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0일 일요일

아직도 줄기교 신자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몇 주 전 KBS에 있는 아는 분을 만나러 갔을때의 일이다.

KBS 본관 앞에서 황박사 지지자들이 천막을 치고 추적 60분 방송을 위한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다. 천막 앞에는 몇 일을 굶었는지 적어 놓고 있었는데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믿음이 가질 않았다.
혹시 아는가. 밤에 그곳을 덮쳐 보면 떡볶이나 순대를 몰래 먹고 있을런지. 그리고 이런 말을 할 지도 모른다.

"아니 군것질 좀 하면 어떻습니까? 굶을 수 있는 원천기술이 있는데."

그리고 경비도 몇 배로 강화됐다.

만난 분에게 물어보니 황박사 팬들이 방송국으로 난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나. 하여간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오늘.

잠시 종로에 나갔는데 연등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행사준비를 하는 가운데 뭔가 이질적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저들은 줄기교도들이 아닌가!!!

실로 난감했다. 기분좋은 부처님 오신날 행사에 이 무슨 망령된 짓인지!!!

믿음이 지나쳐 도를 넘었는데 그 넘은 수준이 너무 심했다.

아직도 줄기교 신자가 이렇게 많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美利堅史] - 도널드 럼즈펠드 世家 (재탕)

럼즈펠드(Donald H. Rumsfeld)는 일리노이주 사람으로 그의 조부는 덕국사람이라 전한다.

장성하여 프린스턴 서원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그 학문이 깊고 문장이 날카로워 모두가 큰 인물이라 칭찬하였다.

럼즈펠드는 학업을 마치고 수군의 군관이 되었는데 그때가 아이젠하워 2년이다.

아이젠하워 5년, 럼즈펠드는 군역을 마치고 조정에 출사하였다. 럼즈펠드의 인물됨이 강직하고 뜻이 고상하니 많은 사람이 흠모하였다.

케네디 2년, 일리노이 백성들이 럼즈펠드의 덕을 흠모하니 천자가 럼즈펠드를 일리노이 후(侯)에 봉했다.

럼즈펠드는 덕망이 높아 백성들이 우러르니 존슨 황제도 작위를 거듭 내려 그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

닉슨 원년, 천자가 럼즈펠드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의랑(議郞)으로 삼았다.

닉슨 5년, 천자가 럼즈펠드를 구라파 칙사(U.S Ambassador to the NATO)로 삼았다. 럼즈펠드가 칙사가 되어 덕국에 가니 그가 가는 길 마다 많은 덕국인들이 나와 엎드려 인사하였다.

"우리같은 번방에서 천자의 사신이 났으니 이 어찌 아니 기쁘리오?"

이때 닉슨 황제가 부덕하여 승상 포드가 천자가 되었다.

포드황제는 평소 럼즈펠드의 학식과 인품을 흠모하여 즉위하자 럼즈펠드를 상서령(Whitehouse Chief of Staff)으로 삼았다.

럼즈펠드가 상서령이 되던 때 조정에는 간악한 무리가 넘쳤고 무리중에 그릇된 도를 따른 자가 많았다.

키신저는 닉슨 황제 때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키신저가 천자의 성총을 흐려 여러 제후들을 제어하지 못하니 천자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노서아 왕이 심히 교만하여 참람되이 천자의 의복과 수레를 사용하였고 그 언행이 심히 방자하였다.
뜻 있는 신하들이 이를 분하게 여겼으나 오히려 키신저는 노서아왕을 두둔하였다.

"이제 천하가 화평하여 한 가족과 같은데 어찌 노서아를 핍박하려 하는가?"

럼즈펠드는 상서령이 되어 천자의 권위를 세우는데 힘을 다하였다. 키신저는 교만하여 마음대로 백악궁을 드나들며 천자를 알현했다.
럼즈펠드는 키신저가 천자 앞에서 망령된 말을 담을때 마다 꾸짖어 물리치니 키신저가 이를 심히 분하게 여겼다.

포드 2년. 황제가 럼즈펠드를 태위에 임명하였다.

이때 천병은 10년간 남만과 싸워 토벌하지 못하니 그 위세가 꺾여 여러 제후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럼즈펠드는 태위가 되어 군사를 조련하고 각종 병장기를 날카롭게 하니 다시 천병의 위엄이 서게 되었다.

레이건 황제도 럼즈펠드를 중용하여 많은 관직을 내렸다.

레이건 4년, 럼즈펠드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럼즈펠드가 관직에서 물러나니 많은 선비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들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때, 레이건 황제는 군사를 조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다시 천병의 위엄이 천하에 떨쳐지고 제후왕들도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함부로 망동하지 않았다.
드디어 노서아왕 고르바초프도 복속할 뜻을 전하니 천하가 태평하였다.

레이건 8년, 천자가 승상 부시에게 양위했다.

부시 황제도 상황의 뜻을 받아 천자국의 위엄을 세우는 데 힘썼다. 이때 함부로 망동하여 군사를 일으킨 의랍극(依拉克)왕 후세인을 토벌하여 천병의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

그러나 클린턴이 제위에 오르니 다시금 천하가 어지러워 졌다.

클린턴은 품행이 방자하고 음란함이 극에 달하여 궁에서 궁녀를 희롱하고 음탕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작은 오랑캐들이 다시금 준동하니 천하가 어지러웠고 의랍극왕 후세인도 다시금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

럼즈펠드가 수차례 상소를 올려 후세인을 토벌할 것을 간하였으나 천자는 이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한 이때 홍건적 수괴 김정일이 군사의 위용을 자랑하며 방자함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클린턴 황제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하니 다시금 제후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부시 주니어가 제위에 오른 뒤 럼즈펠드를 다시금 태위에 명하였다.

럼즈펠드는 먼저 천자에 간하여 후세인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니 천병뿐 아니라 충순한 영길리 국왕도 군사를 보내었다.

후세인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적했으나 마침내 천병에 사로잡혀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이리하여 홍건적 수괴 김정일도 럼즈펠드를 두려워 하여 함부로 준동을 하지 못하게 되니 다시금 천하가 태평해 졌다.

[美利堅史] - 조지 미드 列傳

장군 미드(George Gordon Meade)는 서반아의 카디즈 태생으로 제임스 메디슨 7년 태어났다고 전한다. 비록 미드는 번방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양친은 천자의 덕이 미치는 미화(美華)의 신민이었다. 미드가 태어나던해 구라파를 병화에 몰아넣은 폭군 나파륜이 폐위되었다.

미드의 부친은 부유한 장사치 였으나 나파륜 전쟁으로 곤궁하게 되었다.

앤드류 잭슨 7년, 미드가 군관이 되어 1년간 군문에 몸을 담았다. 미드는 군관일을 그만 두고 대목(大木)일을 하며 전국을 유랑했다.

존 타일러 2년. 미드는 다시 군관이 되었다.

이후 묵서가(墨西哥) 토벌에도 나갔으나 큰 공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링컨 1년. 남부의 여러 제후들이 제퍼슨 데이비스를 왕으로 추대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도적의 무리 수만이 남부의 여섯주를 휩쓰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때 도적들이 회색 두건을 머리에 썼다 하여 훗날 이를 회건적(灰巾賊) 이라 하였다.

도적의 기세가 등등하매 천자가 사방의 제후에 명을 내려 도적을 토멸하도록 하였다. 이때 미드도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회건적의 수괴 데이비스는 로버트 리를 대장군에 임명했는데 그 계략이 하늘에 닫고 계교가 교활하매 매번 싸움에 천병의 위세가 꺾였다. 도적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남부 15개 주에 도적의 깃발이 휘날렸다.

링컨 3년 6월 28일. 장군 후커의 인물됨이 용렬하여 미드가 포토맥 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링컨 3년 6월. 괴수(魁首) 로버트 리가 장군 롱스트리트, 이월, A. P. 힐과 군사 7만5천을 거느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북진하던 도적들은 게티스버그 읍 근교에서 거기장군 레이놀드의 군사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정오가 되자 리가 거느리는 중군(中軍)이 도착했다. 리는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했나 미드의 군사가 용기백배하여 굳건히 버티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군 롱스트리트가 리에게 간하였다.

"대장군. 우리의 형세가 불리한 듯 하니 공격을 멈추소서."

리는 롱스트리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처음 이틀동안의 싸움에서 천병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굳건히 지키고 물러나지 아니하니 도적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괴수 리는 미드의 중군을 쳐서 한번에 싸움을 결정지으려 했다.

리가 롱스트리트 휘하의 중랑장 페티그루, 트림블, 피켓, 앤더슨에게 군사 1만을 주며 명하였다.

"그대들은 핸콕이 거느린 중군을 격파하라."

도적 1만이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핸콕의 군사들이 기운을 내어 함성을 지르며 각종 총통을 발사하니 꺼꾸러지는 도적의 무리가 셀수 없이 많았다. 헤이, 깁슨과 여러 장수들이 몸소 육혈포를 쏘며 군졸들을 격려하니 조금도 천병의 기세가 꺾이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도적들의 기세가 꺾이여 앞다투어 도망치니 이로써 북부의 여러 주가 도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아즈텍의 전쟁수행 양식과 보급문제(삼탕!)

제목은 거창하나 내용은 어린양 블로그의 다른 글들이 다 그렇듯 별 거 없다.

몇 년 전에 Center for Hellenic Studies에서 나온 War and Society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s라는 책을 얼떨결에 구하게 된 일이 있었다. 고대사쪽은 거의 아는게 없는지라 내가 왜 이 책을 가지게 됐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인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꽤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각 문화권 별로 여러개의 짧은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Ross Hassig가 쓴 14장의 아즈텍 문화권의 전쟁이다.

Ross Hassig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전쟁 수행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잘 발달된 도로망의 부재(대 도시를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쓸만한 도로가 없었다고 한다)와 적절한 수송수단의 부재였다고 한다. 특히 도시간의 전쟁에서 이런 문제점은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고 한다.

아즈텍 군대의 기본 단위는 대략 8,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구성된 xiquipilli라고 하는데 말이 없었으므로 전 병력은 보병이었고 행군 속도가 지독히 느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Hassig는 하나의 xiquipilli가 하룻 동안 이동할 수 있는 최대의 거리가 19km정도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사정이 열악해서 행군 대형은 쓸데 없이 길었다고 하는데 한개의 xiquipilli가 행군하면 부대 선두의 사제 부터 제일 후위의 병사까지의 길이가 대충 12km 정도 됐다고 한다.

※ 참고로, John Haldon의 저서에 따르면 도로망이 비교적 양호한 9세기경 비잔티움 군대의 경우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으로 편성된 부대의 행군 대형은 14km였다. 여기서 본대 보다 2~3km 앞서서 나가는 정찰대와 역시 본대 보다 2~3km 뒤에서 따라오는 후위 부대가 차지하는 거리를 빼면 실제 행군 대형은 8~9km 정도다.

문제는 8,000명 정도의 대 병력이 이동하면서 보급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보급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보급품은 병사 개개인이 가지고 다녀야 했고 무게와 부피가 많이 나가는 식량은 병사 한명당 한명의 짐꾼(tlamemes)이 배속되었다고 한다. 보통 짐꾼 한명이 23~25kg정도의 식량을 지고 행군했는데 이건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병사 두명과 짐꾼 한 명이 8일 정도 먹는 분량이었다.
결국 아즈텍의 도시 하나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 경우 최대 작전 가능 범위는 대략 65~70km정도였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Hassig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3일간 행군한 뒤 하루 싸우고 하루 쉰 뒤 3일간 행군해서 돌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황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행군로 상의 도시들에게 사전에 식량과 보급품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도시들 보다는 작전 가능한 범위가 좀 더 넓었다고 한다.

※덤으로 Hassig의 설명에 따르면 아즈텍의 전쟁에서 "기습"이란 요소는 별로 달성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한 도시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에서 소집 명령을 내리고 소집 명령이 내려지면 calpoleque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대표가 자신의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아 온 뒤 숫자가 차면 행군을 시작했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행군 속도가 지독하게 느려서 군대가 출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상대방이 전쟁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뭐, 아즈텍의 전쟁은 종교 행사적인 성격이 되려 강했다고 하니 기습같은건 애시당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美理堅史] - 平和王 문선명 世家

문선명은 본시 한국 사람으로 우드로 윌슨 8년 태어났다.

문선명은 어려서부터 천주를 섬겨 그 믿음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트루먼 원년 8월, 노서아(露西亞)왕 스탈린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왜국을 토벌했다. 이에 천자가 스탈린의 노고를 위로하며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노서아는 사교가 성행한 나라로 그 왕 스탈린도 본시 홍건적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노서아 군사와 함께 홍건적이 들어왔는데 홍건적의 수령 김일성은 노서아 왕의 위세를 빌어 천주를 섬기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이때 문선명도 도적들에 잡혀 노역을 하게 됐는데 도적들이 핍박할 때 마다 천주의 은혜를 입어 터럭하나 다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도적들이 문선명을 핍박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해를 입히지 못하니 크게 두려워 하며 말하였다.

"이자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다!"

트루먼 6년, 한국의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이때 문선명은 천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트루먼 7년, 문선명이 천주를 영접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선명은 반공(反共)의 큰이치를 깨달아 도를 닦는 근본으로 삼았다.

아이젠하워 2년, 문선명이 서울에서 통일교회를 만들고 전도하매 소인배들의 핍박을 받았다. 한국에서 천주를 섬긴다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하나같이 어리석어 그 도의 심오함을 열에 하나도 깨치지 못하였다.

문선명은 어리석은 자들을 깨쳐 반공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힘썼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크게 한탄하였다.

"하늘아래 내 뜻이 받아질 곳이 어디인가!"

마침내 한국같은 번방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천자국에 나아가기를 소망하였다.

존슨 3년, 문선명이 식솔을 이끌고 미리견에 도착했다.

이때 미리견은 백성들의 믿음이 박하여 천주를 섬기는 아름다운 기풍이 사라져가고 음란한 풍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어리석은 백성가운데 사교에 빠져 마르크스, 레닌 등 잡스런 귀신을 섬기는 자도 나타났다.

문선명이 이를 보고 크게 한탄하며 땅에 떨어진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문선명이 힘을 다하여 반공의 이치를 강론하고 미풍양속을 일으킬 것을 권하니 갈수록 그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닉슨 황제가 문선명의 선행을 듣고 백악궁으로 불러 반공의 이치와 인의예지에 대해 물었는데 선명이 대답함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문선명의 고상함에 탄복하였다.

"아. 짐이 어리석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었는데 이제 선생을 만나 반공의 이치를 깨치니 답답한 가슴이 후련하오!"

이에 문선명이 여러 제후와 대소신료들에게 도를 강론하게 되었다. 많은 제후들이 문선명에게 감복하여 마음으로 우러르게 되었다. 천자가 문선명을 "평화왕(King of the Peace)"에 봉하니 마침내 문선명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닉슨 이후 여러 천자들이 문선명의 지혜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니 레이건, 상황(上皇) 부시 시니어 등이 그러하였다.

2006년 4월 27일 목요일

아이스 에이지 2 - 재미있긴 한데 뭔가 허전...

원래 극장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스에이지2를 보게 됐다.

1편이 제법 웃겼기 때문에 이번에도 확실하게 웃겨주겠거니 하는 기대는 해 봤다.

영화 자체는 적당히 웃겼지만 좀 밋밋한 감이 많았다. 뭔가 심심한 찌개를 먹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관객들도 웃기는 장면에서는 아주 재미있어 했지만 전반적으로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슈렉 이후 3D 애니메이션들이 독창적인 요소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기 보다는 기존에 익숙한 영상물, 주로 영화의 패러디에 집착한다는 느낌이 많았는데 아이스에이지2도 그런 식상한 관행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아주 아쉬운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2편은 1편에 비해 패러디의 요소가 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먼저 지금 기억나는 것을 두 개 꼽아 보자면,

1. 시작할 때 빙벽을 오르는 다람쥐는 거의 확실히 미션임파서블2의 첫 장면을 패러디 한 것으로 보이고,

2. 열기가 분출되는 지역을 돌파하는 장면은 라이언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비치를 패러디 했다. 증기가 터져나오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몽롱해 하는 맘모스의 반응을 눈여겨 보시라.
제법 웃기긴 했지만 진부한 내용이란 점에서 마이너스다.
어쨌건 즐겁게 봤으니 흉보기는 싫은 에니메이션이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Conan the Barbarian

나는 근육 덩어리 백인들이 날뛰는 판타지물을 매우 싫어한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니므로.

그렇지만 예외도 있는데 바로 우리의 아놀드옹이 출연하신 Conan the Barbarian이다.

뭐. 특별히 이걸 좋아하는 이유는 없다. 아놀드 옹이 출연하시고 피를 많이 튀기고 이야기 구성이 단순하다는 점. 아. 물론 Basil Poledorius의 멋진 음악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전형적인 복수담이다.

산골짜기 눈많은 동네에서 대장간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코난은 툴사 둠이라는 사이비 종교지도자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부모를 잃고 노예로 끌려갔다가 칼질을 배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맙소사.

그러나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 단순한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칼질은 힘과 피가 넘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툴사 둠의 기병들과 벌이는 처절한 전투는 요즘 시각에서 보면 좀 2% 부족한 느낌이 들 수 도 있지만 매 장면마다 힘이 넘치고 피도 많이 흐른다!
도끼로 기병들의 몸통을 찍어버리는 아놀드 옹의 우람찬 팔뚝근육을 보면 아드레날린이 펄펄 끓게 된다. 오오오!!

예전에 정우성이 나온 "무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을 때 전투장면이 너무 스케일이 작다고 툴툴거린 멍청이들이 많았는데 훌륭한 액션 장면은 단순히 물량으로만 밀어붙인다고 나오는게 아니다.
그렇게 스케일이 중요하다면 엑스트라가 넘치는 중국 영화나 드라마의 액션이 왜그리도 힘이 없는지 설명이 불가능 하다.
중요한건 크기가 아니라 연출하는 능력이고 그 점에서 감독 John Milius는 하이라이트의 전투장면을 훌륭하게 잘 만들어냈다.
대략 20여기 정도에 불과한 기병이지만 이들이 돌격해 올때의 박진감은 쓸데없이 머리수만 채운 어떤 중국영화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박력이 넘치는 장면이다. 쓸데없이 머리수만 채운다고 멋진 장면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은 백만번을 환생해도 만들수 없을 장면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좋은 점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세명 나온다는 것이다.

먼저 두말할 필요없는 아놀드옹.

그리고 두번째는 다스베이더 목소리의 James earl Johns.

마지막으로 세번째가 Max von Sydou다.
Max von Sydou는 요즘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데 T-X와 덩치 좋은 독일 배우가 출연하는 니벨룽의 반지에도 대장장이로 나왔다.

James Earl John는 역시 목소리가 박력넘치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놀드 옹의 Denglish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약간 유감이다.

이번에 국내에 출시된 SE 버전을 샀는데 아주 쓸만한 다큐멘터리가 같이 들어있어 좋았다. 재미있는게 DVD 판은 기존에 국내 출시판에서 삭제됐던 푸줏간의 사람고기 장면이 그대로 실려있다. 흠.

※ 지금 별로 마음에 안드는 하이네켄 한병과 프링글스를 까먹으며 글을 쓰고 있다. 하이네켄은 내가 싫어하는 소주병 같이 생겨 별로지만 그럭 저럭 먹어줄 만은 하다.
내일은 퇴근하는대로 이마트 가서 보드카나 사야겠다.

[美利堅史] - 남가주공 아놀드 슈워제네거 世家 (재탕)

남가주공 아놀드는 오태리의 광대출신으로 부친은 덕국의 병졸 출신인 한미한 집안이었다.

아놀드가 오태리의 병졸로 병거를 몰던때 뭇 군졸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필히 천자국의 제후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리라."

뭇 군졸들이 아놀드를 비웃었다.

"네 어찌 한갖 군졸로 허황된 언사를 내뱉는고?"

아놀드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 어찌 홍작이 대붕의 뜻을 알리요?"

아놀드는 천하장사로 오태리와 구라파에서 그 이름이 드높았다.

닉슨 2년, 아놀드가 미리견에서 광대일을 시작했다. 아놀드가 "신약극의 헤라클레스"라는 활동사진에 처음 나오매 미리견인들이 아놀드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저자의 말함이 영어같기는 하나 사뭇 다르도다!"

그러나 아놀드가 광대일에 매진하매 마침내 뭇 사람들이 그의 성실함을 인정하였다.
레이건 4년, 아놀드가 "종결자(Terminator)"라는 활동사진에 나와 이름을 떨치매 장안의 학동들도 아놀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놀드가 종결자에 나오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꼭두쇠가 꿈을 꾸니 백골형상을 한 쇳덩이가 불길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꿈이로다."
카메론이 이를 활동사진으로 만들려 하매 아놀드에게 글을 보냈다. 아놀드의 지인들이 이르길
"이 활동사진의 대본을 보니 종결자란 인물은 대사가 거의 없네. 자네의 영어가 어눌하나 종결자를 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일세"
이에 아놀드가 종결자에 나와 명성을 얻었다.

레이건 6년, 아놀드가 케네디 황제의 질녀 마리아 슈라이버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처음 아놀드가 마리아와 교제를 시작하매 문중의 반대가 심하였다.

"아놀드는 한갖 오태리 출신의 광대가 아닌가? 천자의 집안에 가당치 않으니 매우 부끄럽도다."

그러나 아놀드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그 뜻이 고상하여 마리아의 어머니 유니스 슈라이버 공주가 감탄하였다.

"비록 그 출신이 미천하나 그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니 가히 내 사위가 될만 하도다."

아놀드는 광대일에 매진하매 갈수록 그 이름이 높아갔다.

그러나 아놀드는 항상 마음속의 큰 뜻을 버리지 않고 품고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태리 출신의 광대로 한때 아놀드와 시정에서 어울리던 자 였는데 항시 아놀드를 시기하여 모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스탤론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놀드는 외방의 광대가 아니던가? 한갖 광대가 감히 제후를 논하니 가당치도 않도다."
조지 W 부시 3년, 아놀드가 남가주 공에 선출되었다. 남가주공의 실정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매 드디어 아놀드는 뜻을 밝혔다.

"남가주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으니 어찌 내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리요?"

아놀드가 뜻을 밝히매 마리아 부인이 간하였다.

"소첩 비록 정치와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나 공의 뜻이 이러할진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유니스 공주도 감복하였다.

"과연 아놀드다. 그 뜻이 이리도 크니 내 사위로 부끄럽지 않도다."

아놀드가 남가주공이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매 소인배들의 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아놀드는 아직도 영어를 못하는데 남가주공이 가당하겠는가?"

그러나 백성들은 아놀드의 고상한 뜻을 흠모하여 그를 남가주공에 추대하였다.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Sunday Bloody Sunday

몇 주 전인가... 친한 인간 몇 명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U2의 With or without you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친구가 말하길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길 들으며 "허헛. 역시 U2로구만."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도 U2를 좋아하고 With or without you가 정말 죽여주게 끝내주는 곡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U2의 최고 걸작은 바로 Sunday Bloody Sunday다.

이 곡은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972년 1월 30일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의 Derry에서 13명의 아일랜드 민간인을 살해한 Bloody Sunday를 소재로 한 노래다. 하기사. 1월 30일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 영화까지 있지 않던가.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처음 듣자마자 가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렬한 충격이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그 노래가 U2의 Sunday Bloody Sunday라는 걸 알고 가사를 구해서 해석을 해 봤다.
물론 그땐 1월 30일 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왜 이리 가사가 심각한지는 몰랐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서 이것 저것 쑤셔보다가 1월 30일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됐고 그제서야 왜 이 노래가 이렇게 심각한지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매우 싫어하긴 하지만 이 노래는 예외로 쳐 주기로 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정치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요즘도 마찬가지다.)

오늘 길을 가다 보니 라디오에서 또 이 노래가 나왔다. 언제 들어도 멋진 곡이다.

Yes
I can’t believe the news today
Oh, I can’t close my eyes and make it go awayHow long...
How long must we sing this song?
How long? how long...’cause tonight...we can be as one
Tonight...Broken bottles under children’s feet
Bodies strewn across the dead end street
But I won’t heed the battle call
It puts my back upPuts my back up against the wall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allright lets go!)

And the battle’s just begun
There’s many lost, but tell me who has won
The trench is dug within our hearts
And mothers, children, brothers, sisters torn apart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How long...
How long must we sing this song?
How long? how long...’cause tonight...we can be as one
Tonight...Tonight...
Sunday, bloody sunday (tonight)
TonightSunday, bloody sunday (tonight)(come get some!)

Wipe the tears from your eyes
Wipe your tears away
Wipe your tears away
I wipe your tears away(sunday, bloody sunday)
I wipe your blood shot eyes(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here I come!)

And it’s true we are immune
When fact is fiction and tv reality
And today the millions cry
We eat and drink while tomorrow they die
The real battle yet begun (sunday, bloody sunday)
To claim the victory jesus won (sunday, bloody sunday)
On...Sunday bloody sundaySunday bloody sunday...

괴이한 사극 열풍

어제 한국일보를 읽어보니 '사극열풍'에 대해 두면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웃겻던 사진은 연개소문이 '안시성' 현판이 걸린 성벽위에서 폼잡고 서있는 모습과 MBC 드라마 '주몽'이라는 데 출연하는 여자가 소서노 랍시고 채찍(?)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 두 장 이었습니다.

뭐, SBS 제작진은 안시성에 안시성이라고 간판을 달아줘야 시청자들이 안시성이라고 믿을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지인의 표현을 도용하자면 "북한산성엔 북한산성이라고 현판 달아놨냐?" 입니다. 하여간 웃기는 일이죠.

소서노는 긍정적인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Historical SM movie를 지향하는 듯 하군요. 소서노의 의상이 좀더 야시시 했다면 제가 기꺼이 그 채찍(?)에 맞아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찝찝한 것은 이 사극열풍이란 걸 타고 만들어지는 사극이라는 것들이 지나치게 허우대를 잡기위해 노력하는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당장 주몽이나 연개소문을 보니 어떻게든 요란하고 화려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 처럼 생각됩니다. 괴이한 주인공들의 의상(주몽), 과장된 갑옷 장식(연개소문의 고구려 투구) 등등...
뭐, 말로는 거창하게 동북공정에 대항하자는 취지를 내세우는데 제가 보기엔 작년 '불멸의 이순신'이 재미를 보니까 사극에서 활로를 찿으려는 노력으로 보이더군요.

그리고 제작비는 뭐 하는데 그렇게 들어가는지...

물론 아직 방송도 되지않은 드라마를 가지고 왈가 왈부 하는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홍보용으로 내놓은 자료들을 보니 기대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물건을 내 놓는게 훨씬 더 참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블로거를 조금 사용해 보니...

아직은 블로거의 기능들을 제대로 파악 못 했습니다.

사실 컴퓨터를 잘 하는 편도 아니라서 아직 템플릿은 만들어진 것을 그냥 가져다 쓰는 수준이죠. 어쨌거나 대략 살펴 보니 글 위주로 블로그를 운영해야 될 듯 싶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도 화려한 걸 싫어하고 만들 감각도 없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재미없고 영양가도 떨어지는 글들로 가득찰 블로그가 될 듯 싶지만 들러주시는 모든 분들과 즐거운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린양 사진 하나...






프로필에 사용할 예정...

2006년 4월 18일 화요일

길잃은 어린양의 세번째 놀이터

처음에 네이버 블로그, 두번째로 이글루 얼음집, 결국 세번째 놀이터를 열었습니다.

아직 손볼것이 많이 남았지만 어쨌건 세번째 놀이터는 잘 돌아가길 바랄 뿐 입니다.일단은 별 영양가 없는 글로 도배질을 할 계획입니다.

일단 모양새는 만들어 놔야 겠죠.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