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독일 기갑부대의 장비문제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복잡해 진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상태가 좋지 않는 군대라면 어느 군대건 겪는 일 입니다. 비슷한 예로 1941년 여름-겨울의 붉은군대를 보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복잡한 부대의 편성과 재편을 거친데다 전쟁 발발 이후 전멸과 재편성을 수 차례씩 반복하면서 그야말로 정신 없는 편제를 보여주지요. 하지만 1941년의 소련군의 장비는 T-26이나 BT 계열 같은 여러 모로 모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내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같은 문제를 겪은 전쟁말기의 독일군에 비하면 ‘국내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쟁 말기 많은 기갑부대가 중구난방으로 장비를 보충받다 보니 전차에서 돌격포로다운그레이드 되는 반면 또 어떤 부대는 난리통에 장비가 업그레이드(!)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1944년~1945년의 재편성 과정에서 장비가 오히려 좋아진 부대 중 하나인 독일육군 제 25기갑척탄병 사단 소속 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943년 6월 23일 제 25차량화보병사단을 개칭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사단은 1942년 하계전역 당시 남부전선에 투입된 차량화보병사단들과 달리 기갑대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된 뒤에도 한동안은 이렇다 할 기갑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단에 배속될 기갑대대가 편성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멸한 제 5기갑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잔존 병력을 근간으로 한 제 5기갑대대였습니다.
이 제 5기갑대대의 편성 명령은 1943년 8월 25일에 내려졌으며 부대 주둔지는 노이루핀(Neuruppin) 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대대의 대대장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베테랑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2중대장을 지냈던 레테마이어(Josef Rettemeier) 대위가 임명되었습니다. 대대의 기갑장비는 1943년 6월 20일자 K. St. N 1157(본부중대 통신소대), 1159(전차중대)에 따라 3대의 3호 지휘전차와 42대의 돌격포였습니다. 5기갑대대가 소속될 25기갑척탄병 사단은 동부전선의 중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월 초 까지 장비배치와 훈련을 마친 대대는 10월 10일부터 15일에 걸쳐 열차에 분승, 10월 20일에 대대의 선발대가 오르샤에 도착합니다.
25기갑척탄병 사단은 제 78돌격사단과 함께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구간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련군이 공격을 집중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10월 하순까지 독일측이 ‘고속도로 전투(Autobahnschlacht)’라고 부르는 두 차례의 격전이 있었으며 5기갑대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14일 제 3차 고속도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사단 예비대로 있던 제 5기갑대대는 119 차량화척탄병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소련군 전차부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이 전투의 전공으로 대대장인 레테마이어 대위는 1943년 12월 5일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소련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개시해 제 4차 고속도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12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8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소련군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합니다. 1943-1944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지구는 우크라이나의 해방에 가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이 중부지구 또한 겨울 내내 치열한 격전이 계속됐습니다. 치열한 전투 덕분에(?) 레테마이어 대위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지 석 달 뒤인 1944년 3월 6일에 백엽기사십자훈장 수여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봄부터 여름까지 장비 보충이 이뤄져 이미 5월 말 전차대대는 돌격포 45대를 갖춰 완편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겨울은 무사히 지나갔는데 문제는 아주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붉은군대의 1944년 하계대공세, ‘바그라티온’작전이 바로 중부지구에 가해질 예정이었고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소련군의 주공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죠. 제 78돌격사단과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이 방어하는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 구간에는 소련 제 11근위군과 31군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의 저항은 완강해서 6월 25일까지도 31군의 진격은 신통 찮았다고 합니다만… 다른 사단의 방어구역이 줄줄이 돌파 당했기 때문에 25기갑척탄병 사단은 후퇴 중 민스크 근교의 포위망에서 전멸당합니다. 물론 이때 5전차대대도 모든 장비를 잃고 전멸했고 대대장 레테마이어 대위는 포로가 됐습니다. 5전차대대에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대 정비중대와 약간의 부상병 정도였습니다.
※포로가 된 레테마이어 대위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귀국할 수 있었고 1997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하는 군요
어쨌든 이렇게 1943년에 돌격포를 장비했던 제 5기갑대대는 전멸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전멸한 많은 부대들이 그렇듯 재편성됩니다. 재편성된 제 5기갑대대의 모체는 1944년 여름에 어수선하게 편성된 독립기갑여단 중 하나인 107 기갑여단의 2107 기갑대대였습니다. 편성 직후 네덜란드로 투입돼 영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이 여단은 11월 8일/9일에 걸쳐 전선에서 물러나 바움홀더(Baumholder) 훈련장으로 이동 이곳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Kampfgruppe 25. Panzergrenadierdivision)으로 개편됩니다. 이렇게 원래 판터를 장비하고 있던 기갑대대의 잔존 장비와 병력으로 편성된 덕분에(?) 새로운 5기갑대대는 비록 몇 대 안 되지만 판터를 장비하게 됩니다.(얼쑤 조쿠나! 득템이다!) 하지만 말만 좋아 재편성이고 실제로는 잠시 휴식을 취한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1월 18일에 재편된(이름만 바뀐)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알자스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보유한 기갑차량은 7대의 판터와 4대의 구축전차였다고 합니다. 전선으로 나간 이후 약간의 기갑차량 보충이 있어서 12월 중순에는 11대의 판터와 6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게 됩니다. 재편성 당시 근간이 됐던 2107기갑대대가 판터를 장비한 부대였기 때문에 신편성 5기갑대대는 계속해서 판터를 보충 받게 됩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11월 말부터 12월 까지 자르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로 작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월 1일자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다시 25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됩니다. 개편될 당시 5기갑대대는 25대의 판터와 10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단 전차엽병대대가 돌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Bernd Hartmann의 부대사에는 1월 1일 사단이 개편되면서 5전차대대도 돌격포로 장비를 교체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저작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봐서 오류 같습니다) 개편 직후 알자스에서 북풍(Nordwind) 작전에 투입됩니다. 북풍 작전에서 5기갑대대는 대대장 아른트(Kurt Arndt) 대위가 전사하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북풍작전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면서 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은 21기갑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에 투입됩니다.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 초반에 25기갑척탄병사단은 붉은군대의 제5충격군 예하 소총병 사단을 상대로 반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25기갑척탄병사단이 예비대로 돌려지면서 5기갑대대도 다시 병력과 장비 보충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작전 직전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현황은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티케에 따르면 1945년 4월 7일 당시 5기갑대대는 가동 가능한 4호 전차 1대, 판터 28대, 4호 구축전차 6대, 대공전차 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수리 중인 판터 6대와 4호 구축전차 3대가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역시 Bernd Hartmann의 부대사는 티케와 상충된 진술을 하고 있는데 다른 서적들과 교차 검증해 보면 티케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상충된 주장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를린 전투가 시작된 뒤 25기갑척탄병사단은 브리첸(Wriezen) 방면의 반격에 투입되어 전투 초반에 전투력의 상당수를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25기갑척탄병사단은 서쪽으로의 탈출에 성공해 5월 3일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5기갑대대는 전쟁 중 두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서적
Tony Le Tissier, Durchbruch an der Oder : Der Vormarsch der Roten Armee 1945, (Bechtermünz Verlag, 1997)
Bernd Hartmann, Geschich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 1943-1945, (Selbstverlag, 2002)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 2, (Schiffer, 1996)
Soviet General Staff, Belorussia 1944, (Frank Cass, 2001)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 (Motorbuch Verlag, 1992)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벼락치기 이탈리아 구경 - 밀라노, 베네치아
툰 기갑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베른 중앙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로 넘어갈 차례가 됐으니까요.
일단 밀라노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생긴것도 별로에 맛도 별로더군요.
맛없는 피자를 뱃속에 집어 넣은 뒤 밀라노로 가는 CIS를 탔습니다. 그런데 멋진 ICE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CIS는 뭔가 좀 모자라 보이더군요.
밀라노에 도착하고 바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방값은 비쌌는데 과연 관광객의 등골을 빼먹는 이탈리아다 싶었습니다.
대충 씻은 뒤 김윤진이 이탈리아말로 떠드는 로스트 시즌 2를 보고 잤습니다.
이놈이 지난 밤에 잤던 호텔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에 중앙역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맑은 날씨에 보니 꽤 멋진 건물이더군요. 시설이 허접한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길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걸으면서 계속해서 독일과 비교를 하게 되더군요. 일단 알아보기 어렵게 붙여 놓은 도로표지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텔에서 대충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두오모 성당이 나왔습니다.
1차 목적지 도착!
그리고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크. 역시 먹는것 하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만세!
승리의 이탈리아! 승리의 이탈리아!
식사를 하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비둘기 모이를 강매하는 파키스탄인(?)만 제외하면 즐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San Lorenzo 성당으로 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중이어서 그 멋지다는 교회의 모자이크를 구경하지 못 했습니다. 책자의 설명으로는 370년 경에 처음 건립되었고 16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모자이크도 만들어 졌다는데 이거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정말 아쉽더군요.
아래 사진은 교회 쪽에서 밖을 보고 찍은 것인데 앞에 있는 돌 기둥들이 제가 밀라노에서 본 유일한 로마시대 유적이었습니다. 이 돌기둥 들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San Lorenzo 성당 다음에는 Sant'Eustorgio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 성당은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르바로사가 밀라노를 털때 성당의 성물인 동방박사의 유골을 탈취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실제고 그게 동방박사의 유골일 리는 없었겠지만 종교란게 다 그렇죠...
Sant'Eustorgio 성당을 구경한 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원래 계획에서는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하려 했는데 중간에 아르덴느 구경을 한 번 한 덕분에 멋진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단 하룻동안 '발가락'만 담그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귀국 한 뒤 이탈리아만 3개월 여행했다는 분을 만나서 아주 부러워 하기도 했지요.
왠지 반가운 화교 상점
중간에 어떤 중고차 가게에서는 재미있는 아이템을 하나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 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으로 갔습니다. 음. 역시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줌마들로 득시글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 앉아서 쉰 다음에 구경했습니다. 크... 그런데 이 어린양은 미적 감각이 제로여서 그런지 막상 유명한 물건을 구경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더군요;;;
마지막으로는 Sforzesco성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 멋진 건물은 정말 "밖에서 살짝"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르덴느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구경을 하루 줄인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생각해 보니 애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걸어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물론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해서 전에 예약해 놓은 야간열차를 확인한 뒤 바로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에 타니 자리가 없어서 베네치아 까지 꼼짝없이 서서 가나 싶었는데 어떤 친절한 승무원이 빈 좌석이 많은 객차를 알려줬습니다. 아아. 이탈리아 만세!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역의 물품 보관소는 그야말로 날강도 들이더군요. 시간 단위로 돈을 받아 먹는건 둘째 치고 그야 말로 살인적은 요금이었습니다. 1~2유로면 하루를 맡길수 있는 독일의 무인보관함이 한없이 그리워 졌습니다.
물품보관소에서 삥을 뜯긴뒤(?) 두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으니 시내 구경이라 하기도 민망했습니다만...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식당 한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마자 물품보관소의 불친절과 바가지에 대한 반감은 싹 사라지고 이탈리아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일단 밀라노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생긴것도 별로에 맛도 별로더군요.
맛없는 피자를 뱃속에 집어 넣은 뒤 밀라노로 가는 CIS를 탔습니다. 그런데 멋진 ICE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CIS는 뭔가 좀 모자라 보이더군요.
밀라노에 도착하고 바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방값은 비쌌는데 과연 관광객의 등골을 빼먹는 이탈리아다 싶었습니다.
대충 씻은 뒤 김윤진이 이탈리아말로 떠드는 로스트 시즌 2를 보고 잤습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에 중앙역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맑은 날씨에 보니 꽤 멋진 건물이더군요. 시설이 허접한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길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걸으면서 계속해서 독일과 비교를 하게 되더군요. 일단 알아보기 어렵게 붙여 놓은 도로표지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텔에서 대충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두오모 성당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크. 역시 먹는것 하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만세!
식사를 하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비둘기 모이를 강매하는 파키스탄인(?)만 제외하면 즐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San Lorenzo 성당으로 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중이어서 그 멋지다는 교회의 모자이크를 구경하지 못 했습니다. 책자의 설명으로는 370년 경에 처음 건립되었고 16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모자이크도 만들어 졌다는데 이거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정말 아쉽더군요.
아래 사진은 교회 쪽에서 밖을 보고 찍은 것인데 앞에 있는 돌 기둥들이 제가 밀라노에서 본 유일한 로마시대 유적이었습니다. 이 돌기둥 들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San Lorenzo 성당 다음에는 Sant'Eustorgio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 성당은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르바로사가 밀라노를 털때 성당의 성물인 동방박사의 유골을 탈취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실제고 그게 동방박사의 유골일 리는 없었겠지만 종교란게 다 그렇죠...
Sant'Eustorgio 성당을 구경한 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원래 계획에서는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하려 했는데 중간에 아르덴느 구경을 한 번 한 덕분에 멋진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단 하룻동안 '발가락'만 담그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귀국 한 뒤 이탈리아만 3개월 여행했다는 분을 만나서 아주 부러워 하기도 했지요.
중간에 어떤 중고차 가게에서는 재미있는 아이템을 하나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 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으로 갔습니다. 음. 역시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줌마들로 득시글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 앉아서 쉰 다음에 구경했습니다. 크... 그런데 이 어린양은 미적 감각이 제로여서 그런지 막상 유명한 물건을 구경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더군요;;;
마지막으로는 Sforzesco성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 멋진 건물은 정말 "밖에서 살짝"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르덴느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구경을 하루 줄인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생각해 보니 애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걸어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물론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해서 전에 예약해 놓은 야간열차를 확인한 뒤 바로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에 타니 자리가 없어서 베네치아 까지 꼼짝없이 서서 가나 싶었는데 어떤 친절한 승무원이 빈 좌석이 많은 객차를 알려줬습니다. 아아. 이탈리아 만세!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역의 물품 보관소는 그야말로 날강도 들이더군요. 시간 단위로 돈을 받아 먹는건 둘째 치고 그야 말로 살인적은 요금이었습니다. 1~2유로면 하루를 맡길수 있는 독일의 무인보관함이 한없이 그리워 졌습니다.
물품보관소에서 삥을 뜯긴뒤(?) 두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으니 시내 구경이라 하기도 민망했습니다만...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식당 한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마자 물품보관소의 불친절과 바가지에 대한 반감은 싹 사라지고 이탈리아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6월 26일 목요일
파이어폭스 3.0을 처음 사용해 봤습니다.
오늘 간만에 컴퓨터를 포맷하고 다시 이것 저것 설치했습니다. 원래 파이어폭스 3.0이 나오면 바로 설치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며칠 있으면 공인인증서 만료일이고 하다 보니 컴퓨터를 포맷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파이어폭스 3.0을 설치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파이어폭스를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채승병님의 추천 때문이었는데 처음 사용하자 마자 시스템에 별 무리도 없고 익스플로러 처럼 구질구질하지도 않다는 점에 푹 빠져서 그 이후로는 기본 브라우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이어폭스를 좋아하는 다른 많은 분들 처럼 익스플로러는 은행이나 국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때만 사용하고 있지요.
오늘 처음 3.0을 설치하고 써 보니 파이어폭스의 장점인 가볍고 빠르다는 점은 여전했습니다. 브라우저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크게 변한 것 같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편한 느낌이 듭니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탭 기능이 2.X 들과 비교해서 크게 개선된 점이 없어 보인다는 정도 입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파이어폭스의 탭 기능을 흡수하면서 마우스 만으로 탭을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을 넣은게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파이어폭스는 고유의 장점인 탭 기능에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역시 익스플로러 7.0에서는 북마크에서 선택한 사이트를 바로 새 탭으로 띄울 수 있는데 파이어폭스도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고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3.0을 쓰다가 다시 2.X를 까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까지 별다른 불편함은 못 느끼겠더군요.
파이어폭스를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채승병님의 추천 때문이었는데 처음 사용하자 마자 시스템에 별 무리도 없고 익스플로러 처럼 구질구질하지도 않다는 점에 푹 빠져서 그 이후로는 기본 브라우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이어폭스를 좋아하는 다른 많은 분들 처럼 익스플로러는 은행이나 국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때만 사용하고 있지요.
오늘 처음 3.0을 설치하고 써 보니 파이어폭스의 장점인 가볍고 빠르다는 점은 여전했습니다. 브라우저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크게 변한 것 같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편한 느낌이 듭니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탭 기능이 2.X 들과 비교해서 크게 개선된 점이 없어 보인다는 정도 입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파이어폭스의 탭 기능을 흡수하면서 마우스 만으로 탭을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을 넣은게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파이어폭스는 고유의 장점인 탭 기능에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역시 익스플로러 7.0에서는 북마크에서 선택한 사이트를 바로 새 탭으로 띄울 수 있는데 파이어폭스도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고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3.0을 쓰다가 다시 2.X를 까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까지 별다른 불편함은 못 느끼겠더군요.
1940년대 조선 주요 도시들의 지도 -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
번동아제님이 "고전사 공부를 위한 지도 자료 문제"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길지는 않은 글이지만 역시 명성은 거저 얻어 진게 아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나니 다음으로는 예전에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지도들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텍사스 주립대 전자도서관의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에 포함된 1940년대 이후 한국 관련 지도들입니다. 처음 이 웹사이트의 한국 지도들을 이용하게 된 것은 2005년이었는데 매년 지도가 조금씩 추가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지도는 해방 후 남한 지역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이 작성한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거의 베낀) 1946년의 경성 지도였습니다. 해방이후 좌익이나 우익단체에서 활동한 분들의 증언을 채록해서 정리하는 일을 했었는데 중요 사건이 있을 때 동선을 파악하는데 아주 좋더군요.
번동아제님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현재 웹사이트에 1940년대의 지도가 올라와 있는 도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성(1946년)
평양(1946년)
진해
진남포
청진
해주
함흥
흥남
군산
겸이포
마산(1946년)
목포
나진
부산
웅기
원산
여수
업데이트가 계속 돼서 더 많은 지도가 올라왔으면 싶습니다. 제법 쓸곳이 많더군요.
그리고 나니 다음으로는 예전에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지도들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텍사스 주립대 전자도서관의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에 포함된 1940년대 이후 한국 관련 지도들입니다. 처음 이 웹사이트의 한국 지도들을 이용하게 된 것은 2005년이었는데 매년 지도가 조금씩 추가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지도는 해방 후 남한 지역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이 작성한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거의 베낀) 1946년의 경성 지도였습니다. 해방이후 좌익이나 우익단체에서 활동한 분들의 증언을 채록해서 정리하는 일을 했었는데 중요 사건이 있을 때 동선을 파악하는데 아주 좋더군요.
번동아제님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현재 웹사이트에 1940년대의 지도가 올라와 있는 도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성(1946년)
평양(1946년)
진해
진남포
청진
해주
함흥
흥남
군산
겸이포
마산(1946년)
목포
나진
부산
웅기
원산
여수
업데이트가 계속 돼서 더 많은 지도가 올라왔으면 싶습니다. 제법 쓸곳이 많더군요.
2008년 6월 22일 일요일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Mugabe's men bring rape and torture to Harare suburbs- GUARDIAN
Mugabe allies 'set up' political terror - GUARDIAN
Assassins in Zimbabwe Aim at the Grass Roots - The New York Times
Zimbabwe opposition asks voters to end Mugabe rule - The Washington Post/AP
Krieg gegen das eigene Volk - Frankfurter Allgemeine
Mugabe setzt auf Mord - Der Spiegel
요 며칠 사이에 짐바브웨에서 아주 난감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는 선거 때 마다 막장상태가 반복돼 오긴 했습니다만 이번엔 약간 더 난감해 보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추종하는 민병대를 앞세워 정치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군요. 소총, 그리고 칼과 돌팔매(!)로 무장한 민병대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며 대통령의 반대파와 유권자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야당 당원에 대해서는 대량학살 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테러가 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테러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건 마치 이박사 치하의 대한민국을 살짝 업그레이드 한 듯한 막장 분위기로군요. 아니나 다를까 짐바브웨의 국가 경제도 엉망인걸 보니 그야 말로 이박사와 동급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습니다. "Krieg gegen das eigene Volk"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의 기사 제목은 정말 짐바브웨 사태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저 위에 링크는 하지 않았는데 AFP 통신의 한 보도에 따르면 무가베는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는건 "신" 뿐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역시 도킨스 옹이 옳았습니다. 정말 갖가지 쓰레기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막장으로 만들고 있군요.
짐바브웨의 막장 상태를 보니 이렇게 집에 편하게 들어앉아 대통령을 씹을 자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Mugabe allies 'set up' political terror - GUARDIAN
Assassins in Zimbabwe Aim at the Grass Roots - The New York Times
Zimbabwe opposition asks voters to end Mugabe rule - The Washington Post/AP
Krieg gegen das eigene Volk - Frankfurter Allgemeine
Mugabe setzt auf Mord - Der Spiegel
요 며칠 사이에 짐바브웨에서 아주 난감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는 선거 때 마다 막장상태가 반복돼 오긴 했습니다만 이번엔 약간 더 난감해 보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추종하는 민병대를 앞세워 정치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군요. 소총, 그리고 칼과 돌팔매(!)로 무장한 민병대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며 대통령의 반대파와 유권자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야당 당원에 대해서는 대량학살 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테러가 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테러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건 마치 이박사 치하의 대한민국을 살짝 업그레이드 한 듯한 막장 분위기로군요. 아니나 다를까 짐바브웨의 국가 경제도 엉망인걸 보니 그야 말로 이박사와 동급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습니다. "Krieg gegen das eigene Volk"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의 기사 제목은 정말 짐바브웨 사태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저 위에 링크는 하지 않았는데 AFP 통신의 한 보도에 따르면 무가베는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는건 "신" 뿐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역시 도킨스 옹이 옳았습니다. 정말 갖가지 쓰레기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막장으로 만들고 있군요.
짐바브웨의 막장 상태를 보니 이렇게 집에 편하게 들어앉아 대통령을 씹을 자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외장하드를 하나 더 장만했습니다
오늘 우체국 택배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이틀전에 주문한 500G 외장형 하드디스크더군요.
케이스는 레토라는 회사 물건이고 안에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는 웨스턴디지털의 물건입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을 위해서 포맷까지 깨끗하게 해 놓았더군요.
이전에는 80G 짜리 외장형 하드디스크를 하나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USB 대신 들고다니려고 일부러 작은 물건으로 샀는데 노트북의 하드디스크가 60G 밖에 안되다 보니 결국에는 휴대는 못하고 집에서 보조 하드디스크로 쓰게 됐습니다. 이제 노트북을 보좌할 500G 짜리가 생겼으니 80G 짜리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필수적인 자료만 집어넣고 외출할 때 들고 다닐수 있게 됐습니다.
고참과 신참
케이스는 레토라는 회사 물건이고 안에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는 웨스턴디지털의 물건입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을 위해서 포맷까지 깨끗하게 해 놓았더군요.
이전에는 80G 짜리 외장형 하드디스크를 하나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USB 대신 들고다니려고 일부러 작은 물건으로 샀는데 노트북의 하드디스크가 60G 밖에 안되다 보니 결국에는 휴대는 못하고 집에서 보조 하드디스크로 쓰게 됐습니다. 이제 노트북을 보좌할 500G 짜리가 생겼으니 80G 짜리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필수적인 자료만 집어넣고 외출할 때 들고 다닐수 있게 됐습니다.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