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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2일 일요일

아프가니스탄군 붕괴 원인을 고찰하는 SIGAR의 보고서

 

지난 2월에 아프가니스탄 재건 특별감찰관실(SIGAR, Special Inspector General for Afghanistan Reconstruction)에서 20219월 아프가니스탄 군경의 급속한 붕괴 원인을 고찰한 보고서 아프가니스탄 군경의 붕괴 원인은 무엇인가?(Why the Afghan Security Forces collapsed)”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보니 주목할 만한 분석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보고서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미국의 개입 중단이 직접적으로 끼친 영향입니다.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아프가니스탄 군과 경찰의 군수지원입니다. 이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 군경이 미국에 의존하면서 발생한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20여년간 미국 고문관들은 아프가니스탄 군경을 미군의 거울쌍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식으로 작전을 하도록 교육했다. 미국이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미국방부 계약자들을 철수하는 합의를 했을 때 아프가니스탄 군경은 아직 미국에 대한 만성적인 의존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아프가니스탄 군경은 국가차원에서 자원관리(resource management), 정비(maintenance), 리더쉽 등을 미군에 의존했다. 아프가니스탄 군경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특수부대 조차 미국의 전투 지원부대에 의존했다.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특수부대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방어하기 위해 분산되면서, 이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의존하던 아프가니스탄의 일반 군부대와 경찰은 갈수록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미국 국방부는 20년이 넘도록 아프가니스탄 군대의 구조와 작전 모델을 미군의 거울쌍으로 만들려 했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냉전이 끝난 뒤 미군은 기갑차량과 포병의 비중을 축소하고 세계 곳곳에서 단기간 동안 유연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보다 가벼운 편제로 변화했다. 미군의 신속하고 유용한 자산들은 그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한 보급 및 물류 체계에 의존했다. 아프가니스탄 안보 문제 전문가인 존 슈로든(Jon Schroden)SIGAR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 자체적인 인적 자원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거에 해왔던 방식을 따르는 대신 미국이 하는 것 처럼 행동하도록 하는 걸 선호했다고 말했다. 미국 국방부는 미국이 탈레반과 협정을 체결했을 무렵 아프가니스탄 군경은 미국이 기대한 정교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실 미국 국방부는 교전이 다소 완화된다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군경이 2024년이 까지 독자적으로 작전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될 것으로 판단했다. 아프가니스탄 군경의 미국에 대한 의존성은 사소한 문제가 이나라 양국간 군사 관계의 특징이었다.”

Special Inspector General for Afghanistan Reconstruction, Why the Afghan Security Forces collapsed, (2023. 2.), p.14.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특수부대의 미국 의존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적합니다.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그 예하의 특수임무항공단이 민간기업 없이는 항공기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202012월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공군 및 특수임무항공단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공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민간 계약업자들을 통해 물류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잘못되었다. 미국이 계약한 민간기업들은 자국 회사였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있어서는 외국 회사였기 때문이다. 미국 국방부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의 자체 인력은 아프가니스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중 최대 40% 정도의 정비만 담당했다.

그리고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때 까지도 아프가니스탄 공군의 조직 개편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조직 관리를 하는데 부담이 가중됐다. 예를들어 아프가니스탄군 인력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했을 당시 아프가니스탄 공군의 중핵이었던 소련제 Mi-17 헬리콥터에 익숙한 상태였다. 아프가니스탄군 인력은 Mi-17의 정비는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항공 훈련-자문-지원사령부(TAAC-Air, Train, Advise, Assist Command Air)201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공군이 Mi-17 헬리콥터 정비를 완전히 숙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공군의 헬리콥터를 Mi-17에서 보다 복잡한 미국제 UH-60 블랙호크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TAAC-AirSIGAR에 미국이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에 항의하고 러시아제 예비부품 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지정학적 문제가 있어 기종변환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TAAC-Air에 따르면 Mi-17UH-60으로 교체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군이 자체적으로 유지정비 능력을 갖출수 있는 시기가 최소 2030년 이후로 늦춰졌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군을 지원하는 미군과 계약회사들을 모두 철수 시키고 10년이나 지나야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특수임무비행단의 Mi-172023년까지 CH-47 치누크로 교체하고자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 국방부는 202012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아프가니스탄 공군은 중장기적으로 전투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간 기업의 물류 지원 및 훈련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213월 레절루트 서포트(Resolute Support) 작전 책임자인 밀러 장군은 미군이 철군하면 아프가니스탄 군경에 필수적인 항공 지원 및 정비 지원도 끊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군 장군이었던 사미 사다트(Sami Sadat)와 하이바툴라 알리자이(Haibatullah Alizai)SIGAR에 미국 민간기업이 철수한 직후 아프가니스탄군의 UH-60 헬리콥터 대부분이 지상 주기 상태가 됐다고 진술했다. 사다트는 미국 계약업자들이 철수하자 전투에서 손상을 입었거나 기타 정비가 필요한 기체들이 모두 방치됐다고 말했다. 그는 몇 달 되지도 않아 블랙호크 헬리콥터의 60%가 지상주기 상태가 됐으며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것들을 다시 정비할 계획도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공군의 항공지원과 민간기업의 물류 지원이 감소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특수임무항공단의 작전 능력은 감소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시간을 맞춰 보충 체계를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고립된 지역에 배치된 아프가니스탄군은 탄약이 떨어지거나 의료후송능력이 없어 죽어갔다. 미군이 철수한 직후 항공기들을 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른 아프가니스탄 군경 부대가 탈레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저해되었다.”

Ibid., pp.15~16.

 

아프가니스탄군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었다는 특수부대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특수부대, 특히 아프가니스탄군 특수전사령부(ANASOC) 예하 코만도부대는 일반 아프가니스탄군이나 경찰 부대 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일반 아프가니스탄 군경 부대 보다 미국 고문관들과 밀접하게 협력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특수부대의 역량 또한 미국 고문관들과의 관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들면, 아프가니스탄군 특수전사령부는 미군이 제공하는 정비, 보급, 물류, 탄약과 같은 물질적 지원 뿐만 아니라 미국 고문관들이 통합기획절차에 의해 제공하는 지휘 및 리더쉽, 미국 고문관들이 코만도부대의 전투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원하는 작전준비태세 사이클 유지,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감시-정찰 능력 및 공지합동작전 능력에 의존했다.

(미국과 탈레반의) 도하 협정 이전에 아프가니스탄군 코만도는 미국 고위 장교들로 부터 훈련-자문-지원을 충실하게 지원받았다. 하지만 도하 협정 이후 아프가니스탄 특수부대에 대한 미군의 항공지원 및 협동작전은 완전히 중단됐다. 가장 먼저 아프가니스탄군 특수전사령부가 이 문제에 직면했다. 20207월 까지 아프가니스탄군 특수전사령부는 대부분의 임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이조차도 미국의 물자 보급 및 일부 물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코만도 부대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기간 중 아프가니스탄 특수부대의 총 작전 회수는 미국의 지원을 받던 1년전의 절반 수준으로 격감했다. 즉 아프가니스탄 코만도는 2019년에 수행했던 만큼 독립작전을 수행했지만 미군이 함께하는 합동 임무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 또 아프가니스탄군이 주도하는 작전에 미군이 정보, 물류, 근접항공지원 등의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행했던 작전 중 아프가니스탄 코만도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작전은 많지 않았다. 미국이 합동기획과정에서 점차 빠지게 되면서 미국 고문관들이 코만도 부대의 잘못된 운용을 막을 막기도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코만도의 작전태세가 악화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코만도 부대는 선택한 장소와 시간에 기동과 화력 집중으로 탈레반을 타격할 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작전 수행간에 적절한 기간 동안 휴식 및 보충을 해야 했다. 미국 고문관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던 때는 이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 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능력은 필요한 정비, 보충, 휴식 시간을 제공하는 작전준비태세 사이클을 유지하는데 달려있다고 지적했다.

미군과 민간군사기업들이 철수하고 아프가니스탄 공군과 특수부대의 능력이 감소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군경이 방어하는 초소들은 더욱 고립됐다. 아프가니스탄 군경이 방어하는 초소들이 유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특수부대의 투입이 더 빈번해졌다. 즉 특수부대가 작전에 투입되는 시간이 과도해졌다. 코만도 부대는 72시간 이내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보급이 떨어지면 특수부대도 일반 군경 부대와 동일한 보급 및 물류 문제를 겪게 됐다.

그리고 통합기획절차가 없어지고 장기간의 작전 시 미국 고문관들의 감독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코만도 부대는 정규군 군단사령부의 전술 통제를 받게 됐다. 아프가니스탄군 군단장들은 코만도 부대를 정규 지휘통제 체계에 편입시켰다. 특정한 목표를 제거하기 위한 단순한 특수부대 작전이 정규군 군단을 지원하기 위핸 대규모 대반란전 임무로 바뀌었다. 코만도 부대는 정규군 군단이 필요로 하는 공중기동력과 우수한 훈련을 받은 자산이었다. 특히 정규군 부대의 지상 보급 역량이 부족해서 공중기동력이 필요했다. 군단장들은 코만도 부대를 72시간 이상 통제하에 두었고, 코만도 부대를 배속받게 되면 정예 보병 부대 정도로 운용하면서 초소를 증원하거나 아예 초소를 지키는 임무를 주었다.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특수부대를 과도하게 운용하고, 또 부적절하게 운용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전투준비태세 사이클과 통합력에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Ibid., pp.16~17.

 

미군의 직접적인 전투 지원, 예를 들어 항공지원이 격감한 것도 악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남아시아 정책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탈레반의 소요에 맞서싸우기 위해 추가적인 허가를 받아야 했다. 주로 공습이 통제를 받았다. 2019년 미군은 7,423회의 공습을 실시했다. 2009년 이후 가장 많은 횟수였다. 2019년 아프가니스탄 군의 고위 장교들은 SIGAR에 탈레반에 점령되었던 영토들을 탈환하는 등 진전이 있었다고 했다. 미국과 탈레반이 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군경에 대한 군사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아프가니스탄군 통합특수전사령관이었던 사다트 장군은 이렇게 진술했다. “하룻 밤 사이에 미군의 공습이 98%나 감소했다.” 미군의 공습은 78%가 감소했다. 2020년에는 겨우 1,631회의 공습이 있었다. 1년 전에는 7,423회의 공습이 있었다. 1,631회의 공습 중 절반은 도하 협정이 체결되기 2개월 전에 수행됐다.”

Ibid., p.12.
 

 

미국의 원조 중단에 따른 급속한 붕괴는 마치 1974~75년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의 국내 정치 문제, 민군 관계 등 다양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읽어봐야 할 보고서입니다.

2018년 4월 27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한국의 건빵 생산

얼마전 트위터에서 한국군의 건빵 썰을 푼 김에 관련된 문헌을 하나 번역해 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58년 5월에 Kenneth W. Myers가 작성한 KMAG’s Wartime Experiences: 11 July 1951 to 27 July 1953의 275~289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해당 연구보고서는 총 3개의 폴더로 나뉘어 태평양사령부 군사실 문서군인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2A1-2AA1의 85번 상자와 86번 상자에 나뉘어 있습니다. 건빵 외에 통조림 생산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번역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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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1951년 6월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와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에 9월 15일 부로 일본에서 한국군의 J형 전투식량과 건빵을 생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정책 기조에 맞춰 전투식량과 건빵은 한국의 민간 공장을 활용하거나 부산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8군사령부와 군사고문단은 1951년 9월까지는 한국 내에서 건빵 재료와 전투식량에 들어갈 통조림 및 기타 부식 재료를 조달하는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1951년 7월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한국군용 건빵 재고가 10월 20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며, 전투식량은 10월 31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때 까지 소비할 건빵 재고를 일본에서 조금 더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건빵 생산은 원래 계획한 9월 15일 보다 늦은 10월 1일 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2)

그러나 1951년 9월이 되자 한국 내에서 건빵과 비상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계획을 좀 더 연기해야 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은 건축 자재 조달이 늦어져 1951년 12월 말이나 1952년 1월은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전투 식량의 주 메뉴인 생산 통조림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8군사령관은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건빵 공장 가동과 전투식량 생산 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한국 내에서의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군용 건빵과 전투식량을 계속 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고량과 일본에 발주한 잔여 물량을 합치면 건빵 5개월 치와 전투식량 2개월 분이 있었다.3)
1951년 10월 초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제8군 사령관에게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 6개월 치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8군 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산의 건빵 공장을 최대한 빨리 가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에 소요되는 예산은 한국민간구호계획(Civilian Relief in Korea, CRIK) 기금에서 유용하도록 제안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건빵 재료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부산 건빵 공장의 생산 예정일은 확실치 않았다.4)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단은 1951년 11월 건빵을 생산하기로 계약한 업자와 회의를 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은 커녕 부지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는 45일 내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건설 자재를 제공하되,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11월 말이 됐는데도 계약한 업자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군은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측은 설사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하는데 반대했다. 제8군 사령관은 군사고문단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빵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5)
1951년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한국군의 급식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전투부대는 최소 기준의 급식을 받고 있었다. 최소기준으로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높게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방 부대의 급식은 칼로리, 단백질, 지방이 권장량 이하 수준이었다. 한국군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었다. 한국 정부는 시장 가격의 폭등에 대응해 원화 예산을 증액하지도 않았고 대량 구매를 통해 식량 예비분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한국 정부에 생선 공급량을 늘리고, 예산을 증액하고, 늘어난 예산을 육군본부 군수국에 지급해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도록 요구했다.6)
한국내에서 건빵을 생산하는 일이 지체되자 군사고문단은 1951년 12월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의 1952년 3월 및 4월분 수요를 맞추도록 일본에서 건빵 500만 봉지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한국 육군본부는 기존에 계약했던 업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이 회사의 서울 지사에 건빵 생산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한국 육군의 건빵 수요 중 50%를 충족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 공장은 1952년 1월, 부산 공장은 1952년 3월은 되어야 건빵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극동군사령부는 군사고문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에 발주한 건빵은 1951년 12월 말 생산에 들어갔으며 1952년 2월 15일~29일 사이에 500만 봉지를 배송할 예정이었다.7)
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군의 일선 병사들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통해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의 부식을 충분히 보급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일원화된 조달 체계 하에서 광주에 각종 장류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지역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한국 육군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각 부대 지휘관들이 급식 수당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걸 우려했다는 점이었다.8)

서울의 건빵 공장은 1952년 1월 중순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20,000~25,000봉지에 달했다. 부산 대신 1952년 5월 1일까지 대구에 두 번째 건빵 공장을 세우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월 초 제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건빵 생산 현황에 대해 평가했다. 이 서신은 한국 국방부가 건빵 공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급식을 미국 정부에 무한정 의존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극동군사령부는 6개월치의 건빵 재료 공급이 확정되었고,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를 때 까지 임시방편으로 500만 봉지의 건빵을 공급할 계획도 확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즉시 한국 정부에 건빵의 추가 공급은 없다고 통보하라. 한국 정부가 건빵 생산을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극동군사령부는 건빵의 추가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추후의 원조는 건빵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데 제한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국측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정부와 한국군, 건빵 공장 운영진에게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한 원료와 기자재를 원조받으면 건빵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은 뒤에만 제공하기로 했다.10) 제8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과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제8군사령부는 4월 30일까지는 한국군의 건빵 수요를 맞출 수 있지만 이때까지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4월 30일 이후의 수요를 맞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으며, 1952년 6월에서 7월쯤이 되면 건빵 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11)

1952년 2월에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공급이 개선되었다. 서울 공장의 생산량은 하루 평균 25,000봉지에 달했고 3월 초에는 33,000봉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국 육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90,000봉지였으니 이것은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구의 건빵 공장이 4월 말에서 5월 초 생산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30,000봉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12)
1952년 2월 제8군은 한국군이 그해 6월까지 미육군의 보급시설에서 건빵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52년 6월 1일 부터 9월 30일까지의 재료는 한국 육군이 항구에 하역되는 대로 인수하도록 했다. 한국군이 재료를 직접 인수하면 미군 보급고가 한국군 건빵 재료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향후 들어올 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13) 1952년 3월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서울의 건빵 공장의 생산 수율을 일본 공장의 85% 수준에서 81% 수준으로 낮출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고문단은 서울 건빵공장을 시찰했을때 굽는 과정에서 재료 낭비가 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건빵의 수분함량을 낮추기 위해 과하게 가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울 공장의 초도 계약 물량 1백만 봉지 생산 수율은 일본 공장의 85%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제8군사령부는 서울 공장의 생산 수율을 낮추지 말도록 지시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에 다음 사항을 권고했다.

-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건빵의 수분함량을 줄이고 덜 단단하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도록 할 것.
-생산 설비의 벨트를 교체할 것.
-건빵에 숱검댕이 묻지 않도록 화덕을 밀폐할 것14)

1952년 4월에 이르러서도 한국군용 건빵 생산은 희망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30,000봉지에 머물렀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건설 중인 건빵 공장은 대규모의 작업이 필요해 8월 1일은 되어야 첫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군사령부는 고위 인사들에게 건빵 생산 문제를 브리핑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10월 부터 1952년 3월까지 미육군은 한국군에 비상식량으로 26,040,000봉지의 건빵을 제공했으며 달러화로 환산하면 1,939,685달러에 해당한다. 동시에 미국은 비슷한 양의 건빵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공급했다. 한국 정부는 건빵 공장 설립을 지체했다. 건빵 공장을 세워서 가동하기 전에는 건빵 완제품과 건빵 재료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한국측은 조치를 취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은 한달에 488,000봉지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아홉달 동안 압력을 넣어야 했다.”15)

1952년 5월과 6월에 서울 건빵 공장은 하루 30,000봉지의 건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새로 짓고 있는 건빵 공장은 8월 15일 쯤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공장은 1952년 2월 1차분 계약 물량 1,800,000봉지 생산을 완료했다. 6월 부터는 새로 계약한 1,077,000봉지에 대한 생산을 시작해 814,980봉지를 납품했다.16) 대구 건빵 공장은 1952년 7월 초도생산을 시작했다. 당초 예상한 8월 15일 보다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대구 공장의 하루 생산 예상치 30,000봉지에 서울 공장의 하루 평균 생산량 30,000봉지를 합치면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17) 한국육군 군수국은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공장들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8월 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서울 공장과 대구 공장의 생산량을 합쳐 하루 60,000봉지의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8)

1952년 10월과 11월에는 서울과 대구 공장을 합친 생산량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하루 평균 52,000봉지에 머물렀다. 건빵 생산은 줄어드는데 한국군 병력이 늘어나는 한편, 건빵 보급량을 늘리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은 1952년 10월 영등포의 건빵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장 복구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확보하고 이 공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19)
군사고문단은 하루에 병사 1인당 건빵 1/3봉지를 배급하는 수준으로는 겨울철에 일선 장병들에 충분한 급양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훈련병에게는 건빵 배급이 허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건빵을 배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훈련병들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충분한 급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 평균 12~15시간의 격렬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훈련병에게는 칼로리와 영영가가 더 높은 급식을 하는게 옳았다. 군사고문단은 훈련병에게 건빵을 보급하면 체력을 증진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20) 1952년 11월 제8군 사령부는 군사고문단과 한국 육군 군수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극동군사령부에 한국에서 건빵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재료를 더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빵 생산을 늘려서 병사 1인당 건빵 배급량을 하루 평균 1/3봉지에서 1/2봉지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9,536봉지의 건빵이 필요했다. 이정도 양이면 일선부대의 205,740명에게 하루 평균 1/2봉지, 훈련병 80,000명에게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할 수 있었다.21) 1952년 12월 육군부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배급량 증대를 허가하고 하루에 130,000봉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 인가량은 전방 부대 장병들이 하루 1/2봉지, 훈련병들은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은 한국 육군 군수국의 요구치를 미달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한국내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평균 45,000봉지였다. 군사고문단은 영등포 공장 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확보에 노력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53년 1월은 되어야 공장 부지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2) 영등포 공장의 생산 설비 복구는 만족스럽게 진행됐지만 건설 자재 확보가 문제였다. 1953년 1월 군사고문단의 조달 고문관은 일본을 방문해 극동육군사령부 조달과와 건설자재 확보 문제를 상의했다.23) 1953년 3월, 제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극동육군사령부에 나중에 상환받는 조건으로 제8군 사령부가 보유한 건설자재를 제공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건빵 공장이 추가로 건설될 때 까지 미국 고문관들이 한국군 취사병들을 훈련시켜 건빵 생산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4)

1953년 4월, 미국정부는 한국군에 43,000달러에 상당하는 양의 건설자재를 공급해 영등포 건빵 공장을 복구하도록 했다. 공장 소유주와 한국군은 영등포 건빵 공장이 군납만을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영등포 공장의 건빵 생산은 1953년 5월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영등포 공장이 생산을 시작하더라도 한국군의 수요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294,233봉지였다. 한국내에 있는 건빵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도 최대 생산량은 하루 평균 210,000봉지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적절한 건빵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에서 임시변통의 조치를 계속 취할 필요가 있었다.25) 모든 한국군 부대는 기본적인 재료를 공급받아 국수, 경단, 건빵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건빵을 생산한 부대들은 낡은 드럼통, 진흙, 점토 등을 동원해 오븐을 만들었다.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건빵과 비슷한 수준의 칼로리를 가진 대체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26)

영등포 공장 복구에 필요한 마지막 건설자재는 1953년 5월 중순 전달되었다. 5월 말까지의 공장 복구 수준으로 봤을때 6월 10일 쯤이면 건빵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1953년 5월 영등포 건빵 공장의 복구 공사는 거의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군사고문단은 공장 복구가 완수되도록 여러 번에 걸쳐 개입했다. 군사고문단의 개입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한국육군은 군수국 보급과에 공장소유주와 교섭할 권한을 주고 한국은행에 대출을 주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확인조치를 취해야 했다.28)

1953년 5월 초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 대표들은 한국군의 실제 건빵 수요량을 평가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한국군은 병력 602,880명을 기준으로 병사 1인당 하루 평균 건빵 1/2봉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일일 건빵 생산량을 130,000봉지에서 294,233봉지로 늘리기를 원했다. 한국군의 요구량은 미국 육군부가 하루 생산량을 130,000봉지로 승인했을때 고려한 변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육군부는 영등포 공장이 복구되어  재가동에 들어가면 건빵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군 병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최저 보급 기준이 악화되자 한국군은 건빵을 더 많이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의 급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빵을 통해 탄수화물을 더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군의관은 영영학 관점에서 하루에 건빵 1/4봉지면 충분하고 1/3봉지는 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육군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한국군 급식 소요를 영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그대신 1952년 4월 기준 한국군 병력 525,000명에 맞춰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보급하기로 했다. 52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군의 하루 평균 건빵 수요는 175,000봉지였다. 육군부에서 허가한 양 보다 45,000봉지를 더 생산해야 했다.29) 1953년 7월 말에도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서울, 대구, 영등포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빵으로는 부족한 양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건빵을 생산해야 했다.



주석

1) Comd Rept(S), HQ EUSAK, Jun 51, Narrative, p.118.
2) Comd Rept(S), HQ EUSAK, Jul 51, Narrative, p.97.
3) Comd Rept(S), HQ EUSAK, Sep 51, Narrative, pp.80~81.
4) Comd Rept(S), HQ EUSAK, Oct 51, Narrative, pp.78~79.
5) Comd Rept(S), HQ EUSAK, Nov 51, Narrative, pp.71~72.
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7)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8) Comd Rept(S), HQ KMAG, Jan 52, Narrative Summary, p.24.
9) Ibid.
10) Comd Rept(TS), GHQ UNC/FEC, Jan 52, p.104;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ive, p.54.
11)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vie, p.55.
12) Comd Rept(S), HQ EUSAK, Feb 52, Narratvie, p.60.
13) Ibid.
14) Comd Rept(S), HQ EUSAK, Mar 52, Narratvie, p.54.
15)Comd Rept(S), HQ KMAG, Apr 52, Narratvie Summary, p.16; Briefing for VIP’s, HQ UNC, Apr 52, Sec. 16, p.7.
16) Staff Sec Repts(S), G4 KMAG, May 52, Summary, p.2; Jun 52, Summary, p.1; Comd Repts(S), HQ KMAG, Narrative Summaries, May 52, p.18; Jun 52, p.18.
17) Comd Rept(S), HQ KMAG, Jul 52, Narratvie Summary, p.18.
18) Comd Rept(S), HQ KMAG, Aug 52, Narratvie Summary, pp.15, 17.
19) Staff Sec Rept(S), G4 KMAG, Oct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0) Staff Sec Rept(S), QM G4 EUSAK, Nov 52, p.46.
21) Comd Rept(S), HQ EUSAK, Nov 52, Narrative, pp.132~133.
22) Comd Rept(S), HQ EUSAK, Dec 52, Narrative, p.143; Staff Sec Rept(S), G4 KMAG, Dec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3) Staff Sec Rept(S), G4 KMAG, Jan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4) Comd Rept(S), HQ EUSAK, Mar 53, Narratvie, p.14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5) Comd Rept(S), HQ EUSAK, Apr 53, Narratvie, p.149; Staff Sec Rept(S), G4 KMAG, Apr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7)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2.
28)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3.


2017년 12월 4일 월요일

신속한 지뢰 제거 방법


다부동을 쳐들어가야 하겠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적들은 길에다 지뢰를 촘촘히 묻어놓았다. 공병이 없었기에 우리는 어쩔수 없었다. 하여 나무를 찍어다가 길을 가로막아놓았다. 이때 찌프차 한대가 오더니 꺽다리 쏘련 군관이 내렸다. 그는 번역을 통해 막아놓은 나무를 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지뢰가 많아 그리로 못간다고 하자 그는 권총을 들이대면서 당장 치우라고 윽박질렀다. 

"죽고싶으면 가거라!" 

하는수 없어 우리는 나무를 치웠다. 하지만 그 쏘련 군관이 탄 차는 얼마 가지 못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날아갔다.

낙동강 전투 당시 북한군 6사단 정찰중대 중대장대리였던 김리정의 증언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 (료녕민족출판사, 2002), 185쪽.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뒤 회고한 내용이기 때문에 구술자의 증언에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중국군 출신자로 편성된 북한군 제6사단은 낙동강 전투 당시 마산 방면에 투입되었습니다.

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2012년 10월 5일 금요일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년)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 포스팅에서 인용할 통계는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공군에 전투기를 원조하는 계획을 마련할때 실시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에 대한 조사입니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북한이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에 의존한 것과 비슷한데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분야일수록 기존 지배체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 12. 7)
조종사
총 비행시간
(1946년까지)
전투기 조종사
출신
폭격기 조종사
출신
수송기 조종사
출신
1
9,800


1(일본군)
1
6,000

1(중국군)

4
2,500
2(일본군)
1(일본군)
1(일본군)
5
1,500
1(일본군)
2(일본군)
2(일본군)
5
700
1(일본군)
1(일본군)
3(일본군)
13
500
1(미군)
8(일본군)
4(일본군)
10
400
4(일본군)
3(일본군)
3(일본군)
13
300
8(일본군)
1(일본군)
4(일본군)
11
200
8(일본군)

3(일본군)
(표출처 : Despatch No.777, “Enclosure No.1, Present Personnel Experience Factors”(1949. 12. 7), RG330 Entry 18 Box68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 Office of Military Assistance Project  Decimal File, Apr 1949~May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