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2007년 10월 23일 화요일
2007년 10월 22일 월요일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 출간과 관련해서
6월에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 출간이 연기됐다는 글을 하나 썼었는데 여기다가 이 책의 번역을 담당하신 진중근 대위님이 댓글을 하나 달아 주셨네요.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의 출간이 조금 더 연기될 것 같습니다
아이쿠. 그런데 진대위님이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면상과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모르실지도.(진대위님, 이 어린양의 정체는 전에 몇 번 뵈었던 윤모입니다.)
한국어판이 나오면 모두 한권씩 질러서 진대위님 싸인이나 받아보지요. 흐흐흐.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의 출간이 조금 더 연기될 것 같습니다
아이쿠. 그런데 진대위님이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면상과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모르실지도.(진대위님, 이 어린양의 정체는 전에 몇 번 뵈었던 윤모입니다.)
한국어판이 나오면 모두 한권씩 질러서 진대위님 싸인이나 받아보지요. 흐흐흐.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독일 국방군의 연령별 징집현황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을 하나 쓰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습니다. 마우스가 고장나서 왼쪽 버튼이 잘 안먹히고 오작동을 가끔씩 하는데 이것 때문에 본문 전체 드랙 + Del + Ctrl S 콤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이쿠.
별로 긴 글이 아니긴 합니다만 같은걸 또 쓰자니 지겨워서 재미있는 통계자료로 때워볼까 합니다.
아래의 표 두개는 Rüdiger Overmans의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222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전쟁 시기에 따른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226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각 군별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1. 시기별 징집 연령대
첫 번째 표가 흥미로운 점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나이 40이 넘은 노땅들이 대규모로 징집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00년생 이상의 남성의 대부분은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이전에 징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전쟁 후기로 가면서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도 징집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Overmans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 초에 징집된 나이 많은 병력들은 후방 부대나 예비부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선부대의 전투병력으로 빠졌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 2. 각 군별 징집연령대
두 번째 표는 각 군별 징집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원 수 옆의 백분율은 각 군의 전체 징집 인원에서 해당 연령대가 어느 정도의 비율인가를 나타냅니다.
이 표가 재미있는 것은 해군의 경우 육군과 공군에 비해 1900년 이전 출생자와 1921년 이후 출생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입니다. 공군은 연령 비율이 어중간한 편이며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1906~1920년 출생자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순수 전투병력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것이 육군인지라 인력배치가 육군 중심으로 된 것 같습니다.
별로 긴 글이 아니긴 합니다만 같은걸 또 쓰자니 지겨워서 재미있는 통계자료로 때워볼까 합니다.
아래의 표 두개는 Rüdiger Overmans의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222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전쟁 시기에 따른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226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각 군별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1. 시기별 징집 연령대
첫 번째 표가 흥미로운 점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나이 40이 넘은 노땅들이 대규모로 징집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00년생 이상의 남성의 대부분은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이전에 징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전쟁 후기로 가면서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도 징집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Overmans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 초에 징집된 나이 많은 병력들은 후방 부대나 예비부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선부대의 전투병력으로 빠졌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 2. 각 군별 징집연령대
두 번째 표는 각 군별 징집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원 수 옆의 백분율은 각 군의 전체 징집 인원에서 해당 연령대가 어느 정도의 비율인가를 나타냅니다.
이 표가 재미있는 것은 해군의 경우 육군과 공군에 비해 1900년 이전 출생자와 1921년 이후 출생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입니다. 공군은 연령 비율이 어중간한 편이며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1906~1920년 출생자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순수 전투병력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것이 육군인지라 인력배치가 육군 중심으로 된 것 같습니다.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세계적 대인배 허경영 총재
모당의 대통령 후보가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뒷구멍으로 추진하다가 나라망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아. 정말 통탄치 않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고작 이정도의 소인배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한반도에 세계적 대인배가 한 분 계십니다.
말 안해도 다 아실 그분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한반도에 세계적 대인배가 한 분 계십니다.
말 안해도 다 아실 그분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2001년 1월 18일부터 28일까지 내가 미국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당선 축하파티에 초청되어 워싱턴에 가서 부시대통령(사진 참조)과 부통령, 그리고 상하원의원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미국 공화당과 한국 공화당과 자매결연도 맺었었다.
그런데 그때 미국의 고위 공직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략)
“미국이 진정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거대한 미국과 맞서서 싸우며 자기 민족을 살리겠다고 몸부림친 민족주의자 반미주의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월맹의 호지명, 그리고 허경영 총재 당신 같은 민족주의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는 미국이 변해가고 있음을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여야와 자민련까지도 고어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고 지지를 했었는데 나는 표범상인 부시가 염소상인 고어를 이기고 대통령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부시에게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여야의 국회의원 20여명이 워싱턴의 호텔에 머물렀지만 그들은 결국 부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10판), 도서출판 새나라, 2000, 2002년, 313~314쪽
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뭔가 꼬여가고 있다!
수령님은 서울을 '해방'할 때 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슈티코프의 아래 전문은 슬금슬금 불길한 기운이 나타날 무렵의 요상한 분위기를 잘 잡아낸 것 같습니다.
암호전문 405809호
평양발, 전송 1950년 7월 2일 04시 00분; 수신 1950년 7월 2일 05시 47분
1950년 7월 2일 05시 55분 소련군 총참모부로 재전송(무선)
긴급
핀시(스탈린) 동무께
362호
미국의 전쟁개입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립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군사작전, 특히 서울의 해방이후 인민들의 분위기는 엄청난 정치적 열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해방지구의 인민들은 인민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으며 인민군을 돕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고 있습니다. 인민위원회, 사회-정치 조직 등 권력기관들이 해방지구에서 속속 설립되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생산과 상업활동이 재개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인민군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빨치산 봉기가 시작됐으며 현재 남한군의 후방 지역에서 빨치산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미국의 선전방송의 확산과 미국 비행기들의 남북한 인구밀집지대, 공업지대, 군사시설에 대한 잦은 공격으로 인민들의 정치적 경향은 다소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후의 승리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해방지구의 인민들(중 소수)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군의 지도부(김일성, 박헌영, 박일우, 김백, 최용건, 강건)는 현재의 복잡한 군사-정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남한의 전역으로 공세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으며 이점과 관련해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자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제게 보병, 전차, 해군 부대들을 추가로 편성하는데 대해 의견을 구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조선 전체에 징병제를 실시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일부, 김두봉과 홍명희는 조선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으며 김일성에게 소련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물어보도록 요청했습니다.(김일성이 제가 김두봉과 홍명희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참여한 우익과 중도파 인사들은 정부의 조치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해방지구에서의 동원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김일성에게 소련정부는 그의 무기 및 탄약 원조 요청에 대해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현재 북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은 양호한 편이며 인민군의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423호 / 슈티코프
1950년 7월 1일
수신인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베리야, 말렌코프,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2007년 10월 14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2)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위의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도데체 이 출판사의 책이 어느정도 수준이냐? 하는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에 귀한 돈을 낭비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샘플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도데체 이 출판사의 책이 어느정도 수준이냐? 하는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에 귀한 돈을 낭비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샘플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과학 기술 수준이 그렇게 높고 훌륭하다면 왜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서구 사회의 일반적 수준보다 낮은 것일까?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과학 기술과 소비 생활의 현격한 격차. 독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낮은 것은 바로 미국의 각종 제재조치와 경제봉쇄 때문이다.
(중략)
일부 독자들은 북한의 과학 기술이 그렇게 우수하다면 기술의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면 경제난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난을 해결한답시고 과학 기술을 수출할 경우 미국은 주변국의 전력을 탐색하듯이 북한의 사정에 통달하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다. 만약 백두산 1호, 백두산 2호의 정보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미국은 이에 대한 방어 기술을 실제로 개발할 지도 모른다.
이 경우 북한으로서는 지금까지 유지하였던 군사적 우위를 한 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다.
전영호, 최한욱,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도서출판 615, 2006 pp.115~117
시리아 관련 소식
뉴욕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Analysts Find Israel Struck a Nuclear Project Inside Syria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번 건으로 승상께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신듯 보입니다.
Analysts Find Israel Struck a Nuclear Project Inside Syria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번 건으로 승상께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신듯 보입니다.
Behind closed doors, however, Vice President Dick Cheney and other hawkish members of the administration have made the case that the same intelligence that prompted Israel to attack should lead the United States to reconsider delicate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over ending its nuclear program, as well as America’s diplomatic strategy toward Syria, which has been invited to join Middle East peace talks in Annapolis, Md., next month.
Mr. Cheney in particular, officials say, has also cited the indications that North Korea aided Syria to question the Bush administration’s agreement to supply the North with large amounts of fuel oil. During Mr. Bush’s first term, Mr. Cheney was among the advocates of a strategy to squeeze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n hopes that it would collapse, and the administration cut off oil shipments set up under an agreement between North Korea and the Clinton administration, saying the North had cheated on that accord.
2007년 10월 13일 토요일
나를 낚은 이 한권의 책 -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
우마왕님이 쓰신 글을 읽고 나니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놈.
서평은 책을 살 때 선택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만 언제나 만족할만한 기준이 되지는 못 합니다. 특히 일반독자의 서평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라는 문제의 서적도 아마존의 독자서평을 보고 혹해서 산 책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책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같은 제 3세계 후진국에서나 볼법한 싸구려 애국심을 학술적인척 하면서 팔아먹는 아주 고약한 책이 되겠습니다. 상국에서 조차 이런 저급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Peter R. Mansoor는 서문에서 Dupuy, van Creveld 등의 군사사가들이 주장한 독일국방군의 전술적 우수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독일군의 전술적 능력은 미군의 그것보다 우수했는가? 정말 미군은 행정적으로만 우수한 “회계사 군대”였고 독일군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졌는가?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외칩니다.
“나의 GI는 이러지 않아~”
그렇다면 정말로 Mansoor의 GI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Mansoor의 책을 읽고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나지가 않습니다. 아니 주장을 했으면 증명을 해야지 이게 뭐하자는 짓이란 말입니까!
물론 Mansoor의 연구가 아주 형편없는 저질은 아닙니다. 그의 연구는 상당한 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읽을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전혀 내놓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즉 미군이 독일군 보다 종합적인 전투력에서 우수했다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Mansoor의 글을 읽으면 미군의 전투력이 꾸준히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독일군이 전성기였을 당시의 전투력을 능가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 입니다. Mansoor가 들고 있는 많은 전투사례들은 독일군이 그야말로 붕괴 직전의 빈사상태에 이른 1944년 겨울과 1945년의 것들이니 제대로 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특별히 시간이 남아돌거나 돈이 남아돌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내용들은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른 훌륭한 저작들에 다 나와있으며 인용하는 자료들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정작 주장하는 핵심에 대해서는 변죽만 울리고 있으니 좋은 책이 되긴 처음부터 글러먹었다고 해야 될까요?
바로 이놈.
서평은 책을 살 때 선택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만 언제나 만족할만한 기준이 되지는 못 합니다. 특히 일반독자의 서평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라는 문제의 서적도 아마존의 독자서평을 보고 혹해서 산 책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책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같은 제 3세계 후진국에서나 볼법한 싸구려 애국심을 학술적인척 하면서 팔아먹는 아주 고약한 책이 되겠습니다. 상국에서 조차 이런 저급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Peter R. Mansoor는 서문에서 Dupuy, van Creveld 등의 군사사가들이 주장한 독일국방군의 전술적 우수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독일군의 전술적 능력은 미군의 그것보다 우수했는가? 정말 미군은 행정적으로만 우수한 “회계사 군대”였고 독일군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졌는가?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외칩니다.
“나의 GI는 이러지 않아~”
그렇다면 정말로 Mansoor의 GI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Mansoor의 책을 읽고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나지가 않습니다. 아니 주장을 했으면 증명을 해야지 이게 뭐하자는 짓이란 말입니까!
물론 Mansoor의 연구가 아주 형편없는 저질은 아닙니다. 그의 연구는 상당한 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읽을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전혀 내놓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즉 미군이 독일군 보다 종합적인 전투력에서 우수했다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Mansoor의 글을 읽으면 미군의 전투력이 꾸준히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독일군이 전성기였을 당시의 전투력을 능가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 입니다. Mansoor가 들고 있는 많은 전투사례들은 독일군이 그야말로 붕괴 직전의 빈사상태에 이른 1944년 겨울과 1945년의 것들이니 제대로 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특별히 시간이 남아돌거나 돈이 남아돌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내용들은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른 훌륭한 저작들에 다 나와있으며 인용하는 자료들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정작 주장하는 핵심에 대해서는 변죽만 울리고 있으니 좋은 책이 되긴 처음부터 글러먹었다고 해야 될까요?
2007년 10월 11일 목요일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
이 글은 World War II, 2005 년 11월호의 26~32, 80쪽에 실린 George F. Winter의 글 Panther’s rampage in the Ardenne를 날림으로 번역한 것 입니다. 이미 예전에 채승병님이 바르크만의 시각에서 본 만헤이 전투에 대한 글을 번역하신 적이 있는데 Winter의 글은 미국쪽의 시각도 반영돼 있어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둘러싼 전투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콩떼 뒤부아 생-장(Comte du Bois Saint-Jean)이라는 성은 벨기에의 오데뉴(Odeigne)에서 4마일 떨어진, 바라끄-드-프레뛰르-라-로셰(Banique-de-Fraiture-La-Roche) 가도의 교차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1944년 12월 말, 아돌프 히틀러의 아르덴느 공세가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이 구석진 곳의 작은 성은 제2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의 제2SS기갑연대 1대대 4중대소속 판터전차의 공격을 위한 집결지가 되었다.
4중대는 제6SS기갑군이 뮤즈강을 향해 공세를 펼치면서 계속해서 전력이 소모되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다스라이히 사단이 전투에 투입될 시기가 왔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제2SS기갑군단의 예하 제대로서 만헤이(Manhay) 방면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SS기갑군단장 비트리히(Wilhelm Bittrich)는 리에쥬(Liege)와 바스토뉴(Bastongne)를 잇는 N15도로가 지나가는 만헤이를 점령함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두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만헤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비트리히는 그의 군단을 그대로 리에쥬를 향해 북진시키거나 아니면 바스토뉴로 방향을 돌려 이곳을 방어하는 미 제101공정사단과 그 배속부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제5기갑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12월 24일 오전, 1대대의 3개 전차중대는 오데뉴에서 발진해 오통(Hotton)-만헤이 가도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기갑척탄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그랑므닐(Grandmenil)과 에레제(Erezee)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 두 마을을 함락시키면 만헤이는 고립되기 때문에 미군은 만헤이를 버리고 퇴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은 프레뉘(Freyneux)와 라모르므닐(Lamormenil)에 방어선을 형성한 미 3기갑사단의 TF 케인(Kane) 소속의 셔먼 전차 11대와 지원 보병의 저항을 받아 저지되었다.
그러나 비트리히는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비트리히는 이 지구의 미군은 지난 수일간의 격전으로 전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한번의 결정적인 타격만 가한다면 붕괴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타격”을 가하는 것이 4중대 소속의 판터전차들의 임무였다.
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부대인 다스라이히 사단에서도 제1대대의 4중대는 특히 우수한 부대였다. 4중대는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러시아 전선을 거친 역전의 용사로 1944년 4월 4중대의 중대장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전투에서는 12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의 중대원 중 한명은 폴 대위가 “쾌활한 성격의 지휘관이었으며 중대원들을 잘 배려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한 중대원은 “과묵하지만 병사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폴 대위의 부관은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Oberscharführer) 였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농부의 아들이었던 바르크만은 폴과는 성격이 판이했지만 그 역시 경험많은 전차장이었다. 그의 전우들은 바르크만에 대해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평했으며 “언제 엄폐하고 언제 기동해야 할지 잘 아는” 바르크만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바르크만은 노르망디 전투기간인 7월 27일에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생 로-쿠탕스(Coutances) 가도에서 9대의 셔먼을 격파한 바 있었다. 바르크만은 이 전투의 공적을 인정받아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성 인근의 숲에서 비트리히의 만헤이 공격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며 전투 투입을 고대하던 중대원들은 한 고급 장교의 방문을 받았다. 폴 대위는 새벽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 장군은 나에게 즉시 북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군과 일개 대위와의 대화치고는 특이한 일이었는데 폴은 그 장군에게 자신의 연대장인 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Obertsturmbannführer)과 먼저 상의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지 물었다.
바로 뒤에 폴은 연대장에게 호출되어 오데뉴의 교회에 위치한 연대본부로 갔으며 엔셀링은 폴에게 다시 한번 공격을 지시했다. 엔셀링, 폴, 그리고 바르크만은 만헤이 도로 부근을 정찰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차로 공격하기에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우리쪽은 기동할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데 비해 미군은 고지대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사격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연대장에게 야간 공격을 제안했고 연대장은 나에게 공격에 대한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폴의 공격계획은 그의 중대가 제3SS 기갑척탄병연대 소속의 척탄병의 지원을 받으며 오데뉴에서 만헤이 도로로 진출하는 것 이었다. 일단 고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만헤이로 진격한 뒤 만헤이를 탈취하고 다시 이곳에서 오통 방면으로 진출, 미 3기갑사단의 측면으로 우회해 돌파구를 넓힌 뒤 후속 부대들이 전과를 확대하도록 한 다는 것 이었다. 이 공격은 24일 밤 22시에 예정되었다.
바르크만과 폴은 공격준비를 위해 중대로 돌아갔다. 16시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중대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중대의 3개 소대 모두가 완편상태였고 17대의 판터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 소속의 판터 5대였다. 프라우셔는 1939년에 SS에 입대한 베테랑으로 소련 전선에서 8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했으며 노르망디에서는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 프라우셔의 뒤에는 역시 노르망디 전투의 베테랑인 피셔(Oskar Fischer)의 전차가 따랐으며 피셔의 사수는 비숍(Bischof)이었다.
폴의 402호차는 3소대의 바로 뒤에 후속했으며 폴의 뒤는 바르크만의 401호차가 따랐다. 중대본부의 뒤에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지휘하는 2소대의 판터 5대가 후속했다. 2소대의 뒤는 얼마전 갓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의 1소대가 따랐다.
엔셀링은 폴의 타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2중대 소속의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판터 6대를 배속시켰다. 하게샤이머의 소대는 프레뉘 외곽에서 4중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하게샤이머는 폴의 중대원들과 친숙했는데 그는 동부전선에서 바르크만과 같은 전차를 타면서 19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마지막으로, 폴 SS대위가 지휘하는 23대의 판터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3SS 기갑척탄병연대의 16중대인 돌격공병중대가 배속되었다.
독일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무렵, 오데뉴에서 3/4마일 떨어진 숲에는 미 7기갑사단 제40전차대대의 A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알렌(Malcolm Allen) 대위가 지휘하는 A중대에는 셔먼 전차 6대가 남아 있었으며 A중대는 마을 바깥으로 향하는 도로의 북쪽, 만헤이 도로의 교차점 부근에 포진하고 있었다.이 교차점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서쪽방향으로 도로가 꺾어졌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지는 S자 커브가 있었으며 도로는 양 옆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이 도로의 동쪽 가에는 풀밭이 있었고 여기에는 넬슨(Roy Nelson) 대위가 지휘하는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S커브로 된데다 양 옆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시계가 불량했지만 한편으로는 넬슨의 중대에 엄폐물을 제공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도저를 장착한 전차가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얕은 구덩이를 파 놓았기 때문에 넬슨의 전차들은 포탑만 내밀어 폭로면적이 줄어들었고 또 독일군의 포화로 부터도 어느 정도 방어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C중대의 혼드롭(Donald Hondorp) 하사는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다. “우리는 마치 하얀 바탕의 검은 점 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목표물이었습니다.”
넬슨의 중대가 배치된 풀밭의 동쪽으로는 B중대와 D중대 소속의 전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두 중대의 셔먼과 M5A1경전차들은 말랑프레(Malempre) 마을 주위에 배치되었다.
브라운(Cook Brown) 중령의 제40전차대대 본부는 만헤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전투 초기에 생-비트에서 격전을 치뤘다. 그 결과 16일 전투 시작당시 60대였던 대대의 전차는 32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역시 만헤이에 본부를 둔 로젠바움(Dwight Rosenbaum) 대령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로젠바움 대령의 A전투단은 40전차대대와 48기계화보병대대(Armored Infantry Battalion), 그리고 1개 소대의 구축전차와 전투공병, 포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전투로 소모된 로젠바움의 부대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의 탈진상태였다. 만헤이로 이동한 로젠바움의 전투단은 크리스마스 이브만은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18시, 만헤이에 도착한지 겨우 6시간이 지났을 때 로젠바움 대령은 제18군단을 지휘하는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소장으로부터 다시 만헤이를 버리고 그 북쪽의 고지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0전차대대가 철수의 후위를 맡으며 이동시간은 22시 30분으로 예정되었다.
22시 정각, 폴은 계획대로 오데뉴를 벗어나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뒤 폴의 중대는 알렌 대위의 A중대와 교전했고 이 전투로 셔먼 두 대와 판터 한대가 격파되었다. 프라우셔의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전차로 갈아타고 공격을 지휘했다. 독일군이 재정비 하는 동안 A중대는 만헤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야간 전투 중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바르크만은 북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자신의 중대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바르크만은 만헤이 가도에 도착한 뒤 (원래의 대형대로) 아직도 프라우셔가 자신의 앞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북진하기로 결정했다.
맑은 하늘과 밝은 달이 눈내린 들판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좋았으며 바르크만은 만헤이로 향하는 낮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무전기의 문제 때문에 나머지 중대의 차량들과 교신이 되지 않던 그때, 바르크만은 앞쪽의 길가에 서 있는 한대의 전차를 발견하고 그것이 프라우셔의 전차라고 생각했다.
바르크만은 전우들과 합류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갔고 포탑 위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프라우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차의 승무원은 그대로 해치를 닫아 버렸고 바르크만도 (상황을 깨닫고) 포탑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크만은 즉시 그의 사수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에게 포탑을 돌려 옆의 전차를 쏘라고 명령했다. 두 대의 전차는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포겐도르프는 포탑을 선회할 수가 없었다. 바르크만의 조종수는 명령도 없이 반사적으로 전차를 후진시켜 포겐도르프가 포탑을 돌려 사격할 수 있도록 했다.
판터가 발사한 포탄은 그대로 셔먼의 후부를 관통해 버렸는데 놀랍게도 그 셔먼의 승무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셔먼의 사수인 오스타체브스키(Frank Ostaszewski)가 부상을 입는데 그쳤으며 바르크만이 프라우셔라고 착각했던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다른 승무원을 구출해서 숲 속으로 숨었다.
바르크만의 401호차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운에 감사하면서 그대로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바르크만은 오른쪽을 살펴보다가 셔먼으로 보이는 전차 두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두 대 모두를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격파된 두 대의 장갑차량은 셔먼이 아니라 제814 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이었다.
바르크만은 여전히 본대를 찾지 못한데다가 적의 전차 세대와 맞딱드리게 되자 속도를 줄이고 조금 더 조심해서 전진하기로 했다. 바르크만은 그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우리의 앞에 나무가 없는 개활지,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 앞의 도로는 큰 S자 커브로 꺾여 있었고 그 앞은 나무로 둘러 쌓인 내리막 길 이었다. 순간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그 목초지에는 적의 전차 아홉 대가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바르크만은 이 상황에서는 능청을 떠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조종수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바르크만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 나갔고 도로가 굽어지는 곳 까지 나간 뒤 전차를 멈추게 했다. 이제 한대의 셔먼을 제외하고는 바르크만을 쏠 수 없는 위치였다.
바르크만의 회고는 계속된다.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미군 전차병들이 전차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제 바르크만의 전차가 중대의 선두라는게 확실해 졌고 바르크만은 뒤따라오는 프라우셔가 미군 전차들을 처리해 주기를 바라면서 미군 전차들을 쏘는 대신 전진을 계속했다.
바르크만이 생각했던 대로 그가 떠나고 몇 분 뒤 프라우셔의 전차가 초지에 도착해 미군 전차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모든 미군 승무원들이 숲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 프라우셔의 전차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셔먼이 프라우셔에게 발포를 했는데 그것은 빗나갔다. 프라우셔는 조명탄을 발사해 주변을 밝혔다.
조명탄이 타오르는 동안 프라우셔의 사수는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다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었다. 혼드롭 하사는 자신의 셔먼을 구덩이에서 몰고 나오는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엔진부가 피격되어 전차에 불이 붙었습니다.” T. C. 그레이(Gray) 하사가 전차장인 두번째 셔먼도 구덩이에서 후진해 나왔다. “우리는 두발을 사격했지만 곧 전차포의 제퇴기가 고장나 버렸습니다.” 혼드롭과 그레이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프라우셔와 그의 소대 소속 전차들은 예기치 못하게 미군과 조우했지만 미군 전차들의 뒤로 들어가 S자로 커브가 진 도로 주변의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했으며 다시 만헤이로 향하기 전에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를 모두 격파했다.
한편, 바르크만은 만헤이에 도착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던 찰나 그는 세대의 미군 전차를 발견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대로 만헤이로 들어갔다. 만헤이는 오후에 로젠바움 대령이 받은 철수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미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날이 어두운데다가 미군들은 각자의 임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바르크만의 판터가 독일 전차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언제까지나 미군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곧 미군들은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알게 되었다. 제40전차대대 본부의 골디(William Goldie) 소위는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대로 건물로 뛰어들어와 대령에게 독일 전차가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전차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고 대령은 모두 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였고 나도 마찬가지였지요.”
골디 소위에게 발견 되기 전에 바르크만은 한대의 지프를 깔아 뭉개 버렸다. 바르크만의 판터와 지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은 그때 도로의 바깥에 서 있던 하프트랙의 운전병 파웰(Morris W. Powell) 이었다. “우리는 오른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걸 들었습니다. 한대의 탱크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섬광이 번쩍였고 곧이어 충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큰 탱크는 처음 봤습니다. 아마도 88mm 포 같았는데 그거 전봇대 처럼 큼지막 하더군요. 지프는 두 명의 사람을 태운 채로 뒤집어져 그대로 그 괴물에게 뭉개졌습니다.”
운전병들이 바르크만의 전차를 피하려고 운전을 하는 통에 로젠바움 대령이 계획한 질서정연한 후퇴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바르크만은 마을을 벗어난 뒤 포탑 밖으로 나와 마을쪽을 바라봤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 차량 중에는 셔먼도 있었다.” 바르크만은 포탑을 6시 방향으로 돌려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이제 도로는 완만한 오르막 길이었다. 포겐도르프는 이동하는 와중에 마을을 향해 포격을 계속했다. 스튜어트 경전차 세대와 하프트랙 한대, 그리고 셔먼 한대가 더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제 판터의 엔진도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더 이상 운이 따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바르크만은 전차를 숲으로 이동시켜 숨은 뒤 중대장과 나머지 전차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만헤이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를 빠져나가고 얼마 뒤 프라우셔가 만헤이에 도착했다. 프라우셔는 “뒤에 매복해 있던 한대의 셔먼이 내 전차의 왼쪽 측면을 명중시켰고 내 전차는 그대로 기동불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격은 A중대의 셔먼이 발사한 것이었고 이것을 발사한 사수 코소브스키(Nicholas Kosowsky)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선두의 적 전차가 집 바로 옆에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뒤의 두 번째 적 전차가 조명탄을 발사한 뒤 우리 전차의 왼쪽 구동륜을 파괴했지요.” 셔먼의 승무원들은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기동불능이 된 전차에서 탈출했다.
프라우셔는 그날 밤 두 번째로 다른 판터로 갈아타고 지휘를 계속했다. 프라우셔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셔먼 한대를 더 격파했다. 이제 미군은 만헤이에서 밀려났는데 폴 대위는 마을 북쪽으로 더 나가는 대신 만헤이에서 빠져나와 그랑므닐 방향인 서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도로는 북쪽과 남쪽의 숲으로 경계지어 있었으며 그 뒤로는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개울이 보말(Bomal) 북서쪽으로 향하는 하수도의 위를 지나 흐르고 있었다. 판터들이 진격하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1소대를 지휘하는 크노케 소위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포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차를 좌측으로 회피시켰고 동시에 숲속을 향해 대응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길 가장자리와 경사면을 살펴보지도 않은채 전차를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포탑과 포신이 그대로 초지에 처박히게 됐고 전차는 그대로 멈춰 버렸습니다.” 크노케는 포탑 밖으로 나와 조종수가 뒤로 빠져나가도록 유도했고 그의 전차는 다시 도로로 올라섰다. 하지만 크노케는 어두운 가운데 포구를 살펴보고 진흙으로 막혀버려 사격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전우들을 놔두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탑과 차체의 기관총은 사용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랑므닐 근처에서 나는 중대장의 전차를 만났습니다.” 폴 대위는 포탄의 파편에 머리를 크게 다쳐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크노케의 사수가 폴 대위의 차량에 대신 탑승해 전차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무렵 프라우셔는 보말의 도로 교차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랑므닐로 진입한 상태였다. 프라우셔는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포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내 뒤를 따르던 내 소대의 네번째 전차가 화염에 휩싸인 채 멈춰섰습니다.” 그 전차는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피셔와 사수인 비숍, 장전수와 조종수 등 네 명은 그대로 타 죽었다. 무전수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프라우셔는 그의 우측 150m 떨어진 곳에서 피셔의 전차를 격파한 셔먼으로 생각되는 차량을 발견했다. 피셔의 판터가 불타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기 때문에 프라우셔는 미군의 전차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사수에게 포탑을 세시 방향으로 돌리라고 명령하고 목표를 확인한 뒤 발사명령을 내렸다. 미군의 전차는 순식간에 격파되었다. 첫번째 전차를 격파한 직후, 프라우셔는 셔먼으로 생각되는 두번째 차량을 발견했고 그 것 또한 격파했다. 프라우셔가 셔먼이라고 착각한 그 두대의 차량은 제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이었다.
뒤를 따르던 2소대의 판터들은 격파된 피셔의 전차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정지해야 했다. 비스만은 조종수에게 왼쪽으로 선회해 도로 옆의 초지로 우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비스만의 전차를 따랐다. 그러나 얼마 뒤 다섯대의 판터들은 제238공병대대가 매설한 지뢰지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뢰폭발로 구동륜과 궤도가 파괴되었다. 네대가 가동 불능이 되었으며 다섯 번째 차량은 길 가에 멈춰섰다.
이제 프라우셔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의 뒤는 격파된 판터와 지뢰밭에 의해 차단된데다 사방은 미군 천지였다. 프라우셔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지났습니다. 나는 홀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끄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한편, 비스만은 전차에서 탈출해 지뢰밭을 건너 도로로 올라왔고 근처의 집으로 피했다. 그리고 잠시 뒤 1소대장 크노케가 합류했다. 두 사람이 다음 단계를 의논하고 있을 때 프라우셔도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의논을 한 뒤 세 사람은 에레제까지 가기로 하고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했다.
의논을 마친 뒤 후속하는 크노케의 전차는 격파된 피셔의 판터를 피해서 집 앞의 정원으로 우회해 앞으로 나갔다. 크노케의 전차는 이 장애물을 통과해 프라우셔의 전차와 합류했고 그곳에서 5마일 떨어진 에레제를 향해 나갔다.
에레제에 도착한 그들은 2중대의 하게샤이머와 합류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하게샤이머는 폴이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그가 공격을 지휘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공격을 지휘하게 된 하게샤이머는 프라우셔와 문제를 상의했다. 하게샤이머는 미군의 방어외에도 이제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군의 공습에 대해서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격하는 와중에 전차를 지원할 보병들과도 접촉이 끊어졌다.
하게샤이머는 자기 전차로 돌아가다가 길 가장자리의 구덩이에 미군 두세명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게샤이머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총을 빼앗으려 했지요. 그러자 갑자기 그들 중 한명이 내 어깨를 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미군들은 달아났다. 하게샤이머에게 있어 전쟁은 끝났다. 하게샤이머는 만헤이로 후송됐고 나머지 전차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전차들은 그랑므닐에 도착해 그곳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날이 밝아오자 미군의 비행기들이 나타났다. 프라우셔는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항공우세는 엄청났습니다. 도로로 나가는 차량들은 하늘 위를 계속 선회하고 있는 세대의 적기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4중대원들은 최선을 다해 엄폐했지만 그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크노케는 이렇게 회상했다. “25일 내내 미군의 포화는 격렬했습니다. 이른 오후 무렵 내가 탄 411호차는 두 발의 포탄을 맞았습니다. 나는 내 승무원들에게 해치를 열라고 했는데 잠시 뒤 내 차량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였습니다. 결국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랑므닐의 판터들이 지독한 포격에 시달린 이유는 4중대의 나머지 전차들이 만헤이를 떠난 뒤에 있었던 일의 결과였다. 그날 아침,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숲에서 나와 만헤이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파괴되거나 뒤집어진 지프, 트럭, 하프트랙, 전차들을 목격했다. 미군들은 철수했고 기갑척탄병들이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폴 대위가 탑승하던 판터를 만날 수 있었다. 두대의 전차는 마을의 북쪽 방향으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오전 늦게 미군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마을 북쪽의 고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31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가 마을을 탈환하려 했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셔먼 전차들은 은폐하고 있던 곳에서 나와 지원하는 보병들과 함께 만헤이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곧 판터 두대의 사거리안에 들어왔고 독일군은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선 셔먼의 장전수였던 놀티(John Naulty) 상병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그날의 임무를 받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버려진 아군의 차량들을 지나쳤습니다.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두발의 포탄은 피했지만 결국 차체 전면 좌측에 한발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따르던 네대의 셔먼도 모두 격파됐다.
그리고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10대의 셔먼이 도착했다. 클라크(Bruce Clarke)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올프 대위는 심하게 주저했다. 올프 대위는 클라크 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있는 곳에서 만헤이 사이에 대여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어 흩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헤이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진격하는 도중) 만헤이 북단에 위치한 적의 포화에 취약해 집니다. 이건 자살행위입니다.” 올프 대위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긴 제7기갑사단 B전투단의 지휘관 클라크 준장은 만헤이 공격을 지켜보기 위해 근처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에게 갔다. 두 장군은 30분 정도 상의를 한 뒤 올프 대위에게 그의 중대를 후퇴시키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전차로 공격하는 대신에 8개 대대의 포병을 동원해 만헤이 일대를 포격했다. 포격은 꾸준히 계속됐으며 포격이 끝난 27일까지 총 8,600발의 포탄이 독일군을 강타했다.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방어하던 독일군 척탄병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두 마을의 건물 중 멀쩡한 것은 단 한채도 없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인 25일 저녁, 폴의 중대원들은 그랑므닐에서 철수했다. 이틀 뒤, 4중대는 사단 본대의 철수에 따라 이 지역을 벗어났다.
폴의 중대는 수많은 미군 전차와 차량을 격파하고 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더 이상 전진할 수 는 없었다. 만헤이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비트리히가 그의 부대를 북쪽의 리에쥬로 전진시키지도 못하고 또 남쪽의 바스토뉴로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중대는 그들의 공격력을 서부전선의 마지막 대공세에서 소진한 뒤 점점 줄어드는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전투에 휩쓸렸다. 4중대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날 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마지막 포탄을 발사한 뒤 중대장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중대원들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중대를 해산했다.
2007년 10월 8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공산주의관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김규식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뭐랄까, 언뜻 보면 대단히 극우적인 인사의 발언 같은데 김규식 박사와 같이 온건하고 중립적인 지식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데 한민족이 대단히 잔인하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되면 러시아 보다 더 잔인해 질 것이라는 예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실제로 입증되었으니 김박사의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만 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뭐랄까, 언뜻 보면 대단히 극우적인 인사의 발언 같은데 김규식 박사와 같이 온건하고 중립적인 지식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데 한민족이 대단히 잔인하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되면 러시아 보다 더 잔인해 질 것이라는 예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실제로 입증되었으니 김박사의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
2007년 10월 3일 수요일
David M. Glantz의 새 저작
독소전쟁사(When Titans Clashed)와 관련된 문제로 David Glantz씨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에 꽤 재미있는 소식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차기작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을 준비중이라는 것 입니다.
편지내용만 놓고 보면 두 권 이상으로 이뤄진 대작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저작입니다. 물론 출간은 2009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기다릴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이 양반이 차기작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을 준비중이라는 것 입니다.
편지내용만 놓고 보면 두 권 이상으로 이뤄진 대작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저작입니다. 물론 출간은 2009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기다릴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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