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의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초반을 보면 힌켈(Adenoid Hinkel)이 관저 곳곳을 돌아다니며 똘마니들을 관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바로 미술가 두명이 나오는 부분이다.
조각가 한명과 화가 한명이 농땡이를 피우다가 힌켈이 들이닥치자 뭔가 하는 것 처럼 수선을 떠는 장면이다. 조각가는 브레커(Arno Breker)나 토락(Josep Thorak) 정도 될 성 싶고 화가는 잘 모르겠다. 하긴, 생각해 보니 채플린이 별 볼일없는 어용 미술인 개개인에 신경을 썼을 것 같진 않다. 대충 그놈이 그놈이려니 하고 등장 시켰겠지.
이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저 두 사람 역시 프로파간다에나 써먹을 쓰레기를 만드는 작업을 내켜하지 않는 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힌켈이 나가자 마자 저 두 사람은 다시 논다.
괴링을 희화한 사람은 그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잘 빈정거린 것 같았다.
그외에, 웃겼던 장면이라면...
편지를 붙이시는 힌켈 각하. 전형적인 악당 두목의 면모가 아닌가 싶다.
2006년 10월 29일 일요일
BBC. 한국을 무시하는 게요?
가끔 BBC 사이트를 들어갈 때 기분을 잡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BBC World Service
아니!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 서비스도 하면서 왜 한국어 서비스는 없단 말입니까!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열심히 하니까 4800만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아 물론 영어 잘하는 사람 많지만 못하는 사람도 많단 말이오!
아아. 한국어가 베트남어에도 밀리다니.
바로!
BBC World Service
아니!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 서비스도 하면서 왜 한국어 서비스는 없단 말입니까!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열심히 하니까 4800만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아 물론 영어 잘하는 사람 많지만 못하는 사람도 많단 말이오!
아아. 한국어가 베트남어에도 밀리다니.
2006년 10월 26일 목요일
독일군 포로송환 완료 뒤 프라브다에 실린 어떤 기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모든 선전기관들이 석방된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포장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귀향자들을 수용하는 프리들란트(Friedland) 수용소는 뻔뻔하게도 과거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찬양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비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프라브다 1955년 10월 21일, G. Knopp, Die Gefangenen s.380 재인용
아데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55년 미송환된 독일인 포로들, 특히 주로 전범으로 분류된 무장 친위대나 고위 간부들의 송환을 성공 시킨 것이다. 무장친위대 소속의 포로들은 소련측에서 씨를 말려버릴 심산이었기 때문에 송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걸 성공 시킨 것이다.
이때의 일로 흐루쇼프는 "독일인들이 벌써 부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내심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로를 송환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심통을 부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2006년 10월 25일 수요일
이라크가 정말 베트남 꼴이 나는 것인가?
얼마전 상국 황상께서 현재 이라크의 상황을 "구정공세"와 비교하셔서 신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신 바 있는데 뉴스에 나오는 바그다드의 꼴을 보면 이건 정말 구정공세라고 말해도 될 만큼 엉망인 것 같다. 이러다가 이라크가 정말로 미국에게 제 2의 베트남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고작 15만도 안되는 미군 중 10% 가까이가 바그다드에 묶여 있고 추가로 다른 지역에서 전투병력을 더 증원할 생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역은?
당연히 이라크 정규군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들을 믿을 수 있을까?
이번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라크 정부군의 육성 상황이었다.
겨우 112개 대대라고 한다. 겨우 112개 대대...
이라크의 면적을 고려한다면 고작 112개 대대로 할 수 있는게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 진다. 이걸로는 미군의 도움 없이 국경을 틀어막고 정부의 주요 거점을 방어하는게 불가능 한것 아닌가?
1966년 베트남에서는 현재 이라크보다 병력 상황은 다소 나은 수준이었지만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남베트남과 미군을 합쳐 172개 대대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라크의 상황은 더 나쁘다. 그리고 병력은 더 적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전쟁때 보다도 미군의 병력 상황은 더 좋지 않다. 현재 상황에서 추가적인 병력 증파는 어려워 보인다. 베트남 전 당시 미군 전투병력은 1969년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 전쟁에 졌다. 그런데 현재 이라크에는 몇개 대대나 있는가?
베트남에서는 ARVN에 대해 막대한 군사 원조도 제공됐지만 이라크 정규군은 그런 것 조차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병력도 부족하고 장비와 기동력도 열세인 정부군이 면적은 432,162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지역을 커버한다는 것 보다는 전여옥 여사의 언행이 순화되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본인의 짧은 지식으로 볼때도 이건 정말 구제 불능의 상황이다. 아무래도 럼즈펠드 공께서는 좀 더 욕을 드셔야겠다.
새삼 스레 sonnet님이 인용한 즈비그 선생 인터뷰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몇 년 있다가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지붕에서 헬리콥터에 매달리는 이라크인들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고작 15만도 안되는 미군 중 10% 가까이가 바그다드에 묶여 있고 추가로 다른 지역에서 전투병력을 더 증원할 생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역은?
당연히 이라크 정규군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들을 믿을 수 있을까?
이번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라크 정부군의 육성 상황이었다.
The American commander said the rebuilding of Iraq’s security forces was about 75 percent complete. He said almost 90 of the 112 American-trained Iraqi Army battalions are “in the lead” across Iraq, meaning they have taken over the primary combat role from Americans.
겨우 112개 대대라고 한다. 겨우 112개 대대...
이라크의 면적을 고려한다면 고작 112개 대대로 할 수 있는게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 진다. 이걸로는 미군의 도움 없이 국경을 틀어막고 정부의 주요 거점을 방어하는게 불가능 한것 아닌가?
1966년 베트남에서는 현재 이라크보다 병력 상황은 다소 나은 수준이었지만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남베트남과 미군을 합쳐 172개 대대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라크의 상황은 더 나쁘다. 그리고 병력은 더 적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전쟁때 보다도 미군의 병력 상황은 더 좋지 않다. 현재 상황에서 추가적인 병력 증파는 어려워 보인다. 베트남 전 당시 미군 전투병력은 1969년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 전쟁에 졌다. 그런데 현재 이라크에는 몇개 대대나 있는가?
베트남에서는 ARVN에 대해 막대한 군사 원조도 제공됐지만 이라크 정규군은 그런 것 조차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병력도 부족하고 장비와 기동력도 열세인 정부군이 면적은 432,162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지역을 커버한다는 것 보다는 전여옥 여사의 언행이 순화되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본인의 짧은 지식으로 볼때도 이건 정말 구제 불능의 상황이다. 아무래도 럼즈펠드 공께서는 좀 더 욕을 드셔야겠다.
새삼 스레 sonnet님이 인용한 즈비그 선생 인터뷰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몇 년 있다가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지붕에서 헬리콥터에 매달리는 이라크인들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2006년 10월 23일 월요일
조선일보의 하영선 교수 인터뷰
북핵 사태를 맞아 신난 조선일보에서 계속해서 전문가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다. 오늘의 타자는 하영선 교수인 모양이다.
인터뷰 내용에서 전반적으로 걸린 것은 아무래도 이 분의 분석이 강대국의 입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런지 우리의 대응은 강대국의 결정에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는 내용으로 귀결되는 것 이다. 솔직히 나도 약간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냥 그런가 보군 하면서 넘어가면 좀 찝찝하지 않은가.
역시 심각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지식이 짧아 이런 식의 부실한 딴지 걸기 밖엔 못 하겠다.
아. 그런데 하영선 교수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여권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물론 지금 열심히 떠드는 야당들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게 어렵기는 마찬가지 겠지만.
인터뷰 내용에서 전반적으로 걸린 것은 아무래도 이 분의 분석이 강대국의 입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런지 우리의 대응은 강대국의 결정에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는 내용으로 귀결되는 것 이다. 솔직히 나도 약간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냥 그런가 보군 하면서 넘어가면 좀 찝찝하지 않은가.
역시 심각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지식이 짧아 이런 식의 부실한 딴지 걸기 밖엔 못 하겠다.
아. 그런데 하영선 교수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엔 대북결의는 안보리에서 15대0으로 통과됐다. 국제사회가 ‘북한책임론’을 만장일치로 지지해줬다는 의미다. 여권은 국내정치와 대선을 기준으로 국제정세를 보기 때문에 미국과 북한의 의도를 읽지 못한다. 북핵문제는 ‘동맹의 정치판’으로 읽어야 답이 나온다.
솔직히 여권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물론 지금 열심히 떠드는 야당들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게 어렵기는 마찬가지 겠지만.
2006년 10월 21일 토요일
露西亞 國王 흐루쇼프의 兵車 無用論
케네디 4년에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가 여러 신료들에게 군사를 줄여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라 하교했다. 그리고 특히 병거가 너무 많다 하니 그 말이 다음과 같았다.
결론.
병거의 왕국 노서아에 병거 무용론을 일으킨 판쩌 파우스트는 역시 위대한 병기다???
지난 전쟁에서 전차는 공격의 중핵으로, 그리고 방어의 지주로서 활약했습니다. 전차는 소화기에 대해서 무적이었고 단지 명중율이 낮은 대포만이 전차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말기에 모든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적은 판쩌 파우스트로 아군의 전차들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숫적 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대전차 로켓은 전차의 최대 사정거리인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전차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전차와 자주포, 병력수송장갑차는 이제 병사들에게 덫이 될 뿐입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전차와 장갑차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까? 수십억 루블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9~1991, p190~191
결론.
병거의 왕국 노서아에 병거 무용론을 일으킨 판쩌 파우스트는 역시 위대한 병기다???
2006년 10월 20일 금요일
이시대의 참 종교인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종교인에 대한 훈훈한 소식 하나를 접했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그동안 교회의 쇠락을 가슴아프게 지켜보던 차에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는 참 목사를 알게 되니 마음이 뿌듯하다.
할렐루야!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하라(데살로니가 전서 3:10)
아. 그동안 교회의 쇠락을 가슴아프게 지켜보던 차에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는 참 목사를 알게 되니 마음이 뿌듯하다.
할렐루야!
2006년 10월 18일 수요일
북조선 인민들은 없는 배도 만들어 격침시킨다!
박군님 블로그를 보니 아주 재미있는 글이 하나 실려 있다. 출처가 된 책의 정확한 서지 사항이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웃기다 못해 짜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찌하다 북조선의 군사 백과사전에서 읽은 ‘미제의 중순양함 발찌모르’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문이 있는 사이트들은 ‘유해 사이트’로 접속이 차단돼 있으니 인터넷 정신병동 자주민보에 실린 글로 대체한다.
참고로, 북한쪽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는 막는데 이런 정신나간 헛소리가 실리는 사이트는 내버려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에서 ‘발찌모르’ 또는‘볼티모어급’순양함이 격침된 사례가 있을까?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은 다음과 같다.
Baltimore (CA-68) : 1956년 퇴역
Boston (CA-69) : 1970년 퇴역
Canberra (CA-70) : 1970년 퇴역
Quincy (CA-71) : 1946년 퇴역, 재취역후 한국전쟁 참가, 1954년 퇴역
Pittsburgh (CA-72) : 1947년 퇴역, 1951년 재취역, 1956년 퇴역
St. Paul (CA-73) : 한국전쟁 참가, 1971년 퇴역
Columbus (CA-74) : 1975년 퇴역
Helena (CA-7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Oregon City (CA-122) = 오레곤 급 : 1947년 퇴역
Albany (CA-123) = 오레곤 급 : 1967년 퇴역
Rochester (CA-124) = 오레곤 급 : 한국전쟁 참가, 1961년 퇴역
Bremerton (CA-130)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Fall River (CA-131) : 1947년 퇴역
Macon (CA-132) : 1950년 퇴역, 1950년 재취역, 1961년 퇴역
Toledo (CA-133)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Los Angeles (CA-13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Chicago (CA-136) : 1947년 퇴역, 1964년 재취역, 1980년 퇴역
그런데 북한의 어뢰정에 격침된 볼티모어급은 단 한척도 없다.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중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다소나마 피해를 입은 것은 CA-135 로스앤젤레스 정도인데 이 녀석에 피해를 입힌 것은 해안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네임쉽인 이른바 ‘발찌모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아예 지중해 함대에 배속돼 있었다고 한다. 즉 북조선 인민들은 지중해에 있는 배도 동해바다로 워프시켜서 격침시킬 정도의 능력을 갖춘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식으로 망상을 만들어 나가는 북조선 동포들을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과연 통일이 된다고 치면 북한인들은 그동안 살고 있던 곳이 참 조악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걸 깨달을 텐데 현실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찌하다 북조선의 군사 백과사전에서 읽은 ‘미제의 중순양함 발찌모르’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문이 있는 사이트들은 ‘유해 사이트’로 접속이 차단돼 있으니 인터넷 정신병동 자주민보에 실린 글로 대체한다.
(전략)
사실 그보다 4년 전에 조선인민군의 어뢰정은 그보다 더 큰 전과를 거둔 바 있었다. 1950년 7월 2일 4시경, 4척의 어뢰정으로 편성된 제2어뢰정대는 4시간 항행 끝에 주문진 앞바다에서 미군 함선집단을 발견했다. 포화를 무릅쓰고 10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21, 22, 23호 어뢰정이 연속 발사한 3발의 어뢰는 전부 중순양함 “발티모르”호를 명중. 뒤이어 6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발사한 어뢰로 경순양함을 명중. 연속 강타를 받은 “발티모르”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몰되었다.
당시 정대장 김군옥은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첫 해군으로 되었고 뒷날 군사교육을 거쳐 기지장이 되었다. 그는 <인민들 속에서 60>(조선노동당 출판사, 2000년 9월 출판)에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기적은 이렇게 마련되였다”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싸움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미 함선집단은 “우리 해군함대가 저들과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방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적 함선들이 부두나 연해에 정박해 있을 때 불의에 타격하면 능히 적함선집단을 소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한다. 김군옥은 그 말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해 성공했다는데, 사실 어뢰정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노릇이었다. 어느 서방군사평론가가 “황소와 땅벌(북에서는 ‘따벌’이라 표기)의 싸움”이라고 평했다는데 아주 근사한 비유이다.
참고로, 북한쪽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는 막는데 이런 정신나간 헛소리가 실리는 사이트는 내버려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에서 ‘발찌모르’ 또는‘볼티모어급’순양함이 격침된 사례가 있을까?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은 다음과 같다.
Baltimore (CA-68) : 1956년 퇴역
Boston (CA-69) : 1970년 퇴역
Canberra (CA-70) : 1970년 퇴역
Quincy (CA-71) : 1946년 퇴역, 재취역후 한국전쟁 참가, 1954년 퇴역
Pittsburgh (CA-72) : 1947년 퇴역, 1951년 재취역, 1956년 퇴역
St. Paul (CA-73) : 한국전쟁 참가, 1971년 퇴역
Columbus (CA-74) : 1975년 퇴역
Helena (CA-7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Oregon City (CA-122) = 오레곤 급 : 1947년 퇴역
Albany (CA-123) = 오레곤 급 : 1967년 퇴역
Rochester (CA-124) = 오레곤 급 : 한국전쟁 참가, 1961년 퇴역
Bremerton (CA-130)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Fall River (CA-131) : 1947년 퇴역
Macon (CA-132) : 1950년 퇴역, 1950년 재취역, 1961년 퇴역
Toledo (CA-133)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Los Angeles (CA-13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Chicago (CA-136) : 1947년 퇴역, 1964년 재취역, 1980년 퇴역
그런데 북한의 어뢰정에 격침된 볼티모어급은 단 한척도 없다.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중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다소나마 피해를 입은 것은 CA-135 로스앤젤레스 정도인데 이 녀석에 피해를 입힌 것은 해안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네임쉽인 이른바 ‘발찌모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아예 지중해 함대에 배속돼 있었다고 한다. 즉 북조선 인민들은 지중해에 있는 배도 동해바다로 워프시켜서 격침시킬 정도의 능력을 갖춘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식으로 망상을 만들어 나가는 북조선 동포들을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과연 통일이 된다고 치면 북한인들은 그동안 살고 있던 곳이 참 조악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걸 깨달을 텐데 현실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2006년 10월 17일 화요일
최근의 북한 핵 논의에 대한 생각
북한이 두번째 핵실험을 준비한다고 해서 또다시 어수선한 상황이다.
북핵이란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많은 논의가 있고 그 중에는 매우 유익한 내용이 담긴 글들도 많았다.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의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판단을 내릴만한 정보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모두 추측,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몇 몇 사이트에서는 자칭 논객들이 자신의 뇌내망상에 근거해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 갖은 썰을 풀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그다지 유익한 정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북한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물론 북한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내놓는 전망도 사실 추정에 불과한 것들이니.
정말 북한은 이런 점에서는 본좌라는 생각이 든다.
북핵이란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많은 논의가 있고 그 중에는 매우 유익한 내용이 담긴 글들도 많았다.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의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판단을 내릴만한 정보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모두 추측,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몇 몇 사이트에서는 자칭 논객들이 자신의 뇌내망상에 근거해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 갖은 썰을 풀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그다지 유익한 정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북한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물론 북한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내놓는 전망도 사실 추정에 불과한 것들이니.
정말 북한은 이런 점에서는 본좌라는 생각이 든다.
2006년 10월 16일 월요일
Die Gefangenen - Guido Knopp
귀도 크놉(Guido Knopp)의 저작들은 대부분 방송용 다큐멘터리와 함께 기획됐고 독일 제 3제국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중 일부는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다.
Die Gefangenen은 2003년 ZDF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편성표를 보니 책 또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건 크놉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어쨌건 2003년에 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 할건 없고 간단히 이 책을 훑어본 느낌만 적어볼까 한다.
첫 장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들부터 시작해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동부전선에서 생포된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잘 알려져 있고 다른 저작들에서도 많이 다루는지라 특별히 흥미가 당기진 않는다.
두 번째 장은 영국에 잡힌 포로들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장은 소련에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접했는데 이 책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장은 포로생활치고는 팔자가 늘어졌다는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장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많다.(대표적인 것이라면 역시 콜라를 마시면서 즐거워하는 독일 포로들. 코카콜라 광고에 이 사진을 써먹으면 어떨가?)
다섯번째 장은 전쟁 종결 직후 독일내의 임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생고생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우익 작가들이 “아이젠하워의 학살” 같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즐겨 써먹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 끌려간 포로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원래 유태인의 추방지로 고려됐던 마다가스카르에 독일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장은 포로들, 특히 소련에 수용됐던 포로들의 귀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2차 대전은 사실상 이 때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된 한 세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이다.
간혹 2차 대전당시 독일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독일은 전범국이네”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신물나게 듣게 된다. 글쎄? 하지만 역사적인 고통이 어떤 한 집단의 전유물 인 것 처럼 떠드는 것 보다 더한 위선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가끔씩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정신건강엔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부터 조금씩 번역을 해 볼 생각이다.
Die Gefangenen은 2003년 ZDF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편성표를 보니 책 또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건 크놉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어쨌건 2003년에 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 할건 없고 간단히 이 책을 훑어본 느낌만 적어볼까 한다.
첫 장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들부터 시작해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동부전선에서 생포된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잘 알려져 있고 다른 저작들에서도 많이 다루는지라 특별히 흥미가 당기진 않는다.
두 번째 장은 영국에 잡힌 포로들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장은 소련에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접했는데 이 책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장은 포로생활치고는 팔자가 늘어졌다는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장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많다.(대표적인 것이라면 역시 콜라를 마시면서 즐거워하는 독일 포로들. 코카콜라 광고에 이 사진을 써먹으면 어떨가?)
다섯번째 장은 전쟁 종결 직후 독일내의 임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생고생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우익 작가들이 “아이젠하워의 학살” 같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즐겨 써먹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 끌려간 포로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원래 유태인의 추방지로 고려됐던 마다가스카르에 독일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장은 포로들, 특히 소련에 수용됐던 포로들의 귀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2차 대전은 사실상 이 때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된 한 세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이다.
간혹 2차 대전당시 독일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독일은 전범국이네”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신물나게 듣게 된다. 글쎄? 하지만 역사적인 고통이 어떤 한 집단의 전유물 인 것 처럼 떠드는 것 보다 더한 위선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가끔씩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정신건강엔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부터 조금씩 번역을 해 볼 생각이다.
2006년 10월 8일 일요일
각하의 찬란한 존안
인터넷의 좌경화가 극에 달한 와중에도 여전히 넷에는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몇 개월전 에는 sonnet님이 각하의 존안을 담은 우표를 수집하여 소장하고 계신다하여 많은 우국지사들의 마음에 훈훈한 감동을 전한바 있다.
그리하여 이 어린양도 우국지사들의 활동에 감명받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힘을 쏟기로 하였다.
자. 그래서 얼마전 입수한 물건 하나를 공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물건은 바로 이것!
바로 지난날 각하께서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들에게 하사하신 물건이다.
그러나 아직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엔 이르다.
뒷면을 보라!
각하의 존안이 메달의 재질과 맞물려 찬란한 빛을 더하고 있다.
아아.... 각하!
그리하여 이 어린양도 우국지사들의 활동에 감명받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힘을 쏟기로 하였다.
자. 그래서 얼마전 입수한 물건 하나를 공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물건은 바로 이것!
바로 지난날 각하께서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들에게 하사하신 물건이다.
그러나 아직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엔 이르다.
뒷면을 보라!
각하의 존안이 메달의 재질과 맞물려 찬란한 빛을 더하고 있다.
아아.... 각하!
2006년 10월 7일 토요일
Tiger der Division Das Reich 영문판 발간
상당히 흥미로운 책들을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출간하는 J.J. Fedorowicz에서 Tiger der Division Das Reich의 영문판을 발행하는 모양이다.
책 소개를 보니 총 페이지수가 396쪽에 컬러 페이지가 8장이라는게 눈에 띈다. 독일어판은 참고문헌까지 포함해 608페이지인데 영문판은 200페이지가 더 적은게 의아하다. 글자수를 작게해서 페이지수를 줄였거나 아니면 판형을 키웠거나 둘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단, 이 출판사에서 번역한 독일책 중에는 번역수준으로 안좋은 평을 듣는 것도 더러 있는데 이 녀석은 어떨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독일어 판에는 색인이 없어 매우 아쉬웠는데 영문판에는 보강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독일어 판에 없던 컬러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돼 있다고 하는데 꽤 흥미롭다.
그런데 가격이 미국 달러로 90달러나 한다고 한다. 좋은 책이긴 하지만 굳이 이정도 가격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독일어판을 55유로에 구했는데 영문판은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됐다는 느낌이다. 영어판이 독일어판 보다 더 잘팔릴 것 같은데 영어판은 40달러 미만으로 해도 좋지 않을까?
만약 가격이 싸다면 영문판을 구해서 독일어판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겠지만 이거 너무나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책 소개를 보니 총 페이지수가 396쪽에 컬러 페이지가 8장이라는게 눈에 띈다. 독일어판은 참고문헌까지 포함해 608페이지인데 영문판은 200페이지가 더 적은게 의아하다. 글자수를 작게해서 페이지수를 줄였거나 아니면 판형을 키웠거나 둘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단, 이 출판사에서 번역한 독일책 중에는 번역수준으로 안좋은 평을 듣는 것도 더러 있는데 이 녀석은 어떨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독일어 판에는 색인이 없어 매우 아쉬웠는데 영문판에는 보강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독일어 판에 없던 컬러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돼 있다고 하는데 꽤 흥미롭다.
그런데 가격이 미국 달러로 90달러나 한다고 한다. 좋은 책이긴 하지만 굳이 이정도 가격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독일어판을 55유로에 구했는데 영문판은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됐다는 느낌이다. 영어판이 독일어판 보다 더 잘팔릴 것 같은데 영어판은 40달러 미만으로 해도 좋지 않을까?
만약 가격이 싸다면 영문판을 구해서 독일어판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겠지만 이거 너무나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2006년 10월 6일 금요일
공산당 서기장 = 짜르
우리의 스탈린 전하께서 1935년 대비마마를 알현했을 때의 일화
공산당 서기장과 짜르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스탈린 동지께서 교시하셨던 것이다...
"어머니, 왜 이렇게 세게 때리시는 건가요?”
스탈린이 어머니에게 묻자 케케(스탈린 어머니의 애칭)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너무 장해서 그런단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쇼프,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도데체 뭐냐?”
스탈린의 초상은 전국 각지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어떤 사람인가는 누구라도 다 알고 있었다. 케케는 그저 자기 아들의 자랑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짜르를 기억하시죠? 저는 지금 짜르와 같은 위치에 있답니다.”
케케의 소박한 대답은 너무나 웃기는 것이었다.
“그래? 성직자를 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구나!”
Edvard Radzinsky, Stalin, Anchor Books, 1996, 24p
공산당 서기장과 짜르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스탈린 동지께서 교시하셨던 것이다...
2006년 10월 5일 목요일
밑빠진 독에 물 붓기 - 케네디 행정부의 중남미 군사원조
S. Rabe의 The Most Dangerous Area in the World를 읽는 중이다. 1998년에 읽은 뒤 8년간 방치해 두고 있던 녀석인데 이번 연휴를 맞아 책장 정리를 하다가 한 번 더 읽는 중이다. 이 책에서는 케네디 행정부의 남미 군사원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인상적이다. 중남미 군사원조에 대한 부분은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군사원조는 40년대 중-후반부터 아이젠하워 행정부까지 다른 제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장비를 갖추고 정규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도록 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 물론 40년대 이전까지 주로 유럽식으로 되어 있던 무기체계를 미국식으로 고치는 것 역시 이 시기 군사원조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남미는 특별한 외부의 위협이 없는 지역이다! 설마 흐루쇼프가 잠수함 타고 쳐들어 오기야 하겠는가.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군사원조를 “삽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바티스타 정권이 카스트로의 아마추어(?) 군대에 박살나자 이런 생각을 더욱더 굳히게 됐다.
케네디가 집권 초부터 비정규전에 큰 관심을 보인 것도 중남미를 염두에 뒀던 것이고 이에 따라 군은 물론 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에 대해서도 대규모 원조가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케네디 행정부 시기 중남미 국가에 대한 군사원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비해 연평균 50% 이상이 증가됐다.
그런데 미국방부는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미 국가들의 군대의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저자는 케네디 행정부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은 남미국가들의 군대에 대해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미국방부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의 군대는 전문성이 결여된 장교단과 부사관집단이 지휘하는 형편없이 장비되고 훈련된 징집병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의 결론은 케네디 행정부의 중남미 군사원조는 삽질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전세계에 걸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했던 50-60년대의 미국을 보면 정말 대국(???)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군사원조는 40년대 중-후반부터 아이젠하워 행정부까지 다른 제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장비를 갖추고 정규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도록 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 물론 40년대 이전까지 주로 유럽식으로 되어 있던 무기체계를 미국식으로 고치는 것 역시 이 시기 군사원조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남미는 특별한 외부의 위협이 없는 지역이다! 설마 흐루쇼프가 잠수함 타고 쳐들어 오기야 하겠는가.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군사원조를 “삽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바티스타 정권이 카스트로의 아마추어(?) 군대에 박살나자 이런 생각을 더욱더 굳히게 됐다.
케네디가 집권 초부터 비정규전에 큰 관심을 보인 것도 중남미를 염두에 뒀던 것이고 이에 따라 군은 물론 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에 대해서도 대규모 원조가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케네디 행정부 시기 중남미 국가에 대한 군사원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비해 연평균 50% 이상이 증가됐다.
그런데 미국방부는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미 국가들의 군대의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저자는 케네디 행정부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은 남미국가들의 군대에 대해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미국방부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의 군대는 전문성이 결여된 장교단과 부사관집단이 지휘하는 형편없이 장비되고 훈련된 징집병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의 결론은 케네디 행정부의 중남미 군사원조는 삽질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전세계에 걸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했던 50-60년대의 미국을 보면 정말 대국(???)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2006년 10월 3일 화요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1950년 3월 8일자 보고서
주한미국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8일 육군부 작전국에 한국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북한의 공군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주일 미공군의 잉여 장비인 P-51또는 P-47 중 50대를 한국군에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보고서의 전문을 옮겨 본다.
흥미롭게도 북한의 육군을 남한군 보다 약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A. Millet의 연구에 인용된 1950년 6월 15일자 미국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전력 평가는 특기할 만한데 북한군의 병력이 103,000명, 전차는 불과 64대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미국 대사관쪽의 분석은 실제 북한군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국무부의 정보망이 군대 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버츠 준장의 요청에 대한 미국방부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줄이면 한국군 병력 증강과 전투기 지원은 국무부의 방침에 어긋나므로 어렵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NSC 8/2는 한국군의 병력 상한선을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35,000명으로 제약하고 있었지만 이미 1950년 3월 한국군의 병력은 이걸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미 육군이 북한의 지상군 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했던 것은 맞는 듯 싶다.
친애하는 찰리(볼테 소장의 애칭)
본인이 “한국 내부” 정보에 대해 보고서를 올린 것이 2-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주한미군사고문단과 한국 국방군의 최신 정보를 요약해서 보냅니다.
지난 겨울 기간 동안 한국군은 두 세곳의 지역에서 게릴라의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게릴라들은 대개 북쪽에서 침투하고 있으며 종종 북쪽으로부터 무기 보급도 받고 있습니다. 아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무기를 실은 적의 선박을 발견해 무기 대부분을 압수했습니다. 한국군은 게릴라전에 5개 연대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대 훈련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되고 있지만 계속해서 각 중대, 대대, 연대를 순환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의 사단장들이 사단 및 연대 예비 대대의 운용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으며 그에 맞춰 훈련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지원 중대 및 소대 단위 부대에 대한 훈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48년과 1949년에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후로그런 위협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38도선 상의 충돌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게릴라 침투를 완전히 차단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으며 현재의 게릴라 토벌 상황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400명 정도의 게릴라를 사살했지만 아직도 산악지역에는 수배에 달하는 게릴라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상황과 현재 국립경찰 병력이 50,000명(본관은 현재의 경찰 병력이 적정수준에서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는 많다고 생각합니다)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관은 경찰 10,000명(각 465명으로 편성된 22개 대대)을 전투경찰로 게릴라 토벌작전에 투입하려 합니다. 현재 이를 위한 조직과 훈련이 진행 중입니다. 경찰 간부 240명이 보병학교에서 8주 과정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 병력이 4월 1일부터 육군으로부터 게릴라 토벌 임무를 인계 받을 예정이고 5월 1일에는 임무 교대가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한국군 병력은 1만이 증가하는 셈이고 육군 부대들을 게릴라 토벌에서 빼내 훈련을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경찰의 게릴라 토벌이 잘 진행되면 51년 여름에 추가로 5,000명에서 10,000명의 경찰을 이 임무에 투입할 계획입니다.
본인의 한국 근무기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10월 1일에는 전역할 예정입니다. 본인은 5월 8일 부로 24개월의 근무기간을 끝냅니다. 제가 도쿄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참모장 콜린스 장군과 잠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콜린스 장군은 제가 전역하기 전인 여름에 한국에서 전출 될 수 있을지 확약할 수 는 없다고 말했고 만약 한국근무를 끝낸다면 전역하기 전 까지 어디서 근무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 6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대답 했습니다. 지금 엘라(Ella)는 병을 앓고 있는데 수막염, 소아마비 또는 뇌막염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의사도 정확히 어떤 병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엘라는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저는 엘라의 곁에 있고 싶지만 제 후임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제 후임으로는 행정력 보다는 전투 경험과 부대 지도에 유능한 소장급 장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3개월 이내에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주요 고위 장교들이 전출될 예정입니다. 먼저 제 참모장은 6월에 근무기간이 끝나며 작전참모, 정보참모, 인사참모, 군수참모, 부참모장, 회계장교와 유능한 고문관 여러명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느 정도 역할을 축소해야 할 지가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a. 미군사고문단은 1949년 12월 15일 이래 편제에 항상 미달했습니다.
b. 병과학교 체계(보병학교, 참모학교, 사관학교, 포병학교, 통신학교, 정비학교, 공병학교, 군수학교, 재정학교, 군의학교)는 한국군의 굳건한 기반이며 이 체계는 계속해서 강화되야 합니다.
c. 미국의 군사원조(MDAP)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군사고문단의 감독이 필수적입니다.
d. 고문단의 지도가 이제 효과를 발휘하기 지작했습니다.
e. 일부 사단은 이제 대대급 기동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중대단위 훈련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f. CPX는 이제 막 진행되고 있습니다.
g. 한국군의 사격 실력은 우수하며 미군보다 조금 뒤지는 수준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먼저 대대급에서 고문단을 철수 시키고 점차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고문단의 감축은 1951년 1월 1일 이전에는 절대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까지의 기간이 한국군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남한 정부가 북한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남한 육군은 충분히 그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고문단이 잔류한다면(최소한 연대와 사단급 부대만이라도) 한국군은 훨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고문단은 더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문단은 명칭만 고문단일 뿐 실질적으로 지휘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100대 가량의 러시아제 항공기를 획득했으며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유사시) 이 100대의 항공기가 남한군 부대와 도시, 그리고 주요 수송로에 대해 어떤 짓을 할 지는 우리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북한이 남침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북한육군은 공군의 지원으로 남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국민들이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승자를 따를 것이며 남한은 아시아 공산국의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현재 남한은 ECA원조로 물자가 풍부하며 인플레이션으로 재정 상태는 좋지 않으나 풍년으로 식량도 충분한 상태입니다. 남한이 북쪽에 점령된다면 매우 훌륭한 전리품이 될 것입니다. 남한은 전략적으로 일본의 심장부를 위협하고 있으며 적의 손에 떨어질 경우 서방세계의 보루인 일본의 방어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북한 공군에 대한 대응책으로 즉각 남한정부에 항공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현재 남한군은 12대에서 14대 정도의 L 계열 항공기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3대의 AT-6 기가 남한군에 배치됐으며 한국 정부는 추가로 7대를 더 구매했습니다.
일본에 배치된 미국 공군의 P-51과 P-47은 제트기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는 구식 장비이지만 남한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필리핀 군도 이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공군의 퇴역 전투기 50대를 양도하면 폐기에 필요한 비용이 절감될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해서 납세자들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만 있다면)한국 정부는 조종사들을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공군 고문단도 필요합니다. 이런 방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만 KMAG의 편제가 500명으로 제한돼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을 보낸 바 있습니다만 NSC 8/2가 한국군의 “항공대” 확장에 부정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10만에 달하는 남한군은 서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며 워싱턴이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더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정부는 언젠가 한국군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군수공장 프로그램은 전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의 책임하에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번달에 일본제 99식 소총탄 500,000발을 생산했으며 다음달에는 1,000,000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공작 기계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 중입니다. 최근 한국은 M-1과 유사한 반자동 소총의 시제품을 생산했으며 또 스프링필드 소총과 비슷한 노리쇠 장전식 소총의 시제품도 생산했습니다. 채병덕은 고위층의 조언을 잘 듣고 있으며 현재 소수의 민간인 기술자들을 조병창에 배치해 필요한 장비들을 생산하고 있고 또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진하지도 않습니다.
현재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장교 중 자질이 뛰어난 33명을 선발해 포병 관측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3개월간 파견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이들은 4월 1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모두 결정됐습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활동은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모든 임무는 감찰관의 배석하에 진행됐으며 주한미군사고문단을 감독하기 위해 극동사령부(FEC)에서 중령 한명이 파견됐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해 잘 정리해 놨습니다. 우리는 4월에 있을 프리켓(Prickett) 장군의 감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기는 매우 양호한 수준입니다. 아직까지 고문단 소속의 군인과 민간인 중 큰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군인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서 교육 받고 있으며 의료 지원도 훌륭합니다. 또 사병들의 여가 시설도 훌륭하며 서울의 PX가 취급하는 제품은 도쿄에 있는 PX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서울에서는) 좋은 술 한병 가격이 2달러입니다. 장교 51명과 사병 138명이 한국 근무를 연장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군사고문단 소속으로 MATS(Military Air Transportation Service) 항공기가 한 대 있으며 (김포에 기착하는) 노스웨스트 항공편 외에도 섬을 오가는 항공편이 한달에 한 대 있습니다.
고문단의 회계 장교인 화이트(R. R. White) 중령은 최고 수준의 회계 장교이며 한국군의 재정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5월 25일 부로 국방성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이 친구는 장군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전 군수참모인 가이스트(Geist) 소령도 1~2주 내에 국방성 수송국으로 전출될 예정입니다.
베니에게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주한미군사고문단장
수신인
C. L. 볼테 소장
미육군부 작전국장
국방성, 워싱턴 D. C.
흥미롭게도 북한의 육군을 남한군 보다 약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A. Millet의 연구에 인용된 1950년 6월 15일자 미국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전력 평가는 특기할 만한데 북한군의 병력이 103,000명, 전차는 불과 64대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미국 대사관쪽의 분석은 실제 북한군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국무부의 정보망이 군대 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버츠 준장의 요청에 대한 미국방부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린
언제나 그랬듯 귀관의 3월 8일자 보고서는 매우 유용한 정보가 많았으며 내가 한국에 대해 고민하던 많은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줬소.
먼저 키팅(Frank A. Keating) 소장이 귀관의 후임자로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귀관이 희망한 대로 5월 또는 6월에 귀국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을 알리는 바이오. 키팅 장군이 한국에 부임하는 것은 7월 말이나 돼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오. 엘라의 건강이 좋지 않고 귀관의 걱정이 심한 것을 알기에 더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귀관의 근무지를 LA 근처로 하는 것은 가능하오.
키팅 소장은 미군사고문단을 맡기 위해 특별히 선발됐소. 그는 지난 대전 때 유럽전선에서 102 보병사단을 지휘했고 이 사단을 지휘하기 전에는 에드워드 기지의 상륙훈련소 부소장이었고 커크(Kirk) 제독의 참모진에서 선임 육군연락장교로 있었소.
주한미군사고문단의 감축에 대한 귀관의 건의는 시의적절한 것으로 판단되오. 현재 합참은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각지의 사절단, 고문단 등의 감축을 검토중에 있소. 귀관의 의견은 먼저 무초 대사의 승인을 받은 뒤 육군성에 제출할 예정이오. 이와 함께 우리는 국무부에 남한 해안경비대에 대한 민간 고문단의 예산을 집행할 것을 요구하는 중이오.
그리고 예산절감에 대한 귀관의 의견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나 역시 한국에서 벌이는 미국의 모든 활동에 대한 경상비용 책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군사고문단의 경우 그 활동의 특성상 현재 예산의 3분의 1 수준만 집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특히 최근 합의에 따라 한국정부가 군사고문단의 활동 비용의 상당수를 부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현재의 MDAP(Mutual Defense Assistance Program)는 3월 15일 최종 승인을 위해 국무부에 제출됐소. 만약 이 원조프로그램의 실행이 늦춰진다면 이건 전 세계적인 군사원조를 재조정 하겠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오. MDAP와 함께 한국에 대한 다른 원조 계획도 정치적 문제로 아직 국무부의 결정이 나지 않았소. 육군의 대부분은 군사고문단의 요청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육군의 증강은 NSC의 정책결정사항에 위배되오. 물론 NSC 8/2가 한국 해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금지하고 있고 공군 창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라는 것을 말해두오. 또 귀관 역시 NSC 8/2에서 규정하고 있는 한국 육군과 해안 경비대, 경찰병력의 상한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본인은 국무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가적인 원조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프리켓 장군에게 한국 방문에 앞서 몇가지 사항을 브리핑 했으며 이전 감찰관이 방문한 이후 많은 점이 변화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당부했소. 나는 프리켓 장군이 미 군사고문단의 모든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하오.
귀관의 반년 단위의 보고서는 완결적이고 정보가 가득한 자료요. 귀관의 보고서는 육군의 작전 수립에 필요한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소. 귀관의 보고서 사본은 아직 국무부에서 검토중이며 육군부에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귀관이 같이 보내준 정보보고서는 가지고 있소. 이 훌륭한 보고서에 대해 귀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모든 장교들에게 감사하는 바이오.
귀관과 귀관의 가족에 경의를 표하며 엘라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오.
볼테
한마디로 줄이면 한국군 병력 증강과 전투기 지원은 국무부의 방침에 어긋나므로 어렵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NSC 8/2는 한국군의 병력 상한선을 육군 65,000명, 해안 경비대 4,000명, 경찰 35,000명으로 제약하고 있었지만 이미 1950년 3월 한국군의 병력은 이걸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미 육군이 북한의 지상군 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했던 것은 맞는 듯 싶다.
2006년 10월 1일 일요일
베트남 - 병력부족의 강대국 vs 인명손실에 관심없는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고생하는 십자군 용사들에 대한 Sonnet님의 동정어린(?) 글들을 읽고 보니 지난 세기 머나먼 안남국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美利堅의 반공십자군들이 떠올랐다. 사실 미국이 죽을 쑨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1960년대의 미군 역시 비정규전에는 토벌군과 게릴라의 전력비가 10:1에서 15:1은 되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군은 이미 1950년대부터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 준장은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지상군 사단이 비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고 1962년 1월 하우즈 위원회는 총 6개 사단(1, 2, 4, 25보병사단, 82, 101 공정사단)을 비정규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슬금 슬금 꼬여가던 시점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쨌건 겨우 6개 사단은 효과적인 비정규전 수행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력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상군 개입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내에는 베트남전 승리가 어렵다는 견해가 제법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로 1963년 가을에 있었던 워게임 SIGMA 1에서는 북폭과 함께 미군 병력을 60만까지 증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VC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와 많은 미국 고위 장성들을 열받게 했다.(이 워게임 결과에 분통을 터트린 대표적인 인물이 반공의 글라디에이터 커티스 르메이다)
어쨌건 초기 미군의 파병은 VC 사냥에 필요한 기동대대를 확보하는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1966년 6월, 미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의 VC 병력을 117개 대대(각 대대는 45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용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연합군 병력은 172개 대대로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미 군사고문단은 미 해병대 1개 대대를 VC 대대의 300% 전력, 미 육군 1개 대대를 VC 대대의 200% 전력으로 평가했다)를 감안해도 전력비가 3: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66년 6월 초에 웨스트모어랜드는 워싱턴에 44개 대대의 증원을 요청했는데 이 44개 대대가 증원되더라도 양측 전력비는 겨우 3:1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맥나마라는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7월 말 존슨에게 예비군 235,000명을 소집하고 육군 병력을 증강할 것을 건의했는데 설사 이것을 합하더라도 별 다른 뾰족한 답이 없었다. 1966년에 44개 대대를 요청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에 추가 증원을 요청했고 미군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됐다. 미군은 1969년까지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낸 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강인한(또는 광신적인) 의지를 가지고 막대한 인명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미국의 9보병사단은 1969년 1월부터 2월까지 무려 168대 1의 사상자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사단 작전구역에서 VC를 박멸하는데는 실패했다. 상대는 민족통일을 위해 시체로 태산을 쌓을 각오가 돼 있는 위인들이었으니 미군이 아무리 베트남인들을 죽여봐야 답이 없는게 당연했다.
하여간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역시 뾰족한 답이 없는 전쟁이다.
1960년대의 미군 역시 비정규전에는 토벌군과 게릴라의 전력비가 10:1에서 15:1은 되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군은 이미 1950년대부터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 준장은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지상군 사단이 비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고 1962년 1월 하우즈 위원회는 총 6개 사단(1, 2, 4, 25보병사단, 82, 101 공정사단)을 비정규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슬금 슬금 꼬여가던 시점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쨌건 겨우 6개 사단은 효과적인 비정규전 수행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력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상군 개입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내에는 베트남전 승리가 어렵다는 견해가 제법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로 1963년 가을에 있었던 워게임 SIGMA 1에서는 북폭과 함께 미군 병력을 60만까지 증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VC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와 많은 미국 고위 장성들을 열받게 했다.(이 워게임 결과에 분통을 터트린 대표적인 인물이 반공의 글라디에이터 커티스 르메이다)
어쨌건 초기 미군의 파병은 VC 사냥에 필요한 기동대대를 확보하는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1966년 6월, 미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의 VC 병력을 117개 대대(각 대대는 45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용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연합군 병력은 172개 대대로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미 군사고문단은 미 해병대 1개 대대를 VC 대대의 300% 전력, 미 육군 1개 대대를 VC 대대의 200% 전력으로 평가했다)를 감안해도 전력비가 3: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66년 6월 초에 웨스트모어랜드는 워싱턴에 44개 대대의 증원을 요청했는데 이 44개 대대가 증원되더라도 양측 전력비는 겨우 3:1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맥나마라는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7월 말 존슨에게 예비군 235,000명을 소집하고 육군 병력을 증강할 것을 건의했는데 설사 이것을 합하더라도 별 다른 뾰족한 답이 없었다. 1966년에 44개 대대를 요청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에 추가 증원을 요청했고 미군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됐다. 미군은 1969년까지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낸 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강인한(또는 광신적인) 의지를 가지고 막대한 인명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미국의 9보병사단은 1969년 1월부터 2월까지 무려 168대 1의 사상자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사단 작전구역에서 VC를 박멸하는데는 실패했다. 상대는 민족통일을 위해 시체로 태산을 쌓을 각오가 돼 있는 위인들이었으니 미군이 아무리 베트남인들을 죽여봐야 답이 없는게 당연했다.
하여간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역시 뾰족한 답이 없는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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