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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에른스트 폴크하임에 관한 논문 한편

 미국의 군사사가 제임스 코럼(James Corum)이 1990년대 초반 The Roots of Blitzkrieg이라는 연구를 발표하면서 전간기 독일군의 기계화전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의가 크게 진전됐습니다. 특히 이 연구의 중요한 업적은 1980년대 까지 독일군의 기계화전 교리 발전을 구데리안을 중심으로 논의하던 틀을 깨고 에른스트 폴크하임(Ernst Volckheim),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등의 이론가들을 발굴한 데 있습니다. 이후 메리 헤이벡(Mary Habeck)의 Storm of Steel, 러셀 하트(Russell Hart)의 Guderian : Panzer Pioneer or Myth Maker?와 같은 연구가 나오면서 그동안 잊혀졌던 독일 군사이론가들의 업적이 발굴되고 구데리안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언 존슨(Ian Ona Johnson)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7호(2023)에 발표한 Ernst Volckheim, Heinz Guderian, and the Origins of German Armored Doctrine은 위에서 언급한 연구들의 연장선 상에서 에른스트 폴크하임의 업적을 조명하는 연구입니다. 존슨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폴크하임의 제1차세계대전 당시 경험과 전후 기갑전 교리 연구, 두 번째는 폴크하임이 독일군의 교리 발전에 끼친 영향, 마지막은 폴크하임이 잊혀지게 된 원인입니다.

 폴크하임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부대에서 복무한 소수의 장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1917년 창설 중이던 전차부대에 부임해 1918년 공세에 참가했습니다. 전후에도 군에 남게 된 폴크하임은 1923년 부터 본격적으로 기갑전 교리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폴크하임은 1923년에 발표한 Die Deutschen Kampfwagen in Weltkriege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수뇌부가 전차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지 못한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전차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지만 제병협동하에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사용한다면 큰 전술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대량의 전차를 집중운용해야 하며 적 방어선 돌파를 위한 중전차와 돌파 이후 전과확대 임무를 수행할 경전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공군력의 발전도 강조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제병협동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없다면 전차는 보조적인 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선돌파를 위한 중전차는 독립된 전차사단으로 편성하고 전과확대를 수행할 경전차는 기병사단과 보병사단에 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구상한 중전차사단은 450대의 전차를 보유하는 강력한 전투부대였습니다. 즉 독일군 내에서 처음으로 기갑사단 편성을 주장한 이론가는 에른스트 폴크하임 이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차 부대를 지휘한 장교였기 때문에 전차의 기술적인 면에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차가 기술적으로 발전한다면 미래에는 진지전이 불가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효과적인 기동작전을 위해서는 전차의 기술적 수준이 높아야 했습니다. 그는 미래의 전차가 충분한 연료와 예비 탄약을 탑재하고 시속 30km의 순항속도로 12시간 이상 작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정도의 기술적 수준을 갖춰야 전차가 작전적으로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 입니다. 

 폴크하임은 1923년 첫 연구를 발표한 이래 잇따라 기갑전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직접 전차를 운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차의 기술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4년 8월에 발표한 글에서는 '중형전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돌파구가 형성된 뒤 전과확대를 위해 투입될 전차는 빠른 속도와 긴 행동반경 뿐만 아니라 적 전차부대와 교전을 하기 위한 강력한 무장과 장갑이 필요한데 경전차는 기술적으로 이것을 충족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당시 세계 각국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경전차나 탱켓(Tankette) 개발에 주력했는데 폴크하임은 이런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봤습니다. 독일에서도 엔지니어 빌헬름 브란트(Wilhelm Brandt)와 같이 탱켓 개발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폴크하임은 탱켓 개발은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전차 개발을 책임진 차량화부대총감 오스발트 루츠 장군은 폴크하임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병기 개발을 총괄하는 병기-장비국(Inspektion für Waffen und Gerät)의 폴라트-보켈베르크(Alfred von Vollard-Bockelberg) 장군도 폴크하임의 이론을 받아들 중형 전차와 중전차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3호전차와 4호전차입니다.

 폴크하임이 주목한 또다른 기술적 요소는 전차의 통신수단이었습니다. 폴크하임은 초기부터 터 제병협동하에서의 전차 운용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차부대가 공군은 물론 보병, 포병 등 다른 병과와 원활하게 통신을 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폴크하임은 전차의 통신 수단이야 말로 미래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단언했습니다. 1920년대의 무전 기술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폴크하임이 1923년 부터 1924년 사이에 발표한 연구들은 큰 반향을 일으켜서 바이마르 공화국군 군무청(Truppenamt)은 폴크하임에게 기갑 병과 교육을 위한 교육 과정을 연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육성되기 시작한 기갑장교들은 폴크하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 입니다. 구데리안 또한 폴크하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입니다. 구데리안은 훗날 회고록에서 폴크하임의 영향을 축소하는 왜곡을 했습니다만 1920년대 중후반 구데리안의 사상이 형성되는데는 폴크하임과의 교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28년 이후 폴크하임은 교리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 논문의 필자인 이언 존슨은 폴크하임의 보직이 자주 바뀌면서 연구에 집중할 수 없었고, 여기에 가족 문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반면 구데리안은 폴크하임의 연구가 침체되었던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구데리안이 Achtung Panzer!를 출간해 큰 명성을 얻고 히틀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데 비해 폴크하임은 전쟁 발발 직전에야 중령으로 진급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에는 노르웨이 침공작전에서 제40특수임무전차대대(Panzer-Abteilung z.b.V. 40)를 지휘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련 침공당시 제203전차연대장으로 참전해 부상을 입은 뒤로는 일선 지휘관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전선에 복귀하지 못 합니다. 구데리안이 승승장구한 것과 크게 대비되지요.

 폴크하임을 재조명하는 연구는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만 이언 존슨의 연구는 폴크하임의 초기 연구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 합니다. 좋은 연구 같습니다.

2024년 1월 1일 월요일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 관한 사료집이 나옵니다

 Generaloberst Friedrich Fromm: Diensttagebuch beim Chef der Heeresrüstung und Befehlshaber des Ersatzheeres 1938–1943 – Ein Dokument aus dem Zentrum der deutschen Kriegsrüstung | Brill


 2024년에 새로 나오는 책이 뭐가 있는가 살펴보다 보니 흥미로운 책이 하나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보충군(Ersatzheer)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 관련된 사료를 엮은 사료집이 나오는군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프롬 상급대장이 직접 작성한 기록을 엮은 사료집으로 전시 동원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수록된 걸로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사료집입니다만....


 가격이 무려 700유로에 달하는군요. 한국 돈으로 100만원에 달하는 가격이라서 개인이 소장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저도 이거는 못 사겠네요. 대한민국의 공공도서관에서는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입니다. 그래도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곳에 신청은 해보는게 좋겠네요.

2023년 6월 6일 화요일

『진흙속의 호랑이』 완역판, 길찾기, 2023, 진중근ㆍ김진호 역

 군사사 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독일 국방군의 유명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 『진흙속의 호랑이』 완역판을 냈습니다. 몇 년 전 영어 중역판이 오역을 비롯한 몇가지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처음 부터 새로 번역을 하는 일은 힘들었을 텐데 대단합니다. 『전격전의 전설』, 『독일 국방군의 신화와 진실』 등 다수의 군사서적을 번역한 육군대학의 진중근 중령님이 번역을 담당하셨습니다. 오토 카리우스는 매우 유명한 '전차 에이스'여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겁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일찌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국어판이 간행되기 전에도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원서나 다른 언어의 번역판으로 접한 분이 많았지요.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서독 사회가 패전의 상처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에 집필되었습니다. 이 점은 카리우스가 회고록의 서문에서 독일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독 사회 일각의 기류를 불편해 하면서 비난하는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참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은 물론 전우들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서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카리우스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는 태도는 현재 시점에서 제3국의 입장으로 볼 때 다소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회고록은 자신에 대한 방어를 위해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점을 차치하고 보면 이 회고록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료입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대부분의 내용이 1943~1944년 제502중전차대대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카리우스가 군인으로서 정점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아마 저자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 일 겁니다. 카리우스는 유능한 전술 지휘관 답게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여러 경험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전술적 교훈을 도출하려 합니다. 저자는 회고록의 곳곳에서 '당시'의 독일연방군 장병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특히 1944년 7월 소련군의 전략적 대공세를 맞아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 제22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대표적입니다. 저자는 제227보병사단의 어떤 연대장과 함께 사단장 빌헬름 베를린 장군을 설득해서 문제가 있는 작전을 철회시킨 일화를 소개합니다. 카리우스는 이 일화를 통해 '독일 국방군'의 임무형 전술이 실전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이런 장점을 '독일 연방군'의 '후배'들이 계승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회고록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되었지만 적군이었던 소련군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간행된 독일 국방군 고급장교 출신자들의 회고록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소련군을 폄하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과 비교하면 제법 '공정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당시 전쟁영웅으로 주목을 받던 인물이다 보니 전투 이외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많습니다.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휴양을 하던 중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카리우스가 힘러를 만났을 당시 힘러는 친위대 외에도 정규군의 보충군 사령관을 겸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쿠데타 이후 친위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정규군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선 시점입니다. 카리우스와 힘러의 대화는 정규군이 정치 싸움에서 친위대에 밀리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입니다. 이 외에도 나르바 전투 당시 유명한 기갑부대 지휘관인 슈트라흐비츠 '백작'이 지휘하는 전투단에 배속되었을 당시의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슈트라흐비츠 '백작'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지휘로 많은 비판을 받은바 있는데 카리우스는 나르바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슈트라흐비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만큼 번역은 전체적으로 좋다고 생각됩니다. 역자가 독일어 원판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식의 군사용어 표기를 잘 살린 부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이 전후 나토에 가입하면서 많은 군사용어가 미국-나토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들어 미터법을 사용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에서는 화포의 구경을 cm로 표기하지만 독일 연방군에서는 mm로 표기합니다. 카리우스는 독일 국방군 경험만 있고 전후에는 연방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전쟁 당시의 용례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자는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판은 원서에서 화포 구경을 cm로 표기한 것을 mm로 바꾸고 있고 영어 중역판은 이걸 그대로 따라갔지요. 또한 역자는 불가피한 예가 아니라면 최대한 많은 용어를 현대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맞춰 한국 독자들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리우스가 잘못 회고한 내용에 대해서는 역자주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서적을 번역할 때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역자가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인공지능 번역의 품질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 처럼 아직은 전문적인 번역가가 필요합니다.

 

2023년 4월 9일 일요일

1945년 6월 노르웨이 주둔 독일 전차부대의 항복 및 무장해제 장면


유튜브에서 1945년 6월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이 항복하고 무장을 해제하는 장면을 기록한 영상을 봤습니다. 이 영상에 나오는 부대는 노르베겐 기갑여단(Panzer-Brigade Norwegen) 예하 부대입니다. 여러 회사에서 나온 3호전차 모형을 만들어 보고 있던 차에 전쟁 말기에 사용된 3호전차가 여러대 나오는 영상을 보니 재미가 있네요. 그런데 1945년인데도 이 영상에 나온 3호전차들은 모두 궤도의 가이드혼에 구멍이 뚫린 형식의 궤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궤도는 소모품인데 전쟁 중반기에 생산된 궤도가 이때까지도 사용되는걸 보면 재미있습니다. 제가 높게 평가하는 아카데미 3호전차에 들어있는 궤도는 전쟁 말기의 3호전차에도 쓰는게 곤란하겠군요.물론 저는 고증을 무시하고 그냥 조립합니다만.^^


 

2023년 2월 21일 화요일

[번역글] 전차 생산기업 크라우스-마파이 베크만社는 독일 정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2월 17일 슈피겔 온라인판에 레오파르트를 생산하는 크라우스-마파이 베크만社 최고경영자를 취재한 짧은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 독일의 기갑차량 생산 능력에 대한 기업측의 관점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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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생산기업 크라우스-마파이 베크만社는 독일 정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전차 생산기업 크라우스-마파이 베크만社(이하 KMW)에 따르면 기업의 관점에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은 없다고 한다. KMW의 최고경영자 랄프 케첼(Ralf Ketzel)은 협력업체들의 생산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우리 협력업체들은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같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확한 정치적 합의 입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간다. 서방 군수기업들의 생산 능력과 생산 속도는 일요일 까지 열리는 뮌헨안보회의(MSC)에서 핵심 주제가 되었다. 이러는 동안 독일 군수산업계에서는 수많은 정치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계약이 체결되지 못했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KMW는 레오파르트2 전차와 자주곡사포2000(이하 PzH2000) 등의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 회사는 4,000명의 사원이 있으며 유럽에서 으뜸가는 궤도 및 차륜 장갑차량 제조 기업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KMW에서 1년에 300대의 레오파르트 전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 대략 하루에 1대의 전차를 생산한 셈이다. 그러나 이후로 사업 모델이 변화했다. 최근의 신규 생산 계획을 보면 1년에 레오파르트 전차 50대를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연간 60대에서 70대 가량의 전차를 개량하는 계획이 있다. 이와 별도로 50대의 전차를 정비하는 사업도 있다. KMW 최고경영자의 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의 통계와 최근의 차량 교체를 감안하면 500에서 600대의 레오파르트2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들을 아주 단기간에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유럽의 인프라와 생산 라인을 감안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차량 조립 및 체계 통합을 하는데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엔진, 광학장비, 전자장비, 특수 광학장비 들을 공급하는 주요 협력업체들에게 당장 주문을 해야 한다는 말이죠.” 케첼은 이렇게 말했다. “상당수 부품은 이미 거대한 생산 라인이 확보되어 있어서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간혹 사소한 문제가 말썽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차량용 반도체 같은 겁니다.”

케첼은 외국이나 독일 본토에 새로운 생산 라인을 구축해 공동 생산에 들어가는데 1년에서 2년 정도가 걸릴 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협력 업체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독일 연방정부와 독일 연방군 조달청(Bundesamt für Ausrüstung, Informationstechnik und Nutzung der Bundeswehr)에서는 아직까지도 무기체계를 대량으로 주문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1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기갑차량 생산을 늘리라는 신호가 있었는지 질문을 하자 케첼은 이렇게 답했다. “없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연방군 조달청과 여러 건의 계약을 협의하는 중이긴 합니다. 우리가 봤을 때 일은 바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약 규모가 세자리 숫자에 미치지는 못 합니다.”

향후 4년 내에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 수치가 기업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해 주는 명확한 정치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푸마 보병전투차량입니다. 2027년까지 1개 사단에 배치할 수량이 필요하다는 명확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투자를 한 겁니다. 영국 정부도 좋은 사례입니다. 영국 정부는 향후 10년간 500대의 복서 장갑차를 도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진행 중 입니다.”

케첼 최고경영자는 KMW는 민수용 자동차나 컴퓨터 생산기업과 달리 완전히 자유롭게 시장에 의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게 전쟁무기통제법(Kriegswaffen kontrollgesetz)에 달려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먼저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독일의 법 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죠. 합리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회사는 규정에 따릅니다.”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우팔리즈 전투 직후에 촬영된 흥미로운 사진 한 장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봤습니다.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의 사진 기자가 1945년 1월 하순 벨기에의 우팔리즈(Houffalize)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우팔리즈 시가지의 폐허 속에 3호전차 한대가 있는게 보입니다. 

ⓒLife Magazine Archives

재미있는 점은 우팔리즈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제116기갑사단은 기록상 3호전차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Kamen Nevenkin의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의 제116기갑사단 항목(594쪽)을 보면 이 사단은 아르덴느 공세 직전인 1944년 12월 10일에 4호전차 26대, 판터 45대, 3호돌격포 25대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2월 17일 부터 12월 29일까지 추가로 4호전차 5대, 판터 23대, 4호 구축전차 5대, 3호돌격포 14대를 보충받았다고 합니다.

Thomas L. Jentz의 Panzer Truppen 2권 198쪽을 보면 제116기갑사단이 1944년 12월 16일 기준으로 4호전차 21대, 판터 41대, 4호대공전차 3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로 4호전차 5대, 판터 23대, 돌격포 14대가 사단에 배치되기 위해 이송중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제116사단에 배치됐다는 기록이 없는 3호전차가 우팔리즈에 있는게 재미있습니다.

제116기갑사단 부대사는 다른 곳에 두고 있어서 지금 없는데 나중에 한번 아르덴느 공세 당시 3호전차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원래 부대가 보유하지 않았던 장비가 나오는 사례는 간혹 있습니다. 나중에 한번 이야기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 제5기갑사단도 작전 투입 당시에는 3호전차를 보유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작전 도중 제5기갑사단 소속의 3호전차에 대한 보고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우팔리즈의 3호전차도 그 이력이 궁금해지는군요.

2022년 7월 30일 토요일

라스푸티차는 독일군의 타이푼 작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Jack Radey와 Charles Sharp의 공동연구인 "Was It the Mud?"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8-4(2015)에 실린 연구입니다. 최근 연구 답게 독일 참전자들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군의 타이푼 작전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은 주된 요인은 '라스푸티차'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라스푸티차는 부차적인 요인에 불과했으며, 다른 요인들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독일군 사단급 이상 부대들의 일지(Kriegstagebuch)에 기록된 기상 데이터를 종합해 분석했습니다. 분석 대상은 중부집단군, 제3기갑집단, 제4기갑집단, 제40차량화군단, 제41차량화군단, 제46군단, 제57군단, 제1, 6 , 10기갑사단과 제36차량화보병사단의 일지입니다. 독일군의 부대 일지들은 표준화된 양식으로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상 데이터를 정리하는데 곤란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구는 분석 대상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북쪽의 제9군과 제3기갑집단, 두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중앙의 제4군과 제4기갑집단, 세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남쪽의 제2군과 제2기갑군입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941년 10월 1일 부터 11월 15일까지 도로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탕이 심했던 지역은 제2군과 제2기갑군 작전구역으로 총 6일은 차량 이동이 불가능했고 나머지 21일도 도로 상태가 불량했습니다. 도로가 양호했던 날은 10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대들의 작전 지역은 제2군과 제2기갑군 작전 지역보다 도로 상태가 양호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제4군과 제4기갑집단 작전구역은 도로 상태가 좋은 날이 14일이었고 도로 사용이 불가능한 날은 없었습니다. 북쪽의 제9군과 제3기갑집단 작전 구역은 도로 상태가 좋은 날이 28일이었고 도로 사용이 불가능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라스푸티차의 영향 보다는 소련의 도로망이 서유럽 보다 부족했다는 점에 더 주목을 합니다. 기상 상태가 양호했던 10월 7일 이전에도 도로 부족으로 도로 정체가 심각했음을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타이푼 작전 당시 독일군 제3기갑집단은 제9군과 주보급로를 공유했습니다. 이때문에 보병과 마차는 18시 부터 05시까지 도로를 이용하고 기갑 및 차량화 부대는 05시 부터 18시까지 도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교통 체증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도로 정체를 해소할 수 없어 제3기갑집단이 제9군에 다른 도로를 이용하라는 요구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는 도로에 대량의 차량이 몰리다 보니 도로의 상태가 금방 악화됐습니다. 소련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도로였던 바르샤바-모스크바 대로의 경우 제4기갑집단, 제4군, 제9군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금방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퇴각하는 소련군이 조직적으로 도로와 교량을 파괴한 점도 마찬가지로 악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여기다가 보급 문제도 부담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합니다.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기 전 부터 이미 중부집단군은 보급 부족으로 연료 및 탄약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겁니다.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면서 보급 문제는 더 악화됩니다. 제3기갑집단은 10월 4일에 연료가 다 떨어져 10월 5일 오후 까지 연료 추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3기갑집단 예하의 제6기갑사단과 제14차량화사단은 칼리닌 방면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10월 12일 부터 10월 24일까지 사단 예하의 오토바이 대대만을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데리안이 지휘한 제2기갑집단도 마찬가지로 연료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비행장을 확보할 경우 독일 공군이 연료와 탄약을 공수할 수 있었지만 항공 수송만으로는 기갑부대의 연료 소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도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독일군 참전자들의 회고록에서 라스푸티차의 영향을 서술한 내용은 크게 과장되어 있다고 봅니다. 타이푼 작전 초기 단계의 작전에 라스푸티차의 영향은 부차적이었으며 도로망 부족, 보급 부족,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합니다.

2022년 6월 5일 일요일

연합국 정보기구의 독일 기갑부대에 대한 평가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의 정보기관들은 전략적으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보전을 다루는 많은 저작들은 독일의 수많은 실패사례와 연합국의 성공사례들을 비교하고 있지요. 전략적인 면에서 제2차대전 시기 독일의 정보기관들이 실패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일 입니다. 그런데 전략적인 성공사례들만 놓고 보면 연합국 정보기관들의 한계를 놓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전차원의 정보전에서는 어땠을까요? 

스웨덴의 군사사가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은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에서 이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제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기갑사단의 전차연대 편제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했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이런 잘못된 평가를 유지했습니다. 예를들어 1945년 3월 15일 간행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에서는 국방군 소속 기갑사단은 4호전차 52대와 판터 51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은 4호전차 64대와 판터 62대를 보유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1) 물론 이건 잘못된 평가입니다. 


미군이 추정한 독일 국방군 기갑사단 편제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p.II-26

미군이 추정한 독일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편제표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p.II-28

세테를링은 독일 사료를 근거로 미군이 추정한 이런 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2)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의 전차연대는 편제상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편제상 전차 보유대수는 동일합니다. 물론 1944년 후반기 이후 정치적으로 친위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무장친위대의 기갑사단 편제를 정규군과 차별화 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3) '최소한' 장비 보급 측면에서는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는 점은 독일군에 관한 여러 연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적군의 편제와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건 매우 어려운 일 입니다. 정보기구들이 자주 실패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 서부전선의 독일군 기갑사단 배치와 전력을 파악하려던 연합국의 시도가 실패한 사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영 연합군은 상륙작전 직전까지도 노르망디에 배치된 독일 제21기갑사단의 전차 전력이 총 240대에 달하고 이중 상당수가 판터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장친위대 제12기갑사단을 합치면 독일군이 총 54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4) 실제로는 독일 기갑사단 중 가장 전력이 약했던 제21기갑사단을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21기갑사단이 노르망디 상륙 직전인 1944년 6월 1일 보유한 전차를 보면 3호전차 6대, 4호전차 장포신형 98대, 4호전차 단포신형 6대, 프랑스제 S-35 40대, 호치키스 H-35 2대로 총 152대입니다.5) 이중 48대는 구식화된 독일제와 프랑스제 전차이니 연합군 전차를 상대로 유효한 전력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장포신 4호전차 98대가 실질적인 전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쟁에서 확보해야 하는 정보는 굉장히 방대합니다. 연합국의 정보기관은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소련도 전쟁 말기 까지 독일군의 규모와 편제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평가하는데는 형편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러시아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은 소련군이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군 기갑사단의 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지요.6) 연합국 정보기관이 작전 차원의 정보를 파악하는데 보여준 한계점은 사실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종종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을 알아야 제2차세계대전 중 정보전의 양상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를 할 수 있겠지요.


주석

1) TM-E 30-451 Handbook on German Military Forces, War Department, 1945, pp.II-26~II-28.

2)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casemate, 2019, pp.18~19

3) "SS Panz. u. SS Panz. Gren. Div"  SS Führungshauptamt Amt II Org.Abt.Ia/II, Tgb.Nr. 948/45 g.Kdos. (1945. 2. 14), H16/120 Zustandberichte Band 501(Gen Insp d Pz Tr/Org Abt.), RG242 T78 R617.

4) Marc Milner, Stopping the Panzers : The Untold Story of D-Da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4, pp.90~91

5)  Zetterling, p.330.

6) Valeriy Zamulin, '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4

2022년 5월 5일 목요일

로만 퇴펠의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

 작년인 2021년에 독일 군사사학자 로만 퇴펠(Roman Töppel)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4-2호에 기고한 논문 "The Battle of Prokhorovka: Facts against Fables"를 읽었습니다.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연구는 여러편이 발표됐지만 여전히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로만 퇴펠의 이 연구도 꽤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네요. 이 논문에서 눈에 띄는 주장 중 몇개를 골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 문제

퇴펠은 소련 시기의 프로호롭카 전투 서술 뿐만 아니라 최근 러시아 학계에서 제기된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유명한 발레리 자물린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퇴펠은 냉전이 종식된 뒤 서방 학계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자 러시아 학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기존의 서술, 즉 소련 시절에 정립된 '프로호롭카 대전차전' 이야기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군사사가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가 독일 문헌을 근거로 독일측 손실을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학계의 대응 중 하나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기간과 전투 장소의 범위를 넓히는 것 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롭카 전투를 1943년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전개된 전투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이 주장은 독일 남부집단군이 주공 축선을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변경하면서 7월 10일 부터 16일까지 프로호롭카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이어졌으므로 이 7일간을 프로호롭카 전투로 봐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퇴펠은 이런 서술 자체가 냉전 시기부터 이어진 소련측 역사서술의 잔재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의 문서를 분석해 보면 독일군은 작전 수립 단계 부터 프로호롭카 방면에 주공을 지향했다는 것 입니다.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서술은 독일군의 원래 주공 축선은 오보얀이라고 보는데 오보얀 남부의 평야지대는 습지로 기갑부대의 기동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곳을 주공 축선으로 선정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비판합니다. 퇴펠은 최근 러시아 연구자들이 프로호롭카 전투의 시간과 공간적 범위를 확대하는 이유는 더 이상 7월 12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자 전투의 범위를 넓게 잡아 소련군의 승리로 해석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2. 독일군은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했는가?

두 번째로는 독일군이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사전에 방어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소련군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하지만 퇴펠은 독일측 사료를 검토해 보면 독일군은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배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소련군이 7월 12일 역습에 투입한 제29전차군단(25, 31, 32전차여단)과 제18전차군단(110, 170, 181전차여단) 중 독일군이 7월 12일까지 파악하는데 성공한 것은 제32, 110, 170, 181여단 뿐이고 제25, 31여단 등 2개 여단은 7월 13일에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7월 11일 밤 까지도 소련군 제18전차군단과 제29전차군단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제4기갑군과 제2SS기갑군단도 소련군 작전 예비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퇴펠은 독일군이 소련군의 역습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주장은 소련군의 전술적 졸전을 변명하기 위한 의도라고 비판합니다.


3. 7월 12일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발생한 양측의 전차 손실

개인적으로 이 연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퇴펠의 분석에 따르면 제2SS기갑군단이 7월 12일 전투에서 입은 전차 손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LAH : 3호전차 2대, 4호전차 2대 대파, 4호전차 4대 완파

다스 라이히 : 4호전차 5대 대파

토텐코프 : 4호 전차 1대, 티거 1대 대파


즉 7월 12일 전투에서 독일군의 총 손실은 완파 4대를 포함해 15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소련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완전손실은 227대이니 이걸 독일군과 비교하면 4:227, 대략 1:56의 교환비가 나옵니다. 퇴펠은 발레리 자물린이 7월 12일 독일군의 손실을 정확히 집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합니다. 예를들어 발레리 자물린은 2015년 루돌프 폰 리벤트롭(Rudolf von Ribbentrop)을 만나서 7월 12일 전투 당시 LAH 사단의 전차 보유대수를 문의했는데 자세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퇴펠에 따르면 리벤트롭은 이미 1989년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글을 쓰면서 LAH 사단의 전차 손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즉 발레리 자물린은 독일측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 입니다. 또한 리벤트롭은 2015년 러시아를 방문해 자물린과 면담을 했을때 러시아측을 고려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소련군의 패전을 자세히 언급하는게 결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꽤 재미있는 연구이지만 로만 퇴펠이 독일측에 편향된 서술을 한다는 비판도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필요는 있습니다.


2021년 3월 20일 토요일

어떤 여가 활동

갓 소위로 진급한 보직 대기 장교들은 주데텐란트의 슈트라우빙(Straubung)에서 압도적인 물량과 병력을 가진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 우리쪽은 저항해 봐야 희망도 없었고 미군이 우리 부대를 그냥 지나쳐 갔기에 싸울 필요도 없었다. 우리에겐 무기도 별로 없었다. 며칠 뒤 우리는 미군에게 항복했다. 미군은 우리를 그라펜뵈어(Grafenwöhr)에 있는 훈련장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포로들을 병과에 따라 분류했다. 미군 경비병들은 우리를 공정하게 대해줬지만 심문은 힘들었다. 식량은 부족하고 포로는 많아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병사들은 잡지에 있는 벌거벗은 여자들의 컬러 사진을 돌려 보는게 낙이었다. 나는 이런 걸 처음 봤다. 나는 농부의 아들이고 추수철이 다가와서 금방 석방됐다. 1945년 6월 나는 석방되어 쾰른 근처에 있는 부모님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제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던 야콥 회게스(Jacob Höges)의 회고

Dale Richard Ritter, Charging Knights on the Eastern Front: The Combat History of schwere Panzer-abteilung 505 (Winnipeg: J. J. Fedorowicz, 2019), p.304.

2020년 8월 24일 월요일

토마스 젠츠의 저작들의 문제점

 판터의 기계적 신뢰성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책을 몇권 뒤지다보니 2012년 사망한 미국의 독일 기갑차량 연구자 토마스 젠츠(Thomas L. Jentz)의 영향력이 꽤 크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판터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저작이라 할 수 있는 프랑크 쾰러(Frank Köhler)의 Panther: Meilenstein der Panzertechnik에서도 판터의 주요 구성품의 수명주기에 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토마스 젠츠의 Germany's Panther Tank: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의 내용을 재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쾰러의 저작은 프라이부르크의 독일연방문서보관소와 코블렌츠의 연방군 국방기술연구박물관(Wehrtechnischen Studiensammlung)이 소장한 1차 사료등 2014년 시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판터와 관련된 문헌은 대부분 활용한 저작입니다. 이런 연구자 조차 상당히 많은 부분을 토마스 젠츠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토마스 젠츠가 연구를 하면서 광범위한 1차 사료를 검토했음을 입증해 줍니다. 즉 신뢰도 면에서 토마스 젠츠는 충분히 검증된 연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젠츠가 내놓은 수많은 연구서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주석을 거의 달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젠츠의 저작들이 대부분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젠츠가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젠츠의 저작에 인용된 1차 문헌들을 찾아보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픕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랑크 쾰러나 토마스 안데르손(Thomas Anderson) 같이 비교적 최근 연구를 내고 있는 독일 기갑차량 연구자들은 연구서의 경우 주석을 충실히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들도 출처가 젠츠의 서적일때는 살짝 난감해 집니다. 젠츠가 본 사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1차 사료에 숙달된 연구자들은 내용만 보면 대략 어느 문서군의 무슨 문서인지 알 수 있습니다만 일반인들은 그게 아주 힘들죠. 젠츠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명성을 고려했을때 아주 아쉬운 점 입니다.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3월 16일 월요일

니클라스 세테를링의 Normandy 1944 개정판

스웨덴의 군사사가 니클라스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의 개정판을 읽었습니다. 큰 틀은 2000년도에 페도로비츠 출판사에서 냈던 초판과 같습니다. 전면개정판이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편 입니다. 하지만 좋은 저작이고 노르망디 전역을 공부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테를링은 2019년에 낸 이 개정판에서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근래의 연구들을 반박하려 합니다. 특히 독일군이 생산한 1차사료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연구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세테를링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연구는 독일 연구자 뤼디거 오버만스(Rüdiger Overmans)가 추산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인명피해입니다. 세테를링은 오버만스가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에 대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크게 과장했다고 비판합니다. 오버만스의 연구에서는 특히 1944~1945년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독일군의 인명손실이 기존의 통설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테를링은 이게 자료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라고 봅니다. 그는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는 전반적으로 정확한 편이고 독일군의 인명손실은 공식기록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이 연합군 보다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미국측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봅니다. 특히 그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피터 맨수어(Peter Mansoor)입니다. 세테를링은 미군이 생산한 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하는 맨수어와 같은 연구자의 글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맨수어는 The GI Offensive in Europe에서 미군의 전투효율성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크게 향상되어 독일군을 능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이 지적한 것 처럼 맨수어는 독일측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교차검증이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않은 겁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저작 중에는 이런 문제점을 가진 것이 꽤 많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D-Day 같은 저작이 대표적이죠.

피터 맨수어가 자신의 주 논지를 뒷받침 하기 위해 인용한 존 슬로언 브라운(John Sloan Brown)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존 슬로언 브라운은 통계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듀푸이는 통계기반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미군과 영국군에 비해 높은 전투효율성을 발휘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존재하지요. 세테를링은 독자적으로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검증하고 이것이 신뢰성이 높음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그는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신뢰하는 입장이고 브라운의 듀푸이 비판은 오독과 자료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했다고 낮게 평가합니다.

오머 바르토브(Omer Bartov)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르토브는 동부전선의 전투가 서부전선 보다 더 격렬했으며 이때문에 인명피해도 더 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은 인명손실의 총계가 아니라 사단 단위 평균 손실로 평가하면 동부전선과 노르망디 전역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노르망디 전역에서 발생한 사단당 인명손실이 동부전선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판에 비해 수정된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의 전투력과 손실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저작입니다. 그리고 독일 자료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2020년 2월 2일 일요일

[번역글] 독일은 군대를 더 키우고 강화해야 한다


블룸버그의 오피니언란에 재미있는 글이 실렸네요. 엉망진창인 독일의 안보상황에 우려하는 독일인이 외국 매체를 통해 자국의 현실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계속하고는 있으나 독일연방군이 회복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독일은 군대를 더 키우고 강화해야 한다


안드레아스 클루트(Andreas Kluth)


최근 독일 기갑차량 승무원들은 폴크스바겐의 미니버스로 훈련을 하고 있다. 푸마 장갑차 4대 중 3대는 정비 중이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정비 받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원인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관료주의에 있다. 독일군은 배낭, 방탄복, 방탄모, 모자 같은 군장류를 보급받는데 수년이 걸린다. 군대 정원은 20,000명 가까이 미달이다. 청년들이 군대에 가고 싶어하질 않기 때문이다. 장교들은 입대 기준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신병들은 날이 갈수록 뚱뚱해지고, 허약해지고, 멍청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독일 연방의회가 임명한 감찰관 한스 페터 바르텔스(Hans-Peter Bartels)가 독일연방군을 조사한 결과이다. 바르텔스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재의 독일연방군은 나토와 서방 동맹국의 통합방위에 충분히 기여할 수 없다.

사실 독일의 동맹국들은, 동쪽의 폴란드부터 서쪽의 미국에 이르기 까지 이 문제점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비판을 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를 지적한 방식은 외교적으로 부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전임 미국 대통령들도 이 문제를 지적해왔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독일 정부에게 이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비판했었다. 이들은 독일이 더 이상 무임승차를 해서는 안되며 국방비 투자를 감축해서도 안되고, 공동의 임무에 있어서 책임을 경감하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말해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는 동맹국들의 비판을 정중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침공했을 때 많은 독일 관료들이 독일은 국제적으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해 말 웨일즈에서 열린 나토 회담에서 메르켈 총리는 다른 동맹국 정상들과 함께 10년 내로 국방비를 최소 GDP2%으로 증액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이때 한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바르텔스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국방비를 GDP2%로 증액할 생각이 없는듯 하다.”고 지적했다. 사실 독일 정부는 냉전이 끝난 뒤 크게 삭감했던 국방비를 다시 증액하기 시작했다. 밑바닥에서부터 말이다. 액수만 놓고 보면 작년 독일의 국방비는 432억 유로(476억 달러)였다.(사실 불합리한 관료주의 때문에 이걸 다 쓰지도 못했다.) 올해에는 451억 달러가 될 것이다. 또한 추가로 예산을 더 증액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바르텔스는 이정도 규모로는 국방비를 2024년까지 GDP1.5% 수준으로 증액한다는 인색한 목표조차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독일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 국내선을 탔을 때 기장이 하는 방송을 들었다. 군인이 탔다고 하자 기내의 모든 승객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독일은 그 반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뒤인 1955년 서독이 군대를 새로 만들었을 때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외출을 했다가 시비를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독일인들은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일으켰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반전, 반군사적인 정체성을 가지려고 했다.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반응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반응은 좀 괴상한 자부심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 독일인은 전쟁을 하지 않고 무역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도문 처럼 되어버렸다. 독일은 사실상 자국의 국방과 국제질서에서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을 미국에게 외주를 줘버렸다. 미국 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와 영국도 독일의 부담을 나눠지고 있다. 그러면서 많은 독일인들, 특히 좌파 정치인들은 기고만장하여 독일의 동맹국들이 전쟁광이라는 훈계나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독일은 경제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국제질서를 악용하고 있다.

독일 정계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런 구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2010년에 독일 연방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Horst Koehler)는 독일이 무역로 보호와 같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해외파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시 격렬한 비난이 확산되었고 그야말로 히스테리 적이었다. 쾰러 대통령은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더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독일 정계에서 매장당한다는 것을 많은 정치인들이 알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세계는 위험한 곳이다. 나토는 수많은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유럽통합군은 그저 공허한 꿈에 불과하다. 유럽의 가장 큰 위협은 여전히 러시아이다. 스웨덴 국방부의 연구자들은 러시아가 지난 10년간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하이브리드 전쟁과 재래식 군사력, 그리고 신형 미사일 배치를 통한 핵무기 위협 등으로 유럽을 무찌르거나 협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누가 독일 국민들에게 이것을 말할 것인가? 하나는 메르켈의 뒤를 이어 연방 총리가 될 것으로 꼽히는 후보 중 한명인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이다.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은 독일군이 주도하는 시리아 파병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프랑스와 더욱 긴밀히 협력할 것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이 이런 주장을 할 때 마다 대중적 지지도는 폭락했다. 

결국 남는 것은 메르켈 뿐이다. 메르켈은 총리 연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밝혀서 레임덕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신망이 높으며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메르켈 총리는 14년간 집권하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같은  수많은 위기를 거쳐왔다. 지금 그녀는 리비아 내전을 비롯한 다른 분쟁들을 중재하려는 중이다. 그리고 미국이 유럽 평화를 보증하는 역할에서 발을 빼려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제 메르켈에게 남은 기간은 2년 뿐이다. 메르켈은 남은 재임 기간 동안 독일 국민들이 군대에 대한 생각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역사적인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커피 칸타타

롬멜은 1944년 1월 16일 또다시 일선 시찰에 나섰다. 가장 먼저 방문한 부대는 노르망디의 제711보병사단이었다. 사단장 요제프 라이헤르트(Josef Reichert)는 해변 및 연안 지대에 장애물을 설치하는데 있어 롬멜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고 이미 사단 구역에 방어 시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 포병은 적군이 해변에 상륙한 이후 포격을 가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롬멜은 대신 적이 상륙하기 전에 타격할 수 있도록 포병 배치를 변경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이틀은 페캉(Fecamp), 볼벡(Bolbec), 생 발레리(St. Valery), 디에프(Dieppe) 일대에 배치된 제17공군야전사단을 시찰했다. 이 사단 지역에서는 방어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방어 전투를 내륙에서 전개한다는 가정에 따라 일부 벙커를 폐쇄하고 방치해 놓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휘관이 벙커를 아예 폭파해 버리고 주저항선을 내륙 안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놓았다.

디에프의 장교 식당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롬멜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진짜 커피 한 잔이 나온 것 이었다.(독일에서는 진짜 커피를 대신해 대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용 커피는 대개 귀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롬멜은 방어 계획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느라 커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루게(Friedrich Ruge)* 제독은 마이제(Wilhelm Meise)** 장군이 차갑게 식어가는 롬멜의 커피를 힐끗 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루게 제독은 롬멜이 보지 않을때 롬멜의 커피 중 절반을 마이제의 커피잔에 따라 주었다. 롬멜은 설명을 마친 뒤 커피를 마시려다가 커피 절반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Mitcham, Samuel W., Desert Fox: The Storied Military Career of Erwin Rommel (Regnery History. Kindle Edition., 2019), Kindle Locations 3661-3672.

*B집단군 해군 참모
**B집단군 공병참모장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독일육군 제505중전차대대사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505중전차대대는 포탑에 그려넣은 돌격하는 기사 마크로 유명한 부대죠.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부대의 활약에 비해 이 부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헌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대가 제2차대전 말기 동부전선에서 완전히 괴멸되었고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에 항복한 중전차대대의 경우 부대사가 비교적 일찍 간행되었죠. 매우 형편없는 전과를 거둔 제508중전차대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부대를 연구한 부대사가 간행된다고 하네요. 판처렉스에서 제공하는 샘플 사진을 보니 상당히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약간 우려되는 점은 저자가 독립연구자로 보인다는 점 입니다. 물론 독립연구자라도 Leaping Horseman Book의 제이슨 마크 처럼 훌륭한 연구를 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간혹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죠.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0년 1월 출간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사야겠습니다.

https://www.panzerwrecks.com/product/charging-knights-on-the-eastern-front-the-combat-history-of-schwere-panzer-abteilung-505/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새해 벽두부터(….) 불법날림번역(…) 나갑니다.

이 글은 2014년 출간된 논문집 Die Waffen-SS: Neue Forschungen에 실린 독일 군사사가 로만 퇴펠의 글 Waffen SS und Wehrmacht in der Schlacht bei Kursk: Ein Vergleich im operativen Einsatz를 번역한 것 입니다. 로만 퇴펠은 최근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제2차대전 작전사 연구를 하는 연구자입니다. 이 글은 1943년 하계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와 육군 부대의 작전 수행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무장친위대와 육군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친위대 장교단에 대한 폄하가 있었고 이게 전후에도 육군 장교들의 회고록을 통해 확대된 면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 입니다.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선전 기구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된 면이 있지만 최소한 1943년 전역에서 무장친위대의 기계화 부대가 달성한 전과는 군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무장친위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학술적으로 증명해 주는게 아니냐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이 논문집 자체는 무장친위대의 정치적인 면, 특히 전쟁범죄 문제도 다루고 있으니 불필요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논문집에는 노르망디 전역의 작전 수행을 비교 분석한 글도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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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로만 퇴펠

서     론

194345일 히틀러는 올해의 첫번째 공세로서 치타델레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치타델레는 러시아의 도시인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돌출부에 대한 양익공세를 감행해 소련군을 섬멸하는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타델레작전이 성공하면 독일 국방군은 전선을 크게 단축하고 남는 병력을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 지도층은 국방군이 다수의 소련군 전쟁포로와 민간인 노동력을 확보하길 희망했다. 포로를 독일로 보내 노동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2)
히틀러는 처음에 치타델레작전을 19435월 초에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공세 개시일이 계속 변경되면서 독일군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다가올 하계 전역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194375치타델레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후 2개월에 걸쳐 오룔, 쿠르스크,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불린다.3) 실제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 규모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들다. 전투가 시작되고 첫 2주동안 양측을 합쳐 2백만 명의 병력과 5천대의 항공기, 8천대의 전차 및 자주포, 그리고 거의 39천문에 달하는 야포가 투입됐다.4)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작전 수행을 비교하는데 쿠르스크 전투의 제1단계인 독일의 하계공세 치타델레작전이 좋은 사례가 된다. 공세에 투입된 대부분의 부대는 공세 첫 주에 담당구역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후반부에 독일군이 방어와 역습을 하는 입장이 됐을때는 상황이 다르다. 공세에 투입됐던 부대들의 소속이 바뀌고 다른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부대들의 작전 행동을 비교하기가 훨씬 어렵다.
이 미시연구의 목표는 세가지 문제에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무장친위대가 육군 사단들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냐는 문제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군사적인 가치를 입증했느냐이다. 세 번째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육군 사단들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이다. 이를 통해 무장친위대 부대의 작전사 연구와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효율성을 평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 SS사단은 육군 부대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는가?

쿠르스크 공세에 투입된 독일군은 총 33개사단으로 이중 보병사단이 17, 기갑척탄병사단이 5, 기갑사단이 11개였다.5) 또한 육군직할대(Heerestruppen)’인 전차대대, 대전차대대, 돌격포대대들도 여럿 투입됐다.6) 9군사령부(Armeeoberkommando 9)의 지휘를 받는 제9군은 돌출부 북쪽에 배치되어 오룔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공격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9군은 총 18개 사단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으며 이중에는 무장친위대 사단이 없었다. 9군의 공세는 19437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됐다. 712일 붉은군대는 오룔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다.(쿠투초프 작전) 이 때문에 북익에서 공세를 개시한 제9군은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
돌출부 남쪽인 벨고로드 지구에서는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이 공격에 투입됐다. 켐프 분견군은 부대의 지휘관인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기갑대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부대의 사령부는 나중에 제8군 사령부가 됐다.7) 켐프 분견군은 7개 사단을 치타델레작전에 투입했다. 켐프 분견군의 임무는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4기갑군의 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해 제4기갑군의 측면을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하는 것이었다.
4기갑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공세에 투입된 부대 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4기갑군은 쿠르스크 남쪽에 종심깊게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을 최대한 신속히 돌파해 북쪽으로 진격한 뒤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과 접촉해 쿠르스크 돌출부에 배치된 소련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4기갑군의 지휘부는 제4기갑군사령부(Panzerarmee-Oberkommando 4)였으며 켐프분견군 보다 전투력이 강했다. ‘치타델레작전에서 제4기갑군에 배속된 사단은 10개 사단이었다. 이중 9개 사단이 쿠르스크 방면으로의 공세를 담당했다. 이 중에는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히틀러(L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사단 등이 있었다. 3개의 SS 기갑척탄병사단은 제2SS기갑군단 예하였다.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육군의 기갑척탄병사단과 비교했을 때 편제상 모든 면에서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8) 심지어 육군의 기갑사단과 비교했을때도 편제상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다. 위에서 언급한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급양기준병력(Verpflegungsstärke)2만명에 달했고 대부분의 육군기갑사단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육군기갑사단은 3개의 차량화보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5개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2개였다. 반면 육군의 기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1개에 불과했다.9)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만이 무장친위대 부대와 비슷한 수준의 특권을 가졌다. 이 사단은 무장친위대 LAH사단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차량화보병대대 전력을 보유했다. LAH를 제외한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됐으나 GD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는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10) 부대의 전투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또다른 결정적인 요인 중에는 전차 보유량도 있다.(도표1)

1.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의 전차 및 자주포 보유량. 1943630일 기준.11)
사단
신형전차12)
신형전차 중 티거 숫자
구형전차
돌격포
대전차자주포
자주곡사포
총계
GD
81
15
54
35
28
34
232
다스 라이히
73
14
73
34
13
30
223
토텐코프
59
15
80
35
14
30
218
LAH
96
13
26
35
29
30
216
2기갑사단
65

51

34
30
180
4기갑사단
79

22

26
30
157
9기갑사단
56

53

28
18
155
11기갑사단
25

89

14
18
146
7기갑사단
37

75

14
12
138
6기갑사단
32

85

12
6
135
20기갑사단
40

42

28
6
116
3기갑사단
22

78
2
14

116
12기갑사단
36

50

16
6
108
19기갑사단
38

49

14

101
18기갑사단
29

46

16
6
97
10기갑척탄병사단




39

39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과 GD사단은 육군의 기갑사단들이 그저 꿈이나 꿔야 할 수준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4개 사단은 신형 자주곡사포로 완편된 1개 포병대대를 갖추고 있었다.13) 뿐만 아니라 이 4개 사단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티거 전차를 완편 상태로 14대나 보유했다.14) 무장친위대의 3개사단과 GD사단이 1개 대대의 돌격포를 보유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돌격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비였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돌격포의 강력한전투력을 엄청나게 호평하고 있다.15) 뿐만 아니라 GD사단은 1943년 여름에 티거 전차를 완전한 1개 대대편성으로 45대나 보유하게 되었다.16) 그리고 무장친위대 사단들 보다도 먼저 최신형 전차인 판터를 장비하게 되었다.17) GD사단은 육군 내에서 매우 이례적인 부대였다. 이 부대는 육군의 LAH’로 불렸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GD사단을 지원했고 이례적일 정도로 다른 육군 사단에 비해 우대를 받았다.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도 이와 비슷해서 LAH 사단이 최우선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GD사단은 쿠르스크 공세를 앞두고 신형 전차를 대량으로 보급받았다.18)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이 평균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가 육군에 비해 더 좋은 보급을 받았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부대인 무장친위대의 비킹기갑척탄병사단은 위에서 말한 3개 친위대 사단에 비해 전력이 빈약했다. 1943년 여름 시점에서 봤을 때 비킹 사단의 기갑 전력은 당시 평균적인 육군 기갑척탄병사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437월 초 이 사단은 46대의 전차와 6대의 돌격포,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는데, 전차는 대부분 구형 전차였다. 비킹 사단과 함께 도네츠강 만곡부에 투입된 육군의 제16기갑척탄병사단은 53대의 전차와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다.19)
무장친위대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은 1943년 여름 기준으로 다른 부대에 비해 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쿠르스크 공세에서 중점(Schwerpunkt)을 구성했다.20)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육군 사단 중에서 이들 3개 사단 만큼 좋은 지원을 받은 부대는 GD사단 말고 없었다. 다른 보병사단에 비해 좋은 장비를 갖추었던 보병사단인 제78돌격사단(Sturmdivision)1943년 하계 전역 기간에 겪은 경험은 좋은 사례이다. 19438월 중순에 작성된 한 보고서를 인용해 본다.

78돌격사단은 현재 상태는 좋지 못하다. 최소한 자주대전차포를 장비한 사단의 대전차대대를 편제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이 사단의 편제에는 돌격포대대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너무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비들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중장비를 회수하지 못하거나 승무원이 부족할 수도 있다.”21)


II.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사단들은 평균이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2SS기갑군단 예하의 3개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중점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전투에 투입된 육군 사단들과 비교했을때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으며 또한 평균이상으로 높은 수준이었느냐는 것이다. 국방군측 인사들이 종종 주장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전과는 불필요하게 많은 손실을 치루면서 얻은 대가라는 비판은 타당한가?22) 기존의 연구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어림짐작으로 무장친위대의 손실이 컸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을 지적했다.23) 힘러는 이런 주장을 통해 친위대야 말로 강인하고 이념무장이 잘 된 전사들이라는 평판을 얻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마케팅전략(Vermarktungsstrategie)’은 양날의 칼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선전을 통해 무장친위대가 쓸데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걸 꺼렸다.24) 군사전문가들은 무장친위대가 많은 인명손실을 입기 때문에 전투부대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혀야 좋은 부대라고 평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육군 제18기갑사단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많은 손실을 입는 것은 전투력이 높은 것과 상관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타델레작전 기간 중 제18기갑사단이 입은 손실만을 구체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이 부대가 1943년 하계전역에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때 입은 피해를 보충할 수 없어서 사단이 해체되고 (포병사단으로) 재편되고 말았다.25) 18기갑사단이 치타델레작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이 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약했으며 공세가 시작됐을 당시 사단 병력을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던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전술상의 실수에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은데 있다.26) 18기갑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퇴역군인들이 집필한 제18기갑사단사를 보면 이 부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작전상으로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27)
무장친위대 사단의 경우는 이런 비판을 할 수 없다. ‘치타델레작전이 절정에 달한 1943712,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제2SS기갑군단을 방문해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에 대해 전투에서 거둔 탁월한 전과와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28) 다음날에는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 상급대장도 휘하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그동안의 전투에서 보여준 행동과 단호함, 그리고 타의 모범이 될 용맹함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는 특별명령을 내렸다.29) 이런 찬사는 단지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별명령에 집어넣은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쿠르스크 공세 작전이 끝난 뒤 제2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SS대장이 호트 상급대장의 추천으로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30) 4기갑군에 배속됐던 3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에서는 하우서만이 유일하게 치타델레작전이 종결된 뒤 이 훈장을 받았다. 48기갑군단장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Otto von Knobelsdorff) 대장은 호트로부터 표창을 받는데 그쳤다.31) 52군단장 오이겐 오트(Eugen Ott) 대장은 아무런 포상도 못 받았다.
그렇다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까? 평균 이상의 큰 손실을 입었을까?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단의 손실을 단순 비교만 하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9군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경우는 이미 1943711일에 쿠르스크 공세작전이 끝났지만 켐프분견군과 제4기갑군 예하 부대들은 1943717일까지 공세작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총손실만 비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총병력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비교를 하려면 인명손실이 작전 개시당시의 총병력과 비교했을 때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해봐야 한다.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의 전투 시작당시 병력대비 인명손실 비중은 표2와 같다.

2.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의 병력손실이 작전개시당시 총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1943 7 4~718.32)
사단
작전개시당시 병력
사망
부상
행방불명
총계
비율(%)
332보병사단(4기갑군)
15,959
398
2,340
129
2,867
18.0
106보병사단(켐프분견군)
19,848
533
2,470
63
3,066
15.4
168보병사단(켐프분견군)
15,880
383
1,946
66
2,395
15.1
320보병사단(켐프분견군)
20,030
469
2,159
378
3,006
15.0
167보병사단(4기갑군, 켐프분견군)
14,347
389
1,551
48
1,988
13.9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14,906
260
1,710
91
2,061
13.8
SS LAH(4기갑군)
23,160
514
2,541
81
3,136
13.5
SS 토텐코프(4기갑군)
19,795
503
2,103
38
2,644
13.4
GD(4기갑군)
21,524
442
2,247
82
2,771
12.9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20,303
483
1,931
23
2,437
12.0
11기갑사단(4기갑군)
15,894
234
1,449
39
1,722
10.8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15,705
232
1,238
33
1,503
9.6
3기갑사단(4기갑군)
13,968
204
989
21
1,214
8.7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20,229
257
1,390
23
1,670
8.3
255보병사단(4기갑군)
14,107
124
671
13
808
5.7

이 표를 보면 보병사단들이 가장 높은 인명손실 비중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보병사단들은 제외하고 기갑부대들만 가지고 비교를 하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손실이 높은 편에 들어간다. 그러나 무장친위대 3개사단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의 공격부대 중에서 중점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무장친위대의 손실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다.33)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기갑차량 손실을 비교하면 이점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3의 통계는 1943714일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어 육군본부에 보고된 티거, 3호전차, 4호전차, 그리고 돌격포의 숫자이다.

3.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사단의 기갑차량 손실 통계, 194375~14.34)
사단
작전개시당시 보유대수
714일까지의 완전손실
비율(%)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80
23
28.8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98
17
17.3
18기갑사단(9)
67
11
16.4
2기갑사단(9)
102
14
13.7
GD(4기갑군)
158
19
12.0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93
10
10.8
3기갑사단(4기갑군)
90
9
10.0
SS LAH(4기갑군)
144
12
8.3
SS 토텐코프(4기갑군)
165
12
7.3
4기갑사단(9)
95
6
6.3
11기갑사단(4기갑군)
101
5
5.0
20기갑사단(9)
66
3
4.5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143
3
2.1
9기갑사단(9)
102
2
2.0

이 표를 보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기갑차량 손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35) 이 부대들은 공세가 시작될 당시 매우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에 손실 비중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전차 보유량이 많은 부대는 전차를 조금 보유한 부대 보다 적의 저항을 신속히 극복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3개 무장친위대 사단은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차 손실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III.엘리트부대?’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한 군사적 평가

쿠르스크 전투는 치타델레작전의 중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련측에서는 1943823일 붉은군대가 하리코프를 재탈환한 바로 그날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됐다고 본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43년 여름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치타델레작전 이후의 전투에는 LAH 사단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 사단은 19437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로 파견됐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사령관 한스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LAH 사단을 이탈리아에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파시즘에 기반한 최정예 부대가 이탈리아에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소.36)
반면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은 동부전선에 남아서 남부집단군의 중점, 그리고 위급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37월 말 이 두사단은 도네츠만곡부 미우스강에 소련군이 구축한 교두보를 분쇄하기 위한 역습에 투입됐다. 쿠르스크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 8월 초에는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과 함께 다시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되어 제3기갑군단 예하에 들어갔다. 3기갑군단 참모장 에른스트 메르크(Ernst Merk) 대령은 1943813일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3개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좋은 인력과 장비에 걸맞게 잘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 지휘부는 부대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장친위대 사단을 엄격히 지휘해야 하며, 상급부대가 지속적으로 감독할 필요가 있다.”37) 메르크 대령이 이런 평가를 내린 시점은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제3기갑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이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나온 육군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무장친위대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38)
사실 무장친위대는 항상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39)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장친위대가 단기간에 팽창한데 있다. 1943년 상반기에만 무장친위대 6개 사단을 신규 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40) 그 결과 기존에 있던 부대들이 약화되었다. 우대를 받고 있었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 조차 1943년 여름에는 장교와 부사관이 현저한 수준으로 부족했다. 가장 심한 손실을 입은 부대는 LAH였다. 이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이 시작되기 전 특별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19437월 초에는 장교 277명과 부사관 1,179명이 부족한 상태였다.41) 이렇게 된 이유는 LAH의 자매부대인 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를 창설하기 위해 간부를 차출한데 있었다. 새로 편성되는 사단들은 단순히 병력을 보충하는 정도가 아니라 LAH사단을 보충대 처럼 이용했다. LAH사단은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을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편성할 기간요원으로 내줘야 했다.42) 다스라이히 사단과 토텐코프 사단도 마찬가지로 병력 부족을 겪었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장교 286명과 부사관 734명이 부족했고 토텐코프 사단은 장교 259명과 부사관 967명이 부족했다.43)
치타델레작전에 참여한 다른 육군 기갑사단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44) 육군 기갑사단 중 장교가 가장 부족했던 부대는 제2기갑사단이었는데 그 숫자는 21명에 불과했다.45) 부사관이 가장 부족한 부대는 제12기갑사단이었다. 그 숫자는 388명이었다.46) 대부분의 육군 기갑사단은 간부 부족이 심각하지 않았다. 한 사단은 아예 해당사항이 없었다. 6기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이 편제대로 있었다.47)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이렇게 심각한 장교와 부사관 부족에 시달린 결과 전장에서의 전투 수행 능력, 그리고 부족한 지휘력으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이 얼마나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보통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 부대가 잘못된 판단으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사례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례 중 가장 심한 것은 19437월 말 미우스강의 소련군 교두보에 대한 역습 과정에서 발생했다. ‘치타델레작전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무장친위대가 중점에 투입됐다. 그러나 역습 첫날은 많은 인명손실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배속받은 제6군 사령부는 유연한 전술을 펼칠 것을 강조했다. 6군사령부는 다음날 공격을 할 때는 같은 지점을 거듭해서 공격하지 말도록 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는 다음날에도 같은 방면으로 공격했다. 공격은 또다시 실패했고 특히 토텐코프 사단의 인명손실이 컸다. 6군사령부는 친위대 사단들에게 명령을 내려 3일차 공격은 중점을 변경하고 공략이 어려운 고지를 우회하도록 했다. 3일차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어 소련군의 교두보를 분쇄할 수 있었다.48)
하지만 1943년 여름 전역에서는 무장친위대만 이렇게 형편없는 지휘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을 치른게 아니었다. 유사한 사례는 육군에서도 나타나며 실제로 각급 제대에 걸쳐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GD사단의 작전참모 올트비히 폰 나츠머(Oldwig von Natzmer) 대령은 19438월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갑사단장 중에는 그 직위에 맞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49) 지휘관들의 잘못된 지휘 문제는 연대급 지휘관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타델레작전 당시 GD전차연대와 제39전차연대를 지휘한 히아진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Hyazinth Graf Strachwitz) 대령이 그러하다. 그는 2개 전차연대를 손실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투입했다. 상관이었던 제10전차여단장은 이러한 지휘방식을 완전히 미쳤고 저능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50) 중대급 지휘관들도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타델레작전 중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 투입되었던 제505중전차대대장은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이렇게 불만을 제기했다. “과거에는 후방 보직에 있거나 본부중대장 정도나 하던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전차중대장에 임명되면서 대대의 공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대의 티거를 잃게 됐다.”51) 이건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 투입되었던 제10전차여단이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단 예하 부대들은 최신형 전차인 티거와 판터를 장비하는 등 훌륭하게 편성되어 있지만 중대급 지휘관들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다.’ 이 보고서에서 예외로 취급한 부대는 무장친위대 다스라이히 사단의 판터 대대 뿐이었다.52)
무장친위대 부대가 많은 손실을 입은 책임이 육군 지휘관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4384일 독일군이 도네츠강의 소련군 교두보를 공격한 전투가 대표적이다. 40기갑군단장 지크프리트 헨리치(Sigfrid Henrici) 기갑대장은 군단에 배속된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사단장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단을 가망없는 공격에 투입했다. 독일군은 공격에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53)
육군 부대가 잘못된 지휘로 많은 손실을 입은 사례는 더 있다. 육군에서는 자주 무장친위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는데, 이러한 비난은 무장친위대가 독일군 내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 및 여러 특권과 결합해서 국방군 측의 불신을 불러오고 긴장을 초래했다.54) 오토 뵐러(Otto Wöhler) 대장은 켐프분견군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5일 전인 1943820일에 다스라이히 사단장 발터 크뤼거(Walter Krüger) SS중장을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크뤼거가 무분별하다거나 그의 지휘 방식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뵐러는 크뤼거가 무장친위대 같은 최정예부대를 지휘하기에는 활력이 없고 둔하다.”고 생각했다.55) 하지만 뵐러의 제안은 허사로 돌아갔다. 크뤼거는 다스라이히 사단을 계속 지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1일 뒤에는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56) 다스라이히 사단은 하리코프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1943827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급되었다.57)
뵐러의 휘하에 배속된 다른 무장친위대 사단들도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 단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8월 중순 토텐코프 사단이 하리코프 지구에서 수행한 역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제3기갑군단장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 대장은 국방군 공식보도에 토텐코프 사단을 언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58) 뵐러도 며칠 안되는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활약을 칭찬했다. 그는 817일 토텐코프 사단을 치하했으며 3일 뒤에는 비킹 사단을 칭찬했다.59) 비킹 사단에 대해서는 194311월 초에 작성된 흥미로운 문건이 하나 있다. 이 자료는 이른바 무장친위대 간부진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이라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기갑군단에서 작성한 각 사단의 내적 전투력에 대한 평가(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라는 제목의 문건은 비킹 사단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비킹 사단은 치열한 방어전을 수행했으며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세작전에서도 역량을 입증했다. 이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26개월간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강인한 부대들이다. 이 사단의 전과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지속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 이 사단의 지휘부는 정력적이고 창의적이며 잘 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인접부대 및 상급부대와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60)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1943년 여름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 사단들은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인 면에서도 우수했다. 그래서 무장친위대의 기갑부대들은 꾸준히 중요한 전장에 투입됐다. 미국의 역사가 조지 스타인(George Stein)1960년대에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무장친위대의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를 투입했다.”61) 스타인은 이러한 예로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호엔슈타우펜, 프룬즈베르크,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들었다. 이 사단들은 1943년 말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으로 개칭됐다.62) 스타인은 이들 사단을 엘리트 사단이라고 불렀다.63) 그렇다면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엘리트부대라고 할 수 있었는가?
군사 엘리트라는 개념은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무장친위대와의 관련성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64)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38개 사단에 달했기 때문에 부대간의 수준 차이가 컸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장친위대 전체를 군사 엘리트로 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대를 엘리트부대로 불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엘리트라는 용어를 분석적인 개념으로 군사적 효율성 연구에 적용하는게 완전히 부적절한지에 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한다.65) 물론엘리트부대(Elitetruppen)’라는 용어는 역사적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서는 19416월의 그리스군이나 19449월 아른헴에 강하한 영국 공수부대와 같이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한 적군 부대에 대해 엘리트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66) 히틀러는 19433월에 2개의 독일군 공수사단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부대들을 엘리트부대라고 불렀다.67) 그리고 군사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거나 사기가 왕성한 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부대나 좋은 장비를 갖춘 부대들을 엘리트로 불러왔다. 군사적 엘리트라는 개념을 전통적인 작전사 연구의 개념으로 본다면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엘리트부대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련군도 그렇게 생각했다. 1943년 여름에 작성된 소련군 문헌들을 보면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그리고 GD사단을 엘리트사단(Отборные дивизии)’으로 구분하고 있다.68)  


 

한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의 군사적 효율성을 비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술적 상황, 지형, 기상 상태, 항공지원 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의 전력과 사기, 적군 부대의 전투력 같은 요인들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동부전선 하계 전역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무장친위대 지휘부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군사적 능력이 증명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등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의 장비 보유 현황은 평균 이상으로 우수했으며 이 때문에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별 대우에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항상 중점이나 위기가 발생한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무장친위대 참전자들의 자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필자는 1942년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동부전선에서 싸운 토텐코프 사단 소속의 한 참전자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토텐코프 사단의 병사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로 생각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엘리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 뿐 입니다.”69)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Operationsbefehl Nr.6. Ernst Klink, Das Gesetz des Handelns. Die Operation Zitadelle 1943, Stuttgart 1966, S.292-294에서 재인용.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92쪽에 있다.
2) Operationsbefehl Nr.6, Anlage 2. 위의 S. 296-298을 참고하라.
3) Karl-Heinz Frieser, Die Schlacht im Kursker Bogen, in: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DRZW), Bd.8: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2007, S.81-208,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00쪽을 참고하라.
4) 같은책 100. 프리저의 글은 전차의 숫자를 다소 적게 산정하고 있다. Roman Töppel, Kursk-Mzthen und Wirklichkeit einer Schlacht, in: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57(2009), S. 349-384, 특히 358-361쪽을 참고하라.
5) 다행히도 치타델레 작전에 참전한 3개 야전군의 해당기간의 전투일지와 그 부록은 잘 보전되어 있다. Führungsabteilungen(Ia) im Bundesarchiv-Militärarchiv(BA-MA), RH 20-8/83(Armeeabteilung Kempf), RH 20-9/134(9.Armee), RH21-4/104(4.Panzerarmee) 등이다.
6) 육군직할대(Heerestruppen)는 사단 예하에 편제되지 않은 부대들을 뜻한다. 이 부대들은 상급사령부에서 중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예하 부대에 일시적으로 배속시켜주는 것이다.
7)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켐프분견군 사령부는 19438월 중순 제8군 사령부로 개칭되었다.(Stabsbefehl, AOK8, Ia, 16.8.1943, BA-MA, RH 20-8/95, Anlage 700, unpag.을 참고하라.) 좀 더 단순히 서술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437월의 전투를 서술할 때에도 제8군 사령부로 통일한다.
8) 문제에 대한 분석은 Bernhard R.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Bevölkerungsverteilung und personelle Rüstung in der zweiten Kriegshäfte(1942-1944), in: DRZW, Bd 5/2: Kriegsverwaltung, Wirtschaft und personelle Ressourcen 1942-1944/45, Stuttgart 1999, S.960을 참고하라.
9)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2000, S.45를 참고하라.
10) ebd., S.44를 참고하라.
11)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59;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65; Zetterling u. Frankson, Kursk, S.46 통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는 운용 가능한 차량 외에도 정비 중에 있거나 독일 본토에서 이동중이던 차량도 포함시켰다. 치타델레 작전에 일시적으로 참가한 부대의 경우는 제외했다.
12) 신형전차에는 4호전차 장포신형, 5호전차 판터, 6호전차 티거, 노획한 T-34를 포함시켰다. 1호전차, 2호전차, 3호전차, 4호전차 단포신형, 35(t), 38(t), 그리고 이 차량의 차대에 기반한 지휘전차는 구형 전차로 구분했다.
13) 여기에는 후멜과 베스페가 해당된다. 그리고 표1의 자주포항목에는 여기에 더해 자주중보병포 그릴레도 포함시켰다. 이 세 종류의 기갑차량에 관해서는 Peter Chamberlain u. Hilarz L. Dozle, Encyclopedia of German Tanks of World War Two, 2. Aufl., London 1993, S.39 f., 47 u. 108f를 참고하라.
14) 쿠르스크 공세작전에 투입된 티거는 총 147대였다. 1에는 이중 90대가 제외되어 있다. 90대는 제503, 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다. 티거 전차의 개발 및 실전 운용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잘 연구되어 있는 서적으로는 Thomas L. Jentz u. Hilarz L. Doyle, Germany’s Tiger Tanks, 3 Bde., Atglen(Pennsylvania), 1997-2000가 있다.
15)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87 그리고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chütz-Ersatz- undAusbildungsabteilung 200 vom 30.8. bis 22.9.1943, Abschrift, BA-MA, RH 10/58,Bl.385를 참고하라. 돌격포의 개발 과정과 기술적 특성에 관해서는 Walter J. Spielberger, Sturmgechütze. Entwicklung und Fertigung der sPak, 3.Aufl, Stuttgart 1997을 참고하라.
16) Helmut Spaeter, Die Geschichte des Panzerkorps Großdeutschland, Bd.2, Duisburg-Ruhrort 1958, S.146 u.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Bd. 2, Winnipeg(Manitoba) 1998, S.49 참고하라.
17) Thomas L. Jentz, Der Panther. Entwicklung, Ausführungen, Abarten, seltene Varianten, charakteristische Merkmale, Kampfwert, Wölferscheim 1997, S.137을 참고하라.
18) LAH 사단과 GD 사단의 특별 대우에 관해서는 Jean-Luc Leleu, La Waffen-SS. Soldats politiques en guerre, Paris 2007, S.356 그리고 Sönke Neitzel u. Harald Welzer, Soldaten, Protokolle vom Kämpfen, Töten und Sterben, Frankfurt-M. 2011, S.367.등을 참고하라. 육군의 LAH라는 표현은 요제프 괴벨스가 194341일에 쓴 것이다. Elke Fröhlich(Hg.), Die Tagebücher von Joseph Goebbels, Teil II, Diktate 1941-1945, Bd.8, April-Junu 1943, München u. A. 1993, S.26을 참고하라.
19) Panzer-Lage, 21.7.1943, BA-MA, RH 10/61, Bl.125(Stand: 10,7,1943); Sturmgeschütz-Lage, 21.7.1943, BA-MA, RH 10/62, Bl.88(Stand: 10.7.1943);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Stand: 30.6.1943). 이 수치는 운용 가능한 차량 뿐만 아니라 정비중에 있는 차량과 본토에서 이동중인 차량도 포함한 것이다. 두 사단은 19434월 재정비에 들어가 1943717일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20) 이점은 켐프 분견군 참모장이 194341일 제출한 Entwurf für Operationsvorschlag K에서부터 나타난다. BA-MA, RH 20-8/81, Anlage 8, unpag. 4기갑군의 치타델레 작전 최종안은 Klink, Gesetz, S.308-311을 참고하라.
21)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 91. 78돌격사단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28대로 편성된 대전차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돌격포 31대로 편성된 제189돌격포대대도 배속받고 있었다. 이 사단에 관해서는 Ludwig Merker, Das Buch der 78. Sturmdivision, Tübingen 1965를 참고하라.
22) 에리히 만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무장친위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이 달성한 전과는 희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Erich von Manstein, Verlorene Siege, Erinnerungen 1939-1944, 13.Aufl., Bonn 1993, S.188; 그리고 Neitzel u. Welzer, Soldaten, S.368 f.를 참고하라.
23)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Die Waffen-SS 1933-1945. Leitbild, Struktur und Funktion einer nationalsozialistischen Elite, 6. Aufl., Paderborn 1999, S. 282 f.; Leleu, Waffen-SS, S. 37을 참고하라.
24) ebd., S. 239 f.를 참고하라.
25) 18기갑사단이 1943년 하계전역에서 입은 피해에 관해서는 Reisebericht des Majors i. 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93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951을 참고하라.
26) 18. Panzerdivision, Ia, Kriegstagebuch(KTB) Zitadelle, 28.6.1943ß12.7.1943, Russland, BA-MA, RH 27-18/139, Bl. 10-12 u. 17-23을 참고하라.
27)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Division 1943-1944, Reutlingen 1989, S.255 f.를 참고하라.
28) Silvester Stadler(Hg.), Die Offensive gegen Kursk 1943. II. SS-Panzerkorps als Stoßkeil im Großkampf, Osnabrück 1980, S.104 그리고 108을 참고하라. 여기에는 KTB Nr.6, Generalkommando II.SS-Panzerkorps, Ia, mit Anlagen, für Zeitraum 1.7.1943-2.8.1943.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은 BA-MARS 2-2/17(Textband) RS 2-2/18(Anlagen)로 소장되어 있다.
29) Der Oberbefehlshaber der 4.Panzerarmee, Tagesbefehl, 18.7.1943, BA-MA, RH 21-4/111, Bl.115; 그리고 Stadler, Offensive, S. 155 f.를 참고하라.
30) Antrag auf Verleihung des Eichenlaubs zum Ritterkreuz für Paul Hausser, National Arc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aryland, A3343, SSO 071A(Personalakte Hausser). 바이로이트의 파이트 셰르처(Veit Scherzer)씨가 이 문서의 사본을 제공해 준데 감사드린다.
31) Schreiben Hoth an Knobelsdorff, 21.7.1943, BA-MA, RH 21-4/111, Bl.174. 크노벨스도르프가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19431112일이었다. Veit Scherzer, Die Ritterkreuzträger. Die Inhab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 von Heer, Luftwaffe, Kriegsmarine, Waffen-SS, Volkssturm sowie mit Deutschland verbündeter Streitkräfte nach den Unterlagen des Bundesarchivs, 2. Aufl., Ranis-Jena 2007, S.453.
32) 57보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 기간 중 주로 방어적인 엄호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98보병사단은 공세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 뒤에야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표에서 제외했다. 이 표에 포함한 부대들은 쿠르스크 공세 작전 기간 중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던 사단들이다. 남부집단군 예하의 사단 일부는 이미 치타델레 작전 개시에 앞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194374일 보병을 투입해 소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기에는 74일에 발생한 인명 피해도 포함했다.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 prepared by Office of the Chief of Staff, US Army Concepts Analysis Agency, Bethesda(Maryland) 1998, Appendix F,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dialspace.dial.pipex.com/town/avenue/vy75/data.htm(마지막 검색일 201163). 이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onhand strength‘라는 용어는 다소 혼동을 줄 수 있다. 이 용어의 개념(onhand effective personnel present for duty)에 대응하는 독일어 용어는 Tagesstärke이다. 그러나 1차사료와 대조해서 분석한 결과 이 보고서에 사용된 경우는 Iststärke에 해당된다. 독일어에서 병력 현황을 나타내는 용어에 관해서는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Analyzing World War II Eastern Front Battles, in: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1(1998), S> 176 f. 그리고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 839를 참고하라.
* 역자주: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PDF판은 https://apps.dtic.mil/dtic/tr/fulltext/u2/a360311.pdf 에서 다운로드 가능.
33) 2차대전 전 기간을 다루는 연구들도 유사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Wegner, Soldaten, S. 282; Rüdiger Overmans,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München 1999, S: 295 f.; Leleu, Waffen-SS, S. 725.
34) 12기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에 적은 전력만을 투입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ß59(Stand: 30.6.1943);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Stand: 30.6.1943); Ausfälle H.Gr.Süd, Stand 14.7.1943, BA-MA, RH 10/64, Bl.67; Ausfälle H.Gr.Mitte, Stand 14.7.1943(Berichtigt), BA-MA, RH 10/65, Bl.12.
35) 치타델레 작전에 종결될 때 까지 이런 추세는 변하지 않았다. 2SS기갑군단은 1943723일 총 손실이 전차 31대와 돌격포 5대라고 보고했다. Stadler, Offensive, S.165를 참고하라.
36) Helmut Heiber(Hg.), Hitlers Lagebesprechungen. Die Protokollfragmente seiner militärischen Konferenzen 1942-1945, Stuttgart 1962, S.373.
37) Reisebericht des Majors i.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2.
38) Sönke Neitzel, Des Forschens noch wert? Anmerkungen zur Operationgeschichte der Waffen-SS, in: Militärgeschichtliche Zeitschrift 61(2002), S.403-429를 참고하라.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408쪽이다.
39) Leleu, Waffen-SS, S.287 f.를 참고하라.
40) Kurt Mehner, Die Waffen-SS und Polizei 1939-1945, Führung und Truppen, Norderstedt 1995, S. 145 f.을 참고하라.
41) Zustandsberichte der SS Panzergrenadierdivision Leibstandarte SS Adolf Hilter, Meldung vom 1.7.1943, BaßMA, RH 10/312, Bl.2.를 참고하라.
42)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d. 3, Osnabrück 1982, S. 218-220, 그리고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d. 1, 3. Aufl., Coburg 1996, S. 11-16.를 참고하라.
43) Zustandsberichte der SS-Panzergrenadierdivisionen Das Reich u. Totenkopf, Meldungen vom 1.7.1943, BA-MA, RH 10/313, Bl.1 u. RH 10/314, Bl. 1.을 참고하라.
44) 안타깝게도 GD사단의 194371일 보고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BA-MA, RH 10/209)
45) Zustandsberichte der 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1, Bl. 2.를 참고하라.
46) Zustandsberichte der 1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50, Bl. 1.을 참고하라.
47) Zustandsberichte der 6.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5, Bl. 1.을 참고하라.
48) KTB AOK 6, Ia, Bd.5, 17.7.1943-17.8.1943, BA-MA, RH 20-6/303, Bl. 123-149.를 참고하라.
49) Reisebericht des Majors i. 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3.
50) Bericht von Oberst Karl Decker, Kommandeur der Panzerbrigade 10, vom 17.7.1943, Abschrift, BA-MA, RH 10/54, Bl. 58.를 참고하라.
51) Bericht von Oberstleutnant i. G. Graf von Kielmansegg über einen Flug zur 9.Armee am 11.7.1943, BA-MA, RH 10/54, Bl. 61에서 발췌.
52) Panzer-Brigade 10, Gliederung und Offz.- Stellenbesetzung der Panther- und Tiger-Einheiten, 31.8.1943, BA-MA, RH 10/56, Bl. 135.를 참고하라.
53) Ewald Klapdor, Mit dem Panzerregiment 5 Wiking im Osten, Siek 1981, S.160 f.(여기서는 HenriciHeinrici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KTB XXXX. Panzerkorps, Ia, Bd. 3, 1.8.1943-15.8.1943, BA-MA, RH 24-40/54, Eintrag vom 4.8.1943 그리고 Tagesmeldung an das PzAOK 1 vom 4.8.1943, unpag.를 참고하라. 다음날 비킹 사단장 헤르베르트 길레(Herbert Gille) SS소장은 비킹 사단은 필요한 준비와 지형 정찰을 하지 않으면 계획된 공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의 일지 194385일 참조.
54) 무장친위대의 특수한 위치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는 제4기갑군의 1943713일 일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4기갑군 참모장은] 남부집단군 참모장과 상의하면서 무장친위대의 병력 현황과 보충은 완전히 별도의 체계로 이루어지고 있어 제4기갑군이 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BA-MA, RH 21-4/104, Bl. 157).
55) AOK 8, Fernschreiben vom 20.8.1943, 19.3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28, unpag. 이 시사점이 많은 문서에 관해 알려준 베른의 카타리나 슈트라웁(Katharina Straub)에게 감사한다. 당시 다스라이히 사단 병기참모(1. Ordonnanzoffizier)의 회고록은 뵐러가 크뤼거와 갈등을 빚게 된 계기가 8군의 다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우리 사단 예하 부대를 계속해서 전용하는 것에 대해크뤼거가 뵐러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뵐러는 크뤼거가 항의하자 남부집단군 전체가 전례없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 기반한 지휘 방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휘관이 반대하더라도 전투력이 양호한 부대에 방어 작전의 부담을 지우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계속 취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Rolf Diercks, Lebenserinnerungen- überschattet vom Irrweg im Dritten Reich. Autobiographische Schliderungen von den Anfängen der Weimar Republik bis zum Beginn des 21. Jahrhunderts, München/Straubing 2009[Ms]., S.413). 이 회고록의 내용은 크뤼거가 1943820일과 822일 힘러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크뤼거는 힘러에게 다스라이히 사단이 분산 운용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BA-MA, M841, Akte 4, unpag.을 참고하라.
56) Scherzer, Ritterkreuzträger, S. 479.를 참고하라.
57)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3 Bde., Köln 1989를 참고하라. 여기 인용한 부분은 Bd. 2, S. 549.
58)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0.4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02, unpag.를 참고하라. 토텐코프 사단은 1943818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명되었다. Die Wehrmachtberichte, Bd.2, S.542.를 참고하라.
59)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9.35 Uhr, u. 20.8.1943, 22.00 Uhr, an III. Panzerkorps, Abschriften, BA-MA, RH 20-8/95, Anlagen 707 u. 729, unpag.
60) Generalkommando III. Panzerkorps, 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 2.11.1943, BA-MA, RH 20-8/89, Anlage 113, unpag. 이 문서는 19431020일부터 1125일까지 제3기갑군단 군단장 대행을 맡은 하인츠 치글러(Heinz Ziegler) 중장이 서명을 했다.
61) George H. Stein, Geschichte der Waffen-SS, Düsseldorf/Wiesbaden 1999(1967), S.186.
62) Mehner, Waffen-SS, S.166-219를 참고하라.
63) Stein, Geschichte, S. 186 u. 260 f.
64) 특히 Jens Westermeier, Die Junkerschulgeneration- eine militärische Elite des Führers? Ergebnisse einer Untersuchung der Absolventen der SS-Führerschulen, in: Arbeitskreis Militärgeschichte e.V., Newsletter 35(2010), S. 8-13.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65) 옌스 베스테마이어와 얀 에릭 슐테는 201156일부터 7일까지 열린 독일 제2차세계대전사 편찬위원회와 뷔르츠부르크 대학 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무장친위대의 역사를 다루는 콜로키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H-SOZ-U-KULT(http://hsozkult.geschichte.hu-berlin.de/tagungsberichte/id=3790)에 올라온 페터 리프(Peter Lieb)의 글과 필자가 Militärgeschichtlichen Zeitschrift 70(2011), S.99-104.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라.
66) Die Wehrmachtberichte, Bd.1, S. 565 u. Bd. 3, S. 262.를 참고하라.
67) Heiber, Lagebesprechungen, S. 192.를 참고하라.
68) Iz otcëta o boevych dejstvijach 5-j Gvardejskoj Tankovoj armii za period s 7 ijula po 24 ijulia 1943 goda(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 S. 3; Otcët o boevych dejstvijach 29 tankovogo korpusa za period s. 7.7. po 24.7.43 g.(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29전차군단의 전투보고) 포돌스크 소재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한 사본으로 포츠담의 독일연방군사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서는 GD 사단도 SS 사단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다.
69) 6SS기갑척탄병연대 테오도르 아이케에서 하사로 복무했던 하인츠 베허(Heinz Becher)2010919일에 한 인터뷰.