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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합리적 수익분배 유형 - 1944년 동유럽 분할 문제

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무리 다급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만드는 독일인들

아래의 이야기는 1944년 겨울 부다페스트에 포위된 독일군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독일계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뒤 독일군이 Solymar에 주둔하게 됐다. 하지만 독일군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성들이 징집됐던 터라 독일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독일 병사들은 장작을 패거나 추수를 도왔고 마을 사람들은 독일 병사들을 매우 좋아했다. – 물론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서 같은 침대에서 재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줬다. 병사들 중 한명은 Erzsebet에게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줬다고 한다. 그 병사가 적은 것은 아돌프 헤르만 라인플루스라고 돼 있는데 Erzsebet은 라인플루스가 병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병사의 고향 마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병사 한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포위망 안에 갇히네요.”

소련군은 Solymar를 점령하자 독일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은 마을 광장에 카츄샤를 배치하고 Varhegy(부다에 있는 성채언덕, 독일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를 포격했다. 나중에 포위된 독일 무장친위대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을 때 이들 중 일부가 Solymar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들에게 식량을 주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옷을 빌려줬다. 하지만 도망치던 독일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그리고 소련군이 Solymar를 다시 점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도 사로잡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살된 독일군들을 마을 묘지에 매장했다. Erzsebet도 일년에 한번 라인플루스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Cecil D. Eby, Hungary at War : Civilian and Soldiers in World War II, The Pennsylvan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p201

포위망에 갇혀 오늘 내일 하는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민족문제

Sonnet님이 쓰신 최근 레바논 현황에 대한 글을 보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레바논 정부군의 병사들은 각각 소속 종파를 찾아 탈영했다. 슈프 산악지대에서는 드루즈파가 팔랑헤당을 무참히 부수었다.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팔랑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해병대가 재건한 레바논 정부와 정부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확실히 민족, 정파 구성이 복잡한 국가에서 멀쩡한 단일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창궐 이후 여러 국가들을 엿 먹였지요.
근대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면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두 국가 모두 민족주의가 제국이 붕괴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이 항상 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은 당장 큼지막한 덩어리로 쪼개더라도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등으로 나뉘고 발칸 반도의 그저 그런(?) 민족들 까지 넣으면 더욱 더 골치가 아파집니다.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군대에서는 사용 언어가 명령어(Kommandosprache)와 직무어(Dienstsprache), 그리고 지휘 및 통신용 언어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 중 상당수가 황제폐하가 사용하시는 Deutsch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 입니다.
명령어, 그리고 지휘 및 부대간 통신 언어는 독일어였지만 직무어는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빈이나 짤즈부르크 등에서 편성되는 독일인 부대의 경우 명령어와 직무어가 모두 독일어 였지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인 부대는 명령어는 독일어, 직무어는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rwin A. Schmidl의 짧은 에세이, Die k.u.k Armee : intergrierendes Element eines zerfallenden Staates? 에는 1차대전 발발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참모부에서 각 부대별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각 연대 및 독립대대 중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42개 였고 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63개, 그리고 3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가 24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국경지대, 혹은 민족별 접경지역에서 심했는데 예를 들어 프세미시우(Przemysl) 10보병연대는 연대 병력 중 47%가 루테니아어, 43%가 폴란드어, 10%가 기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66보병연대는 46%가 슬로바키아어, 25%가 헝가리어(magyarische), 22%가 루테니아어, 7%가 기타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사관의 임무에는 병사들 간의 ‘통역’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며 또 전쟁이전 임관한 장교들은 배치된 연대의 공식어를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른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기술적인 것 이었다면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평화시에 입대한 직업군인 장교나 부사관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황제에 충성하는 편 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소집된 장교나 부사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는 장교로 소집됐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채 들어왔다는 점 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말도 안통하는 황제에게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의 20%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을 불문하고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죠. 유대인들이 장교로 충원되니 반유대정서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뻔 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군대의 편제, 교리, 장비 만큼이나 전쟁 초-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연달아 참패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개시되면 폴란드나 체코인 부대는 대규모로 항복해 버렸다고 하지요.

그러나 sonnet님의 중동문제에 대한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21세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레바논같은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군대에 민족문제가 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최소한 경상도 말이나 전라도 말이 서로 못 알아먹을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균질적인 사회구성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아도 국가가 유지되는게 아닐까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헝가리식 절멸전쟁? (재탕)

원래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번역 글인데 이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폐쇄됐는지라 여기에 재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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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헝가리식 절멸전쟁? 헝가리군과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1942년


1. 도입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정규군의 개입 문제는 독일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함부르크 사회학 연구소(Hamburger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독일 국방군 전시회”개최는 독일 사회의 “씻을 수 없는 과거” 문제를 새로운 논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에 개입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일 국방군이 행한 범죄의 정도와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이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동유럽 출신 자원자들이 폴란드와 소련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개입한 문제와 이른바 “동방군단(Osttruppen)”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중동부 유럽 국가의 독일동맹군들이 “이념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며 각기 다른 분석을 하고 있다. Alexander Dallin은 독일 점령하의 오뎃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민간인을 잘 대했다고 지적했지만 독일의 점령 정책 자체는 매우 가혹한 것 이었다고 평가했다. John Armstrong 역시 하버드 대학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의견을 지지했는데 하버드 대학의 자료에 헝가리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한편 Peter Gosztony(동부전선의 헝가리군을 연구한 몇 안되는 학자이다.)는 헝가리는 독일군에 비해 민간인을 훨씬 온건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1942년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지휘관들이 전선후방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분석하여 헝가리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남부 후방군사구역(rückwährtiges Heeresgebiet Süd)에서는 독일, 헝가리군과 현지 자원병들이 중 동부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증대하는 일반 주민들의 소요와 날로 커져가는 빨치산 활동을 상대하여 독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사구역 북부(체르니히프와 수미)는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과 훈련 상태였지만 빨치산 활동이 심각한 지구를 맡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 보안 부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손실이 증대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임무를 맡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반면 독일측은 헝가리가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측의 논쟁은 인력과 장비 부족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끄라이나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로 넘어갔다. 헝가리군은 빨치산 세력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은 독일군은 물론 우끄라이나의 협조적인 세력에게도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이러한 보복은 효과가 없으며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헝가리군 장군 한 명은 자신의 관할구역 내 빨치산 출몰지역의 남성 중 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을 모두 사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독일측은 헝가리측에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가혹한 보복은 게릴라 활동만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1942년 9월에서 10월까지 게릴라 출몰지구의 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초토화 시키기로 합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 빨치산 작전 수행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런식의 대응은 약간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빨치산전에 대해서 독일측이 조사 분석한 문헌(주로 벨로루시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을 보면 독일측은 우끄라이나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끄라이나 대부분이 탐욕스러운 에리히 코흐(Erich Koch)의 우크라이나 제국위원회(Reichskommissariat Ukraine)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드네쁘르강 동안의 광대한 지역은 1942년부터 1943년 까지 독일의 군정 통치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파괴적인 경제 수탈등 가혹한 독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독일군 고위 간부들은 친 우끄라이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에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관인 칼 폰 로끄(Karl von Roques)중장과 부사령관이고 나중에 로끄의 후임이 된 에리히 프리데리치(Erich Friderici) 중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에 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우끄라이나 토착민들을 빨치산 활동에 대한 보복 같은 가혹한 독일의 점령정책 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들의 정책은 인간 존중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지만 독일측이 1942~43년 기간동안 우끄라이나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점령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에 이미 그 기초가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헝가리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Gosztony는 헝가리군이 독일군 보다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꺼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측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부 후방군사구역에서 발생한 가장 잔혹한 보복 작전은 대부분 헝가리군이 수행한 것 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대해 독일측과 헝가리측이 벌인 논쟁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측 역시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적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독일군의 기준은 항상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1943년에 독일의 우끄라이나 지배가 끝장날 때 까지 친 우끄라이나적 성향을 유지했으나 이런 온정주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전쟁이 격화되어 가면서 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희박해 졌다. 독일 지휘관들의 재량권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로 우끄라이나인들의 우호적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군 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끄라이나 주민에 대한 강제 노동 징발 – 로끄와 프리데리치가 강력히 반대했다. - 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측의 빨치산 소탕 방식 역시 사실은 헝가리군 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 물론 독일측은 자신들이 훨씬 온건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독일측의 잔인한 대응역시 우끄라이나 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릴라 전에 대한 독일 지휘관들의 명령 역시 매우 모순적인 것 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치루려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상의 적”을 분쇄하려는 투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2년에 독일측이 행한 빨치산 토벌작전 기록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독일 지휘관들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줬음이 드러났다. 1942년 9월에서 10월사이에 독일측이 민간인 소개를 실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개된 민간인들을 위한 준비는 매우 형편없이 준비 되었다. 독일측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작전의 일부만을 행했을 뿐이며 나머지 “더러운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부대 관할로 넘어갔다. SS와 경찰 부대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헝가리군 지구에서 헝가리군을 지원하여 여러 차례의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국방군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합동 작전이 순조롭게(reibunglos)진행되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었다. 또한 잔학행위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직할의 비밀 야전 헌병(geheim Feldpolizei)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 대한 독일측의 비난은 자기 위선이나 뻔뻔한 기만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 지휘관들이 자국군의 잔학행위와 헝가리군의 잔학행위를 구별지워 판단하려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아마도 독일 지휘관들이 자국의 동맹군을 비난한 것은 독일군이 예의 바르고 전문적인 집단이라는 환상과 자국 군대가 41년 6월 22일 이후 자행한 일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반영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측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이 논문의 초점은 헝가리군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 전쟁(Vernichtungkrieg)”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잔학행위의 원인은 무었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

이 연구는 독일, 러시아, 헝가리의 1차 문헌을 이용하여 이루어 졌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과 그 예하 부대의 작전 일지가 포함되어있다. 이 기록은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군사 분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1942년 부분은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으며 민간인과 접촉이 빈번했던 비교적 하급 제대의 기록까지 있다. 관련 기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연방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측 문헌으로는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조직과 지하 공산당 조직, 이들을 지원한 NKVD의 기록과 1944년 초까지 독일 점령기간을 연구한 지역 정부의 연구 기록등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예쁘의 국가 중앙 문서보관소와 체르니히프, 수미 현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자료는 1997년에 필자가 체르니히프와 수미에 당시 살았던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수집하였다.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의 군사사 기록 보관소(Hadtörtnélmi Levéltar)에 보관된 자료를 참조했다.


2. 1942년 3월까지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바바로사 작전초기에 독일 국방군은 빨치산에 대한 문제는 겪지 않았다. 스딸린은 전쟁 이전에는 빨치산 부대 조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전쟁 초기에 효율적인 조직을 편성하지 못 했다. 초기에 편성된 빨치산 조직은 지역당 조직과 NKVD에 의해 조직되어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 못 했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독일은 침공전에 준군사 조직이나 민간인의 저항이 있을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보복은 유대인과 공산당 등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집단에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총 사령부는 1941년 7월 12일에 이러한 방침을 확정했다. 남부 후방 군사구역 사령관 폰 로끄는 우끄라이나는 우호적인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육군 총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정의롭다는 인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보타지 행위에 대해서 우끄라이나인 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돌려야 한다. 보복 역시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한해서만 행해야 할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명령은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폰 로끄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있을 경우 모두 “특별 사건(besondere Ereignisse)”으로 분류하여 자신에게 분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빨치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1년 10월 이전에 대량 보복은 단 한 건이 있었다. 1941년 8월 29일 제 454 보안 사단 소속의 82 차량화 헌병 대대는 체르보녜 마을에서 우끄라이나인들이 빨치산이라고 고발한 유대인 6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0월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방군은 동진하면서 공산당이 좀더 조직적으로 지하조직과 빨치산을 편성한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빨치산은 낙오된 소련 정규군이나 퇴각하는 정규군 부대를 지원하여 직접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드녜쁘르강 만곡부 지역에서는 수주간 보안 사단과 빨치산 부대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 후방군사구역은 제 6 군으로부터 제 62 보병사단을 증원 받아 뽈따바 지구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여기서부터 남부 후방군사구역의 대 민간인 정책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폰 로끄의 명령에 반해 남부 후방군사구역 예하 병력은 군사구역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우끄라이나인 마을을 불태우는 보복을 시작했다. 생포된 빨치산이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순찰하는 독일군이 즉결 처형을 했다. 보복 작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군사구역 사령부가 다른 동부 전선의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대 빨치산 작전에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민간인의 살상에도 불구하고 군사구역 사령부는 12월에 친 우끄라이나적 점령 정책을 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우끄라이나 인을 “아리안”인종으로 규정했다. 프리데리치는 12월 14일자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일에 대한 우끄라이나 민간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우끄라인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이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은 안된다.”

한편, 12월부터 헝가리군이 후방군사구역에 투입되어 빨치산 소탕에 참여했으며 곧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군사구역 예하의 헝가리 군은 “헝가리 동부 수비 집단(königliche ungarische Besatzunggruppe Ost)”으로 불리웠으며 제 102, 105, 108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2월 18일 에서 19일, 독일측은 체르니히프 북동쪽 75km 에 위치한 꼬류끼프까 지구에서 1,7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빨치산 집단을 파악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들이 소련 제 4군의 장교와 중앙당 간부, 그리고 지역당의 열혈당원, 유대인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박격포와 자동화기, 그리고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12월 20일, Kálman Csiby대령이 지휘하는 제 105 여단 2 대대가 게릴라 소탕을 위해 출동했다. 이틀 뒤 대대는 게릴라 700명을 사살했으며 잔여 인원은 중부 집단군 지구로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대인 90명을 작전 중 사살했으며 최소한 마을 한 곳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기록되었다. 독일측 기록에는 이 지역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다. 그러나 105 여단이 이후의 전투에서 형편없는 전과를 올린점에 미뤄 본다면 빨치산 700~800명 사살은 확실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100명 이상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의 러시아측 문헌은 이 소탕 작전에서 114명이 학살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12월에 체르니히프 지구 빨치산이 배포한 삐라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 헝가리측의 사상자 숫자로 볼 때 교전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빨치산은 보복으로 학살된 민간인 이었다. 여단의 보고서에는 헝가리군이 전사 7명과 부상 10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 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우끄라이나의 경찰 보조원(Hilfspolizei, 보통 Hipo 라고 부름)중에서 11명이 전사, 9명이 행방불명, 27명이 부상당했다.

꼬류끼프까 지구 전투는 이후 헝가리군의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격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군사구역의 북쪽 경계는 체르니히프 일대에 형성되었다. 헝가리군은 데스나강과 벨로루시아와 러시아 경계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지구의 빨치산은 체르니히프 지하당 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미래의 소련 연방영웅 페도로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월 에서 3월까지 독일군이 혼란한 전선일대로 집중된 동안 후방의 헝가리 제 105 여단은 페도로프가 지휘하는 빨치산 부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은 헝가리군과 점령군에 협력하는 우끄라이나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빨치산 부대는 홀미 일대에서 26명의 우끄라이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 17명을 죽였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집 34채를 불태웠다. 2월 5일에 옐니예 에서 두 명의 헝가리 병사가 매복 공격에 사살 되었으며 12일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105여단 소속 병력이 매복 공격을 받아 31명의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군은 보복작전에서 루끼-후또르 마을을 불태우고 139명의 “빨치산”을 “사살” 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공격은 더욱 더 대담해 졌다. 3월 2일, 헝가리 제 46 보병연대는 홀미와 꼬노똡 일대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두명이 행방불명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0일 뒤에 페도로프는 제 105 경보병사단(이전의 105여단이 개편된)의 전투단을 아바니브까 마을에서 습격해 4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또한 빨치산은 30명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6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독일측 보고서에 따르면 빨치산은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경찰 보조원의 아이들의 손을 자르고 19명의 주민을 강제로 입대 시켰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은 빨치산과 그 후원세력을 “전투원”이 아닌 “범죄자”로 파악했다. 늘어나는 손실로 헝가리군의 사기는 낮아졌다. 지휘관들은 증원병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독일측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임무를 맡겼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민간인에 대한 대우도 가혹해 졌으며 빨치산 소탕도 한층 더 과격해 졌다. 생포된 빨치산이 그를 감시하던 경비병 두 명을 죽이자 105 사단측은 1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빨치산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측도 헝가리측의 불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헝가리 제 105 사단장 Kolossváry 준장과 체르니히프의 독일 제 194 야전사령부(Feldkommandantur) 지휘관 뷔어펠(Würfel)중령의 요청에 따라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는 페도로프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토벌을 위해 증원 병력을 투입했다. 703 경비 대대(Wachbattalion)과 544 향토 대대(Landesschützen-battalion)가 증원되어 헝가리군 2개 대대와 함께 옐리녜 남쪽의 삼림지대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이 전투단은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 예하의 비밀 야전 헌병 3개 분견대(Abteilung)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는 독일측의 정보가 매우 정확했으며 일부 우끄라이나 경찰의 탈주와 영하 15~3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성공적 이었다. 페도로프 집단은 900명중 22명이 사살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측 주장에 따르면 27명이 사살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전술적인 측면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뒤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Csendes 중령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점령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며칠 뒤 헝가리군이 마을로 다시 갔을 때 마을 주민 대다수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Csendes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체포에 저항하는 주민 30명을 사살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일 비밀 야전 헌병에 인계했다.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옐니녜 주변에서 민간인 536명이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 중 230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고멜에 있는 민간인 수감시설로 이송되었다. 군사구역 사령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데 고멜은 중부 집단군의 관할 구역이었으며 프리데리치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4년 해방 뒤 NKVD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고멜에서는 민간인들 중 노인들만 석방되고 여성과 어린이는 학살됐다고 한다.

군사구역 사령부측이 민간인 학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독일측은 작전의 성공적 종료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군사구역 북부 지역은 평정 된 것 처럼 보였다. 703 경비 대대 대대장은 그의 나이 먹은 부하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했다. 신병 치료차 떠나있던 폰 로끄 역시 복귀한 직후 작전의 성과를 치하했다. 만약 독일측이 헝가리군의 작전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 이다. 그러나 Csendes의 추정은 독일군에 비해 덜 낙관적 이었다. 그는 최소 300명 이상의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Kolossváry 준장은 작전의 성과에 만족했으나 작전 기간 중 자신의 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로 되어 있는데 독일-헝가리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Kolossváry 준장의 비판

Kolossváry 준장은 1942년 초 105 사단의 작전 경과를 상급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경 사단의 역경”이라는 제목으로 네 장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먼저 105 사단의 절반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상태 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장교와 병사들은 정신력으로 훈련과 육체적인 문제를 극복해 왔으나 부족한 보급과 좋지 않은 기후, 그리고 지속되는 전투 손실로 지휘관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의지”가 없이는 부대의 상황이 악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세부적으로 기록했다. 1월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7명이 심각한 동상으로 절단 수술을 받았으며 250명이 2도 동상에 걸렸다. 사단 예하의 각 대대는 각각 호로드니아, 바흐마취 니즈인, 노브로로드-세베르스끼, 얌삘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대중 일부는 체르니히프의 야전 병원과 사단 본부로부터 최고 70~8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사단의 주둔 지역은 철도망이 부실했으며 빈약한 도로 사정으로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보급 문제는 매우 열악했으며 편지 배달도 원활하지 못 했다. 사단의 한 대대는 연 초의 작전 기간 중 거의 2500km를 행군했으며 주둔지의 거주 사정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가내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우크라이나 가옥”이었다. 의무 지원은 기초적인 수준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급품에 이 같은 기생충이라도 붙어 있는 경우에는 집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3월 말 까지의 소탕작전에서 105 사단은 101명의 전사자와 129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들은 좋지 않은 날씨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체르니히프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군이 겪은 여러가지 고통 중에서도 가장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외국인 지휘관과 병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기상 상황에 대해 잘못 된 정보를 주며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그들의 행태”였다. 그는 소련측이 이런 불만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사이의 균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빨치산은 그들이 약탈하고 방화한 마을을 헝가리군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독일측은 이러한 사태가 사전에 아무런 논의도 없이 발생한데 해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측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으며 이런 문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Kolossváry 준장은 결론에 가까워 지면서 자신의 작전 구역의 빨치산이 숫적으로 매우 우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나폴레옹 전쟁당시 가장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당시에도 역시 활발한 게릴라 활동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은 빨치산의 세력 확대에 매우 유리한 상황 조성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자신의 담당 구역의 면적, 각 부대의 행군 범위, 3월의 작전에서 사살한 빨치산 숫자(그는 5,132명으로 추정했다.)등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단이 맡고 있는 고정 거점 방어를 우끄라이나 부대에 넘기고 각 대대를 사단의 통제하에 운용하며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대전차포와 기관단총의 보급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측에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들은 매우 간단한 요구사항이었다. Kolossváry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폰 로끄의 참모진들은 헝가리측에 추가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폰 로끄는 그의 후임인 프리데리치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측이 병력과 장비 부족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폰 로끄는 헝가리군의 상태에는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Kolossváry가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폰 로끄는 육군총사령부 군수국에 헝가리측의 곤궁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보복에 대한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헝가리군과 독일군측에 상당기간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Kolossváry의 보고서에서는 헝가리군과 독일 상급 사령부 사이의 의견 불일치 문제를 주로 지적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석을 했다. 그러나 다시 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민간인에 대한 헝가리군의 태도는 한층 더 격해 졌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는 헝가리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하계 대공세와 보복에 대한 논의


봄의 홍수와 페도로프 집단의 퇴각으로 헝가리군의 담당 지구는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빨치산과의 특별한 교전은 없었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새로운 하계 공세인 BLAU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10만 평방 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 1,3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6월에 군사구역의 관할 구역이 수미 지구까지 확대되면서 브랸스끄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점을 둔 강력한 빨치산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일부 빨치산 부대는 수미에 확보한 전방 기지를 기반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얌삘 남쪽과 서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6월 말이 되자 군사지구 사령부는 중부 집단군 으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으며 시도르 꼬빡 일대에 있는 대규모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헝가리 108, 105 사단의 일부 병력과 소련군 포로로 편성한 “투르키스탄” 대대, 공군의 비행장 경비 병력 1개 중대, 꼬노똡 에서 차출한 건설 부대 병력(Gruppe Becker, 베커 집단), 1개 전차 중대, 공병, 대공포 등 1,2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작전은 6월 20일부터 26일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으며 독일측은 기대이하의 성과로 헝가리측과 논쟁을 벌였다. 헝가리측은 250명을 작전 중 사살하고 143명을 생포한 뒤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상당수의 포로를 독일 비밀 야전헌병의 감시하에 뿌띠블리 지구로 이송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모두 빨치산 주력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헝가리군 사령관 Imre Bogányi 중장은 지역 민간인들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기간 중 민간인들이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중에도 노바 슬로브다, 야치녜, 체레뽀보, 이바니프스끼, 세슐린등의 마을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작전 구역의 남성중 15~60세의 남성은 모두 사살하고 생포해서 이송한 포로들도 사살해야 하며 여자 포로들 중에서도 가슴 밑에 별 무늬 문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주로 사용한 표지)을 한 경우는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ogányi 중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6월 25일에 베류흐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의 책임을 물어 베류흐에서 10명의 인질을, 그 인접 마을들에서 각각 5명씩의 인질을 처형했다.

이와 관련된 독일측 기록으로는 노바 슬로바다와 칼리체, 리노보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 행위는 인접 부대인 바익스 집단 사령관 폰 바익스 상급대장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7월 3일에 바익스는 브리데리치에게 헝가리군이 마을을 파괴하는 행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행위는 얌삘과 세레디냐-부다 일대의 빨치산 활동을 감소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익스는 독일 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으며 헝가리측의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뿌띠블은 텅 비었다. 헝가리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1,300명의 비적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12곳의 마을과 460톤의 곡물이 헝가리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헝가리군을 피해 달아났다. 헝가리군을 긴급히 (독일군 부대로)교체 시켜야 한다고 본다.”

프리데리치는 작전 기간중 뿌띠블을 시찰했다.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서 프리데리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이것을 육군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똑같이 기록했다. 한편, 프리데리치나 그의 참모진 중 한명은 Bogányi가 인질을 대량 처형하자고 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뿌띠블 작전 직후 프리데리치는 빨치산전에 대한 지침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지침은 누구를 “포로”로 대우하고 누구를 “빨치산”으로 구분 할 것인가를 언급한1941년에 내려진 명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새 지침에는 “잔악한 유대-볼셰비즘적 전쟁 방식”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있었으며 이전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도 추가 되었는데 교전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투항하는 빨치산은 처형을 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반면 소련 정규군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 항복하건 규정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집단 처벌”이라는 규정을 새로 도입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제약을 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발적인 게릴라에 대한 절멸 전쟁은 유조의 요소가 있다.” 또한 죄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독일적 정의관에 반하는 행위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프리데리치는 모스끄바는 빨치산에게 독일군이 민간인에 대한 대량 보복을 하게 부추김 으로서 “주민들 사이에 독일군과 그 지원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실제로 처형해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사용할 전술이 아니다. 이것은 작전이 끝나고 행하는 보복성 행위이다. 추가 조사 과정에서 밝혀낸 결과 이 때문에 주민들의 우호도가 감소하고 마을 전체가 빨치산에 협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보복만 무자비하게 가함으로서 독일이 지지기반을 잃고 있으며 필요한 물자의 징발, 귀중한 노동력의 상실, 빨치산에 대한 지지만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이전에도 예하 부대의 잔학 행위를 단속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폰 로끄는 1941년 7월에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리데리치의 경우는 헝가리군의 행위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리데리치의 새로운 게릴라전 방침과 Bogányi가 옹호하는 무차별적 보복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마을 주민 전체가(in ihrer Gesamtheit) 빨치산 활동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야전부대가 주민들의 빨치산 관여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에 프리데리치가 내린 명령의 의도는 의문의 대상이다. 아마 프리데리치 자신도 보복을 “완전히” 금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새 명령을 하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 비밀 야전 헌병 부대는 니즈인 마을에서 독일 헌병 하사 한 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로드꼬 마을의 민간인 116명을 처형했다. 이 학살은 그 지구의 독일군 지휘관(194 야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지만 프리데리치는 이 잔학행위에 대해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뿌띠블리 마을에서와 같이 반복적인 마을 초토화와 대량 학살을 감소시키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Bogányi는 노바 슬로보다 마을을 6월 26일에 초토화 시켰다고 보고했는데 1943년 10월과 11월에 작성된 소련 뿌띠블리 지구당의 보고서에는 바로 7월 6일에 헝가리군이 다시 노바 슬로보다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7월 7일의 학살에서 헝가리군은 마을 주민 407명을 사살하거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헝가리군의 군율 문란과 작전 수행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다시 보복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194 야전사령부 사령관은 7월 18일에 뿌띠블리의 시장으로부터 헝가리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뿌띠블리 시장은 헝가리군이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야전사령부측은 군사 지구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했다.

“빨치산 무리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 붙이는 작전은 효과가 없다. 빨치산 집단은 지나가면서 머무르는 마을 마다 식량과 물자를 징발하며 지역 주민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유지들은 빨치산이 지역에 출몰한다는 점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빨치산 주력을 포위 격멸해야만 지역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며칠 전에 니즈인 마을에서 116명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같은 기간에 194 야전사령부 예하의 307 지역사령부(Ortskommandantur 307)는 헝가리 105 경사단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민가를 파괴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제 450 투르키스탄 대대의 장교 한명은 프리데리치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헝가리군이 삼림 지대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보고되고 군사구역사령부가 헝가리측에 항의를 전달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헝가리군은 독일측의 비난에 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데리치는 보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린지 3일 뒤에 빨치산 작전에 대한 새로운 전술 지침을 하달했다. 이 문건은 현재 없으나 네 명의 지휘관(제 213 보안사단, 제 194 야전사령부, 제 198 야전사령부, 헝가리 주둔군)이 이에 대해 보낸 회신이 남아 있다. 이 네통의 회신은 모두 남아 있으며 원래 명령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재 구성할 만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술 지침의 핵심은 “예하 부대의 자원으로 좀더 공세적인”행동을 취하라는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프리데리치는 상급 사령부에 빨치산 소탕에 투입할 전력이 부족함을 여러 차례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리데리치는 자신이 증원병력을 요청했음에도 상급 사령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좀더 정교한 전술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Bogányi는 이 지침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예하 부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고 “이미 이런 문제점은 충분히 겪고 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에게 분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 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Bogányi는 전문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회신에서 불만만 제기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해결안을 같이 적었다. 이것은 3월 31일에 Kolossváry가 올린 보고서와 유사한 내용 이었다. 물론 Bogányi의 답장에는 직접적으로 대응 보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전술적 측면 보다는 지역 주민이 빨치산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는 독일 비밀 야전 헌병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빨치산 출몰 지역과 빨치산을 지지하는 마을은 경제활동을 봉쇄해 버려야 하며 필요하다면 봉쇄로 기아를 유발 시킬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북부 관할 구역의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것 이었다. Bogányi는 빨치산 출몰지역의 성인 남성을 모조리 노동 수용소로 이송해서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Bogányi는 7월 2일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에 의거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Bogányi의 제안이 있기 전에 북쪽 지역의 민간인 소개를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민간인 소개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며 9월 10일에 집단군 사령부에 세레디냐-부다 와 데스나 강 동안의 벨리까 베리즈까, 홀루비브까, 리스녜, 빌료시브까, 스챠하일리브까, 즈놉-노보호로지께, 류바히프, 우끄라이스끼, 체르보니, 바실리브까 일대의 민간인을 소개하고 이 일대의 자재와 물자를 이송시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인과 물자의 소개가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한 것 같으며 10월까지 완료 된 것으로 보인다. 소개된 주민들은 제 213 보안사단과 197 야전사령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주리 주 서부와 필리핀 봉기, 보어 전쟁, 일본군의 만주 지역 게릴라 작전과 말라야, 케냐, 베트남 전쟁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민간인 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 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부 후방군사구역이 실시한 민간인 소개 작전이 효과적 이었는가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