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육군은 배가 고프다!!!

아랫 글에서 듀푸이 장군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나서…

카터 행정부는 엉망이 된 경제 때문에 국방비 감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터는 국방부가 ‘뻥을 쳐서’ 예산을 뜯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자 당장 국방비를 70억 달러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1) 카터의 국방비 삭감계획에 각 군은 바짝 긴장했고 특히나 육군은 카터가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을 통해 육군의 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카터가 주한미군 전투부대를 철수하라는 행정명령 13호에 서명하는 등 육군을 열받게 하고 있던 1977년 5월, 듀푸이 장군은 미육군전력사령부(FORSCOM)와 미육군교육사령부(TRADOC)의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먼저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육군전력사령부와 유럽주둔미군은 모두 내가 ‘집중성’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희생양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집중성’ 때문에 우리는 비용의 상승과 동시에 에너지의 고갈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중략)

두 번째로 닥치고 있는 것이 비용(문제)입니다.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가 종종 이용하는 랭글리(Langley) 공군기지에는 72대의 F-15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즉 1개 비행단 입니다. F-15 한 대는 1800만 달러나 합니다. 한 대당 1백만 달러인 XM-1 18대를 살 수 있는 돈 입니다. (XM-1) 18대에 72를 곱하면 우리 육군이 유럽에 배치한 전차를 비용으로 환산한 것의 80%가 됩니다. 또한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M113 장갑차 보다 여덟 배 비쌉니다.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마더 만큼 비싸지 않으며 영국군의 보병수송장갑차 만큼 비싸지 않지만 M113 보다는 여덟 배가 비쌉니다. 이것은 보병의 편성과 훈련, 전투에 혁명을 가져올 것 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비용 문제는 우리를 육군에서 이상한 위치에 처하게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육군의 예산으로 모든 부대를 이렇게 값이 비싼 무기로 현대화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무기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입니다.


I want to make two points. One is that all of you in FORSCOM and in USAREUR are about to be the victims of what I would call convergence. Now, by that I mean we are faced with a problem similar to running out of energy with the price going up at the same time.



The second thing coming at you is cost. Here is a rather interesting example. Parked over at Langley Air Force Base, from which we depart from time to time, are 72 F-15 fighter aircraft. That's a wing. Each F-15 costs 18 million dollars - that is equivalent to 18 XM-1 tanks, at a million dollars a copy. If you multiply 72 times 18 you have the value of 80% of all the tanks the Army has in Europe. Also the MICV is 8 times more expensive than the M113 Armored Personnel Carrier. It is not as expensive as the Marder, nor is it as expensive as the new British infantry carrier, but it does cost 8 times more than the M113. It is going to revolutionize infantry organization, training and fighting. If you don't believe that, you haven't seen it.

Cost is putting us into a very peculiar position in the United States Army. It is not at all clear to me that the Army's budget is going to permit us to modernize the whole force with such increasingly expensive equipment.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if you asked me my candid opinion, I would say it will not, so we have to make some very tough decisions about where you are going to put that new equipment and how fast you are going to buy it.

Speech of General William Dupuy(1977. 5. 24), Richard M. Swain(199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228-229


한줄요약 : 육군은 공군새퀴들 처럼 돈 처먹는 하마도 아닌데 절라 억울해염.


1) Dale R. Herspring(2005),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 Military Relation from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p.244

잡담 하나. 원래 M60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자료를 읽다보니 이게 더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잡담 둘. 듀푸이 장군이 상원에 XM-1 개발 비용을 늘려보려고 보낸 편지도 있는데 그것도 좀 재미있습니다.

잡담 셋. 레이건 시절에는 국방예산이 크게 증액되는데 그것도 마냥 좋은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더군요.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아아... 허본좌

예전에 박정희를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유한 농담글을 쓰면서 허경영 총재에 대해서는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평을 바친바 있습니다.

[妄想大百科事典]박정희(朴正熙)

그런데 오늘자 언론 기사들을 보니...

허경영 "마이클 잭슨 영혼, 사망 3일 전 찾아왔었다"

왠지 이 기사는 사실로 믿고 싶습니다.

역시 허총재님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듯 싶습니다. 동류이다 보니 서로 통한게지요.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몇 가지 궁금한 점

지난번에 땜빵 포스팅으로 올렸던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에 달린 답글에 우마왕님이 피드백을 해 주셨습니다.

먼저 제가 쓴 댓글의 경우는 현재 시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냉전 전 기간의 경쟁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궁금한 점 몇가지만 질문 드리려고 합니다.

우마왕님의 지적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우마왕님은 T-62의 115mm포를 언급하시면서 1970년대에 신형 APFSDS탄이 도입된 이유가 서방 각국이 소련 전차포에 대한 열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시는데 미국 쪽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말씀하신 115mm 탑재 T-62가 M60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다는 평가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111이 개발된 것은 1978년으로 알고있는데 이미 1974년에 Dupuy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고 평가한 걸 보면 우마왕님이 쓰신 떡실신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MBT 70의 개발도 소련 기갑의 '숫적우위'를 상쇄할 수 있는 '기술적우위'를 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요?

'떡실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는 어떤게 있을까요? 우마왕님이 쓰신 글을 보면 실제 미국측의 판단 보다는 정황증거로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더 직접적인 자료는 없을까요? 제가 기술적인 문제는 잘 모르니 우마왕님께서 관련된 자료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이 부분도 좀 의문인데 NATO가 전술핵과 공격 헬리콥터를 조합한 방어대책을 거론한 것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기갑 전력의 '숫적 우세'를 '기술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마왕님께서는 나토의 방어전술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요인으로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를 꼽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읽었던 냉전기 서유럽 방어 계획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보면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는 숫적 열세에 비해 부차적 문제였던 것으로 이해가 되어서 말입니다. 작전계획에서도 개별 전차의 성능적 열세를 언급하는 것 보다는 압도적 숫적 열세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 보이더군요.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를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셔먼

일요일에 앉아서 일을 하자니 손에 잘 안잡히더군요. 답답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니 슈피겔에 1952년의 이집트 혁명 기록사진이 아홉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아홉장의 사진 중 두 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집트군의 셔먼이 나와있더군요.

사진=AP

사진=Corbis

얼빵하게 생긴 셔먼의 엉덩이를 보니 뭔가 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미야 M4A1셔먼의 포장을 뜯어서 대충 포탑만 맞춰 봤습니다.


타미야 M4A1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포방패가 두가지로 초기형의 M34도 들어있다는 점 입니다. 셔먼 계열은 대부분 얼빵하게 생겼지만 특히 포방패가 M34인 것은 더 얼빵해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포탑을 대충 맞춰놓고 보니 전에 만들다 만 하비보스의 M4가 생각나더군요. 이것도 포방패를 M34로 했는데 동축기관총 부품이 생긴게 마음에 안들어 잠시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하비보스의 셔먼에는 기관총이 두 종류가 들어 있는데 조립하고 남는 cal.30을 동축기관총으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비보스 M4의 M34 포방패는 구멍이 좁아서 기관총이 잘 안들어가더군요. 사포질을 해서 구멍을 조금 넓혔습니다.


주포와 동축기관총이 같이 움직이도록 대충 붙여놨습니다. 하비보스의 M4는 사놓은 것이 더 있는데 다음에 만들때는 좀 더 그럴싸하게 해 봐야 겠습니다.


대략 비슷한 모양이 나오는 것 같군요. 얼빵한 분위기를 잘 풍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데자뷰? - (5)

BigTrain님 블로그에서 불라바 미사일의 실험 실패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전통을 21세기에도 잘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현재의 러시아가 1930년대의 소련 보다 나은 점은 사보타지 혐의자들이 총살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정도같습니다.

민간인 사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조치

Bundeswehr entschädigt Familie des afghanischen Opfers,(2009. 07. 23) Spiegel

지난 번의 총격 사고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15세 소년 한명이 사망하고 소년의 아버지를 포함해 두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최초 보도에서는 세명 사망이다 두명 사망이다 등등 혼란스러웠는데 최종 확인된 바로는 사망자가 한명에 그쳤군요.

독일 연방군은 소년의 부족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할 것이며 구체적인 보상액수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결정될 모양입니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민간인 사살 사건 당시 독일측은 여성 한 명과 그 자녀 두명의 사망에 대해 2만달러를 지급했는데 이번에는 15세의 소년이라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액수는 비슷할 것 같다는 전망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에서는 노동력이 있는 남성의 가치가 여성과 어린이 보다 높기 때문이라는군요.

민주주의와 미디어의 발전으로 비정규전은 매우 골치가 아파졌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독일군이라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민간인이 한 두명 사살된다 해도 신경을 안 썼을테니 말입니다.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20일의 독일연방군 선서식

독일 연방군은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기념해서 이날 신병 선서식을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올해의 선서식은 연방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으며 메르켈 총리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연방군과 시민들을 보다 가깝게 하자는 취지였다고 하는군요.

한편 선서식이 있던 도중 베를린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요구하는 반전시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10대 초반의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세명이나 사살됐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진 직후이기도 하니 올해 선서식은 꼬였다는 느낌입니다.


Budeswehr-Gelöbnis vor Reichstag(Spiegel)

땅크를 샀습니다

일요일에 주문한 모형이 도착했습니다. 아이 좋아라~♬




티거 초기형은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타미야 제품이 하나 있는데 아직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타미야 물건은 시커먼 503 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고 이번에 산 AFV클럽 티거는 다스라이히 사단 차량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슈툼티거도 꽤 기다리던 물건인데 드디어 하나 구하게 됐습니다. 상자에 초판 한정으로 뭘 넣어줬다고 되어 있군요.


찌메리트 코팅할 때 쓰는 도구로군요. 뭔가 대단한게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AFV 중 하나인 sd.kfz 251 C형입니다.

그리고 보니 타미야의 sd.kfz 251 D형도 국내에 수입이 됐던데 이건 다음에 사면되겠군요.


이 3호전차는 다스라이히 사단 차량으로 만들 티거와 짝을 해주려고 샀습니다. 타미야 3호전차 N형을 만들때 쉬르첸을 달지 않아서 쉬르첸이 남으니 이 물건에 달아볼 생각입니다.

스트레스 받을 때 만지작 거릴 물건이 생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2009년 7월 20일 월요일

독일군,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살

아프가니스탄 주둔 독일군이 검문 중 민간인 두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Bundeswehr tötet Zivilisten
-> 새 기사로 대체되어 링크가 깨졌습니다.

독일 연방군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여섯명의 민간인이 탄 차량이 독일군이 있는 곳으로 고속으로 접근해 왔기 때문에 경고사격을 했으나 멈추지 않아 차량을 직접 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따르면 사망자는 어린이 한 명을 포함해 세 명이라고 합니다.

독일 연방군의 공식 발표가 맞다면 사격을 가한 병사는 교전수칙에 충실했던 것이겠지만 어쨌든 어린이 까지 사살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론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좌파연합의 라퐁텐(Oskar Lafontaine)은 아프가니스탄 파병은 실패이며 즉시 철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ps 1. 새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사살된 게 확인됐다는군요. 첫번째 기사와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독일연방군도 꽤 곤혹스러운 모양입니다.

Deutsche Soldaten töten Jugendlichen

ps 2. 기사가 계속 편집되는군요;;;; 처음 기사는 민간인 사살이 중심이었는데;;;; 정신 없습니다.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 영어판(Crucible of combat) 출간 예정

영국의 군사서적 출판사인 헬리온(Helion&Company Ltd)에서 롤프 힌체(Rolf Hinze)의 저작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를 출간한다고 하는군요. 영어판 제목은 'Crucible of Combat : Germany's Defensive Battles in the Ukraine, 1943-44'입니다.

'Crucible of Combat : Germany's Defensive Battles in the Ukraine, 1943-44'

헬리온에서는 예전에 힌체의 저작인 To the Bitter End :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A, North Ukraine, Centre—Eastern Front, 1944-45(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 Kämpfe der Heeresgruppe Nordukraine/A/Mitte)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힌체의 저작을 계속 내는 것으로 보아 힌체의 나머지 저작들도 출간할 계획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존에 올라온 가격을 보니 정가는 59.95달러로 책정되어 있고 할인가 37.77달러입니다.

저도 몇 번 이야기 했지만 헬리온에서 먼저 출간한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는 동부전선을 다룬 힌체의 저작 중 가장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편 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될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는 작전 위주의 딱딱한 서술이지만 사단급 제대의 작전을 아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는 수작입니다. 전자의 영어판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이라도 이번에 나올 물건은 기대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책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라면 번역 문제입니다. 사실 헬리온에서 먼저 낸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의 경우 영어판을 읽어본 일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크론(Hermann Cron)의 'Imperial German Army 1914-18'의 경우 몇몇 부분에서는 이해가 잘 안되고 문장도 어색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번역자에 따라 다르니 이 책 한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요즘 경제사정이 나빠서 영어판 까지 구입할 생각은 없지만 어떤 물건일지 꽤 궁금하군요.

한줄로 요약 하자면 '강력 추천'입니다.

ps 1. 사실 제 개인적으로 롤프 힌체의 저작 중 최고로 꼽는 것은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와 Das Ostfront-Drama 1944 : Rückzugskampfe Heeresgruppe Mitte등 바그라티온 작전 2부작인데 후자만 영어판이 나와있고 전자는 아직 나와 있지 않습니다. 조금 아쉽습니다.

ps 2.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영어판도 한번 구입해서 대조해 보고 싶긴 한데 가카 취임 이래로 주머니 사정이 나빠져서 그런 호사는 부리지 못하겠습니다;;;;

2009년 7월 18일 토요일

인터넷을 통해 생산되는 정보의 문제점

이 글은 지난 겨울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열었던 특별전시전 “칼, 실용과 상징”에서 판매한 도록에 수록된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의 에세이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도록에 실린 사진들 보다 더 인상적인 글이었는데 특히 인터넷을 통해 생산되는 정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은 많은 분들이 공감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에서 논하는 것은 도검에 대한 인터넷의 부작용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6. 인터넷으로 심화되는 전통 도검에 대한 오류
인터넷이 등장함에 따라 그 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도검에 관한 정보가 공유되고 있고, 애호가들이 결성한 카페 활동에 의해 도검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칼에 관한 활발한 지식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관련 지식이 늘어난 것은 분명히 인터넷의 공이며 인터넷이란 매체가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동호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인터넷의 도검 관련 카페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도검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정보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는 수많은 도검과 나이프 관련 카페들이 있으며 그 중 한 카페의 회원 수는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활성화 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등을 공유하며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카페들의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그 카페들을 접속해보면, 우리 도검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 깊이가 터무니없이 얕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도검에 대해 공부하길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도검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부족함에 갈증을 느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알고자 하는 심도 있는 정보에의 접근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논하고 있는 피상적인 정보조차도 내용의 상당 부분에서 옥석의 구분이 불가하다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아예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오류가 난무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허위정보의 오류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내용을 대중에게 재전파하고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정설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군사유물 등을 다루는 관련 학계나 국공립박물관 계통의 연구에서는 애초 그러한 근거불명의 외부자료를 공식적으로 논문에 인용하는 일이 없으나, 일반인들은 공인된 이론과 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해 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외부에서 난무하는 추측이 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해도 자료의 취합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우, 앞서 말 한대로 추측은 정설로 둔갑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허위의 정보가 일반 상식처럼 통용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번 상식처럼 통용된 그럴 듯한 허위 정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허위 정보를 유포시킨 수고보다 수십배 이상의 노고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아무런 감수와 근거에 대한 점검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그럴듯한 글재주와 문장으로 허위와 진실이 그럴 듯 하게 배합된 글을 연구자나 호사가들이 참조하는 경우엔 문제는 더욱 커진다. 호사가들은 엉뚱한 정보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케 되고, 만에 하나 그런 자료를 연구자가 정식 논문에 인용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연구의 근간부터 흔들리는 사상 누각을 만들게 된다는 치명적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7. 왜곡과 오류의 첨병인 일부 호사가들
인터넷에서 전통도검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고 기본정보를 대중의 저변으로 확대 시키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을 호사가들이다. 학계가 하기 어려운, 즉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이 호사가들의 초반까지 역할은 매우 긍정적인 면이 많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호회나 카페에서 대접을 받는 위치가 되면서부터 이들 중 상당수가 초심을 잃고 대부분 엉뚱한 행동을 한다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에게 추종자가 생기고 그들이 인터넷상의 권력에 맛 들이는 ‘오만’에 중독된 순간부터 자신이 아는 정보의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독선’이 시작된다.

이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공부는 안하면서 인터넷을 뒤져 그럴 듯한 글을 짜집기하고, 어쩌다가 학계의 논문이라도 얻게 되면, 출처조차 밝히지 않은 채 자구만 바꾸어 자신이 쓴 글 처럼 추종자들에게 제공하면서 ‘찬사’를 받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이들은 매우 영리하여 논문을 교묘하게 짜깁고, 자신이 생각나는 대로 창작한 설 까지 그럴듯하게 중간에 첨부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도주로까지 준비하는 지능적인 행태를 보인다. 솔직히 이것은 일종의 범죄인데 아직 학계에서 인터넷을 뒤져 이런 행태에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호사가들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대표적 사례를 예로 들면 1) 타인의 논문이나, 연구내용의 무단 도용하는 것, 2) 무단도용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창작인양 첨삭하여 내용을 왜곡 변형하는 것, 3) 이에 대한 원저작자의 지적이나 항의에 대해서는 절대로 인정치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양, 원본을 접할 수 없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것 등이다. 헌데 이상한 것은 한국의 전통도검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열정으로 시작했던 초심은 사라지고 이들이 이런 오류와 왜곡의 생산자로 변질되는가 하는 점이다.

도데체 이들은 왜 변했을까?

8. 허위 정보의 생산자가 되는 이유
그 근본이유는 학계의 연구활동과 결과가 관심있는 대중에게 공개된 정보로서 직접 연결될 루트가 없다는 것이고, 관심있는 대중들 또한 도검에 대한 궁금증을 공인된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학업에 열중해야 할 학생들과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들은 시간의 문제 때문에 직접적으로 연구기관이나 박물관에 찾아가 자료나 정보를 얻기는 거의 요원한 일이기에 호사가들이 만든 카페나 동호회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직접 얻지 못한 정보를 대신 전달해 주는 이 호사가들에게 도검이란 분야에 대해 인스트럭터나 멘토mentor로서 경의를 표하며 그들이 주는 자료와 정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호사가가 알고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다. 또한 많은 자료의 DB를 보유했다 해도 그 내용의 옥석을 일일이 구분하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니 답을 요구하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알건 모르건 그때부턴 만들어서라도 답을 생산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므로 이미 진실은 관계없이 자신이 설파하는 주장과 내려주는 정보를 갈망하는 추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도검에 대해선 모든 것을 아는 ‘전능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권위에 중독되고 명예의 노예가 된 것이다.

허나 참으로 우스운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명예, 그들이 추종자들에게 내세우는 권위, 추종자들에게 받는다고 믿는 존경 등은 결코 호사가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닌데도 자아도취 속에 빠져버리는 데 있다. 현실과 인터넷을 구분 못하고 자기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호가가들이 애초의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인터넷 권력의 화신이자, 무불통지의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돌변하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이석재, 「무엇이 한국의 칼인가? – 우리 칼의 정체성 인식을 위한 제언」, 『칼, 실용과 상징』, 고려대학교박물관, 2008, 172~174쪽

인터넷 글쓰기의 문제점을 아주 잘 지적했다는 생각입니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런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심하고 항상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 입니다.

Ps 1.capcold님의 블로그 한 켠에 적힌 "I might be wrong, so prove me wrong"라는 문구도 이런 경우에 인용하면 적절할 듯 싶습니다.

Ps 2. 그러므로 Back to the Source 캠페인이 활성화 되어야 겠습니다.

Ps 3. 부록으로 딸린 에세이에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더군요. 없는 살림에 거금 3만5천원을 들여 구입한 도록인 만큼 뽕을 뽑으려 합니다.

2009년 7월 15일 수요일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

계속 땜빵 포스팅입니다;;;;

지난 번에 sonnet님이 슈트라우스 독일 국방장관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M47 전차를 살펴보는 의미심장한(?) 사진을 한 장 올리셨었죠. 슈트라우스의 표정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아래에서 언급한 Trauschweizer의 책을 읽다 보니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신형 M60 전차에 대해 평을 한 것이 실려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독일과 미국은 신형 주력 전차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M60이 제7군에 배치되자 슈트라우스는 이 전차의 결점에 대해 지적했다. 슈트라우스는 소련의 T-10은 M60의 시야에 들어오기 300야드 앞에서 M60을 먼저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측은 슈트라우스가 M60 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전차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신형 전차는 35톤(M60 보다 거의 10톤 가벼운)의 무게에 800마력 엔진, 200마일의 작전반경, 그리고 높이는 2.4미터(M60은 3.2미터)로 낮았으며 시속 45마일 이상의 고속에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대전차화기의 발전으로 중장갑은 약점을 상쇄하는데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속도와 항속거리, 그리고 낮은 높이가 좋은 전차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미 육군 지휘관들은 M60이 소련 전차보다 열등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M60의 105mm 전차포는 운동에너지탄을 사용해 T-54를 2,900미터에서 격파가 가능했지만 소련 전차가 M60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2,70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했다.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165

슈트라우스가 지적한 M60의 단점은 M47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미국 전차의 특징이었습니다. 게다가 M47은 화력도 M60 보다 떨어지니 슈트라우스가 좋게 봤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정말 그 사진에 찍힌 슈트라우스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독일 영토 내에서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딜레마

요즘은 Ingo Trauschweizer의 The Cold War U.S. Army를 읽고 있습니다. 책이 다루는 주된 내용이 냉전기 미육군의 편제와 교리 문제이다 보니 전술핵 사용 문제가 많이 언급되는데 간혹 동맹국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이 책의 125쪽에 실린 1961년 7월 14일 슈트라우스(Franz J. Strauss) 독일 국방장관이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회담했을 때 했다는 발언이 눈길을 끌더군요.

슈트라우스는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에 대해 맥나마라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1평방마일 당 210명의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고 핵무기 공격에도 취약합니다. 핵무기는 전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쟁을 억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기묘하고 이상한 존재가 되겠지요.”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의 독일은 자칫 잘못하면 판돈으로 걸어 놓은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날 각오를 하고서라도 도박을 해야 할 처지였는데 아마 핵무기 사용은 그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도박이었을 것 입니다. 썼다 하면 쪽박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바르샤바 조약군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 그대로 딜데마 중의 딜레마가 아니었을 지.

슈트라우스와 맥나마라의 회담 녹취록은 나중에 한번 입수해 보고 싶습니다.

2009년 7월 14일 화요일

약간의 불만

조폭선생, 일본 극장가 접수


저는 나카마 유키에는 좋습니다만 '고쿠센'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싫습니다.

고쿠센 극장판을 찍는다는 소문이 들릴 때 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뭐, 이렇게 툴툴거리긴 해도 어떻게든 구해서 보긴 하겠죠;;;;

'트릭'의 속편이나 나와줬으면 싶은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고;;;;

한미동맹에 대한 김대중의 시각

하드를 정리하다가 작년 8월 10일의 일요진단 특집에서 복사한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날 일요진단 특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 초정해서 국내외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파일을 찾은 김에 그 부분을 인용해 보죠.

김대중 : 우리는 한미관계건 한일관계건 모든 것은 우리 국익 중심으로 생각해야 됩니다.우리가 국익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군사적으로 안전해야 합니다.

군사적으로 안전하게 우리를 도와줄 나라는 미국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은 아주 중요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미한다는 것은 우리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죠.

그러나 미국만 따라가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하고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국, 러시아, 일본하고도 반드시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4대국 관계를 잘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호체제, 이것을 당분간 하되 머지않아 6자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동북아안보기구가 생길 겁니다.

그러면 남북이 합친 6자 중심으로 안보기구가 생기면 거기에서 4대국도 같이해서 자기들이 의무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협력할 것입니다.그런 것을 내다보면서 당분간은 그런 체제가 올 때까지는 미국하고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나라하고도 좋게 지내야 합니다, 절대 나쁘게 지내면 안 됩니다.그건 우리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요진단(2008.8.10), KBS1

제 개인적인 감상은 생략;;;;

2009년 7월 12일 일요일

당혹감

밥벌이용 원고를 교정하는 중 배가 출출해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라면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밖에는 폭우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군요.

배가 고파 일 할 의욕도 안 나는데 냉장고도 썰렁합니다.

이것 참;;;;


ps1. 이런 날은 뜨끈 뜨끈한 순대국에 술 한잔 해야 하는데 말이죠.

ps2. 이런 날은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도 나름 괜찮습니다.

ps3. 블로그에 쓰려고 계획해둔 글이 몇 건 있는데 본업에 밥벌이도 해야 하다 보니 계속 밀리는 군요. 예고편이라도 때리면 의무감에서라도 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ps4. 밥벌이용으로 하는 일이라도 특성상 아주 재미있는 자료가 많이 굴러들어오는데 '업무상 기밀'이라는 딱지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별로 심각한 내용도 아닌 자료들인데 대외비라니 그것참...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국회도서관

인터넷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 많은데 특히 돈이 있다고 해도 물량이 없는 경우는 꽤 난감합니다.

그런 경우 국회도서관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국회도서관 검색창에 입력하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Jan Glete의 Navies and nations도 괴이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재고를 찿기 힘든 물건인데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도움을 받은 경우입니다. Glete의 다른 저작들은 가격이 황당한 경우는 있어도 인터넷에서 못구하는 수준은 아닌데 요상하게도 Navies and nations는 헌책도 찾기가 어렵더군요.

아마 국회도서관 만큼 납세자를 즐겁게 해 주는 정부기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나를 분노(?!?!)하게 한 것들...

분노(?!?!)할 일이 두 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조조로 본 트랜스포머.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인간들에게 할애해서 거지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주인공의 부모는 뭐하러 출연시킨 것인지.

그리고 악당 두목인 폴른이 부활한 프라임에게 순식간에 썰리는 것도 황당하더군요. 아 이거 너무 허무하잖습니까. 한 5분 이상은 치고 받고 싸워야지.

스트레스 풀려다 스트레스를 몇 배로 더 받았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터미네이터가 이것 보다 훨 나은듯....

화가 치솟아 영화 끝나자 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나오면서 중간 중간 에필로그를 보여주긴 하던데 전혀 당기지 않더군요.

두 번째는 점심에 먹은 버거킹 스태커.

전형적인 사진빨에 속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진에는 매우 큼지막하고 푸짐하게 나와 있는데다 가격도 다른 것 들 보다 비싸서 기대를 하고 주문했는데...

스태커 더블이라고 나온게 롯데리아의 천원짜리 버거들 크기더군요.

게다가 세트로 먹는데 감자가 없습니다!!!!!

아니. 햄버거 세트에 감자가 없다니! 가격은 와퍼세트보다 더 비싼데!

이미 트랜스포머를 보고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는데 버거킹에게 마무리 일격을 받았습니다.

이놈의 버거킹은 늘 속으면서도 새로운 낚시가 나오면 걸리고야 마니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따로 없습니다;;;;;

짜증이 나니 일도 잘 안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