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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1일 토요일

Aces at Kursk : The battle for aerial supremacy on the Eastern Front 1943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 또 한권 나왔습니다. 통계에 기반한 군사작전 연구로 유명한 드퓨이 연구소(The Dupuy Institute)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Christopher A. Lawrence)가 집필한 Aces at Kursk 입니다. 이 책은 원래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발간이 미뤄지게 됐습니다. 로렌스가 The Battle for Kyiv : The Fight for Ukraine's Capital를 집필하느라 이 책 보다 늦게 간행이 됐습니다.


 이 책은 제2차세계대전의 항공전, 특히 러시아전선의 항공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필수적인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로렌스는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수집한 러시아의 1차사료와 기존에 공개되어 있던 독일측 1차 사료를 면밀하게 교차검증해서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을 상세하게 재구성했습니다. 이 연구의 강점은 독일군이 공세를 가하던 기간의 항공 작전 통계를 구체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과거 소련에서 나온 연구와 여기에 기반했던 서방의 연구(Von Hardesty의 Red Poenix 같은 저작)는 소련측의 엉터리 통계를 인용해서 신뢰성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로렌스는 보다 정확한 통계에 바탕을 두고 작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쿠르스크 항공전 연구 중에서는 통계가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일 단위로 상세한 통계를 제공하고 있다 보니 방대한 데이터에 압도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방대한 통계자료를 쏟아내고 있지만 책이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쿠르스크 전투 항공작전의 전체적인 양상을 분석하면서 중간 중간 자잘한(?) 주제들을 짚고 넘어가면서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소련 에이스들의 격추 전과는 얼마나 정확한가, 항공기의 전차 공격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가 하는 것 들입니다. 로렌스는 소련 공군은 항상 아군 손실 보다 독일군 손실이 더 크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고, 이 점은 소련 공군 에이스들의 전과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로렌스는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 소련 공군 에이스들이 격추했다고 주장하는 72대 중 32대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건 니콜라이 굴라예프인데, 이 사람은 쿠르스크 전투 중 12대를 격추했다고 공인 받았으나 실제 격추는 2대 정도로 평가합니다. 소련 공군이 쿠르스크 전투 공중전에서 거둔 공식 전과는 실제 보다 7.4배 이상 과장되어있으니 소련 공군의 에이스 조종사들의 전과 기록은 그나마 양호한 편 입니다. 반면 훈련 수준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독일 공군의 전과 기록은 매우 정확하다고 평가합니다. 로렌스는 독일 공군 에이스들이 격추했다고 공인받은 99대 중 실제 격추한 것은 95대로 정확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의 경우 쿠르스크 전투 중 20대를 격추했는데 이건 모두 사실일 거라고 봅니다.


 


2024년 4월 16일 화요일

The Defeat of the Damned

 무장친위대의 딜레방어 여단은 전쟁범죄로 유명한 부대입니다. 많은 무장친위대 부대가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악명에 견줄 수 있는 부대는 없습니다. 워낙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형편없는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의 부대사가 몇권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온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군사적으로 무가치한 부대는 관심이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미국의 저명한 군사사학자 내쉬(Douglas E. Nash sr.)가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를 쓴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금 놀랐습니다. 어째서 이런 저명한 군사사학자가 딜레방어 여단 같이 형편없는 범죄조직의 부대사를 쓰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쉬가 집필한 The Defeat of the Damned : The Destruction of the Dirlewanger Brigade at the Battle of Ipolysag, December 1944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1944년 말 헝가리의 이포이샤그(Ipolyság)에서 벌어진 전투에 초점을 맞춘 연구입니다.(Ipolyság 현재 슬로바키아의 도시 Šahy가 되어 있습니다.) 내쉬는 무장친위대 제4기갑군단의 역사를 다룬 3부작 From the Realm of a Dying Sun을 집필하던 중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딜레방어 여단의 부대사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이포이샤그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체 15개 장 중에서 11개 장이 이포이샤 전투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제외한 3개 장이 딜레방어 여단의 창설, 성장과정, 종전에 이르기 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는 이펠(Ipeľ, 헝가리어로는 이포이Ipoly)강을 접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가는 주요 도로 중 하나가 이 곳을 지나갑니다. 이런 지리적 입지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전쟁에서 요충지로 인식됐습니다. 이때문에 1944년에도 이 도시는 격전지가 됩니다.

 이포이샤그 전투는 1944년 12월 14일 소련군 제9근위기계화군단이 이포이샤그를 점령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12월 15일 부터 독일군이 감행한 역습입니다. 12월 15일 전투에는 딜레방어 여단이 포함된 린텔렌(Rintelen) 사단집단이 주공을 맡았으나 소련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은 제357보병사단의 잔존병력에 딜레방어 여단, 헝가리군 등 다양한 부대를 배속시킨 임시부대였습니다. 이 임시 부대는 제357보병사단장 요제프 린텔렌(Josef Rintelen) 장군의 이름을 따와서 린텔렌 사단집단으로 불렸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의 패배로 소련군의 전력이 상당히 강하다는걸 파악한 독일군은 제8기갑사단을 이포이샤그 지구로 이동시켜 반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제8기갑사단의 반격도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이포이샤그 지구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포이샤그 전투 당시 딜레방어 여단의 형편없는 작전 수행을 매우 세밀하게 재구성 했습니다. 이 부대의 전투력이 엉망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범죄자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정치범들로 구성되어 병사들의 전투 의지가 낮았고, 지휘관들은 후방에서 치안유지와 학살을 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보유한 장비도 그에 맞게 잡다한 구식 무기 위주였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에 배속된 뒤에는 다른 부대들의 중화기 지원을 받을 수 있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형편없는 전투력을 단기간에 개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포이샤그 전투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많은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않고 도주하거나 소련군에 투항했습니다.

 1944년 12월 헝가리 전역을 다루는 연구는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수가 독일 기갑사단의 작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내쉬의 연구는 독일군 내에서도 전투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보병 부대가 중요한 작전에 투입되어 와해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만 읽었는데, 이렇게 상세하게 작전 경과를 분석한 연구가 나와서 반갑습니다. 

 

※유튜브의 WW2TV 채널에 내쉬가 Ipolysag 전투에 대해 설명한 동영상도 올라와 있습니다.

(258) Dirlewanger Brigade and the Battle of Ipolysag - YouTube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Ben Wheatley 저,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

 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벤 휘틀리(Ben Wheatley)의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는 제가 2023년에 읽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 중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1990년대에 칼 하인츠 프리저의 선구적인 연구가 발표된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서술도 상당 부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틀리의 이 연구는 새로운 사료를 활용해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기존에 발표한 연구들을 보완한 것 입니다. 예를들어 프로호롭카 일대의 항공사진을 분석한 연구는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라는 제목으로 2019년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에 실렸습니다.

 이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새로운 사료 발굴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그중에서도 프로호롭카 전투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휘틀리는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이런 선입견이 틀렸다는걸 입증했습니다. 휘틀리의 업적 중 특히 중요한 건 그동안 사료의 공백 이었던 1943년 7월 20일 부터 1943년 8월 1일 까지 독일측의 기갑차량 통계를 입증한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상이 드러난 뒤 이 시기의 사료가 공백상태라는 점을 들어 독일측이 실제 손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물론 이건 러시아쪽에서 불리한 사실이 드러날 때 마다 내놓는 상투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휘틀리의 연구로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러시아측의 주장은 또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저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분석했을 때 1943년 7월 11일 부터 7월 20일까지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 손실은 '최대 16대'이며 치타델레 작전 전 기간을 포함한 손실은 '41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측 1차 사료의 성격을 분석한 1장이 매우 중요하니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군 각 사단의 차량 '차대번호' 까지 확인하는 철저한 분석으로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개별 차량의 차대번호까지 확인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 러시아쪽이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러시아쪽에서는 휘틀리의 연구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죠.

 통계 분석 뿐만 아니라 항공사진을 활용한 전투 분석도 매우 훌륭합니다. 저자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한 제4장에서 항공사진을 구술자료 및 문헌자료와 교차 검증해 전투를 미시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휘틀리는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은 핵심적인 요인은 독일군의 진격에 당황한 소련군이 충분한 정찰 및 정보수집 없이 역습을 감행한 데 있다고 봅니다. 이때문에 소련 제5근위전차군은 소련군이 구축한 대전차호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돌격하다가 공황상태에 빠져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물론 휘틀리는 소련군이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도 숫적으로는 여전히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소련군이 많은 수의 대전차포와 야포로 방어를 하고 있어 독일군의 진격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 연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하리코프(하르키우) 함락 이후 시작된 독일군의 전략적인 후퇴와 이에 따른 기갑전력의 소모 문제입니다. 휘틀리는 1943년 8월 까지는 독일군이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작전가능 상태로 되돌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기갑전력의 손실이 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리코프를 상실한 뒤 계속해서 철수를 하게 되면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수리하는게 어려워졌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 본토로 후송한 전차를 수리해서 복귀시키는 것 또한 독일 국내의 인프라 부족(대형 크레인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제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휘틀리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들은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수가 남아있지만 9월 부터 12월에 걸쳐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제6장은 1943년 하반기의 작전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소모를 통해 붕괴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의 밀도가 높고 1차 사료의 활용도 매우 탁월한 우수한 저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꼭 읽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5월 22일 금요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으휴. 간만에 블로그에 뭘 하나 쓰는군요.

'산처럼' 출판사에서 로널드 스멜서(Ronald Smelser)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Edward J. Davies)의 공저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의 한국어판『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이 출간되었습니다. 류한수 교수님이 한국어판 역자이시군요. 예전에 РККА님이 블로그에 이 책을 번역해서 올리셨기에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면 РККА님의 번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이 책은 냉전기에 만들어진 '무결한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오늘날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의 절반 이상(1~5장)은 기존에 생산된 연구의 정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 없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6~8장)에서 미국인들의 왜곡된 2차대전 인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당히 재미가 있어집니다. 특히 냉전기에 형성된 2차대전 인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북미권의 군사서적 출판사들과 아마추어 군사연구자에를 비판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미국인들이 냉전기에만들어진 독일인들의 변명을 재생산하고 이것이 인터넷이라는 수단과 결합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페도로위츠(J. J. Fedorowicz) 출판사 같이 독일군 관련 서적을 주력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미국인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페도로위츠, 쉬퍼(Schiffer) 출판사와 같은 군사서적 전문 출판사들이 간행하는 서적들은 균형이 잡힌 연구서라기 보다는 독일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서술하는 수준에 그치는 책들입니다. 페도로위츠 출판사는 악명높은 오토 바이딩어가 집필한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사 같은 것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간행하고 있죠. 


2차대전을 다루는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비판도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아흐퉁 판처와 같은 웹사이트들에 실린 내용은 2000년대 초반 저와 같은 한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7장은 인터넷이라는 영향력 있는 수단이 독일국방군 무오설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밀리터리 오타쿠들이 편협한 역사관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잘 설명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은 독일인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뒤바뀐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의 '군사사 연구'는 정치적인 맥락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책은 소위 '독빠'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밀리터리 오타쿠 전반에 적용되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낭만화 하고 탈정치화하는 위험한 경향은 굳이 독빠가 아니라 밀리터리 오타쿠 다수에 내재해 있으니까요. 책의 내용도 재미있고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저자들은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Guru라고 칭하는데 류한수 교수는 이걸 '본좌'로 옮겼습니다. 아주 탁월한 번역어 선정입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번역은 독일군 애호가들을 칭하는 romancer를 '낭만무협인'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너무나 탁월한 초월번역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1~5장의 내용은 기존에 간행된 연구들과 차별점이 없다고 쓰기는 했는데 사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한국어 문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국어판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낭만화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라면 자기 반성을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부대명인 JG52를 JU52로 표기 한 것 같은 사소한 오탈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수정될 수 있게 이 책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독일육군 제505중전차대대사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505중전차대대는 포탑에 그려넣은 돌격하는 기사 마크로 유명한 부대죠.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부대의 활약에 비해 이 부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헌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대가 제2차대전 말기 동부전선에서 완전히 괴멸되었고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에 항복한 중전차대대의 경우 부대사가 비교적 일찍 간행되었죠. 매우 형편없는 전과를 거둔 제508중전차대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부대를 연구한 부대사가 간행된다고 하네요. 판처렉스에서 제공하는 샘플 사진을 보니 상당히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약간 우려되는 점은 저자가 독립연구자로 보인다는 점 입니다. 물론 독립연구자라도 Leaping Horseman Book의 제이슨 마크 처럼 훌륭한 연구를 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간혹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죠.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0년 1월 출간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사야겠습니다.

https://www.panzerwrecks.com/product/charging-knights-on-the-eastern-front-the-combat-history-of-schwere-panzer-abteilung-505/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지역 항공전 연구

얼마전 듀푸이 연구소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을 다루는 단행본을 준비 중 이라고 포스팅을 했습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 지상전을 다룬 연구서에서 항공작전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해 서술했으니 향후 출간될 항공전에 대한 연구도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2019년에 나온 축약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 243-290쪽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죠.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소련 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다."


1.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전개한 독소 양군의 공군력

남부집단군의 공세를 지원한 공군부대는 그 유명한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이었습니다. 제8항공군단은 공세 직전 1,093~1,112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습니다. 로렌스는 전투서열 상 1,093대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전투기 145대, 지상공격기 407대, 폭격기 309대, 정찰기 69대, 야간공격기 60대, 수송기 13대, 헝가리 공군기 90대 입니다. 

이에 맞서는 소련 공군은 제2항공군이 전투기 572대, 지상공격기 306대, 폭격기 117대, 야간폭격기 57대, 정찰기 21대를 보유했고, 제17항공군이 전투기 198대, 지상공격기 360대, 폭격기 76대, 야간폭격기 75대, 정찰기 41대를 보유했습니다. 총 1,823대로 독일공군 보다 다소 우세한 전력을 보유했습니다. 특히 전투기 전력은 770대로 독일공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중 85대의 Fw190이 공중전이 가능한 기종이긴 하지만 이걸 합해도 소련공군 전투기 전력의 압도적 우위입니다.


2. 양측의 항공기 손실

그러나 소련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상공에서 열세를 보였습니다. 독일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111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소련 공군은 같은 기간 동안 658대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티 대비 항공기 손실율로 따지면 독일 공군은 소티대비 0.72%의 손실율을 보인 반면 소련 공군은 소티 대비 5.3%의 손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소련공군의 높은 손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군요.

"소련 공군의 높은 손실을 보면 이들의 용맹함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p.281)

소련 공군은 자신들이 교환비 면에서 유리했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즉 65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는 동안 독일 공군기 928대를 격추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소련 공군은 1943년 7월 5일 부터 7월 18일까지 341대의 Me109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투입된 Me109는 198대였고 총손실은 37대였으니 소련 공군의 격추 산정이 극도로 신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반면 독일 공군은 비교적 정확하게 전과를 산정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658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소련공군의 실제 손실이 658대였으니 굉장히 정확한 추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공군의 평가가 가장 부정확 했던 것은 1943년 7월 5일 입니다. 이날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260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실제 소련군의 손실은 187대였습니다. 이날은 대규모 공중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집계가 부정확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7월 6일 부터는 매우 정확하게 추산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실제 격추한 소련 공군기 보다 더 적은 숫자를 격추했다고 엄격하게 산정하는 양상이 보입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이런 부정확함은 정예 조종사들의 격추기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들어 1943년 7월 5일 제8근위전투기사단과 제205전투기사단의 에이스 조종사 7명은 총 25대의 독일 공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날 독일공군 총손실 19기 보다 훨씬 많습니다. 로렌스는 소련 에이스들의 격추기록 중 55%는 사실이 아니거나 기종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독일 공군 에이스들의 격추 기록은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25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중 22대가 확인됩니다.


3. 총 소티 및 폭탄 투하량

총소티 및 폭탄 투하량으로 비교해도 소련 공군의 열세가 두드러집니다. 독일 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총 15,338 소티를 기록한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공군은 12,426소티로 열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근접항공지원 소티의 격차가 큰데,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같은 기간 총 11,641소티를 출격한 반면 소련공군의 지상공격기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4,295소티를 출격하는데 그쳤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716대, 소련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859대로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숫적 우위에 있는 소련공군의 소티가 독일군의 40% 수준인 것은 놀랍습니다. 작전 초반 독일공군 전투기부대가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부대가 제대로 작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전투 손실도 컸으니 더더욱 그러했겠지요.
이것은 지상작전 지원에 소모한 폭탄의 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측의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10,000톤에서 12,000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련 제2항공군과 제17항공군은 1,748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소련공군이 공중전은 물론 지상지원 임무에 있어서도 효율성이 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옵니다

통계 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 연구소의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 연구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제목은 Aces at Kursk 라는군요.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 전개된 항공전에 대한 통계 기반 연구입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공전의 양상을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위해 94쪽 분량의 새로운 내용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항공전 통계자료만 77쪽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독소전쟁 항공전의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인 중요한 저작이 될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전작인 Kursk: The Battle of Prokhorovka와 이 책의 축약판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에도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만 부차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지요. 집필은 거의 마쳤다고 하니 조만간 책으로 접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2019년 4월 20일 토요일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무장친위대 전사록』


길찾기 출판사에서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인 저자의 연구서로군요. 1943년 하리코프-쿠르스크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의 작전을 분석한 저작입니다. 저자 소개문의 약력을 보니 허진이라는 분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셨군요.




인터넷 서점에 샘플이 뜬걸 보니 독일측 1차사료를 활용한 점이 눈에 띄입니다. 실물을 직접 읽어봐야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책의 분량도 700쪽이 넘는 상당한 분량인 것으로 봐서는 정리가 잘 된 저작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다만 목차를 보니 좀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는데, 1장의 '전격전 교리의 원칙과 수정'은 왜 이런 제목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죠.




2019년 3월 16일 토요일

대조국전쟁사 서술에 관한 흥미로운 학위논문

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에 실린 논문 몇 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를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는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3편이나 실려있어 매우 즐겁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데이비드 서튼(David Sutton)의 "1941 and the National-Patriotic Revival in Russia"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푸틴 치하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환경이 제2차세계대전사, 특히 1941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고르바초프-옐친 이래 기세가 꺾여 있던 러시아의 우익-국수주의적 역사관이 푸틴 치하에서 부활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소련 시기의 역사관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국수주의적 논자들은 고르바초프-옐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영웅적인 과거사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저작은 2011년에 간행된 12권짜리 '대조국전쟁사'입니다. 대조국전쟁사의 간행 책임자였던 졸로타레프는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국제적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판필로프 사단의 28용사' 등 소련 시절의 날조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공격을 되려 '수정주의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부한다는 점 입니다. 서튼의 글은 이렇게 퇴행적인 푸틴 집권기의 역사서술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라 번역을 해보고 싶군요.

다음으로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이고르 예레민, 세르게이 쿠즈네초프의 공동연구인 "The Particularities of Military Mobilization Campaigns in Siberia in the Summers of 1914 and 1941"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시베리아 지역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글 입니다. 1941년의 경우 공산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해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력 및 마필 동원과 달리 차량 및 트랙터 등의 장비 동원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쿠르스크 전투를 주로 연구하는 발레리 자물린의 "Soviet Troop Losses in the Battle of Prokhorovka, 10~16 July 1943"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정리한 글 입니다.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그의 기존 연구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논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글도 있습니다. 리브 파르네모(Liv Karin Parnemo)의 "Russia's Naval Development - Grand Ambitions and Tactical Pragmatism"는 최근 러시아의 해군력 건설은 러시아의 경제적 역량을 고려해 연근해 작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직까지는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대형 함정과 잠수함 전력으로 제한적인 원양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신규 함정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역량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새해 벽두부터(….) 불법날림번역(…) 나갑니다.

이 글은 2014년 출간된 논문집 Die Waffen-SS: Neue Forschungen에 실린 독일 군사사가 로만 퇴펠의 글 Waffen SS und Wehrmacht in der Schlacht bei Kursk: Ein Vergleich im operativen Einsatz를 번역한 것 입니다. 로만 퇴펠은 최근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제2차대전 작전사 연구를 하는 연구자입니다. 이 글은 1943년 하계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와 육군 부대의 작전 수행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무장친위대와 육군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친위대 장교단에 대한 폄하가 있었고 이게 전후에도 육군 장교들의 회고록을 통해 확대된 면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 입니다.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선전 기구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된 면이 있지만 최소한 1943년 전역에서 무장친위대의 기계화 부대가 달성한 전과는 군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무장친위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학술적으로 증명해 주는게 아니냐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이 논문집 자체는 무장친위대의 정치적인 면, 특히 전쟁범죄 문제도 다루고 있으니 불필요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논문집에는 노르망디 전역의 작전 수행을 비교 분석한 글도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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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로만 퇴펠

서     론

194345일 히틀러는 올해의 첫번째 공세로서 치타델레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치타델레는 러시아의 도시인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돌출부에 대한 양익공세를 감행해 소련군을 섬멸하는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타델레작전이 성공하면 독일 국방군은 전선을 크게 단축하고 남는 병력을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 지도층은 국방군이 다수의 소련군 전쟁포로와 민간인 노동력을 확보하길 희망했다. 포로를 독일로 보내 노동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2)
히틀러는 처음에 치타델레작전을 19435월 초에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공세 개시일이 계속 변경되면서 독일군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다가올 하계 전역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194375치타델레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후 2개월에 걸쳐 오룔, 쿠르스크,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불린다.3) 실제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 규모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들다. 전투가 시작되고 첫 2주동안 양측을 합쳐 2백만 명의 병력과 5천대의 항공기, 8천대의 전차 및 자주포, 그리고 거의 39천문에 달하는 야포가 투입됐다.4)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작전 수행을 비교하는데 쿠르스크 전투의 제1단계인 독일의 하계공세 치타델레작전이 좋은 사례가 된다. 공세에 투입된 대부분의 부대는 공세 첫 주에 담당구역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후반부에 독일군이 방어와 역습을 하는 입장이 됐을때는 상황이 다르다. 공세에 투입됐던 부대들의 소속이 바뀌고 다른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부대들의 작전 행동을 비교하기가 훨씬 어렵다.
이 미시연구의 목표는 세가지 문제에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무장친위대가 육군 사단들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냐는 문제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군사적인 가치를 입증했느냐이다. 세 번째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육군 사단들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이다. 이를 통해 무장친위대 부대의 작전사 연구와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효율성을 평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 SS사단은 육군 부대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는가?

쿠르스크 공세에 투입된 독일군은 총 33개사단으로 이중 보병사단이 17, 기갑척탄병사단이 5, 기갑사단이 11개였다.5) 또한 육군직할대(Heerestruppen)’인 전차대대, 대전차대대, 돌격포대대들도 여럿 투입됐다.6) 9군사령부(Armeeoberkommando 9)의 지휘를 받는 제9군은 돌출부 북쪽에 배치되어 오룔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공격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9군은 총 18개 사단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으며 이중에는 무장친위대 사단이 없었다. 9군의 공세는 19437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됐다. 712일 붉은군대는 오룔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다.(쿠투초프 작전) 이 때문에 북익에서 공세를 개시한 제9군은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
돌출부 남쪽인 벨고로드 지구에서는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이 공격에 투입됐다. 켐프 분견군은 부대의 지휘관인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기갑대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부대의 사령부는 나중에 제8군 사령부가 됐다.7) 켐프 분견군은 7개 사단을 치타델레작전에 투입했다. 켐프 분견군의 임무는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4기갑군의 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해 제4기갑군의 측면을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하는 것이었다.
4기갑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공세에 투입된 부대 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4기갑군은 쿠르스크 남쪽에 종심깊게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을 최대한 신속히 돌파해 북쪽으로 진격한 뒤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과 접촉해 쿠르스크 돌출부에 배치된 소련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4기갑군의 지휘부는 제4기갑군사령부(Panzerarmee-Oberkommando 4)였으며 켐프분견군 보다 전투력이 강했다. ‘치타델레작전에서 제4기갑군에 배속된 사단은 10개 사단이었다. 이중 9개 사단이 쿠르스크 방면으로의 공세를 담당했다. 이 중에는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히틀러(L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사단 등이 있었다. 3개의 SS 기갑척탄병사단은 제2SS기갑군단 예하였다.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육군의 기갑척탄병사단과 비교했을 때 편제상 모든 면에서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8) 심지어 육군의 기갑사단과 비교했을때도 편제상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다. 위에서 언급한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급양기준병력(Verpflegungsstärke)2만명에 달했고 대부분의 육군기갑사단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육군기갑사단은 3개의 차량화보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5개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2개였다. 반면 육군의 기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1개에 불과했다.9)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만이 무장친위대 부대와 비슷한 수준의 특권을 가졌다. 이 사단은 무장친위대 LAH사단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차량화보병대대 전력을 보유했다. LAH를 제외한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됐으나 GD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는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10) 부대의 전투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또다른 결정적인 요인 중에는 전차 보유량도 있다.(도표1)

1.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의 전차 및 자주포 보유량. 1943630일 기준.11)
사단
신형전차12)
신형전차 중 티거 숫자
구형전차
돌격포
대전차자주포
자주곡사포
총계
GD
81
15
54
35
28
34
232
다스 라이히
73
14
73
34
13
30
223
토텐코프
59
15
80
35
14
30
218
LAH
96
13
26
35
29
30
216
2기갑사단
65

51

34
30
180
4기갑사단
79

22

26
30
157
9기갑사단
56

53

28
18
155
11기갑사단
25

89

14
18
146
7기갑사단
37

75

14
12
138
6기갑사단
32

85

12
6
135
20기갑사단
40

42

28
6
116
3기갑사단
22

78
2
14

116
12기갑사단
36

50

16
6
108
19기갑사단
38

49

14

101
18기갑사단
29

46

16
6
97
10기갑척탄병사단




39

39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과 GD사단은 육군의 기갑사단들이 그저 꿈이나 꿔야 할 수준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4개 사단은 신형 자주곡사포로 완편된 1개 포병대대를 갖추고 있었다.13) 뿐만 아니라 이 4개 사단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티거 전차를 완편 상태로 14대나 보유했다.14) 무장친위대의 3개사단과 GD사단이 1개 대대의 돌격포를 보유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돌격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비였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돌격포의 강력한전투력을 엄청나게 호평하고 있다.15) 뿐만 아니라 GD사단은 1943년 여름에 티거 전차를 완전한 1개 대대편성으로 45대나 보유하게 되었다.16) 그리고 무장친위대 사단들 보다도 먼저 최신형 전차인 판터를 장비하게 되었다.17) GD사단은 육군 내에서 매우 이례적인 부대였다. 이 부대는 육군의 LAH’로 불렸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GD사단을 지원했고 이례적일 정도로 다른 육군 사단에 비해 우대를 받았다.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도 이와 비슷해서 LAH 사단이 최우선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GD사단은 쿠르스크 공세를 앞두고 신형 전차를 대량으로 보급받았다.18)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이 평균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가 육군에 비해 더 좋은 보급을 받았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부대인 무장친위대의 비킹기갑척탄병사단은 위에서 말한 3개 친위대 사단에 비해 전력이 빈약했다. 1943년 여름 시점에서 봤을 때 비킹 사단의 기갑 전력은 당시 평균적인 육군 기갑척탄병사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437월 초 이 사단은 46대의 전차와 6대의 돌격포,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는데, 전차는 대부분 구형 전차였다. 비킹 사단과 함께 도네츠강 만곡부에 투입된 육군의 제16기갑척탄병사단은 53대의 전차와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다.19)
무장친위대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은 1943년 여름 기준으로 다른 부대에 비해 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쿠르스크 공세에서 중점(Schwerpunkt)을 구성했다.20)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육군 사단 중에서 이들 3개 사단 만큼 좋은 지원을 받은 부대는 GD사단 말고 없었다. 다른 보병사단에 비해 좋은 장비를 갖추었던 보병사단인 제78돌격사단(Sturmdivision)1943년 하계 전역 기간에 겪은 경험은 좋은 사례이다. 19438월 중순에 작성된 한 보고서를 인용해 본다.

78돌격사단은 현재 상태는 좋지 못하다. 최소한 자주대전차포를 장비한 사단의 대전차대대를 편제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이 사단의 편제에는 돌격포대대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너무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비들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중장비를 회수하지 못하거나 승무원이 부족할 수도 있다.”21)


II.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사단들은 평균이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2SS기갑군단 예하의 3개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중점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전투에 투입된 육군 사단들과 비교했을때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으며 또한 평균이상으로 높은 수준이었느냐는 것이다. 국방군측 인사들이 종종 주장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전과는 불필요하게 많은 손실을 치루면서 얻은 대가라는 비판은 타당한가?22) 기존의 연구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어림짐작으로 무장친위대의 손실이 컸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을 지적했다.23) 힘러는 이런 주장을 통해 친위대야 말로 강인하고 이념무장이 잘 된 전사들이라는 평판을 얻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마케팅전략(Vermarktungsstrategie)’은 양날의 칼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선전을 통해 무장친위대가 쓸데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걸 꺼렸다.24) 군사전문가들은 무장친위대가 많은 인명손실을 입기 때문에 전투부대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혀야 좋은 부대라고 평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육군 제18기갑사단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많은 손실을 입는 것은 전투력이 높은 것과 상관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타델레작전 기간 중 제18기갑사단이 입은 손실만을 구체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이 부대가 1943년 하계전역에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때 입은 피해를 보충할 수 없어서 사단이 해체되고 (포병사단으로) 재편되고 말았다.25) 18기갑사단이 치타델레작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이 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약했으며 공세가 시작됐을 당시 사단 병력을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던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전술상의 실수에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은데 있다.26) 18기갑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퇴역군인들이 집필한 제18기갑사단사를 보면 이 부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작전상으로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27)
무장친위대 사단의 경우는 이런 비판을 할 수 없다. ‘치타델레작전이 절정에 달한 1943712,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제2SS기갑군단을 방문해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에 대해 전투에서 거둔 탁월한 전과와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28) 다음날에는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 상급대장도 휘하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그동안의 전투에서 보여준 행동과 단호함, 그리고 타의 모범이 될 용맹함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는 특별명령을 내렸다.29) 이런 찬사는 단지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별명령에 집어넣은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쿠르스크 공세 작전이 끝난 뒤 제2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SS대장이 호트 상급대장의 추천으로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30) 4기갑군에 배속됐던 3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에서는 하우서만이 유일하게 치타델레작전이 종결된 뒤 이 훈장을 받았다. 48기갑군단장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Otto von Knobelsdorff) 대장은 호트로부터 표창을 받는데 그쳤다.31) 52군단장 오이겐 오트(Eugen Ott) 대장은 아무런 포상도 못 받았다.
그렇다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까? 평균 이상의 큰 손실을 입었을까?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단의 손실을 단순 비교만 하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9군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경우는 이미 1943711일에 쿠르스크 공세작전이 끝났지만 켐프분견군과 제4기갑군 예하 부대들은 1943717일까지 공세작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총손실만 비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총병력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비교를 하려면 인명손실이 작전 개시당시의 총병력과 비교했을 때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해봐야 한다.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의 전투 시작당시 병력대비 인명손실 비중은 표2와 같다.

2.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의 병력손실이 작전개시당시 총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1943 7 4~718.32)
사단
작전개시당시 병력
사망
부상
행방불명
총계
비율(%)
332보병사단(4기갑군)
15,959
398
2,340
129
2,867
18.0
106보병사단(켐프분견군)
19,848
533
2,470
63
3,066
15.4
168보병사단(켐프분견군)
15,880
383
1,946
66
2,395
15.1
320보병사단(켐프분견군)
20,030
469
2,159
378
3,006
15.0
167보병사단(4기갑군, 켐프분견군)
14,347
389
1,551
48
1,988
13.9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14,906
260
1,710
91
2,061
13.8
SS LAH(4기갑군)
23,160
514
2,541
81
3,136
13.5
SS 토텐코프(4기갑군)
19,795
503
2,103
38
2,644
13.4
GD(4기갑군)
21,524
442
2,247
82
2,771
12.9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20,303
483
1,931
23
2,437
12.0
11기갑사단(4기갑군)
15,894
234
1,449
39
1,722
10.8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15,705
232
1,238
33
1,503
9.6
3기갑사단(4기갑군)
13,968
204
989
21
1,214
8.7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20,229
257
1,390
23
1,670
8.3
255보병사단(4기갑군)
14,107
124
671
13
808
5.7

이 표를 보면 보병사단들이 가장 높은 인명손실 비중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보병사단들은 제외하고 기갑부대들만 가지고 비교를 하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손실이 높은 편에 들어간다. 그러나 무장친위대 3개사단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의 공격부대 중에서 중점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무장친위대의 손실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다.33)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기갑차량 손실을 비교하면 이점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3의 통계는 1943714일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어 육군본부에 보고된 티거, 3호전차, 4호전차, 그리고 돌격포의 숫자이다.

3.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사단의 기갑차량 손실 통계, 194375~14.34)
사단
작전개시당시 보유대수
714일까지의 완전손실
비율(%)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80
23
28.8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98
17
17.3
18기갑사단(9)
67
11
16.4
2기갑사단(9)
102
14
13.7
GD(4기갑군)
158
19
12.0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93
10
10.8
3기갑사단(4기갑군)
90
9
10.0
SS LAH(4기갑군)
144
12
8.3
SS 토텐코프(4기갑군)
165
12
7.3
4기갑사단(9)
95
6
6.3
11기갑사단(4기갑군)
101
5
5.0
20기갑사단(9)
66
3
4.5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143
3
2.1
9기갑사단(9)
102
2
2.0

이 표를 보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기갑차량 손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35) 이 부대들은 공세가 시작될 당시 매우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에 손실 비중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전차 보유량이 많은 부대는 전차를 조금 보유한 부대 보다 적의 저항을 신속히 극복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3개 무장친위대 사단은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차 손실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III.엘리트부대?’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한 군사적 평가

쿠르스크 전투는 치타델레작전의 중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련측에서는 1943823일 붉은군대가 하리코프를 재탈환한 바로 그날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됐다고 본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43년 여름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치타델레작전 이후의 전투에는 LAH 사단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 사단은 19437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로 파견됐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사령관 한스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LAH 사단을 이탈리아에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파시즘에 기반한 최정예 부대가 이탈리아에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소.36)
반면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은 동부전선에 남아서 남부집단군의 중점, 그리고 위급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37월 말 이 두사단은 도네츠만곡부 미우스강에 소련군이 구축한 교두보를 분쇄하기 위한 역습에 투입됐다. 쿠르스크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 8월 초에는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과 함께 다시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되어 제3기갑군단 예하에 들어갔다. 3기갑군단 참모장 에른스트 메르크(Ernst Merk) 대령은 1943813일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3개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좋은 인력과 장비에 걸맞게 잘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 지휘부는 부대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장친위대 사단을 엄격히 지휘해야 하며, 상급부대가 지속적으로 감독할 필요가 있다.”37) 메르크 대령이 이런 평가를 내린 시점은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제3기갑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이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나온 육군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무장친위대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38)
사실 무장친위대는 항상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39)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장친위대가 단기간에 팽창한데 있다. 1943년 상반기에만 무장친위대 6개 사단을 신규 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40) 그 결과 기존에 있던 부대들이 약화되었다. 우대를 받고 있었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 조차 1943년 여름에는 장교와 부사관이 현저한 수준으로 부족했다. 가장 심한 손실을 입은 부대는 LAH였다. 이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이 시작되기 전 특별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19437월 초에는 장교 277명과 부사관 1,179명이 부족한 상태였다.41) 이렇게 된 이유는 LAH의 자매부대인 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를 창설하기 위해 간부를 차출한데 있었다. 새로 편성되는 사단들은 단순히 병력을 보충하는 정도가 아니라 LAH사단을 보충대 처럼 이용했다. LAH사단은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을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편성할 기간요원으로 내줘야 했다.42) 다스라이히 사단과 토텐코프 사단도 마찬가지로 병력 부족을 겪었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장교 286명과 부사관 734명이 부족했고 토텐코프 사단은 장교 259명과 부사관 967명이 부족했다.43)
치타델레작전에 참여한 다른 육군 기갑사단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44) 육군 기갑사단 중 장교가 가장 부족했던 부대는 제2기갑사단이었는데 그 숫자는 21명에 불과했다.45) 부사관이 가장 부족한 부대는 제12기갑사단이었다. 그 숫자는 388명이었다.46) 대부분의 육군 기갑사단은 간부 부족이 심각하지 않았다. 한 사단은 아예 해당사항이 없었다. 6기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이 편제대로 있었다.47)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이렇게 심각한 장교와 부사관 부족에 시달린 결과 전장에서의 전투 수행 능력, 그리고 부족한 지휘력으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이 얼마나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보통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 부대가 잘못된 판단으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사례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례 중 가장 심한 것은 19437월 말 미우스강의 소련군 교두보에 대한 역습 과정에서 발생했다. ‘치타델레작전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무장친위대가 중점에 투입됐다. 그러나 역습 첫날은 많은 인명손실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배속받은 제6군 사령부는 유연한 전술을 펼칠 것을 강조했다. 6군사령부는 다음날 공격을 할 때는 같은 지점을 거듭해서 공격하지 말도록 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는 다음날에도 같은 방면으로 공격했다. 공격은 또다시 실패했고 특히 토텐코프 사단의 인명손실이 컸다. 6군사령부는 친위대 사단들에게 명령을 내려 3일차 공격은 중점을 변경하고 공략이 어려운 고지를 우회하도록 했다. 3일차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어 소련군의 교두보를 분쇄할 수 있었다.48)
하지만 1943년 여름 전역에서는 무장친위대만 이렇게 형편없는 지휘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을 치른게 아니었다. 유사한 사례는 육군에서도 나타나며 실제로 각급 제대에 걸쳐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GD사단의 작전참모 올트비히 폰 나츠머(Oldwig von Natzmer) 대령은 19438월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갑사단장 중에는 그 직위에 맞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49) 지휘관들의 잘못된 지휘 문제는 연대급 지휘관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타델레작전 당시 GD전차연대와 제39전차연대를 지휘한 히아진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Hyazinth Graf Strachwitz) 대령이 그러하다. 그는 2개 전차연대를 손실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투입했다. 상관이었던 제10전차여단장은 이러한 지휘방식을 완전히 미쳤고 저능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50) 중대급 지휘관들도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타델레작전 중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 투입되었던 제505중전차대대장은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이렇게 불만을 제기했다. “과거에는 후방 보직에 있거나 본부중대장 정도나 하던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전차중대장에 임명되면서 대대의 공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대의 티거를 잃게 됐다.”51) 이건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 투입되었던 제10전차여단이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단 예하 부대들은 최신형 전차인 티거와 판터를 장비하는 등 훌륭하게 편성되어 있지만 중대급 지휘관들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다.’ 이 보고서에서 예외로 취급한 부대는 무장친위대 다스라이히 사단의 판터 대대 뿐이었다.52)
무장친위대 부대가 많은 손실을 입은 책임이 육군 지휘관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4384일 독일군이 도네츠강의 소련군 교두보를 공격한 전투가 대표적이다. 40기갑군단장 지크프리트 헨리치(Sigfrid Henrici) 기갑대장은 군단에 배속된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사단장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단을 가망없는 공격에 투입했다. 독일군은 공격에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53)
육군 부대가 잘못된 지휘로 많은 손실을 입은 사례는 더 있다. 육군에서는 자주 무장친위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는데, 이러한 비난은 무장친위대가 독일군 내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 및 여러 특권과 결합해서 국방군 측의 불신을 불러오고 긴장을 초래했다.54) 오토 뵐러(Otto Wöhler) 대장은 켐프분견군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5일 전인 1943820일에 다스라이히 사단장 발터 크뤼거(Walter Krüger) SS중장을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크뤼거가 무분별하다거나 그의 지휘 방식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뵐러는 크뤼거가 무장친위대 같은 최정예부대를 지휘하기에는 활력이 없고 둔하다.”고 생각했다.55) 하지만 뵐러의 제안은 허사로 돌아갔다. 크뤼거는 다스라이히 사단을 계속 지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1일 뒤에는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56) 다스라이히 사단은 하리코프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1943827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급되었다.57)
뵐러의 휘하에 배속된 다른 무장친위대 사단들도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 단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8월 중순 토텐코프 사단이 하리코프 지구에서 수행한 역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제3기갑군단장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 대장은 국방군 공식보도에 토텐코프 사단을 언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58) 뵐러도 며칠 안되는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활약을 칭찬했다. 그는 817일 토텐코프 사단을 치하했으며 3일 뒤에는 비킹 사단을 칭찬했다.59) 비킹 사단에 대해서는 194311월 초에 작성된 흥미로운 문건이 하나 있다. 이 자료는 이른바 무장친위대 간부진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이라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기갑군단에서 작성한 각 사단의 내적 전투력에 대한 평가(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라는 제목의 문건은 비킹 사단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비킹 사단은 치열한 방어전을 수행했으며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세작전에서도 역량을 입증했다. 이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26개월간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강인한 부대들이다. 이 사단의 전과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지속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 이 사단의 지휘부는 정력적이고 창의적이며 잘 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인접부대 및 상급부대와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60)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1943년 여름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 사단들은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인 면에서도 우수했다. 그래서 무장친위대의 기갑부대들은 꾸준히 중요한 전장에 투입됐다. 미국의 역사가 조지 스타인(George Stein)1960년대에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무장친위대의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를 투입했다.”61) 스타인은 이러한 예로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호엔슈타우펜, 프룬즈베르크,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들었다. 이 사단들은 1943년 말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으로 개칭됐다.62) 스타인은 이들 사단을 엘리트 사단이라고 불렀다.63) 그렇다면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엘리트부대라고 할 수 있었는가?
군사 엘리트라는 개념은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무장친위대와의 관련성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64)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38개 사단에 달했기 때문에 부대간의 수준 차이가 컸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장친위대 전체를 군사 엘리트로 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대를 엘리트부대로 불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엘리트라는 용어를 분석적인 개념으로 군사적 효율성 연구에 적용하는게 완전히 부적절한지에 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한다.65) 물론엘리트부대(Elitetruppen)’라는 용어는 역사적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서는 19416월의 그리스군이나 19449월 아른헴에 강하한 영국 공수부대와 같이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한 적군 부대에 대해 엘리트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66) 히틀러는 19433월에 2개의 독일군 공수사단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부대들을 엘리트부대라고 불렀다.67) 그리고 군사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거나 사기가 왕성한 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부대나 좋은 장비를 갖춘 부대들을 엘리트로 불러왔다. 군사적 엘리트라는 개념을 전통적인 작전사 연구의 개념으로 본다면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엘리트부대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련군도 그렇게 생각했다. 1943년 여름에 작성된 소련군 문헌들을 보면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그리고 GD사단을 엘리트사단(Отборные дивизии)’으로 구분하고 있다.68)  


 

한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의 군사적 효율성을 비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술적 상황, 지형, 기상 상태, 항공지원 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의 전력과 사기, 적군 부대의 전투력 같은 요인들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동부전선 하계 전역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무장친위대 지휘부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군사적 능력이 증명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등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의 장비 보유 현황은 평균 이상으로 우수했으며 이 때문에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별 대우에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항상 중점이나 위기가 발생한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무장친위대 참전자들의 자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필자는 1942년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동부전선에서 싸운 토텐코프 사단 소속의 한 참전자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토텐코프 사단의 병사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로 생각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엘리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 뿐 입니다.”69)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Operationsbefehl Nr.6. Ernst Klink, Das Gesetz des Handelns. Die Operation Zitadelle 1943, Stuttgart 1966, S.292-294에서 재인용.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92쪽에 있다.
2) Operationsbefehl Nr.6, Anlage 2. 위의 S. 296-298을 참고하라.
3) Karl-Heinz Frieser, Die Schlacht im Kursker Bogen, in: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DRZW), Bd.8: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2007, S.81-208,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00쪽을 참고하라.
4) 같은책 100. 프리저의 글은 전차의 숫자를 다소 적게 산정하고 있다. Roman Töppel, Kursk-Mzthen und Wirklichkeit einer Schlacht, in: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57(2009), S. 349-384, 특히 358-361쪽을 참고하라.
5) 다행히도 치타델레 작전에 참전한 3개 야전군의 해당기간의 전투일지와 그 부록은 잘 보전되어 있다. Führungsabteilungen(Ia) im Bundesarchiv-Militärarchiv(BA-MA), RH 20-8/83(Armeeabteilung Kempf), RH 20-9/134(9.Armee), RH21-4/104(4.Panzerarmee) 등이다.
6) 육군직할대(Heerestruppen)는 사단 예하에 편제되지 않은 부대들을 뜻한다. 이 부대들은 상급사령부에서 중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예하 부대에 일시적으로 배속시켜주는 것이다.
7)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켐프분견군 사령부는 19438월 중순 제8군 사령부로 개칭되었다.(Stabsbefehl, AOK8, Ia, 16.8.1943, BA-MA, RH 20-8/95, Anlage 700, unpag.을 참고하라.) 좀 더 단순히 서술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437월의 전투를 서술할 때에도 제8군 사령부로 통일한다.
8) 문제에 대한 분석은 Bernhard R.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Bevölkerungsverteilung und personelle Rüstung in der zweiten Kriegshäfte(1942-1944), in: DRZW, Bd 5/2: Kriegsverwaltung, Wirtschaft und personelle Ressourcen 1942-1944/45, Stuttgart 1999, S.960을 참고하라.
9)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2000, S.45를 참고하라.
10) ebd., S.44를 참고하라.
11)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59;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65; Zetterling u. Frankson, Kursk, S.46 통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는 운용 가능한 차량 외에도 정비 중에 있거나 독일 본토에서 이동중이던 차량도 포함시켰다. 치타델레 작전에 일시적으로 참가한 부대의 경우는 제외했다.
12) 신형전차에는 4호전차 장포신형, 5호전차 판터, 6호전차 티거, 노획한 T-34를 포함시켰다. 1호전차, 2호전차, 3호전차, 4호전차 단포신형, 35(t), 38(t), 그리고 이 차량의 차대에 기반한 지휘전차는 구형 전차로 구분했다.
13) 여기에는 후멜과 베스페가 해당된다. 그리고 표1의 자주포항목에는 여기에 더해 자주중보병포 그릴레도 포함시켰다. 이 세 종류의 기갑차량에 관해서는 Peter Chamberlain u. Hilarz L. Dozle, Encyclopedia of German Tanks of World War Two, 2. Aufl., London 1993, S.39 f., 47 u. 108f를 참고하라.
14) 쿠르스크 공세작전에 투입된 티거는 총 147대였다. 1에는 이중 90대가 제외되어 있다. 90대는 제503, 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다. 티거 전차의 개발 및 실전 운용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잘 연구되어 있는 서적으로는 Thomas L. Jentz u. Hilarz L. Doyle, Germany’s Tiger Tanks, 3 Bde., Atglen(Pennsylvania), 1997-2000가 있다.
15)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87 그리고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chütz-Ersatz- undAusbildungsabteilung 200 vom 30.8. bis 22.9.1943, Abschrift, BA-MA, RH 10/58,Bl.385를 참고하라. 돌격포의 개발 과정과 기술적 특성에 관해서는 Walter J. Spielberger, Sturmgechütze. Entwicklung und Fertigung der sPak, 3.Aufl, Stuttgart 1997을 참고하라.
16) Helmut Spaeter, Die Geschichte des Panzerkorps Großdeutschland, Bd.2, Duisburg-Ruhrort 1958, S.146 u.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Bd. 2, Winnipeg(Manitoba) 1998, S.49 참고하라.
17) Thomas L. Jentz, Der Panther. Entwicklung, Ausführungen, Abarten, seltene Varianten, charakteristische Merkmale, Kampfwert, Wölferscheim 1997, S.137을 참고하라.
18) LAH 사단과 GD 사단의 특별 대우에 관해서는 Jean-Luc Leleu, La Waffen-SS. Soldats politiques en guerre, Paris 2007, S.356 그리고 Sönke Neitzel u. Harald Welzer, Soldaten, Protokolle vom Kämpfen, Töten und Sterben, Frankfurt-M. 2011, S.367.등을 참고하라. 육군의 LAH라는 표현은 요제프 괴벨스가 194341일에 쓴 것이다. Elke Fröhlich(Hg.), Die Tagebücher von Joseph Goebbels, Teil II, Diktate 1941-1945, Bd.8, April-Junu 1943, München u. A. 1993, S.26을 참고하라.
19) Panzer-Lage, 21.7.1943, BA-MA, RH 10/61, Bl.125(Stand: 10,7,1943); Sturmgeschütz-Lage, 21.7.1943, BA-MA, RH 10/62, Bl.88(Stand: 10.7.1943);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Stand: 30.6.1943). 이 수치는 운용 가능한 차량 뿐만 아니라 정비중에 있는 차량과 본토에서 이동중인 차량도 포함한 것이다. 두 사단은 19434월 재정비에 들어가 1943717일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20) 이점은 켐프 분견군 참모장이 194341일 제출한 Entwurf für Operationsvorschlag K에서부터 나타난다. BA-MA, RH 20-8/81, Anlage 8, unpag. 4기갑군의 치타델레 작전 최종안은 Klink, Gesetz, S.308-311을 참고하라.
21)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 91. 78돌격사단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28대로 편성된 대전차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돌격포 31대로 편성된 제189돌격포대대도 배속받고 있었다. 이 사단에 관해서는 Ludwig Merker, Das Buch der 78. Sturmdivision, Tübingen 1965를 참고하라.
22) 에리히 만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무장친위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이 달성한 전과는 희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Erich von Manstein, Verlorene Siege, Erinnerungen 1939-1944, 13.Aufl., Bonn 1993, S.188; 그리고 Neitzel u. Welzer, Soldaten, S.368 f.를 참고하라.
23)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Die Waffen-SS 1933-1945. Leitbild, Struktur und Funktion einer nationalsozialistischen Elite, 6. Aufl., Paderborn 1999, S. 282 f.; Leleu, Waffen-SS, S. 37을 참고하라.
24) ebd., S. 239 f.를 참고하라.
25) 18기갑사단이 1943년 하계전역에서 입은 피해에 관해서는 Reisebericht des Majors i. 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93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951을 참고하라.
26) 18. Panzerdivision, Ia, Kriegstagebuch(KTB) Zitadelle, 28.6.1943ß12.7.1943, Russland, BA-MA, RH 27-18/139, Bl. 10-12 u. 17-23을 참고하라.
27)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Division 1943-1944, Reutlingen 1989, S.255 f.를 참고하라.
28) Silvester Stadler(Hg.), Die Offensive gegen Kursk 1943. II. SS-Panzerkorps als Stoßkeil im Großkampf, Osnabrück 1980, S.104 그리고 108을 참고하라. 여기에는 KTB Nr.6, Generalkommando II.SS-Panzerkorps, Ia, mit Anlagen, für Zeitraum 1.7.1943-2.8.1943.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은 BA-MARS 2-2/17(Textband) RS 2-2/18(Anlagen)로 소장되어 있다.
29) Der Oberbefehlshaber der 4.Panzerarmee, Tagesbefehl, 18.7.1943, BA-MA, RH 21-4/111, Bl.115; 그리고 Stadler, Offensive, S. 155 f.를 참고하라.
30) Antrag auf Verleihung des Eichenlaubs zum Ritterkreuz für Paul Hausser, National Arc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aryland, A3343, SSO 071A(Personalakte Hausser). 바이로이트의 파이트 셰르처(Veit Scherzer)씨가 이 문서의 사본을 제공해 준데 감사드린다.
31) Schreiben Hoth an Knobelsdorff, 21.7.1943, BA-MA, RH 21-4/111, Bl.174. 크노벨스도르프가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19431112일이었다. Veit Scherzer, Die Ritterkreuzträger. Die Inhab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 von Heer, Luftwaffe, Kriegsmarine, Waffen-SS, Volkssturm sowie mit Deutschland verbündeter Streitkräfte nach den Unterlagen des Bundesarchivs, 2. Aufl., Ranis-Jena 2007, S.453.
32) 57보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 기간 중 주로 방어적인 엄호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98보병사단은 공세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 뒤에야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표에서 제외했다. 이 표에 포함한 부대들은 쿠르스크 공세 작전 기간 중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던 사단들이다. 남부집단군 예하의 사단 일부는 이미 치타델레 작전 개시에 앞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194374일 보병을 투입해 소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기에는 74일에 발생한 인명 피해도 포함했다.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 prepared by Office of the Chief of Staff, US Army Concepts Analysis Agency, Bethesda(Maryland) 1998, Appendix F,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dialspace.dial.pipex.com/town/avenue/vy75/data.htm(마지막 검색일 201163). 이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onhand strength‘라는 용어는 다소 혼동을 줄 수 있다. 이 용어의 개념(onhand effective personnel present for duty)에 대응하는 독일어 용어는 Tagesstärke이다. 그러나 1차사료와 대조해서 분석한 결과 이 보고서에 사용된 경우는 Iststärke에 해당된다. 독일어에서 병력 현황을 나타내는 용어에 관해서는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Analyzing World War II Eastern Front Battles, in: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1(1998), S> 176 f. 그리고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 839를 참고하라.
* 역자주: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PDF판은 https://apps.dtic.mil/dtic/tr/fulltext/u2/a360311.pdf 에서 다운로드 가능.
33) 2차대전 전 기간을 다루는 연구들도 유사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Wegner, Soldaten, S. 282; Rüdiger Overmans,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München 1999, S: 295 f.; Leleu, Waffen-SS, S. 725.
34) 12기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에 적은 전력만을 투입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ß59(Stand: 30.6.1943);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Stand: 30.6.1943); Ausfälle H.Gr.Süd, Stand 14.7.1943, BA-MA, RH 10/64, Bl.67; Ausfälle H.Gr.Mitte, Stand 14.7.1943(Berichtigt), BA-MA, RH 10/65, Bl.12.
35) 치타델레 작전에 종결될 때 까지 이런 추세는 변하지 않았다. 2SS기갑군단은 1943723일 총 손실이 전차 31대와 돌격포 5대라고 보고했다. Stadler, Offensive, S.165를 참고하라.
36) Helmut Heiber(Hg.), Hitlers Lagebesprechungen. Die Protokollfragmente seiner militärischen Konferenzen 1942-1945, Stuttgart 1962, S.373.
37) Reisebericht des Majors i.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2.
38) Sönke Neitzel, Des Forschens noch wert? Anmerkungen zur Operationgeschichte der Waffen-SS, in: Militärgeschichtliche Zeitschrift 61(2002), S.403-429를 참고하라.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408쪽이다.
39) Leleu, Waffen-SS, S.287 f.를 참고하라.
40) Kurt Mehner, Die Waffen-SS und Polizei 1939-1945, Führung und Truppen, Norderstedt 1995, S. 145 f.을 참고하라.
41) Zustandsberichte der SS Panzergrenadierdivision Leibstandarte SS Adolf Hilter, Meldung vom 1.7.1943, BaßMA, RH 10/312, Bl.2.를 참고하라.
42)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d. 3, Osnabrück 1982, S. 218-220, 그리고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d. 1, 3. Aufl., Coburg 1996, S. 11-16.를 참고하라.
43) Zustandsberichte der SS-Panzergrenadierdivisionen Das Reich u. Totenkopf, Meldungen vom 1.7.1943, BA-MA, RH 10/313, Bl.1 u. RH 10/314, Bl. 1.을 참고하라.
44) 안타깝게도 GD사단의 194371일 보고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BA-MA, RH 10/209)
45) Zustandsberichte der 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1, Bl. 2.를 참고하라.
46) Zustandsberichte der 1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50, Bl. 1.을 참고하라.
47) Zustandsberichte der 6.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5, Bl. 1.을 참고하라.
48) KTB AOK 6, Ia, Bd.5, 17.7.1943-17.8.1943, BA-MA, RH 20-6/303, Bl. 123-149.를 참고하라.
49) Reisebericht des Majors i. 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3.
50) Bericht von Oberst Karl Decker, Kommandeur der Panzerbrigade 10, vom 17.7.1943, Abschrift, BA-MA, RH 10/54, Bl. 58.를 참고하라.
51) Bericht von Oberstleutnant i. G. Graf von Kielmansegg über einen Flug zur 9.Armee am 11.7.1943, BA-MA, RH 10/54, Bl. 61에서 발췌.
52) Panzer-Brigade 10, Gliederung und Offz.- Stellenbesetzung der Panther- und Tiger-Einheiten, 31.8.1943, BA-MA, RH 10/56, Bl. 135.를 참고하라.
53) Ewald Klapdor, Mit dem Panzerregiment 5 Wiking im Osten, Siek 1981, S.160 f.(여기서는 HenriciHeinrici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KTB XXXX. Panzerkorps, Ia, Bd. 3, 1.8.1943-15.8.1943, BA-MA, RH 24-40/54, Eintrag vom 4.8.1943 그리고 Tagesmeldung an das PzAOK 1 vom 4.8.1943, unpag.를 참고하라. 다음날 비킹 사단장 헤르베르트 길레(Herbert Gille) SS소장은 비킹 사단은 필요한 준비와 지형 정찰을 하지 않으면 계획된 공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의 일지 194385일 참조.
54) 무장친위대의 특수한 위치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는 제4기갑군의 1943713일 일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4기갑군 참모장은] 남부집단군 참모장과 상의하면서 무장친위대의 병력 현황과 보충은 완전히 별도의 체계로 이루어지고 있어 제4기갑군이 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BA-MA, RH 21-4/104, Bl. 157).
55) AOK 8, Fernschreiben vom 20.8.1943, 19.3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28, unpag. 이 시사점이 많은 문서에 관해 알려준 베른의 카타리나 슈트라웁(Katharina Straub)에게 감사한다. 당시 다스라이히 사단 병기참모(1. Ordonnanzoffizier)의 회고록은 뵐러가 크뤼거와 갈등을 빚게 된 계기가 8군의 다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우리 사단 예하 부대를 계속해서 전용하는 것에 대해크뤼거가 뵐러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뵐러는 크뤼거가 항의하자 남부집단군 전체가 전례없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 기반한 지휘 방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휘관이 반대하더라도 전투력이 양호한 부대에 방어 작전의 부담을 지우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계속 취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Rolf Diercks, Lebenserinnerungen- überschattet vom Irrweg im Dritten Reich. Autobiographische Schliderungen von den Anfängen der Weimar Republik bis zum Beginn des 21. Jahrhunderts, München/Straubing 2009[Ms]., S.413). 이 회고록의 내용은 크뤼거가 1943820일과 822일 힘러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크뤼거는 힘러에게 다스라이히 사단이 분산 운용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BA-MA, M841, Akte 4, unpag.을 참고하라.
56) Scherzer, Ritterkreuzträger, S. 479.를 참고하라.
57)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3 Bde., Köln 1989를 참고하라. 여기 인용한 부분은 Bd. 2, S. 549.
58)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0.4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02, unpag.를 참고하라. 토텐코프 사단은 1943818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명되었다. Die Wehrmachtberichte, Bd.2, S.542.를 참고하라.
59)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9.35 Uhr, u. 20.8.1943, 22.00 Uhr, an III. Panzerkorps, Abschriften, BA-MA, RH 20-8/95, Anlagen 707 u. 729, unpag.
60) Generalkommando III. Panzerkorps, 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 2.11.1943, BA-MA, RH 20-8/89, Anlage 113, unpag. 이 문서는 19431020일부터 1125일까지 제3기갑군단 군단장 대행을 맡은 하인츠 치글러(Heinz Ziegler) 중장이 서명을 했다.
61) George H. Stein, Geschichte der Waffen-SS, Düsseldorf/Wiesbaden 1999(1967), S.186.
62) Mehner, Waffen-SS, S.166-219를 참고하라.
63) Stein, Geschichte, S. 186 u. 260 f.
64) 특히 Jens Westermeier, Die Junkerschulgeneration- eine militärische Elite des Führers? Ergebnisse einer Untersuchung der Absolventen der SS-Führerschulen, in: Arbeitskreis Militärgeschichte e.V., Newsletter 35(2010), S. 8-13.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65) 옌스 베스테마이어와 얀 에릭 슐테는 201156일부터 7일까지 열린 독일 제2차세계대전사 편찬위원회와 뷔르츠부르크 대학 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무장친위대의 역사를 다루는 콜로키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H-SOZ-U-KULT(http://hsozkult.geschichte.hu-berlin.de/tagungsberichte/id=3790)에 올라온 페터 리프(Peter Lieb)의 글과 필자가 Militärgeschichtlichen Zeitschrift 70(2011), S.99-104.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라.
66) Die Wehrmachtberichte, Bd.1, S. 565 u. Bd. 3, S. 262.를 참고하라.
67) Heiber, Lagebesprechungen, S. 192.를 참고하라.
68) Iz otcëta o boevych dejstvijach 5-j Gvardejskoj Tankovoj armii za period s 7 ijula po 24 ijulia 1943 goda(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 S. 3; Otcët o boevych dejstvijach 29 tankovogo korpusa za period s. 7.7. po 24.7.43 g.(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29전차군단의 전투보고) 포돌스크 소재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한 사본으로 포츠담의 독일연방군사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서는 GD 사단도 SS 사단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다.
69) 6SS기갑척탄병연대 테오도르 아이케에서 하사로 복무했던 하인츠 베허(Heinz Becher)2010919일에 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