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부 구매했습니다. 몇년전 HBO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 퍼시픽을 아주 감명깊게 봐서 유진 슬레지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도 있던 차에 그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나왔다니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은 미해병대의 말단 보병의 시각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말단 사병의 시각에서 본 회고록은 제법 많고 국내에도 이미『잊혀진 병사』를 비롯해 몇권이 번역되어 소개됐습니다.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 약력에도 잘 나와있듯 그는 전쟁 초 교육 수준이 높다는 이유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전후에는 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또한 전장에서도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비교적 일찍 회고록 저술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했던 덕분에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구체적입니다. 유명한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저자가 거의 대부분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 집필을 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나중에 진실성 여부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줍니다. 또한 그의 지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도 시간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회고록들이 혼란스러운 서술을 보여주는 점을 생각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쟁 중에 남긴 기록과 그의 명료한 지적 능력은 그가 전투에서 겪은 여러 사실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말단 보병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지상전을 미시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펠렐리우 전투 당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동료 해병대원들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전리품을 얻기 위해 일본군 시체에서 금이빨을 뽑으려 들었던 순간을 회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 합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고참 병사가 어느 순간 PTSD에 시달리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큰 틀에서 국가에 헌신한 동료 해병대원들의 명예를 기리고자 하지만 단순한 무용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추악한 면, 특히 동료 해병대원들에 의한 행위들을 이야기 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영어판을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에 대해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이 좋고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몇몇 용어가 어색하게 번역된 느낌이 드는데 영어판을 확인해 보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도 훌륭하고 번역도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Taking Nazi Technology - Douglas M. O'reagan 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력은 전후 수십년에 걸쳐 신비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B급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나치의 비밀병기라는 클리셰는 지겹기까지 할 정도죠.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떠했을까요? 더글러스 오레이건(Douglas M. O'reagan)의 Taking Nazi Technology: Allied Exploitation of German Science after the Second World War(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9)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와 직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과학기술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것이 냉전에 끼친 영향을 다루는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독일 과학기술력을 자국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있는 합동정보위원회(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주독일미군정 그리고 미국상부부 등이 독일의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V2 미사일과 제트기로 대표되는 항공 기술은 독일이 우위에 있어 미국이 습득해야 할 기술로 평가되었습니다. 미국 군부는 항공분야의 기술자와 설비를 철저하게 쓸어갔습니다. 예를들어 미국 육군항공대는 독일 항공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풍동시험시설이 미국 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째로 반출했습니다. 군부 뿐만 아니라 보잉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마그네틱 테이프 같이 전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산업기술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대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계에 대한 조사결과 독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전쟁 이전에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항공 기술과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 분야는 미국이 우월하거나, 독일의 기술 발전이 미국에 불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석탄에 기반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일은 석탄을 활용한 기술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미국의 화학공업은 석유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유용하지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석탄을 활용한 인조 고무 생산은 독일 화학 공업의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후 이를 조사한 뒤 독일의 인조 고무 생산 기술은 미국 보다 뒤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일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은 항공우주기술에서 조차 대량생산에 필요한 금속가공 등의 몇몇 공정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력과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 부터 산업 경쟁력 저하로 고심하던 영국은 독일의 기술을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의 군사기술 중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계와 산업계의 평시 이익에 활용할 수 있는"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5년 10월에 보도된 한 언론기사는 독일에서 획득한 과학기술 정보의 가치가 1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에서도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 이전에 기대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자국에게 가치가 없는 독일의 기술이라도 전후 잠재적인 경쟁국이 습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은 미국과 비교적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나 소련에 비하면 제약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은 영국과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했으나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후 배상 차원에서 독일의 산업시설을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프랑스가 포섭할 수 있었던 독일 과학기술자는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포섭된 주류 과학기술자들과 지적 네트워크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군에서는 지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독일 기술진과 연구시설들을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대안으로 독일의 연구소등에 프랑스 유학생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는 동시에 감시역을 맏기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국력의 한계가 있었던 프랑스는 '승전국' 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어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자 오레이건은 프랑스가 독일의 과학기술을 약탈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독일과 협력하는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독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군사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지적으로 도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약탈하는데 있어 프랑스와 동일한 정책을 폈으나 훨씬 효율적이고 큰 규모로 수행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정부가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더 이상의 연구를 진행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서 뒤쳐지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이 소련의 기술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음으로는 전후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기술의 부흥에 끼친 역할입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정책을 취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대전 직후에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독일 과학계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독일 과학계를 서방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 및 산업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패전국인 독일 과학자들은 승전국의 대학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화학 산업계는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뒤쳐져 있었던 석유 기반 화학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과학 네트워크에서 축출합니다. 미국은 경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연구는 대중적으로 과대 평가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 과학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조직한 기구가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통제 수단이 되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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