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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8일 화요일

군대에 가면 총값을 내야지!


 군대에서 하는 장난 중에서 신병에게 총값을 내라고 하는게 있죠.(요즘은 안그러나요?^^) 그런데 실제로 총값을 내고 군대에 가는 경우도 있긴 했다는군요.

 법률에 따라 짧은 기간만 복무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계층 조차 아예 군대를 가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은 프로이센의 군사개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인기없었음을 보여준다. 교육수준이 높고 부유한 계층의 청년들은 1년간 정규군에 복무한 뒤 전역해 지방군(Landwehr) 장교로 임용되는 것 보다는 아예 군대에 가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쾰른 행정구의 경우 1817년에서 1818년 사이에 1년 복무를 위해 병적 등록을 한 사람이 겨우 41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해 쾰른 행정구 징집 인원의 1%에 불과했다. 실제로 이 계층의 사람은 징집 인원의 3%에 달했다.
 프로이센의 1814년 병역법은 자발적으로 병적 등록을 한 사람 중 두 부류에 한하여 복무기간을 줄여줬다. "교육을 받은" 계층과 군복 및 무기를 사는데 필요한 돈을 직접 지불한 사람의 경우 복무기간이 1년이었다. 복무기간을 1년으로 줄이는데 필요한 비용은 1816년 기준으로 40탈러(공병)에서 214탈러(중기병) 사이였다.(당시 프로이센에서 자영업 이외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연평균 소득은 94탈러였다. 프로이센의 초등학교 교사는 1년에 107탈러를 벌었다.) 1814년 병역법의 문맥을 보면 복무기간 단축의 대상으로 "교육을 받은" 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교육을 받은 사람은 군복과 무기를 살 비용도 댈 능력이 있으리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한 것이었다. 병역법은 "교육을 받은 계층"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도가 실시되자 금방 확실해졌다. 예를들면 김나지움에 2년 반 재학했던 자물쇠 장인들은 자신이 "교육을 받은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인 레시피를 가진 제빵사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Ute Frevert, A Nation in Barracks: Modern Germany, Military Conscription and Civil Society, (Berg, 2004), pp.52~53.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1호 특집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의 최신호인 제27권 1호를 훑어보는 중 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에 대한 특집호로 구성되어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는게 유감입니다. 3월에 출간되다 보니 최근 전개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문제는 다루지 못했지만 이것은 아마 여름에 나올 제2호에서 다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27권 1호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편의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Jacob W. Kipp, “‘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imothy Thomas, “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

Dmitry (Dima) Adamsky, “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논문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논문인 로저 맥더못Roger N. McDermott의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는 러시아의 국방개혁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몇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비판적인 경향이 강한 글 입니다.
 필자는 근본적으로 러시아 국방부의 기획 수립 능력 자체에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러시아군의 폐쇄성과 형편없는 통계 조사 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러시아 국방부가 군 연금 대상자 통계조차 똑바로 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2006년에 러시아군이 작성한 통계에서는 2011년까지 연금 지원 대상자가 24,000명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2011년이 되자 연금 지원 대상자는 45,000명이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1) 필자는 빈약한 통계 조사 능력과 같은 부실한 기반에 의거해 수립하는 계획이 제대로 추진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 자료를 획득할 수 없으니 연구조사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러시아군의 행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례로 드는 것 중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국방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장교단을 축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010년까지도 감축 목표에 전역자로 인한 자연 감소를 반영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2) 이쯤 되면 주먹구구식이라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필자는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획 능력을 결여한 러시아 국방부가 러시아군 총참모부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병력 운용의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러시아 육군이 사단체제에서 여단체제로 개편되면서 전투 준비태세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12개월 징집병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러시아군의 전투 준비태세는 의심스러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러시아 국방부가 기획능력의 난맥상을 감추기 위해서 새로운 여단체제의 효율성을 과대선전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3)
 이같은 문제점은 장교에 대한 인사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군이 2008년에 장교의 숫자를 35만5명에서 15만명으로 감축하기로 한 결정이 체계적인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외국 군대의 장교 비율을 참고해서” 장교의 숫자를 총 병력의 15%로 한다는 목표에 따라 설정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만명으로의 감축을 시작한 2008년 부터 장교 감축의 목표를 22만명으로 재조정한 2011년 까지 장교를 감축하면서 일어난 주먹구구식의 행정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읽다보니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서 제가 오독을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장교 숫자를 감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간부후보생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애교일 정도입니다.4) 그리고 육군을 여단 체제로 개편하면서 이에 걸맞는 장교 교육 체계는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실제로 2009년도에는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여단장 보직에 대령을 임용하기 위해 여러명의 대령을 면접한 결과 후보자로 올라온 대령의 대부분이 여단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5) 제가 조지아 전쟁 시기에 썼던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1987~”이라는 글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여전히 장교단 붕괴의 여파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군의 여단 편제 개편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상군의 여단 대부분이 편제 미달이다.
2. 지원병과 징집병에 혼재되어 있어 전투 준비태세가 부족하다.
3. 대부분의 여단이 여전히 구식장비로 무장하고 있으며 신형장비의 도입이 지지부진하다.
4. 장교단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5. 지휘부의 능력이 부족하며 특히 대대급으로 내려가면 문제가 심각하다.
6. 유능한 부사관이 부족하다.6)

 2011년에 편성된 우주-방공군Воздушно-космическая оборона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제가 정말 모르는 부분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논문으로 실린 제이콥 킵Jacob W. Kipp“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는 소련 붕괴이후 러시아 군부의 미래전에 대한 전망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비록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전에 쓰여진 글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를 접하고 보니 이해가 잘 가는 글 입니다. 냉전 이후 러시아를 둘러싼 안보정세의 변화를 러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설명해 주는 글 입니다. 이 글은 별도로 소개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제 번역할 시간이 나면 좋겠군요.


세번째 논문인 다니엘 고어Daniel Goure의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도 꽤 재미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읽다 보면 러시아라는 나라는 석유를 가진 북한 같다는 인상을 받게됩니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응, 그 한계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소련이 붕괴한 이후 경제적, 군사적인 몰락에 따른 트라우마로 러시아 지도층이 안보문제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며 때로는 피해망상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진단합니다. 이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존의 세력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 입니다.7)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면 현재 러시아 지도층의 생각은 1차대전 직후의 독일 지도층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지도층은 나토의 동진을 러시아에 대한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과거 소련의 세력권에 있던 지역들이 러시아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미국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국력은 열세하고 경제력과 인구 같은 치명적인 문제들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내부에서는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가 러시아를 미국 경제에 종속된 자원 수출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하다고 지적합니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 지도층이 보여주고 있는 강경한 태도는 러시아가 처한 전략적인 열세를 정치-군사적으로 만회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 입니다.8)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의 핵전력이 중요하게 다루어 집니다. 전략핵무기는 러시아가 서방, 특히 미국과 전략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9) 이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이래로 미국에게 큰 격차로 뒤지고 있는 재래식 정밀유도무기의 열세를 메울 대안이 바로 전술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여전히 전술핵 사용을 상정한 훈련을 활발히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10) 또한 핵무기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항할 경제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푸틴이 밝힌 것 처럼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지 않고 미국과의 핵경쟁을 하려면 더 많은 핵투발 수단을 보유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1)
 재래식 전쟁에 있어서는 러시아가 “세력권”으로 인식하는 지역에 대한 미국-나토의 제한적인 침공을 저지하는 양상의 분쟁을 예상하는 모양입니다. 동시에 서방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네트워크 중심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테러전과 사이버전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어서 생략합니다.


 네번째 글인 티모시 토마스Timothy Thomas“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는 러시아의 정보전, 사이버전 능력에 대해 다루는 부분인데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다섯번째 글은 알렉산더 골츠Alexander Golts의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입니다. 이글은 메르베데프가 집권하던 시기에 진행된 군사개혁을 평가하고 현재 푸틴 정권하에서 진행되는 군사개혁을 전망하는 내용인데 첫번째 글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문제점은 첫번째 글에서 지적했던 내용들과 겹치는게 많습니다.
 먼저  현재 러시아의 징병제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징집 가능한 인적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만18세의 남성은 2011년에 648,000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592,00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고 합니다. 인구 구조상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징집 기간이 12개월 밖에 안되는 것도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6개월 단위로 신병들이 교체되는데 이런 상태로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게다가 러시아 정부와 군부에서는 징집병과 지원병의 비율을 조정하는 문제에 있어 상당한 혼란을 보여왔습니다. 장기적으로 지원병의 비율을 늘릴 계획이라곤 하지만 세르듀코프가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시기에 보여준 난맥상을 볼 때 계속해서 징집병 위주의 군대로 갈 수 도 있다는 지적입니다.12) 그리고 러시아의 경제력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러시아의 경제 수준으로는 쇼이구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뒤 제시한 71만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현재 GDP의 3~4%를 국방비에 투입할 경우 적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병력을 50~60만명 수준으로 평가합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병력 규모를 유지하려 하는 이유는 고위 장교단의 관료주의적 발상에 기인한다고 봅니다.14)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그리고 지원병에 대한 처우도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425,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하는 계획도 실패할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2003~2008년 기간 동안 추진된140,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한다는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지원병 중에서 3년간의 복무기간을 마친 뒤 복무기간 연장에 동의하는 인원은 전체의 3분의 1남짓에 불과하다고 합니다.15)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향상 및 충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군관계에 대한 지적도 있는데 이건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여섯번째 글인 케어 자일스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는 맥더못이나 골츠와 달리 러시아의 국방개혁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2008년 부터 2010년까지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2011년 부터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으며 현재의 푸틴 정권도 국방개혁에 힘을 실어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방위산업과 무기 획득 체계의 개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러시아군의 병력 구조 문제나 군 간부단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는 점이 조금 의문입니다.


 마지막 글인 드미트리 아담스키Dmitry (Dima) Adamsky“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는 아직 읽지를 않았습니다.


 꽤 흥미로운 특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올 여름에 나오게 될 27권 2호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크게 다루지 않을까 싶으니 목을 빼고 기다려 봐야 겠습니다.


1)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16.
2) ibid., p.18.
3) ibid., p.19.
4) ibid., p.25.
5) ibid., p.27.
6) ibid., pp.29~30.
7)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69.
8) ibid., pp.71~72.
9) ibid., p.75.
10) ibid., p.81~82.
11) ibid., p.85~86.
12)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p.134~135.
13) ibid., p.135.
14) ibid., p.136.
15) ibid., p137.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국민동원에 특별히 유리한 정치사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번에 짤막한 소개글을 썼던 『패튼과 롬멜』은 패튼과 롬멜을 각각 미군과 독일군의 상징으로 하여 두 나라의 군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인 쇼월터는 미국의 장점으로 병사들의 자발성, 혹은 헌신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기간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병사의 숫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쇼월터는 2차대전 중 군법에 의해 처형된 탈영병은 한명인 반면 독일군은 5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처형했다고 지적합니다.1) 이러한 지적은 미국의 체제, 특히 정치문화가 독일의 파시즘에 비해 우월했다는 해석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쇼월터 또한 2차대전의 승리를 미국 자유주의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였던 지적풍조의 연장선상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일단 쇼월터는 1941년 12월 부터 1946년 3월까지 사형이 집행된 미군 병사가 146명에 달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탈영으로 처형된 병사 한명만을 언급함으로써 매우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병사 처형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추정치인 5만명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집행받고 처형된 독일군인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큰 차이가 나는데 데이빗 키터만David Kitterman은 1만명에서 1만2천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로서 많이 인용되는 메서슈미트Manfred Messerschmidt의 연구는 2만명 가량으로 추산합니다.2) 146명대 1만명으로 하더라도 독일군이 매우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쇼월터의 서술방식은 약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이데올로기적인 경직성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군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예로 들면 독일군은 전쟁 기간 동안 15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48명에 사형을 집행한 반면 프랑스의 경우는 2천여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700여명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미국과 비슷한 자유주의적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군은 3,08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346명을 실제로 처형했습니다.3)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독일군에 비해 일곱배나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입니다. 정치문화도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실제 전장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만 병사에 대한 강압적인 처벌은 해당 군대가 그만큼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리고 국민동원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민 동원’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이니 말입니다. 1차대전 당시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공화정 체제인 프랑스와 자유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이 병사들에 대한 통제에 독일군 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물론 미국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적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문화만 가지고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독일군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집행을 크게 늘린 것은 1944년 하반기 이후부터였고 이것은 나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 외에도 다른 요소들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독일과 동일한 조건에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닌 이상 쇼월터와 같은 방식의 서술은 약간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같은 경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졌던 초기에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국민동원”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한국의 징병제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그런 쪽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조금 늘어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상적인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쇼월터의 글을 읽으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몇년간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동원방식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대안이라 할 만한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게 고민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월터의 주장을 접하니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1) 데니스 쇼월터 지음/황규만 옮김, 『패튼과 롬멜 :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 (일조각, 2012), 280쪽
2) Norbert Hasse, “Wehrmachtangehörige vor dem Kriegsgericht”, Rolf-Dieter Müller&Hans-Erich Volkmann(hrsg.) Die Wehrmacht : Mythos und Realität, (Oldenbourg, 1999), pp.480~481
3) Stephen G. Fritz, Frontsoldaten : The German Soldier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95), p.90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징병제에 대한 잡상 하나

근대적인 대규모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혁명기의 프랑스 였지만 이것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Albrecht von Roon의 군제개혁은 프로이센식의 동원체제를 확립했고 보불전쟁 이후로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론의 군제개혁은 병력동원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것 이었습니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측에서 지지하는 "무장한 시민"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론의 군제개혁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1813년 독일 민족 정신의 발현으로, 그리고 "무장한 시민"의 상징으로 생각한 향토방위군Landwehr를 축소하고 그 대신 국가가 "통제"하는 현역 자원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은 골치아픈 진실입니다.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징병제를 옹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채택한 징병제는 "무장한 시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병력자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센 방식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징병제는 프로이센 지배층의 구상과 비슷한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문제인데 좀 더 정리된 글을 하나 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년 7월 5일 화요일

독일의 완전 모병제에 대한 잡담

독일 날자로 7월 4일, 의무병역제도가 폐지된 이후 첫번째로 입대한 자원병들이 국방부장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De Maizière begrüßt die ersten freiwilligen Wehrdienstleistenden

Von der Wehrpflichtarmee zur Freiwilligenarmee

이날 여성 44명을 포함해 총 3,419명이 독일연방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지원병의 복무기간은 23개월로 별로 긴편은 아닌데 현재 독일연방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부족한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독일연방군은 냉전시절에도 1962년 병역기간 연장 당시 늘린다고 늘린게  18개월이었고 1973년에는 다시 15개월로 줄일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병역부담이 적은 편이었지요.1) 자원병도 2년이 안되는 걸 보니 참 묘합니다.

그런데 독일 국방부장관의 환영사에서 좀 묘한 느낌이 풍겨나옵니다.

"(입소한) 계층은 광범위합니다. 대학입학 자격을 획득한 사람 부터 학업을 마치지 못한 사람, 그리고 재입대한 사람까지, 독일전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여기 모두 함께 하고 있는것 입니다."
(Das Spektrum ist breit. Sie kommen aus ganz Deutschland, sind Abiturienten, Menschen ohne Schulabschluss, Wiedereinsteiger – da ist alles dabei.)

독일의 완전 모병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드메지에Thomas de Maizière 독일 국방부장관의 발언은 어딘가 과거 맥나마라의 발언과 비슷한 느낌이 풍기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빈곤층들은 마침내 조국의 방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술과 생활 방식등을 배워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며 …. (중략) 이렇게 해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것 입니다.”2)

독일의 모병제가 다른 나라도 본받을 만한 괜찮은 모범사례가 될지 아니면 사회의 하층계급에게 국방의 부담을 떠넘기는 제도가 될지 궁금하군요.



1) Andre Uzulis, Die Bundeswehr : Eine politische Geschichte von 1955 bis heute, (Mittler&Sohn, 2005), s.36
2) George Q. 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07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재활용

얼마전에 읽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논문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유사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전에서 어느 한 쪽이 인력자원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쪽이 인력자원을 얻을 가능성을 뜻했다. 국민파는 공화파의 포로나 투항자 중 절반 정도가 국민군에 복무해도 될 정도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재활용’은 국민군이 새로운 병력을 얻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재활용한’ 병력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모로코 용병들과 함께 국민군이 징병해야 할 인력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국민군은 진격할 때 마다 편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공화군 포로를 잡아들여 여분의 인력자원을 꾸준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37년 9월, 국민군 총참모부는 병력과 저렴한 노동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포로수용소장 마르틴 피닐로스(Martin Pinillos) 대령에게 “신규 노동대대의 편성을 시작하기 위해 포로의 신속한 등급분류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분류는 다음과 같이 문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민파의 대의에 충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A, ‘(국민파의 대의에) 적대적이고 반대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간주되면 B, ‘유죄’이며 법적 처리를 받아야 하는 포로들의 경우 범죄가 ‘경미할’ 경우에는 C, ‘심각할’ 경우에는 D로 분류되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으면서 그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의심스러운 A’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분류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는데 공화파 포로 중 무려 50퍼센트가 A, 20퍼센트가 ‘의심스러운 A’, 20퍼센트가 B에 해당됐다. C와 D는 합쳐서 전체 포로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민군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공화군의 포로를 자기 편으로 ‘재활용’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의심스러운 A와 B로 분류된 포로는 노동대대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 통계는 공화군 병사의 상당수가 자신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는 편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성심이 약했다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 스페인 내전 전시기의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민군은 1937년 말 까지 107,000명의 공화군 포로를 잡았다. (이 중에서) 거의 59,000명이 곧바로 국민군에 입대했으며 약 30,000명은 노동대대에, 거의 12,000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머지 6,000명은 이 보고서가 작성될 때 까지 아직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1937년 가을, 아스투리아스(Asturias) 전역이 끝나갈 무렵 국민파는 다음과 같은 선전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많은 공화군 포로들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10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아스투리아스 점령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거의 7만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수일 내로 우리의 군인이 될 것이다.”

데 라 시에르바(De la Cierva)는 이중에서 대략 2/3이 1938년에 국민군으로 싸웠다고 추정했으며 인민군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보았다.

개별 모병소(Cajas de Recluta)의 보고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향이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1937년 10월에서야 북쪽에 있던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이 국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북부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함락된 산탄데르(Santander)의 모병소는 이미 9월 10일 부터 업무를 시작해 얼마전 까지 공화군에 있던 병사들을 국민군 일선 부대로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38년 5월의 보고서를 보면 부르고스(Burgos) 한 곳 에서만 15,000명을 ‘재활용’ 했다고 한다. 1938년 7월 14일 부터 20일 까지 단 일 주일간 사라고사 한 곳에서만 ‘적군 소속이었던’ 345명을 국민군에 입대시켰다. 마찬가지로, 바야돌리드(Valladolid) 에서는 같은해 7월, 단 10일 동안 246명을 모집했다.

공화군 병사로서 국민군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A로 분류될 경우 아주 빠르게 편을 바꿀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바스티다(Luis Bastida)는 공화파 북부군에 복무하다가 1937년 말 국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바스티다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민군 제35 ‘메리다’ 연대에 입대해 갈리시아(Galicia)의 비고(Vigo)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상을 바꾸지 않고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진영, 군대, 군복, 군가, 그리고 깃발을 바꾸었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바스티다는 국민군 소속으로 공화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아이러니하다는 듯이 기록했다.

“나는 회색 상의와 카키색 바지의 국민군 군복이 우리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일부 병사들은 너무 빨리 편을 바꾸는 통에 황색과 적색의 왕당파 깃발에 충성을 서약할 시간도 없었다.

James Matthews, “'Our Red Soldiers': The Nationalist Army's Management of its Left-Wing Conscripts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9”,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45 No 2(2010), pp.354~356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단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골치 아파집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나의 국민으로 편입될 존재들이기 때문에 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주 애매해 지지요. 물론 독소전쟁의 경우 처럼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도 ‘재활용’이 이루어 지는 경우 많긴 합니다만 내전 처럼 간단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지요. 어찌 보면 사상적 균열이 꽤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같은 사회구성원간의 내전에서는 의외로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집단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그 사람이 빨갱이인지 파시스트인지 구분하기란 꽤 어렵지 않겠습니까?(반대로 독일과 소련이라면 그 문제는 훨씬 쉽겠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하던 북한은 한국군 포로를 대규모로 인민군에 편입시켰지요. 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 직전 13,094명의 한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이중 6,430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박진홍 교수의 회고록을 보면 포로 송환 당시 한국군에서 인민군에 편입된 포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2)

어쨌든 동일한 사회적 집단, 특히 민족이라는 집단의 테두리 내에서는 균열을 완전히 봉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당히 은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친인척이 과거 ‘빨갱이’나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스페인 내전 당시 상대방의 포로를 전향시키는 과정을 보고 우리의 과거가 겹쳐지는 것 같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 션즈화/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2010), 413~414쪽
2) 박진홍, 『돌아온 패자 : 북한 포로수용소, 그 긴 전장을 가로지른 33개월의 증언』(역사비평사, 2001), 177~178쪽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를 다시 읽으면서

1970년에 나온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The Report of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an All-Volunteer Armed Froce)’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몇 년전만 하더라도 이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몇몇 논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이 보고서가 예측한 많은 사실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라 지금은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 보고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쟁을 겪고 있던 미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근대적인 징병제가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우리들도 한번 읽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고서는 서두에서 모병제 반대진영에서 제기하는 아홉가지 문제들을 열거한 뒤 모병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근거가 부족하거나 지나친 걱정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들고 있는 모병제 반대진영의 주요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모병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문제들이죠.

1.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유지비가 매우 많이 들어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시에 신속하게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유연성이 부족해 질 것이다.
3.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모든 시민은 국가에 헌신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약화시켜 애국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4. 징집병은 (군에 대한) 민의 우위, 자유, 그리고 민주적 제도들을 위협하는 독립된 군사문화가 성장하는 것을 막아준다.
5. 지원병제에서 제시하는 높은 급여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계층(미국의 경우 흑인)을 군대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며 이것은 계급적인 약자들에게 국방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6. 지원병제 하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주를 이룰 것이며 이들은 애국심이 아닌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입대하는 사실상의 용병에 불과할 것이다.
7.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해외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부추기고 무책임한 대외정책을 조성하는 한편 군사력 사용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8. 지원병으로 편성한 군대에는 유능한 인재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대의 효율성이 저하할 것이다. 군인의 자질이 저하되면 군대의 권위와 존엄성도 떨어지고 이것은 다시 모병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9. 완전한 지원병제를 실시할 만큼 국방예산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른 국방 부문의 예산을 삭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국방 태세를 약화 시킬 것이다.

물론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 아홉가지 문제 모두가 실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원병제 추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언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언급된 아홉가지 문제 중 아마 2번과 5, 6번 문제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 문제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8번도 해당될 수 있겠군요. 어쨌든 지원병제가 직접적인 경제적 부담이 더 크다는 점과 징병제에 비해 우수한 인력을, 특히 낮은 계급에 충당하는게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달리 인구와 경제력에서 여유가 없는 한국같은 나라는 더 위험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경제적, 안보적 환경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징병제를 계속 유지시키는 구실이 되고 있지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징병제를 불가피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장기적으로 군 복무 단축을 계속해서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로 줄일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미국의 징병제 폐지론자들이 강하게 주장한 것 처럼 징병제란 아무리 좋게 포장하더라도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제도입니다. 어쩌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나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주장한 것 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징병제도 실상은 중세의 군역과 다를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징병제 처럼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제도는 어떻게 변호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적인 근대적 징병제라면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한국의 실상은 정말 군역에 불과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필요성은 절감하는데 옹호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읽었을 무렵에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근대적인 징병제를 비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은 제 생각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얼마전 군복무기간을 다시 24개월로 늘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사적으로 화가 치밀더군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징병제에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1990년, 붕괴 직전 소련군의 일화

우울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죠.

1990년 6월 '병사의 어머니들' 이라는 운동단체가 과거 4~5년간 1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이후 부터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가 다른 출처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인민대표회의의 우즈베키스탄 대표 한 명은 "최근" 타쉬켄트 한 지역에서면 190명의 신병이 사망했으며 이미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신병 430명이 사망했다는 폭로를 했다.

이 대표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병사들을 노린 살인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며 국방부 대변인은 (1990년) 11월에 발표하기를 1989년 (1월 부터 ) 9월까지 사망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는 167명이며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출신은 123명, 우크라이나 출신은 25명, 카자흐스탄 출신은 15명, 벨라루스 출신은 13명, 그루지야 출신은 7명, 아제르바이잔 출신은 7명, 그리고 이 밖의 다른 공화국 출신 병사 일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이러한 증거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들만 차별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망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다른 민족(공화국)들이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에 제기한 의심을 더 확신하게 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가 일관성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나 발표된 통계를 보면 사망자의 숫자는 1990년 이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조프 원수는 12월에 있었던 한 비공개 회의에서 1990년 한 해에만 500명의 징집병이 자살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69명의 장교와 32명의 부사관이 살해당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장 니콜라이 쉴랴가 대령은 1990년 (1월부터) 11월까지 2,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말했다.(이렇게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 수치에 타지키스탄과 카프카즈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즉된다.)

Odom, William E.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93

붕괴될 무렵의 소련군대나 옐친 시절의 러시아군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군의 병영생활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따라잡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옐친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군대내의 가혹행위를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이 무렵의 소련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적당한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살짝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는데...

클린턴이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무렵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클린턴과 그의 측근들은 대체로 대선의 가능성에 대해 약간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분위기를 살펴보자는 쪽이었다. 대선에 출마한다는 구상은 4년 전 부터 주지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고려하던 것 이었다. 클린턴은 1988년 대선을 얼마 앞두고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에 대한 구상을 결코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1990년, 클린턴은 재선 운동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와 그의 참모들은 적절한 시점에 성공적인 전략을 사용했으며 그는 다시 낙승을 거둘 수 있었다. 클린턴과 그의 아내 힐러리, 그의 선거참모인 프랭크 그리어(Frank Greer), 여론조사가인 스탠 그린버그(Stan Greenberg), 그리고 소수의 가까운 측근들은 주지사직을 확보하자 즉시 1992년 대선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모두 클린턴이야 말로 민주당을 통털아 가장 유능한 중도적 인물이라고 믿었다. 이들의 모임은 1990년 12월 초 부터 시작되었으며 1991년 초에는 더욱 더 심각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때 걸프전쟁이 터졌으며 부시의 인기도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별반 잃을 것이 없던 클린턴 조차도 대선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은 그리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국인들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을 내쳤다는 이야길 들어 봤나?"

그리어는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 했다고 대답했지만 또한 매우 유동적인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적 대중매체의 위력 때문에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 이었다. 그리어는 정치적 흐름은 훨씬 빨리 변화하고 예측하기 어려워 졌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었는데."

그리어가 대답했다.

"저도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리어는 한 반전단체의 활동을 도운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리고 국민 대부분이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은 마침내 대선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19

지원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병역이 한 번 정도는 고려해 봐야 할 문제였다는 점에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입니다.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군복무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뜨거운 감자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회창 같은 거물도 자녀의 병역문제로 격침당했고 최근에는 정운찬 총리가 비슷한 문제로 고역을 치렀지요. 그리고 한 편에서는 또다시 식지않는 떡밥인 군가산점 문제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만약 대한민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원병제로 전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집니다. 최소한 요즘 처럼 병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정치인들은 없겠지요. 클린턴은 걸프전 때문에 병역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지만 특별히 전쟁할 일이 없는 대한민국이라면 의무 병역이 폐지될 경우 정치에 뛰어들려는 엘리트들은 한가지 부담은 덜게 될 것 입니다.

시민의 상당수가 군대와 무관한 상황이 오게 된다면 병역문제는 어떤 존재가 될까요? 의무 병역제는 인권 침해라는 측면에서 아주 고약한 제도이긴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그나마 엘리트들이 적어도 선거철에는 시민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물론 병역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이 시민의 눈치를 봐야할 것이 많긴 합니다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병역 만큼 효과적인 것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