준장이나 6사단 사령부의 참모들이 각 연대의 구역을 직접 시찰했다면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질 않았다. 방어진지로 재전개 하는 것이 매우 느렸고 사격 진지는 진창이었다. 야간 방어 전투에 필요한 많은 장비들이 산 아래에 있긴 했지만, 초급 장교와 부사관, 사병들은 꾸물거렸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가 코앞에 닥쳤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부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군 장교들 중 상당수가 특별한 기준 없이 선발되었고 훈련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에는 불출분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몰 후 대략 한시간이 지나자 중국군 제60사의 선두 연대가 공격 준비사격이나 다른 공격 조짐도 보이지 않은채 갑자기 한국군 제2연대의 최전방 대대를 휩쓸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제2연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중국군의 두 번째 연대가 나타나 (2연대의) 예비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저항은 약간의 간헐적인 소화기 사격에 그쳤다. 제19연대는 왜 사격을 하는 건지 물어본 뒤에야 제2연대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제2연대의 생존자들과 제19연대 전체가 방어진지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무기와 장비도 모조리 버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보다 신중한 이들은 장비와 탄약, 무전기는 챙겨서 후퇴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장비가 유기되었다. 제7연대는 제2연대의 패잔병들 때문에 비상이 걸려 2200에서 2230사이에 황급히 방어선에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7연대도 패주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뉴질랜드군의 포대는 한국군 6사단 구역에 관측소를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화력지원본부(fire support center)를 통해 목표를 지정받아야 했다. 한국군의 전방포병관측요원들도 도주하는 보병들과 함께 달아났기 때문에 미군과 뉴질랜드군 포병들은 화력지원요청을 받지 못했다. 한국군의 포병 진지들은 총퇴각의 와중에 모두 버려졌다.

2230 경 군사고문관 한 명이 뉴질랜드군의 지휘소에 한국군의 전방에 배치된 2개 연대가 공격을 받아 5km 정도 퇴각했다고 알려왔다. 한시간 반 뒤 한국군 6사단 사령부도 예하 연대와의 연락이 모두 두절되었다고 알렸다. 이 무렵 소규모의 한국군 병사들이 뉴질랜드군의 포진지를 지나쳐 가평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도망쳤다. 23일 0100 무렵이 되자 이 길은 수많은 패잔병들로 가득 메워졌다.

다행히도 한국군은 적군보다 훨씬 앞서 도망치고 있었다.(Fortunately, they had outpaced their foe.)2)

미육군 공간사인 Ebb and Flow에서는 사창리의 패전을 무미건조하게 사실 위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영국군 공간사는 살짝 시니컬하게 쓰고 있어 한국사람을 무안하게 하지요;;;;3)  6사단 부사단장 이었던 임부택 대령은 사창리 전투 당시 6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간신히 귀환할 정도로 6사단의 혼란은 심각했습니다.4)  다행히도 중국군은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반격에 직면해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만 한국군의 정예부대였던 6사단은 체면을 있는대로 다 구기죠.

사창리 전투에서 제6사단과 배속된 부대가 상실한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5)


한국군 제6사단과 배속부대의 장비 손실(1951. 4. 22~23)
한국군 제6사단
6사단 배속부대
75mm 야포
6
105mm 야포
8
15
M1 소총
2,353
카빈
852
BAR
85
중기관총
45
경기관총
43
기관단총
72
권총
45
60mm 박격포
37
81mm 박격포
7
4.2인치 박격포
7
3/4톤 트럭
11
11
1/4톤 트럭
22
27
2½톤 트럭
17
22
도요타 트럭
23
닛산 트럭
13


장도영의 회고록에는 호그 소장의 질책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참패를 겪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을 리가 없지요. 6사단의 어처구니 없는 패배뒤에 미 제9군단장 호그(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 준장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장도영 장군에게,

이 서한은 귀하가 1951년 4월 25일 귀하의 사단의 상태와 현황을 보고한 서한에 대한 답장이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 스러운 것이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측의 지원부대들 까지 유린되게 했소. 이 때문에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소.

제7연대도 나을 것이 없소. 제7연대는 예비대로서 공격을 감행해 제2연대가 잃어버린 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 공격을 실시했다면 성공했을 것이 분명하고 다른 부대들의 와해를 막는 한편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오. 제7연대는 이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대신 후방으로 달아났고 연대의 일부 병력이 23일 오전 수마일 후방에서 재집결했을 뿐이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소. 적군이 초기의 성공을 확대했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오. 아군이 적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적군이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군 6사단의 패배로 인한 이점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지휘력과 통제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위 제대의 부사관과 장교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러한 혼란은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하는 것이오.

상위 제대의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 단계에 해당 구역에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패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위제대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오.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 연대장과 그 이하의 지휘관들은 부대의 훈련과 규율 유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과거에 이러한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고 이러한 긴급 상황에서 공격적인 지휘력을 발휘할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패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 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소.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소.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 정말 유감이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 날 것이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8군의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하는 바이오.6)

그리고 호그 소장은 5월 2일에는 제8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도 보냈습니다.

1951년 4월 22일의 적 공세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군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현재까지의 정보로는 1951년 4월 22일 공세 당시 적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한국군 6사단 보다 열세했습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않아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와해되어 이렇다할 저항도 하지 않은채 혼란에 빠져 패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내버려두고 도망치면서 우리측 지원부대들 마저 유린되게 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제7연대는 명령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제7연대 또한 혼란에 빠져 후방으로 패주했습니다. 4월 23일 오전 한국군 제6사단장은 사단의 병력이 대략 3,000명 정도라고 파악했습니다. (6사단 예하) 연대들이 패주, 와해된 것은 도데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모든 측면에서 불명예스럽습니다. 4월 23일, 재편성된 사단의 잔여 병력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다시 방어진지를 버렸으며 지원부대들을 뒤로 하고 후방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군 6사단을 와해시킨 공격은 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제27여단 소속의 약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한국군 6사단에 소속된 분대에서 연대에 이르는 모든 부대들이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혼란에 빠져 와해된 상태로 퇴각한 것이나 무기와 장비를 내팽개쳐 적이 노획하도록 한 사실은 모든 계급의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부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의견 : 본인은 한국군 제6사단의 패주는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공격적인 지휘력을 결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위 제대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사단 내에 제5열이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문을 퍼트리는 병사는 순식간에 공황과 혼란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의심과 공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제안 : 모든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지휘관은 책임을 가지며 이것은 부하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이란 부하들의 훈련, 군기 유지, 그리고 복지라는 기초적인 원칙을 철저히 숙달시켜야 합니다.7)

여기서 호그 소장은 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패전할 경우 단골로 지적되는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문제이지요. 다행히도 장도영과 6사단은 얼마 안되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쉬운 것은 사창리 전투의 패배만 없었다면 제6사단은 전설적인 부대로 남을 수 있었다는 점 입니다.



1) 장도영, 『望鄕』(숲속의 꿈, 2001), 215~216쪽
2) Anthony Farrar-Hockley,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Vol.II : An Honourable Discharge(HMSO, 1995), pp.139~140
3) 미육군 공간사의 사창리 전투 서술은 Billy C. Mossman, Ebb and Flow(USGPO, 1990), pp.381~385를 참고하십시오.
4) 林富澤, 『洛東江에서 楚山까지』(그루터기, 1996), 375쪽
5) 6th ROK Division(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6) From Major General W. M. Hoge to Brigadier General Chang Do Young(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7) IXCCG76,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현리 전투 경험담 하나...

현리전투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한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분석이 이루어져 왔고 많은 경험담이 활자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매우 극적인 사건인 만큼 관련된 기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끌리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많으시겠지만 현리전투를 육군 신병으로 경험한 인물의 경험담입니다. 현리 포위망 내에서 겪은 경험을 제법 자세히 서술해 놓아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글 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 첫 전투로 맞이한 현리전투에서 겪은 공포와 공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라서 좀 길게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런 병영생활일망정 그런대로 익숙해 가던 1951년 5월 중순, 그 곳(9사단 보충대)에 배치된 지 스무 날 쯤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새벽 천막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연병장에 뛰쳐나온 우리들 신병 셋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장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사단 앞의 연병장은 말할 것도 없고, 냇가 건너편의 골짜기까지 군인들로 꽉 찬 것이 아닌가.

내가 속했던 사단만의 병력은 분명 아니었다. 당시는 개개인의 부대인식표가 없어서 다른 사단의 병력이 섞인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어림짐작해 보건대 1개 사단 병력은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활기찼던 군인이 아니고 지칠 대로 지친 참담한 몰골의 패잔병들이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대기 하나 없는 이등병 주제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잔뜩 주눅 든 채 취사반에서 밥을 타다가 배식하면서 귀동냥한 결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 포위되었다는 것 이었다.(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의 포위가 유명한 현리전투라고 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낭을 챙긴 뒤,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중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한쪽엔 쌀, 한쪽엔 ‘씨레이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포위망 돌파에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각자 지닐 만큼의 식량을 휴대하라는 것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들 이등병은 한쪽 얻어먹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씨레이션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니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 이어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참들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별일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고참들은 이런 포위는 항용 있어온 일이라는 듯 2~3일분 식량만 챙겼는데, 그 이상은 짐스럽기만 할 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셋은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것이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배낭속을 몽땅 비우고 7일분 씨레이션을 짊어졌다.

(중략)

그 동안 부대 앞의 냇가를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트럭들의 질주행렬이 이어졌으나, 출발한 지 1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기총소리가 났고, 이어 피격당한 흔적이 완연한 트럭들이 다시 돌아왔다. 말은 질주행렬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차량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사단본부 앞 연병장 정도나 될까, 그 밖에는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임간(林間) 도로였기 때문에 남쪽 길목만 막으면 우리 사단 뿐만 아니라 같은 골짜기에 있던 다른 사단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독안의 쥐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사단 본부가 진주하면서 길이 만들어졌지만, 북쪽은 그것조차도 없는 오지였다. 지금은 국도가 아닌 웬만한 지방도로도 포장이 되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지만, 당시 강원도 산간의 도로는 포장은 커녕 간신히 일방통행이나 가능할까, 마음대로 오고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니 희생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부대 앞의 연병장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서 105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박격포 등을 배치하여 사격을 개시하였고, 사격이 끝나자 포들을 분해하여 땅속에 묻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적군이라는 말없는 설명인 셈이었다. 그 많은 씨레이션과 쌀더미, 퇴로가 막힌 트럭들엔 휘발유가 뿌려졌고, 우리들은 불길을 뒤로 하고 방향도 모른 채 고참병의 뒤를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정양섭, 『어이없는 참전기 : 어느 북파공작원의 회상』(지식산업사, 2004), 76~79쪽

그야말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현리”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아직 패주의 초반이기 때문에 그냥 고참병들의 분위기에 따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이 포위망 속의 1주일은 방향은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앞사람만 따라다녀야 했던 1주일 이었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후퇴, 그것도 포위망 속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방황이라고 해야 옳았다.

웬놈의 피리소리는 그렇게도 처량하던지, 다른 군인들은 그 피리소리가 공격 시에도 울렸다고 했으나 내가 듣기엔 밤중, 그것도 유독 달밤에만 울린 것 같았다. 처음엔 처량하기만 했으나 날이 가면서 피리소리만 나면 소름이 끼쳤다.

(중략)

어차피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포위망 속이라면, 그럴수록 분산되어 3~4명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습격받을 기회도 적어서 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심정은 흩어지면 꼭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자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무리가 커질수록 공격받을 가능성은 늘어나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참모 등 서슬 퍼렇던 그 많은 고급 장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포위 첫날 부터 볼 수 없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눈에 띄던 위관급 장교들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오를 이룬 후퇴로 지휘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가는 사람은 앞선 대로, 뒤쳐지는 사람은 뒤쳐진 대로 뒤섞이다 보니 완전한 오합지졸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뭇가뭇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무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도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앞사람의 뒤만 따라갔다. 살 길을 찾아서가 아니고 그 밖에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막연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기습을 받을수록 우리들의 몰골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철모는 불편해서 벗어버렸다 해도 작업모조차 쓰지 못한 맨대가리가 있는가 하면,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는 그만두고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춘 군인보다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점차 늘어났다. 나 자신도 세 번째로 당한 밤중의 기습에서 M1 소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이어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데다가, 넝쿨 때문에 총을 지닌 채로는 도저히 숲 속을 해쳐 나갈 수 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들은 말이 있어서 방아틀뭉치만은 빼내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총기를 그대로 버리는 것과는 달리 방아틀뭉치를 뽑으면 그 총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버릴 때는 총기 대신 방아틀뭉치만은 지니고 돌아와야 처벌을 면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방아틀뭉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양섭, 위의 책 79~82쪽

포위된 상태가 길어지면서 점차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특히 훈련과 전투경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한국군이었던 만큼 공황상태가 지속되면서 모든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몇몇 부대는 상당한 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양섭의 회고에 따르면 현리 포위전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석 달 가까이 방위군에서 고생한 끝에 입대한 것 이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때문에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어서 행렬의 뒤끝에서 빨리 오라는 고참들의 재촉을 받으며 따라가던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뒤쳐졌던 나를 뒤에서 쫓아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앞지르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전투태세로 산개하고는 빨리 가라고 호통쳤다. 장교고 사병이고 모두가 쥐구멍만 찾는 판국에 자신들의 반격에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라고 소리치다니 도데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너희들같이 도망이나 다니는 패잔병들도 군인이냐는 투였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공용화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개인화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적지 않은 판에 그들은 개인장비는 물론 60밀리 박격포까지 갖춘 완전한 전투부대였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공수된 특전사 병력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 추격해 오는 적군과 일전을 준비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신기하기 조차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해볼 때, 그들도 연대나 대대 같은 상급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설사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작전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반격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소대 자체의 자의에 따른 반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속했던 사단의 경우 신설 사단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사(지금의 상병)면 분대장, 중사(하사)면 선임하사 급인데 견주어, 그들은 중사가 분대장 급으로 나 같은 이등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최하가 하사 급이었다.

그들은 18연대라고 했다. 18연대면 사변 전 옹진전투에서부터 용명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같은 한국군이라도 ○○연대는 아무리 공격해 보아야 고지점령은 커녕 당하기만 한다고 해서 ‘○○연대 공격하나마나’. ××연대의 경우 아무리 보급품을 줘 보아야 모두 적군의 손에 빼앗기기 때문에 ‘××연대 보급 주나마나’였는데 반해, 18연대는 아무리 포위당해도 모두 빠져나온다고 해서 ‘18연대 포위당하나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연대나 ××연대에 견주면 18연대야 말로 전투부대였다.

정양섭, 위의 책 86~88쪽
하지만 이런 양호한 사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포위망 내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정양섭이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이야기는 부대 단위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옆의 동료 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용감한 고참병이 몇몇 사병과 함께 기습하는 적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보니, 불과 10여명도 안 되는 분대 단위의 기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할 때마다 희생자는 늘어났고 앞뒤로 흩어졌던 병사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게 되어 또 습격을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7일분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아쉬운대로 기아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지니지 못했던 군인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지 사흘만에 만난 여군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그것이었다. 말은 여군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군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부대인식표는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계급장은 커녕 군인다운 징표가 전혀 없는 달랑 군복뿐인 여자였다. 당시의 전투사단 편제에 여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신분이 수상한 여자였다.

남자들은 각자 배낭 속에 적으나마 비상식량을 지녔고 또 작업복 위에 ‘판초’를 갖추어 웬만한 안개비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군은 먹을 것은 둘째로, 우의조차 갖추지 않은 입은 옷 그대로의 단벌인 채로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려 지나가는 길섶에 누워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장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끝장이었다. 모두가 굶주린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씨레이션은 바닥이 날 것이 뻔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배가 고프면 숲 속에 혼자 쳐져서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작업복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그것마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뒤쳐져 우물우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내 수통속의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시고 나면 허리에 찬 수통에선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고, 그렇게 되면 한 모금 달라는 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을 것 이어서,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아예 물통이 빈 것 처럼 행세해야 했다.

그 래서 운 좋게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을 만날때 까지는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냇물이 있어 물통을 채울 수는 있었으나 당장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를 적군이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낙오될지도 모르는 것이 더 겁이 났다.

정양섭, 위의 책 90~91쪽

이 책의 저자인 정양섭은 원래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현역으로 빠진 경우인데 하필 처음으로 경험한 전투가 현리전투이다 보니 당시의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18연대와 같이 긍정적인 사례도 있긴 합니다만 현리전투 자체가 작은 미담으로 덮기엔 너무나 큰 참사지요. 정양섭은 장교들의 부정부패, 고참들의 폭력, 형편 없는 군기문제 등 삼류군대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을 때 마다 씁슬하기 짝이 없습니다.

2011년 6월 2일 목요일

美風良俗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지요.

전두환 정권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워커는 대한민국의 미풍양속에 꽤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이 도를 지나쳐 표출될 때도 있었다.

청와대의 대형 커피 테이블에서 열리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전씨가 담배를 꺼낼라치면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이 서로 먼저 라이터로 전씨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기 위해 올림픽식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 중 군용 텐트에서 김윤호(金潤鎬) 당시 한국군 합참의장이 전씨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김 의장을 ‘학자 장군’이라 부르곤 했다. 전씨의 자리는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보다 30cm 정도 높은 연단에 마치 옥좌와 비슷하게 마련돼 있었다. 이를 본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존 위컴 장군은 나를 쳐다보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같은 자리 배열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와 한국군 의전 참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리처드 워커 지음/이종수ㆍ황유석 옮김, 『한국의 추억 :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한국문원, 1998), 31~32쪽

저도 이 부분을 읽고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서구화(?)되어 전래의 미풍양속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2011년 5월 21일 토요일

한국의 ROTC제도 도입에 대한 잡담

한국의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ROTC제도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은 것 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 제도가 실시된 배경은 미국과는 조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ROTC제도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년 전인 1916년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미국은 평화시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던 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하면서 장교, 특히 초급장교를 대규모로 충원할 제도가 필요했고 그 결과 ROTC가 도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ROTC는 군대의 대규모 증강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제도는 1960년 도입되었고 1961년 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군의 증강이 완료되어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한국의 ROTC제도는 대규모의 군대, 특히 대규모의 육군이 만들어진 다음에 여기에 필요한 장교단을 육성하기 위해 도입된 것 입니다. 명칭과 기본적인 성격은 미국의 ROTC와 같지만 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은 미국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ROTC가 육군의 대규모 증강을 앞두고 실시된 선행조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국의 ROTC는 육군이 급속도로 팽창한 뒤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된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9년에 육군본부 인사국에 있던 손창규(孫昌圭) 대령은 육군대학에서 발간하는 『軍事評論』5호에 육군의 인사문제에 대한 글을 한 편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1년 뒤 도입될 ROTC제도의 성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몇 군데 있습니다.

현역병역의무연한을 무한정하고 넘어서 장기복무하게 되는 것을 꺼려하여 대부분의 대학졸업자들이 단기복무를 희망하지 장교복무를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국민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데 배치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원시에 대량으로 필요한 예비역 초급장교를 확보하는데 있어 대학졸업자는 병(兵)으로 있기 때문에 현역복무연한을 훨씬 넘어서 장기 복무하다가 도태당한 자들을 그 대신으로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비군의 건전한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단기복무제도와 공정한 병역의무의 의의와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제도를 발전시킬 상태에 놓여 있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시지탄의 감을 느끼는 상태로 전환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孫昌圭,「오늘의 淨軍과 내일의 淨軍」『軍事評論』5號(1959. 4), 12쪽

**********

단기복무장교제도가 없으면 대학졸업자의 대부분이 장교희망을 안 할 것이다. 이러한 현황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교가 대학졸업한 병사를 거느려야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단기 현역복무장교제도가 없기 때문에, 즉 장교로 임관되면 전원이 장기복무자의 과정을 밟어야 되므로 경비의 난비(亂費)는 물론 많은 장교의 강제 도태 문제를 불가피하게 만들고만다. 사실인즉 우리는  휴전직후부터 이 제도를 수립했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양성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예비군의 장교양성비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기복무후 비교적 장기간 예비군의 장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孫昌圭, 위의 글 16쪽

손창규의 글은 당시 한국군이 직면한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된 만큼 장교단도 폭증했는데 이것은 장교의 진급적체를 사회문제로 만들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장교단은 많은수가 직업군인을 희망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을 정리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설사 장교단을 한번 정리한다 하더라도 장교 충원방식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군, 특히 육군의 감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병력 감축에 미온적이었습니다.(그리고 여기서 약간의 병력만 감축된 뒤 60만의 대군이 오늘날 까지도 유지되고 있지요.) 결국 장교인사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고려되기 시작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장교 처우는 매우 좋지 않았고 언론에서 “싸구려군대”라고 자조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필요로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은 군대에 장기복무하는 것을 기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장교 충원방식의 변화가 필요했고 ROTC 제도는 이점을 개선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 꼽혔습니다. 1950년대 말 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장교단의 교체가 실시되고 ROTC와 같은 개선된 제도가 도입됨으로서 1950년대 말의 심각한 장교 인사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ROTC 라는 미국의 제도가 한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되는 과정은 꽤 흥미롭습니다. 제가 인용한 이 짤막한 글에서는 그 과정의 단편적인 면을 보여줄 뿐이지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안보적 환경입니다. 사실 한국군을 논하는데 있어 이걸 빼면 전혀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