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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이탈리아의 국력에 대한 아주 탁월한 평가

이탈리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평가가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주 왕성한 식욕을 가졌지요. 그런데 이빨이 영 시원찮습디다.”
(Diese Italiener, sie haben zwar großen Appetit, aber schlechte Zähne.)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대사에게, 1881년.

Hendrik L. Wesseling, Teile und herrsche: die Aufteilung Afrikas 1880-1914, (Franz Steiner Verlag, 1999), p.25

재치도 있거니와 아주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에겐 좀 안됐지만. 그런더 더 안습인건 2차대전이 발발할 때 까지도 이탈리아의 군대가 시원찮아서 2차대전에 대한 저작에서도 이미 2차대전으로 부터 60년 전에 있었던 저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는 겁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외교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한번쯤 이 일화를 접해 보셨을 겁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비스마르크는 만담가의 자질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데자뷰? - (2)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이지스함 1척을 하기 위해서 드는 돈이면 400~500억 하는 차기고속정 25척 이상 건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지스함 1대면 그 정도의 배 200척도 만들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임종인 의원, 2004년 10월 12일 해군본부 국정감사 회의록

그리고.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해군은 유럽대륙의 지상군 위주의 군사 전략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다. 해군력은 유럽의 대륙국가간의 관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고 마한이 역설한 이야기는 유럽 대륙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해군 전략은 대륙국가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즉 대륙국가들은 열세한 해군 전력으로 해양국가의 해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국가의 해군 이론가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주력함의 열세를 만회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함의 우월적 지위와 거함거포주의자들에 첫 번째로 도전을 한 것은 “어뢰정”이었다. Jeune Ecole의 수장인 Theophile Aube 제독은 어뢰정이 강력한 해양국가의 해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저렴한 대응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어뢰정으로 전함으로 이뤄진 함대를 무찌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전함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Emily O. Goldman, Sunken Treaties : Naval Arms Control between the War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p91-92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읽으면서 자꾸만 임종인 의원이 생각나더군요.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프랑스의 대미 군사원조 : 1917~1918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국의 전쟁 준비는 해군을 빼면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 전체가 고립주의에 빠져 19세기 후반기 내내 전쟁에 대한 특별한 생각 없이 살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E. Glaser는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 동원체제에 대한 짧은 논문에서 미국의 군수공업위원회가 1918년 초까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E. Glaser의 논문 제목도 아예 Better late than Never입니다. ‘아예 안하느니 늦는게 낫다’ 정도…)

1917년, 퍼싱이 유럽 원정군을 1918년 6월까지 1백만 수준으로 증강시키고 최종적으로 2백만으로 증강시킨다는 계획을 전쟁부(Department of War)에 제출했을 때 미국 유럽 전선에 보낸 장비 중 현대적인 야포는 120문의 M1903 3인치 유탄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미국에 제대로 된 군수공장이 드물다 보니 새로 개발하는 M1916 3인치 유탄포는 프랑스군의 75mm 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 도중에 설계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공장들은 프랑스로부터 75mm 유탄포의 생산면허를 도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M1916을 양산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다간 전쟁이 끝날 판이었으니…

1차 대전이 끝난 뒤 미 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쟁 기간에 우리는 우리 군대에 대포를 보급할 능력도 없었고 보급하지도 못했다고 말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이겠지만,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딱한 사정을 보고 나서게 됩니다. 1917년 5월 22일, 조프레는 미국 전쟁성에 미육군의 병력 동원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자동화기와 야포를 모두 프랑스 정부가 원조한다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또 같은 달 25일에 프랑스 정부는 미국 측에 1백만발의 75mm 포탄과 10만발의 155mm 포탄을 먼저 원조하고 그 다음으로 매일 3만발의 75mm 포탄과 6천발의 155mm 포탄을 원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미국 정부는 1917년 6월 9일에 프랑스 측에 미국제 3인치, 6인치 유탄포 생산을 취소하고 그 대신 프랑스로부터 75mm, 155mm 유탄포를 원조 받겠다고 통보합니다. 당장 포탄부터 얻어 써야 할 판이니 대안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이 덕분에 오늘날 수많은 제 3세계 국가가 155mm를 주력 야포로 쓰고 있지요.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3인치와 6인치 유탄포를 양산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야포의 표준 구경은 6인치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부족한 것은 대포 말고도 많았습니다.

1차 대전의 필수품, 기관총도 매우 적었던 것 입니다. 퍼싱은 기관총 부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사단들은 미국 본토에서 기관총 사용을 충분히 훈련 받지 못했고 많은 사단들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까지 기관총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에 참전할 당시 각 사단은 기관총 92정만 보유했는데 실제 편제상으로는 기관총 260정과 자동소총 768정이 필요했다. 기관총이 부족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퍼싱은 1917년 6월 21일, 프랑스에 기관총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전쟁부에 문서를 보냈고 프랑스 정부는 즉시 미국에 기관총과 탄약 일체를 원조하겠다는 답신을 보냅니다.

항공기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J. H. Morrow. Jr의 The Great War in the Air에는 전쟁 발발당시 말 그대로 안습이었던 미 육군항공대의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09년 이후 군사 항공에서 독일과 프랑스에 큰 차이로 뒤진데다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유럽의 항공기술이 급속히 발전해 미국으로서는 이 격차를 쉽게 줄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미국 육군항공대는 프랑스가 만든 비행기로 도배를 하고 맙니다.

그러나 미국은 프랑스에 철강, 화약 등을 지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해 저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17년에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무연화약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1918년에는 더 벌어지지요. 프랑스 역시 자원이 부족한데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자본이 거덜날 지경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측에 파격적인 선심공세를 퍼붓게 됩니다.

1차 대전기간 중 미육군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 영국)

야포 : 3,532 / 160
열차포 : 140 / 0
탄약차(Caisson) : 2,658 / 0
박격포 : 237 / 1,427
자동화기 : 40,884 / 0
전차 : 227 / 26
항공기 : 4,874 / 258

R.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 France in the Great War, p.105

거의 대부분의 군 장비를 원조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차량은 생산기반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중화기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지요.

저런 일들이 불과 90년 전 일 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때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경쟁자가 없는 절대 강국으로 떠오른 것을 보면 미국은 좋건 나쁘건 간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괴물 국가임에 틀림 없습니다.

2007년 1월 17일 수요일

17-18세기 프랑스 군대와 여성

중세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민간인을 달고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에는 군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상인, 장인, 그리고 대포를 조작하는 기술자(17세기 이전까지 대포는 민간인 기술자가 발사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체계적으로 포병을 양성한건 프랑스가 최초라고 하지요), 약간의 거지와 건달, 그리고 잡일을 거들거나 매춘을 하는 여성이 포함됐습니다. 16-17세기 유럽 군대를 연구한 저작들을 보면 이 시기의 군대에는 전투원의 1.0~1.5배 정도의 민간인이 따라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여성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숫자였을 것 이라는게 군사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G. Parker나 J. Lynn등등) 17세기 중반까지도 여성들은 전투 부대를 따라다니며 식사 준비, 빨래, 간호 등의 일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예산을 무지막지 잡아먹었다는 점 입니다.

프랑스 군대도 이 점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대들과 비슷했습니다. 루이 14세 때까지 프랑스군 병사들은 허드렛 일을 거들 하인(goujats)를 거느리는 것을 법으로 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사관 정도면 두 명 까지 거느릴 수 있었다는군요. 이 경우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례가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 빨래도 해주고 밤일도 해준다면야 나쁠게 없겠죠. 여기에 외국인 용병들은 가족을 달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들은 부대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한 독일인 부대는 부대와 같은 숫자의 가족을 달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죠.
루이 14세는 부대비용 절감을 위해 전투 부대에 딸린 여자의 숫자를 줄여보려 노력했습니다만 이걸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 했습니다. J. Lynn에 따르면 루이 14세가 요단강을 건너간지 한참 지난 1772년의 기록에 프랑스군 전체에 걸쳐 보병 1개 대대당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여성이 잡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빨래 같은 잡다한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야전 지휘관들은 여자들이 전쟁터로 따라 오는 것을 좋게 봤다지요.
잡일을 거드는 여성 외에 vivandieres라고 불리는 여성 잡상인(?)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부대를 졸졸 따라다니며 술, 담배를 판매했다고 하는군요. 술과 담배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들 잡상인들은 부대 주둔지 내에 천막을 치고 영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야전 지휘관들로부터 보장 받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병사들의 결혼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반 사병들은 결혼하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대신 결혼할 경우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월급도 아까운데 거기다가 입을 더 보태는게 좋게 보일리는 없었겠지요. 특히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둔지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은 다른 지역 여성과의 결혼보다도 엄격하게 금지됐습니다. 장교도 비슷한 규정을 적용 받았다고 하지요. 기혼자는 모병 대상에서 엄격히 걸러졌기 때문에 루이 14세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육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년전쟁 시기인 1630~40년대의 프랑스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40%~45% 정도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태양왕 시기에 기혼자 비중이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결혼 자체는 엄격하게 통제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할 경우에는 군인 가족의 복지에 일정한 혜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1706년에 병사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부대 관사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듭니다.

이 밖에 전투원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꽤 재미있는 이야기이니 따로 다루는게 좋을 것 같군요.

2006년 12월 14일 목요일

독일군 정보부의 삽질과 베르됭의 대재앙

과거의 독일군은 작전과 전술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정보부문에 있어서는 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1~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은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피박을 본 사례가 제법 있지요. 아무리 주먹을 잘 써도 앞이 잘 안보이면 별 수 없으니.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

2006년 12월 6일 수요일

1635~40년 프랑스군의 기병 부족 문제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보병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고 기병의 비중이 크게 축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 정복전쟁(reconquista)을 치루고 있던 카스티야 가 대표적인데 그라나다 전투 초기에 아라곤 군(대부분 카스티야에서 동원되었음)은 기병 6,000~10,000명, 보병 10,000~16,000명 으로 편성됐는데 그라나다 전투 말기에는 기병 10,000명, 보병 50,000명으로 그 비율이 1:1 에서 1:5 로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94년 프랑스 국왕이 거느린 군대는 13,000명의 기병과 15,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1552년에는 기병 6,000명과 보병 32,000명으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5로 변화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보병의 중요성은 더더욱 증대됐고 이제 기병은 정찰, 보급 부대 호위 정도의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기병은 부차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 결과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육군은 기병이 지나치게 축소됐습니다. 1635년 프랑스는 보병 115,0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했지만 기병에 배정한 예산은 불과 9,5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이제 1:11에 달한 것 입니다.

30년 전쟁 시기에 주요 교전국들은 기병 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전투는 16세기 보다 기동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황당하지만 보급 문제도 기병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당시의 보급체계는 더 넓은 반경에서 약탈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을 필요로 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장기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자 어처구니 없게도 기병이 좀 더 보급에 유리해 진 것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태평했던(?)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630년대 내내 주요 야전군에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평균 1:10 에서 1:12 사이였다고 하죠.

그러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30년 전쟁에 개입하자 기병의 부족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가 됐습니다. 1635~36년에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은 보병 12,000과 기병 13,000명으로 구성돼 프랑스군에 비해 기동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이해 8월 기습적으로 파리 교외 지역을 휩쓸어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지요.

프랑스도 이 무렵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병 증강을 꾀했으나 예산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파냐 군대의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황급히 기병연대 편성을 시작하지만 예산도 불충분한데다 숙련된 기병을 짧은 시간안에 긁어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결국 궁색한 상황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형식상으로 남아있던 봉건 의무를 귀족들에게 부과합니다. 1636년 프랑스는 왕령으로 아직 군에 있지 않은 귀족들에게 40일간 기병으로 복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 이미 봉건적인 군사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은 기병으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예 국왕의 소집령에 무시로서 대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왕은 1638년 까지 계속해서 매년 소집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정부 예산으로 기병을 증강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해에 프랑스는 6개 중대로 편성된 기병연대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1641년이 되면 각 야전군 소속의 기병 전력은 5,000~7,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경우 보병 10,855명에 대해 기병은 7,261명 이었다고 하지요. 프랑스 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1650년대에는 40% 수준에 달했습니다.

비록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었지만 기동력이 중요해 지면서 기병도 17세기 초반의 찬밥 대접은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다시는 전장의 주역이 되지는 못 했지만 말입니다.

2006년 9월 3일 일요일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y Jay Luvaas

전쟁은 당사자들에게는 고역이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외국의 전쟁은 자국의 교리와 군사 기술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남북전쟁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북부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많은 수의 무관단을 파견했다. 이 책은 1988년에 발간된 물건인데 남북전쟁 시기 유럽 각국 무관단의 활동과 유럽 열강들이 남북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무관단을 파견한 유럽 각국 중 3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20만에 달하는 인원이 연방군에 복무 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귀국해 고급 장교로 진급 했기 때문에 이들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이 이후 독일군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저자는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1부는 남북전쟁 시기 영국, 독일, 프랑스 무관단, 혹은 자원병들의 활동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2부는 1870년대 이후 남북전쟁의 교훈이 이들 국가의 교리, 장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독일의 사례이다. 독일의 고급 장교단은 남북전쟁을 아마추어들의 전쟁이라고 폄하했고 철도의 운용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동시에 독일인들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외국인으로는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남북전쟁에 직접 참여한 독일 장교들이 이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고 이것을 독일의 군사 교리에 어떻게 적용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부록 중에는 남북전쟁을 주제로 한 독일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를 모티브로 한 것인가에 대해서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꽤 재미있다.

2006년 9월 1일 금요일

루이 14세 - 프랑스 보병의 현대화를 가로 막다

굳이 말 안해도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성능이 좋은 신무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높은데 계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짱 황인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프랑스의 자아도취 지존 루이 14세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 뿐 아니라 군대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간섭은 늘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진 않았는데 프랑스 군대가 수발총으로 무장을 교체하는 것이 다른 국가들 보다 뒤졌던 이유 중 하나가 루이 14세의 간섭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군대는 9년 전쟁 이전까지도 각 연대의 척탄병 중대만이 완전히 수발총을 장비 했을 뿐 일반 보병의 수발총 장비는 네덜란드 보다도 뒤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리슐리외 시기인 1640년대에 수발총을 도입한 것을 감안하면 지독하게 보급이 느렸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가 수발총 보급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1680년대 중반 기준으로 프랑스에서는 수발총의 가격이 16리브르, 기존 머스켓은 9리브르였다. 여기에 루이 14세가 수발총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으며 전쟁상 루부아가 이런 국왕의 성향에 부채질을 했던 모양이다.
무엇 보다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데 인건비만도 장난이 아니게 들어갔기 때문에 비싼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
그 결과 일반 보병 중대의 수발총 장비율은 극도로 낮았는데 1670년 편제에 따르면 일반 보병 중대는 수발총 사수가 네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척탄병이었다.

그러다가 9년 전쟁에서 수발총을 대량으로 장비한 적들에게 여러 차례 쓴 맛을 본 뒤에야 뒤늦게 수발총 보급을 늘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됐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의 골치거리인 영국 또한 수발총의 보급이 상대적으로 느렸는데 1690년대 까지도 영국군 보병의 약 40%는 화승식 머스켓을 장비했다고 한다.

꽤 재미있는 것은 루이 14세가 젊은 시절 무기 설계에 관심이 많아 몇 종류의 머스켓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다들 손재주가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