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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보리스 소콜로프의 바그라티온 작전 연구

 러시아의 역사연구자 보리스 소콜로프가 2022년에 발표한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이 최근 Operation Bagration : An Incimplete Truth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은 꽤 흥미롭습니다만 저자인 소콜로프가 극단적으로 소련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소콜로프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사망자를 굉장히 높게 추산해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 책에서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전사한 소련군을 무려 515,700명이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발표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전사한 소련군이 178,507명입니다. 소련의 통계가 전반적으로 엉망이긴 하지만 소콜로프가 주장한 만큼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점이 있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소련군의 완승이다 보니 지금까지 간행된 관련 연구들은 소련군의 작전적-전술적 문제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소콜로프는 독일군이 초반의 참패 이후 기갑예비대를 투입하면서 소련군이 고전한 사례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스크 축선에서 소련 제5근위전차군이 독일 제5기갑사단과의 교전에서 고전한 사례, 바르샤바 인근의 반격으로 소련군이 큰 타격을 입은 사례들을 들고있습니다. 주요 교전에서 발생한 양측의 장비 손실과 인명 손실을 잘 정리했는데, 독일군과 소련군 양측의 장비 손실은 비교적 정확하게 정리를 잘 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중 소련 공군의 문제점도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 비판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중 소련 공군의 숫적 우위를 감안하면 소련 공군의 성과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1944년 여름의 작전은 소련군이 작전술 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다는걸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는데 추천하기는 좀 애매합니다. 독소전쟁에 진짜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는 있을 듯 합니다. 전반적으로 같은 러시아의 역사연구자인 알렉세이 이사예프가 쓴 같은 제목의 책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쪽이 소콜로프의 연구 보다는 균형이 잘 잡혀있는 듯 합니다. 마침 내년에는 유명한 독소전쟁 연구자인 프리트 부타(Prit Buttar)도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책을 낸다고 합니다. 부타의 연구도 평균 이상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스탈린의 전쟁』이 간행되었군요.

 열린책들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Stalin's War의 한국어판을 낸 걸 알게 됐습니다. 한국어판은 무려 744쪽에 달하는군요. 영문판의 2배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스탈린의 전쟁




 이 연구는 스탈린의 전략가적 자질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41~1942년에 스탈린이 저지른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43~1944년에 스탈린이 보여준 전략적 식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950년대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스탈린의 군사적 업적은 과도하게 폄하당한 경향이 있는데 로버츠는 이런 비판에 대해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로버츠는 1943년 이후 소련군의 반격 과정에서 스탈린이 전략적인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때로는 작전술 차원에서도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스탈린의 전략가적 면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1944~1945년 소련군의 동유럽 진출 과정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소련의 군사적 성과를 충실하게 활용해 소련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이 연구는 독일 문제 처리 과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냉전 초기 단계에서 스탈린의 전략적 결정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에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냐는 해석이 주목할 만 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아시아에서 제한적인 군사적 충돌을 구상했고 그 결과물이 한국전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전략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략하게 개요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독소전쟁사』를 함께 보시면 보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간행된 저작임에도 군사작전에 대한 몇몇 서술은 모호하거나 다소 부정확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서술입니다. 저자는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갔으나 다소 2000년대의 최신 연구경향을 반영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연구이기 때문에 저도 번역본으로 한 번 읽어볼 생각이 있습니다. 이제는 간행된지 16년이 넘은 책 이지만 여전히 일독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6월 27일 월요일

"죽 쒀서 개 준다"

한국에는  『나치의 병사들』로 잘 알려진 독일 역사학자 죈케 나이첼(Sönke Neitzel)이 해제를 달아 간행한 사료집 Abgehört- Deutsche Generäle in britischer Kriegsgefangenschaft 1942-1945을 읽다보니 씁슬한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 간혹 있습니다. 이 사료집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 포로가 된 독일 고급 장교들의 사적인 대화를 감청한 녹취록들을 정리한 것으로 영어판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웃겼던 부분은 1944년 서부전역에서 서부기갑집단, 제7군 사령관을 역임한 에버바흐(Heinrich Eberbach) 기갑대장이 제12SS기갑사단장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발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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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바흐 : 잘 보면 러시아군은 바르샤바 부터는 아주 훌륭한 자동차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걸 알 수 있지. 우리가 만든 도로말이야. 바르샤바-포젠-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설사 해빙기가 닥치더라도 보급이 예전 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이 동부 도로는 우리가 러시아를 침공할때에도 이미 상태가 좋았어. 차선도 여러개였지. 그리고 나중에는 (폴란드) 총독부에서 매우 큰 노력을 기울여서 도로를 개선했어. 이제 러시아군은 보급을 하는데 더이상 어려움이 없을 거야. 소련군을 오데르강에서 오래 저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군.

Wenn man sich anguckt, von Warschau hat der Russe diese wunderbare Autostrasse, die wir gebaut haben : Warschau-Posen-Berlin. Der Nachschub wird also für die nicht mehr die gross Schwierigkeit spielen, wie früher, selbst dann nicht, wenn Tauwetter eintritt. Denn diese Aufmarchstrassen im Osten hatten wir seinerzeit für den Angriff auf Russland schon ausgezeichnet ausgebaut, mehrgleisig - sind späterhin noch weiterhin ausgebaut worden, im General Gouvernement, wo ja sehr viel für Strassen getan worden ist. Ich bin nicht einmal sicher, dass es gelingen wird, ihn an der Oder Iange aufzuhalten.

 Sönke Neitzel, Abgehört- Deutsche Generäle in britischer Kriegsgefangenschaft 1942-1945, (Berlin: List, 2007), p.408.


에버바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건설한 도로가 독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수단이 된 역설적인 상황을 씁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러니함이 제3자의 입장에서는 꽤 웃깁니다.

2022년 5월 5일 목요일

로만 퇴펠의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

 작년인 2021년에 독일 군사사학자 로만 퇴펠(Roman Töppel)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4-2호에 기고한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를 읽었습니다.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연구는 여러편이 발표됐지만 여전히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로만 퇴펠의 이 연구도 꽤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네요. 이 논문에서 눈에 띄는 주장 중 몇개를 골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 문제

퇴펠은 소련 시기의 프로호롭카 전투 서술 뿐만 아니라 최근 러시아 학계에서 제기된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유명한 발레리 자물린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퇴펠은 냉전이 종식된 뒤 서방 학계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자 러시아 학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기존의 서술, 즉 소련 시절에 정립된 '프로호롭카 대전차전' 이야기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군사사가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가 독일 문헌을 근거로 독일측 손실을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학계의 대응 중 하나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기간과 전투 장소의 범위를 넓히는 것 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롭카 전투를 1943년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전개된 전투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이 주장은 독일 남부집단군이 주공 축선을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변경하면서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프로호롭카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이어졌으므로 이 7일간을 프로호롭카 전투로 봐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퇴펠은 이런 서술 자체가 냉전 시기부터 이어진 소련측 역사서술의 잔재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의 문서를 분석해 보면 독일군은 작전 수립 단계 부터 프로호롭카 방면에 주공을 지향했다는 것 입니다.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서술은 독일군의 원래 주공 축선은 오보얀이라고 보는데 오보얀 남부의 평야지대는 습지로 기갑부대의 기동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곳을 주공 축선으로 선정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비판합니다. 퇴펠은 최근 러시아 연구자들이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를 확대하는 이유는 더 이상 7월 12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자 전투의 범위를 넓게 잡아 소련군의 승리로 해석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2. 독일군은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했는가?

두 번째로는 독일군이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사전에 방어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소련군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하지만 퇴펠은 독일측 사료를 검토해 보면 독일군은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배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소련군이 7월 12일 역습에 투입한 제29전차군단(25, 31, 32전차여단)과 제18전차군단(110, 170, 181전차여단) 중 독일군이 7월 12일까지 파악하는데 성공한 것은 제32, 110, 170, 181여단 뿐이고 제25, 31여단 등 2개 여단은 7월 13일에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7월 11일 밤 까지도 소련군 제18전차군단과 제29전차군단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도 소련군 작전 예비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퇴펠은 독일군이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주장은 소련군의 전술적 졸전을 변명하기 위한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3. 7월 12일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발생한 양측의 전차 손실

개인적으로 이 연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퇴펠의 분석에 따르면 제2SS기갑군단이 7월 12일 전투에서 입은 전차 손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LAH : 3호전차 2대, 4호전차 2대 대파, 4호전차 4대 완파

다스 라이히 : 4호전차 5대 대파

토텐코프 : 4호 전차 1대, 티거 1대 대파


즉 7월 12일 전투에서 독일군의 총 손실은 완파 4대를 포함해 15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완전손실은 227대이니 이걸 독일군과 비교하면 4:227, 대략 1:56의 교환비가 나옵니다. 퇴펠은 발레리 자물린이 7월 12일 독일군의 손실을 정확히 집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합니다. 예를들어 발레리 자물린은 2015년 루돌프 폰 리벤트롭(Rudolf von Ribbentrop)을 만나서 7월 12일 전투 당시 LAH 사단의 전차 보유대수를 문의했는데 자세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퇴펠에 따르면 리벤트롭은 이미 1989년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글을 쓰면서 LAH 사단의 전차 손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즉 발레리 자물린은 독일측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 입니다. 또한 리벤트롭은 2015년 러시아를 방문해 자물린과 면담을 했을때 러시아측을 고려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소련군의 패전을 자세히 언급하는게 결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꽤 재미있는 연구이지만 로만 퇴펠이 독일측에 편향된 서술을 한다는 비판도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필요는 있습니다.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1월 18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에 실려있는 글들을 대략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에는 개인적으로는 다행히도 2 세계대전과 관련된 논문이 2 실려있습니다.

번째 글은 레스터 그라우(Lester Grau) “River Flotillas in Support of Offensive Ground Operations: The Soviet Dnieper River Flotilla Experience”입니다. 글은 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이 강과 호수에서 운용한 분함대의 작전이 소련 지상군의 작전을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분함대는 드네프르강 분함대 입니다. 글은 드네프르강 분함대가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 도하작전 지원, 군수지원, 해군육전대 작전 등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 작전 시기에 대한 분석이 좋습니다. 하천이 많고 도로망이 빈약한 벨로루시 지역에서 소련 지상군의 신속한 기동전이 가능했던 원인 하나로 드네프르강 분함대의 역할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번째 글은 미하일 수프룬(Mikhail N. Suprun) “Lend-Lease and the Northern Convoys in the Allied Strategy During the Second World War”입니다. 연합국이 수행한 렌드리스 북극해 방면으로 수행된 부분을 다루는 짤막한 입니다. 저자는 미영 연합의 유럽 우선 전략에있어서 북극해 방면의 렌드리스 수송선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번째는 노르웨이에 주둔한 독일 해군을 끌어내는 미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역할은 영국이 1943년까지 채택한간접행동(indirect action)’ 전략의 일부로서 두드러졌다고 봅니다. 간접행동 전략은 해상봉쇄 전략폭격, 제한적인 특수부대 공격 등으로 연합국 인명희생을 최소화 하면서 독일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북극해 방면의 수송선단은 간접행동 전략의 일부로서 기능을 수행했다는 입니다. 또한 반히틀러 동맹을 공고하게 하는 정치적인 역할도 수행했다고 평가합니다. 수프룬은 렌드리스가 전쟁 수행에 기여한 역할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합니다. 단순히 물자의 총량이나 달러 환산 가치 등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식에 비판적입니다

밖에도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100주년을 맞아 특집 논문들이 다수 실려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특집이네요.

그리고 1877-78년의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당시 발칸 전역을 다룬 Alexander Staiev 논문도 주목할 합니다. 러시아군이 겨울철의 불리한 산악 지형에서 어떻게 기동을 하여 오스만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에 비해 우수한 전술적 기량을 보여주었고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Taras Kuzio “Old Wine in a New Bottle: Russia’s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Soviet Information Warfare and Active Policies Against Ukraine and Ukrainians”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정보전 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 형성된 정보전 수행 방식을 현재의 러시아군이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같습니다. 러시아 군부가 미디어를 활용해 대여론전을 전개하는 양상이 흥미롭습니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4월 4일 목요일

평행 우주의 붉은군대



"타국에서 전투 수행 간에는 지휘관은 지역주민과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호적 관계 형성으로 지역 주민이 적을 지원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소련군이 독일의 영토로 진입할 때 독일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소련군이 선량한 독일주민을 잔혹하게 죽였다는 흑색선전을 유포하였다. 그러나 이 흑색선전은 소련군 부대의 대민 지원 활동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식료품과 연료, 기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없어 고통 받는 독일 주민들에게 소련군은 물질적 원조를 실시했다.
A. F. 슈렘첸코, 유형봉 옮김, 『어떻게 부대를 지휘할 것인가 : 러시아군 부대지휘의 철학과 사상』 합동군사대학교, 2018, 178~179쪽.


가끔 러시아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와 다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2019년 3월 16일 토요일

대조국전쟁사 서술에 관한 흥미로운 학위논문

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8년 12월 6일 목요일

데이비드 글랜츠 저, 유승현 옮김, 『8월의 폭풍』 길찾기, 2018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8월의 폭풍: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를 읽었습니다. 길찾기 출판사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군사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면서 군사분야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확대하는데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을 시작으로 대중서를 넘어 전문적인 군사사 연구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의 폭풍』은 길찾기 출판사가 내놓은 군사사 연구의 두번째 저작입니다.

1945년 8월에 있었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외교사의 범주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결정한 사건이기에 많은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군사작전'에 관해 주목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군사작전이라는 점, 자료가 러시아어와 일본어 등 영어권 연구자가 접근하기에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영어권에서 손꼽히는 소련-러시아 군사사의 대가 데이비드 글랜츠의 이 연구는 글자 그대로 선구적인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연구자의 저작이기 때문에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소련군의 만주지역 전략 공세를 다루고 있지만 제2차대전 중 소련군의 발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소련은 1941년 부터 시작된 독일과의 전쟁을 계기로 전략, 작전술, 전술적인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전쟁 종결 직전에 있었던 만주지역 전략 공세는 소련군이 그동안 유럽 전역에서 쌓아온 역량이 총체적으로 발휘된 무대였습니다. 4장 부터 9장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 준비와 실행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 작전 시행과정을 다루는 장에서는 1939년 이후로 큰 발전이 없이 교리와 장비면에서 정체되어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신속한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군의 전술적인 분전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면서도 이것이 전략-작전술의 차원에서는 별 영향이 없었음을 지적합니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전략-작전-전술의 차원을 명쾌하게 분리해 설명하면서 일본군의 전략-작전 차원의 패배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데이비드 글랜츠의 초기 연구에 속하지만 작전연구라는 측면에서 매우 훌륭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측 시각을 보여주는 자료 대부분이 1950년대 미육군에서 수행한 작전연구들에 제한되어 있지만 소련에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략~작전술 차원의 연구이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서술도 이 범주에 국한하고 있습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질적 수준과 전략-작전 단위 방어 계획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1990년대 이후에 나온 글랜츠의 일부 연구가 소련 자료에 대한 과도한 편향성으로 작전연구 차원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1980년대에 나온 『8월의 폭풍』에서 보여주는 공정한 시각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길찾기 출판사 편집부의 실력은 기존에 간행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8월의 폭풍』에서도 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만주 전역의 특성상 고유명사를 번역하는데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는 이 어려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도 장점이 많습니다. 특히 큰 판형을 채택해서 본문에 지도와 도판이 많이 포함된 장점을 살리고 있습니다. 편집부가 지도 편집에 많은 공을 들여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지도의 가독성도 높습니다. 게다가 초판 한정 부록에 포함된 대형 작전도는 즐거운 깜짝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후 상업출판사에서 출간된 증보개정판이 아니라 미육군에서 간행한 초판이라는 점 입니다. 물론 초판으로도 만주 전략 공세를 전략-작전술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충분합니다. 증보개정판은 내용면에서도 보완이 있었고 부록으로 1차사료의 영역본을 제공하고 있어 만주 전략 공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역자인 유승현님을 비롯해 감수를 맡으신 주은식 장군님, 그리고 길찾기 출판사 편집진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노력이 들어간 책인 만큼 군사사에 관심 가지신 분들이 많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4호에 실린 H. G. W. Davie의 논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인 31-4호에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H. G. W. Davie라는 연구자의 'Logistics of the Combined-Arms Army- Motor Transport'라는 글 입니다. H. G. W. Davie는 이미 같은 저널에 독소전쟁시기 철도망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기고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제2차대전기 소련군의 차량화 수준과 군수보급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문제는 소련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입니다.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전쟁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31만 8,500대였습니다. 1942년 동안 차량 증가분은 소련 국내 신규생산분이 2만 5천대, 민간차량 징발분이 9만대, 렌드리스 차량이 3만 900대였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40만 4,500대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같은해 증가분은 신규생산 4만 600대, 민간차량 징발분 1만 2,400대, 렌드리스 차량 8만 3,700대 였습니다. 1944년 1월 1일 차량 보유량은 49만 6,000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같은해 신규생산 3만 6,700대, 렌드리스 차량 12만 8,800대 등의 증가에 힘입어 1945년 1월 1일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62만 1,200대가 됩니다. 매우 인상적인 규모입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집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소련군의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1:28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차량 손실과 병력 증가로 인해 전쟁 기간 중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렌드리스 차량이 대량으로 보급된 1944년 1월 무렵에야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이 1:24가 됩니다. 차량 규모의 증가로 1945년에는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21까지 낮아지기는 하지만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1945년 6월 기준으로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7.7이었습니다. 야전부대로 한정하면 차량화 수준이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기계화부대와 독립지원부대(특히 포병) 중심으로 차량을 집중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의 일반 보병부대는 같은 시기 독일군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는 차량화 수준을 보였습니다.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에서 차량화된 부대는 사단 직할 대전차포 대대, 122mm 곡사포 대대, 중박격포 대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필자는 제7근위군의 사례 분석을 통해 소련군의 1개 야전군의 차량 보유량이 영국군 1개 보병사단 보다 못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마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1945년 1월 기준으로 소련군은 105만 4,200마리의 마필을 보유했고 이 중 야전군이 보유한 마필이 79만 1,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련군은 1944~45년 사이에 매우 높은 수준의 작전 템포를 달성했습니다. 비수아-오더 작전에서 소련군의 전차군은 1일 평균 45~75km를 진격했고 보병과 마필 중심의 제병협동 야전군은 1일 평균 30km를 진격했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부족한 보급 능력에 맞춰 보급 소요를 책정하고 부족한 물자를 현지조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1943년 8월 루먄체프 작전에서 스텝전선군은 주공축선의 주력부대에 전선군 직할 수송부대의 역량을 집중하고 부차적인 지역은 야전군 및 사단의 자체적인 수송역량으로 보급소요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수송역량도 탄약과 유류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8월 3일 부터 23일까지의 작전 기간 중 스텝 전선군의 보급부대는 총 42,972톤의 물자를 수송했는데 이 중 탄약이 2만 7,887톤, 연료가 7,906톤, 기타 보급품이 7,949톤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중량으로 따지면 탄약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걸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양상이 비수아-오더 작전 당시 제8근위군의 사례에서도 나타납니다. 제8근위군은 식량 조달을 노획하거나 현지 징발에 의존하면서 탄약 및 유류 보급에 수송역량을 집중해 높은 진격속도를 유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소련군의 낮은 보급능력과 과도한 약탈을 일리있게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발레리 자물린 등의 연구자는 소련군이 낮은 보급능력으로 인해 전쟁 중후반까지도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전투에 필수적인 탄약과 연료에 수송역량을 집중하고 병사의 생활에 필요한 보급소요를 최소화 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논문이라 시간이 되면 한번 번역해 보고 싶네요^^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러시아의 국가 범죄 은폐 의혹?


Dig Near Stalin-Era Mass Grave Looks To Some Like Kremlin Dirty Work

Russian digs accused of covering up Stalinist crimes

9월에 있었던 AFP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유해 발굴작업을 명분으로 소련의 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제2차대전 중 핀란드군이 학살한 소련군 포로 유해를 발굴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핀란드군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소련군 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군사사학회(РОССИЙСКОЕ 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РВИО])는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레딘스키와 우익 정치인 드미트리 로고진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용단체'입니다. 실제로 이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러시아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지요.

러시아 인권운동단체들은 이 발굴이 스탈린 시절 소련 정부가 자행한 정치범 학살을 은폐하려는 공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푸틴 집권 이후 퇴행적이고 쇼비니즘 적인 분위기에서 소련 시기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군요. 카틴 학살 같이 소련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범죄라고 날조공작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찝찝함이 느껴지는군요.


2018년 9월 29일 토요일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



러시아 연구자의 연구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2차대전기 소련군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최신연구 중에도 여전히 교차검증에 소홀하고 냉전기 소련의 주장만을 답습하는 저서도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고르 네볼신이라는 러시아 연구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7 6 오전 14군은 전선군예비대로 있던 15근위소총병군단과 17근위소총병군단을 증원받았다. 군단은 2근위전차군 전방의 2방어선에 전개해 전차군 예하 전차군단들을 엄호했다. 1943 7 6 오전 5시경 16전차군단은 예하의 2 전차군단을 투입해 올호바트카(Ольховатка)-스텝(Степь)-부틔르키(Бутыркий) 방면으로 반격을 감행했다. 반격은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다. 4포병돌파군단과 2개의 자주포연대가 반격을 지원했다. 스노바(Снова)-포드소보로브카(Подсоборовка)선에 전개한 107전차여단이 선봉에 서서 231.1고지-스텝-오코프(Окоп)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반격이 시작된 직후 독일군의 야포와 자주포가 107전차여단에 포격을 가했다. 전차를 후속하던 보병 부대가 손실을 입었다. 여단이 진격을 계속하자 적은 아군을 자신의 방어진지 깊숙이 끌어들였다. 여단은 티거 16대와 중형전차 경전차 70여대와 격돌했다. 페르디난트 구축전차도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107전차여단은 순식간에 T-34 29대와 T-70 17대를 잃었다. 살아남은 전차 4대는 보병부대의 후방으로 철수해 오시노븨이(Осиновый) 서쪽의 숲에 집결했다.107전차여단의 공격이 실패하고 1시간 카샤라(Кашара)-사모두로브카(Самодуровка) 선에 전개한 164전차여단이 포드소보로브카-스텝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여단은 전차 150여대와 격돌했다. 여단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우다가 T-34 17대와 T-60 6대를 잃고 공격개시선까지 퇴각했다.16전차군단과 19전차군단이 조율된 강력한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대신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축차투입된 결과 막대한 손실(전차 89) 발생했다.  
Igor Nebolsin(Author), Stuart Britton(Trans), Stalin’s Favorite: The Combat History of the 2nd Guards Tank Army from Kursk to Berlin, Vol 1: January 1943-June 1944, Helion, 2015, pp.96~97.

네볼신은 소련군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각각 90여대, 150여대의 우세한 독일군 기갑전력과 격돌해 불리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합니다. 네볼신의연구 주석이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 주장의 출처를 정확히 없습니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는 매우 유명한 전투이다 보니 2차문헌 만으로도 어느정도 교차검증이 가능합니다. 독일군의 작전일지등 1차사료를 충실히 활용한 Martin Nevshemal 연구에도 해당 전투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겠습니다.

2전차군 예하부대의 반격은 오전 02 50 이그나토프(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Игнатов) 소장이 지휘하는 4포병돌파군단이 1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시작됐다. 독일 6보병사단은은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채 베른하르트 자우반트(Bernhard Sauvant) 소령이 지휘하는 505중전차대대를 비롯한 지원 부대와 함께 집결지점에 대기하면서 04시로 예정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공격 준비사격이 6보병사단의 집결지역을 타격했다. 
 적은 우리 보병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로켓포와 규모를 없는 []보병화기로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격부대를 타격할 소련군 부대들이 모두 집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직 16전차군단만이 계획대로 부틔르키-포늬리2 서쪽을 잇는 공격개시선에 전개했다. 17근위소총병군단은 계획대로 공격개시선에 전개하지 못해 소련군의 반격은 성공할 없었다. 
 17근위소총병군단은 7 5 하루종일 적의 공습을 받아 행군이 지연되었다. 군단의 주력부대는 20 30분이 되어서야 스노바-사모두로브카를 잇는 공격개시선에 전개할 있었다. 이때문에 전차부대와의 협동 작전을 펼치고 보병 부대의 공격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예정대로 시작됐다. 오전 04 16전차군단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독일군의 전초진지를 돌파하고 드루자베츠키-스텝-사보로브카 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선봉에는 텔랴코프(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Теляков) 중령이 지휘하는 중형전차 30대와 경전차 20대로 편성된 107전차여단이 서고, 코릘로프(Н. В. Корылов) 중령이 지휘하는 동일하게 편성된 164전차여단이 좌익에 배치되었다. 
소련군이 진입한 지역은 우익으로는 비티우그-드루자베츠키를 따라 남북방향으로 깊은 도랑이 이어지고 좌익으로는 스노바강이 흐르고 있었다. 두개의 자연적 장애물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4km 폭의 공간이 있었다. 16전차군단은 이곳을 따라 북쪽으로 공격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에 이르는 지역은 전차가 기동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지형은 대체로 평탄한 편이었고 나무를 비롯한 장애물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에게는 불행하게도 지역은 강력한 티거 전차와 245, 904돌격포 대대의 돌격포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는데도 완벽한 지형이었다. 독일 기갑부대도 공격을 위해 지역에 집결한 상태였다. 
소련군 전차부대는 독일 6보병사단의 좌익(58척탄병연대) 방어선을 강타했다. 227.9고지를 둘러싸고 짧고 일방적인 전차전이 벌어졌다. 107전차여단은 독일 보병의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티거와 여러대의 돌격포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여단은 불과 몇분만에 보유한 전차 50 46대를 잃었다. 코릘로프 중령의 164전차여단이 뒤이어 돌입했으나 일방적인 전투 끝에 전차 23대를 잃었다. 소련 전차부대의 공격은 시작하자 마자 끝나고 말았다공격에 나선 2 전차여단은 완전히 격파됐으며 보유한 전차의 거의 75% 잃었다. 
 Martin Nevshemal, Objective Ponyri!: The Defeat of XXXXI. Panzerkorps at Ponyri Train Station, Leaping Horseman Books, 2015, p.63.

전투는 독일 58척탄병연대 구역에서 일어났음을 있습니다. Martin Nevshemal 58척탄병연대에 배속된 돌격포 부대는 245돌격포대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05중전차대대는 완편되지 못한 상태여서 1중대와 2중대, 티거 31대만이 이날 전투에 참가한 상태였습니다.1)  245돌격포대대의 전력은 1943 7 4 기준으로 돌격포 22대와 105mm 돌격곡사포 9대로 31대였습니다.2) 소련군 107전차여단과 교전한 ‘70대의 중형전차와 경전차’, 164전차여단과 교전한 ‘150대의 전차 해당 구역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입니다. 독일군의 모든 기갑장비가 가동 상태였다 해도 최대 62대를 넘지 못하는데 네볼신은 독일군 기갑전력이 150대에 달했다는 과장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네볼신은 58척탄병연대에 배속되지도 않은페르디난트까지 있었다는 잘못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볼신의 잘못된 서술은 어디에 근거를 하고 있을까요? 네볼신은 자신의연구 주석을 달지 않았으나 전반적인 내용은 소련 시절의 문헌과 동일함을 쉽게 파악할 있습니다. 소련군 총참모부의 쿠르스크 전투 연구에서 해당 전투에 관한 서술을 인용합니다.

작전 2일째의 전투는 16전차군단의 투입으로 시작됐다. 군단은 오전 4 스텝과 부틔르키 방면으로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을 투입해 반격을 감행했다. 107전차여단이 선봉에, 164전차여단이 후방 좌익에 배치되었다. 4포병돌파군단과 자주포 2 연대가 반격을 지원했다. 
반격이 시작되자 마자 독일군의 포병과 자주포가 107전차여단에 포격을 가했다. 여단을 지원하던 보병부대에 피해가 누적됐다. 하지만 선봉 부대는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군을 몰아내고 포늬리 1(Поныри 1)-스텝-사보로브카(Саборовка) 잇는 선에 도달했다. 107여단은 진격을 계속하던 호를 파고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던 티거 16대를 비롯해 수많은 중형전차와 경전차로 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여단은 순식간에 46대의 전차를 잃었다. 살아남은 4대의 전차는 지원 보병 부대의 후방으로 후퇴했다.107전차여단이 퇴각한 164전차여단은 진격을 계속하다가 독일군 전차 150대와 조우했다. 여단은 적과 교전하다가 전차 23대를 잃고 공격개시선까지 퇴각했다. 
19전차군단장은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의 반격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자 계획했던 공격을 취소했다. 대신 132소총병사단과 15소총병사단에 연락해서 사단포병으로 19전차군단을 지원해 것을 요청했다. 이로인해 16전차군단과 19전차군단이 동시에 강력한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단지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축차투입되는 결과만 초래했다.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Trans and Edit), The Battle for Kursk 1943: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Frank Cass, 1999, pp.203~204.

네볼신의 서술이 소련의 공식 역사 서술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있습니다. 독일측 1차사료들은 거의 대부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어 쉽게 교차검증이 가능함에도 소련 시기의 역사서술을 답습하고 있는 입니다. 아마존등에는 이고르 네볼신의 저작에 대해 호의적인 평이 많은데, 이렇게 좋은 평을 남긴 사람들이 교차검증을 봤는지 궁금합니다. 소련 시기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러시아 연구자들도 많지만 푸틴 집권 이후의 쇼비니즘적 풍토에서 소련 시기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되풀이하는연구자 여전히 존재합니다. 러시아 연구를 읽을때 주의해야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1) Martin Nevshemal, Objective Ponyri!: The Defeat of XXXXI. Panzerkorps at Ponyri Train Station, Leaping Horseman Books, 2015, p.57.
2) Niklas Zetterling and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Frank Cass, 2000,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